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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법륜스님의 `실천적 불교사상`] 제1강 불교란 무엇인가? - 첫 번째
hdkang 추천 0 조회 14 14.07.08 17:3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불교’란 무엇인가?

‘부처 佛, 가르칠 敎’, 그러니까 ‘부처님의 가르침’ 입니다.

 

부처님’은 무슨 뜻인가?

‘깨달으신 분’을 인도어로 ‘붓다(부처)’라 합니다.

 

즉 ‘불교’란,

‘깨달으신 분이 깨닫지 못한 자를 깨닫게 해주는 가르침’ 입니다.

불교인’이란,

‘깨닫지 못한 사람이 깨달은 이의 가르침을 듣고 뭔가 깨달은 사람’ 입니다.

 

그러니까, 절에 30년을 다니더라도, 승려생활 50년을 했더라도

뭔가 깨닫지 못했다면, 그는 불자가 아닙니다.

절에 한 번도 안나와도, 다른 종교에 목매달고 다녀도

뭔가 인생에 깨달은 바가 있다면 그는 '불교인' 입니다.

 

그러니 불교인의 관심은 ‘깨달은 이가 누구냐, 깨달으려고 하는 이가 누구냐’이지,

그 사람이 교회 다니냐, 어느 절에 다니냐, 어느 종파에 다니냐는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럼 다음 질문이 뭐겠어요?

무엇을 깨닫는가?

어떻게 깨닫는다는 것인가?

깨달은 상태라는 것이 어떤 상태인가?

깨달으면 뭐하는가? 즉, 나한테 무슨 이익이 있는가?

이런 네 가지 질문은 필연적입니다.

 

첫째, 무엇을 깨닫는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깨닫는’ 겁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거야, 눈 있어 보고, 귀 있어 듣고, 코 있어 냄새 맡고,

혀 있어 맛 보고, 손으로 만지고, 이런저런 생각도 할 수 있기에,

누구나 알 수 있는 쉬운 것 아닌가 하겠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허상입니다.

 

둘째, 어떻게 깨닫는가, 즉 어떻게 실상을 보느냐?

바르게 봐야 합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봐야 합니다.

깜깜한 밤에 아무것도 안보여, 손으로 더듬더듬 하는 것이 깨닫지 못한 자가 살아가는 삶의 모습이고,

불을 훤하게 켜고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깨달은 자가 살아가는 모습입니다.

 

셋째, 깨달은 상태란 어떠한가?

불 켜놓고 훤하게 보는 상태가 깨달은 상태입니다.

깨닫지 못했을 때는 이 세상에 자기밖에 없는 줄 알지만,

깨닫고 나면 자기 주위에 수많은 생명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깨닫기 전에는 지구가 세계의 전부인 줄 알지만,

깨닫고 나면 셀 수도 없이 많은 세계가 이 우주공간에 있음을 알게 됩니다.

깨닫지 못할 때는 알기는 알아도 긴가민가했던 상태이다가,

깨닫고 나면 애매모호한 것이 없어지고 모든 것이 분명해집니다.

 

넷째, 깨달으면 어떻게 되느냐? 나한테 무슨 좋은 일이 있느냐?

 

깨달으면 괴로움이 없어지고 속박에서 벗어납니다.

 

예를 들면, 옆 사람이 이유없이 자꾸 나를 때립니다.

억울하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고, 참을 수 없이 괴롭습니다.

쥐어박아 버리려다 발밑을 보니, 내가 그 사람 발을 꽉 밟고 있는 겁니다.

앗차! 하며 발을 떼는 순간, 마음 속의 미움이나 원망이나 화가 사라집니다.

내가 그 사람의 발을 밟았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괴로움이 없어집니다.

 

하나를 깨달으면 하나가 없어지고, 모두 다 깨달으면 모든 괴로움이 다 없어집니다.

괴로움이 없어져 버리는 것을 열반(니르바나, 滅)이라 합니다.

 

우리는 살면서 남의 눈치를 보며 지냅니다.

부모 눈치, 애인 눈치, 배우자 눈치, 회사 눈치, 상사 눈치....

우리는 살면서 늘 눈치를 보고 뭔가에 속박이 되어 살고 있습니다.

깨달으면 이런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집니다.

이렇게 속박이 사라지는 것을 해탈이라 합니다.

 

깨달으면 이런 상태(열반과 해탈의 상태)가 되는 거고,

깨달아 간다는 것은 이런 상태로 점점 나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어렸을 때와 지금의 자기를 비교해봅시다.

재산도 늘고, 지식도 늘고, 지위도 높아지고, 더 잘 먹고, 더 잘 입습니다.

