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회는 지금 아날로그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디지털 시대가 개막되고 있다. 다니엘 벨이 [이데올로기의 종언]을 이야기 하던 시절과도 상황이 너무 변했다. 우리는 인류 최초의 디지털 세대다. 하루가 다르게 가파르게 변해가는 이 시대의 핵심 키워드는 속도이며, 영상이다. 정보화 사회는 곧 영상 정보화 사회다. 영상문화의 흡인력은 너무 막강해서 다른 문화의 수용자들을 방향전환하게 하는 현상을 일으키고 있다.
활자문화 수용자들의 상당수는 영상문화로 개종하고 있다. 이제 밤을 새워 도스토에프스키의 [죄와 벌]이나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읽는 사람보다는 그것들이 영화화 된 비디오를 통해 내용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훨씬 늘어나고 있다. 2시간 이내면 충분히 감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소설은 영상의 하위개념인가? 기초 텍스트에 불과한 것인가?
영화 발생 초창기에도 원작소설의 영화화는 진행되었다. 오리지날 시나리오의 부족과 명작 소설, 혹은 베스트셀러 소설을 영화화함으로써 대중들에게 훨씬 잘 포장되어 전달될 수 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특히 고전 명작이 갖고 있는 광휘로움은 갈수록 영향력이 급증되고 있는 영상문화에 투영되면서 상호 보완 작용까지 일으키고 있다.
그러므로 세익스피어의 고전들, 수없이 영화화 된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햄릿][맥베드] 등을 비롯해서 현대의 고전들인 도스토에프스키, 톨스토이의 작품들도 쉴새없이 영화화되었다. 국내에서도 가장 최근에 영화화 되어 우리나라 영화사상 최초로 칸느 영화제 경쟁부문에 진출한 임권택 감독의 [춘향전]을 비롯해서, 황순원의 [독짓는 늙은이]나 김동리의 [무녀도], 오영수의 [갯마을], 박경리의 [김약국의 딸들], 박상륭의 [죽음의 한 연구] 등이 영화화되었다. 현재로 올수록 고전 명작보다는 당대의 베스트셀러가 영화화되는 비율이 현저하게 늘어나고 있다.
1960년대 문예영화 시대에는 좋은 영화를 만들어 국내외에서 수상하게 되면 외하 수입쿼터가 배당되었기 때문에 제작자들은 돈벌이가 보장되는 외화 수입권을 따내기 위해 명작들의 영화화를 선호했었다. 한국 현대소설 초창기의 명작들은 주로 그 당시 영화화되었다. 소설의 상업성 논란이 제기되었던 70년대 청년문화 이후에는, 시장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대중들의 관심을 모은 베스트셀러들의 영화화가 시도되었다.
최인호의 [별들의 고향]이나 조선작의 [영자의 전성시대], 조해일의 [겨울여자] 등 주로 호스테스 문학이라고 불리던 소설들, 70년대 고도 경제성장의 이면에서 도시 변두리로 흘러들어와 신음하던, 소외받은 여성들이 주인공인 소설들이 영화화되었다. TV의 대량 보급과 함께 드라마에 주도권을 빼앗긴 80년대는 영화산업의 침체기다.
강석경의 [숲 속의 방]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이상 오병철 감독), 양귀자의 [나는 소망한다 내게 금지된 것을](장길수 감독) 등이 90년대 초반에 영화화 되었지만 상업적으로는 모두 실패했다. 베스트셀러의 후광이 더 이상 영화관객들에게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하지 못하고 있다는 반증이었다. 반면에 당대의 신세대 작가로 부상한 장정일의 대부분의 소설들은 영화화되어 관객들의 지지를 이끌어냈다. [아담이 눈뜰 때](김호선 감독)를 비롯해서 [너희가 재즈를 아느냐](오일환 감독) [너에게 나를 보낸다][내게 거짓말을 해 봐](이상 장선우 감독) 등이 그것이다. 장정일의 소설들은 기본적으로 이야기 구조가 뚜렷하고 전복적인 성적 코드가 삽입되어 있어서 제작자들의 기호를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90년대의 대표적 베스트셀러 시집인 유하의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도 작가 자신에 의해 영화화되었다. 이청준의 [서편제]와 조정래의 [태백산맥]을 영화화 한 임권택 감독은 그 이후 주로 오리지날 시나리오로 영화를 만들고 있다.
2천년대 들어서면서 원작소설의 영화화는 다시 주목을 받는다. 왜냐하면 박찬욱 감독에 의해 흥행 신화를 다시 쓴 [공동경비구역 JSA]가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박상연의 [DMZ]를 원작으로 했다는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유하 감독은 역시 오늘의 작가상을 받은 이만교의 [결혼은 미친 짓이다]를 두 번째 연출작으로 택했고 상업적으로 대성공을 거두었다.
