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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해설]
이상기 수필의 사유와 상상, 그 인문학적 성찰
-수필집 《길에서 만난 생각》의 경우
한상렬│문학평론가
1. 프롤로그-존재론적 담론의 깊이
수필문학은 사유와 상상이 생명이다. 사유를 전개할 때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실마리다. 무엇으로 실마리를 잡느냐에 따라 사유의 전개는 달라지게 마련이다. 이런 사유는 현실에서부터 출발한다. 문학이 상상의 세계라지만, 수필의 경우 현실과 전혀 동떨어진 세계를 그린다면 애초 수필이 요구하는 존재파악과 멀어지게 된다.
이상기의 수필집 《길에서 만난 생각》은 이런 사유와 상상이 작품마다 펼쳐진다. 화자로 하여금 사유와 상상의 공간은 다름 아닌 ‘길’이라는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일상이다. “시간을 내어 뒷산을 걷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아파트단지를 벗어나 오솔길을 걷다 보면 공기와 나무와 새소리, 계절의 변화를 만나게 되고, 자연스럽게 세상의 일들을 떠올리게 되고 연관된 생각에 잠기곤 한다.”(<책 머리에>에서) 그의 수필은 이렇게 ‘길’과 ‘걷는다’라는 행위, ‘뒷산’이라는 공간이 조화롭게 융회되어 있다. 이는 어쩌면 토포필리아Topophilia 즉 공간애와 연결되지 싶다.
삶이란 만남의 과정에 있는 것이 아닐까? 만남에는 의도적인 만남도 있지만 계획대로 전개되지 않을 때가 있고, 내가 수필을 만나게 된 것처럼 우연한 부딪침 같은 만남도 있게 마련이다. 어떤 만남이건 우리는 만남으로 인해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된다. 예쁘다, 갖고 싶다, 먹고 싶다 등등의 반사적 느낌을 포함해서 기쁨과 슬픔, 분노와 환희, 깨달음과 좌절 같은 복합된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걸으면서 만나게 되는 생각들을 기록하다 보면, 놓쳐 버리기 십상인 삶의 과정을 고스란히 간직하게 된다. 기록으로 인해 단조로운 일상이 작은 역사가 되고, 감사와 평화가 된다.
-<책 머리에>에서
작가는 이렇게 자신의 문학적 행위에 대하여 담백하게 진술하고 있다. 그는 왜 쓰는가? 무엇이 그에게 ‘수필’이라는 문학하는 일에 심취하게 하였을까? “삶이란 만남의 과정”이라는 화자의 진술이 심상치 않다. 여기 만남은 그저 우연한 부딪침이 아니다. 어쩌면 그에게 있어 수필은 필연적 만남이지 싶다. 그의 프로필에는 “POSCO E&C 부사장, 철강사업 본부장 퇴임. 엠에스파이프(주) 대표이사. 2014년 『수필춘추』 등단. 한국문인협회 회원. 서울일보 논설위원.”이라는 짤막한 해적이가 들어 있다. 이런 외연적 진술은 그의 수필을 이해하는데 최소의 언어적 기표다.
철강업, 기계공학, 자연과학, 이런 어휘와 어울릴만한 작가. 그런 그가 퇴임 후 ‘문학’이라는 제2의 삶을 경영하고 있다는 것은 다소 생경하다. 그가 삶의 현장에서 물러나 수필을 짓고 있다. 자연스레 작가의 체험은 “걸으면서 만나는” 모든 것들을 ‘의식의 그물망’에 포착하고 있다. 이는 새로운 세계로의 열림이겠다. 여기 특이한 성향은 그의 작품이 평생토록 경도되었던 ‘철강업’이란 무거운 사유의 영역에서 벗어나 사유와 상상 그리고 인문학적 성찰로의 전환이 이뤄지고 있다는 데에 착목하게 한다.
2. ‘길에서 만난 생각’의 형태적 특성
자, 이제 수필가 이상기의 작품세계를 탐색하기 위한 요량으로 그의 작품의 형태적 분석으로 들어가고자 한다. 수필집 《길에서 만난 생각》의 중심키워드는 다름 아닌 ‘길’이다. 다소 추상적이긴 하지만 화자에게 있어 ‘길’은 그의 인생의 축도와도 같다. 그는 그 길에서 사물과 인간을 만난다. 그의 만남의 대상은 필연이기보다 우연이다. 그는 팽나무를 만나고, 오징어내장탕도 만나다. 산책과 산행을 위해 영덕 팔각산이며, 제주 새별오름을 오르기도 하고, 지리산을 찾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그의 시선에는 산수유나 개미는 물론이요, 까치집도 구운 바나나도 포착된다.
이렇게 작가의 의식의 그물망에는 세상 모두가 들앉아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수필짓기의 소재는 무궁하다. 서정과 서사를 동반한 이런 유형만이 아니다. ‘철’과 유관한 그에게는 ‘삶의 구조물’이나 ‘정보화시대 살기’. ‘스위치’가 자연스레 제재가 되며, 퇴임 이후의 삶과 연관된 ‘나이듦’의 문제, 즉 노년문제, 코로나19에까지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수필집 《길에서 만난 생각》에는 이런 다층적이고 다양한 소재를 통해 이 시대의 지식인의 눈으로 본 ‘만남의 대상’들에 대하여 애정어린 시선을 담고 있다. 전 4부, 44편이 배열되어있는 이 수필집은 제1부에서 자연과의 통섭, 관계맺기가 제2부에서는 자기 응시와 사물의 재현, 제3부에선 실존적 의식의 그물망 그리고 제4부에선 경계 가로지르기와 관련한 작품들로 편성되어 있다.