그런데 정작 고뇌는 더 많이 생기고 눈치는 더 많이 보며 지내고 있습니다.

그걸 보면, 지금까지 추구해 왔던 먹고 입고 자는 이런 물질적인 것들이,

행복과 자유의 길(해탈과 열반)에 절대적인 요인이 아닙니다.

물질적인 것들이 필요없다고 말할 수는 없지마는, 행복에 비례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깨달으면 행복해집니다.

그러니까 깨달아볼 만 한 겁니다.

 

빨간 안경과 파란 안경을 쓴 사람이 있습니다.

하얀 벽을 보고서도 빨갛다 파랗다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합니다.

처음에는 서로 자기가 맞다고 우기다가, 설득하다가, 나중에는 싸웁니다.(신혼 초)

그러다가 싸워봐야 시끄럽고 화만 나고 해결은 안되니, 포기하고 서로 외면하고 살아갑니다.(애 낳고 키울 즈음)

그러나 외면하고 살 수만은 없어, 상대를 이해하고 대화하려 애쓰며 살아갑니다.(늙그막에)

싸우는 유형, 외면하는 유형, 그래도 대화해 보려고 애쓰는 유형....

이게 우리가 주위에서 볼 수 있는 인간관계의 세 가지 유형입니다.

그 중 대화하려 애쓰는 유형이 그래도 제일 낫습니다.

근데 이게 깨달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오십보 백보요, 그 나물에 그 밥입니다.

안경을 딱 벗는 순간 그냥 이것은 싸울 일도 없고, 외면할 일도 없고, 대화하려고 노력할 일도 없어집니다.

근데 불교를 세 번째 유형으로 아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참고 인내하고 이러는 것이 자비인 줄 알고, 이게 수행인 줄 알고,

이렇게 공부하는 사람이 많지만, 이것은 불교가 아닙니다.

불교는 그런 세가지 유형이 아니고, 안경을 탁 벗어버리는 겁니다.

안경을 벗는 것이 깨달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늘 자기가 태어난 나라 안에 갇히거나, 그 문화 안에 갇히거나,

그 종교 안에 갇히거나, 그 종파 안에 갇혀있습니다.

 

6대 종교간의 대화 모임에서, 한 기독교 신학자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구약, 신약, 기독교 역사서 등을 30년동안 연구해서 내린 결론이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였고, 그것에 대해 2시간동안 강의를 했습니다.

기독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볼 때는 파문을 각오해야 할 엄청난 사건이지만,

기독교 밖에서 볼 때는 누구나 알 수 있는 너무 당연한 이야기이기에,

30년씩 연구할 가치도, 2시간씩 강의할 필요조차도 없는 겁니다.

사람이 어떤 갇힌 상태 안에서 벗어나려면 그만큼 힘이 드는 겁니다.

 

스리랑카에서 열린 세계실천불교대회에서 비구니제도가 주제로 선정되었습니다.

스리랑카 등 남방불교에는 비구니(여승) 제도가 없습니다.

여자는 수행을 해봐야 깨달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비구니 수계를 하려는 것, 여자를 스님으로 인정하는 것은,

불교를 망치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들은 극구 반대합니다.

우리가 보면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즉, 울타리 밖에서 보면 아무 일도 아니고 너무나 당연한 것을,

그 울타리 안에 있는 사람은 거기서 못 벗어나는 겁니다.

 

신라시대에는 동성동본끼리 결혼을 했습니다.

성골이니 진골이니 다 이렇게 해서 유지된 것입니다.

근데 조선시대에는 같은 성씨끼리만 결혼하는 것도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과연 누가 옳고  누가 그를까요?

이런 것은 옳고 그른 문제가 아닙니다, 문화라는 울타리의 차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울타리 안에만 살면,

자기가 그런 울타리 속에 갇혀있는 지조차도 알 수가 없습니다.

울타리 안에 갇혀 지내는 것이 깨닫지 못한 상태이고,

울타리를 벗어나는 것이 깨달은 상태인 것입니다.

 

(제2강에 계속합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정토TV→법문 보기→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예수님을 믿거나 알라신를 믿을지라도, 깨달았다면 그는 곧 불교인이다.

빨갛거나 파란 안경을 벗어 던지는 것이, 닫힌 울타리를 박차고 나오는 것이 곧 깨달음이다.

깨달으면 괴로움이 없어지고 속박에서 벗어나며 행복해진다.

종교라는 작은 틀에서 벗어나 진리라는 큰 틀로 나아가서,

'깨달음'이라는 게 무엇인지 공부해 볼 만합니다.

시작하기를 참 잘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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