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벧전 4: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어떤 의사의 경험담입니다. 개업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환자 한 사람이 들어왔습니다. 그날도 이 의사는 진료실에 들어온 환자에게 평소 습관처럼 웃으면서 인사를 건넸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진찰이 다 끝나갈 무렵이 되자 환자가 어렵게 말을 꺼냈습니다.
“저, 선생님, 별건 아닌데요. 아까 제가 진료실에 들어왔을 때 ‘안녕하십니까?’ 하고 인사셨죠? 환자에게 안녕하시냐고 물어보는 것은 잘못된 것 아닙니까?” 의사가 한 방 맞은 꼴이 되었으나 일리가 있는 지적이라 생각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다음부터 인사말을 바꾸었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인사를 겸해서 “어디가 아파서 오셨습니까?”라고 묻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썩 마음에 드는 인사는 아니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고 한동안은 별 탈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한 6개월쯤 지났을 때 또다시 황당한 일이 생겼습니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습니까?” 하고 인사를 했는데 환자의 표정이 이상해지더니 불쾌한 목소리로 대꾸를 했습니다. “선생님, 그 말은 제가 물어볼 말이 아닌가요? 어디가 아픈지 찾아 달라고 병원에 왔는데 저에게 물어보시면 어떡합니까?” 엉뚱한 오해가 생기면서 의사가 또 한 방 얻어맞은 격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그다음 날부터는 “어떻게 오셨습니까?”라는 인사말로 바꾸었습니다. 몇 달 동안 아무런 탈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한 여중생이 진료실에 들어오면서 문제가 생겼습니다. 친절하게 “어떻게 왔지?” 하고 인사를 했더니 이 학생이 잔뜩 긴장한 얼굴로 대답했습니다. “지하철 타고 왔는데요.” 당황한 의사는 마침내 새로운 인사말을 찾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우리는 세상 속에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 속에는 많은 종교가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자신들의 신앙에 맞는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갑니다. 가끔 이슬람을 믿는 이들이 보여주는 폭탄 자살 테러를 이해하기 어렵지만, 그들은 분명 자기 믿음과 신념을 가지고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칭찬하거나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책망하고 교훈을 주고 싶지만 적어도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신앙의 정체성에 충실하게 사는 이들이라는 사실은 배우고 싶습니다.
그 말은 우리는 그리스도인입니다. 그 말은 곧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믿고 그분을 따르는 이들을 말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순종하고 그 말씀을 따라 삶의 여정을 끝내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자 구원자로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성경을 중요하게 여기며 그 성경의 가르침을 따라 살려고 노력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신 하나님과 이웃 사랑의 가르침을 따라 살고 사랑과 관용을 실천하며 모든 사람을 존귀하고 존중이 여기며 섬기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로운 삶을 살기를 힘쓰고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아들이며 교회 공동체 생활을 통해 영적 성장과 예배자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하여 하나님의 뜻을 추구하고 따르며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과 다를 수 있습니다. 그들과 다르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들의 생각과 마음으로 우리를 이상하게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이 나를 보는 관점이 아니라 내가 하나님이 보실 때 그리스도인인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많은 대다수 사람이 보는 눈이 아니라 하나님 한 분이 보시는 눈이 중요합니다. 그것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함께 생각하고 은혜를 받고자 하는 것이 있습니다.
첫째 나의 관심이 하나님께 향하여 있는지 점검하라
외국에서 나가 사는 한국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한국 사람만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보면 자신들의 나라를 떠나서 공부, 직장, 사랑, 가족들 다양한 이유로 외국에서 살아갑니다. 그곳에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고 그렇게 살아가지만, 그들 대다수 자신의 나라를 잊지 않도록 언어와 음식, 그리고 같은 동포들과 교제를 하며 살아갑니다. 아이들에게 고국의 언어를 배우도록 힘을 쏟습니다.
