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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두동교회를 위한 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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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단성에 대하여
대부분의 성도들은 이단이란 교회바깥에 있는 집단이나 사람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문가로서 판단할 때 교회 안에도 많은 이단들이 있다는 사실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다시 설명하자면 기성교회 목회자이면서도 이단적인 행위를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이단성을 가장 잘 분별할 수 있는 방법은 아무리 정통교회에 소속한 목회자라도 성도들을 사랑의 대상이 아닌 이용의 대상으로 삼아서 성도들로 하여금 목회자 자신이 원하는 사람이 되게 하거나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목적을 이루는 수단이 되도록 유도한다면 그것은 바로 이단적 행위라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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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도들은 목회자의 이용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이요 섬김의 대상입니다. 진정한 목회자는 성도들을 주님의 양으로 알아 귀하게 여기고 어떻게 양육할까? 어떻게 믿음이 성장하도록 도와줄까? 어떻게 낙심한 자를 격려하며 슬픈 자를 위로하고 성도들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도록 할까? 생각하며 성도들을 위해서 자신을 드려 헌신하며 섬기는 분이 아닐까요?
반대로 이단적인 행위를 하는 목회자는 어떻게 성도들에게 헌금을 많이 하게 할까? 어떻게 하면 성도들이 반항하지 않고 순종하도록 만들까? 어떻게 하면 시키는 대로 움직이도록 만들 수 있을까? 등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이용하는데 급급한 사람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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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목회자의 자기성찰부분
인간의 죄 중에 교만(驕慢)은 잘난 체 하고 뽐내고 버릇없이 구는 것을 말한다. 교만이 종교인에게는 치명적이어서 겸손할 줄 모르고 ‘경건한 교만병’에 걸리면 거의 치유가능이 없을 정도이다. 교만은 대체로 힘있거나 잘난 사람들, 지위가 높은 사람들, 일시 성공한 사람에게 마약처럼 스며든다. 교만병의 병색은 독선과 독단이라는 증세로서 나타난다. 자기만이 옳고, 자기집단만이 가장 선한고 정의로운 진리를 보유하고 있다고 장담하면서 자기와 다른 생각과 행동을 공격한다. 요즘 말로 삶의 다양성과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획일적 사고를 좋아한다.(김경재목사)
교회에서 목사님께 바른말을 하거나 다른 의견을 이야기하면 분열의영, 사탄의영, 비판의영, 이라고 치부해버리며 설교시간에 교인을 향해 사탄내지는 귀신이라고 규정해 버리는 분의 말씀보다는 이재철목사님과 같이 자기 자신에게서 그 원인을 찾으시는 분의 말씀이 더 공감이 갑니다.
“내가 기꺼이 내 자신을 주님의 도구로 내어놓았음에도 전혀 변화되지 않는 교인이 있다면, 오히려 인간적으로 나를 괴롭히는 교인이 있다면, 그것은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여전히 모난 상태의 내 심령을, 가다듬어 주시기 위한 끌로 그를 사용하고 계심을 믿어야 한다. 그때에만 우리는 언제 어디서나, 누구에게나, 평생 봉사와 섬김의 목회자로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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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교회성장론에 대하여
“사실 요즘 교회성장학이 많이 거론돼요. 제경험상, 목사들은 자꾸 교회를 성장시키는데 포커스를 맞추어요. 사실 거기에는 많은 문제의 원인이 있어요. 목사는 교회를 성장시키는 매니저가 아니거든요. 교회성장 이전에 목사에겐 자기성장이 있어야 되거든요. 목사는 끊임없이 전인적으로 성숙해가야 해요. 성령의 체험과 지적인 성장이 함께 가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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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바른 말씀의 전달
홍수에 먹을 물이 없다는 말처럼 말씀의 홍수 속에서 바른 말씀을 듣기가 이렇게 힘들고 어려운지 몰랐습니다. 마치 사막에서 오하시스를 찾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목회자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이야기 하는척하면서 자신의 목회적경험이나 교인들에게 하고 싶은 자신의 이야기를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포장하며 이야기하며 순종을 강조 합니다. 그러면서 교인들을 조종하려합니다. 잘나고 똑똑한 이들은(교권주의자) 끊임없이 무슨 멋진 명분을 만들고 교리를 만들고 다른 이들보고 따라오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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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자들은(교권주의자) 배려하면서 억압하고, 동정하면서 수치를 주고. 친절하면서 불편함을 주고, 가르쳐주면서 컨트롤하려는 그런 목회를 하다 보니 결국 배신을 당합니다. 사실 그것은 목회자 본인이 느끼는 배신이지 성도들의 배신이 아닙니다. 성도들은 배신이 아닌 탈출을 한 것이지요...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이 조종을 하려합니까? 설교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조종을 하려하고, 조언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조종을 하려합니까? 목회자는 이러한 자신을 백기사로 생각하지만 결코 아닙니다. 자신의 갑옷에 갇혀 있는 어리석은 행동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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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낯선 사람들’ 이 설교는 홍수에 마실 물이 없는 이들에게는 생수와 같은 말씀 갔습니다. 조종하고 컨트롤하려 하지 않습니다. 길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순종하라고 강요하지 않습니다. 교회의 교인을 양분하지 않습니다. 묵묵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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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일꾼으로 살려는 사람은 어려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세상은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팔자려니 여기고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모세는 자유의 꿈을 불어넣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모세는 해방운동의 지도자이지만, 바로의 입장에서는 반역자입니다. 예언자들은 모두 체제에 길들여질 수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질서와 가치에 대해 물음표를 붙이곤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어려움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이 어렵다고 하여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고 투덜거리는 것은 약자의 버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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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말씀이 살아있는 교회를 소망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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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창세기1장27절 말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이 말씀을 좋아합니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 하나님 앞에 동등한 우리들의 존재를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동등합니다. 누구나 똑같이 하나님의 율법 앞에 서야 합니다. 사람은 율법 앞에 서야 하는 존재이지 율법을 휘두르는 존재가 아닙니다. 그런데 종교지도자들은 율법 앞에 서지는 않고 율법을 휘두르기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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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많은 목사들이 교인들을 자주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기독교의 죄론에 대한 심층적 이해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사실입니다. 