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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편
리첼은 검을 쥔 채 잘게 떨었다. 입가로 웃음이 새어나왔다. 눈물도 함께 떨어진다.
뒤에선 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영주의 모습에 입을 벌리고 있었다.
영주가 악마와의 계약으로 살아있다고 듣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러할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하.. 하하.”
하하, 하하하하! 드, 드디어 복수를 해냈다.
드디어! 리첼이 기쁨에 광소를 터트리고 있는데, 누군가의 찢어질 듯한 비명이 그를 가로막았다.
“안 돼!!!!”
낯익은 목소리에 리첼이 웃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영주와 같은 녹빛의 머리카락을 가진 늘씬한 여성이 보였다. 얼굴의 반은 하얀 붕대로 칭칭 감은 채.
놀라 눈을 크게 뜨자 그녀가 부들부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네, 네년이 끝내…. 끝내 또 죽였구나. 불쌍하신 내 오라비를 두 번이나 죽였어!!”
“아, 아가씨? 당신이 어떻게?”
“하, 그럼 내가 죽었을 거라 생각했어? 나는 그 때 잠시 기절했을 뿐이지 죽지 않았어! 사특한 계집.”
그녀가 다가와 리첼을 죽일 듯 노려보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그녀의 등장과 끝도 없는 살의에 리첼은 당황했다.
무슨 소리야. 무슨…. 당신을 죽인 것은 영주가-.
“네가 죽였잖아!! 페리엘경도 모자라 오라버니까지. 이젠 저 좋을 대로 기억도 왜곡하는구나! 다 불쌍해! 두 분 모두 너 같은 악독한 년이 뭐가 그리도 좋다고! 이렇게 목숨을 버려.”
“내가 …죽였다고? 나라고?”
“살려내! 살려내란 말이야!”
그녀가 악에 받쳐 리첼의 목을 쥔 채 흔들었다.
머리가 혼란스럽다. 지금 아가씨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럴리 없잖아. 내가 왜 사랑하는 페리엘을 죽여. 언제 영주를 죽였다는 거지?
힘없이 목을 내어주고 있는데, 문쪽에 서있는 검은 흑발의 꼬마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잊고 있던 어떠한 기억의 파편들이 머리속 스쳤다.
콰르르르릉.
[“슬퍼하지 마라 리첼.”]
언뜻 그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창가에 올려진 유리병에는 남푸른 색의 화사한 꽃과, 수수한 흰색의 꽃이 장식되어 있었다.
채 말리지 않은 머리카락에서 빗물이 뚝뚝 떨어졌다. 리첼은 그의 약혼이 있기 직전 마지막으로 페리엘을 만났다. 침대 한켠에는 영주의 동생이 잠들어 있었다.
머리가 점차 하얗게 비어간다. 이런 광경을 보고자 그를 찾은 것이 아니었는데.
‘그녀를 사랑 하나요?’
한숨을 쉬며 난색을 표하던 페리엘이 곧 리첼을 마주했다.
‘네, 그녀를 사랑합니다.’
아득한 수렁에 빠졌다. 그 말을 끝으로 이성이 뚝 끊겼다. 이만 나가달라 부탁하던 페리엘이 휘청하며 바닥에 쓰러진다.
조금전 그녀가 건넨 차가 그 원인. 약에 취한 페리엘의 육체가 그녀의 시야에 담겼다. 그가 놀란 눈으로 리첼을 바라보았다.
리첼은 진득하게 웃었다. 돌아오지 않는 사랑에 살의가 들끓었다.
벽에 장식되어 있는 검을 빼어 들었다. 그리고 그의 몸을 타고 올라가 높이 치켜들었다.
‘날 사랑해주세요. 그럴 수 없다면-.’
차라리.
‘내 손에 지세요.’
이제는 소유하는 사랑이라도 상관없다.
정신이 들었을 때, 이미 그는 죽어가고 있었다. 증오스럽던 영주의 동생도 난도질이 되어 있었다.
입고 있던 드레스는 페리엘의 피로 점차 붉게 물들어 갔다. 검을 쥐고 있던 손도 마찬가지. 그가 크게 기침했다.
‘리첼, 나는…쿨럭!’
‘페리엘!! 말 하지 말아요…!’
