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라와 엘림 출15:22-27
오늘 함께 나누는 말씀인 출 15장은 홍해를 건너서 승리의 노래를 부르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들이 소고를 치며 춤추며 여호와를 찬양했습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힘과 노력으로 홍해바다를 건너온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은혜로 건너왔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흘 길을 걸어왔는데 그들 앞에는 물을얻지 못했습니다. 유튜브에서 러시아 군인들이 우르과이랑 전쟁을 하는데 물을 먹지 못한 소련군사들이 항복을 손으로 표시하며 물을 달라고 애원을 하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러자 물병을 던져주고 따라오라고 유도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물은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죽고 사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목이 말라 하는 중에 이스라엘은 마라의 물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물은 쓴 물이어서 마실수 없는 물이었습니다.
‘마라’의 의미는 ‘쓰다, 괴롭다, 근심하다’ 이며 이것은 목이 마른데 써서 먹을 수 없으므로 너무 괴롭고 고통스럽고 물이 없는 일로 인해 근심했다는 것입니다. 또한 물을 찾을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물을 마시지 못한다는 것은 죽음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인생길에는 마라와 같은 힘들고 실망스러운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사흘전에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강대국 애굽을 떠나 홍해를 건넜고 그리고 쫓아오는 애굽군대를 바다속에 수장시켜 버린 일들을 잊어버리고 그들은 절망에 빠져 버렸습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했어도 오늘 힘들면 잊어버리고 환경을 바라보고 무기력한 자신을 바라보며, 하나님을 찬미하던 입술이 이제는 원망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러한 쓴 경험들이 많아지게 되면 원망의 사람, 절망의 사람이 되어 버립니다. 죄가 우리 인생을 포로로 잡아 갑니다. 이것을 끊어 내려면 우리는 하나님을 찾아야 하고 무릎을 꿇어야 합니다.
시42:5절을 보면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 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자신들은 어떻습니까?
다시 23절을 보면 “마라에 이르렀더니 그 곳 물이 써서 마시지 못하겠으므로 그 이름을 마라라 하였더라” 그들이 도착하여 보니 물이 있는데 써서 먹을 수 없다는 것은 본래부터 쓴 물이었을까요? 아니면 쓴물로 변하게 요인이 있었을까요? 잘 알수는 없지만 현재 이 물은 써서 먹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물은 마시면 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마라라 했습니다.
왕하2장에도 보면 그곳 주민들이 엘리사에게 찾아와 물이 써서 먹을수 없고 열매도 떨어진다고 했습니다. 광야의 물은 소금기가 함유된 쓴 물이었고, 이것은 생명의 물이 아니라 오히려 죽음의 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흘만에 물을 발견했는데, 그 물이 죽음의 물이라니!
25절을 보면 하나님이 그들을 시험하신 것이라 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이 그들을 가르치시는 하나의 방편이라 보여지기도 합니다. 고통의 문제는 참으로 난해한 문제지만, 성경은 고난을 하나님의 섭리라는 특별한 안경을 통해 보여주십니다. 기적을 체험했다고 고난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에서 고통이란 피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마라의 쓴 물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가르치시는 방법인 것입니다. 모세에게 이끌려 애굽에서 탈출은 했지만 그들은 하나님이 누구신지, 어떻게 하나님을 의지하고 살 것인지 아직 모릅니다. 400년 노예 생활에 길들여져 있는 이 백성에게 하나님은 마라의 쓴 물, 고통으로, “거기서” 그들을 가르치십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믿고 율례를 따라 순종할 때, 하나님은 애굽에 내린 심판을 내리지 않고 그들을 하나님 백성으로 삼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러므로 마라의 쓴 물은 인생들이 하나님께 가르침을 받기에 가장 적합한 자리입니다. 고난이 없다면 인생은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합니다. 그래서 역설적이지만, 고통이 축복입니다. 시 119:71절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우리는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그 사랑을 깨닫게 되고,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는 법을 온전히 배우게 됩니다.
다시 25절을 보면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모세가 부르짖었다고 말씀합니다. ‘부르짖었다’‘와이츠아크’는 ‘괴롭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울부짖었다’ 즉 기도했다는 말씀입니다.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기도라고 하십니다. 불평불만으로 가득한 백성들과 반대로 모세는 기도했습니다. 하나님은 그기도를 들으시고 기적을 보여 주셨습니다.
