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주에 갔을 때 신라 왕족이었던 진공선사가 설악산 진전사에 가서 도의선사 부도 앞에 스스로 제자의 의식을 행하고 문도가 되었다는 말에 박장철씨께서 그 출처가 어디냐고 물었는데, 대답을 안하고 해어져 매우 서운했습니다. 이제 대답할 기회가 언제쯤일지도 모르겠기에 이번에 대답합니다.
가지산문중과 도의선사. 한국불교 조계종 종헌에 나오는 조계종의 종조(宗祖)이지요. 삼국사기 기록에는 도의선사가 교종을 신봉하는 신라 왕실의 푸대접으로 설악산 진전사에 칩거하다가 염거화상에게 법을 전하고 죽었다고 전하고 있고, 실제로 진전사지에는 지금도 도의선사의 부도가 있지요. 이 부도는 한국 부도의 변천사에서 매우 중요한 부도이지요. 처음 세속오계를 지은 원광국사 부도는 일반 탑과 다름 없는 모양입니다. 그뒤에 도의 선사의 부도는 기단부는 탑의 형태이면서 탑신 이상은 팔각원당형이 됩니다. 그리고 도의 선사의 제자 염거화상의 부도는 우리나라 부도의 전형인 완전한 팔각원당형인데, 원주 흥법사지에서 가져 왔다고 전하며, 지금 국립박물관에 있지요. 왜 흥법사지에 염거화상의 부도가 있었겠습니까? 모든 사람들이 염거화상의 부도는 원주 흥법사지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진공대사가 스스로 창원 봉림산문을 버리고 설악산 진전사로가 도의선사의 부도 앞에서 제자의 예를 행하고 가지산문중의 승려가 되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공선사는 봉림산 문중에 출가하여 오랫동안 김해부근에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흥법사지에 머무러다가 설악산 진전사로 갔던 것이지요. 그기서 가지산 문중으로 개종하고였는데, 이때의 인연으로 염거화상의 부도를 원주 흥법사에 세웠던 것이지요.
그런데 정작 진공대사가 진전사에서 도의선사에게 귀의 했다는 기록이 도대체 어디 있느냐는 말은 하지 않았네요. 진공대사는 가지산문중의 창시자 도의선사의 제자가 되기로 서약한뒤 깨달음을 얻어 소백산 영주 비로사를 지어 소백산과 김해일대를 왕래하면서 후학을 지도하였는데, 그가 신라가 망한뒤 고려 태조를 만나 설법을 하였습니다. 감명을 받은 고려 태조는 계속하여 왕사로 있게하였는데, 고려 태조 20년에 입적하자 비석을 세웠습니다. 시호를 진공대사라하고 탑이름을 보법이라 했는데, 이 비석이 한동안 조각만 남아 있었는데 현재 영주 비로사 경내에서 나머지가 발견되어 거의 완벽하게 복원이 가능하게 되었지요. 당시 최고의 학자 최언위가 비문을 짓고 이환추가 글을 씃는데, 최환규가 돌에 새긴것입니다. 여기에 진공대사가 설악산 진전사를 찾아 도의선사의 제자가 되기를 스스로 서약하고 개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비석이 발견됨으로써 도의가 신라 경주에서 바로 설악산으로 간 것이 아니라 현재 영남 알프스로 알려진 가지산, 운문산, 천왕산 일대에서 포교를 한 흔적을 추정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언양 석남사에 도의선사 부도를 누가 세웠을까요? 당시 상항으로 보아 김해와 소백산을 오가던 진공대사가 도의 선사의 흔적을 찾아와 석남사에 도의선사의 부도를 세웠을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안녕히 주무시길 4월 23일 12시 6분.
석남사 도의선사 부도
비로사 진공선사 보법탑비
첫댓글 궁금합니다. 설악산 진전사에 도의선사 부도가 있는데 석남사에 왜 도의선사 부도를 또 세웠을까요?
부도를 여러 곳에 세울 수 있는 것입니까?
부도란 입적하신 사찰이나 오래 주석하셨던 사찰에 세우는 것이 아닌가요?
문외한이라 여쭤봅니다.
석가모니 부처님의 사리를 처음에는 팔등분하여 여덟개의 탑을 세웠습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사리팔등분이라 부르는데, 부도도 마찬가지 입니다. 여러곳에 세울 수 있습니다. 원주의 흥법사 진공선사의 부도가(지금은 국립 박물관에 있지만) 비로사에도 있는 것과 마찬가지 입니다. 입적하신 곳이 아니라도 깊은 인연이 있는 곳에는 사리를 분과(分果)하여 몇개씩 세울 수 있습니다. 진공선사가 석남사에 도의선사 부도를 세웠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저 뿐이고요, "도의 선사 부도라고 전한다..." 정도로 이야기 하는 사람은 있지만 학계에서는 누군지알 수 없는 스님의 부도라고 합니다.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방랑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