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가본 실미도
북파부대원들의 흔적들, 슬픈 역사의 현장을 찾다
2021.2.28(일), 지인들과 실미도를 다시 찾아가 봤다. 실미도는 인천광역시 중구 용유동에 딸린 무인도로, 섬 대부분이 해발고도 80m 이하의 야산으로 이루어져 있다. 영종도(永宗島) 인천국제공항 바로 아래쪽 무의도(舞衣島)와는 하루 2번 썰물 때 갯벌로 연결된다. 해안은 모래와 갯벌이 뒤섞여 있다.
1968년 북한의 무장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서울 세검정고개까지 침투했던 1·21사태에 대한 보복으로 중앙정보부가 창설한 북파부대원 31명이 3년 4개월 동안 지옥훈련을 했던 뼈아픈 장소이기도 하다. 이 북파부대원들은 1971년 8월 23일 실미도를 탈출해 버스를 빼앗은 뒤 서울로 진입했다가 군경의 저지선을 뚫지못하자 스스로 자폭했다.
이처럼 끔찍하고 엄청난 실미도사건 이후에도 이 섬은 오랫동안 '비밀의 섬'처럼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채 숨겨져 왔었다.
그러나 그 후 실미도 북파부대원들의 실상을 파헤친 백동호의 소설 《실미도》가 1999년 발표된 뒤, 이 소설을 원작으로 각색한 강우석 감독의 동명 영화(2003년 12월 개봉)가 개봉되자 58일 만에 한국 영화사상 처음으로 1,000만 관객을 돌파하면서 33년간 베일에 가려 있던 실미도의 역사도 서서히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실미도는 여러번 다녀왔는데 서북쪽으로는 바위해안이 많아 경관도 수려하다. 이번엔 주로 북파부대원들의 흔적 찾는데 관심을 기울여봤다.
실미도 건너가는 길은 물이 빠지면 돌다리와 모래밭이 은밀한 속살을 드러낸다. 드디어 물이 빠진 시간이다. 돌다리를 건너 모래밭을 걷는다. 우측 해안을 돌면 기암괴석이 즐비한 바위해안이 나타난다. 실미도는 조그만 섬이라 약 2-3시간 정도 머무르면 충분하다. 섬 해안에서 여유롭게 더 쉬고싶다 해도 바닷길이 열리는 시간 안에 돌아와야 한다.
그러나 684부대원들이 훈련받던 흔적이나 영화 세트장은 모두 사라지고 없다. 이름없이 사라져간 북파공작원들처럼 세트장도 그렇게 없애버린 것 같다. 실미유원지 끝쪽에 영화포스터 한장 만 세워져 있을 뿐이다. 그래서 실미도는 더욱 슬픈 섬이다.
“북으로 간 아버지 때문에 연좌제에 걸려 사회 어느 곳에서도 인간대접 받을 수 없었던 강인찬(설경구 분) 역시 어두운 과거와 함께 뒷골목을 전전하다가 살인미수로 수감된다. 그런 그 앞에 한 군인이 접근, '나라를 위해 칼을 잡을 수 있겠냐'는 엉뚱한 제안을 던지곤 그저 살인미수일 뿐인 그에게 사형을 언도하는데... 누군가에게 이끌려 사형장으로 향하던 인찬, 그러나 그가 도착한 곳은 인천 외딴 부둣가, 그곳엔 인찬 말고도 상필(정재영 분), 찬석(강성진 분), 원희(임원희 분), 근재(강신일 분) 등 시꺼먼 사내들이 잔뜩 모여 있다. 그렇게 1968년 대한민국 서부 외딴 섬 '실미도'에는 기관원에 의해 강제차출된 31명이 모인다.
영문 모르고 머리를 깎고 군인이 된 31명의 훈련병들, 그들 앞에 나타난 의문의 군인은 바로 김재현 준위(안성기 분), 어리둥절한 그들에게 ‘주석궁에 침투, 김일성 목을 따 오는 것이 너희들의 임무다’라는 한 마디를 시작으로 냉철한 조중사(허준호 분)의 인솔하에 31명 훈련병에 대한 혹독한 지옥훈련이 시작된다.
'684 주석궁폭파부대'라 불리는 계급도 소속도 없는 훈련병과 그들의 감시와 훈련을 맡은 기간병들... ‘낙오자는 죽인다, 체포되면 자폭하라!’는 구호하에 실미도엔 인간은 없고 '김일성 모가지 따기'라는 분명한 목적 만이 존재해간다. 조국의 부름에 목숨을 걸고 응답한 청년 기간병들과 분단 조국이 내몰았던 사지의 땅에서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울부짖으며 죽어간 서른 한 명 훈련병들의 영혼. 역사는 흘러갔지만 섬 ‘실미도'는 여전히 그곳에 떠 있다.” 영화 '실미도'포스터에서 주인공 설경구(강인찬 역)의 가슴에 쓰여진 글이 섬뜻하다. '이름도 없었다... 존재도 없었다... 살려둘 이유도 없었다!'
실미도 숲은 낮은 야산으로 산책하기에 아주 좋다. 실미도 해안 동남쪽 코너 직전 쯤 가면 소나무숲 사이로 사람들이 다닌 길 흔적이 보인다.
