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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회 국제인도법세미나 (2013. 11. 28) 발제 1 발표문>
한국의 1864년 최초 제네바협약 가입 110주년:
그 것의 의미와 영향에 관한 고찰
최 은 범 (법학박사, 국제인도법연구회 대표
대한적십자사 인도법자문위원)
___________ <내 용 목 차> ____________
I. Berne 의 스위스 연방기록원 탐방
II. 1864년 제네바협약의 유래와 특징
III. KOREA와 제네바 제(諸)협약
IV. 결어- 동 아시아의 인도법적 공통과제
<부록> 1864년 최초 제네바협약 국문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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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Berne의 스위스 연방기록원 탐방
지금으로부터 8년 전인 2005년 9월 7-9일 이탈리아 San Remo에서 열린 국제인도법연구원(IIHL) 주최 <국제인도법 당면문제에 관한 원탁회의>가 끝나던 날, 다른 2명의 한적(韓赤) 대표들은 프랑스 Nice를 거쳐 귀국 길에 오르고, 나는 다음날인 10일 IIHL 부총재 Veuthey교수의 승용차에 편승하여 육로를 통해 스위스로 향했다. “대한적십자사100년사편찬위원회 위원장”의 자격으로 5박6일간 Geneva에 머무는 동안 국제적십자의 양대기구인 국제적십자적신월사연맹(IFRC)과 국제적십자위원회(ICRC), 그리고 스위스연방기록원(Swiss Federal Archieves)을 순방하면서 “한국적십자운동 100년”(1905-2005)의 사료수집 작업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로 특히 IFRC(Petit Saconnex 소재)에서는 내가 관련 서류파일 중에서 일일이 훑어보고 골라놓은 부분을 문서보관팀장인 Mr. Mitchell이 며칠 동안 손수 복사하여 총 240쪽을 넘겨주었다. ICRC(Avenue de la Paix 소재)에서는 오랜 친구인 당시 국제법협력부장인 Dr. Bugnion의 주선과 문서보존팀의 협조로 내가 선별한 자료 복사물 158쪽을 인수할 수 있었다.
뭐니뭐니 해도 그때 “한적100년사 자료탐사” 투어의 하이라이트는 스위스 연방정부의 기록원을 방문한 일이었다. 마지막 날인 9월14일 오전 7시경 Geneva 출발 열차편으로 스위스 수도 Berne에 도착한 것은 아침 이른 시간이었다. 사전에 한국제네바대표부를 통해 연락이 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리고 특히 대표부의 친절한 문화담당관이 이메일로 보내준 대중교통 안내지를 들고 큰 불편 없이 혼자서 전차를 타고 스위스 연방기록원의 고색창연한 건물을 찾아 갔더니, 주임 사서(司書)인 Dr. Bourgeois가 서고에서 미리 꺼내놓은 2개의 종이상자 뚜껑을 열고 조심스레 하나씩 집어내면서 설명을 하기 시작하였다.
대한제국 연호인 광무(光武)6년 즉 서기 1902년 고종황제가 민영찬(閔泳讚) 파리주재 공사에게 내린 신임장(Credential)의 진본. 이것은 아마도 일찍이 1968년 국제적십자사연맹주최 연수에 참가 중이던 고(故) 조준동(趙濬東, 당시 한적구호국장)씨에 이어 한적직원으로서는 내가 두 번째로 그 실물을 직접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볼 수 있었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바로 오늘 나의 발표주제인, 1903년 1월 8일자 대한제국에 의한 1864년 최초 제네바협약, 즉 “전지에 있는 육군 부상자의 상태개선을 위한 1864년 8월 22일자 제네바협약(Geneva Convention for the Amelioration of the Condition of the Wounded in Armies in the Field, 22 August 1864)”에 대한 가입(Accession)의 추진을 위해 발급된 신임장은 두터운 종이에 4각의 문양(紋樣) 테 안에 한문으로 인쇄되었으며 왼쪽 여백에 커다란 국쇄가 찍히고 그 상단에는 고종황제의 친필 수결(手決, Signature)이 쓰여져 있다.
또한 신임장 내용 문본은 황금색 비단 표지의 별책 부본으로 만들어져 함께 보존되고 있다. 신임장은 두 쪽으로 접여져서 아이보리색 두터운 종이봉투에 넣어 봉인되었고 그 표면에는 <스위스연방국 대통령각하>(大瑞士聯邦 太伯理爾天德閣下)라는 문구가 들어있다.
