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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고 있는 회개 민수기 23장 19절
오늘은 회개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합니다.
민 23장 19절에 "하나님은 사람이 아니시므로 거짓말하지 아니하시고 인자가 아니시므로 후회하지 아니하신다 하셨습니다. 즉 행하지 아니하시겠느냐 말씀하신즉 이루지 아니하시겠느냐" 라는 말씀은 하나님은 후회가 없는 완벽한 분이심을 나타내는 말씀이며. 주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은 실수를 허락하지 않는 완벽함이 있기에 후회가 원천적으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회개란 오직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회개란 단어를 살펴보면 '나함'이라는 단어는 사 40장1절에서 반복해서 사용했습니다. 먼저 히브리어로 읽으면. "나하므 나하므 얌미 요마르 엘로히킴"입니다. "너희 하나님이 이르노라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보는 바대로 '위로하다' 라는 말이 거듭 나옵니다. 거듭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신약성경의 위로자라는 개념의 근거가 되는 말씀입니다.(요14: 26) 그리고 그 위로자는 성령이므로 이사야의 이 말씀은 교회시대를 향한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애가 1장 9절에서 우리는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 선지자가 "그를 위로할 자가 없다"고 한탄하는 것을 읽습니다. 이것은 위로자가 아직 오지 않았고, 그래서 사람들이 자신의 죄를 후회하지 않았다는 것과. 위로자가 없이는 회개가 불가능함을 의미합니다. 즉 위로자인 성령이 오기 전에는 근본적인 회개가 없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로자이신 성령의 도움이 없이는 회개가 불가능하며 성령충만은 회개의 바탕이 만들어짐을 의미합니다. 이로써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게 되고, 결과로 겸손해져서 타인을 비난하지 않게 될 때. 겸손은 회개의 결과로 나타나는 열매이며, 남을 귀하게 여기는 기초가 되는 것입니다.
두 번째 회개라는 의미로 쓰이는 '슈브'는 이사야 9장 13절에 나오는데 "그 백성들이 자기들을 치시는 이에게 돌아오지 아니하며"라는 말씀에서 회개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움직임으로 먼저 징계가 있음을 말씀합니다. 히12장 8절을 보면 "징계가 없으면 사생자요 참 아들이 아니니라."라고 했습니다. '슈브'는 '돌아오다'라는 뜻으로 이를 구체적으로 표현한 성경 말씀은 민수기 10장 36절로 "궤가 쉴 때에는 여호와여 이스라엘 종족들에게로 돌아오소서 하였더라" 광야에서 하나님은 구름기둥으로 이스라엘을 인도하였는데 그것은 모세의 지도 아래 광야로 인도하여 그분의 길로 훈련시키는 방식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실제로 필요한 교훈을 배운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방식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불평하고 원망했습니다.
신약성경에서는 '돌아오다'라는 의미로 쓰이는 '에피스트로페'라는 단어가 회개의 의미를 가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집니다. 이 단어는 사도행전 15장 3절에서 "이방인들이 주께 돌아온 일을" 이라는 말씀에 쓰인 단어로 불신자에서 믿는 자로 돌아선 것을 지적합니다. 이들이 돌아서게 된 것은 말씀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들음은 회개의 조건이며 징벌을 대신합니다. 그러나 듣지 않을 때는 징벌이 주어집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시험하실 때마다 이스라엘은 실패했습니다. 믿음의 시험이란 하나님께 돌아오기(슈브)를 촉구하는 하나님의 손길입니다. 그것이 신약시대에는 고난으로 나타납니다. 그들이 이집트를 떠난 때부터 카데스-바네아에서 약속의 땅에 들어가라는 명령을 받을 때까지 하나님은 그들을 열 번이나 시험하셨습니다(민수기 14: 22). 이것은 1년 반의 기간 동안입니다.
이 부분은 하나님의 마음과 뜻에 따르기 위해 돌이키는 회개는 수년이 걸릴 수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줍니다. 회개는 영적 성장으로 가는 길입니다. 신앙생활을 어느 정도 하여 알 것은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기 보다는 그 앞에 터를 잡는 사람들입니다. 르우벤과 갓 지파는 야셀 땅과 길르앗 땅에 남기를 모세에게 청했습니다. 그들은 가축이 많았기 때문에 굳이 가나안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민 32: 1~5). 이와같은 사람에게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집을 파괴하고 그들이 계속 나아가도록 강요하지 않는 한, 그들이 요단을 건너 왕국에 들어갈 가능성은 거의 없습니다. 그런 까닭에 회개로 이끌려 가는 사람은 은혜를 받은 소수의 남은 자입니다.