한동안 미국에 이민을 가신 분들이 아이들이 한국말을 하면 영어를 잘하지 못한다고 한글 자체를 사용하지 못하게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로 인해 한국 아이들인데 한국말을 잘못하는 세대가 생겼습니다. 부모가 한국 사람인데 아이들이 영어밖에 못해서 할아버지나 할머니와 대화가 되지 않는 일이 생겨버렸습니다. 물론 당시에 한국의 위상이 크지 못해서 그런 생각을 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후에 후회하고 지금은 무조건 한국말을 배우게 합니다. 한국의 위상이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자신의 나라의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런데 사랑하는 여러분 이전에 아이들 영어를 위해 한국말을 하지 못하게 한 부모가 있었던 그곳에 그런데도 뿌리를 잊어서는 안 된다며 끝까지 한글을 가르치고 집에서는 절대 영어를 쓰지 않고 한국말을 쓰게 한 부모들이 계셨습니다. 그들 자녀는 당연히 두 언어를 쓰면서 한국에 와서도 쉽게 더 가까이 한국에 적응하여 잘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당연히 그런 선택을 하고 끝까지 정체성을 지켜준 부모에게 감사한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로 했다면 세상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정체성을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나는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이며 그의 자녀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요즘 사람들이 자신이 정체성을 이야기하며 자주 사용하는 말이 있습니다. “뼛속까지 한국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뼛속까지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의 조상 요셉의 제안으로 애굽 땅 고센 지역으로 들어가 살았습니다. 시간이 지나 요셉은 죽고 애굽의 왕과 백성들은 이스라엘의 요셉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을 구한 일을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허드렛일을 이스라엘 사람들을 시켰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 이주하여 산지 430년입니다. 몇 대에 걸쳐 고센 땅에 살았는지 계산하기도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들 가운데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 자체가 무슨 의미가 있냐고 하며 산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건 아주 옛날 조상들의 이야기라고 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아브라함을 생각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키려고 한 이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이스라엘 사람들로 하나님과 언약을 한 백성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애굽 사람들과 섞일 수 없었습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하나님의 나라 사람들은 세상의 사람들과 같이 살고 같은 문화 안에서 정치와 경제 모든 것을 함께 이루며 사는 것 같지만 결코 같을 수 없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을 삶의 기준으로 정하고, 말씀을 삶의 원칙으로 세우고 그의 나라를 위해 살아가는 사람과 세상에서 자신의 부귀영화와 영광을 위해 사는 사람이 가진 정체성과 가치관이 같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것에 집중하고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사는 것이 사는 것이 옳습니다. 그 말은 우리는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이 옳습니다. 부러워하거나 그들처럼 살려고 흉내를 내거나 그럴 이유가 없습니다. 당연하게 당당하게 소신껏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것입니다.
옛날에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습니다. 눈이 하나밖에 없는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서는 두 눈을 가진 사람이 장애인이라고 말입니다. 그 말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모두가 다리가 4개인데 2개 다리를 가진 사람이 태어나면 장애인 것입니다. 많은 사람이 기준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 땅에 그리스도인은 제법 많은 수가 있다고 해도 아직은 그 숫자가 믿지 않는 사람보다 적습니다. 직장생활도, 학교생활도, 어느 곳에 가든지, 교회가 아닌 이상, 선교단체가 아닌 이상, 적습니다.
그 말은 당연히 그리스도인으로 자신을 밝히고 살아가는 것이 쉽지 않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그러기에 더욱더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라고 밝히고 살아야 합니다.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내가 받아들이기로 했기 때문입니다. 나는 아무개 목사입니다. 나는 아무개 장로입니다. 나는 아무개 권사입니다. 집사입니다. 저는 교회에 다니며 하나님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습니다.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고백은 곧 그러한 삶을 살겠다는 다짐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옳다고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둘째 나의 삶의 방향이 예수 그리스도가 가신 골고다 언덕을 향하고 있는지 점검하라
어느 시절에는 그게 맞았는데, 어느 시절에는 다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이 복잡하여서 단순하게 사는 것이 맞지만 맞닥뜨리는 현실은 단순하게 답을 낼 때 맞을 수도 있고 틀릴 수도 있습니다. 오죽하면 그때는 그게 맞았고 지금은 그게 틀렸다고 말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느 시절에는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속도였습니다. 빨리빨리 입니다. 그런 때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속도가 아니라 방향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 빨리로 채워졌고 그만큼 왔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상황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 중심은 잘 되길 원하는 것입니다. 그것처럼 우리가 판단과 선택은 지금, 이 순간 영적으로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를 올라가고 있는 방향이 맞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조금은 무거운 이야기이지만 한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어서 들려드립니다.