2004년에도 베스트셀러 소설의 영화화는 계속해서 시도되었다. 위기철의 [아홉살 인생]이 영화화되었으며 이규형 감독의 [DMZ 비무장지대]는 자신의 소설 [이등병 오딧세이]를 영화화 한 것이다. 또 이 시대의 대표적 작가인 김영하의 소설 [사진관 살인사건][거울에 대한 명상] 등 단편 3편이 짜깁기되어 변혁 감독에 의해 [주홍글씨]로 만들어졌다. 한석규 이은주 엄지원 등이 열연한 [주홍글씨]는 제 9회 부산국제영화제 폐막작으로 선정되었으며 흥행에서도 손익분기점을 넘었지만 이른바 제작사에서 동원한 알바 논쟁으로 영화판을 시끄럽혔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영화계에 등장한 한국 신인 감독들은 기본적으로 자신이 직접 오리지날 시나리오를 집필하는 능력을 대부분 갖고 있다. 2004년 베를린 영화제에서 [사마리아]가, 베니스 영화제에서 [빈집]으로 각각 감독상을 수상한 김기덕 감독은 1996년 [악어]로 데뷔한 이후 지금까지 연출한 11편의 영화가 모두 자신이 직접 쓴 오리지날 시나리오다. 또 2004년 칸느 영화제에 [여자는 남자의 미래다]로 진출한 홍상수 감독 역시 데뷔작인 [돼지가 우물에 빠진 날]만 구효서의 [낯선 여름]을 원작으로 하고 있을 뿐, 그 이후 [강원도의 힘][오! 수정][생활의 발견]이 모두 감독 자신이 직접 쓴 오리지날 시나리오로 만든 것이다. 소설가 출신인 이창동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데뷔작인 [초록 물고기]부터 [박하사탕]과 [오아시스] 모두 감독 자신의 오리지날 시나리오다. 우리 시대의 대표적 작가주의 감독들 3인방이 모두 오리지날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것은 90년대 한국영화 부흥이 감독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하나의 반증이다.
칸느 영화제에서 심사위원 대상을 받아 한국 영화의 질적 우수성을 세계에서 공인받게 한 박찬욱 감독 역시 마찬가지다. 그의 데뷔작 [달은 해가 꾸는 꿈]과 [삼인조]를 비롯해서 [복수는 나의 것], 그리고 최근 촬영중인 복수 3부작 중의 마지막 작품인 [친절한 금자씨]까지 모두 박찬욱 자신이 직접 쓴 오리지날 시나리오다. 다만 칸느에서 수상한 [올드보이]는 일본 만화를 원작으로 하고 있지만 박찬욱 감독 자신에 의해 과감하게 각색되어 있다. 특히 결말 부분의 충격적인 대반전은 작품의 틀을 바꿔버릴 정도였고, [올드보이]의 판권을 오히려 일본에서 다시 사가는 형편이 되었다.
이렇게 최근 한국 영화의 시나리오 작업 능력은 매우 우수해졌다. [조폭 마누라]나 [달마야 놀자] 등의 시나리오 판권이 할리우드에 팔려서 리메이크되고 있다는 소식은 그만큼 한국 영화의 프리 프러덕션, 즉 제작전단계의 우수한 능력이 입증된 것이다. 가장 큰 원인은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에 대한 기획팀이 튼튼해졌다는 것이다. 이것은 90년대 이후 인문한적 상상력으로 무장된 우수한 인재들이 문학보다는 영화로 방향전환하면서 이루어진 현상이다. 영상적 부가가치가 문학의 그것에 비해 훨씬 높아져 가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도 이런 현상은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2004년 국내 개봉된 외화들 중에서도 원작소설을 영화화 한 작품은 많다. 가장 대표적인 경우가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를 영화로 만든 것이다. [중앙역]으로 베를린 영화제 대상을 받은 브라질 출신의 월터 살레스 감독은, 아르헨티나 출신으로 쿠바 혁명에 가담해 카스트로와 함께 공산주의 혁명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체 게바라의 일대기를 영화화했다. 체 게바라는 라틴 아메리카에서는 신적인 존재로 숭상받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영화화 작업은 더욱 조심스러웠다. [모타사이클 다이어리]는 체 게바라의 파란만장한 일대기 중에서 23살 청년기의 여행을 다룬 것이다. 체가 개인적 관심사에서 사회로 시선을 넓히게 된 결정적 계기가 23살 때의 라틴 아메리카 대륙 여행이며, 체는 그때의 경험을 자신이 직접 책으로 쓴 바 있다. 국내에는 체 게바라 평전과 사진집 등 관련서적 수십종이 번역되어 있다.
이외에도 일본 작가 에쿠니 가오리의 베스트셀러 [냉정과 열정 사이]나 가타햐마 교이치의 소설 [세상의 중심에서 사랑을 외쳐라] 타나베 세이코의 원작인 [조제. 호랑이, 그리고 물고기들] 등이 영화로 만들어져 국내 개봉되었다. 특히 크리스마스 시즌 가장 화제를 모은 [오페라의 유령]은 원래 1911년 발표된 가스통 르루의 소설이 원작이지만, 앤드류 로이드 웨버의 뮤지컬이 워낙 유명해서 원작자가 가려져 있을 정도이다. 1985년 출간된 크리스 반 알스버그의 동화책 [폴라 익스프레스]도 이번 크리스마스 시즌을 맞아서 영화화되었다. 이렇게 원작소설의 영화화는 문학과 영상의 상호보완적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있다. 영화의 근본인 내러티브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이미 소설로 대중들의 검증을 받았다는 점에서 리스크가 심한 영화산업의 특성상 제작자들을 안심시켜 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