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산의 마을이 언제형성 되었는지는 정확히 알수는 없으나. 덕림치 독베기 석등 방애떨밑 뒷골등에 지석묘가 분포 되어있고 구전으로 전해오는 일설등을 감안하면 선사시대 때부터 사람이 거주해 왔던것으로 추정되나,
문헌상에 나타나는 기록으로는(참조; 장흥향토지,장흥읍지,안양면지,등) 고려시대 말부터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사람이 거주하고 마을이 형성된것으로 나타나며 岐山 이라는 마을의 지명을 최초로 사용했던것이 이시기에야 비로소 문헌상에 나타나는 것으로보아 이는 아마도 조선중종,명종때에 이르러 집중적으로 봉명재에서 배출된 백기봉이하 팔문장의 영향으로보인다,...
기산의 지명의 유래는 주나라의 기산에서 유래된 것으로봄은 우리나라의 지명들이 거의가 하나같이 중국의 지명을 본따왔음을 고려해 볼때에 공부자의 유교 이념에서 비롯 되었으리라 사료되오며
특히,기산마을 전역에 걸쳐 문왕골 생문왕골 경연대 사부정 수반정 반송정 덕림치등 주문왕이 사용하던 지명들과 흡사하다는 것이다,
더구나 岐 라는 글자는 상상의 상서로운 새 鳳의 날개를 뜻한다는 의미의 글자로 岐山의 서재 鳳鳴齋와 마을 이름과 주문왕의 도읍지 岐山과 무관하지 않음으로 사료 된다는 것이다.
기록상으로는 기산마을에 최초로 거주했던 집성촌은 부안임씨와 광산김씨이고 부안임씨와 수원백씨는 광산김씨의 외손인것으로보아 차후로 입촌한것으로 분석되며 훈련원도감 훈련원장을 역임하신 김주부 할아버지께서 (현재옥녀봉에서 건너다보이는 분토골에 墓가있슴)
고향으로 낙향하신후 봉명재서당을 열고 친손들과 외손들을 친히 교육하셨으며 그의 친손과 외손들이 사마 양시를 합격하여 팔문장의 반열에 듦으로해서 장흥의 일기산이라 일컬어 졌다고 전한다,
당시에는 기산동네 뒷산에 일명징칭이(慶宴臺)에 사또이하 사족들이 함께모여 과거에 급제한 선비들을 축하하는 잔치를열고 글짓기를 하였으며 俟夫亭일명 살푸쟁이에서 활쏘기 등 경연을 하였다고하며 비동의 팔장사가 선비들이 앉아서 글짓기하고놀던 너럭바위를 떼메가서 비동뒤 대밭에다 버려버려 오늘날 그바위에 팔장사의 손자국이 남아있다는 설도있으며 해서인지는몰라도 흥학계 해체후 백승기 당시 면장님이 비동에서 바위 일부분을 여덟분의 힘센장사의 목도로 옮겨와 慶宴臺址라고 표석을 세워둔바 현재 존재하며,...
봉명재의 원래터는 뒷홍골 임도밑에 있었으나 한말 호식으로인해 옮겨와 우리들이 어렸을적에 다녔던 봉명재 서당터는 마을 뒷골에 터만 유지되고있다,
鳳鳴齋의 옥호를 잊지 않기위해 마을 주민들과 출향인들의 성금으로 사장나무 밑에 봉명정이라는 정각을 1986년도에 건립하여 현재 유지되고 있으며,..
봉명재에서 비롯된 후손들이 興學契라고 이름지어 마을의 경조사를 관장해왔으며 오늘날 미륵사 절로 모셔진 미륵불을 매년 섣달 초사흘 흥학계에서 유사와 제사장을 정하고 동제를 모셔 오다가 1960년대 새마을사업 이후로 미륵사 절로 모셔졌다,
흥학계의 자산이 엄청났으나 60년대 전기공사 대금으로 매각되고 해체되어 돌이켜보면 많은 아쉬움을 남긴일이 되었으며,.... 봉건적 사상과 유교 이념에 집착되어 일제 강점기이후 신문학을 늦게받아 들이는 등으로 해서 해방이후 많이 침체된 마을처럼 느껴졌으나,
최근에 들어 학계 법조계 행정고시등 많은 인재들을 배출 하였으며 새롭게 후학들이 우후 죽순처럼 치솟을 준비를 하고 있는등 생동감 있는 마을로 차츰다시 변모 하고있다,....