인간의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은 철저하게 종말론적인 사건입니다. 악한 자가 평생 잘되는 수도 많으며 반대로 무죄한 자가 이유 없는 고난을 당하는 일도 허다합니다. 자신의 자유로운 의지로 활동하시는 하나님을 기껏 권선징악의 원리쯤으로 선포한다면 사람의 불안 심리를 자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어서 나름의 목회적 성과를 얻어낼지 모르지만 결코 복음의 근본에 충실한 설교라 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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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개신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교회는 신학은 미국 근본주의(복음주의)이며, 정서는 유교권위주의, 천국관은 샤머니즘적 천당, 목회철학은 조용기 목사의 3박자 축복 이며 목사를 섬기는 것을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치우쳐가며 가장먼저 영권을 내세워 무지한 일방도로를 만들어 그들만의 천국, 그들만의 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개신교회의 정체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말씀선포는 참으로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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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말씀을 연구하고, 거기서 현재 공동체에 계시되는 하나님의 뜻을 찾아내는 일에 최선을 다하는 사명과 책임을 갖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목사의 설교는 사람들로 하여금 말씀에 비추어서 자기를 돌아볼 수 있게 하고, 죄와 오류와 무력함을 보게 하고, 죄인을 사랑하고 구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깨닫게 하고, 그래서 자유와 생명을 얻게 하고, 참된 자녀로 살아갈 수 있는 용기와 힘을 북돋아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그것만을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쏟아 부어도 다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바로 그 목표입니다. 그래서 목사는 항상 더 겸손하게 연구하고, 기도하고, 성령의 깨우쳐주는 역사를 간구하는 것입니다. 설교자의 인격과 삶이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설교란 어느 분의 지적대로 지적 전달에 그치는 강의와는 달리, 설교자의 삶과 인격이 하나님의 말씀에 녹아 증언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설교자는 언제나 자신의 삶과 인격이 설교 속에서 말씀의 능력과 함께 드러나야 함을 의식해야 하며, 그것과 유리된 말씀선포는 결국 위선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자각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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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이 살아있는 설교 바른설교를 듣고 싶다는 작은소망을 갖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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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감리교의 정체성 있는 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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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적인 감리회 신학과는 거리가 멀고, 복음주의를 내세우나 복음적이지도 못한 정체불명의 신학을 가진 분이 감리회신앙을 혼돈케 하는 일이 없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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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는 항상 남에 탓만 한다."라는 격언과 "농부는 밭을 탓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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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리교회는 감리교 신앙의 4대 기준으로 성서, 전통, 이성, 경험을 받아들이고 있는데 감리교 신앙의 4대 기준중의 하나인 이성을 버리라는 설교말씀을 자주 듣게 되는 것 같아서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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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진정한 교회
모든 신앙인은 하나님의 백성이다. 언제 어디서나 교회는 온전한 하나님의 백성이요, 온전한 에클레시아이며. 온전한 신앙인의 모임으로서 믿는 사람은 누구나 왕같은 제사장이며 거룩한 백성이다.
그렇기에 모두가 교회 안에서 동등하다. 계급으로 작동하는 사제제도, 목사제도는 반성경적이다. 하나님의 백성 안에서는 구별이 있으되 달란트에 따른 구별 밖에는 없다. 구별은 있으되 차별은 없고 모두가 기본적으로 동등하다.
교회를 개인화해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교 메시지에 있어서 근본적으로 중요한 것은 개인으로 구성된 백성 전체의 구원이다. 교회는 하나님이 세우신 것이지만, 인간 없이 교회란 없다. 하나님의 자비로운 사랑의 부름과 선택 없이 교회란 없듯이 인간의 순종하는 신앙의 응답과 동의 없이는 교회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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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는 하나님의 백성이지만, 교회를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는 하나의 신에 준하는 실체로 보아서는 안 된다. '항상 개혁하여야 할 교회'란 특별히 어려운 시기의 슬로건만이 아니라, 순례도상의 하나님 백성이 거듭 새로운 노력으로 더욱 새롭게 만들어 가야 한다는 매일의 하나님의 요구이다.
교회는 영이 채워져 있고 영이 활동하고 있는 사람이다. 이 사람이 바로 성전이요. 교회로 세워지는 건물이다. 즉 영의 집이다. 고로 건물을 교회라고 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벽돌건물을 집으로 삼아 계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주님에 의해 전달된 하나님의 영은 여러 면에서 교회의 존립 기초요, 생명 원리이며 활동 능력임이 드러난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력과 권능에서 오는 영에 충족되고 생활하며 유지되고 인도된다. 교회의 모든 원천. 존재. 존속이 그리스도의 영의 덕택이다. 이런 의미에서 교회는 성령의 피조물이다.
하지만 교회와 성령을 동일시하는 것은 위험하다. 성령은 교회의 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이다. 성령과 교회를 구별할 줄 아는 교회는 교회 내에도 죄와 허물이 있음을 인정하고 계속적인 죄의 지적과 함께 함께 변화를 추구해 나가야 한다.
회개는 하나님 나라의 선포가 인간에게 요구하는 것으로, 이것은 외적인 고행이 아니라, 근본적이고 전적인 내적 전환이요, 전인격적으로 하나님께로 회귀하는 것이다.
교회는 다섯 가지 성격을 지닌다.
1. 순례하는 교회 - 교회는 믿는 사람 그 자체이므로 일시적, 잠정적, 과도기적 존재이다.
2. 신뢰하는 교회 - 하나님이 이 시대를 통치하신다는 것과 목사나 사제 중심의 교회당 종교나 인류의 불의한 현실을 개혁하도록 역사하신다는 것을 믿는 신앙으로 나아가야 한다.
3. 봉사하는 교회 - 교회가 할 일은 영적 봉사이다.
4. 죄인들의 교회 - 교회는 죄인들이며 죄인들을 위해 존재한다.
5. 순종하는 교회 - 교회는 불의와 부정에 대해 거듭 지적해야 하고, 거듭 회개해야 한다. 하나님의 통치하에 서 있어야 하며 그럼으로써 사랑으로 세상의 인간을 섬기고 돌보아야 한다.
기독교는 인간의 변화를 지향한다. 그것이 그리스도교 메시지의 핵심을 이루는 회심이다. 우리는 회중 중심이 아닌 조직 중심, 목사 중심, 사제 중심의 종교, 역사 종교라는 이름 아래 신도나 사람을 이용하고 희생시켜 온 분쟁의 역사를 솔직히 고백하는 용기가 필요하다.
아울러 사회의 변화, 구조의 변화도 지향해야 한다. 인간은 본성상 더불어 살게 되어 있다. 혼자 회심한 후 사랑으로 가득 차서 이웃과 사회를 향해 나아가더라도 사회라는 구조와 이웃이 그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사회 혹은 교회가 부조리, 불화, 착취와 수탈로 덮여 있는데 혼자 깨끗하고 평화로울 수는 없다.
자신과 교회를 되돌아보지 못하고, 끊임없이 현재와 미래를 조망하지 않는 종교는 더 이상 삶을 향해 또는 이웃을 향해 영감을 불어넣을 수 없다.
교회는 맹목적이고 습관적으로 피조물인 목사나 사제의 말만 그저 믿고 따라서는 안 된다. 늘 성령으로 예수 그리스도에게 돌아가 묻고 자신의 양심에 따라 처신할 수 있는 신앙이어야 한다. 이럴 때 신자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교회가 될 수 있는 것이다.
