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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부역·독재비호 사법부 수장들, ‘또 하나의 가족’
신학림
2018년 08월 24일 19시 22분
취재: 신학림 전문위원, 박중석
데이터: 최윤원, 임송이
을사5적은 모두 판사 출신
오는 29일이면 일제(日帝)에 나라를 빼앗긴 ‘경술국치(庚戌國恥)’ 108주년이 된다.
나라를 ‘완전히’ 빼앗긴 것은 1910년 8월 29일이지만, 1905년 11월 17일 일제가 이른바 ‘보호’라는 단어를 삽입한 이름의 ‘을사(乙巳)조약’을 체결할 때부터 이미 국권을 상실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일제가 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글자 그대로 ‘통치하고 감독’하는 통감(統監)을 파견함으로써 나라 안팎을 완벽하게 장악했기 때문이다.
1) 제국주의 일본에 나라를 팔아먹은 ‘을사5적’은 모두 판사 출신들이었다.
학부대신 이완용(李完用: 1858.07.17.-1926.02.12.)은 전라북도와 평안남도 재판소 판사 출신이었고, 외부대신 박제순(朴齊純: 1858.12.07.-1916.06.20.)은 평리원(平理院: 1899년 5월부터 1907년 12월까지 존치되었던 최고법원; 현재의 대법원) 재판장서리, 군부대신 이근택(李根澤: 1865.09.30.-1919.12.16.)은 평리원 재판장(현재의 대법원장),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 1870.10.23.-1928.06.28.)은 평리원 재판장과 법부대신, 농상공부대신 권중현(權重顯: 1854.11.27.-1934.03.19.)도 평리원 재판장서리를 각각 지냈다. 을사5적 중 이완용을 제외한 나머지 네 명 모두가 요즘의 대법원격인 평리원의 재판장 혹은 재판장 서리를 지낸 것이다.
이들은 역시 판사 출신인 참정대신 한규설(韓圭卨: 1856-1930) 등의 반대에도 아랑곳 않고 을사조약에 찬성함으로써 스스로 매국노의 길을 택한 것이다. (참고: 사건으로 본 법조 100년; 김이조 지음; 2005)
2) 그로부터 100여 년, 양승태(梁承泰·70) 대법원장 시절 대법원과 법원행정처가 저지른 헌법과 사법질서 파괴 행위는 그 끝이 어딜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우리를 분노하게 만들고 있다. 법조인의 역할과 역사적 사명이 가진 무게를 새삼 되짚어 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든다.
3)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려 해도 세 가지 필요조건이 있다. 사람, 돈, 조직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이 세 가지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어떤 제도든 그것을 운영하는 주체는 결국 사람이다. 아무리 좋은 제도와 조직이라도 운영을 잘못하면 원래 취지나 목적을 살릴 수 없거나, 경우에 따라 목적에 정반대 방향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4) 흔히 “법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고 말한다. 우리 사회는 과연 그런가? 얼마 전 작고한 정의당의 노회찬 국회의원은 “딱 만 명만 법 앞에서 평등하다”고 우리의 처참한 사법 현실을 날카롭게 꼬집었다.
5) 네트워크 과학 연구자들에 따르면, 전 지구 60억 인구도 6단계(사람)만 걸치면 연결된다고 한다. 이른바 여섯 단계 분리(the six degrees of separation)론이다. 10여 년 전 중앙일보와 연세대 사회발전연구소의 공동연구조사 결과에 따르면, 한국인 5천만 명은 3.6 단계만 거치면 다 연결(알게) 된다고 한다. 그런데, 우리나라 언론계나 법조계 등 특정 분야의 경우는 어떨까? 자세히 조사해 봐야겠지만, 두 단계도 아니고 한 단계, 한 사람만 거치면 대부분 아는 사람이 아닐까?
위에 나열한 다섯 가지 사실들은 서로 동떨어진 것이 아니라 서로 연결돼 있어 오늘날에도 우리의 사법질서를 지배 또는 왜곡하거나, 보통 사람들의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런 관점에서 지난 100년 동안 이 나라를 지배해 온 세력의 중심에 서 있던 대법원장과 대법관들이 맺은 혼맥을 통해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또 하나의 거대한 가족”을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다.
