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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2:4 우리가 한 몸에 많은 지체를 가졌으나 모든 지체가 같은 기능을 가진 것이 아니니
12:5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
폭력적인 정신병자 100여 명을 수용하고 있는 정신병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환자들을 통제하는 직원은 3명뿐이었습니다. 어느 방문객이 물었습니다. “혹시 저 폭력적인 정신병자들이 한꺼번에 공격해 오면 어떡하죠?” 그러자 직원이 웃으며 대답했습니다.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정신병자들은 절대로 단합하지 않습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참된 공동체의 힘은 숫자가 아니라 하나가 됨입니다. ‘신앙 공동체’는 같은 신앙 안에서 하나 된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한 성전’이 되고, 성령 안에서 한 몸을 이루어 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오늘은 교회 창립 48주년 기념 주일입니다. 년 수를 무시할 수 없지만, 예수님을 생각해 보면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숫자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면 훨씬 많은 제자를 두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사람들을 어떻게 해서든지 설득하고 그들이 떠나지 못하게 하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오히려 그들을 쫓아내신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로 단호하고 냉정하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때 오병이어를 행하신 후에 그들이 예수님을 임금으로 삼으려고 무리를 지어 예수님을 찾아다닐 때 오히려 예수님은 홀로 피하여 산으로 가셨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기도하셨습니다. 그 후에 결국 그들이 제자들이 있는 곳을 찾아 예수님과 만나게 됩니다. 예수님이 이때 살과 피를 흘려 그들에게 영생을 줄 것이라는 말씀을 하면서 더는 그들에게 오병이어의 기적을 줄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십니다.
그곳에 찾아온 군중과 심지어 제자들까지 이때 설교가 너무 어렵고 이상하게 여겨 하나둘씩 떠납니다. 결국, 제자 12명이 남았는데 그들의 믿음의 상태에 대해 성경은 이렇게 소개합니다.
요6:64 그러나 너희 중에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있느니라 하시니 이는 예수께서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 누구며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처음부터 아심이러라
예수님이 우리 가운데 계신다면 이렇게 똑같이 말씀하셨을 것입니다. 너희 중에 믿지 않는 사람이 있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나라는 이미 정해져 있습니다. 단지 그곳에 들어갈 하나님의 자녀를 찾고 계실 뿐입니다. 그 나라는 숫자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습니다. 그 나라의 문은 닫혀 있는 것이 아니라 열려있습니다. 하지만 찾는 사람 수가 적을 뿐입니다. 오는 이들에 대해서만 환영하고 열려있을 뿐입니다. 놀랍게도 그 나라를 찾는 이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고 예수님은 이미 우리에게 2천 년 전에 알려주셨습니다.
마 7:13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고 7:14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고 길이 협착하여 찾는 자가 적음이라
좁은 문은 닫혀 있지 않습니다. 열려있습니다. 다만 찾는 자가 적다고 하였습니다. 적극적으로 말씀은 힘을 내서 그 문으로 들어가라고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찾는 잃어버린 양은 모두를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누구에게나 기회가 있을 수 있으나 그 기회가 무엇인지 알고 붙잡고 그 안에 거하는 이들에게 영생의 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나라는 특징은 많고 적음과 상관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하나가 됨에 있습니다.
요10:26 너희가 내 양이 아니므로 믿지 아니하는도다 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주인으로 알고 따르는 양들이 모인 곳입니다. 그곳에는 그렇게 하나가 됨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제자가 하나가 되지 못함을 이미 아셨습니다.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이 원하는 것과 다른 쪽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제자로 거듭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서로 딴생각하고 마음으로 서로 경쟁하며 싸우고 있었던 것입니다. 자신들의 목적을 취하려고 예수님을 이용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마도 그들은 성경에 소개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자주 다투었을 것입니다.