그러나 시대의 변천으로 미맥위주의 농업탓인지 이농 현상이 심해 1960년대 까지는 150여호의 가구에 거주 인구가 816명여에 달했지만 지금은 노령화 된 인구에 200 여분이 거주하며 실가구수는 78호밖에 되지않는 아쉬움을 남긴다,
식견이 짧은관계로 대략 이렇게 저희 기산 마을을 소개해 봅니다 마을유래 소개를 부탁하신 내사님 양해해 주시지요? 봉명제씀
( 내사님께서 물으신답글) 내사님! 기산 마을에 대해 대단히 관심과 애정이 많으시군요! 기산출신 으로써 대단히 감사 하다는 말씀을 먼저 올리는 바입니다,
맞습니다 8문장을 배향하는 기양사는 년전에 도립문화재가 됨으로 해서 복원이 됐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향교는 태학으로써 국립학교 였다면 봉명재는 사학인 셈이지요
일제 강점기이후 신문학이 들어오면서 서재는 사양길로 접어들고 재정문제 등으로해서 훌륭한 유적의 서재를 보존 유지하지 못한점 많이 아쉽고 또한 기산출신의 한사람 으로써 대단히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우리나라 유학의 사원들이 거의가 그러 하였듯이 대원군 이하응의 사원 철폐령 에 의해 기양사 역시 철폐 되었다가 후손들의 성금으로 면면을 유지해 오던중, 만시지탄 이지만 백기봉님 께서 임금님 에게서 하사 받으신 선시 10권이 국보급 유물로 인정되어 년전에 도립 문화재로 책정되어 오늘의 기양사가 기산의 동계에 복원 되었습니다,
지적하신 대로 봉명재의 터는 현재 유지되고 있으며 표석만을 세워두고 있습니다만, 언젠가는 가사문학의 효시요 장흥 가단의 주력이신 백기봉의 관서별곡이 세간에 빛을 보게되었으니 8문장 님들이 공부하셨던 봉명재가 복원될 날도 있으리라 확신합니다,...
궁굼해하신 기산의 성씨 입촌도는 본문에서 말씀 드렸습니다만 부안임씨가 고려말 1373년에 기산에 입촌하시고 광산김씨는 그직후이며 외손 부안임씨 인것을보면 서로간에 연고가 있었지 않았나 사료되며 그리고 수원백씨 가 기록상으로 세종삼년 으로 나타나며 그러니까 한 500 년정도 되나요?
그리고 물으신 광산노씨는 유치대리를 통해 부산면 고개밑에를 통해 370년전에 기산으로 입촌 하신걸로 나타납니다 이후 성균관 진사를 내심으로 광산盧씨 제실인 효성사에 배향 하시고 계시지요
남원양씨가 170년정도 되구요 장흥임씨가 120년정도되구요
영광김씨가 130년정도 되구요 장흥위씨가 130년정도 됩니다 남평문씨가 120년정도 되고요 인천이씨가 80년정도 됩니다,...
그밖에 평산신씨 진주강씨 파평윤씨 해주오씨등은
해방이후로 근년에 입촌 하신걸로 기록상 나타나고 있습니다,...
지금은 동계로 이거하셨지만 창녕曺씨들도 170년전에 입촌하신걸로 나타납니다, 물론 조치곡 선생님도 봉명재에서 대과에 급제하신 기록이 장흥 향교에 있습니다 당시 비동에 거주하신걸로 기봉과는 년대가 30년정도 차이가 난걸로 압니다, 그렇게 따지고보면 기산의 동네는 여러 성씨가 화합하여 집성촌을 이루고있는 마을인 것입니다,
특히 기산 마을에 대해 관심을 가져주신 내사님께 다시한번 감사의 말씀을 올리고요 식견이 짧은관계로 더이상 상세하게 설명드리지 못한점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봉명제올림
|
첫댓글
위의 기산마을 소개글은 2008년 4월29일
전설과설화의 코너에 써서 올렸던 글입니다.
당시는 마을가꾸기 시작전의 소개글이고
마을가꾸기 사업으로 전국 대상을 받은뒤로
박준영지사님과 이명흠군수님의 전격적인
지원으로 로하스타운 사업이 추진되었습니다.
그 당시 급히써서 올린내용이 지금에 와서보니
서원철폐령을 사원철폐령으로 잘못 기제되어
고치려고 해도 프로그램 변경으로 인하여
수정이 불가능하군요.!
당시이장.! 백광철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