- 한스 큉의 글에서 발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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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죄를 강조하는 설교에 대하여
“기독교 신앙의 토대를 죄에 놓고 있다. 일견 매우 당연한 것처럼 보이는 이런 주장이 과연 신학적으로 정당할까? 영적인 긴장이 있는 사람은 ‘죄’에 예민하다는 김 목사의 주장은 죄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시고 친구처럼 지내셨던 예수님의 복음이 아니라, 그 예수님을 죄인들과 먹고 마시는 사람으로 몰아붙였으며 스스로 죄를 지을까 노심초사하던 바리새인들의 율법처럼 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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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죽어야 성령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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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생각하는 설교는 “자신의 주관적 신앙과 경험을 청중들에게 주입시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신비와 존재의 신비 앞에 직면하도록 안내하는 행위이다.” 기복주의나 도덕주의, 죄에 대한 공격, 세계 선교의 비전이 성서의 핵심적 메시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성서를 좀더 깊이 들여다보라고 권고하고 싶다. 김 목사의 경우처럼 아모스서를 읽은 목사가 청중들을 좀더 윤리적인 사람들이 되도록 설교해야한다고 생각했다면 그는 처음부터 신학공부를 다시 해야만 한다. 아투르 바이저는 아모스서의 주제를 이렇게 설명했는데, 나는 그게 옳다고 본다. “하나님의 의가 인간의 예상을 넘어서 실현된다.” 이 말은 하나님의 신비를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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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예상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신비는 곧 역사와 존재의 신비이다. 성서를 통해서 그런 세계를 조금이라도 엿본 설교자는 가능한대로 실증적이고 공격적이고 선동적인 설교를 하지 않는다. 오히려 소극적으로 설교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인식능력과 언어세계가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에는 너무나 옹색하다는 사실을 절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해야 한다는 당위와 하나님을 말씀을 전할 수 없다는 불가능성 사이에 설교자가 실존하고 있다는 칼 바르트의 가르침은 의미심장하다. 남녘교회 임의진 목사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나는 흥분하고 싶지 않았다. 그처럼 내 친구들도 흥분하지 않고 차분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내 목회철학이다. 진정한 열망과 진정한 열광은, 그리고 진정한 신비주의는 편안한 이웃들과의 관계 속에서 피어난다.”(기상, 11월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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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목사를 비롯해서 우리 설교자들에게 조심스럽게 한 마디 해야겠다. “설교자가 죽어야 진리의 영인 성령이 산다.” 겨우 ‘큐티’ 수준의 성서읽기로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하는 행위야말로 김 목사가 위협조로 주장한 ‘하나님의 말씀을 대적하는 죄’(253) 아닐는지. 이 비평의 항해를 끝내면서, 대표적인 강해설교자의 설교가 복음을 훼손하는 종교적 잔소리에 불과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내 마음은 불편하다. 이 글에 과격하게 표현된 대목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김 목사만을 향한 게 아니었음을 김 목사도 충분히 헤아리시고, 너그럽게 받아주실 것으로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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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저주, 협박, 정죄(심판)적 설교 이대로 좋은가?
요즘 연일 대형교회 목사님들의 설교에 대하여 말이 많은 것 같습니다. 특별히 큰교회 목사님뿐만이 아니라 중대형 교회목사님들의 설교에서도 교인들을 향해 저주, 협박, 정죄(심판)적 설교가 난무 하는 현실 속에 평신도들의 대응은 어떠해야 하는가 라는 고민에 직면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함께 고민하고 좋은 대응 방법 등을 생각해보고 나누어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최근 순0음교회 조00목사님의 설교에서 “하나님의 주권에 저항하고 교회와 사역자에게 대적한 국가나 개인은 반드시 망한다.” 라며 하신말씀에 당당뉴스 국인남편집장의 글을 보겠습니다.
“대부분 총은 적을 향해 쏘는 무기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먼저 방아쇠를 당겨야 만이 생명을 유지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요즘 전쟁터도 아닌 예배당에서도 생뚱맞게 총을 맞는 경우가 있다. 목사들이 “하나님의 주권에 저항하고 교회와 사역자에게 대적한 국가나 개인은 반드시 망한다.”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가 배운 말씀에서는 ‘하나님의 주권’은 협박하고 휘두르는 칼날이 아니라, 그의 나라와 의를 위해 사랑과 긍휼을 실천하며 사는 삶이 하나님의 주권으로 알고 있다.
아마도 요즘 성경책이 자주 바뀌면서 잘못 인쇄되었나보다. 우리의 성경 66권을 다 찾아보아도 그런 협박은 없기에 말이다. 중세시대 종교의 타락을 다시 보는 것 같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외치는 자의 자리는 항상 자신부터 먼저 비워야 한다. 성도들을 협박하는 것은 오만의 극치가 될 수 있다. 설교가 도를 넘다보니 예배의 경건성은 간 곳없고 사람의 독선과 독주만이 보일 뿐이다. 하나님의 주권은 의를 위해 핍박 받는 자, 애통하는 자의 자리에 앉는 것이라 했다. 또한 예배는 사람의 의가 드러나는 곳이 아닌, 하나님의 의와 사랑이 선포되는 곳이다.
성경 66권을 엑기스로 줄이면 오직 ‘사랑’만이 남는다. 하나님은 당신의 실체가 사랑이심을 수없이 긍휼함과 죄 사함으로 보여주셨다. 또한 가죽옷을 입혀주시며 푸른 초장 쉴 만한 물가로 당신의 자녀들을 인도하시는 좋으신 하나님이다. 그런데 오늘날 수많은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을 진노의 하나님, 벌만 주시는 무서운 하나님으로 각인 시켰다. 그것도 부족해서 하나님보다 더 높이, 더 큰 자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주권을 핵폭탄처럼 터트리며 여전히 협박적인 설교를 하고 있다.
이 땅에서 한 번 태어난 모든 생명체는 반드시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성서적이다. 개혁의 길에서 외치는 자, 맹신 맹목하며 사는 자, 하나님의 주권을 내세워 망언하는 자, 저 높은 곳에서 통치하는 자,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자, 결국 모두가 함께 가야 할 길은 죽음의 길에서 만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진리다.
인간은 어느 누구나 생로병사(生老病死), 희노애락(喜怒哀樂)을 넘나들며 살다가 부르시는 그날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하다. 교회와 사역자에게 대적해서 망하고 죽는 것이 아니다. 죽음은 또 다른 영의 세계인 천국이 있는 곳 아닌가. 사역자가 한 성도들을 향해 총을 쏘아대는 것은 범법행위다. 사역자는 오직 국가와 성도를 향해 섬김의 자세로 내려가는 길만이 사명이며 그 길만이 소명 자가 가야 할 길이다.
종교는 어떠한 집단이기에 치우쳐 힘을 과시하면 그것은 졸개집단이다. 조직폭력이 왜 우리사회에서 지탄을 받는가. 그들은 힘의 논리로 폭력과 협박을 앞세워 약탈하며 개인의 이득을 취하기 때문이다. 종교의 논리는 베려와 섬김, 화합과 긍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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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낮은 곳에서 함께 하신다
하루속히 종교가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은 비움을 실천하는 ‘예수살기’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개신교 지도자들은 ‘예수팔기’자리에서 ‘예수살기’자리로 내려오기를 바란다. 지난 어두운 시절 개혁자들은 순교정신으로 ‘예수살기’를 외치며 이 땅에 수많은 사람들을 불러 모았다. 그 결과 축복과 함께 교회는 초대형화와 더불어 기업화를 이루었다. 그러나 집은 커지고 숫자는 많아졌지만 순교정신은 사라졌다. 이제 그만 저 높은 곳에서 내려와 진정한 비움의 자리로 내려와야 한다.”