民國 100년 특별기획, “누가 이 나라를 지배하는가” 인터렉티브 페이지 링크
양승태 대법원장과 사돈 맺은 김승규 법무장관·국정원장, 장인은 김익보 전 서울고검 검사
재판 거래와 탄핵심판 개입 의혹 등으로 국민적 비난을 받고 있는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대법관으로 재직하던 2005년 노무현 정부 때 법무장관과 국정원장을 지낸 김승규씨와 사돈을 맺어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차녀 양소임(41) 씨와 김승규 전 법무장관의 3남 김수현(42) 씨는 같은 교회를 다니다 알게 돼 오랫동안 교제 끝에 2005년 3월 25일 서울 서초구 양재동 횃불선교센터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과 김승규 전 법무장관은 사법고시 12회 동기로, 같은 지역에서 판사와 검사로 여러 차례 같이 근무한 적이 있다.
김승규 전 국정원장의 장인은 서울고검 검사를 지낸 김익보(金翊寶: 1916-2002) 전 변호사다. 김 전 국정원장의 처제 김희자(金熙子·64) 씨는 총신대 종교교육과 교수이고, 남편 장용호(張龍虎·68) 씨는 서강대 언론대학원장을 지냈다. 장용호-김희자 부부교수의 차남 장대현(33) 씨는 미술작가로 2015년 사랑의교회 ‘사랑아트갤러리’에서 ‘하나님의 창조세계’ 작품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광양군 교육위원을 지낸 김응선 씨의 5남 3녀 중 5남으로 태어난 김승규 전 법무장관의 넷째형 김명규(76) 씨는 고향인 전남 광양에서 14-15대 국회의원을, 2000-2003년 한국가스공사 사장을 지냈다. 김명규-승규 형제의 조카들 중에서 한국가스공사를 다니고 있는 사람이 두 명 있다.
고재호 대법관·변협 회장, 동생·조카·사위 등 고위직 법조인 수두룩
고재호(高在鎬: 1913-1991) 전 대법관·대한변협 회장은 해방 후 법조인으로서 활동은 비교적 높은 평가를 받았으나, 일제 때 판사를 지낸 경력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다. 그의 13대조 할아버지 제봉(霽峯)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두 아들과 함께 전장에 나가 목숨을 바친 것으로 유명하다. 고경명 선생은 60세의 나이에 6천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전북 금산(지금은 충남 금산)에 진입한 왜군과 싸우다 둘째 아들 학봉(鶴峯) 고인후(高仁厚: 1561-1592)와 함께 장렬하게 전사했다. 고경명의 장남 준봉(隼峯) 고종후(高從厚: 1554-1593)는 임진왜란 발발 이듬해 진주 전투에서 전사했다.
학봉 고인후의 후손들은 전남 담양군 창평면 일대에 300여 가구가 집성촌을 이루어 살고 있다. 담양군 창평면 일대에 살고 있는 제주 고(高)씨들은 별도로 창평 고씨, 혹은 장택(長澤) 고씨라 부르기도 한다. 고재호 대법관의 족친(族親) 중 창평에서 사립학교인 창흥의숙(昌興義塾: 나중에 창평보통학교가 됨)을 설립한 사람이 바로 부통령을 지낸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의 장인 고정주(高鼎柱: 1863-1933) 규장각(奎章閣) 직각(直閣: 요즘의 서울대 도서관장)이다.
고정주는 창흥의숙과 별도로 영학숙(英學塾)이라는 기숙학교를 설립했다. 고하(古下) 송진우(宋鎭禹: 1887-1945), 근촌(芹村) 백관수(白寬洙: 1889-1961; 김연준 한양대 설립자의 장인), 인촌 김성수, 가인(佳人) 김병로(金炳魯: 1888-1964) 등이 이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공부하기도 했다. 이런 인연으로 창평 고씨 가문은 김성수 본인과 후손들, 그리고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 자손들과 통혼을 통해 깊은 혈연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런 환경 탓인지, 고정주와 동생 고하주(高廈柱: 1872-1932) 후손들 중에서도 고위 법조인들이 눈에 많이 띤다.
고재호 대법관의 둘째사위가 최종영(崔鍾泳·79) 전 대법원장이다. 최종영 전 대법원장 부인 고수경 씨는 최종영의 사촌 처남인 고중석(高重錫: 81) 헌법재판소 재판관의 소개로 만났다고 한다. 당시 고 재판관과 그는 같은 판사실에서 근무하던 동료 법관이었다. 특허법원장을 지내고 법부법인 우면 고문변호사로 있는 곽동효(郭東曉·72) 변호사는 최종영 전 대법원장과 동서지간이고, 법원행정처 법정국장과 서울고법 수석부장판사를 지낸 홍성무 법무법인 동인 대표변호사는 사촌동서다.
최종영 전 대법원장의 두 사위가 판사를 지낸 나상용(羅相庸·49) 변호사와 호제훈(扈帝熏) 판사다. 고재호의 형(高在宣)의 차남 고중석(高重錫: 81)은 헌법재판관을 지냈고, 고재호의 바로 밑에 동생 고재량(高在亮: 1922-2000)은 광주고등법원 부장판사를 지냈고, 그 밑의 동생 고재청(高在淸·90)은 국회의원(9-12대)과 국회부의장을 지내기도 했다.
