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의 품안으로 돌아가라
사람은 누구나 모든 일이 뜻대로 되지 않음을 압니다. 그러나 사람은 그러함을 알고 있을 뿐 승복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는 일마다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다고 한탄을 하기도 하고, 푸념을 하기도 하고, 나아가 팔자를 탓하기도 합니다. 이것은 모든 일이 사람의 뜻에 따라 결정되지 않음을 말해 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앞에서 축원(祝願)을 올릴 때는 여의원만성취발원(如意圓滿成就發願)이라고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즉, 뜻과 같이 원만(圓滿)하게 성취(成就)되기를 발원한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많은 것을 어기면서 살다가 가지만 부처님은 어느 것 하나 어기지를 않습니다. 사람은 욕심을 내지만 부처님은 욕심을 모르는 까닭입니다. 만일 하늘이나 땅이 욕심을 부리고 무엇을 편애(偏愛)할 줄을 안다면 어느 것 하나 편하게 살 수가 없을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소나무는 예뻐하고 잣나무는 미워하는 산은 없으며 맑은 물만 좋아하고 탁한 물은 싫어하는 강이나 바다는 없습니다. 부처님은 무엇이던 동품(同品)으로 받아드리고 기꺼이 껴안아 줍니다.
무엇을 가려서 시비를 걸고, 버리고 택하는 분별이라는 것을 부처님이 취한다면 나는 새가 어찌 편할 것이며, 물속의 고기들이 어찌 마음 놓고 헤엄을 치며 편할 수 있겠습니까? 이는 부처님은 욕심을 간직하지 않음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만일 사람이 이러한 부처님을 믿고 따른다면 무슨 일이 뜻같이 않다고 한탄하거나 절망할 필요가 없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을 사람은 부처님처럼 살아야 한다고 바꾼다면 인간의 삶에서 비참한 것들이 사라지리라는 것은 너무나 분명할 것입니다. 편애(偏愛)나 시기(猜忌), 증오(憎惡)니 혐오(嫌惡)의 연극을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지극한 도(道)는 어렵지 않으니 오직 가리고 택하는 분별을 꺼려할 것이니라.” 고 옛사람은 말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가지가지 업(業)으로 말미암아 부처님을 거슬러 삶의 욕망에 빠져 그것만을 채우려는 본능을 간직하고 있는 모양입니다. 부처님이 주는 있는 그대로의 편안함보다 인간 스스로의 편안함을 찾아서 발버둥을 치려고 하는 모양입니다.
이러한 발버둥을 문명이라 여기면 될 것입니다. 이제는 인간이 문명의 멍에에 길들여져 부처님의 신실(信實)한 편안함을 잃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대인에게서는 무심(無心)히 부처님을 따른다는 말은 거의 헛말처럼 들리고 맙니다.
‘부처님의 품안으로 돌아가라.’ 이렇게 말을 하면서도 이러한 말을 잘 믿지를 않습니다. 문명이 인간을 편안하게 해준다고 환호하다가 문명이 강요하는 부담을 느낄 때마다 그저 푸념삼아 ‘부처님과 함께 살리라.’ 이렇게 넋두리나 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부처님 품안으로 돌아가라.’는 말을 ‘인간을 다시 찾으라.’는 말로 새긴다면 아직도 우리를 편하게 해주는 지름길이 되어 줄 것입니다. ‘인간을 다시 찾으라.’는 말은 곧 ‘양심을 회복하라.’는 말과 같은 의미일 것입니다.
2025.04.25.중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