이글을 통해 우리는 목회자들이 하는 저주, 협박, 정죄(심판)적 설교에 대하여 바르게 알고 대처하며 또한 바르게 권면한다면 그런류의 설교는 없어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래 글은 김경재목사님의 글입니다. 이 글 또한 순0음교회 조00목사님의 “하나님의 주권에 저항하고 교회와 사역자에게 대적한 국가나 개인은 반드시 망한다.” 말씀에 ‘교회의 모습은 교만, 태만 기만의 극치를 보는 듯하여 기가 막히다.’ 라며 교회의 현실과 저주, 협박, 정죄(심판)적 설교를 하시는 목사님들께 일갈하시는 내용의 글입니다.
인간의 죄 중에 교만(驕慢)은 잘난 체 하고 뽐내고 버릇없이 구는 것을 말한다. 교만이 종교인에게는 치명적이어서 겸손할 줄 모르고 ‘경건한 교만병’에 걸리면 거의 치유가능이 없을 정도이다. 교만은 대체로 힘 있거나 잘난 사람들, 지위가 높은 사람들, 일시 성공한 사람에게 마약처럼 스며든다. 교만병의 병색은 독선과 독단이라는 증세로서 나타난다. 자기만이 옳고, 자기집단만이 가장 선한고 정의로운 진리를 보유하고 있다고 장담하면서 자기와 다른 생각과 행동을 공격한다. 요즘 말로 삶의 다양성과 차이를 견디지 못하고 획일적 사고를 좋아한다.
교만과 정반대 죄성이 태만(怠慢)인데, 사실은 교만 못지않게 깊은 죄성의 뿌리이다. 태만은 겸손으로 위장하면서 아예 가능성을 포기하거나 자기개발이나 선을 행할 능력을 활용하지 않는다. “마음은 원이로되 육신이 약하여”라고 핑계대면서 실천적 수행마저도 포기하여 ‘싸구려 은총신앙’에 만족한다. 태만은 심신이 약한 자에게 보다는 보통 중산층 사람에게 파고든다. 창조적 모험과 변화를 두려워하고 현실에 안주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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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만(欺瞞)은 남을 그럴듯하게 속이는 죄인데, 남을 속이는 것보다도 더욱 심각한 것은 자기 자신이 그럴듯한 명분을 만들면서 자기를 속이는 것이다. 자기기만(自己欺瞞)이라는 것이다. 교만과 태만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본래적 인간성에서 이탈한 것임을 양심이 깊은 곳에서 눈치채고 있기에, 영악한 인간은 양심가책을 은폐하려고 무의식적으로 스스로 자기기만에 몰입한다.
교회의 모습은 교만, 태만 기만의 극치를 보는 듯하여 기가 막히다. 눈을 바로 뜨고 세계를 바로 보시라. 순박한 하나님의 자녀들을 ‘복음주의 노선’ 이라는 그럴듯한 동굴 속에 가두어 ‘닫힌 종교’ 신도들로 만들지 말고, ‘열린 종교’의 자유인으로 해방시켜, 세상 한복판에서 빛의 자녀들로서 이웃 종교인들과도 대화하고 협력하고 사랑하면서 살게 하라.
위 두 편의 글을 통해 우리 평신도들이 바르게 알고 바르게 신앙생활을 할 때 저주, 협박, 정죄(심판)적 설교가 교회에서 사라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민영진 목사님은 ‘나의설교를 말한다.’에서 “하나님의 심판을 합법화하기보다는 인간의 고통을 이해하려 하고, 그것을 자신과 자신이 소속한 공동체의 죄에 대한 심판으로 인식하고, 고난당하는 자에게서 대속(代贖)을 체험하고, 그리하여 한 개인의 고난을 구원의 능력으로 재해석하는, 고난의 종을 보고 있는 그 관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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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받는 이를 보고서 자신의 잘못을 깨닫는 사람에게서, 고통 받는 사람을 보고서 그에게서 자신의 구원자의 임재를 확인하는 그 사람에게서, 우리는 더 진한 우정과 해방과 구원을 체험하게 됩니다. 그를 설교자의 모범으로 삼고 싶은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라며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화자(話者)같은 설교자를 모범 삼고 싶다고 말씀하십니다. 지구촌 시대에 이사야서 53장에 나오는 화자(話者)와 같은 설교자를 모범삼아 설교하시는 목사님들이 점점 많아지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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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간증에 대하여
요즘 사회에 문제가 되는 다단계 조직에서도 간증을 많이 듣게 한다는 것을 아십니까? 이것은 다단계 회사에서 사람을 끌어 모으고 수익을 위해 주기적으로 교육 한답시고 모이게 하여 분위기도 잡으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나와 자신의 지난 출신 등을 소개하고 지금은 어떻게 하여 연봉이 얼마가 되고 고급단계까지 오르게 되었다는 간증을 하게하여 거기에 모인 많은 무리들이 강한 충동을 느끼게 하고 도전을 받게 하는데 어떤 면에서 이런데 나오는 간증 자들은 거기에 모인 많은 자들에게 나도 할 수 있고 역전이 되는 것처럼 열망을 갖는데 바람잡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 간증에 미혹되어 다단계에 빠진 자들이 대부분인 것입니다.
