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의봄
#영화_서울의_봄_비틀어_보기
어제 오후 느지막이 다섯 식구를 이끌고 영화 "서울의 봄"을 보고 왔다.
빤한 결론을 영화를 통해서 또다시 확인하는 것은 고통스럽다. 그럼에도 영화관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나의 감정이 미묘하다. 현대사의 불합리성을 다룬 역사물의 흥행에 일조하자는 마음과 어떻게 그려냈을까 궁금했다 말하는 게 솔직한 마음일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상쇄할 만큼의 어느 누구 한 사람 빠지지 않는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에 매료되지 않을 수 없었다. 영화란 기본적으로 픽션이 가미될 수밖에 없겠지만, 솔직히 픽션이 너무 심했다.
전두환(전두광)과 노태우(노태건) 등은 이미 법적으로든, 역사적으로든 단죄된 인물들인데 굳이 가명을 사용할 필요가 있었을까 싶고 그 외에 반란군 측 1공수여단을 2공수로, 진압군 측 9공수여단이 8공수로 각색한 까닭을 모르겠다.
그 외에도 전두환의 총리공관 탈출 시 무력충돌, 1공수 회군 시 한강 다리에서의 장태완(이태신)의 원맨쇼, 육본 측 종용으로 회군, 세종로 대치 장면, 취사병까지 동원한 수경사 잔여병력 출동, 수경사 야포단에 내린 포격 명령, 국방부장관의 '장태완'에 대한 직위 해제 발언 등은 모두 허구다.
현실은 그랬다. '장태완'은 사령부의 전차 4대와 수경사 전 병력을 긁어모아 출동하려 했으나, 유사시 전차 전력의 배신이 우려된다는 부관들의 만류로 공격을 포기했다. 실제 자신의 휘하 30경비단장 장세동(장민기), 33경비단장 김진영(진영도), 헌병단장 조홍(최원정) 등 하나회 소속 장교들은 일찌감치 반란군에 가담했다.
뿐만 아니라, 수도권에서 가장 가까운 1군단장 황영시(인내상), 수도군단장 차규헌 국방차관보 유학성, 정병주(공수혁) 특전사령관 휘하 4개 공수단 가운데 9공수를 제외한 3개 공수단이 이미 반란군에 넘어간 상태였다.
극 중에서는 새벽까지 매우 긴박하게 전개되었던 것으로 그려지지만, 장태완 또한 각고의 노력을 다하다, 결국 '전두환' 체포를 포기하고 사령관실에서 대기하다 반란군에 체포된다.
훗날 장태완이 MBC와의 대담에서 밝힌 바와 같이 연희동 저녁 식사에 유인당한 6시 30분경 이미 반란 성공률 95%가 완성된 상태였고 자신이 요청했던 병력 중 단 한 사람도 동원되지 않았다는 뼈아픈 말을 남겼다. 그렇듯 12.12 반란은 10.26 직후부터 사전에 철저하게 준비된 반란이었다.
극 중에서는 다수의 사상자가 나오는 것으로 그려지지만, 실제는 진압군 측에서 특전사 소령 오진호(김오랑), 국방부 청사 정선엽 병장, 반란군 측에서 수경사 33헌병대 박윤관 일병 등 3명에 불과하다.
극한 군사 정변임에도 사상자가 많지 않고 내전 상황으로 치닫지 않은 것을 다행이라 해야 할까? 이것은 보안유지도 매우 철저했고 감청을 통해 수경사 및 육본 등 진압군의 미세한 움직임마저 파악하고 있었고 전방부대까지 가담시킬 정도로 매우 과감했던 반란군의 움직임과 달리, 지휘부마저도 우왕좌왕 지리멸렬하다, 신군부의 압도당한 진압군의 일방적인 패배였다. 물론, 막을 수 있었던 몇 번의 기회가 있었지만, 국방장관은 비겁했고 대통령도 무능했다.
극 중에서는 전두환이 원맨쇼하는 것으로 그려졌지만 사실 그들 하나회 멤버들은 사전에 준비한 대로 매우 능동적이며 적극적으로 움직였다. 전두환에 등 떠밀려 자신의 부대를 간신히 움직이는 것으로 나오는 그려지는 1공수여단장 박희도(도희철) 또한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선제적으로 출동시켰다.
<서울의 봄>이란 79년 10.26 박정희 사망으로 유신체제가 붕괴한 직후 5·18 민주화운동이 신군부의 총칼에 무참하게 짓밟힐 때까지의 한국의 민주화의 가능성을 꿈꾸었던 시간이다.
