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설, 공空을 깨우다 / 윤미영
바람을 기다린다. 깃털처럼 가벼운 몸짓으로 발밑을 살핀다. 제자리에서 돌아서지도 벗어나지도 않는다. 하안거 동안거가 끝나고 수행 스님이 돌아와도 하늘 언저리에 고요히 빗금만 긋는다. 바람이 오면 바람이 치는 대로 소릿결을 만든다.
능선을 넘어온 산바람은 길을 내지 않는다. 모양도 빛깔도 없다. 사물에 부딪혔을 때 길을 보여주고 소리를 듣게 한다.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이 바람을 맞이하여 응답한다. 산빛을 담아 청아한 음색을 울린다 하여 풍령風鈴, 풍탁風鐸이라 불리는 풍경이, 서기瑞氣 감도는 하늘에 얹혀 묵언 수행 중인 사찰을 깨운다.
풍경 안에는 물고기 모양의 단단한 금속이 달려 있다. '탁설鐸舌'이다. '목탁의 혀'라는 두 글자가 '탁'치는 듯, 얇은 혀가 경종을 울리는 듯, 작은 몸이 벽을 깨듯 내는 소리라 하여 종어성鐘魚聲이다. 수행자가, 잘 때에도 눈을 감지 않는 물고기처럼 항상 깨어 있으라는 의미가 침묵을 뒤집어쓴 듯하다.
사찰에 가면 소리가 예사롭지 않다. 경내에는 법구경이 있고, 산문 밖에는 물소리, 바람 소리, 새소리, 낙엽 지는 소리도 법어로 들린다. 법고는 축생을, 범종은 중생의 영혼을, 날짐승을 깨우는 목어와 운판과 경쇠다. 법고를 두드리는 스님의 뒷모습을 보노라면 '마음 심心'을 수없이 그리며 번뇌를 끊어 내려 하는지, 심장 박동마저 고요해진다. 새벽 예불 때 목탁은 잠든 천지 만물을 깨우고 중생을 미혹에서 깨운다. 범종각에서 속이 훤한 목어가 '너도 거짓과 위선으로 가득한 속을 파내어 비우라.'며 엄포를 놓는다.
절간 곳곳의 소리를 허투루 들을 게 아니다. 목탁 소리와 어우러지는 법음구法音具가 죽비와 같아서 사찰을 찾는 이들의 불성을 일깨운다.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경배하는 마음 자세도 달라진다. 불성을 깨우는 소리가 중생에게 경更을 치는 것이 아닐는지.
‘경을 치다’는 꾸지람이나 나무람을 들을 때 쓰이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밤 시간을 알리는 방법으로 경更에는 북을 치고, 점點에는 꽹과리를 쳤다고 한다. 자정인 삼경에는 북을 스물여덟 번을 쳐서 도성의 사대문을 걸고 사람들의 통행을 금지했다. 돌아다니다 걸리면 통행금지가 해제되는 오경에 풀려났으므로 경을 치르고 나왔다는 말이 생겼다. 풍경에도 그런 경책이 있을 터이다.
사람 사이에도 경을 쳐야 할 때가 있다. 몇 년 전, 친구에 대한 글을 써서 절연하다시피 한 아픈 경험이 있다. 그녀는 허리병을 앓다가 수술 후 외출할 때마다 휠체어에 의지했다. 그 무렵 내가 글쓰기 공부를 시작하면서 친구가 겪은 고통에 대해 쓴 글이 화근이었다. 친구는 자신의 사연이 글이 되어 떠도는 것이 불쾌하다며 소식을 끊고 이사를 가버렸다. 일말의 용기를 주려던 것이 심리적 거리만 넓히고 말았다. 글도 세 치 혀가 되는 걸 절감했다.
풍경 속 탁설이 사람의 입속 혀처럼 군다. 입 안에서 혀가 갖가지 말을 만들듯, 탁설은 바람이 치는 대로 다른 소릿결을 만든다. 혀가 들어가는 속담 중에 '더운 죽에 혀 데기'는 대단치 않은 일에 낭패를 보고 어찌할 바를 모르는 경우다. ‘혀에는 뼈가 없어도 사람의 뼈를 부순다’의 의미는, 혀가 단단한 뼈를 부술 만큼 위세를 지녔음을 경고한다. 풍경 속의 쇳고리가 겉쇠를 칠 때마다 내는 소리는 듣는 사람의 상황에 따라 다르기 마련이다.
베란다에 대나무로 만든 풍경을 걸었다. 앞산 너머 해풍이 건너오거나 뒷산의 바람이 다가오면 신호를 보낸다. 소리를 가만히 듣고 있으면 대숲에 있는 것처럼 가슴이 서걱거린다. 마음을 수시로 살피며 우유부단하다 싶으면 경을 쳐서 당겨주고, 매몰차다 싶으면 풀어준다. 빈틈없이 채워진 마음자리가 비워지고 맑아진다. 풍경이 제 몸을 치면서 좋은 기운을 집 안으로 들이고 악귀는 내모는 벽사수나 다름없다.
바람결에 스님의 선방에서 보았던 조고각하照顧脚下라는 글귀가 묻어난다. ‘발밑을 살펴보라’는 말 속에 가까운 사람일수록 마음을 더 쓰고 자신을 돌아보라는 뜻이 담겨 있다. 호젓한 절간에서 풍경을 유심히 올려다보는 이는 조고각하를 실행하는 사람이다. 그를 알지 못하나 지긋한 미소에서, 진중한 음성에서 기품이 우러난다. 인생의 연륜이 빚어내는 신뢰감과 반추하는 낯빛에 화색이 돈다.
탁설이 부딪힌다. 바람이 운다. 소리 없이 자취 없이 흐르던 바람이 마침내 소리 내어 운다. 가람을 오가며 들었던 법문 중에 '소리를 듣고 도를 깨친다'는 문성오도聞聲悟道가 있다. 풍경의 진언 같아서 들을수록 먹먹해진다. 옛 선비들은 '경敬'자를 해낭에 넣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흐트러지기 쉬운 마음을 챙겼다 한다. 말보다 행동이 앞서는 일상에서 의미 있는 글자 한 자쯤 심중에 지닌다면 마음의 소리가 느긋해질 것이다. 서걱거림이 어느새 가라앉는다.
마음이 탁설만큼 가벼우면 무탈할까. 천지간 한 점 풍경에 묻고 싶어진다. '살면서 늘 마음의 거리를 살펴라. 인연에 따라 서로 의존해서 살아라.'는 조언을 해 줄 법하다. 허공에 있어도 발밑이 두렵지 않은 자. 움츠리는 기색 없이 사붓이 주위를 추스르는 자. 찰나에 스칠 바람 같은 연緣을 알고 자연에 순응하는 법을 익힌 수행자의 모습이 저럴까.
풍경 속 쇠고리가 경쇠를 친다. 비었다고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공간 가득 세상 만물의 숨소리를 품었다. 탁설은 숨의 진동에 따라, 아우르고 다독이고 스미듯 변화무쌍한 울림을 준다. 울림이 사람마다 다르게 와 닿는다면 진리를 통해서 깨치는 마음자리의 차이일 것이다.
굳게 닫힌 법당 문을 연다. 쇠고리와 마른 공기가 부딪쳐 바람을 일으키는 소리를 가만히 비집고 절을 올린다. 고개를 드니 법당 추녀 끝에 매달린 풍경이 더욱 초연하다. 탁설이 벽을 친다. 적막하기 이를 데 없는 산중에 파문을 일으키는 저 푸른 음성. 공空을 깨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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