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경자의 <까치설날>의 추억
1958년 섣달 그믐 날 경자는
아현동 판자촌 비탈길을 흙 묻은 쌀 한봉지와 깨어 진 연탄 한개를 들고 힘겹게 올랐다.
넘어질 때 다리를
다쳤는지 쩔뚝 절뚝..
어디선가 여자애의 가날 픈 노래
소리가 들렸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벌써 땅거미가 져서 먼 여의도
쪽에선 겨울 노을이 벌겋게 물들고 빛을 잃은 태양도 힘겨운 듯 산마루에 걸터 있더니
참새똥이 뚝 떨어 지듯 순식간에
숨어 버렸다.
그 날, 1958년 섣달
그믐날 즉, 어린이들의 마음을 설래이게
하는 <까치설날>이다.
여기 저기서 '까치 까치설날은
어저께고요~'라는 '설날' 노래가 들릴만 하지만 이
동네는 유난히 더 조용했다.
모든 사람들이 가난에 찌들어 사는 서대문 신학대학 위 북 아현동 고개턱에
자리 잡은 하꼬방(판자촌)촌이다.
경자는 나보다 2살이 어려
국민(초등)학교 4학년이다.
4학년이라도 체구도 작고
여위어서 지금의 초등학교 2학년 정도나
될까?
아래로 남자 동생이 둘이나
있다. 학교에 다녀 오면 언덕배기
공터에서 막내는 업고 바로 아래 동생도 데리고 나와
친구들의 고무줄넘기 놀이를
구경하다, 정 하고 싶으면 동생을
친구에게 맡기고 고무줄 놀이를 잠깐 즐긴다.
그래도 공부는 중간 정도이고 얼굴은 잘 못먹서 그런지 항상 하얀 파리한
얼굴이지만 웃으면
약간 들어나는 덧니와 보일
듯, 말 듯한 보조개는 나의
마음을 설래이게 했다.
경자도 나를 조금 좋아했는지 나를
보면 수줍게 웃었지만 오빠라고는 부르지는 않았다.
동네에서 하나 뿐인 공동변소의 긴
줄에서 나를 만나면 서로 쑥스러워 고개만 푹 숙였다.
6.25전쟁이 끝나고
5년, 그러니까 모든 것이
부족하다.
공동 화장실도 남여 구분만 되게
문만 2개이고 칸막이 사이는 얼기
설기 판자로 막고 가마니를 걸어 논 것 뿐이다.
추운 겨울. 새벽이라도 누구나 신문지 한
장 씩 들고 20미터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다행히 사용료가 없다는 것
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북 아현동 판자촌은 골목도 복잡한
10평짜리 이하의 집들이 굴딱지
처럼 다닥 다닥 붙어 있다.
피난민이 많고 생활전선에서 패전한
가난뱅이 집합소였다.
동네로 들어가는 가파른 흙 계단
길은 너무나 힘들고 위험하다.
비가 오거나 눈이 오면 위에서 부터
중간 중간 매듭이 진 새끼줄이 아래로 늘어져 있어 누구나 등산하듯 붙들고 올라가곤 했다.
펀한 길을 갈려면
10분을 돌아야 하기 때문에
대부분 이 길을 이용했다.
산꼭때기 마을, 달동네에서 보는 달은 더
크게 보이고 별빛도 더 반짝였다.
멀리 보이는 있는 있는자의
마을, 즉 부잣동네의 불빛을 보면
가슴에 차오르는 그 무엇이 있다.
부러움, 답답함과
분노, 나의 처량한 모습과 비교하면
한숨만 나온다.
임경자는 여기 판자촌에서 태어 난 것도 아니다.
6살때 아버지가 직장에서 떨어져
나오고 부터 이곳 월 셋집으로 밀려 왔다.
경자 아버지는 한마디로 노가다
인생으로 일용직 세멘트 잡부로 일한다.일이 없으면 놀고
..
이 동네에서는 일을 할만 한 나이의
여자이면 공장이나 남의 집 파출부로 다닌다.
경자 엄마는 아이들 때문에 비닐우산
조립을 집에서 한다.
불에 지진 인두로 파랗고
노랗고,빨간 얇은 비닐을 서로 붙이는
작업이다.
오늘, 까치설날 아빠는 밀린 임금을
받으러 갔다가 공사사장이 도망 갔다면서 현장 소장이 반의 반도 안되는 돈을 지불 했단다.
사장과 짜고 치는 고스톱이 틀림이
없다,
아빠는 친구들과 마신 막걸리로 조금 취해 있었고 엄마에게 내민 돈은 몇장의
종이돈과 10환짜리리 동전 몇 개가
전부였다.
경자 엄마는 그래도 내일이 설날인데, 하면서 경자에게 심부름을
보냈다. 국을 끓일 동태 두마리는
어제 구해 왔고
나머지
물건들이다.
물건 이랫자 봉지쌀
한봉지(약1키로}와 계란
2개,덴뿌라(오뎅 5장),연탄 한개이다.
구멍가게는 집에서
7,80미터 아래에
있다.
구멍가게 아주머니 만큼의 부자는 이
동네 없었다, 구멍가게 외 공동수도를
운영해서 많은 돈을 번다.
