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 5. 19. 주일예배설교
로마서 8장 23~27절
우리의 소망은 무엇이며, 어떠한가?
■ 어떤 일에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좋은 태도입니다. 긍정적인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신 승리의 측면에서 갖는 소망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보유한 주식이 오를 것이라는 소망은 대개가 자조적입니다. 소위, ‘소망 회로/행복 회로’를 돌리는 자기 위로가 크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소망은 긍정성과 부정성을 동시에 갖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소망의 불필요성이나 부정성을 강조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특히 신앙인의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신앙생활에서, 소망은 이것의 부정성과 긍정성에 상관없이 반드시 지녀야 할 매우 중요한 태도이기 때문입니다. 신앙 자체가 소망에 기인한 것이니 오히려 소망을 갖는 것이 신앙적입니다. 더욱이 상황이 부정적일수록 소망을 갖는 것이 오히려 신앙적입니다.
그러므로 신앙인인 우리는 소망을 부정적으로 비꼬는 말에 휘둘릴 필요가 없습니다. 소망 회로를 돌리는 자조적 태도에도 휘말릴 필요가 없습니다. 소망에 대한 우리의 입장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소망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무엇인가요? 우리는 왜 소망을 가져야 할까요? 그리고 우리가 말하는 소망은 무엇일까요? 오늘 본문에서 살펴보겠습니다.
■ 일반적으로, ‘소망’은, ‘어떤 일을 바라는 것’을 일컫습니다. 무엇이 되기를 바라고, 무엇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 소망입니다. 그러나 기대와는 달리, 소망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 있습니다. 확률적으로, 안 될 가능성과 될 가능성은 늘 반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대개가 소망을 불안을 안은 기대감으로 이해합니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있어 ‘소망’은 이런 이해와 입장과는 전혀 다릅니다. 우리의 소망에는 그 어떤 불안도 없기 때문입니다. 안 될 이유가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반드시 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우리의 소망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23~24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우리의 소망이 무엇인가요? 그렇습니다. ‘구원’이고 ‘속량’입니다. 물론 이미 구원받았고, 속량을 약속받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이 땅에 있는 한, 아직은 완성이 아니기에,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완전한 구원의 날과 우리의 몸이 완전한 해방을 맞는 속량의 날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소망은 보이는 소망이 아닙니다. 물질과 현세에 기대를 둔 소망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소망은 세상에 기대하는 소망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소망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소망에는 불안이 있을 이유가 없습니다.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신 하나님의 약속에 기댄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단지 우리가 몸담은 세상이 불안할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악한 세력들이 불안을 조장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의 소망을 흔들기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 대개 고난이라는 것으로 공격해 옵니다. 17절로 거슬러 가보겠습니다. “자녀이면 또한 상속자 곧 하나님의 상속자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상속자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할 것이니라.”
우리가 장차 받을 영광은 앞서 말한 구원과 속량입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구원의 날과 우리의 몸이 해방을 맞는 속량의 날을 맞는 영광입니다. 바로 이 영광에 이르지 못하도록 악한 세력들이 방해하는데, 그 수단이 고난입니다. 이 고난이 우리의 상황을 불안으로 만들곤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소망이 불안한 것은 아닙니다. 상황이 불안한 것이지, 우리의 소망은 하나님의 견고한 약속 가운데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혹시나 고난이라는 상황으로 불안해할지 모를 우리를 위해 하나님은 세심한 준비를 해놓으셨습니다. 성령님의 돌보심입니다. 26~27절입니다.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예상할 수 있는 우리의 연약함에 대비해, 하나님은 성령님의 돌보심을 준비해 놓으셨습니다. 이는 우리가 소망하는 것이 불안한 것이 아니라, 소망하는 우리가 불안하기 때문입니다. 소망하는 것은 완전한데, 소망하는 우리는 연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연약함이 소망을 놓치거나 당황할 때마다, 성령님은 우리를 붙잡아 주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 직접 기도해 주십니다. 더욱이 기도를 멈추고 쩔쩔매고 있을 때, 더욱 기도해 주십니다. 깊은 안타까움으로 대신 기도해 주십니다.
■ 혹시 이 사실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시는지요? 놀랍게도, 우리를 대신해서 기도하신다는 것의 의미는 성령님은 철저히 우리 편이시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 편이 아니시다는 것입니다.
놀랍기도 하고 당황스럽기도 하시죠? 그러나 놀라움과 당황을 거두셔도 되는 이유는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확히 아신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도대체 모순 같아 보이는 이 사실은 무슨 의미일까요? 28절로 가보겠습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모순 같아 보이는 이 사실의 의미는 하나님의 선입니다. 고난으로 인해, 우리가 불안하고 속상한 마음을 갖고 헤매는 혼란스러운 행동을 할 때, 성령님은 철저하게 우리 편에서 기도해 주십니다. 그래서 마치 하나님의 뜻을 위배하는 기도 행위인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성령님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입니다.
성령님은 하나님이 모든 것을 하나님의 선으로 만들어 내신다는 사실을 정확히 알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 편에서 친히 간구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이를 성령님의 이중성으로 읽을 이유는 없습니다. 하나님도 성령님의 태도를 정확히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소망을 붙잡고 있는 한, 그 어떤 상황도 불안해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 상황, 심지어 고난이라는 상황을 어떻게 선으로 만들어 가시는지를 현장경험 하게 되는 은혜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참으로 신나는 일이지 않겠습니까? 이렇게 말씀드리니 제가 철없어 보이시죠? 그러나 이것이 철든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붙잡고 있는 소망은 불안의 상황 속에서도 흔들릴 이유가 없습니다. 단지 한 가지 태도는 수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25절입니다.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수고해야 할 한 가지 태도는 “참음으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래야 하는 이유는 분명합니다. 우리의 소망이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가시적이고, 현세적이라면, 참음의 강도가 낮아도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육신의 눈으로는 전혀 볼 수 없는, 오롯이 믿음으로만 소망하는 하나님 나라의 구원과 속량이기 때문에, 참고 기다림의 강도가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힘든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우리를 위해 늘 기도하시는 성령님, 심지어는 대신해서 기도하시는 성령님, 우리의 현재를 탄식하시며 기도하시는 성령님이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힘듦은 전적으로 거저먹기일 수도 있습니다. 말이 좀 거친가요?
분명한 것은, 우리를 위하시는 성령님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면, 우리의 모든 것이 너무도 쉬워집니다. 우리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수록 문제는 더 꼬이고, 더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정확히 알고 계시는 성령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면, 문제는 전혀 어렵지 않게 풀립니다. 삶과 역사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하나님의 구원과 속량의 약속을 소망하면, 삶은 행복 그 자체가 됩니다. 누리시기만 하면 됩니다.
■ 삼위일체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매우 정교한 구원의 삶을 선물로 주셨습니다. 참으로 감사한 일입니다. 그러나 이를 누리는 것은 전적으로 우리의 몫입니다. 그것은 참고 기다림으로 소망할 때입니다.
그런데 이 참고 기다림이 가능하도록 은혜의 장치를 하셨는데, 성령님의 돌보심입니다. 보혜사로서 늘 내 곁에서 늘 내 편이 돼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에게 간곡히 권면합니다. 성령님과 친해지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의 복음과 함께, 그리고 하나님의 지혜와 함께, 성령님의 이끄심과 친해지시길 바랍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 가운데 계신 성령님의 이끄심으로 인해 자신의 모든 문제들이 풀어지는 은혜를 매번 입으시길 바랍니다. 참으로 성령님은 내 소망의 견인차(牽引車)이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