다급하게 외치며 그제야 눈물을 후둑, 후둑 떨구어 내자 그가 피를 토하면서도 애써 웃음지어 보였다.
그는 슬퍼하며 또한 안타까워 했다. 리첼을 위해 자신의 사랑을 포기했건만, 그것은 그녀를 벼랑끝으로 내몰게 했다.
“미안합니다.”
멍하니 자신을 바라보는 남색의 눈동자에 그는 다시금 말했다.
거짓을 말하고 끝내 상처밖에 주지 못해서.
“아프게 해서 미안합니다.”
점점이 이어지던 목소리가 점차 희미해져 간다. 숨을 쉬는것이 힘들었다.
“나는…당신을…….”
사실은 당신만을 사랑했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이렇게 당신의 손에 죽는다 해도 원망하지 않는다고 그리 전하고 싶었다.
잡은 손등위로 애절한 입맞춤을 하며 페리엘은 눈을 감았다.
이어 숨소리가 잦아 들었다. 툭, 고개를 떨구는 그를 보며 리첼은 울부짖었다.
“안 돼..”
안 돼! 안 돼, 페리엘!!!
목이 찢어져라 그 이름을 외치며 그의 어깨를 뒤흔들었다.
가슴이 아팠다. 너무 아파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이러지 마요. 페리엘. 페리엘?”
몇 번을 불러도 그는 그녀에게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다. 이렇게나 가까이 있음에도 다정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헛웃음이 나왔다.
감당할 수 없는 광경에 쩌렁쩌렁한 광소가 흘러나와 빗소리를 갈랐다. 눈물이 내리는 빗방울처럼 계속해 떨어졌다.
콰콰쾅.
다시 한 번 낙뢰가 치며 방안이 환해졌다. 이윽고 덜컥, 문이 열리며 티끌하나 묻지 않은 흰 정장에 소름끼치도록 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터벅, 들리는 발걸음 소리에 리첼은 고개를 들었다.
광기와 절망, 그리고 분노로 일그러진 남색의 눈동자가 그를 향한다.
“영주님-.”
“리첼?”
“당신만, 당신만 없었더라면!! 당신이!!!! 왜 날 사랑했어, 왜 약혼을 허락한거야! 왜!!”
“그게 무슨..”
“죽어버려!! 눈앞에서 없어져 버리란 말이야!”
의아해 하는 그에게 들고 있던 검을 무작정 휘둘렀다.
울부짖으며 찌르고 또 찔렀지만, 그는 반항하지 않았다.
깨달았을 때엔 그는 피투성이가 되어 가느다랗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챙그랑. 들린 검이 바닥에 떨어졌다.
먹빛으로 뒤덮인 어두운 하늘에선 굵직한 빗줄기가 끊임없이 쏟아져 내렸다.
쏴아아아. 불어오는 바람과 내리는 비가 유리창을 세차게 두들겼다. 고요함 속에 빗소리만이 요란했다.
리첼은 떨리는 눈을 들어 자신의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항시 착용하는 흰색의 정장은 검붉은 자욱으로 물들어 있었다. 기가 질릴 정도로 차가운 눈이 그녀를 가만히 응시해 왔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거지?
부들부들 떨고 있자니 피로 얼룩진 손을 부드럽게 감싸며 그는 말했다.
“괜찮다. 리첼.”
뭐라고?
예상치 못한 말에 멍하니 묻자, 그가 희미하게 웃었다. 마주한 눈동자가 어딘지 서글퍼 보였지만 그녀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한다.
나는 괜찮아.
“그러니 …슬퍼하지 마라. 모든 건 내 탓이니 너는 잊어라.”
나는 언제까지고 네 행복을 바라줄 테니. 죽음을 목전에 두고, 단 한마디의 원망도 없었다. 페리엘과 마찬가지로.
그저 마지막으로 내뱉는 말은 그것이었다. 잊어라.
꼭 쥐고 있던 그의 손이 빠져 나갔다. 그의 숨도 멎었다. 싸늘한 기운이 방안을 휘감았다.
“왜 당신이….”
그런 눈으로 나를 본 거지?
왜 반항도 하지 않았지? 왜, 왜, 왜?
어째서 마지막에는 그 무감정한 눈빛을 보이지 않았지? 그래야만 마음껏 미워하고 증오하잖아.