솔로몬이 성전을 봉헌하기 위해 기도한 내용은 역대하 7장 13-14절에 있습니다 "내가 하늘을 닫아 비를 내리지 아니하거나, 메뚜기에게 명령하여 땅을 멸망시키거나, 내 백성 가운데 온역을 보낼 때, 내 이름으로 불리는 내 백성이 스스로 낮추고 기도하며 내 얼굴을 찾고 악한 길에서 돌이키면, 나는 하늘에서 들을 것이요, 그들의 죄를 용서하고 그들의 땅을 고칠 것이다." 솔로몬은 악한 자들에게 회개하라고 호소한 것이 아니라 내 이름으로 불리는 내 백성에게 호소했습니다. 이것은 은혜의 남은 자들에게 호소한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하늘이 닫혔을 때, 회개하고 상황을 바꾸라고 부름을 받은 것은 은혜의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은 가뭄이 3년 동안 땅을 황폐화시킬 때까지 그렇게 할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가뭄이 극심하여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었을 때, 하나님은 엘리야를 아합 왕을 마주하기 위해 다시 보냈습니다.
하나님은 종종 말씀과는 반대가 되는 일을 하심으로써 우리를 당황하게 합니다. 예수께서 5천명을 먹이시고 제자들에게 벳세다로 먼저 가게 하고 자신은 산으로 올라가 기도했습니다. 바람이 거세어 제자들이 힘들어 하는 것을 보고 바다를 걸어왔습니다. 그리고 그 배는 게네사렛에 도착했습니다.
이는 원래 목적지와는 상당히 떨어져 있는 곳 입니다.(막 6: 45~53). 벳세다는 '물고기 집'을 의미하며 교회를 상징합니다. 게네사렛은 '하프'라는 뜻으로 이기는 자를 상징합니다(계 15: 2). 따라서 예수께서 폭풍을 잠잠케 한 후 그들을 데리고 간 곳은 교회(벳세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게네사렛)이었습니다. 이는 회개의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 왕국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다른 종류의 가뭄과 기근을 겪고 있습니다. 아모스 8장 11-12절은 "주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 땅에 기근을 보내리니 떡이 없는 기근이 아니요 물이 없는 목마름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기근이로다. 사람들이 바다에서 바다까지, 북에서 동까지 비틀거리며 여호와의 말씀을 찾으려고 왔다 갔다 하되 찾지 못하리라." 이것은 다른 종류의 기근으로, 그들이 하나님의 본뜻에 맞는 말씀을 듣기가 결코 쉽지 않음을 의미합니다. 또한 말씀을 자유롭게 듣거나 읽을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됨을 말합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말씀에 대한 무지는 그들을 죄의 본성에 대해 눈멀게 하고 회개에 대해 무디게 만듭니다. 해결책은 나의 백성으로 일컬어지는 소수의 이기는 자들이 국가와 교회 자체를 대신하여 회개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타바흐'는 시편 78편 41절에 나오는데 그 뜻은 '괴롭게 하다'입니다. "거룩하신 이를 노엽게 하였도다."라는 말씀에서 쓰인 단어입니다. 회개는 한 순간에 일어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지만 사실은 오랜 세월에 걸쳐 진행되는 영적 성숙의 한 과정입니다. 이스라엘은 오랫동안 하나님을 괴롭게 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고 회개가 일어납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구약 시대는 야곱이 있으며 신약 시대는 바울이 있습니다.
히6장 1절은 죽은 행실에서 회개함을 언급합니다. 죽은 행실은 생명(구원, 불멸)으로 이어지지 않는 행위를 말합니다. 바울의 관점에서 죽은 행실은 사람들이 의롭다함을 받을 기대를 가지고 행하는 선행입니다. 반면 야고보의 관점에서 죽은 행실은 믿음의 증거를 보이지 않는 행위입니다. 대부분의 경우에 사람들은 단순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출애굽기 19: 8). 문제는 아무도 그 언약을 지킬 능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의롭게 되는 길은 하나님의 언약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온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로마서 4: 21).
바울은 갈라디아서 1장 13-14절에서 고백합니다. "여러분은 이미 내가 유대교에 있을 때 행한 일을 들었을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교회를 심히 핍박하고 없애려고 노력했던 것입니다. 나는 내 동족 가운데서 나와 나이가 비슷한 많은 사람들보다 유대교에 더욱 열심이었고, 내 조상의 전통을 위하여 더욱 열심히 일하였습니다." 바울에게 있어서 열심은 그 자체가 믿음 있는 증거로 여겨졌습니다. 그것은 죽은 행실의 대표적인 현상이며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다메색에서 "사울아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행 9: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박해하다' 라는 의미로 쓰인 헬라어 '디오코'는 '타바흐'와 같은 의미입니다.
