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봄이 주는 용기
우리는 모두 땅의 숨으로 하늘을 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는 하나님께 태초에 우리에게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며 본연의 모습이다. 비록 그 은총을 스스로 놓치고 아쉽고 불편한 관계에 있다고 할지라도 본성과 은혜는 여전하다.
사람과 자연을 가슴에 품고 하늘을 살고자 하는 사람은 볕과 바람이 얼마나 아름답고 나무와 꽃들이 그저 예쁜 봄을 이유 없이 사랑하게 된다. 서로는 푸른 숲을 이루는 나무가 되고 모두가 반기는 맑은 물이 된다. ‘신이 쉼표를 넣은 곳에, 마침표를 찍지 말라’는 류시화 시인의 말이 위로와 생명의 숨으로 다가온다.
새봄의 기운과 함께 하늘의 숨을 가진 사람은 쉽게 낙심하며 절망하지 않는다. 암울한 상황에서도 새 기운이 생겨나며, 어디서 불어온 바람처럼 큰 용기와 힘을 입게 된다. 나라와 민족을 살리고, 삶의 자리를 세워갈 깨어있고 함께할 사람들이 곁에 있음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기미년 3.1만세운동은 우리 민족의 비할 데 없는 자긍심이며 역사적 문화적 민족적인 자존심의 결정체다. 자발적이며 비폭력 평화와 자주를 염원하는 민중의 마음이었다. 무엇보다 이 운동의 상당수에 기독교의 신앙이 있었다는 사실은 가슴이 벅차다.
해마다 이맘때면 일제의 폭압에 의한 36년의 아픔과 질곡의 역사가 떠오른다.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리고 가슴이 먹먹하다. 수많은 사람이 영문도 모른 채 끌려갔으며 원치 않는 삶을 살아야 했고 소중한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러니 조선의 온갖 좋고 귀한 것을 제 맘대로 수탈해 간 것은 말할 필요도 없다.
히브리인이 자녀들에게 ‘우리는 이집트의 노예였음을 부끄럽다고 감추지 않고 들려주며 상기시켜 준 것’(신 6:20-21)은 그런 삶이 되풀이될 수 없음을 확실하게 하기 위함처럼, 우리도 일본의 식민 역사를 감출 수 없다. 일본이 독일처럼 잘못을 스스로 인정하고 반성하며 사과한다면 받아줄 수 있고 미래지향적인 입장에서 용서할 수 있지만 부정하고 속이며 거짓을 일삼으면 쉽게 잊거나 용서할 수 없다.
작금의 상황에서 한국 기독교는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분명한 정체성으로 기독교의 위상을 지켜야 한다. 진정 나라를 위한 일이 무엇인지 뼈를 깎는 심정으로 고민해야 한다. 나라 안팎으로 정신 차리고 풀어가야 할 일이 산더미 같은데 집안싸움으로 몸살을 앓고 있다.
예수님은 보수나 진보, 우일까 좌일까. 어느 쪽도 아니거나 양쪽 다일 수 있다. 두 모습이 다 있음은 그게 우리의 현실이고 한계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또한 주님은 당신의 뜻으로 풀어내고 온전케 하셨다. 왜 우리는 한편에서 극단적인 입장을 고집하며 정치나 이념의 논리에 놀아나는가. 예수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주권을 회복해야 한다.
세상은 혼란스럽고 갈 바를 알지 못할 수 있으나 그리스도를 믿고 따라는 사람은 다를 수 있고 달라야 한다. 생명에 반하고, 평화에 반하는 어떤 세력과 집단에 선을 그으며 대안과 희망을 내놓을 수 있어야 한다. 기미년의 3.1운동을 통해 보아야 한다. 진정 우리 민족과 나라가 나아갈 방향과 이상을 모른 체 하면 안 된다.
지금의 위태롭고 혼란스러운 상황을 자초하고 국민을 극한 대립으로 몰고 온 책임은 반드시 물어야 한다. 나가 이보다 더한 어려움과 상황에서도 우리 민족은 위기를 견뎌왔고 슬기롭게 극복해 왔다. 위기를 기회로 삼고 시련을 통해 더욱 단단한 나라를 만들겠다는 다짐이 삼일운동의 정신으로 나타나야 한다. 언 땅을 뚫고 올라오는 여린 풀잎의 의지와 용기를 새봄을 통해 배우며 세상을 바꿔내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