그 봉투는 다시 진한 남색 바탕에 4각형으로 붉은 매화꽃과 파란 잎사귀를 수놓고 황금색 술이 달린 비단 주머니에 넣은 것을, 민영찬 공사가 불어로 수기(手記) 작성한 제네바협약 가입기탁서와 함께 스위스정부에 전달한 것으로 추측된다.
1903년 1월 8일자로 된 대한제국 정부의 최초 제네바협약 가입서를 보면, 당시 주(駐 )프랑스 민영찬 공사는 필기체 펜글씨로 쓴 동 협약의 불어 문본 상단에 다음과 같은 전문(前文)을 붙였다.
“대한제국 대황제폐하께서는 육전에서의 부상군인의 생명을 구휼하기 위하여 프러시아, 이탈리아, 프랑스, 스웨덴, 덴마크, 벨기에, 바덴, 스위스 등 제국이 1864년 8월 22일 제네바에서 회동하여 제정한 이 조약에 가입한 정부의 수가 점차 많아진 것을 기뻐하시었음.”
그리고 또 그 말미에는 이렇게 덧붙였다.
“대한제국 대황제페하께서 1864년 8월 22일 제정된 본 조약을 매우 기뻐하시어 주 프랑스 특명전권공사 민영찬에게 전권을 위임하시었으므로 1903년 1월 8일 이에 서명 날인함.”
이렇게 짧은 일정이었지만 스위스 Geneva와 Berne에서 한국 적십자운동 100년 역사의 향기를 느끼며 온 몸에 스며들었던 전율 같은 감격과 환희는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나는 왜 여기에서 나의 개인적 여행담을 기술하였는가? 그 이유는 오늘 나에게 주어진 주제에 실물적(實物的) 감각으로 접근함으로써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두에 이르는 시기에 벌어졌던 한국의 다자외교(多者外交)의 현장에서 느낀 영감 내지 상상을 공유하고 싶기 때문이다.
II. 1864년 제네바협약의 유래와 특징
1. 국제적십자운동의 입장에서 볼 때, 작년(2012)은 적십자의 경전(經典)인 “솔페리노의 회고” 출판 150주년, 금년(2013)은 국제적십자기구 창설 150주년, 그리고 내년(2014)은 최초 제네바협약 조인 150주년을 연속적으로 기념하는 매우 뜻깊은 계기가 되고 있는 것이다.
널리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적십자운동의 아이디어는 쟝 앙리 뒤낭(Jean Henry Dunant, 1828-1910)의 저서 “솔페리노의 회고”에서 유래하혔다.
1859년 6월 24일 프랑스-사르디니아 연합군은 이탈리아 북부의 농촌 마을 솔페리노(Solferino) 부근에서 오스트리아 황국군대와 격전을 벌였다. 이탈리아 통일전쟁에 있어 결정적인 전투라 할 수 있는 솔페리노 대첩은 워털루(Waterloo) 전투 이후 유럽이 겪은 것 중 가장 소름끼치는 혈전(血戰)이었던 것이다. 열시간 동안의 치열한 전투에서 쌍방의 인명피해는 사망자만 6천여명, 부상자가 4만여명에 달했다.
프랑스-사르디니아 연합군 측의 의무기관은 사상자수에 압도되어 총체적으로 망가졌고 병참군단은 완전 기능상실 상태에 빠졌다. 프랑스 군대에는 의사 수 보다는 수의사(獸醫師)가 더 많았고 수송수단은 비참할 정도로 부족했다. 야전용 붕대가 들어있는 상자들은 통째로 일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부려놓았다간 개봉 안된채로 전투가 끝난 뒤 파리에 반송되었다. 프랑스군 병참사령관은 전쟁터에서 10,212명의 부상자를 후송하는데 6일이 걸렸다고 보고하였다.
부상자들은 전우의 도움을 받으면서 임시변통으로 만든 목발이나 자기의 소총 총신에 기대서 절름거리면서 음식과 물, 응급치료와 누워 쉴 자리를 찾아 인근 마을로 걸어갔다. 그 중 9천여명이 카스틸리오네(Castiglione)라는 작은 읍내로 몰려갔는데, 그 숫자는 그곳 주민의 인구수를 몇배 상회하였다고 한다. 부상자들은 주택, 헛간, 교회 어디라 할 것 없이 들어찼고 광장과 골목도 가득 메웠다.