인촌 김성수의 장인 고정주의 차남 고광준(高光駿: 1882-1950)의 장남이 고재욱(高在旭: 1903-1976) 전 동아일보 사장이고, 고재욱의 여동생 고귀현(高貴賢)이 초대 대법원장 김병로의 맏며느리다. 고정주의 동생 고하주의 장남 고광표(高光表: 1908-1997)는 동아일보 감사 등을 지냈고, 고광표의 둘째사위는 윤일영(尹一泳·85) 전 대법관이다.
인촌 김성수 가문은 증손자이자 동아일보 2대 주주인 김재열(金載烈·50) 제일기획 사장을 통해 이병철·홍진기 가문과도 연결된다. 한국빙상경기연맹 회장으로 소치 동계올림픽 한국선수단장을 맡은 바 있는 김재열의 장인이 이건희(76) 삼성전자 회장이고, 이 회장의 부인 홍라희(73) 여사는 홍석현 중앙일보 회장의 누나이고, 부친은 법무장관과 내무장관을 거쳐 동양방송(TBC)과 중앙일보 회장 등을 지낸 홍진기(洪璡基: 1917-1986) 씨다. 홍석현의 장인은 초대 중앙정보부(현재의 국가정보원) 차장(2인자)을 거쳐 검찰총장(1963.12-1971.06: 7년6개월), 법무부장관(1971.06-1973.12: 2년6개월), 중앙정보부장(1973.12-1976.12: 3년)을 차례로 지낸 신직수(申稷秀: 1927-2001) 씨다.
대선에 두 차례 패배한 이회창 전 대법관과 처가도 법조인 많아
이회창(李會昌·83) 전 대법관·감사원장·국무총리는 친가, 외가, 처가 모두 법조인과 정치인 가족으로 유명하다. 우선 부친 이홍규(李弘圭: 1905-2002) 옹은 일제 때 변호사를 지냈고 해방 후 대검찰청 검사를 지냈다. 이회창 전 대법관의 사위는 서울지검 검사를 지낸 최명석(崔明錫·56) 김앤장 변호사이고 최 변호사의 이모부가 노태우 대통령의 청와대에서 사정수석비서관 광주고검장을 지낸 김유후(金有厚·77) 변호사다. 김유후 변호사의 손윗동서 최기선(崔基先·80) 씨의 아들이 최명석 변호사다. 김유후 변호사의 부친 김형근(金亨根: 1915-1993)은 일제 때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를 합격하여 판사로 일하다, 정부 수립 후 이승만 대통령 비서관을 거쳐 서울지검장과 내무부장관을 지냈다. 김형근 장관의 둘째형 김광근(金光根: 1903-1947)도 일제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판사를 지내다 해방 후 변호사로 활동했다. 김광근·김형근 두 형제는 친일인명사전에 나란히 올라 있다. 그 부친 김윤면(金潤冕: 1876-1947.02.02.)은 일제 때 종로 1가에서 무명을 파는 백목전(白木廛)으로 돈을 번 거상(巨商)으로, 1920년 당시 개인 기업으로는 세 번째 고액납세자였다고 한다.
이회창 전 대법관의 장인과 처남은 부자(父子)가 모두 서울고등법원장을 지낸 것으로 유명하다. 장인 한성수(韓聖壽: 1910-1988)는 일제 때 경성사범학교를 나와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해방 후 법원행정처장, 대법관 두 차례와 9대 서울고등법원장을 지냈다. 그의 장남 한대현(韓大鉉·77) 변호사는 경기고·서울법대를 졸업하고 고등고시(15회)에 합격, 인천지방법원장, 서울형사지방법원장, 대전고등법원장을 거쳐 28대 서울고등법원장과 헌법재판소 재판관을 지냈다. 한대현 변호사의 동서가 김홍엽(金弘燁·64) 전 서울지법 동부지원 부장판사다. 한대현 변호사의 두 아들 한정수(韓政洙), 한지수(韓知洙) 변호사도 각각 법무법인 율촌과 광장에서 일하고 있어 3대가 법조인 가족을 이루고 있다.