나의 아버지 손양원 목사라는 책에 있는 내용 일부입니다.
아버지는 1950년 9월 13일 수요일, 유수내무서 율촌분주소 소장 및 내무서원들에 의해 잡혀가서 서울이 수복되는 날인 9월28일에 여수 미평과수원에서 총에 맞아 48세에 순교하셨습니다.
그전에 여러 차례 피신할 기회가 있었으나 아버지는 한사코 거절하였습니다. 전쟁이 터지자 서울에 있던 일부 목사들이 남쪽으로 몸을 피했다는 말을 듣고는 “이거야말로 큰일이로다. 이 민족의 죗값으로 하나님께서 채찍을 드셨는데 서울에서 회개를 외치다 제물이 되어야 할 목자들이 양 떼를 두고 내려왔다니 이를 어떻게 할꼬? 나라도 올라가야 하겠구나”하고 걱정하던 아버지였으니 피난은 애당초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실제로 상경하려고 했으나 길이 열리지 않아서 못 올라간 것입니다.
7월 21일 순천에서 내려온 나덕환 목사님이 피난을 권유하고 또 박재봉 목사님의 부탁을 받고 7월24일에 김흥복 집사님의 피난 권고를 뿌리치셨습니다. 그 집사님은 “그래도 우선은 살아야 일하지 않겠습니까?” 손 목사님은 이때 “그 말은 틀린 말이오, 내가 조금 전에 주께서 허락만 하신다면 희생의 제물이 되겠노라 말하기도 했거니와 우리 기독교는 본시 살기 위한 종교가 아니라,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기 위해 잘 죽기 위한 종교입니다. 꼭 살아서만이 복음을 전한다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씨가 죽어야 싹이 나듯이 죽어서도 얼마든지 복음을 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순교하기 전 손양원 목사님은 애양원 나환자를 대상으로 부흥 집회를 열었습니다. 그는 마지막 설교에서 충(忠)자는 입구(口)와 마음 심(心)을 요지부동하도록 한데 못질해 놓은 글자입니다. 자기가 가진 힘대로 힘을 다하는 것이 충성입니다. 죽음을 무릅쓰는 모험적 신앙이 충성입니다. 죽는 날까지 참는 것이 충성입니다. 시간마다 순교의 각오를 하고, 죽도록 충성을 다해야 합니다.
베드로는 오늘 본문의 말씀을 통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벧전4:15 너희 중에 누구든지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간섭하는 자로 고난을 받지 말려니와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으면 부끄러워하지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 때문에 정직하고, 악을 미워하고, 예배자의 삶을 살기 위함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사탄은 정직함을 가진 자를 미워하고 핍박하고 비난합니다. 여러 사람을 내세워 수치심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그 일이 살인이나 도둑질이나 악행이나 남의 일을 방해해서 죄를 짖는 것이 아니라면 당당하게 맞서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어느 것이 옳은지 분명하게 말씀에 비춰보고 그 뜻을 정했다면 당당하게 맞서 나아가는 것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설령 죽음을 맞이하는 일이 있다고 해도 말입니다.
그렇게 우리에게 본이 되는 믿음의 선배들은 살다가 갔습니다. 오래 사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건강하게 사는 것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살다가 어떻게 죽을 것인지를 더 깊이 생각하며 그 길을 갔던 것입니다. 오늘날 이와 같은 믿음의 선배가 그립고 또 우리 가운데 그런 십자가를 지고 가는 신앙의 자녀들이 있어야 하겠습니다.
지금 나의 신앙의 길이 어떤 길인지 점검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넓은 길을 가며 편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비록 힘든 길이지만 그 길이 맞는다면 기꺼이 어려움을 스스로 받아들이며 기쁨으로 헌신하는 삶을 사는 것이 옳습니다.
셋째 나의 삶을 성령님의 인도하심과 가르치심에 반응하는지 점검하라
생선은 바로 잡아 팔 때 가격이 비싸게 거래됩니다. 그거 며칠 놔두면 값이 내려갑니다. 이름은 똑같이 불립니다. 생긴 것도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싱싱함이 사라지고 점차 머리부터 썩어 내려갑니다.
믿음은 매일 반응하는 것입니다. 흘러간 것이 아니라 지금을 말합니다.