제네바 출신의 31세 앙리 뒤낭은 6월 24일 저녁에 카스틸료네에 도착했다. 직업 은행가였던 그는 사적(私的)인 직업상 용무로 여행중이었기에 특별한 의학적 지식이 없었지만, 그의 자애심은 자기 주위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적 고통과 재난을 도외시할 수 없을 정도로 강열했던 것이다. 여러 날과 밤을 새워가면서 5백명이 넘는 부상자가 수용돼 있는 성당인 ‘키에자 마죠레(Chiesa Maggiore)'에서 일했다. 그들에게 물을 주어 갈증을 추겨주고, 상처를 소독하고, 붕대를 갈아주었다. 그리고 또 자기의 마부를 브렛시아(Brescia)시에 심부럼을 보내 붕대를 만들 헝겊, 담배 파이프와 권연(卷煙), 약초즙과 과일을 사오게 하였다.
부상자와 사망자를 돌보도록 하기 위해 현지의 자애심 많은 부녀자들을 모았다. 제네바의 친구들에게 편지를 써보내 물자지원을 요청하기도. 요컨대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자신이 직면한 인간적 고통을 가능한 한 경감할 수 있는 인도적 원조를 조직화할 하나의 사례를 창출한 것이었다.
뒤낭은 7월 11일 제네바에 돌아갔다. 이날은 바로 이탈리아 전쟁의 종전일이었다. 이미 과거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프랑스 령(領) 알제리아에 투자한 개인사업에서 파생된 재정난이 또다시 그를 괴롭혔다.
만일 그것으로써 뒤낭의 솔페리노 부상자 구호사업에 대한 가담이 종결되었더라면, 카스틸료네나 브렛시아, 밀라노 등지에서 그와 동일한 헌신을 보였던 또다른 선의의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그의 이름은 얼마 안가서 잊혀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그러나 뒤낭의 머리에서는 자신이 목격한 것들이 지워지지 아니 하였던 것이다.
1861년 그는 일체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제네바에서 칩거하면서 일년간 이탈리아 전쟁에 관한 기록물들을 검토한 연후, 인도주의 운동의 한 이정표가 된 책을 써냈으니 그것이 바로 “솔페리노의 회고(원문 Un souvenir de Solferino; 영문 A Memory of Solferino)"이다. 이 책은 두 부분으고 나뉜다. 첫째 부분은 그 전투의 구체적 서술, 즉 전쟁사의 유구한 전통에 따른 서사적(敍辭的) 기술이었다. 그러나 갑짜기 저자의 톤이 변하고 부상자와 사망자가 뒤엉켜 함께 누어있는 ‘키에자 마죠레’에 관한 그의 엄중한 묘사 속에 전쟁의 숨겨진 측면이 적라나하게 벗겨진다. 그는 그곳의 비참상과 핏물이 고인 물구덩이, 역겨운 악취, 붕대를 싸매지 않은 상처에 달라붙은 파리떼, 고통과 주변의 무관심, 죽음의 공포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면서 일그러진 부상자들의 입모습을 박진감 있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뒤낭은 단순히 전쟁에 대한 증오를 묘사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두 가지의 질문으로 이 책의 대미(大尾)를 장식하였다. 그것은 사실상 인류양심에 대한 절규이고 호소였던 것이다.
그런데 왜 나는 이러한 고통과 재난의 모든 장면들을 이야기하였으며, 아마도 나의 독자들의 마음 속에 고통스러운 감정을 불러일으키지 않았을까? ...
그것은 당연한 질문이다. 아마도 나는 또다른 질문으로 이것에 답할 수 있을지 모른다.
전쟁시에 열성적이고 헌신적이며 완전한 자격을 갖춘 자원봉사자들에 의해 부상자들에게 간호가 제공되도록 함을 목적으로 하는 구휼단체를 평상시에 설립하는 것이 가능하지 않겠는가?
이와 같은 간단한 질문은 바로 적십자 창설의 영감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이들 자원봉사자가 최전선 가까운 곳에서 구호활동을 수행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승인 되고 존중되어야만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생각은 뒤낭의 두 번째 호소로 표현되었다.