고린후서 7장 10절은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 일로 마음 아파하는 것은 죽음에 이르게 합니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맞게 아파한다" 는 것은 하나님을 괴롭게 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로 오는 고난을 뜻합니다. 이 문제는 사람들이 새 언약의 존재를 이해하지 못했을 때 시작되었습니다. 그들은 믿음이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을 그분께서도 이루실 수 있다는 것을 온전히 확신하는 것"(로마서 4: 21)이라는 사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야곱과 에서가 태어나기 전에 하나님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기리라"(창 25: 23)고 약속하셨습니다. 이 약속을 이루기 위해 어머니와 야곱은 함께 행동에 옮겼습니다. 우리 중에 하나님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해서는 일정 부분 우리가 해야 할 역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나님을 앞서간다는 생각은 하지 못합니다. 그런 행동의 결과는 고난을 불러옵니다. 야곱은 속임수로 언약을 성취하려 했으나 그에게는 21년 간의 환난이 대가로 주어졌습니다. 모든 대가를 치르고 난 후 그는 형 에서를 만나러 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도중에 자신보다 강한 존재와 씨름하는 상황을 만나게 되고 적이라고 생각했던 존재가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알고 변화되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날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났을 때, "나는 당신의 얼굴을 하나님의 얼굴을 보는 것과 같이 봅니다"라고 말했습니다(창33: 10). 이것은 브니엘에서의 그의 경험, 하나님의 얼굴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었습니다. 야곱은 마침내 가장 큰 적에게서 하나님의 얼굴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는 마침내 하나님의 주권을 알게 되었고, 그의 삶에 대한 전체적인 관점이 변화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야곱은 돌아서서(회개해서) 새로운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의지에 근거한 죽은 행위에 의존하는 것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의 도움 없이도 약속을 성취하실 수 있다는 진정한 믿음으로 옮겨갔습니다. 야곱이 세운 패턴은 우리에게 믿음을 극복하는 길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이 저에게 회개운동을 지시하실 때 환상을 보여주셨는데 벗은 사람이 세마포 천으로 몸을 가리고 있지만 속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모습이었습니다. 우리가 죄를 이렇게 가리고 있다고 말씀하시고, 엄청나게 큰 가마솥이 펄펄 끓고 있는데 천사들이 솥을 기우리자 끓는 물이 쏟아지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이 이것은 '진노의 솥'이라고 말씀하실 때 저는 큰 두려움을 느꼈습니다.
'샤하르'는 시편 78편 34절에 "하나님을 간절히 찾았고" 에서 나오는 단어로 '회개하는 심정으로 찾다' 라는 뜻입니다. 간절히 하나님을 구하는 것은 말씀을 사모하고 배우는 것입니다. 즉 말씀을 배우고 읽는 것이 회개로 이어지는 과정이기에 성경을 주야로 묵상함으로써 죄를 깨닫게 됩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는 문제는 자신에게 불편한 내용은 피한다는 것입니다. 큰 교회일수록 성도의 성향과 충돌되는 부분은 의도적으로 피하고 중립적인 내용만 다루는 경향이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에서 특정 행동을 죄(또는 범죄)로 선언하는 다양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1절은 거짓 증언을 금지하는데, 이는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지 말라" 는 아홉 번째 계명을 제시합니다 ( 출애굽기 20: 16 ). 거짓 증인을 용납하는 것은 특별한 사람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며,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에게 박탈감을 줍니다. 진실을 말하지 않는 행위 역시 소극적으로 거짓 증언에 포함됩니다. 우리 사회는 이 부분이 너무 심각합니다. 대다수가 방관자가 되는 사이에 불법이 힘을 얻어 범죄자가 고위직에까지 오르고 있습니다.
출애굽기 23장 2절은 재판관들이 대중의 의견에 동의함으로써 정의를 왜곡하는 것을 금합니다. 민주주의가 위험에 빠지게 할 수 있으며, 오늘날에도 우리는 이를 봅니다. 대중이 특정 집단을 지지한다고 해서 재판관에게도 그 집단을 기쁘게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정치적 성향을 가진 판사에 의해서 판결이 전혀 다르게 나옴으로써 그러한 결정이 내려질 때마다 국민과 재판관 모두 회개해야 합니다.
출애굽기 23장 3절은 가난한 사람에 대한 편애도 금지합니다. 오늘날의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해 세금을 기존의 한계를 넘어 인상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합니다. 적절한 지출의 한계를 넘어 세금을 인상하는 것 자체가 절도이며, "도둑질하지 말라"는 여덟 번째 계명을 어기는 것입니다( 출애굽기 20: 15 ). 가난한 사람에게 주기 위해 부자에게서 훔치는 것은 사랑의 행위처럼 보이더라도 죄입니다. 물론 부자가 불법적으로 재산을 얻었다면 피해자에게 배상해야 합니다. 약자라고 하여 일방적으로 과도한 관용을 베푸는 행위 역시 범죄입니다. 동성애가 대표적인 예입니다.
하나님을 괴롭게 하는 것은 죄입니다. 대부분은 자신이 하나님을 기쁘게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같은 행동을 계속합니다. 그런 행동이 일정 기간까지 계속될 때 그것은 하나님을 괴롭게 하게 되어 고난이 오고 이어서 회개로 이어집니다. 회개 운동은 국가적 죄가 어떤 수준을 넘어섰을 때 일어납니다. 그 수준은 하나님이 정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알 수 없습니다. 때가 이르면 주께서 주체를 세워 운동을 일으킵니다.
장봉운목사 성경공부에서 의정부 등대지기 하늘산소.
첫댓글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