저는 돈에 흐름을 잘 알지 못합니다. 그런데 환율을 보면 그냥 신기합니다. 매일 아니 매 순간 환율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어제와 오늘이 다릅니다. 같은 돈인데 언제 외국 돈으로 바꾸느냐에 따라 다르게 줍니다. 그게 저는 신기합니다. 계속 신기할 것 같습니다.
성령님은 매일 매 순간 우리를 주장하십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매일 시간이 주어지기 때문에 성령님은 계속해서 우리에게 산소를 공급하시듯이 가르치고 계신 것입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반응해야 합니다. 그때마다 믿음으로 응대해야 합니다. 그때마다 감사로 응해야 합니다.
며칠 전에 성령께서 저에게 또 말씀하십니다. 아니 계속 말씀하셨는데 잘 듣지 않았습니다. 조용한 시간에 성령님은 “너 지금 목회를 숙제처럼 하고 있지!” 이런 말씀을 주셨습니다. “예”, 그러지 마라, 나는 네가 행복한 목회를 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자유로운 목회를 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죽으심으로 자유로움을 선물하셨다는 것입니다.
모르는 내용이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는데 또 잊어버리고 겹겹이 숙제처럼 설교 준비를 하고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성도를 숙제처럼 만나고 목회 계획을 숙제처럼 세우고 그렇습니다. 즐거움은 조금씩 상실되고 부담감은 항상 목을 조릅니다. 이건 예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걸 위해 독생자를 십자가에서 죽어 피를 흘리게 하신 것은 아닙니다.
한번은 영국 축구를 보는데 손흥민과 팀원들이 게임을 시작하기 전에 한쪽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왜 저러지 했는데 그게 ‘티보잉’이라는 것입니다. 이 티보잉이라는 말은 신조어입니다. 어떻게 이 단어가 생겼을까요.
미국 미식축구 덴버 브롱크스의 쿼터백 팀 티보는 필리핀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임신 초기에 아메바에 감염되어 목숨이 위태로워지자 의사가 낙태를 권고했지만, 목숨을 걸고 티보를 낳았습니다. 기적적으로 선교사의 가정에 태어나 고등학교까지 홈스쿨링으로 공부했던 팀 티보는 동네 미식축구에서 두각을 나타낸 결과 대학 미식축구까지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티보가 전국적인 지명도를 얻게 된 것은 2009년 1월 8일. 대학 미식축구 최강자를 가리는 BCS챔피언십에서입니다. 전국에 생중계되는 가운데 플로리다와 오클라호마가 진검승부를 펼쳤습니다. 스코어는 24대 14, 플로리다가 그해 패권을 차지했습니다. 경기가 끝나자 구글에서 난리가 났습니다. 게임 내용에 대한 검색 때문이 아니라 티보의 아이패치(혹은 아이블랙, 선수가 햇빛 반사를 막기 위해 눈 밑에 검댕을 칠하는 것)에 쓰인 글자 때문이었습니다. ‘John 3:16’ 티보는 평소 경기할 때 아이패치 위에 흰 물감으로 성경 구절을 써놓곤 했습니다. 엡 2:8-10, 막 8:16, 사 40:31 등등. 마침 이날 티보의 아이패치에는 ‘요 3:16’이 기록되어 있었는데 ‘John 3:16’이 뭔지 알아보기 위해 무려 9,300만 명이 몰려들어 검색해대는 통에 구글이 마비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이날 역전승의 주역이었던 티보로 말미암아 ‘요 3:16’은 구글 역사상 가장 많은 인파를 끌어모은 검색어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대학 풋볼의 슈퍼스타인 그가 프로의 세계에선 빛을 발하지 못할 것으로 내다봤습니다. 돌진과 비교해 패싱이 부족하기 때문에 프로에서는 벽에 부딪힐 것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2010년 티보는 덴버 브롱크스 유니폼을 입었지만, 전문가들의 예상대로 시즌을 거의 벤치에 앉아 보냈습니다. 2011년도 교체용 선수 신세를 면하지 못했습니다. 언론들은 일제히 ‘그의 승리는 우연이었을 뿐, 쇼는 끝났다.’라고 보도했습니다. 그러던 티보에게 기회가 찾아왔습니다. 팀이 1승 4패로 극히 부진하자 감독은 ‘티보 카드’를 뽑아 들었습니다. 티보는 프로 경기에서는 금지된 아이패치 대신 운동장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명 ‘티보잉’ 사람들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기도하는 그의 행동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티보잉이 시작되면서 함께 기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덴버는 1승 3패 이후 7승 1패의 성적을 거두며 꼴찌에서 일약 리그 단독 선두로 날아올랐습니다. 