한대현 변호사의 장인은 서울지검장을 지낸 고 서주연(徐柱演) 변호사이고, 서 변호사의 숙부가 서순영(徐淳永: 1900-1983) 전 판사다. 서순영 전 판사는 제헌의원과 반민특위 재판장을 지내기도 했다. 서순영의 장남 서주성(徐柱成)의 차남 서석희(徐奭熙·62) 변호사는 공정거래위원회 등에서 근무하다 지금은 법무법인 충정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서 변호사의 6촌 서창희(徐昌熙·55) 변호사는 대구지검 상주지청장과 서울고검 검사를 거쳐, 현재는 법무법인 광장에서 일하고 있다. 서창희 변호사의 외삼촌이 정해창(丁海昌·81) 전 법무부장관이다.
이회창의 장남 이정연(李正淵)씨의 장인은 이봉서(李鳳瑞·82) 전 동력자원부장관이고, 이 장관의 부친은 상업은행장과 산업은행 총재를 지낸 이필석(李珌奭: 1914-2000) 씨다. 이회창 씨가 세 번째 대선 도전인 2007년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자유선진당을 창당했을 때 당사를 구하지 못해 애를 먹었는데, 결국 사돈 이봉서 가족이 소유하고 있는 남대문 근처 빌딩에 당사를 차리기도 했다.
한편, 이회창의 외삼촌 3형제 김홍용(金洪鏞: 1902-1950; 2대 국회의원)·김문용(金汶鏞; 1916-1995; 2대 국회의원)·김성용(金星鏞: 1918-1999; 6-7대, 9대 국회의원)은 모두가 국회의원을 지낸 보기 드문 가족이다.
일제 때 판사 출신 대법원장(직무대행 포함) 5명 친일인명사전에 등재
일제 때 판사를 지내다 정부 수립 후 대법원장을 지낸 사람은 네 사람이다. 초대 대법원장 가인(街人) 김병로(金炳魯: 1888-1964), 2대 조용순(趙容淳: 1898.-1975), 3-4대 조진만(趙鎭滿: 1903.-1979), 5-6대 민복기(閔復基: 1913-2007) 등이다.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을 제외한, 나머지 세 대법원장은 민족문제연구소가 펴낸 친일인명사전에 친일파로 등재돼 있다.
이승만 대통령이 함부로 대하지 못했던 김병로 초대 대법원장이 1957년 12월 물러나자, 김두일(金斗一: 1898-?) 수석대법관과 김갑수(金甲洙: 1912-1995) 수석대법관이 차례로 잠시 대법원장 직무대리를 맡는다.
5대 민의원과 전두환의 5공화국 때 신정당과 신정사회당 대표를 지내기도 했던 김갑수 대법관 가문도 주로 법조인으로 구성돼 있다. 우선 그의 부친 김종근(金鍾根: 1894-?)도 일제 때 변호사를 거쳐 제4-5대 대한변호사협회 회장을 지낸 법조인이다. 김갑수의 5촌 당숙 김종진(金鍾振: 1895-1936)도 일제 때 판사와 변호사로 활동했고, 막내 숙부인 김종열(金鍾烈: 1901-1985)도 조선변호사시험에 합격하여 대전지법에서 판사를 지내다 2대 국회의원(1950)까지 지냈다. 김종열 변호사의 셋째아들이 김지수(金智洙: 1937-2013) 전 한국외국어대 법대 학장이다.
김갑수 대법관의 처남 이재수(李在洙: 1931-1985)는 고등고시 8회로 서울지법 판사를 지냈고, 매제 김홍수(金洪洙: 1923-1997)는 서울지검 부장검사를 거쳐 대한변협 회장(36대: 1991-1993)을 지내기도 했다. 김갑수 대법관의 외사촌 동생 권태홍(權泰弘: 1920-1997)은 서울고법 판사와 서울제1변호사회 회장을 역임했고, 그의 차남 권영호(권영호·74)의 장남 권오성(權五晟·45)도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김갑수 직무대행에 이어 조용순(趙容淳: 1898-1975) 2대 대법원장이 취임한다. 이 때부터 이승만 대통령의 사법부에 대한 간섭이 노골화된다. 대법원장에 취임하기 4년 전 조용순은 중앙선거관리위원장과 법무부장관도 지냈다.
