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자의 기도
박노해
낯선 땅에 첫발을 내딛으며
나는 기도한다
설산이여 산맥이여 고원이여 들녘이여
광야여 사막이여 저를 받아주소서
대지를 지키고 이야기를 보존해온
이 땅의 사람들이여 저를 받아주소서
우주에서 오직 이 장소에 뿌리박은 자만이
체득할 수 있는 삶의 진실을 전해주소서
기쁨의 순간들과 좋았던 일들을 들려주시고
고난과 실패를 이겨낸 불굴의 인내와
곧고 선한 인간의 위엄을 전해주소서
꽃과 나무를 기르는 단아한 집안의 가족들과
용감한 청년들과 아름답고 총명한 여인들이
저를 친구로 받아들이게 하시고
눈 맑은 아이들과 손잡고 웃으며 걷게 하시고
노인들의 오래된 지혜와 경륜을 물려주소서
일 잘하는 장인과 안목이 높고 솜씨 좋은 이와
논밭을 경작하고 과일을 길러 따고 벌꿀을 치고
사냥을 하고 소금을 캐고 물고기를 잡고
양떼를 모는 이들의 정직하고 빛나는 노동으로
저를 겸허히 가르치게 하소서
선조들과 자신들의 발자국이 아로새겨진
빛나는 터무늬와 장엄한 풍경 속에 벌어지는
춤과 잔치와 탄생과 혼인과 장례와 축제와
시와 노래와 연애와 우애와 저항과 기도와
묘비가 있는 곳으로 저를 초대하소서
오래전부터 저를 기다려온 좋은 이들을 만나
진실한 증언을 듣고 희망을 심어 가게 하시고
절망과 슬픔의 골짜기를 걷고 있는 이들을
제게 보내주시어 위로하고 격려하며
무력한 사랑뿐인 저를 더 분투하게 하소서
그리하여, 여행자의 발길을 낮추어
당신의 삶 속으로 나직이 스며드니
저를 받아주소서
- 박노해 시인의 숨고르기 ‘여행자의 기도’
시집 『너의 하늘을 보아』 수록 詩 1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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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자의 기도...박노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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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2.29 1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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