1212반란주역들
만약, 그 당시 신군부가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현재 우리 사회는 어떤 모습일까?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을까? 당연히 5.18은 겪지 않았을 테고 지금과 같은 아픔은 없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보다 더 높은 경제성장과 윤택한 삶을 누릴 것이라고는 단정하기 어렵다. 역사는 가정이 없다.
그런데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전두환 집권 초, 2차 석유파동으로 물가상승률이 30%에 달하는 악재에도 불구하고 81년 7.2%를 시작으로 매년 8.3%, 13.2%, 10.4%, 7.7%, 11.2%, 12.5%의 경이로운 경제성장률을 기록한다. 여기에 필적할 만한 성과는 IMF 외환위기 3년 차에 빠르게 경제력을 회복한 김대중 정부의 11.% 밖에 없다.
그렇다고 해서 전두환 정권에게 당위를 부여하고 싶지 않다.
각자의 입장에 따라서 달리 분석할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로 되돌아가 살펴보면, 연 3천 시간에 육박하는 고강도 노동시간과 벼룩의 간을 빼먹다는 표현이 적당할 수준의 저임금에 희생된 노동자들과 88년까지 이어진 저금리, 저유가, 저달러를 뜻하는 3저 현상 등에 따른 세계 경제 호황 그리고 시장 개방 및 자유 무역에 따른 국내 농, 축산업 수입 장벽의 완화에 따른 농업 등 국내의 1차 산업 붕괴의 서막에도 불구하고 공산품 수출의 극대화가 고도성장을 견인하였다.
게다가 87 노동자 대투쟁 이후 임금 상승이 이루어지면서 구매력을 갖춘 중산층이 두텁게 형성되었고 생활 수준이 급격하게 상승하였다. 이에 따라 자동차가 크게 보급되면서 '마이카 시대'가 열리는 등 내수시장도 폭발적으로 확대되었고, 이것은 다시 경제성장을 견인하며 단군이래 최대의 호황기를 누렸다.
단군 이래 최대라는 호황기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미국의 검은 월요일과 일본의 버블붕괴로 상징되는 세계 경제의 퇴조, 국내적으로는 원화 절상과 통상압력, 과잉투자로 인한 국제수지 악화로 1989년에 무너진다. 따라서 전두환 군부독재의 경제적 성패는 세계 경제 흐름에 따른 영향이 컸다고 보는 시각이 정확하다.
‘신자유주의 경제체제’의 무등을 탔던 노태우 정부에 이은 김영삼 정부는 IMF 경제위기를 자초했고 소위 민주 정부라 불리던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신자유주의 경제체제를 완성하면서 촉발된 청년실업, 정리해고, 양극화, 비정규직 문제로 인해 2023년 현재도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10.26으로 촉발된 <서울의 봄>은 그 당시 우리들의 이데아(Idea)이었을까?
영화를 보는 내내 고구마 먹다 체한 것 마냥, 가슴이 답답하고 먹먹했다. 현재 우리는 대통령도 내 손으로 뽑고 IT산업의 발전과 매스미디어의 발달로 인하여 사통팔달 소통이 가능하다. 무엇보다 SNS와 1인 미디어의 등장은 과거처럼 대중의 눈과 귀를 틀어막는 독재는 불가능한 시대에 들어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아직 우리 사회는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는 것일까?
행여 우리는 사회발전은 ‘독재가 물러가고 모든 시민들이 한 표씩 얻는 상황만 도래하면 종료되는 것’이라고 해석했던 <1980년 서울의 봄>을 꿈꾸는 그 시절의 독재 V 반독재 구도에 매몰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1980년 <서울의 봄>은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었다. '민주주의'에 대한 염원이었다. 그런데 민주주의는 엄밀히 따져, 이념 또는 사상이 아닌, 군주제 또는 공화제 같은 일종의 통치체제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30여 년에 걸친 군사정권에 저항해 왔던 경험 탓에 이념 또는 사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성이 있는 것 같다. 문제는 이러한 대중적 경향성이 민주주의를 정치적 민주주의로 국한해 사고하고 대중의 먹고사는 경제적 부분을 터부 시 하는 이른바 ‘적폐청산론’이 팽배해 있다.
이제 <서울의 봄>을 넘어 현시대에 맞는 <서울의 봄>의 재해석이 필요한 때이다. 사상의 멸균실이라고 불리던 군부독재가 맹위를 떨치던 70년대 중반에도 새로운 가치와 사상이 움트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다만, 6~70년대에도 4.19 혁명 등 민주화 운동이 존재하였지만, 사회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 시대 운동은 부르주아적, 또는 자유주의적 특징과 연관이 깊다. 이를 반전시킨 계기는 1950년 5.18 광주 민중항쟁이다.
