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청천(靑川) 원도원리 출생으로 은퇴 후 다시 원도원리로 돌아와서 살고 있다.
어느 강줄기를 떠나 바다로 나갔다가 산란을 위해 다시 출생지로 돌아간다는 연어를 닮은 건 아니다.
아버지가 사시는 청천 중리 가까운 곳에서 살겠다고, 청천수양관 관리를 맡겠다고 자원했던 게 빌미가 되었다.
자연스럽게 고향 사람들과 어울리게 되었고, 글을 쓰면서 향리의 문학회원이 되어 살아가게 되었다.
대한기독문인회에 첫발을 내디뎠고, 어쩌다 활천문학회를 알게 되어 회원이 되었는데,
아직은 소극적이긴 하지만, 이젠 괴산문학회원으로 글을 올리는 중이다.
괴산의 임꺽정백일장에 응모해서, 장원 차상 차하 참방 중에 2022년과 2023년 두 차례에 걸쳐 '차하'로 입선도 했다.
일찌감치 괴산문학29집 원고를 모집한다는 공지를 봤지만 무심하게 마감일을 넘겼었다.
허나 마감일을 연장했으니 수필문을 보내라는 장현두 회장의 전화를 받고 부랴부랴 묵은 글을 뒤적거려
소소한 일상(1) 과 늦깎이의 변이라는 제목의 글 2편을 수정헤서 송고를 마쳤다.
글이란 같은 줄거리라도 글쓰는 시점과 상황 그리고 제목에 따라 내용이 다양하게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다.
내용이 확 바뀌고 줄인 늦깎이의 변을 올려본다. -觀-
늦깎이의 변 이관수
어느 날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 또 잠을 자는 꿈이었습니다.
그 잠 속의 잠결에 손님이 찾아와 큰방으로 들어가는 뒷모습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비몽사몽이어서 그분을 영접할 수 없었습니다. 뒤늦게 부스스 일어났고, 그 손님과 마주 대했을 때,
그분은 내게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그래, 늦게라도 나를 만났으니 다행일세, 사람이 살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게지!” 그 후의 내용은 기억되지 않았지만 너무나 신비한 꿈이었죠. 해몽이란걸 무시하지만, 잊히지 않는 꿈도 있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내 생애에서 지나온 날들을 돌아보면, 다른 사람들을 뒤쫓느라고 애를 쓰는 늦깎이임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그래서인지 대기만성(大器晩成)이란 용어가 마음에 쏘옥 들어옵니다. 내가 결코 큰 그릇도 아니고, 큰 그릇이
될 수도 없을 테지만, 남보다 뒤진 사람으로서 자신을 달래고 위안받을 말로 이만큼 좋은 용어가 또 어디
있겠습니까? 항상, 막차를 타듯, 뛰다가 넘어지고 또다시 일어나서 달리고, 숨을 헐떡이면서 겨우겨우
따라잡을 것 같은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는 서울 흑석동에서 남영동으로 버스나 전차로 통학했습니다.
통행금지가 시행되던 시절, 가끔은 막차를 타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당시에 알아준다는 S상고에 입학한 몇 개월 후에 주경야독(晝耕夜讀)을 원하시는
부친의 의사(意思)에 따라 야간학급으로 옮겼기 때문입니다. 매일 밤 아홉 시경에 학업이 끝나면
친구들과 어울려 재잘거릴 여유란 없었습니다. 막차를 타기 싫어서 서둘러 남영동 버스정류장으로
달렸기 때문입니다. 앞차가 출발하기도 전에 밀려드는 버스들은 승객이 이리 뛰고 저리 달리게 하는 일이
예사였지요. 목적지가 각기 다른 버스들이 줄지어 들어오기 때문이었습니다. 숨을 헐떡이면서 흑석동행
버스를 찾다가 보면, 어느새 남영극장에서 마지막 회 영화 관람을 마치고 밀려 나오는 관객들과 뒤범벅됩니다.
어물어물하다가는 영락없이 막차를 타겠지만, 회고해 보니 막차를 떨군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시내버스 차장은 안내양이 아니라 건장한 남성들이었습니다.
그들이 문을 여닫으며 “스토옵, 오라이”를 힘차게 외치는 버스는 항상 만원이었습니다.
빽빽이 들어찬 승객들을 비집고 안으로 들어가는 게 쉽지 않지만, 억센 차장의 손놀림과 운전사의 절묘한
운전 솜씨가 합작이 되어 승객은 빨려들 듯이 안으로 밀려들어 갑니다
지금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아파트가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동작동 국립묘지 못미처 비게라 불리던 곳에
흑석동 버스 종점이 있었습니다. 종점 가까운 곳에 집이 있어서, 혹시 버스 안에서 졸더라도 결코 집을
지나치는 일은 없었습니다.
초등학교 어린 시절에 함께 어울리던 진태라는 친구가 무심천 외딴집에 살고 있었습니다. 피난 가족이었는데,
그의 큰형은 유리에 페인트로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습니다. 유리에 그림을 그리고 뒤집으면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졌고, 그걸 액자에 넣어서 이발소 나 사무실 같은 곳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의 그림솜씨에 반해서 화가의 꿈을 품었었지요. 중학교 특별활동 시간에 펜화반에 들어 펜그림을 그렸고,
고등학교에서는 상업미술을 배웠지요. 그리고, 요르단에서는 학교나 교회, 센터나 가정집에 수성페인트로
벽화를 그려주었는데, 요르단인들이 ‘당신은 화가! (인타 환난, 혹은 인타 랏쌈)’ 라고 불러주었답니다.
전문 화가는 아닐망정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게 되었으니 늦게라도 꿈을 이룬 것 아니겠습니까!
왜 그런지 알 수 없지만, 지각한 사람은 또 지각할 확률이 높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듭니다.
하루가 멀다하고 변화하는 현실에서 늦깎이로 살면서, 여전히 남을 뒤따라갈 일이 비일비재(非一非再)합니다.
여전히 글쓰기에 도전(挑戰)을 멈추지 않는 건, 늦깎이 버릇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이겠죠?
-觀-
이관수 약력: '42년 1월 괴산 청천 출생, 청주중앙초, 청주중, 선린상고 졸업
서울신대 목회대학원 졸업, 청주서문교회 명예목사
괴산문학, 대한기독문인회, 활천문학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