그 길을 오르면 아기자기한 소나무숲 오솔길이 이어진다. 연인과 함께 오면 어울릴 것 같은 길이다. 이곳 소나무숲에서는 영화같은 처절함이나 슬픔은 찾아볼 수 없다. 오직 싱그러운 생명의 활력 만 있을 뿐이다.
산책로 입구에서 약 5분 정도 숲길을 가로지르면 시야가 트이면서 실미도 서쪽 해안이 나타난다. 아무도 없는 쓸쓸한 해안. 파도소리만 섬의 정적을 깨운다. 해안으로 내려가기 직전, 좌측으로 북파부대원들의 막사터가 보인다. 여러 군데의 집터들, 이곳이 바로 북파부대원들이 먹고 자던 숙소였던 것 같다.
해안으로 바로 내려가지않고 오른 쪽 숲을 헤치고 가면 잡풀에 덮혀있는 우물터도 보인다. 오래 전 그들이 사용했을 우물. 만감이 교차한다.
길도 제대로 나지않은 숲길. 덤불을 헤치고 북쪽 방향으로 몇 분 쯤 가면 기암괴석들이 늘어서 있는 넓은 해안공터가 나타난다.
필자의 경우 우물터를 찾기 위해 이처럼 덤불을 헤치고 해안공터까지 넘어갔지만, 이곳으로 오는 다른 방법은 실미도 동쪽 해안 소나무숲길 가기 직전, 산으로 향하는 또 하나의 희미한 비탈길을 오르면 계속 이곳 서쪽해안까지 이어지는 선명하고 아늑한 숲길이 나 있다. 이곳 해안공터에는 코키리 모양의 바위도 있고 바로 옆에 층층바위도 서 있다. 또, 웅장한 모습의 주먹바위도 만날 수 있다.
북파부대원들의 한이 서려 있는 듯 거대한 주먹바위가 바로 방문자들을 후려칠듯 날카롭기 그지없다. 송이버섯 모양의 바위도 있다.
이름없이 사라져간 31명의 북파공작원들의 영혼이 피어난 것일까? 해변가에는 활짝 핀 연꽃 모양의 큰 바위도 보인다. 멀리 바다 위에 떠 있는 바위 끝에 이름모를 새 한 마리 앉아 있다. 실미도의 아픔을 알고 있는 것처럼 하염없이 하늘 만 바라본다.
물빠진 해변은 해안선을 따라 검은 색 및 황금색 돌들이 바둑알처럼 빽빽이 깔려있다.
멀리 긴 모래밭도 나타난다. 돌 해안을 걷고 모래밭 해안도 걷는다. 그냥 걷기만 한다. 아무 생각없이 계속 이렇게 걷고 싶다.
모래밭에는 가느다란 물길이 거미줄처럼 퍼져 있다. 마치 실핏줄 같다. 피가 흐르는 바다. 그런데도 그 바다는 언제나 무심하고 냉정하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오늘도 변함없이 파도만 흘려보낸다. 뼈아픈 흔적의 실미도. 두시간 남짓 머무는 동안 그 섬은 내 가슴 속 한 구석에 또 하나의 ‘슬프고 외로운 섬’을 각인시켜주었다.
바다가 토해낸 갯벌은 참으로 황량하다. 전쟁이 휩쓸고 간 도시처럼 회색 빛깔의 흔적들 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곧 파도가 밀려오면 이곳 폐허도 다시 물 속으로 잠길 것이다. 내가 남긴 모래밭의 발자국도 함께 사라질 것이다.
모든 흔적, 모든 과거는 그렇게 사라질 것이다. 실미도처럼, 실미도의 흔적처럼 잊혀질 것이다. 시간 속으로 잠겨버릴 것이다.(글,사진/임윤식)
*실미도 가는 방법은...
서울에서 무의도, 실미도 및 소무의도를 갈려면 자가용의 경우 인천공항 고속도로로 잠진도 선착장까지 가서 2019년 4월 말에 개통된 무의대교를 건너면 된다.
대중교통의 경우에는 서울역에서 인천공항 제1터미널까지 공항철도를 탄 후, 인천공항제1터미널 3층 7번 게이트앞에서 무의도가는 1번 순환버스를 탄다. 잠진도선착장-무의도 큰무리선착장-실미유원지 입구-광명선착장 및 소무의도 다리 입구-하나개해수욕장 등 방향으로 돈다. 06:40부터 20:00까지 거의 매 50분 마다 다닌다. 7번게이트 앞 버스탑승장에는 버스운행시간표가 붙어있다(예성교통 문의 010-9911-4406). 이 이외에도 제1터미널 2층에서 자기부상열차가 매 15분 마다 용유역까지 다니는데 코로나 발생 이후 현재는 아침 07:30-09:00, 오후 18:00-19:00 등 제한된 시간에만 운행하고 있다.
실미도는 무의도에서 썰물 시간에만 건너갈 수 있는 조그만 무인도이다. 물이 빠지면 실미유원지와 실미도 사이에는 걸어서 건너갈 수 있는 모래톱이 나타난다. ‘바다타임’이라는 앱 등에서 물 때 및 바다 갈라지는 시간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