신앙의 간증에도 이런 위험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베드로의 인생의 참 역전은 한순간 고기를 많이 잡은 기적 같은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죄인 됨을 알게 하는 주의 능력과 보이는 그것만 제일로 바라며 살던 인생에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하며 영원한 하나님 나라로 사는 자가 되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살며 누린다는 것은 세상 형편적인 것의 극적인 변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렵든지 괜찮든지 하나님 한 분으로 기뻐함에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제 주관적 자기 체험과 또한 고기를 많이 잡은 성과적 숫자와 성공적 사례만 부각되는 매우 부분적이고 얼마든지 가감될 수 있는 그런 위험성이 다분한 간증들이 교회 강단에 서지 못하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간증은 하나님 나라의 실현보다 주로 하나님을 통한 세상 일시적 사례들로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강단은 교회된 성도들이 이제 그의 나라에 합당한 모습으로 구원을 이루도록 자라게 하는 순전한 복음만이 증거 되고 가르쳐지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자신의 피로 사신 몸 된 교회의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통치가 이루어지도록 말씀의 사역자를 세우신 것입니다. 때문에 교회 사역자는 하나님이 자신에게 맡겨 주신 말씀의 강단을 오직 그분의 말씀만 대언 되도록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래야 진리의 교회로 건전하고 굳게 서 갈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우리는 진리를 거스려 아무것도 할 수 없고 오직 진리를 위할 뿐”이라고 증거한 것입니다.(고후13:8)
간증은 올바른 것이라 할지라도 강단에서 할 것이 아니라 삶에서 나타내며 보여줘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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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설교베끼기 문제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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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글을 읽으면서 우리용두동교회에서는 설교 베끼기나 설교도용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이글은 설교에 대하여 “설교의 독창성은 선포되는 주장의 내용이 아니라 그 주장을 얼마나 창의적인 논증과 어휘, 그리고 재료를 사용하여 전개하느냐에 달려 있다.” 라고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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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에는 주장의 독창성보다 논거의 독창성이 필요함을 이야기 하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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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에 마실 물이 부족하듯 말씀의 홍수 속에서도 우리용두동교회는 생명력 넘치는 말씀, 하나님의 은혜가 충만한 말씀이 넘쳐나기를 소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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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판단하여 기준이 되는 신앙에 대하여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두지 말라"는 첫째 계명은 어느 누구도 신의 자리, 곧 '기준'의 자리에 서려 하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다.” 이런 경고 앞에도 기준의 자리에서는 사람이 너무나 많은 것 같습니다. 기준의 자리에서서 판단하고 재단하는 것은 바리세인의 모습이며, 예수님께서 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아’라며 일갈하셨던 모습을 성경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증언하고 있는데도 ‘기준’의 자리에서 판단하고 재단하는 일은 언제까지 계속될까요. 이글 말미의 결론에 우리 신앙인들이 귀 기울이며 실천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신앙의 과정’이 불완전하고, 죄 많고, 상처 많고, 개선의 여지가 많은, 실패한 자들을 위한 ‘과정’이기 때문이다.
‘과정’은 결코 “당신들, 나를 봐. 내 얼마나 잘 듣고, 믿고, 행하고 있는지.”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초대장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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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과정’은 나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 예수를 보아라. 그가 무엇을 했고, 무엇을 하고 있으며,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집중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는 초대장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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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거짓목자와 참목자 구별법
요즘 개신교회의 모습은 어떻습니까? 대부분의 교회는 신학은 미국 근본주의(복음주의)이며, 정서는 유교권위주의, 천국관은 샤머니즘적 천당, 목회철학은 조용기 목사의 3박자 축복 이며 목사를 섬기는 것을 곧 하나님을 섬기는 것으로 치우쳐가며 가장먼저 영권을 내세워 무지한 일방도로를 만들어 그들만의 천국, 그들만의 교회를 만들어 가고 있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개신교회의 정체성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말씀선포는 참으로 우리를 슬프게 합니다. 우리교회는 어떤 모습인가 생각해보게 됩니다. 위의 글에서 이야기하는 모습과 동떨어져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지만 오히려 그쪽으로 가고 있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저만의 오해이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열심히 글을 퍼 오기도 하고 쓰기도 하며 좋은 목사님 글을 올리기도 합니다. 김기석목사님의 ‘말이 끊어진 자리’라는 설교의 내용을 발취했습니다. 거짓목자와 참 목자의 차이를 알기 쉽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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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귀한 은혜 나누시기를 바라면서…….
• 광신을 경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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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감리교 창시자인 존 웨슬리 목사(1703-1791)의 회심 271주년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1738년 5월 24일 웨슬리는 내키지 않는 발걸음으로 영국 런던의 올더스게이트(Aldersgate) 거리에서 열렸던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에 참석했습니다. 저녁 8시 45분경 그는 어떤 사람이 루터가 쓴 로마서 서문을 읽는 것을 듣고 있다가 마음이 이상하게 뜨거워지는 체험을 합니다. 그것은 일종의 문지방을 넘는 체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외롭고 쓸쓸하고 암담하던 곳에서 벗어나 빛의 세계로 진입하는 순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 내가 받아들여지고 있음을 이론이 아니라 실재로 경험하는 순간입니다. 이전 것은 지나가고 새 삶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그 체험 이후 웨슬리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봉헌하며 살았습니다. 그의 재능과 열정 시간과 물질을 받으신 하나님은 그것을 영국사회를 변화시키는 밑거름으로 삼으셨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모든 사람들에게 호감을 샀던"(행2:47) 것처럼, 웨슬리를 따르는 이들이 있는 곳에는 새로운 초대교회의 기적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감리교회의 시작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한국 감리교회는 길을 잃고 있습니다. 길을 잃은 책임은 물론 목자를 자처하는 목회자들에게 있습니다. 한국교회의 문제는 정확하게 저 자신을 포함한 목회자들의 문제입니다. 무지와 독선과 편견에 사로잡힌 이들이 사람들을 오도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마치 인생의 모든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처신합니다. 사람들을 굳어진 교리의 틀로 묶어두고, 헛된 욕망과 두려움의 독을 흘려 넣어 사람들이 이성적 사유를 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여러분께 분명하게 말씀드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마치 다 아는 것처럼 말하는 지도자들을 경계하십시오. 늘 기도를 통해 계시를 받는다고 말하는 이들을 믿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를 그릇된 길로 인도하는 눈먼 인도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이들이 아니라, 제 배만 불리려는 거짓 선지자들입니다. 확신에 찬 것처럼 보이는 이들처럼 사람을 오도하기 쉬운 이들이 없습니다. 감리교회는 물론 체험을 중시합니다. 올더스게이트에서의 하나님 체험이 없었더라면 웨슬리의 위대한 신앙운동도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웨슬리는 신앙적 체험이 자칫하면 광신이 될 수 있음도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생활의 가장 사소한 일들에서까지 하나님으로부터 ‘특별한 지시’를 받고 있거나 받을 것이라고 상상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이미 우리에게 길잡이가 되는 이성을 이미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어떻게 알 수 있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초현실적인 꿈을 기다리지 않고, 환상 속에서 하나님이 계시해 주시기를 기대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는 ‘특별한 느낌’이나 갑작스러운 충동을 찾지도 않고, 다만 하나님의 말씀(oracle)을 찾아 거기서 뜻을 찾는 것입니다.” (웨슬리 설교전집3/설교37, <광신의 본성>, 26쪽)
하나님의 뜻은 특별한 방법으로만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대개 건전한 이성과 상식을 통해서 전달됩니다. 그 뜻을 알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생각’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피를 토하듯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 문화는 슬프게도 반성적 사유가 실종된 것 같습니다. 그래서 공공적 이성보다는 벌거벗은 욕망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습니다.
웨슬리는 광신에 사로잡힌 사람이 얼마나 비타협적인가를 잘 압니다. 그들은 남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다른 이에게 배울 생각이 없습니다. 가르칠 것만 있습니다. 그들은 폭력적입니다. 이런 교만함이 광신을 강화합니다.
