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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스크랩 [법륜스님의 `실천적 불교사상`] 제22강 불투도계 - 세 번째
hdkang 추천 0 조회 6 14.07.10 16:2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제21강에서 계속)

 

천지만물의 은혜에 감사해야 한다

우리는 이 자연의 은혜를, 자연이 얼마나 우리들에게 많은 이익을 주는지 모르고 살고 있습니다.

천지만물의 은혜를 모르니 환경파괴가 일어납니다.

 

북한도 이 한반도 땅에 같이 붙어있는 데, 맨 날 홍수때문에 농사 망쳤다, 가뭄때문에 망쳤다 합니다.

거기만 특별히 비가 많이 오거나 비가 적게 왔을까요? 아닙니다.

땔감이 없으니까, 산에 나무를 하나도 없이 다 베어서 민둥산이 되었습니다.

먹을 게 없으니까, 산꼭대기까지 전부 개간하여 농토로 만들었습니다.

그러니 비가 조금만 많이 와도 홍수가 들고, 비가 조금만 안 오면 가뭄이 듭니다.

숲이 홍수와 가뭄을 막아주는 댐으로서의 가치는 생각하지 않은 결과입니다.

예전엔 갯벌을 막아 논 만드는 것을 엄청나게 잘하는 짓이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갯벌이 주는 이득이 농사짓는 것보다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많이 달라지고 있습니다.

환경파괴는 이렇게 우리들의 어리석음에서 옵니다.

환경파괴는 많이 생산해서 많이 쓰는 것이 잘사는 것이라는 헛된 생각과,

자연이 우리들에게 주는 갖가지 은혜를 몰라서, 제 손으로 제 눈깔을 찌른 결과입니다.

 

사위성 사바티라고 하는 도시에 구걸을 하는 가난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하루는 성이 시끌벅적하기에 무슨 일인가 물었더니, 이 성에 부처님이 오셨다는 겁니다.

이 나라 왕이 석 달 동안 부처님께 갖가지 공양을 올리고, 일만 개나 되는 등을 정사에 켰다고 합니다.

 

이 여인은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왕은 과거 생에 복을 많이 지어서 이 생에 복받고, 이 생에 또 저렇게 공양을 올리니 다음 생에도 복받겠지,

나는 지난 생에 복을 못지어서 이 생에 가난하고, 가난하다고 아무것도 못하니 다음 생에 또 가난할 것이다.

나도 가난하지만 복 좀 지어야 되겠다’,

그래서 그 여인은 길가는 사람에게 구걸을 해 동전 두 닢을 얻어 그 돈으로 기름을 사고,

정사 한쪽 구석에 불을 켜고 기도했습니다.

대개는 '나도 저 프라세나짓 왕처럼 돈도 많고 지위도 높은 사람이 되게 해주십시오' 라고 하겠지만,

이 여인은  저도 다음 생에 부처님같이 깨닫게 해주십시오’, 이렇게 기도를 했습니다.

한밤이 되어 아난존자가 불을 끄는데, 다른 불은 다 꺼지는데 그 등불만은 아무리해도 안 꺼집니다.

이때 부처님이 나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아난다여, 부질없이 애쓰지 말아라,

그것은 가난하지만 마음 착한 여인의 넓고 큰 소원과 정성으로 켜진 등불이다,

그러니 결코 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등불의 공덕으로 그 여인은 오는 세상에 반드시 성불할 것이다’,

 

이 말을 전해들은 프라세나짓 왕은 부처님께 나아가 여쭸습니다.

부처님, 어떤 여인이 등불을 켠 일로 수기를 주셨다는 데 사실입니까?

저는 석 달 동안이나 부처님과 스님들께 큰 보시를 하고, 수 천대의 등불을 켰습니다.

저에게도 미래의 수기를 주십시오

*수기(授記) : '부처를 이루리라'고 예언하는 것

부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불도란 그 뜻이 매우 깊고 헤아리기 어렵고 알기 어려우니 깨치기도 어렵소.

그것은 하나의 보시로서 얻을 수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백천의 보시로도 얻을 수 없는 경우가 있소.

그러므로 불도를 얻기 위해서는 먼저 여러 가지로 보시하여 복을 짓고

좋은 벗을 사귀어 많이 배우며 스스로 겸손하여 남을 존경해야 합니다.

자기가 쌓은 공덕을 내세우거나 자랑해서는 안됩니다.

이와 같이 하면 뒷날에 반드시 불도를 이루게 될 것이요

왕은 속으로 부끄러워하면서 물러났습니다.

 

이것은 경전에 있는 내용 그대로입니다.

하나를 보시하고도 불도를 이룰 수도 있고, 백천을 주고도 이룰 수 없다이겁니다.

이게 부처님이 하신 말씀입니다.

요즘 같으면 대통령이나 부자 앞에서 누가 감히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요?

나도 못할 겁니다, 돈 끊길까봐 겁이 나가지고....

 

그러니까 '아, 정말 이분은 위대하신 분이구나',

눈이 바로 뜨여진 자가 아니고는 어떻게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까?

지금같은 설명없이 이런 글을 그냥 읽으면, 이게 무슨 소리인지 사실은 잘 모릅니다.

그냥 가난한 여인이 정성드려 기도를 했더니 성취가 되었다는 얘기구나, 이렇게 생각할 것입니다.

여기에 담긴 보다 더 깊은 뜻을 헤아려 보십시오.

가난한 여인은 그 동전 두 닢이 그녀의 전 재산입니다.

임금은 이렇게 큰 공양을 올렸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의 재산의 만분의 일도 안될 것이고,

그의 재산이라는 것도 백성들의 세금으로 모은 것입니다.

