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1,토요漫筆/ 죽고 나서 따져볼 일 /김용원
나이가 들면서 어떤 형식으로든 관계된 사람들이 하나 둘 유명을 달리했다는 소식을 자주 접하곤 한다. 친인척은 말할 것도 없고 학교 동창 소식에서도 그렇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과도 그렇다. 어쩔 수 없는 일.
그런데 갈수록 그 소식들에 대한 반응이 달라지고 있는 자신을 깨달으며 놀란다. 4,50대 적만 해도 깜짝깜짝 놀란 다음엔 가엾다는 생각이 뒤따랐고, 이어 내가 그 경우가 된다면 어떻겠는가 생각이 깊어지곤 했다. 그러나 지금은 누가 이승을 떠났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 대상이 70살 미만이면 배우자는 어떤지, 자식들은 결혼시켰는지, 죽을 때 힘들지는 않았는지 묻는데 그 듣고 묻는 자세가 극히 객관적이다. 일단 듣고 나서 결론 또한 객관적이다. “조금 아쉽다”라든가 “다행이다” 정도.
80살이 넘은 지인이 하직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그땐 객관적이기보다 초월한 느낌이다. “아프시다더니 끝내 가셨구먼. 그만큼 살았으면 됐지 뭐.” 아니면, “너무 오래 사셨어. 내가 그만큼 살까봐 겁나.”라고 말하는 자신을 깨닫고는 놀란 적이 있다.
여기서 나는 한 가지 주제를 이끌어낸다. “늙는다는 것은 죽음에 익숙해지는 과정”이라는 것. 옛 선조들이 환갑잔칫상을 받고 나면 가묘를 만들고, 소나무로 널을 짜서 헛간에 매달아 놓고 매년 옷칠을 하며 간수했다던 그 속뜻을 알 것 같다. 미리미리 준비해 놓아 자손들이 갑작스런 일에 허둥대지 않도록 배려하는 의미가 컸으리라. 그때쯤이면 죽음에 대한 마음준비가 충분히 숙성되어 슬픔이나 아쉬움 따위를 초월한 경지에 이른 것이다. 또한 여성들은 시집올 때 해온 원삼치마저고리를 고이 모셔놓았다가 일 년에 한 번씩 살피고 걸쳐보기도 하였는데 그 또한 죽음에 대한 마음준비를 숙성시키는 한 과정이겠다. 우리 할머니가 그러하셨듯이.
이제 세상은 변했다. 불과 몇 십 년 전만 해도 부모를 화장시킨다는 것은 집안에서 허용할 수 없는 일이었고, 자손들도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감히 그런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떤가. 상여를 준비하고 발인제를 지내고, 묘지를 만들고 따위 복잡한 상례를 갖추려 한다면 다들 거북스러워하는 걸 지나 아예 말리기까지 하는 시대가 되었다. 자손들은 저 벌어먹고 사느라 바쁜데 장례를 치르고 3년상을 나고, 묘지까지 관리해 달라고 한다? 상상마저 허용될 수 없다.
그렇다. 지금처럼 죽음과의 자연스러운 조우가 삶과 병행되도록 숙성시키는 과정에 익숙해지는 게 가장 현명한 대처방법이겠다. 대신, 살아있는 한 오늘이 소중하고 움직일 수 있는 한 뭔가를 하며 한걸음 한걸음 화장터로 향하는 여행을 하다 보면 어느 날 틀림없이 찾아올 것이고, 까짓 그날 그때를 그냥 받아들이면 그만이다. 말 나온 김에 하는 말이지만, 천당이나 극락, 부활, 영생 따위는 죽고 나서 저승에 가서 따져도 늦지 않다.
/어슬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