2대 조용순 대법원장, 이승만 대통령 노골적 개입에 무기력
조용순 대법원장 재임 때 중석불(重石弗) 사건을 담당한 안윤출(安潤出) 대구지법 부장판사, 이승만 대통령이 감시하러 보낸 현역 육군 장교를 권총으로 살해한 서민호(徐民濠) 의원 사건을 맡은 순천지원장 노병건(魯炳健) 부장판사, 진보당 사건의 재판장이던 류병진(柳秉震) 서울지법 부장판사 등이 정부의 의도와 다른 판결을 내렸다는 이유로 10년 후 판사 재임용에서 탈락되는 일이 벌어졌다. 이에 항의해 서울지법 윤학로(尹學老) 부장판사는 재임용(연임) 신청을 하지 않고 판사직을 던져 파문이 일기도 했다. 배정현, 고재호 대법관은 당시 홍진기 법무장관에 항의하기도 했으나, 조용순 대법원장은 사법부 독립을 제대로 지키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조용순 대법원장은 넷째 아들(조덕규·78)을 통해 임항준(任恒準: 1919-2008) 대법관과 사돈이 된다. 건설부차관보와 건설공제조합 이사장을 지낸 조덕규는 임항준 대법관의 차녀(임선영·71)와 결혼했다. 조용순 대법원장의 4남 중 장남은 서울대 총장과 교육부장관을 지낸 조완규(趙完圭·90) 전 방송문화진흥회(서울 MBC 주식을 70% 보유한 1대주주) 이사장이다. 조 전 장관은 광주과학기술원과 한국과학기술 한림원 이사장도 각각 지냈다. 조완규 전 장관의 사위는 2016년 5월부터 박근혜 대통령의 주치의를 지낸 윤병우(尹炳宇·63) 서울대 의대 신경과 교수다.
사돈인 조용순 대법원장과 함께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임항준 대법관은 4명의 딸 중 두 명을 법조인과 결혼시켰다. 맏사위 김헌무(金憲武·78) 변호사는 청주·수원·대구·전주 지방법원장을 지내고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고, ‘헌법을 생각하는 변호사모임’의 회원이다. 임항준 대법관의 넷째 사위가 대검찰청 수사기획관, 서울중앙지검 1차장, 수원지검 성남지청장 등을 차례로 지낸 박만(朴滿·67) 법무법인 여명 대표변호사다. 박만 변호사는 2007년 KBS 이사를 거쳐, 2011년 5월부터 3년 동안 방송통신심의위원회 위원장도 지냈다. 박만 변호사가 방송통신심의위원장을 지낼 당시 이명박·박근혜 정권은 KBS와 MBC 등 공영방송에 노골적으로 개입하거나 통제해 현업 언론인들로부터 엄청난 저항에 부닥치기도 했다.
3-4대 대법원장을 지낸 조진만(趙鎭滿: 1903-1979) 전 법무부장관(5대)은 세 아들 중 두 아들이 판사 출신 변호사다. 작고한 차남 조언(趙彦: 1935.-2010) 변호사는 서울고법 부장판사와 사법연수원장을 지냈다. 셋째아들 조윤(趙胤·80) 법무법인 춘추 변호사는 서울서부지원장을 지냈다. 조언 전 변호사는 서울고법 부장판사에 재직할 당시 김영삼 신민당 총재 제명 사건을 담당하기도 했다.
김익진 대법관·검찰총장 가문, 최초의 여성 사법시험 합격자 이태영 변호사와 사돈
김익진(金翼鎭: 1897-1970) 대법관 가문도 쟁쟁한 법조인 가족을 이룬다. 김익진 검찰총장은 일제 때 특임시험에 합격하여 1920년부터 평양지법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해 1945년 평양에서 조만식 선생의 (반공)투쟁을 돕다가, 그해 월남하여 정부 수립 후 대법관으로 활동하다 1949년 6월 2대 검찰총장으로 부임한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보름 전인 1950년 6월 12일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고검 서상환 검사장을 3대 검찰총장에 임명하고, 김익진 검찰총장을 서울고검장으로 강등시키는 이상한 인사를 단행한다. 이우익(李愚益) 대구고검장이 권승렬(權承烈) 법무장관의 후임으로 법무장관이 된 지 한 달 만의 일이었다. 한마디로 김익진 검찰총장 시절 경찰이 잡아 송치한 좌익분자들을 검찰이 증거 불충분을 들어 풀어준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에 이승만 대통령의 눈 밖에 났던 것이다.
김익진 검찰총장이 이승만 대통령의 눈 밖에 난 보다 직접적인 이유는 당시 김태선(金泰善) 수도관구경찰청장(현재의 서울경찰청장)이 총애하는 노덕술(盧德述)을 반민특위에서 체포하려하자 김태선 청장이 노덕술을 비호하고 체포를 방해하자 김익진 검찰총장이 김태선 청장을 범인은닉 혐의로 입건해 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린 것이다. 김익진 검찰총장은 강등 인사발령에도 아랑곳 않고, 검사를 정치적 압력으로 몰아낼 수 있다는 선례를 남기지 않겠다며 서울고검장에 취임한다.