수10:12-14절에는 여호수아가 기도하여 태양을 멈추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왕상18:41-46절에 엘리야의 기도로 비를 멈추게 하였고 그의 기도로 비를 오게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가하면 왕하 20:1-11절에는 히스기야가 기도로 자신의 생명을 15년연장을 했고 태양을 뒤로 15도나 뒤로 물러나게 했습니다. 그 밖에도 여러 기적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약5:13-18절에 말씀하시기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지만 기도할 때 놀라운 역사가 일어났던 것처럼 믿음의 기도는 병을 낫게도 하고 죄사함도 얻게 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기도해야 합니다. 시107:19-20절에 말씀하시기를 “이에 그들이 그들의 고통 때문에 여호와께 부르짖으매 그가 그들의 고통에서 그들을 구원하시되 그가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도다” 요15:7절“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아멘.
그러자 하나님이 응답을 주셨습니다.
‘한 나무를 가리키시니 그가 물에 던지니 물이 달게 되었더라’ 하나님은 모세에게 한 나무를 가리키시고, 모세는 그 나무를 쓴물에 던져넣으니까 쓴물이 달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마라의 쓴 물이 단물로 변화된 것은 친히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입니다. 그러므로 나무 자체에 쓴 물을 달게 하는 어떤 효능이 있었다기보다는 모세의 순종의 믿음을 통해 이 나무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는 기적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한 나무를 가키신 것은 만국을 치료하며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생명나무이자 십자가를 예표한 것입니다. 계시록에 보면, 생명나무가 4번이 사용되었는데, 이기는 자, 믿음의 승리자들에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였고, 만국을 치료하는데 사용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우리도 인생의 쓴물 앞에 놓여 있다면, 원망하지 말고, 탓하지 말고 부르짖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곳에, 기도하는 사람에게 기적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쓴물과 같은 우리의 인생을 단물과 같은 인생으로 바꿔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삶이 고달프고 힘들고 쓴물과 같을 때가 있을지라도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가운데 찾아오시고,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게 되면, 기적의 인생이 되는 것입니다. 아멘.
25-27절을 보면 하나님은 쓴물을 단물이 되게 하신 마라 지역에서 백성들을 위하여 법도와 규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셨는데, 시험의 내용은 여호와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고 의를 행하며 계명과 모든 규례를 지키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중 하나라도 내리지 않게 하시겠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시험은 유혹이 아니라 테스트, 평가의 의미인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계명과 규례를 지키느냐 지키지 않느냐를 시험하신 것이고, 지켜서 시험을 통과하면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 중 하나도 내리지 않을 것인데, 그것은 하나님은 그들을 치료하는 여호와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치료하는’이란 말은 ‘라파라는 단어로, 의사, 의원’이란 뜻입니다. 하나님 여호와께서는 우리의 질병을 근원적으로 치료해주시는 진정한 의사요, 의원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도 의원이셨습니다. 실제로 병들고 아픈 사람들은 수도 없이 고쳐주셨습니다. 이스라엘 전국에 몰려온 병든자를 치료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육체적인 치료자만 되시는 것이 아니라 영혼의 치료자, 우리의 마음과 인격도 치료해주시는 전인적 치료자이십니다.
막 2:17절, “건강한 자에게는 의사가 쓸 데 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치료를 받은 사람은 엘림에 이르게 되고 풍족한 은혜와 쉼을 얻게 될 것입니다. 아멘.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쓴물을 경험한 마라지역을 떠나 엘림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엔 물샘 열둘과 종려나무 일흔 그루가 있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물샘 열둘 곁에 장막을 치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쓴물을 맛보고 하나님의 기적과 치료를 경험하면, 풍족한 물샘과 쉼터가 있는 엘림에 도착하게 된다는 것을 암시해주고 있습니다.
‘엘림’은 큰 나무라는 뜻입니다 엘림은 샘물 12개와 종려나무 70주가 있는 비옥한 오아시스인데 이는 완전수인 70(7*10)이 상징하듯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완전한 휴식처와 안식처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광야와같은 이세상에서 엘림과 같은 오아시스를 만들어 우리를 쉬게 하십니다.
마치려합니다.
오늘 내가 있는 곳이 마라든지, 엘림이든지 하나님이 주신 곳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고치며 살아가되 영원을 사모하며 기쁨과 소망으로 걸어가실수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의정부 등대지기 하늘산소.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