광주의 본질은 무엇보다 20세기 대명천지에 국가권력이 국민을, 시민을 무력으로 학살했다는 데 있다. 그 참담한 현실 앞에 보다 강력한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했다. 강력한 이데올로기는 마르크스 정치경제학이었다.
앞세대가 추구하지 않았던 이념을 스스로 체계화하고 내재화하며 자발적 사회주의자로 불리웠던 80년대 사회과학도들은 앞세대와 비교해 (알튀세르 표현을 빌리면) ‘인식론적 단절’을 겪은 세대라 할 수 있다.
정치적 민주주의를 넘어서 사회 구조적 개혁으로 노동자, 농민 등 민중이 주체가 되고 사회의 모순을 생산하는 자본가, 군벌들이 타도되는 사회를 최종점으로 잡아야 한다는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혁명 이론에 근거한 ‘사회성격논쟁’ 논쟁이 전개되었다.
사회구성체 논쟁(줄임 사구체)의 시점은 재야 경제학자 박현채가 창작과 비평에 한국사회의 성격을 ‘국가독점자본주의’로 규정한 데 대하여 이대근이 ‘주변부자본주의’를 안티 테제로 제시하면서 기본구도가 형성된다.
박-이 두 지식인의 논쟁은 학계를 넘어 운동권으로 번지고, 시대의 대논쟁으로 확산되었다. 이후 등장하는 이른바 NL-PD 논쟁에서도 핵심 논점은 최초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NL은 한국의 식민지적 성격 때문에 정상적 자본주의 발전이 불가능하다고 보았던 이대근 이론의 연장선에 있었고 반면 PD는 한국이 예속적 성격이 있음에도 자본주의의 독자적 발전법칙은 관철되고 있다고 본 박현채 이론의 업그레이드 버전이다. 이후 다양한 주변부 논쟁이 가세하면서 논쟁적 스펙트럼의 지평은 더욱 넓어진다.
그런데 90년대 접어들면서 사회과학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백가쟁명으로 확산되던 '사구체(사회성격논쟁)'도 사라진다. 이와 같은 배경에는 소련이라는 현실 사회주의의 붕괴와 급진적 민주주의에 대한 대중의 피로감, 무엇보다 어쨌든, 절차적 민주주의가 실현되고 있다는 게 크게 작용했다. 물론, 그것만은 전부가 아니었던 것 같다. 당시 사회과학 논쟁의 역력한 한계에 직면했다.
그것은 분단과 독재를 도외시하고서는 그 어떤 형태로든 온전한 국민국가로 나아갈 수 없다는 인식론의 한계에 직면했다. 이러한 문제의식이 87년 6월 항쟁과 노동자 대투쟁을 거치면서 일정 부분 체제에 반영되었고 운동가 다수가 극우와 보수 양당에 흡수되었던 영향이 컸다.
또한 1980년대 세계 자본주의는 신자유주의로 탈바꿈해 대중의 삶 속에 깊이 파고들었고, 유럽은 다수의 국가들이 대항적 차원에서 이미 70년대 마르크스주의 위기론에서 벗어나 '사회민주주의'로 진화하고 있었음에도 80년대 사회과학도들은 이러한 흐름을 포착하지 못했다. 게다가 소비에트 체제 붕괴 이후 한꺼번에 밀어닥친 세계사적 변화를 감당하지 못하고 고전 수준의 담론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다.
즉 다시 말해 한국 자본주의의 변화와 대중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의식의 변화에 관하여 둔감했을 뿐만 아니라 현실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바꿔 나아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깊지 않았다. 그 결과 논쟁은 추상화 또는 관념화되고 이론의 현실적 검증에 앞서 이론 자체의 완결성을 목표로 하였다.
성탄절을 맞은 오늘, 영화, <서울의 봄>은 1천만 관객을 넘어 범죄도시 3을 제치면서 올해 최고의 흥행작으로 등극했다. 그것은 새로운 변화에 대한 대중의 욕망이 투영된 결과가 아닐까?
세상은 급변하고 있다. 이미 아주 오래전 마르크스주의, 모더니즘을 넘어 포스트 모더니즘 등 무엇 한 가지로 규정할 수 없는 포스트주의 시대에 접어들었다. 진정으로 우리들이 꿈꿔왔던, 우리 시대 <서울의 봄>은 무엇일까?
우리는 무엇을 향해 나아가야 할까? 이데아(Idea)가 아닌 현실로 바꿔놓는 보다 강력한 그 무엇이 절실히 필요한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