2년 뒤인 1952년 6월 25일 부산시 충무로 광장에서 6·25 2주년 기념식 도중 이승만 대통령 저격 미수 사건이 벌어지자 서울에 있던 김익진 서울고검장은 당시 범인 김시현(金始顯) 국회의원과 알고 지냈다는 이유로 검찰이 구속영장을 청구하고 법원이 발부하여 구속되는 바람에 세상이 깜짝 놀라는 일이 벌어진다. 결국 법원에서 1심 법원, 항소심과 대법원에서 모두 무죄를 받았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정치보복에 얼마나 집요했는지 보여주는 생생한 사례가 아닐 수 없다.
김익진 대법관의 세 아들 중 두 명이 대를 이어 법률가로 이름을 날렸다. 장남 김증한(金曾漢: 1920-1988)은 형법학의 대가로 서울법대 학장과 문교부 차관을 지냈다. 김증한 학장의 맏사위가 최연희(崔鉛熙·74) 변호사·국회의원이다. 최연희 변호사의 아들 최지일(崔志一·44)은 미국 뉴욕대 로스쿨을 졸업, 미국에서 뉴욕주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판사와 장면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지낸 3남 김흥한(金興漢: 1924-2004) 변호사의 부인(정진숙·80)은 8선 국회의원과 외무장관을 지낸 정일형(鄭一亨) 박사와 여성 최초의 사법고시 합격자 이태영(李兌榮: 1914-1998) 부부의 3녀 1남 중 장녀다. 김흥한 변호사의 처남이 정대철(鄭大哲·74) 전 의원이다. 김흥한 변호사의 손아래 동서가 법무법인 양헌 대표를 맡았던 김의재(金義在·81) 변호사이고, 김흥한의 맏사위가 최경준(崔炅俊·58); 법무법인 양헌 대표변호사다. 최경준 변호사의 형은 판사를 지내다 3기 방송통신위원장을 지낸 최성준(崔成俊·61) 변호사인데, 최 변호사의 장인은 김용철(金容喆·94) 전 대법원장(9대)이다.
김용철 전 대법원장의 6명의 동서 중 둘째동서가 4선(6-9대) 국회의원으로 국회 법사위·예결위·보사위 위원장을 지낸 김봉환(金鳳煥·97) 변호사인데, 김 변호사의 맏사위가 CJ그룹 회장과 대한상공회의소 소장을 맡고 있는 손경식(孫京植·79)씨이고, 손 회장의 매형이 이병철(李秉喆: 1910-1987) 회장의 장남 이맹희(李孟熙: 1931-2015)다. 손 회장의 외동딸 손희영(46: 동덕여대 교수)은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장의 차남 이동훈-김영혜(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누나) 부부의 장남 이재환(李在桓·46)과 결혼했다.
김흥한 변호사의 장남 김유동(金裕東·54: 청석개발 대표)은 동국제강 장경호(張敬浩: 1899-1975) 창업주의 5남 장상건(張相健·83) 전 동국제강 회장의 사위다. 김흥한의 차남 김윤동(金潤東·51: 일진자동차 대표)은 전주민방의 1대주주인 (주)일진 창업주이자 회장인 허진규(許鎭奎·78)의 차녀(허승은·50)와 결혼했다. 허진규 일진그룹 회장은 감사원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김황식(金滉植·70) 전 대법관의 매형이다. 김황식 전 국무총리의 누이와 형제 가족은 광주·전남 지역에서 동신대학 등 학교법인 동강학원을 운영하고 있다.
한편 김익진 검찰총장의 6촌 동생이 김성진(金晟鎭: 1905-1991) 전 보사부장관인데, 김 전 장관의 셋째 사위가 서울대 총장을 지낸 이현재(李賢宰·89) 전 국무총리다. 김성진 전 장관의 다섯째 사위 성낙응(成樂應·93) 전 이화여대 의대 학장의 매형이 이호(李澔:1914-1997) 전 법무장관(8대·20대)이다.
손동욱-손지열, 유일한 부자(父子) 대법관
장인과 사위가 모두 대법관을 지낸 사례가 셋인데, 앞에서 소개한 고재호-최종영, 한성수-이회창에 이어, 사광욱(史光郁: 1909-1983; 초대 중앙선거관리위원장)-김형선(金炯善·79) 경우다.
그런데 아버지와 아들 모두 대법관을 지낸 경우는 손동욱(孫東頊: 1908-1976)-손지열(孫智烈·71) 부자(父子)가 유일한 경우가 아닐까 싶다. 친일인명사전에 올라 있는 손동욱 전 대법관은 고향인 함경남도 북청에 있는 북청공립농업학교 농잠과를 졸업하고 일본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북청군 사립 용연(龍淵)학교 교원으로 근무하다 1937년 일본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하여 해방될 때까지 판사로 활동한다. 해방 후 두 차례 대법원 판사(대법관)을 지낸 뒤 1973년 변호사로 개업해 활동하던 손 전 대법관은 1976년 10월 23일 부인과 등산하기 위해 호남고속도로를 달리던 중 전주 진입로 부근에서 교통사고가 발생, 부인은 현장에서 사망하고, 본인은 중상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11월 9일 사망한다.