“그의 교만이 커질수록 그를 권면할 수 없는 상태와 고집도 역시 커집니다. 그는 납득이 되도록 이야기가 통할 가능성과 설득당할 가능성이 점점 줄어들어서 오히려 자기 자신의 판단과 자기 자신의 의지에만 더욱더 집착을 하기 때문에 드디어 그는 완전히 고착되어 요지부동이 됩니다.”(같은 책, 31쪽)
• 관용의 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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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만한 영혼, 요지부동이 된 영혼들이 때로는 확신에 찬 지도자처럼 보일 때도 있습니다. 영적 분별력이 필요한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은 예수에 대해 말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만, 정작 그들 속에서 말하는 것은 ‘자아’입니다. 자아가 강한 사람들은 자기와 다른 생각, 삶의 방식을 가진 사람들을 함부로 정죄합니다. 그들은 선교의 열정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선교의 본질은 사람을 온전케 회복시키는 데 있습니다. 병든 사람을 고치고, 귀신 들린 사람을 회복시키고, 죄책감이나 열등감에 짓눌린 이들을 일으켜 세우는 일이야말로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소명입니다. 웨슬리는 <편협한 믿음에 대한 경고>라는 설교에서, 설사 교회가 이단이라고 정죄한 이들이 귀신을 쫓아낸다 해도, 유대인이나 무슬림들이 귀신을 쫓아낸다 해도 그를 말려서는 안 된다며, 그들 가운데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인정하라고 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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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서 누구를 쓰시더라도 그분이 기뻐하시는 사람이면 그가 전적으로 하나님께 몸을 바쳐 살 수 있도록 그를 격려하십시오.”(같은 책, 56쪽)
이것이 웨슬리 정신이고, 감리교 정신입니다. 그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나가 있는 사람이라 해도 이성과 진리와 사랑을 통하지 않고는 누구도 돌아오도록 강요하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복음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예배하는 방식이 다르다고 해서 그를 외면하는 일은 잘못된 일입니다. 우리가 똑같이 생각할 수는 없지만 서로 사랑할 수는 있으니 말입니다.(웨슬리 설교39, <관용의 정신>, 61쪽 참조).
• 사람을 아끼는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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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음이 없어 한국 감리교회와 우리 사회가 이 지경입니다. 이번 사건을 겪으면서 제 마음 속에 떠오른 말은 "사람을 다스리고 하늘을 섬기는 데는 아낌만한 것이 없다"(治人事天 莫若嗇, 노자 59장)는 말입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너무 거칠고 사나워졌습니다. 사람을 아끼지 않습니다. 서있는 자리가 다르다고 함부로 규정하고, 헐뜯고 상처내고 모욕 주고 사지로 몰아넣습니다. 우리는 이런 야수적 현실이 어떤 결과를 빚는지를 지금 참담한 마음으로 바라보고 있습니다. 인간에 대한 예의가 사라진 세상을 치유할 책임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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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한 약탈을 정당한 행동으로 여기는 유목민들조차 길 잃은 적들은 잘 대접하여 원기를 회복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본디 마음이 아니겠습니까? 추수할 때 마을의 어려운 이들을 위해 밭의 한 모퉁이를 남겨두고, 한 뭇 쯤 슬쩍 흘려줄 줄 아는 것, 바로 그것이 사람다운 사람이라고 성경은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살펴서 그들을 비천하게 하고, 악한 자들을 그 서 있는 자리에서 짓밟아서 모두 땅에 묻어보아라"(욥40:12-13)라고 욥에게 말씀하시지만, 이 말은 그래서는 안 된다는 말이 아닙니까? 예수님은 정말 사람을 아끼신 분이십니다.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기를 주저하지 않으셨습니다. 이 마음을 우리가, 그리고 교회가 회복하지 않는 한 한국교회에 희망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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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 속에 박제화 된 예수 말고, 갈릴리의 민중들 속에서 함께 웃고 울며 사람이 사람 대접받는 세상을 열기 위해 역사의 뻘밭을 온 몸으로 포복하셨던 예수님을 우리 가슴에 모셔야 합니다. 하나님의 가없는 사랑에 눈 뜨고, 예수의 얼에 사로잡혔던 참 사람 존 웨슬리를 기념하는 오늘, 우리 모두 예수님의 마음에 지핀 사람이 되어, 이 척박한 세상에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삶으로 증언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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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순종을 강요하는 설교에 대하여
언제까지 설교를 통하여 교회와 담임목사에게 순종을 강요하며 죄라고까지 정죄하는 설교를 계속해서 할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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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의 문제의 상당 부분은 ‘순명’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순명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에 대한 순명인가, 라는 것입니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라는 말이 진리와 절대자를 향해 몸을 낮추는 순정과 겸허의 서원이 아닌, 목사의 모든 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으로, 기성의 권력과 제도에 대한 순종으로, 세상의 오류와 편견에 대한 무지와 수용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태도가 진짜 신앙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이며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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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바른 설교 듣고 싶다는 작은 소망이 죄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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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우리용두동교회 목사님께 바른 설교를 듣고 싶다는 작은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래서 열심히 교회게시판 ‘생각나누기’에 글을 올리기도 하고 다른 목사님의 바른 설교도 올리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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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요즘은 바른 설교를 듣고 싶다는 작은 소망도 죄라고 치부하시는 목사님들의 설교를 들으면서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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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설교를 통하여 교회와 담임목사에게 순종을 강요하며 교회와 담임목사를 실어하면 죄라고까지 정죄하는 설교를 계속해서 할 것인지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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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종교의 문제의 상당 부분은 ‘순명’하는 태도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봅니다. 순명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무엇에 대한 순명인가, 라는 것입니다. “마땅하고 옳은 일입니다”라는 말이 진리와 절대자를 향해 몸을 낮추는 순정과 겸허의 서원이 아닌, 목사의 모든 말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으로, 기성의 권력과 제도에 대한 순종으로, 세상의 오류와 편견에 대한 무지와 수용으로 잘못 이해하고 있는 태도가 진짜 신앙을 죽이고 있다는 사실이며 죄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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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네기와 록펠러의 예화 문으로 예수 믿고 부자 되어서 믿는 자의 귀감이 되자고 하는 설교, 이성과 합리성을 버리라는 이야기를 수도 없이 하는 설교, 마치 하나님을 빅브라더의 보이지 않는 지배자로 만들어 버리는 설교등 이런 설교에 의문을 제기하고 하지 말아주십시오 라는 의미로 글을 올리면 오히려 설교시간에 분열의영 이라고 치부해버리는 설교로 교인을 사탄이나 나쁜 영으로 치부하는 설교는 오히려 교회를 분열시킨다는 생각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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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한국교회(용두동교회의 모습)모습