예를 들어, 소속 국적이 상이한 군사전술가 군주들이 쾰른(Cologne)이나 샬롱(Chalons)에서 회합하는 특별한 계기에, 그들이 이러한 종류의 회의를 이용하여 어떤 국제적 원칙을 제정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을 것인가? 즉 그 원칙은 하나의 신성불가침한 성질의 협약에 의한 제재를 갖추게 되는 것으로서 일단 합의되고 비준되면 유럽 각국에 있는 부상자 구휼단체들의 기초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그 결과 이 질문은 최초(original) 제네바협약의 제정으로 결실되었던 것이다.
2. 영문으로 <Convetion for the Amelioration of the Condition of the Wounded in Armies in the Field. Geneva, 22 August 1864>라는 표제가 붙은 1864년 제네바협약의 중요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첫째로 이 협약은, 불과 10개 조문으로 된 짧은 것이지만, 그 이후 시대의 변천 특히 전쟁 양상의 변화에 따라 여러 차례 (1899, 1906, 1929, 1949, 1977, 2005)에 걸쳐 확대, 수정, 보완, 재확인의 과정을 걸쳐 집대성된 방대한 국제인도법전 즉 오늘날의 무려 6백여 개 조문을 가진 ”제네바 법(Law of Geneva)"의 효시였다는 점이다.
둘째로 이 협약은, 그 이전의 전쟁법규와는 달리, 특정한 충돌사태나 특정한 시기에만 국한하지 않고 모든 형태의 전쟁, 모든 부류의 당사자 즉 전쟁희생자에 대하여 현재 뿐만 아니라 미래에 있어서까지 항구적으로 적용 가능하도록 마련된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점에서 국제법의 발전사상 중대한 일획을 그은 것이라고 높이 평가되었다.
셋째로 이 협약의 규정 내용을 훑어보면, 1) 군대 부상자, 그들을 가료하는 의무요원 및 구급차량을 중립화(中立化)하여 전투의 권외(圈外)에 놓이도록 하였으며, 2) 부상자의 인간 존엄성, 생명권을 절대 보장하였으며, 3) 의무요원의 동일국가 소속 부상자에 대한 치료행위의 계속과 자기소속 본진(本陣)에 귀환할 수 있는 권리를 보장하였으며, 4) 육전시에 부상군인을 가료 또는 원조한 현지 민간주민에 대한 면책(免責)을 규정하였으며, 5) 교전 양측 군대의 참모총장은 각기 자국 정부의 명령에 따라 이 협약의 이행에 필요한 조치를 취할 의무가 있으며, 6) 백지적십자(白地赤十字, A Red Cross on White Background) 표지를 만국 공통의 보호표장으로 결정하였다. 이상과 같은 특징들은 그 이후의 확대 발전한 제네바법 체계 속을 관류하는 대원칙(Major principles)으로 작용하고 있다.
III. KOREA와 제네바 제(諸)협약
1. 국제적십자의 창시자 앙리 뒤낭이 아직 생존하고 있던 시기에, 스위스에서 아주 멀리 떨어진 극동지역 끝에 위치한 우리나라에서 적십자운동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일찍이 19세기 말엽에 서양문물(西洋文物)의 격랑이 태평양을 건너 대한해협에 까지 다다라 와서 “은둔왕국”의 굳게 잠긴 문호를 세차게 두드리던 때, 적십자라는 인도주의 문명의 복음이 그 본원지인 구미(毆美) 등지로부터 조정으로 날아들어 왔는가 하면, 이 땅의 개화 선각자들은 선진국에서 보고 들은 적십자의 활동 사례들을 국내에 전파함으로써 관민(官民)을 함께 일깨웠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들은 구한말 때 창간된 “독립신문”의 논설과 또한 당시 외(무)부에 수취된 일부 유럽국가의 정부나 적십자사 문서 등 규장각(奎章閣) 소장 자료에 의해 입증되고 있다. 이것은 즉 적십자 운동을, 어느 제3국의 중개나 어떤 식민지 종주국의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우리의 선인들이 자주적, 창의적으로 그 본원지로부터 도입하였음을 웅변해 준다.