손 전 대법관의 셋째 아들 손지열 전 대법관은 법원행정처장, 법관임용심사위원회 위원장, 중앙선거관리위원회 위원장(14대) 등을 거쳐 현재는 김앤장 합동법률사무소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최장수 대법원장 민복기, 매국노 민병석의 차남, 사법부를 박정희 시녀로
현직 김명수 대법원장을 제외하고, 초대 김병로 대법원장부터 15대 양승태 대법원장까지 정부 수립 후 대법원장을 지낸 사람은 모두 13명이다. 이 중에서 가장 오래 대법원장직에 있던 사람이 5-6대 민복기(閔復基: 1913-2007) 대법원장이다. 그는 1968년 10월 21일부터 1978년 12월21일까지 10년 2개월 동안 사법부의 수장을 지냈다.
일제 식민통치 시기에는 6년 동안 판사로 재직하며 항일독립운동과 관련된 각종 재판에 참여했고, 해방 후 이승만-박정희 정권 동안 법조인으로서 거칠 수 있는 모든 요직, 즉 판사, 법무부 검찰국장, 대통령 비서관, 서울지검장, 검찰총장, 대법원 판사(대법관), 법무부차관, 법무부장관(16-18대), 대법원장 등을 모두 거친 유일한 법조인이다. 그것으로도 모자랐는지, 그는 전두환의 5공 때에도 국토통일원 고문(1980-1984)과 국정자문위원(1980-1988)에 헌정제도연구위원회 위원장까지 지낸다.
그가 10년 2개월 동안 최장수 대법원장으로 지내는 동안 사법부의 독립은커녕 박정희 독재정권의 하수인 노릇에 사법부는 암흑시대 그 자체였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 앞에서 ‘각하, 각하’를 입에 달고 살아, 스스로 사법부의 권위를 추락시켰다는 비판을 받았다. 오죽했으면, 그를 조선시대 임금을 모시던 비서(승지·承旨)에 빗대어 ‘민승지(閔承旨)’ ‘민비서’라 불렀을까. 결국 그 엄혹했던 유신 시절의 공포 분위기 속에서도 사법 정의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 용감한 법관들이 들고 일어나는, 제1차 사법파동이 ‘권력의 시녀가 된 민복기 사법부 10년’을 상징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부전자전이랄까? 그의 아버지는 어땠을까?
그의 부친 민병석(閔丙奭: 1858-1940)의 친일 부역 행각은 끝이 없다. 1910년 8월 궁내부 대신으로 ‘합병조약’ 체결에 관한 어전회의에 참석하여 가결에 찬성함으로써 스스로 매국노가 되었다. 이후 일제 총독부 중추원 고문만 5회 연임했고, 중추원 부의장까지 지낸 친일부역자들 중의 ‘거물’로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돼 있다. 일제의 자작 작위까지 받았다. 자작 작위는 장남 민홍기(閔弘基: 1883-1951)가 세습했다.
민병석은 본부인 외에도 모두 네 명의 첩을 거느렸다. 차남 민복기 대법원장의 부인 이 씨는 친일사학계의 ‘거두’ 이병도(李丙燾: 1896-1989)의 조카딸이다. 민복기의 차남 민경택(閔庚宅: 1935-1996) 변호사는 경복고와 서울법대를 졸업하고 고등고시 8회 사법과에 합격하여 육군 법무관을 거쳐, 서울지법 판사와 서울지검 형사부장을 지냈다.
민복기의 장남 민경성(閔庚星·85)의 장녀(민인자·55)는 김종규(金鍾圭·91) 전 서울신문 사장의 차남과 결혼했다. 김종규 전 사장의 장남(김진철·64)은 벽산그룹 창업주 김인득(金仁得: 1915-1997)의 조카딸(김은숙·61)과 결혼했고, 김 전 사장의 사위는 김윤(金鈗·65) 삼양홀딩스 회장이다. 김윤 회장의 부친 김상홍(金相鴻: 1923-2010) 전 삼양그룹 회장은 부통령을 지낸 인촌(仁村) 김성수(金性洙: 1891-1955)의 동생 김년수(金秊洙: 1896-1979)의 셋째아들이다. 한국 지배세력 혼맥의 중심에 있는 가문이다.