그런데 그 애틋하고 애절한 감정은 뭐야. 당신은 악역으로 남았어야지. 이제와 이러는 건 반칙이잖아.
눈물이 그득 차오르고 움켜쥔 손에선 피가 뚝뚝 떨어졌다. 비릿한 피 냄새에 머리가 아파왔다.
몸이 가늘게 경련했다.
리첼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콰르르릉. 모든 것이 핏빛이다.
창틀에 놓인 푸른 꽃과 흰색의 꽃이 아스라이 흔들렸다.
잊고 있던 기억이 되살아 났다. 영주의 말따라 지우고 지우고, 또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냈다.
그러하지 않았으면 자신은 미쳤을 거니까.
아니 이미 미친 건가?
툭, 투둑.
볼을 타고 차가운 빗방울이 미끄러져 내렸다.
눈물은 마치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끊임없이.
“거짓말….”
가슴이 먹먹해 졌다. 눈앞이 희뿌옇게 변해가며 숨을 쉬는 것이 힘들었다. 날카로운 단도들이 가슴을 찌른다.
입을 열면 울음소리가 새어 나올 것만 같았다. 숨이 막힌다.
쨍그랑, 놓여있던 유리병이 깨어지며 말라버린 하얀색의 ‘페리엘’과 푸른색의 ‘리첼’이 바닥에 흐드러졌다.
리첼은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았다.
어느 샌가 다가온 검은 머리카락의 소녀, 라니아가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본다.
처음부터 그렇게 느꼈지만 기이한 분위기가 감도는 아이다. 라니아는 바닥에 떨어진 꽃을 주워들었다.
“그거 알아?”
“…무엇을?”
“리첼은 ‘소유하는 사랑’. 하지만 이렇게 하얀색의 페리엘을 함께 꽂아주면 꽃말이 변하지.”
“…아.”
주춤 하는 그녀를 향해 라니아는 붉은 입술을 끌어 올렸다. 이어 잔혹한 한 마디가 가슴을 할퀴었다.
“당신의 행복을 바랍니다.”
고요함이 깨어졌다. 들고 있던 단도를 손에서 놓아버렸다.
리첼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문을 박차고 나갔다.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걸음을 멈추지는 않았다.
뛰고 뛰고 또 뛰어서 가장 높은 탑까지 올라갔다.
차가운 빗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바람이 휘몰아 쳤지만 리첼은 망설임 없이 난간위에 섰다.
아찔할 정도의 높이였다. 눈물에 젖은 머리카락이 휘날렸다.
그녀는 넋을 잃은 얼굴로 허공을 응시했다.
‘꽃말’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들은것은 페리엘에게서가 아니다.
아주 오래 전, 자신에게 꽃말에 대해 이야기 해주던 소년이 떠올랐다. 화사한 풍경들이 펼쳐진다.
따사로운 햇살. 부드러운 바람. 풍겨오는 봄 내음.
다채로운 꽃들이 흔들리는 가운데 12살의 그녀는 언덕위에 앉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너무해, 너무해.
훌쩍 거리며 눈물짓고 있는 그녀의 앞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자 잘생긴 소년이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영주님의 아들이다. 한 번도 이야기를 나눠 본 적은 없었지만, 여러번 도움을 받아 친절한 도련님인건 잘 알고 있었다.
녹음을 닮은 짙은 녹색의 머리칼을 가진 영주의 아들이 리첼의 얼굴을 보며 고개를 갸웃한다.
“왜 울고 있지?”
리첼은 감정이 복받쳐 입술을 꾹 물었다가 더듬 더듬 이야기를 시작해 나갔다.
“부모님은 내 이름을 리첼이라고 지어줬어요. 이 푸른꽃을 닮았다고. 그런데 이거 꽃말이 소유하는 사랑이래요. 난 그런거 말고 예쁜 사랑을 하고 싶은데.”
울먹이다 이내 울음을 터트리자 소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대로 사라졌나 싶었는데 하얀꽃을 내밀었다.
“혹 알고 있어?”
“뭘요?”
“리첼은 소유하는 사랑이지만 이 꽃과 함께 두면 꽃말이 변하지.”