공동 수도가 동네에서 하나라서
밤낮 없이 물지게를 진 사람과 물통을 든 엄마들이 줄을 선다.
경자는 왼손엔 짚으로 만든 새끼줄
한올을 연탄의 중심 구멍에 끼워 들고 오른 손에는 누런 세멘트종이로 만든 쌀봉지를 안았다.
그 시절에는 비닐봉지도 없고
해서, 말가루와 국수도 이렇게
봉투에 넣어 들고 다녔다.
쌀 반말 4키로를 한번에 사는 것도
힘들고 연탄 50장을 들여 놓는 것도 여려운
시대.
연탄 한,두개를 사면 판 쪽에서 새끼
끈으로 들고 가기 쉽게 만들어 준다.
어른들은 양손에
2개씩, 어린이들은
1개씩 잘도
팔렸다.
경자는 의기 양양하게 내일 먹을
뗀뿌라 볶음에 마음도 가볍게 눈이 녹아 땅이 미끄러운 오르막 길을 조심스럽게 걸었다,
앗!
하는 순간, 경자는 앞으로 꼬구라
졌다.
아까시아 꽃보다 더 탐스럽고 눈빛
보다 더 흰 쌀알들은 봉지에서 터져 나와 흙범벅이 되었고 뒤를 돌아보니
연탄은 저만치 굴러가다 반으로 쩍
쪼개졌고 새끼줄만 겨울 찬바람에 이리 저리 날려 다니고 있었다.
경자는 얼른 양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휴~~다행히 계란은 두꺼운 쪼기
주머니에서 반들반들하게 만져졌다.
경자는 하늘이 노래짐을 느낌과
동시에 눈물이 솟아 나왔다.
이걸 어떻하나?
생각 할 수록 울음소리도 크게
나왔다,
이 광경을 본 이웃 아줌마들이
깡통을 들고 나와 흙이 뭍지 않은 부분을 살살 퍼 담았다. 3분지
1의 양도 되지
않았다.
경자는 얼른 흙 범벅이 된 쌀을
조그만 손으로 막 쓸어 모아서 이웃이 갖다 준 양재기에 쓸어 담았다..
손 시린 것도 느끼지 못하고
너무 바빠서 눈물 조차 닦을 여유도 없다.
수 많은 사람들이 지나가고 연탄을
나른 길이라 양재기의 쌀들은 아주 까마귀 발 같았다.
지금의 흑미(黑米
)와 닮았다고나
할까?
그래도 씻어서
먹어야지. 버린다는 것은 곧 굶는
것이니..
<쌀 한봉지의 비극>, 지금은 그냥 문장으로 남아 있지 아무도 그뜻을 모른다.
이웃 영수 할아버지는 쪼개진 연탄을
다른 끈으로 메주덩어리 묶듯해서 들고가기가기 싶게 해 주셨다.
경자의 울음도 여지껏 그치지
못햇다.
이제는 집으로 가면 엄마한테
머리채를 잡히거나 아버지의 큰 손바닥이 뺨을 훓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마침 이 때,
한복을 깨끗이 차려입고 양손에
선물 보따리를 든 젊은 부부가 지나갔다.
아마 설 명절이라 친가에 다니려
오는 모양새다.
그 부부는 경자의 울음소리를 듣고
흙투성이가 된 경자의 손을 보고서 두어 걸음을 걷다
되 돌아 서면서 두루마기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10환짜리 종이돈 한장을 실포시
흰 쌀 위에 놓아 주고 지나갔다.
경자는 어리 둥절해서 그 사람과의
눈도 맟추어 보지도 못하고 말았다.
이것을 본 아주머니들도 술렁거리더니
수다쟁이 정희엄마가 몸빼(일바지)에서 오원짜리 동전
3개를 경자손에 쥐어
주자,
여기 저기서 몇개의 동전들이
모여졋다.
성질 급한 영수 엄마는 불나게
구멍가게에서 봉지쌀도 사왔다.
항상 막걸리에 취해 있는 두봉이 아빠도 주머니에 돈이 없다는 걸 알면서도
몇번을 손을 넣었다 뺏다.
1958년 섣달 그믐 날 경자는 아현동 판자촌 고개를 흙 묻은 쌀 한봉지와 깨어 진 연탄 한개를 들고 힘겹게
올랐다.
어디선가 여자애의 가날 픈 노래
소리가 들렸다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
벌써 땅거미가 져서 먼 여의도 쪽에선 겨울 노을이 벌겋게 물들고 빛을 잃은
태양도 힘겨운 듯
산마루에 걸쳐 있더니 참새똥이 뚝
떨어 지듯 순식간에 숨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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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 북아현동에 살면서
비탈길에서 본 쌀봉지를 땅에 엎질고 연탄이 깨어져 울고 아이들을 몇번 보았습니다.
그걸 바탕으로 쓴 픽션입니다. 독수리 타법이라 맞춤법 트린 곳도 있을 겁니다.
그 어린이가 여러분의 어머니가 되었을 찌도 모릅니다.
노인은 절대 자존심 상한 과거를 쉽게 말하지 않는 성격이 대부분입니다.
@섣달 그믐날을
'까치설'이라고도 하는데
'까치까치 설날은
어저께고요~'라는 '설날' 노래가 있기 전에는 까치설이
없었다고 합니다.
즐거운 설날 되십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