그러면 앙리 뒤낭이 말년에 스위스 북부 국경지대의 산촌인 Heiden(해발 800m)에 칩거하면서 양로병원 생활을 하고 있던 시기인 1890년대 말 한반도의 상황은 어떠하였는가? 한마디로 아시아 대륙의 지배를 노리는 일본제국, 이것에 대립한 청국과 제정러시아의 3대 강국이 우리 땅을 둘러싸고 각축전을 벌이고 있는 형국이었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일본은 우선 청일전쟁(1895)에서 승리한 여세를 몰아 우리나라 조정에 대하여 물리적 압박의 강도를 높였으며, 그 후 러일전쟁(1904)에서는 무적(無敵)의 위세를 자랑하던 러시아 함대를 한반도 근해에서 격파하고 대승하였다.
이러한 당시 위기상황에 대하여, 최근 한국의 한 중견 언론인은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1895년에서 1905년까지의 10년간 조선은 중국(청), 러시아, 일본 세력의 각축장이었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해 조선에서 중화(中華)질서가 무너지고 잠시 힘의 공백기가 생겼다. 청일전쟁으로 조선지배 야욕의 절반을 달성한 일본을, 남하하는 러시아가 가로막았다. .... 1903년 말에 이르러 동양의 뜨는 제국과 서양의 지는 제국은 전쟁의 레일 위를 마주보고 달리는 두 기관차의 꼴이었다.... 일본이 러시아에 선전포고한 것은 1904년 2월 10일.... 결국 러시아는 일본에 대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상술한 바 백척간두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요행히 국가 차원에서, 아마도 동양에서는 일본 다음으로, 최초의 제네바협약 가입(1903, 광무7년), 대한적십자사규칙 반포(1905, 광무9년 칙령 제47호)라는 위대한 유산이 남겨질 수 있었으니, 이는 실로 자랑스러운 우리 선조들의 음덕(蔭德)이라 아니 할 수 없다. 그 뿐만 아니라, 대한제국 정부는 “1864년 제네바협약의 원칙을 해전에 적용하기 위한 헤이그협약”(1899. 7. 29 제정, 헤이그 제III협약)에 1903년 2월 7일, 약칭 “전시 병원선에 관한 협약”(1904. 12. 21 제정, 헤이그)에 (일자미상) 각각 가입하였다. 그러나 앞에서 말한 최초 제네바협약(1864)에 대한 제1차 개정인 1906년 제네바협약은 그것을 심의, 의결한 외교회의부터 일본정부가 겸임(兼任)대표를 파견함으로써 한국은 배제되는 비운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어떻든 이러한 일련의 초기의 인도주의적 외교문서(Diplomatic instruments)에 가입한 사실은 아마도 UPU, ITU 등 국제적 행정기구 규정을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의 국제조약 가맹 일자 순위에 있어서 선두를 차지한 것이라고 믿는 바이다. 이것은 한국의 근대화 노력이 서양에서 전래된 과학기술과 함께 인도주의 조약들에 의해 견인되어 왔다고 볼 수 있지 않을 까?!
이러한 와중에 대한제국은 1905년 한일 간의 을사보호조약(乙巳保護條約)이란 미명 하에 반(半) 주권국으로 강등되었고, 1909년 “한일(韓日)적십자사 합동”이란 명분으로 대한제국 적십자사규칙(칙령 제67호)이 폐지되었다. 이 가운데서 적십자사의 합동만 보더라도 분명히 일국 적십자사에 대한 타국 적십자사의 “침탈”이라 할 수 있다. 본래 적십자사는 제네바협약에 가입한 독립 주권국가 내에 설립되는 것인 만큼, 일본으로서는 창립 4년 밖에 안된 대한제국의 적십자 활동이 아무리 미약한 것이었지만 그것의 존재 자체가 머지 않아 이룩할 국가 병합에 커다란 장애물이 될 것이라 예단했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늦었지만, 어떠한 형태로든 일적(日赤)측의 역사적 성찰 조치가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은 이와 같은 적십자사 폐지에 이어 1910년 한일합방(韓日合邦) 조약으로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 국권은 완전 상실되었다.