눅 9:46 제자 중에서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나니
눅 22:24 또 그들 사이에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이 난지라
누가는 두 번이나 이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가장 하나가 되는데 힘들게 한 사람이 가룟 유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돈에 밝은 사람, 자신의 목적을 숨기고 예수님을 따르는 척한 무서운 사람입니다. 그렇다고 베드로가 쉬웠을까요. 또 불같은 성격의 제자들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좇겠다고 자신의 것을 다 버릴 결단이 있는 사람 중에 쉬운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을 것입니다. 목사를 사명으로 생각하는 사람 가운데 쉬운 사람이 있을까요. 한 공동체의 장로직임을 맡은 이들 가운데 쉬운 사람이 있을까요. 저는 100% 없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가룟 유다가 자신의 메시야 예수님을 은30에 팔고 자살함으로써 제자들의 무리에서 떨어져 나갔습니다. 베드로는 3번이나 부인했습니다. 나머지는 자기들 살겠다고 옷까지 벗어 던지고 도망갔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제자들을 다시 만나주셨습니다. 그들을 보듬어 주었습니다. 또한, 그들 가운데 한 명 가룟 유다는 없습니다. 11명의 제자도 더 이상 자신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120명의 제자가 모여 기도하면서 성령으로 하나가 되는 사건을 만나게 됩니다. 12명도 하나가 되지 못했는데 120명이 하나가 된 것입니다. 같은 마음으로 모였기 때문입니다. 방해자가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성령의 감동으로 거듭남의 역사를 체험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들에게 더 이상 높고 낮음은 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지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서 이루기 위해 목숨을 내어 주신 예수님의 뜻을 이어받아 계속해서 완성해 나가는 것뿐이었습니다. 서로 돕고 서로 나누고 서로 불필요한 것들을 지워갔습니다. 불만이 있으면 적극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마음을 모았습니다. 부족할 때마다 기도하며 말씀을 통해 새롭게 다시 정비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순교하고 멀리까지 선교하며 그의 나라를 구하였던 것입니다.
당연히 이때 믿음의 사람들이 늘어나고 함께 그 일에 동참하길 원하는 이들이 생겨났습니다. 곳곳에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곳에 제자들은 자신들이 만난 그 성령의 역사가 동일하게 나타나길 원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초대교회를 향한 똑같은 마음을 전했습니다.
우리는 하나라는 것입니다.
삼총사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프랑스 소설가 알렉상드르 뒤마가 지은 소설인데 그것을 영화화한 것입니다. 몇 번을 본 듯합니다. 여러분도 봤을 것입니다. 그거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칼을 서로 맞대고 구호를 외칩니다. “하나는 모두를 위하여, 모두는 하나를 위하여” 멋있습니다.
하나는 예수님을 위하여, 모두는 예수님을 위하여, 이게 교회의 구호가 아닐까요.
성경에 축복의 자녀는 분명하지만, 가정적으로 불행한 아버지가 있습니다. 그는 바로 이삭입니다. 그에게 한꺼번에 두 아들을 낳는 축복을 받았지만 두 아들은 경쟁하는 관계였습니다.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그랬습니다. 두 아들이 하나가 되지 못함으로 가장 힘들고 어려웠던 이는 어머니 리브가였을 것입니다.
에서나 야곱이나 각자의 삶을 산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부모 안에 살면서 하나가 되지 못하자 두 사람은 불행한 과정을 얻게 됩니다. 에서는 야곱을 죽이겠다는 마음을 품게 됩니다. 그리고 결국은 야곱은 형의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사는 것에는 성공했지만 집을 떠나야 했습니다. 물론 각자가 사는 것이지만 말입니다. 말년에 어머니 리브가는 작은아들의 소식을 정확하게 듣지도 못하고 죽었습니다. 두 아들은 결국 그렇게 헤어져 살다가 그의 후손들은 원수처럼 그렇게 대하며 서로 죽이는 관계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그렇게 생각해 보면 영적으로 아브라함과 이삭으로 이어지는 영적 계보는 이어가지만 육적으로 보면 썩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것은 바로 두 사람인데도 하나가 되지 못함이 가져다주는 불행입니다.
초대 왕 사울이 불행했던 것은 그가 블레셋과 전쟁을 치렀기 때문이 아닙니다. 당시에 전쟁은 너무도 당연하였습니다. 그가 불행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윗과 사울 둘로 나뉘었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이 서로 신고하고 감시하고 나뉘게 된 것이 이스라엘을 불행하게 한 것입니다. 나라가 보이지 않게 둘로 나뉘게 되므로 백성들은 왕에게 진심으로 충성하지 않았습니다. 그 의심은 사울을 미치게 했고 자신의 백성들을 죽임으로 패악한 왕임을 들어냈습니다.
자식도 아버지를 따르지 않고 마음이 나뉘었습니다. 사울 왕의 딸들도 마음이 멀어졌습니다. 그렇게 사울 왕은 불행한 왕이 된 것입니다.
네가 섬기는 교회는 행복하냐? 은혜롭냐? 즐겁냐? 이 물음 안에는 공동체가 하나가 됨이 있느냐? 하는 물음일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그것은 한 몸처럼 서로를 위해 줄 때 기꺼이 행복하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재정의 문제가 아니라 서로 자기의 짐을 지고 또 얼마든지 함께 하는 성도의 짐을 대신 지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그 마음들이 모일 때 교회는 선한 역사를 이룹니다.