티보의 역전승이 계속되며 팀은 결국, 2011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2011년 10월 23일 마이애미 돌핀스와의 원정 경기, 4쿼터까지 치열한 접전 끝에 23대 23으로 경기가 끝나고 연장전이 시작되자, 티보는 연장 11초 만에 극적인 역전 터치다운을 이뤄내고 맙니다. 그것도 전문가들이 그의 약점이라고 판단했던 패싱으로 말입니다. 동료가 뒤엉켜 환호하는 가운데 티보는 한 편에서 조용히 기도를 올렸습니다. 이 경기 기록을 보면 재미있는 점이 있는데, 티보가 열 번의 패스에서 기록한 총 패싱 거리는 316야드였고, 리서치 결과 이날 이 경기의 시청률이 31.6%였다고 합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 아이패치에 쓸 수 없었던 하나님의 사랑을 경기장의 경기를 통해 하나님께서 써 주셨던 것입니다. 이날 경기 후 새로운 기록이 세워졌는데, 구글의 이날 ‘요 3:16’의 검색 수가 121억 2천 번을 넘었다고 합니다.
이 경기 이후 ‘티보잉’은 삽시간에 온 세계로 퍼져 나가 플래시몹의 형태도 수많은 ‘따라 하기’ 사진들이 올라오게 되었습니다. 티보잉 닷컴이라는 웹사이트도 개설되어 전 세계의 네티즌들이 자신의 기도 장면을 올리기 시작했습니다. 헬기 조종사로부터 유명 여배우, 아프리카의 원주민 등 수많은 사람이 서프보드 위, 비행기 안, 학교 교실 등 장소를 불문하고 티보잉을 따라 했습니다. 지금도 새로운 사진이 1시간에 2~3건꼴로 올라오고 있다고 합니다. 이러한 열풍으로 ‘티보잉’이라는 말이 신조어로 영어사전에 등재되었는데, 그 뜻은 “주변이 어수선해도 기도에 열중하다.”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티보는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이 당신의 사랑하는 이에게 단 한 번이 아닌 기회가 생길 때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처럼, 저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주님께 사랑을 고백하며 주님을 자랑할 것입니다.”
댈러스 카우보이스의 쿼터백 토니 로모는 그를 이렇게 평가했습니다. “하늘이 돕는 선수를 막아낼 방도가 없지 않은가.”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에는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입니다. 나는 축복의 사람입니다. 나는 영생을 얻은 사람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나는 세상의 모든 것을 가진 사람입니다. 하늘의 상속자입니다. 이런 말이 다 포함된 것입니다. 나는 부활의 몸을 입고 세상에 다시 예수님이 부활 후에 입은 몸으로 똑같이 부활할 것입니다. 이런 내용이 다 포함된 것입니다.
나는 예수님 가신 그 길을 따라 그분이 우리에게 보여주신 아름다운 사랑의 실천을 따라 살려고 마음먹고 작정하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이 포함된 것입니다.
그런데 왜 부담스럽죠, 왜 힘이 들고, 벗어나고 싶고, 불행한 것처럼 보입니까? 왜 그럴까요.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로 다시 태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거듭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천국을 놓지 않으려고 붙잡고 한쪽으로는 세상을 짝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불행해집니다. 그러면 짐이 됩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이 힘겹습니다. 그러면 숙제를 하듯이 율법적인 신앙인이 되는 것입니다. 매일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기대하고 거기에 집중하고 마음을 두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며 살아가는 성도는 이미 축복을 누리고 사는 것입니다.
‘성도’라는 말은 거듭나므로 거룩하게 된 사람을 뜻합니다. 얼마나 대단한 말입니까? 세상에서 구별되어 거룩한 사람이니 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은 대단한 축복의 말입니다. 믿지 않는 이들이 당신은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할 수 있도록 믿음의 길을 걷기를 바랍니다.
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성도입니다. 라고 말하며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가 모두 될 수 있길 바랍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