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랑은 같이하고,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내려오신 이유는 인간을 향한 연민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은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시기 전에, 아니 육화하시기도 전에 이미 우리의 고통을 몸소 끈질기게 겪으셨습니다. 그분이 이렇게 (육화) 이전에 고통받지 않으셨더라면, 우리 인간의 삶을 함께 나누기 위해 사람이 되지도 않으셨을 것입니다. 그분은 먼저 고통을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바로 이 땅에 내려오셔서 모습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위해 겪으신 이 고통은 도대체 어떤 종류의 고통일까요? 그것은 사랑의 고통입니다.
사정이 그러하다면, 우주의 하나님이신 아버지께서도 용서와 자비가 충만한 하나님이시므로 어떤 방식으로든 고통받으신다고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의 사연에 함께하시는 그분 또한 인간의 고통을 맛보고 계신다는 사실을 그대는 알아듣겠습니까? 사실 주님이신 그대의 하나님께서는 마치 아버지가 자기 아들을 껴안으시듯이, 그대를 있는 그대로 껴안으십니다. 아드님께서 우리의 고통을 껴안으시듯이, 아버지께서도 우리 존재를 그렇게 껴안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분께 (고통으로) 부르짖으며 기도한다면, 그분은 마음이 울렁이시고 애틋함으로 마음이 미어지십니다. 사랑으로 마음이 아파 오십니다. 그러하기에, 원래 하나님 본성의 위대함으로 보자면 상상도 할 수 없는 상황에 짐짓 들어오셔서, 사람의 고통을 당신 품에 껴안고 아파하시는 것입니다.” <오리게네스/ 교부들의 지혜>
그리스 철학이나 기독교의 신 이해로 보면, 그 자체로 완전하신 하나님은 그 어떤 결핍도 없으시므로 하나님이 고통을 겪으신다는 말은 언어도단입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오리게네스가 하나님께서도 고통받으신다고 말하는 이유나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사랑의 고통입니다. 사랑하면 고통을 받게 됩니다. 고통이라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한평생은 고통받는 뭇 인생을 향한 연민의 연속이었습니다. 복음서 곳곳에서는 예수께서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는 곳에 가실 때마다 지극한 측은지심에 사로잡히셨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동체대비(同體大悲)란 말이 있습니다. 고통받는 사람의 몸과 딴 몸이 아니기에, 사람의 고통은 바로 그분의 고통이 됩니다. 이런 연민의 고통은 십자가의 고난에서 절정에 달합니다. 오리게네스는 그리스도께서 지상에서의 연민 이전에, 그러니까 육화 이전의 영원한 말씀 시절부터 동일한 사랑의 고통을 겪으셨다고 말합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주님은 사람으로 이 땅에 오지 않을 거라 말합니다.
렘브란트의 유명한 그림 <돌아온 탕자>를 보면, 뉘우치고 돌아와 무릎을 꿇고 아버지께 매달린 아들을 껴안는 늙은 아버지의 눈자위가 그간 흘린 눈물로 짓물러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전해주신 하나님 아버지의 얼굴은 그런 모습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십자가 앞에서만 하나님의 본모습을 깨닫는 빛을 얻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그분은 고통당하는 우리와 함께 고통당하시는 하나님으로 드러납니다. 그분은 한평생 적지 않은 말씀과 행적을 남기셨지만, 그것으로 우리를 구원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의 고난과 고통, 죽음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습니다.
인격적이신 하나님이란 말을 들어보셨나요? 전능하신 하나님은 감정도 없고 생각도 없고 아무것도 필요 없는 게 아니라, 그분은 사랑의 고통을 아시고 느끼고 감당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도 때로는 외로움을 타신다”는 정호승 시인의 말이 기억납니다. 사랑의 고통을 안고 나에게 오시고 지금도 내 편이 되시는 주님을 홀로 두지 마십시오. 외롭게 마시고 서운하게 마십시오. 주님이 나를 위해 사랑의 고통을 앓고 겪으셨다면, 나도 주님을 향한 사랑의 고통을 나누고 져야 합니다. 그 사랑은 두려움을 몰아내고 온전한 구원을 이룹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