한국교회를 단축키로 말하면 모이자, 돈 내자, 교회 짓자 이 세 가지 카테고리안에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봐야 합니다. 다른 이설이 없습니다. 세계 선교, 지상끝까지 전도하자, 빛과 소금이 되자. 등등의 수많은 설교와 책과 성경에 나열되어 있는 메시지는 결국 목사 개인의 영광과 목회성공 도구를 위한 매개체로만 존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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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자본주의 시스템을 이용하여 오로지 인본주의에 기초한 목회성공 바벨탑을 쌓는데 메뉴바로 사용하지요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고 그리고 헌금하게 하고 그 돈으로 자신의 목회성공 아성을 쌓으며 그 바벨탑의 주인으로 안주하자는 맘몬적 탐욕을 정당화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구성원들을 예수의 제자로 만들기 보다는 자신의 똘마니로 만드는데 적절한 보상을 하고 인정을 하고 칭찬을 하고 아니다 싶으면 비방하고 교회밖으로 내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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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를 중심으로 교회를 성장하는 가장 기초적인 전략은 사람을 모으는 일입니다. 이는 다단계와 보험회사, 노인들을 대상으로 사기치는 건강식품, 약장사의 마케팅과도 일치합니다. 이를 교회에서는 천국 새생명 운동, 태신자 전도 운동으로 포장하여 자신의 목회세력을 넓히려 합니다. 교회가 수적으로 성장하면 헌금도 많이 들어 올 것은 당연하고 그러면 목사에게 인센티브가 돌아가는 것은 자본주의 시장경제 법칙입니다. 오로지 사람 수에 따라 목회가 성공하고 교회가 성장했다는 물량주의 기준은 복음과는 상반되는 인간위주의 입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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좁은 길을 강조하고 십자가의 고난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평화를 강조하게 되면 교회는 절대로 성장할 수가 없습니다. 가시밭길을 가라고, 아골골짜기로 가라고 하는데 누가 그 말을 따르겠습니까? 번영의 길, 넓은 길, 영광의 길, 축복의 길을 가라고 하는 달콤한 복음을 전하고 따르기에 화려한 대형교회로 성장이 가능하게 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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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주의 시장경제를 충실히 교회와 접목하여 이용하는 교회는 태신자를 위하여 중보기도 한다거나 생일날을 기억해 축하해주고 어려울 때 전화하여 위로하고 인간적 만남을 통하여 정을 나누어 자연스런 교제를 하게 합니다. 이슬비 전도라고 하여 편지를 지속적으로 쓰기도 합니다. 지속적인 관심은 자연스럽게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역할을 하는 것을 이용한 심리학적인 전도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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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하나님이 컨트롤(control)하는 예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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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컨트롤(control)하는 예배는 하나님의 영이 주관하시는 대로 나를 드리는 예배이어야 합니다. 인간의 진실함, 인간의 거룩함, 인간의 경건성은 오히려 자기만족, 자기욕구의 표현일 뿐입니다. 목사가 컨트롤(control)하는 예배는 인간이 주도하는 예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컨트롤(control)하는 예배는 하나님의 영이 주관하시는 예배이기에, 인간의 진실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에 완전히 나를 내어놓음의 시간이 되어야 하고, 그런 모습으로 찬송, 기도등 예배 순서에 임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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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를 들어 교회의 주일 예배라면, 그 예배 전체를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고 생각하는 게 중요할 것 같습니다. 하나님이 컨트롤(control)하는 예배에 설교자, 대표기도자, 성가대 등 모두가 한 부분으로 참여한다는 겸허한 마음과 예배 전체를 하나님께 돌려드린다는 자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예배를 은혜스럽게 이끌어간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완전히 하나님의 것을 빼앗는 자세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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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컨트롤(control)하는 예배는 인간중심이기에 목사가 심판자가 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청중을 향해 명령하며 청중을 좌지우지 하려합니다. 예배는 모든 임사 자가 한 부분으로 참여해야 함에도 청중을 향해 성경을 따라 읽어라, 아멘 좀해라, 다 일어나라, 손을 들어라, 등 예배의 예전에도 없는 행동을 요구하며 명령합니다. 또한 설교를 통하여 하나님의 말씀으로 위장하여 목사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토해냅니다. 청중을 향한 예의도 사라집니다. 청중의 심리를 나는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을 합니다. 청중을 무시합니다. 이런 목사의 설교는 화석화된 교리 안에서만 머무르며 도식화된 설교로 청중을 획일화시키는 설교에 집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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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분의 진솔한 고민입니다. “나는 요즘 ‘목회자의 설교는 과연 얼마만큼 하나님의 말씀일 수가 있을까’를 고민하는 중이다. 온 회중을 일순간에 휘어잡을 만큼 카리스마와 은혜(?)가 넘치는 일부 목회자들의 설교 내용이 우리들이 처한 역사와 삶 그리고 기본적인 신학과도 거의 소통부재를 느낄 만큼 공허하게 느껴질 때가 많기 때문이다. 독선, 아집, 편견, 무지, 오류, 몰이해에 근거한 교설이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일방통행 식으로 선포될 때 한 사람의 청중으로서 나는 가슴이 답답하고 이내 질식당할 것만 같다. 왜 청중들에게는 설교에 대한 반론권이 주어지지 않는 걸까? 결단코 하나님의 말씀, 성서적 설교, 기독교적 메시지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무조건 듣고만 있어야 하는 것이 과연 옳은 태도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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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이 가는 글이며 공감이 가는 고민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하나님께서도 욥에게 ‘와보라 변론해보라’며 대화를 하셨고 예수님도 제자들과 묻고 답하며 말씀하셨는데
목사들의 독선, 아집, 편견, 무지, 오류, 몰이해에 근거한 교설이 하나님의 말씀을 빙자하여 일방통행 식으로 선포하는 시대에 청중들은 영적인 촉수를 바르게 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며 깨어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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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석목사의 설교 중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꾼으로 살려는 사람은 어려움을 각오해야 합니다. 세상은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을 미워합니다. 애굽에서의 종살이를 팔자려니 여기고 살고 있던 사람들에게 모세는 자유의 꿈을 불어넣었습니다. 히브리인들에게 모세는 해방운동의 지도자이지만, 바로의 입장에서는 반역자입니다. 예언자들은 모두 체제에 길들여질 수 없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질서와 가치에 대해 물음표를 붙이곤 했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습니다.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스스로 어려움을 택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인생이 어렵다고 하여 낙심하지 않았습니다. 낙심하고 투덜거리는 것은 약자의 버릇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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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컨트롤(control)하는 교회는 예배를 컨트롤 하려합니다. 청중을 컨트롤 하려합니다. 목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둔갑시켜 순종을 강요하며 청중을 길들이기에 집중합니다. 목사와 교회에 순종을 강요합니다. 배려하면서 억압하고, 동정하면서 수치를 주고. 친절하면서 불편함을 주고, 가르쳐주면서 컨트롤하려는 그런 목회를 합니다. 목회자들이 얼마나 많이 조종을 하려합니까? 설교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조종을 하려하고, 조언을 통해서 얼마나 많은 조종을 하려합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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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컨트롤(control)하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예배를 위함이고, 하나님은 참된 신앙의 길을 예배의 원리에 담아 두셨음을 깨달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과 교권주의에, 성전체제에, 목사가 컨트롤(control) 하는 교회에 길들여 지지 않으며, 세례자 요한도 그랬고 예수님도 그랬던 것처럼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는 우리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온전히 하나님께만 순종하며 예배하는 우리들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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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은 구원받은 자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신 것은 예배를 위함이고, 하나님은 참된 신앙의 길을 예배의 원리 속에 담아 두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컨트롤(control)하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향한 영적인 촉수를 바르게 세워 하나님의 말씀을 상고하며 깨어서 예배드리는 우리들의 신앙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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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이재철 목사의 목회자 자기 관리 수칙 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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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배를 영어로 서비스 service 라 한다.