설교 문을 찾아보니 2013년 5월 19일 징검다리에 대한 예화를 넣어 설교했습니다. 그 내용 중에 있습니다.
어느 날 책을 읽다가 징검다리가 수고하는 모습을 그린 글을 보다가 감동하였습니다.
내용은 이런 것입니다. 냇가를 건너기 위해서 징검다리가 필요합니다. 그런데 정작 징검다리는 냇가를 건너지 못합니다. 이 징검다리는 자신을 건너지 못하면서도 다른 사람들을 건널 수 있도록 다리가 되어줍니다. 그런 내용입니다.
가슴이 먹먹하면서 이렇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해보았습니다.
나를 밟고 지나 안전하게 다음 장소로 옮겨 갈 수 있는 그런 희생을 살 수 있다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가슴을 후벼 파는 것입니다. 우리 시온성교회에 징검다리가 되어주기 위해서 자신을 건너지 못하더라도 묵묵하게 그 냇가에 물을 맞서 싸워 그 자리를 지켜주는 이들이 많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 것입니다.
요즘 축구 선수 중에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는 손흥민입니다. 그는 토트넘의 주장이기도 합니다. 그가 우리를 기쁘게 해주는 것은 실력과 더불어 인성이 세계를 감동을 주기 때문입니다. 그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감동을 줍니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 2021~2022시즌 득점왕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미 지난 이야기지만 그 당시 손흥민이 득점왕이 되려면 반드시 마지막 경기에서 골이 필요했습니다. 영국 프리미어 리그에서 아시아 선수가 득점왕에 오른 것은 손흥민이 최초입니다.
마지막 경기에 이미 토트넘은 2:0으로 앞서고 있었습니다. 그 경기로 이미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에 진출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경기에서 토트넘 선수들이 손흥민을 위해 보여준 헌신은 대단했습니다.
감독은 손흥민을 빼지 않았습니다. 동료들은 공을 잡으면 손흥민에게 기회를 주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골키퍼가 손흥민의 슛을 철벽처럼 막아냈습니다. 하지만 후반전에 마침내 손흥민 선수가 두 골을 넣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득점왕 자리에 올랐습니다. 누구도 할 것 없이 모두가 함께 기뻐해 주었습니다. 그 경기를 관람하면서 얼마나 감동이 되었는지 모릅니다.
모든 토트넘을 위한 이들은 하나가 되어 손흥민을 응원해 주었기 때문입니다. 코치 스텝, 선수들, 응원하는 팬들 그리고 멀리서 방송을 통해 응원하는 모두가 하나가 되었던 것입니다.
교회가 인원이 적든지 않든지, 둘, 셋으로 나뉘어 있다면 그것은 참으로 불행 한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고 좋아 보여도 든든하게 서서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냥 예수님과 함께 기적을 행하고 사람들이 모여들고, 인기가 좋을 때는 모릅니다. 하지만 어려움에 부닥치자, 그 안에 있는 내면의 모습이 드러납니다. 어떤 상태인지 말입니다.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말씀을 전한대로 목사가 섬기기만 하면, 공동체 안에서 기도하는 대표자들이 기도한 만큼만 섬기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 생각을 말입니다.
그 핵심은 나를 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다른 지체 즉 형제자매를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가능합니다. 야곱이 자기를 먼저 생각할 때 에서와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울이 자기를 먼저 생각할 때 다윗과 문제가 생겼고 하나님과 문제가 생겼습니다. 12제자들이 거듭나지 못했을 때 자기들을 먼저 생각했습니다. 그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사도 바울이 자기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자 열심을 낼 때 문제가 생겼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주의 일을 하는데 문제가 생기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자기 의를 드러내고 싶은 욕망이 강할 때입니다. 나를 나타내려고 할 때 그때가 갈라질 때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랬습니다. 자신들의 경건을 나타내고 싶어서 주체를 할 수 없었습니다. 그 교만이 결국은 주님도 못 알아본 것입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는 서로 섬기는 공동체입니다. 서로 지체로 여기고 돕는 것을 기꺼이 감당하는 것입니다. 누구라고 할 것 없이 앞에서 끌고 가는 지체를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해서든지 돕고 격려하며 위로하고 함께 힘을 보태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나라 복음을 위해 달려갈 길 다 간 사도 바울과 같이 주님의 뜻을 나타내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교회가 세워진 그 목적에 합당한 그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말입니다. 오늘도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진심으로 하나가 되게 하시는 일을 행하여 주시길 간절하게 구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