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전을 읽다보면 '한성부(漢城府)는 곧 옛 경조부(京兆府)이다. 라고 언급이 되어있다.
그런데 그 옛 적은 언제를 말하는 것일까?
고려시대부터인지 삼국시대부터 인지는 언급되어 있지는 않다.
조금은 다른 사료를 통해 추적해보기로 하자.
1.성종실록 > 성종 8년 정유 > 7월 12일 >
형조(刑曹)에서 아뢰기를,
“《원육전(元六典)》에 이르기를, ‘개성부(開城府)는 곧 한(漢)ㆍ당(唐)의 경조부(京兆府)이다.
[刑曹啓: "《元六典》云: ‘開城府卽漢、唐京兆府也。]
한성부가 아닌 조금은 다른 개성부에 관한 기록이지만 필자의 생각에는 한나라와 당나라때의 수도가 개경 혹은 한성부와 겹치는 지역이며 그곳이 경조부라고해석해야 되지 않나 싶다.
왜나하면 여지승람에도 개성부 상편에 언급되어 있듯이 덕수현(德水縣)이 개성부에 속해 있기 때문이다.익히 알다 시피 덕수(德水)는 황하의 다른 이름이다. 이 황하와 위수가 흐르는 관중평야에 한성부와 개성부가 같이 옹기종기 붙여있었던 것이다.
한,당(漢唐) 시절의 포함하는 수도인 장안(長安)이 우리의 역사에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왔을 것이다. 왜 그렇게 똑같은 말을 해야 했는지에 대해 다음의 글이 물음에 대한 대답이 될 것이다.
2. 태조실록 태조 3년 6월 태조 3년 6월 11일
"개성부(開城府)는 옛날 한(漢)나라·당(唐)나라 경조부(京兆府)의 전례에 의거하여 오로지 왕도(王都)를 숙청하는 일을 맡아 보게 하소서. 고려조의 말기에 이르러 법령이 해이해지자 군소배(群小輩)들이 어버이에게 효도할 줄 모르고 일족들에게 화목할 줄도 모르며, 이웃끼리 서로 도와줄 줄도 모르고 묵은 빚을 제멋대로 받고 저자에 있는 물건을 강제로 사며, 혹 질병이 있어도 구호해 주지 않고 사람이 죽어도 묻어 주지 않아서, 인륜과 풍속이 심히 아름답지 못하게 되었으니,[하략]
한당의 장안을 중심으로 한 지역을 분명히 언급하여 옛 일을 참고하라는 신하의 간언이다. 지리적으로 같지 않으면
전례를 참고한다느니 하는 말은 감히 못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