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t1.daumcdn.net/cfile/cafe/9924014E5EDED79723)
![](https://t1.daumcdn.net/cfile/cafe/99245A4E5EDED79723)
스님~ 저는 그저 지금도 하던 그대로 六門에서 일어나는 대상을 아는 그 아는 마음을 계속 알아가고 있습니다. 그냥 그것만 신경 쓰고 있습니다.
가끔씩 아는 그 마음과 대상의 관계 대해 질문을 하기도 합니다만,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습니다. 그저 관심과 호기심만 불러일으키는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의심과 긴장이 일어나면 그냥 가볍게 알고 넘기고, 긴장을 풀고 다시 새로운 대상을 알아차림 합니다.
_(답 글)_
네, 괜찮습니다. 지금 하고 있는 알아차림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현재 그냥 대상을 아는 마음만을 알기만 하는 알아차림 방식/패턴에서 보는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 같이 봐야 합니다. 이렇게 보는 마음을 잡아서 보는데 있어서는 반드시 아는 마음과 함께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보는 의도가 너무 거칠고 강하고 힘이 세기 때문에 일어나는 대상에 반응하고 끌려다니기 십상이라서 제대로 잡아서 고찰하거나 법의 조사를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洞察(통찰)하고 直觀(직관)하기가 힘들고 곤란할 뿐만 아니라 조사하고 이해하기조차 무척 어렵습니다. 그래서 아는 마음과 함께 해야 합니다. 보는 마음을 잡아서 보는 용도(用途)로서 아는 마음을 최대한 活用해야 합니다. 이 또한 지혜입니다.
여기서, 대상을 아는 마음만을 계속 알아가고 있다고 해도 사띠는 보는 마음이 어떤 일을 하는지에 관심과 포인트를 두고 지켜봐야 ‘마음과 대상’의 관계 대해 질문의 답이 드러나게 됩니다. 마음도 작용하는 마음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하는 말은 이와 같은 맥락입니다. 그냥 단지 아는 마음(우뻬카상태)만을 알기 때문에 물어도 뚜렷한 답은 나오지 않는 것입니다.
이제는 더 넓고 다양하게 작용(일)하는 마음을 보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된다는 사실입니다. <어떻게-왜>가 실린 그 원인과 결과에 대한 이치를 아는 쪽으로 말입니다. 즉 update에 의한 upgrade 시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가끔씩 ‘아는 마음과 대상’의 관계에 대해서 질문을 하는 것도 이와 같은 맥락으로 봐야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물어준들 그에 대한 答(답)은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즉 지켜보고 이해하는 힘이 부족한 관계로 인하여, 즉 체험이나 경험에 대한 법의 조사로 인한 정보나 자료수집이 충분히 갖추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찰이나 조사가 필요하고 필수적입니다. 필요/충분조건이 갖추어졌을 때 답이 드러나서 지혜가 말을 해주는 것입니다.
지금 현재의 대상을 그저 단지 알기만 하는 것에서 이제는 update 시켜서 upgrade 해야만이 보는 힘(정보&자료)을 얻을 수가 있습니다. 있는 사띠와 함께 ‘조사(고찰)’하라는 말이 그와 같은 맥락입니다.
실은, 아는 마음을 계속 알아가고 있다는 뜻은, 以前에는 알지 못했던 담마의 이치(어떻게-왜, 원인/결과)에 대해 이제는 알아두어야 할 것으로 아는데 있어서 더 자세하고 분명하게 알아가는 것들이 자꾸자꾸 생겨나도록 update해서 upgrade 시켜야 한다는 것이지, 보이는 것도 안 보이고, 아는 것도 안 생기고, 진전이 없다면 그에 따른 보상(이익)은 물론 분명하고 뚜렷한 답이 없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법칙입니다.
그냥 알고 넘기고, 알고 넘어가고 해서는 일어나는 대상으로부터 아는 것이 생기지 않아서 거기에 how-why, 원인/결과를 알 수도 없고, 알지도 못하기 때문에 보는 힘, 지켜볼 수 있는 힘이 증장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 어떤 답도 얻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해답은 지혜가 말해주는데 그것은 답을 얻을 수 있는 조건(알아차림의 가속도)과 그 원인(聞/思/修에 의한 정보&자료수집)들을 갖추어 놓았을 때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보는 힘이 좋아지고 더욱 지켜볼 수 있는 힘의 증장은 법의조사와 통찰적 이해가 필수적입니다. 여기에 적용하기 위해서 알아야 할 것들, 그 이치나 관계(how-why, 원인/결과)에 대하여 더욱 관심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켜야 하는 것이지, 일어나는 대상을 그냥 가볍게 알고 넘기고 알고 넘어가고 하는데 있어서는 그냥 단지 알기만 하는데 쓰이는 보통 사띠用이지 지혜를 계발하고 키우는, 보는 힘, 즉 지켜보면서 조사하고 이해력을 기르는 수행의 사띠에 적용되지 않습니다.