사법부 독립 초석 쌓은 김병로 대법원장 가문, 법조인 고위관료 등 많아
김병로 대법원장은 지금의 기준과 관행에 비추어 보더라도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사법부의 독립을 위해 원리와 원칙을 지킨 것으로 유명하다. 새해 첫날 국회의장을 비롯한 3부 요인들이 이승만 대통령에 새해 인사를 갈 때에도 김병로 대법원장은 삼권분립 하의 사법부 대표가 행정부의 대표인 대통령한테 새해 인사를 하는 것은 옳지 않다며 끝내 경무대를 방문하지 않았다.
사법부의 독립을 지키려는 김병로 대법원장의 단호한 태도와 별개로, 그의 직계 후손들 중에는 거물급 법조인이 많이 눈에 띤다. 대표적인 인물이 대법관과 헌법재판소장을 지낸 윤영철(尹永哲·80) 씨다. 가인(佳人) 김병로의 장남 김재중(金載重: 1907-1955)의 4녀 김종윤(78) 씨가 윤영철 전 헌법재판소장의 부인이고, 윤씨의 손위동서가 신민당 국회의원과 대변인으로 이름을 날린 이택돈(李宅敦: 1935-2012) 변호사다. 윤씨의 손아래 동서가 경제기획원 차관, 대통령 경제수석비서관을 거쳐, 건설부 장관을 지낸 이진설(李鎭卨·79) 씨다.
김재중의 장남이자 김병로의 장손인 김원규의 맏사위가 서울북부지방법원장과 서울가정법원장을 지낸 뒤, 법무법인 화우의 고문으로 있는 이윤승(李胤承·65) 변호사다. 이윤승 변호사의 바로 아래 동서가 이명박 정부 시절 청와대 경제수석과 지식경제부장관을 지낸 최중경(崔重卿·62) 씨다. 청와대 경제수석과 지식경제부장관으로 재직할 때 보여준 강한 캐릭터로 ‘최틀러’로 불리기도 했던 최 씨는 2016년부터 한국공인회계사회 회장을 맡아, 연임 중이다. 김재중의 차남인 김형규의 맏사위가 이명박 정부 시절 조달청장을 지내다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 대사로 나가 원자력발전소 수출에 주도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진 권태균(權泰鈞·63) 씨다. 권태균 씨가 UAE 대사로 부임할 당시 4촌 동서인 최중경씨는 청와대 경제수석비서관으로 있었다.
김병로의 장남 김재중의 장녀인 김혜규(86) 씨의 시아버지는 대검찰청 검사와 심계원(현재 감사원) 차장을 지낸 김완섭(金完燮: 1898-1975) 씨고, 김완섭 차장의 부친은 대한제국의 판사와 변호사를 지낸 김병도(金秉度: 1875-1947) 씨다. 김혜규 씨의 시가(媤家)를 통해 김병로 가문은 또 다른 거대한 법조가문과 연결된다.
김혜규의 시동생은 대구고법원장과 사법연수원장을 지낸 김재철(金在澈·79) 변호사이고, 김 변호사의 손아래 처남이 노태우 대통령 시절 청와대 사정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유후(金有厚·77) 전 광주고검장이다.
다시 김병로 가문으로 돌아가자. 일찍 작고한 김병로의 차남 김재열(金載烈: 1914-1942)의 장남이 김종인(金鍾仁·78) 전 국회의원(보사부장관)이다. 김종인 전 의원의 부친은 일제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했으나 일찍 작고하는 바람에 판사로 임명되지 못했다고 한다. 김종인 의원의 처삼촌이 김정렴(金正濂·94) 씨로 1969년 10월부터 1978년 12월까지 무려 9년 3개월 동안 박정희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냈다. 김종인 전 의원의 매형은 박봉환(朴鳳煥: 1933-2000) 전 동자부장관으로, 나중에 증권감독원장을 3연임하기도 했다. 박봉환 전 정관의 장녀 박현정(55) 씨는 서울시립교향악단 대표를 맡아 조직원들과 마찰을 빚다 물러났다.
얽히고 설킨 한국 지배세력의 혼맥은 끝없이 펼쳐진다. 동아일보 김재호 사장의 증조부인 인촌 김성수와 장인 고정주(高鼎柱: 1863-1933) 규장각 직각의 창평 고씨 가문, 그리고 가인 김병로 대법원장 가문은 겹사돈을 맺어 거대한 하나의 가벌(家閥)을 이룬다. 대법관을 비롯한 법조인과 고위 관료, 정치인, 대학교수 등을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취재: 신학림 전문위원, 박중석
데이터: 최윤원, 임송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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