그러므로 교인들에 대한 봉사 정신에 투철하지 않는 한 진정한 목회자가 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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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토요일은 주일을 준비하는 날이지 휴일이 아니다
만약 목회자의 토요일이 휴일이 된다면 그 순간부터 목회자는 교인과 구별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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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토요일 자 신문이 오면 주일에 대한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필요한조치를 미리 취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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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반드시 시간을 지키라
어떤 예배든 정해진 시간 정각에 시작하라
사람이 많이 오지 않았다고 예배 시간을 늦추지 말라
예배 시간이란 사람과의 약속이자 그 예배를 받으실 하나님과의 약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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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새벽 기도회가 끝남과 동시에 개인 기도를 충분히 하라
그 시간을 놓치면 하루 중 따로 시간을 내어 기도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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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새벽 기도회가 끝난 뒤 집에 가서 다시 잠들지 말라
하루 중 그 시간보다 영성을 기르기에 더 좋은 시간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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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어떤 교인보다도 성경을 더 많이 읽고 어떤 교인보다도 더 많이 기도하라
말씀 읽기와 기도는 습관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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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자신이 행하지 못하는 것은 교인에게 요구하지 말고 교인들에게 설교한 것은 무 조건 행하라
참된 설교는 강단에서 내려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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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좋은 설교는 그 전체 내용을 한 문장이나 한 단어로 표현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불가능하다면 그것은 그 설교에 초점이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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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다른 사람이 설교할 때 주의를 집중하여 경청하라
타인의 설교를 소홀히 하면 다른 사람도 나의 설교에 집중하지 않는다
목회자가 다른 사람의 설교에 귀 기울이는 것 자체가 이미 교인을 향한 훌륭한 설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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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월요일 아침에는 자기 교구 교인 명단을 놓고
주일에 누가 보이지 않았는지 대조하면서 전화로 확인해 보라
목회는 관심이고 관심은 쏟아야 계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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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교인들에게 대접만 받는 사람이 되지 말라 먼저 베푸는 사람이 되라
목회자가 나눔의 종착역이 되려 하면 스스로 썩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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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심방의 대가로 어떤 경우에도 돈을 받지 말라
그것은 상대에게 자신의 인격을 파는 짓이요 스스로를 삯꾼으로 전락시키는 짓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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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목회 활동 중에 알게 된 교인의 비밀은 누구에게도 누설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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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성이 교역자 혼자 심방해 줄 것을 요구하면 절대로 응하지 말라
이성과는 단둘이 식사도 하지 말라
이성과는 상담을 할 때는 반드시 교회 사무실처럼 공개된 장소에서 하라
정신질환자인 이성이 상담을 요구할 때는 반드시 누군가를 배석시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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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교인들이 보지 않는 곳에서도 목회자여야 한다
교인들이 없다고 해서 목회자의 정체성을 망각한다면 결국 사람들 앞에서는
목회자 연기를 하는 셈인데, 연기를 통해서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시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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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장례식 때 하관예배 설교는 5분을 넘지 말라 그때가 유족들이 가장 지쳐있는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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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하관예배까지 다 끝난 후에는 유족의 집까지 따라가서 위로의 기도를 해드리라
장례식을 마치고 집에 도착하여 문을 들어서는 순간이 유족이 가장 외로울 때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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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다른 목회자가 어떤 일을 주관할 때 반드시 자기 자신을 그 자리에 세워보라
그렇지 않으면 자신에게 그 일이 맡겨졌을 때 제대로 감당하기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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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교인의 모든 행사는 교역자 위주가 아니라 교인 위주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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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명단을 작성할 때는 교인들의 이름을 먼저 쓰고 교역자의 이름은 제일 끝에 넣 으라
교인들을 위한 섬김을 종이 위에서도 나타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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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교인수첩 제작등 교인명부를 작성할 때 교인의 이름이 틀리거나 빠지지 않도록 유의하라
사람의 이름을 빠뜨리거나 틀리게 기재하는 것은 그 사람의 존재와 인격 자체 를 부정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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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교회 재정에 관여치 말라 한번 관여하기 시작하면 재정이 목회의 핵심이 되어 버린다
목회의 핵은 복음이지 재정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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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어떤 경우에도 자신을 위하여 교회에 금전적인 요구를 하지 말라
목회자는 주어진 것 속에서 자족하며 살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영적 권위는 주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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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내일 떠나더라도 지금 섬기는 교회를 중간 기착지라 생각지 말고 종착역으로 여기라
내일이 되기 전에 내 생명이 끝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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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어떤 경우에도 거짓말을 하지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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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실수를 깨달았을 때는 즉시 사과하라 실수 자체는 잘못이 아니다
잘못은 실수를 깨닫고도 사과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실수를 세 번 이상 반복하는 것은 목회자의 자질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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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절대적인 것을 위해서는 목숨을 걸 수도 있어야 하지만
상대적인 것이라면 모두 양보할 수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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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부목사 시절에 세계문학전집 한 질은 반드시 읽으라
목회의 대상은 사람이고 문학은 사람에 관한 사람의 이야기이기에
문학은 사람에 대한 앎의 깊이를 더해 준다
사람을 알지 못하는 자의 설교는 사람을 변화시키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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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신학자는 수직적 사고만으로도 족하지만 목회자는 수직적 사고와 수평적 사고 가 교직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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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지식과 정보는 반드시 공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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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 목회자들끼리 서로 사랑해야 한다
목회자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면 그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모두 공허한 메아 리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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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3. 삶은 결코 되돌아오는 법이 없기에
목회자는 자기를 바로 세우기 위하여 중단 없이 정진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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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거 정말 길어서, 몇 번에 나눠 읽어야겠군요.
총정리의 결정판이라 할 수 있겠는데.... 어떤 한 분의 글인가요? 아니면, 국민이님께서 집대성하신 건가요?
우리용두동교회의 문제점들을 지난5년간 문제제기 하면서 모았던글들을 짜집기해 두었던 글입니다.
한참 전에 써두었던글이라 오늘 긴박하게 돌아가는 우리용두동교회의 현실에 조금더 부합한 글이 되려면 조금더
다듬어야 하는데 요즘 시간이 없어서 그냥 올렸습니다.
어쩐지 그런 느낌이 스치더라니 그랬군요^^
개인적으로 어려운 일도 많으실텐데,... 정말 고생하셨습니다. 교회의 미래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큰 도움이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