이렇게 하여 대한적십자사는 폐사(1909)되었고 나라는 주권을 상실하여 식민지화(1910) 하였으나, 1919년 3.1독립운동 후 상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함께 “대한적십자회”라는 명칭으로 부활, 항일 독립투쟁 전선에서의 인도적 임무 수행과 해외동포 지원에 임하였다. 1945년 광복 후 미군정하에서는 “조선적십자사”로 재건되어 다양한 사업기반을 구축하고 상당한 실적도 거두었으며,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따라 법률 제25호(대한적십자사 조직법)에 의거, 명실상부한 독립 주권국가의 기반 위에 1949년 10월 27일자로 오늘날의 “대한적십자사”로 재조직되었던 것이다. 그후 6. 25 한국전쟁(1950-53) 기간 중에는 온 나라와 온 국민과 함께 한 고난과 시련 속에서 성장한 이 한국 인도주의 운동체는 특히 1971년 8월 민족분단 4반세기 만에 처음으로 남북간 대화의 물꼬를 튼 1천만이산가족 찾기 남북적십자회담을 주도함으로써 그 존재 가치를 여실히 발휘하였으며, 오늘날에 와서는 과거의 “도움을 받는 자”에서 이제는 “도움을 주는 자”로 발전하여 국제적십자적신월운동체 안에서 당당히 자리매김 하고 있다.
여기에서 또한 구한말 1864년 제네바협약 가입이 후일에 남겨준 효과로 평가할 수 있는 두 가지 중요한 사항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로는 1957년 대한적십자사가 적십자사연맹(국제연맹의 전신)에 가입하기 위하여 ICRC의 승인을 받을 당시, “신생국 적십자사의 승인조건” 제1항(제네바협약이 시행되고 있는 국가의 영토 위에 설립된 적십자사일 것)에 규정된 요건이 1903년 대한제국 정부에 의한 제네바협약 가입 조치로써 충족되었으며, 둘째로는 1966년 대한민국 정부가 현행의 “전쟁 희생자 보호에 관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 4개 협약”에 대한 가입서를 스위스연방 정부에 기탁함에 따라, 그때 까지 1864년 협약에 "유일한 체약국"으로 잔류하던 KOREA가 비로소 삭제됨으로써 그 최초 제네바협약 문본이 102년만에 Archives로 옮겨졌다는 역사적인 에피소드 한 토막이 전해졌다.
2. 이미 다른 기회에 거듭 강조한 바와 같이, 제네바협약 내지 적십자운동과 "KOREA"와의 관계 형성은 단순히 외관상으로 나타난 외래문물(外來文物)의 전래 현상으로만 보아서는 안 된다. 이것은 우리 한민족의 역사 속에 고대로부터 면면히 이어져 내려온 민족정신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예로부터 우리 동양에서는 “항복하는 자는 죽이지 말라(降者不殺)는 것을 인륜(人倫)의 한 덕목으로 삼아왔다. 더욱이 고대한국의 역사를 더듬어 보면, 지금으로부터 근 5천년 전 우리 한겨레의 개국선조 단군(檀君王儉)께서 천명하신 “弘益人間” 사상은 백의민족의 덕목인 평화, 자비, 정의, 충효로 발전되었다. 그것은 다시 신라 화랑오계(花郞五戒)라는 전투규칙으로서, 급기야 민족통일의 대업을 달성하는데 있어 도덕적, 정신적 원동력으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즉 삼국통일의 간성이었던 신라의 화랑들은 화랑오계(일명 世俗五戒)의 가르침에 따라 문무(文武)의 기예를 연마하였으니, 그 중에서도 제4계인 임전무퇴(臨戰無退 저군과 싸울 때는 물러서지 말라)와 제5계인 살생유택(殺生有擇 생명을 죽일 때는 가려서 하라)은 절세(絶世)의 그리고 불휴의 경구로서, 이는 일찍이 제네바학파(Geneva School)의 태두인 쟝 픽테(Jean S. Pictet)박사가 제시한 근대 인도법 형성의 도형(diagram)상 이른바 “군사적 필요성(military necessity)"과 인도성(humanity)이라는 두 지주(two pillars)의 매우 압축적이고 난숙한 표현이었던 것임을 알게 될 때, 그러한 고대 선조들의 선각적(先覺的)인 예지를 온 세계에 드러내어서 자랑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인도주의적 전통은 우리의 민족정신으로 면면히 계승되어 왔고, 또한 현대에 와서는 대한민국 헌법 전문에서 “정의, 인도, 국제평화”라는 기본이념으로 천명되었다. 더 나아가서 신라의 화랑정신은 1948년 창건된 우리국군의 건군이념(建軍理念)으로 선포되었으니 오늘날 국군장병들은 국토방위의 신성한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 도의적 전력인 “인(仁)”과 물리적 전력인 “용(勇)”의 융합한 상승적 효과를 발휘하면서 어떠한 세력과 대적해 싸우더라도 옳게 싸우고 백전백승(百戰百勝)할 수 있는 사기를 다져가고 있다.