변한다구요? 의아하게 바라보자 그가 눈을 마주 응시해왔다.
“당신의 행복을 바랍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는 사람들은 이렇게 연인들에게 달콤한 고백을 하곤 한단다.
소년이 무표정한 얼굴로 이야기 했다.
그리고는 남색의 꽃을 꺾어 그녀의 손에 함께 쥐어주었다. 울지 마라, 그렇게 위로한다.
멍하니 바라보자 소년이 무표정한 얼굴 위로 따사로운 봄 햇살과 같은 다정하고 부드러운 미소가 머물렀다.
“내가 언제나 네 행복을 바라겠다. 리첼.”
아아, 아아-.
탄식과 함께 눈물이 끊임없이 떨어졌다.
“왜.”
리첼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왜 나같은 걸 그렇게 사랑해 주었나요 영주님.”
아름다운 사랑이 하고 싶다고 바랐던 주제에 정작 집착한 것은 자신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는 단 한 번도 당신을 돌아보지 못 했는데.”
그것이 후회스러웠고, 그것이 뼈에 사무치게 미안했다.
페리엘에게도 죄를 지었지만 영주에 대한 죄책감이 더 했다.
[“괜찮다. 리첼.”]
[“그러니 …슬퍼하지 마라..”]
그래서 당신은 다시 되살아 났을 때 그렇게 말했군요. 괜찮다고.
행복할 수 있었는데 만족하지 못했던 건 자신이었다.
사랑에 집착한건 오히려 나.
처음부터 당신을 사랑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당신은 그 때와 변함없이 한 자리에서 나를 지켜봐 주었는데 왜 나는-.
리첼은 자조적으로 웃었다.
미안해요. 지금에서야 당신을 돌아봐 미안해요. 하지만 뭐라 해도 이제 너무 늦었죠.
허공으로 한걸음 내딛는데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푸른색의 리첼과, 하얀색의 페리엘이 시야에 가득 찼다. 흐르는 눈물이 차가운 빗방울과 섞여 추락했다.
[“내가 언제나 네 행복을 바라겠다.”]
세상이 검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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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눈치채신 분 있을까 모르겠는데.. 27편의 첫부분에보면
[리첼은 떨리는 눈을 들어 자신의 앞에 선 남자를 바라보았다. 항시 착용하는 흰색의 정장은 검붉은 자욱으로 물들어 있었다.]
->리첼이 영주를 죽인 후입니다.
29편 마지막에
[다시 한 번 낙뢰가 치며 방안이 환해졌다. 이윽고 덜컥, 문이 열리며 티끌하나 묻지 않은 흰 정장에 소름끼치도록 무표정한 얼굴을 한 사내가 안으로 들어섰다.]
->이 때는 리첼이 영주를 죽이기 전이죠. 정장에 하얗거든요.
이 미세한 차이를 알아채신 분들은 눈썰미 좋으신분들 ㅋㅋ
+ 회상씬중에 페리엘이 27편에서 고백하는 장면, 행복을 바란다는 꽃말이 나와요. ;ㅂ;!
여하간 이번 파트는 비극적인 사랑을 써보고 싶었어요.
하지만 주인공을 이따구로 만들 수도 없고, 다른 소설 쓰기는 귀찮고.
영주님 ㅠㅠ 아아 비운의 캐릭터. 주고주고 또 주고 죽어버린 헌신적인 남자님.
결국 죄책감을 못이긴 리첼도 같이 죽었습니다. 저 기억가지고 멀쩡히 살아있는게 더 이상하죠;
어쨌거나 이제 마무리 지어지고, 바로 물의나라로 파트로 넘어갑니다!
슬퍼요ㅠㅠ근데 리첼이라는 여자도 불쌍한것 같아요 거짓된기억을 가지고있다가 영주를 죽이고 기억이 다시돌왔는데 저라도 못견딜것 같아요ㅠㅠㅠ
ㅠㅠㅠㅠㅠ슬퍼요ㅜㅜㅜ
ㅠ 다시 읽어도 재밌어요 간만에 다시 봤는데 역시!! 제발 다음편을....!!
슬퍼요ㅠㅠ 진짜 영주님.... 쿠키조아님도 대단하세요 복선도 bb
허류ㅠ어떻게이럴수가....ㅜ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