알아차림 스스로 update와 upgrade 되는 수행의 사띠用(있는 사띠)으로서의 아는 것을 계속해서 알아가야만 됩니다. 그럴려면 보는 마음이 어떻게 작용하는지에 더욱 포인트를 두고 관심 있게 봐야만 합니다. 일어나는 대상에 직시해서 그것과 보는 마음과의 관계(어떻게 하니 어떻게 되더라)를 더욱 관심 있고 흥미롭게 지켜보면서 조사하고 이해하는 차원에서 아는 마음과 함께 하는 것이라면 아주 적절하고 바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일어나는 것도 <왜-어떻게> 일어나며, 사라지는 것 또한 <왜-어떻게> 사라지는가를 알아둬야 합니다. 둘 다 그 이해(앎)의 정도&레벨에 따라 매우 다릅니다. 즉 힘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가장 힘 있는 것이 어떤 것인가도 알아야 합니다. 그 힘을 기르고 키우는 데는 바르고 올곧게 꾸준히 오랫동안 팔정도 길을 걷는데 달려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대상을 아는 것을 다시 아는 것, 수행의 사띠도 그냥 보통의 마음으로는 쉽게 이해되지 않습니다. 말이나 글로 설명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사띠가 이어지고 가속도가 붙어서 ‘있는 사띠’가 되면서 <Watching Mind Knowing Mind>의 관계를 지켜보면서 보는 힘이 좋아지게 되면 자연스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의심과 긴장이 일어나면 그냥 가볍게 알고 넘기고, 긴장을 풀고 다시 새로운 대상을 알아차림 합니다>..에서
의심과 긴장이 일어나면 그냥 가볍게 알고 넘기는 것에는, 그 ‘알고’의 아는 것이 보는 쪽에 지혜가 들어 있음으로서 모든 일어나는 대상에 대해 아주 깊게 이해를 했을 때 통찰지혜가 그렇게 볼 수 있는 문제입니다. 통찰지의 책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의심과 긴장에 대해서도.. 보통 사람들처럼 뭐다뭐다 명칭이나 이름, 언어적 고정관념(빤냐띠)에서부터 느낌(Vedana)으로 보거나, 마음(Citta) 작용(Cetasika)으로, 법(Paramattha)으로 볼 줄 아는 수행의 사띠로 키우고 전환해야 됩니다. 올바르게 사띠함으로서 바르게 보는 법의 점진적 단계가 필요/충분조건으로 갖추어져야 됩니다.
예를 들어 초등학교 때 구구단을 외우고, 중학교 때 인수분해를 배우고 익혀서, 고등학교 때 미적분을 할 수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단순히 초등시절 구구단에만 안주할 것 같으면 더 높은 수학의 길(과정)을 알 수 없을 것입니다.
보는 마음 쪽에서 알아차림의 가속도의 증장에 따라 보는 힘이 커지는데 그 길이 곧 두는 사띠(묻는 사띠), 있는 사띠, 되는 사띠, 아는 사띠, 앎을 놓치지 않는 사띠의 계발의 길(way)로 본다면, 보는 힘이 아주 강해서 그 자리에 통찰지가 들어앉아서 法으로서 일할 때 확실히 완전해질 것입니다. 바라밀의 完成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긴장도, 마음의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 아주 좋고 힘이 있습니다. 몸에서 일어난 긴장만 푸는 것 가지고는 수행에 있어서는 그리 적절하다거나 힘이 없습니다. 몸과 마음은 아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만은 사실입니다. 긴장이란 것도 마음이며 마음이 긴장을 합니다. 마음의 긴장감으로 인하여 몸에서 나타난 것을 알아차렸다면 한참 늦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을 봐야 하는 것이며 마음에서 긴장이 일어나는 순간 바로 직시하였다면 보는 힘이 强할 것 같으면 몸으로까지 이어지지 않습니다. 진정 긴장을 풀어주는 것이 몸에서가 아니라 마음에서 직관적 이해(지혜)로서 풀어주는 것이 가장 적합합니다.
이렇게 조사하고 이해해서 알아가야만이 더욱 넓고 깊게 보는 힘이 생기는 것입니다. 정견으로 확립됩니다. 이 길이 곧 통찰수행의 길이라고 하며, 위빠사나 지혜가 생겨서 빠라마타를 대상으로 더욱 넓고 강한 힘이 발휘되어 번뇌에 끄달리거나 반응하지 않게 됩니다.
현재 자신이 생각하고 있는 알아차림에만 머물거나 안주하지 말고 나날이 update 해서 upgrade 되어야 합니다. change up 시키고 변화를 주라는 것입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위빠사나, 알아차림 수행이란 알면 알수록 더욱 더 아는 것이 새록새록 생겨나고 증장되기 때문에 바르게 수행을 하고 있다면 以前에 알았던 것에서 머무를 수가 없으며 오늘의 아는 것에서 끝낼 수가 없습니다.
알면 알수록 통찰의 특성에 따라 아는 힘이 더욱 강해져서 그럴수록 뿌리 깊은 번뇌의 괴로움, 무명의 苦에서 벗어나 더욱 평정함의 자유를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괴로움을 알면 더욱 편안해지고 편안함을 알면 더욱더 편안해질 수 있습니다. 不善은 사라지고 善이 더욱 증장되기 때문입니다. 法界 가득 찬 四無量心이 그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래서 단지 알기만 해서는 안 되고 일어나는 대상으로 하여금 아는 것이 새록새록 생겨나도록 할 줄 아는 지혜를 도모해야만 됩니다. 그러므로서 보는 힘이 좋아지고 보다 넓고 깊게 이해하는 지혜(정견)로서 몸과 마음의 자연적인 성품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사야도 법문집: Awareness alone is not enough 내용 중 “알아차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단지 알아차리려고만 하는 것보다는 무슨 일이 진행되고 있는지 진정으로 이해하겠다는 의지를 갖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해하기 위해서 알아차림 수행을 합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지난 담마찌따또야 5월 경산법회 인터뷰 법문에서도 그냥 알기만 할 때와 지켜볼 때의 차이점에 대한 카페&밴드에 공유된바 있습니다. 타이틀: ‘알기만 할 때는 마음이 완전하게 만족하지 못할 때가 있거든요?’와 다음카페: ‘앎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를 다시한번 읽어보도록 권유합니다.
![](https://t1.daumcdn.net/cfile/cafe/9979AA4C5EDED2F71F)
_(2020년 6월 8일 한여름으로 치닫는 월요일 정오에.. 사사나 스님)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