임금은 부처님께 공양 올리고 모자라면 또 세금 거둬들이면 그만입니다.

임금은 백성의 것으로 부처님께 공양을 올린 것이니 미안한 줄 알아야 하는 데, 자기 공덕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말이 부드럽지만 하나하나 뼈가 있는 이야기입니다.

이게 세간의 구조를 훤하게 알고 계시니까 이렇게 아주 간단하게 이야기가 나오는 겁니다.

여러분들이 우리의 삶의 길이 어떤지를 알고 이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서 경전을 읽으시면,

경전은 만화책 보는 것보다 더 재미있고 소설책 읽는 것보다 더 재미있고 더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이 나아가고 있는 삶의 길의 모순을 알지 못하고, 색안경을 끼고 경전을 읽으면,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알 수가 없고, 설령 안다 하더라도 큰 사상이 있어 보이지도 않습니다.

마치 초등학생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만 할 겁니다.

 

중국에 불교가 들어와서 많은 탄압을 받다가, 남북조 시대 말엽에야 국교가 되었습니다.

특히 남쪽의 양나라에는 불교가 아주 융성했습니다, 양나라의 무제는 불교를 옹호했습니다.

무제는 절을 수천 개 짓고 탑을 세우고, 스님들 몇 천 명의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그러니 모두가 호법의 왕, 전륜성왕이 태어나셨다, 아쇼카 왕이 중국에 다시 태어나셨다면서 법왕이라고 존경했습니다.

그 무렵 인도에서 달마라고 하는 한 스님이 중국 땅에 왔습니다.

인도에서 고승이 왔으니, 왕은 왕궁에 모셔 극진하게 진수성찬으로 대접했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치적을 모두 이야기하고서, 이 사람과 똑같이 물었습니다.

 

대사, 이만하면 내 공덕이 어떠요?’, 그랬더니 달마대사는 (無, 공덕이랄 게 없소)!’ 이랬습니다.

왕이 화가 머리끝까지 나지만 참으며 당신은 누굽니까?“, 그랬더니 ‘I don't know’ 이랬습니다.

그러니 양무제는 씩씩대면서 당장 죽여버릴려고 했지만 주위에서 말렸기에,

달마대사는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양쯔강을 건너가 강북으로 갔습니다.

중국에 불교가 굉장히 흥행하다고 하지만,

달마대사가 와서 봤을 때 중국불교는 이런 불교였습니다.

 

큰 전쟁이 나서 모두가 피난을 갑니다.

상놈은 가진 게 없으니, 보리쌀을 한가마 지게에 짊어지고 피난길에 나서고,

양반은 금화를 한 주머니 넣어 피난을 가는데, 상놈을 만나 같이 가게 되었습니다.

양반은 무겁고 값도 안나가는 보리쌀을 지고가는 상놈을 보니 불쌍하고 한심합니다.

상놈은 땀을 뻘뻘 흘리고 기우뚱거리며 걸어가고, 양반은 가볍게 걸어갑니다.

저녁이 되니 상놈은 보리쌀을 한웅큼 내어 밥을 합니다.

근데 양반에게 먹어보라는 소리도 안하고 혼자만 먹습니다.

양반은 괘씸하기 이를 데 없지만 상놈이 무식해서 그런다 생각하고 참습니다.

이튿날 걸음을 계속하는 데, 가는 곳마다 다 도망가고 아무도 없어 밥 사먹을 데가 없습니다.

저녁때가 되고, 허기가 져 죽겠는 데 상놈은 밥을 해 또 저 혼자 먹습니다.

그래서 금화 한 닢 줄 테니까 너 보리쌀 한가마 나한테 팔아라했습니다.

금화 한 닢이면 보리쌀 다섯 가마는 살 돈인데, 다섯 배로 쳐주었는 데도 상놈은 들은 체도 안 합니다.

이튿날 길을 가는데 또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번엔 금화 다섯 닢을 주면서 보리쌀 반가마만 팔아라해도 상놈은 입을 꼭 다물고 가만히 있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또 길을 가는 데 인제 상놈이 앞으로 가고, 양반은 허우적거리며 뒤따라 갑니다.

저녁이 되어 이번엔 금화 절반을 주면서 보리쌀 한 말만 파라고 해도 대꾸도 안합니다.

이튿날 또 길을 가는 데 양반은 정신이 오락가락한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여보게, 내 이 금화 다 줄 테니까 밥 한 그릇만 주라했지만, 상놈은 아무 말도 안합니다.

다음날, 양반은 거의 혼수상태가 되고, 이제는 호주머니의 금화가 엄청나게 무겁게 느껴집니다.

그러나 밥 한 그릇도 못 바꿔 먹는 금화는 천하에 쓸모도 없기에 논바닥에 던져버리고,

엉금엉금 기어서 가다가 결국 쓰러졌습니다.

여보게 나 좀 살려줘, 나 지금 숨넘어가니 물 좀 주고 밥 좀 주면 안 되겠나

그때서야 상놈이 지게를 바치고 밥을 해서 양반에게 주었습니다.

 

이 이야기가 뭘 말할까요?

이거 숙제입니다, 아시겠습니까?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 강의는 '정토회 > 정토TV > 법문 보기 > 실천적 불교사상'에서  동영상으로 볼수 있습니다.

 

 

*** 짧은 생각 ***

 

숙제를 풀어야 하는 데, 도데체 무슨 뜻인지....

 

재화는 필요한 곳에서 필요한 사람이 써야 한다,

금화도 재화이고 보리쌀도 재화이지만,

목숨을 부지하는 데는 금화가 아니라 양식이 필요하다.

그런 뜻이 아닐까 생각하는 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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