1950년 6월 25일 북한 공산군의 남침으로 발발한 한국전쟁(1950-53)은 우리민족에게 너무나 불행한 동족상잔의 비극이었지만, 다른 한편에서 보면 그해 바로 1년 전인 1949년 8월 12일자로 채택된 현행 제네바 4개 협약에 대하여 최초의 시금석(試金石)이 되었었다. 그 당시 아직 어느 참전국가에 대해서도 효력을 발생하고 있지 않던 이 인도주의 조약의 중요 규정들은 교전당사자인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쌍방이 전쟁기간 중과 특히 포로교환 협상 및 후속사업 수행에 있어 어떤 형태로든 준거규칙으로서의 역할을 하였던게 틀림없다.
그리고 또 한국전쟁의 변화된 양상들은 새로운 제네바 제협약에 새로운 도전으로 작용하였으며, 그 이후 세계 도처에서 빈발한 대소의 무력분쟁들은 “무력충돌에 적용되는 국제인도법의 발전 및 재확인”을 위한 제네바 외교회의(1974~1977)로 이어져서 그 결과 1977년 2개의 추가의정서(국제적 무력충돌에 관한 제I의정서; 비 국제적 무력충돌에 관한 제II의정서)를 생산하기에 이르렀고 이어서 몇년 전에는 제III의정서(적수정 표장)가 채택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현행 제네바 제협약과 추가의정서는 그것들의 국내 이행 및 보급 의무를 체약국들에게 부여하였으며 따라서 우리나라 대한민국정부와 대한적십자사는 그 동안 활발한 활동으로 다대한 성과를 거양한 바 있다.
VI. 결어-동 아시아의 인도법적 공통과제
나는 시간상 그리고 지면상 이유 때문에, 우리나라 정부와 적십자사의 국제인도법의 이행(Implementation)과 보급(Dissemination) 분야에서 각기 수행한 업적에 관하여 상세히 언급하지 않으려고 한다. 다만 이 세션의 토론자나 다른 세션의 발표자 중에서 어느 분이 그 분야에 관하여 말씀하여 주시기를 기대하고 또 부탁하는 바이다.
끝으로 나로서는, 오늘 제32회 국제인도법 세미나에 중국, 일본, 한국그리고 또 스위스 제네바의 ICRC 본부 및 북경의 동아시아 대표단에서 고명하신 석학과 전문가 여러분이 다수 참석하고 게시는 사실을 감안하여, 한반도의 국제인도법적 현안과 나아가서는 동 아시아지역의 공통과제를 함께 인식하고 그것들의 현실적 해결책을 강구하는데 가능한 협조를 구하고자한다.
첫째, 한국전쟁 정전협정(1953. 7. 27 체결) 60주년을 맞았는데도 미결사안으로 남아있는 인도적 문제(이산가족, 미귀환 포로, 정전 후 납북인사 등)의 조속한 해결을 위한 새로운 적극적 협동방안(concerted measures)의 모색;
둘째, 그중에서 특히 남북이산가족들의 조기 재회를 위한 방안으로서, 1980년대 중반에 개시된 이래 성공적 사례로 평가된 중국 본토와 대만 간의 이산가족 교류 방식과 성과를 한반도의 경우에 활용하는 가능성(주변국 특히 중국홍십자회, ICRC대표단의 설득 내지 멘토링 역할, 기술적 지원)의 적극적 검토;
셋째, 금년으로서 32회째 국제인도법세미나를 주최한 대한적십자사 인도법연구소의 다양하고 유용하면서도 저(低)비용의 프로그램 (연구, 교육, 출판, 기타) 모델을 동 아시아 지역 내의 수요(需要)국가들에게 전파하기 위한 기술적 교류 협력의 추진.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