한 마디로 이상기의 수필집 《길에서 만난 생각》은 가멸찬 수필의 진경을 보게 한다. 한 작가의 정신세계가 성城을 쌓듯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며, 삶에 천착한 소박한 담론이 진정성과 함께 독자에게 잔잔한 감동을 동반한다. 그의 수필의 마력과도 같은 힘이자 함의含意일 것이다. 아울러 그의 존재론적 담론의 깊이와 함께 그만의 사유와 상상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인문학적 성찰에 기여하고 있음을 보게 한다. 그의 수필의 내밀한 진정성이자, 독자를 작품 속으로 흡인하는 마력과도 같은 힘일 것이다.
3. 자연과의 통섭統攝그리고 관계맺기
몽상의 철학자로 알려진 바슐라르는 마르크 사갈을 가리켜 “생물들이 풋풋한 나무줄기와 같이 깨어나 성장하고, 인간이 그대로 초인적인 존재였던 저 확고부동한 위대한 시대를, 우리들에게 체험하도록 하는 사람.”이라고 하였다. 샤갈의 그림 <인간의 창조>는 위대한 상상력으로 인류의 낙원시대를 보여준다. 여기 상상력이란 환상, 즉 새로운 현실을 창조하는 능력을 일컫는다. 그렇기에 예술 작품의 창조와 감상은 상상력을 낳게 하고, 다시 이를 받아들이게 하는 끊임없는 상호 영향 과정의 연속이라 하겠다.
화자에게 상상력을 증폭시키게 하는 대상들은 아주 미소하고 소소한 것이다. 그의 퇴임 이후의 일과는 산책이요, 그 산책을 통해 자연과 만난다. 그리고 그들과 관계맺기를 한다.
수필 <꽃잎의 무게>는 가볍지만 가볍지 않은 수필이다. 화자는 “오래된 벚나무가 터널을 이루고 있는 보문호숫가 벚꽃 길을 걷는다.” 꽃잎들이 하늘하늘 가볍게 난다. “어쩌다 바람이 살짝 지나가면 어린 나비떼처럼 연분홍 꽃잎이 한꺼번에 하르르 하르르 날리고 여기저기 사람들의 환호성이 터진다.”라고 했다. 화자의 언어적 미감은 차라리 시적감각이 되어 무한 상상을 일으킨다. 화자는 문득 “살포시 내려앉는 저 꽃잎의 무게는 얼마나 될까?”라는 의문을 품는다.
꽃마다 떨어지는 모습이 달라서 송골송골 모여 핀 꽃송이로부터 행복과 번영을 보기도 하고, 날고 있는 여린 꽃잎에서 순결의 무게를 보게 되는 벚꽃은 눈부시게 아름다운 순간에 소리 없이 한 잎 한 잎 흩날리며 떨어진다.
시들기도 전에 통째로 뚝 떨어지는 동백의 붉은 꽃송이에서는 못다 한 사랑의 슬픔과 무게를 보게 된다. 또한 백목련의 도톰한 꽃잎은 시들고 나서야 한 잎씩 툭툭 떨어진다. 냉기가 채 가시지 않은 이른 봄, 높다란 나뭇가지에서 고고한 자태를 지켜내기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누렇게 변색된 꽃잎에서 고난의 무게를 보게 된다.
-<꽃잎의 무게>에서
이런 사유의 함의는 자연과의 교감이자, 존재인식의 깊이를 행간에서 읽게 한다. 이렇게 작가에게 있어 벚꽃과 동백, 목련이 자연 자체로 인식되는 언어적 기표가 아니다. “누렇게 변색된 꽃잎에서 고난의 무게를” 읽어내는 화자의 통찰이 존재인식의 철학과 어울려 ‘번짐’의 의미에 천착하게 한다.
화자의 시선은 자연현상에만 머물지 않고 그 존재의 본질을 자각하는 의미에 집중하고 있다. 결미의 “나는 지금 저 연약한 꽃잎의 숙명 앞에 무한한 우주의 생태와 생명의 신비를 향해 귀를 열어 보는 것이다.”라는 진술은 자연과학을 인문학적 성찰로 융합하는 작가만의 창작의도와 맞물려 있다. 일종의 지식의 대통합인 ‘통섭’이라 하겠다. 레이첼 카슨이 《잃어버린 숲》에서 갈파했듯, 이런 생태학적 자각은 이미 이 시대의 핵심코드가 되고 있다.
<번짐에 대하여>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파악된다. “며칠 전 우연히 관람하게 된 수묵화전시회에서 번짐의 오묘함을 보았다. 그림을 대하고 한참을 서 있다 보니 먹물의 농담濃淡으로 이루어진 번짐이 가슴까지 번져오면서 진한 감동을 만들었다. 보고 있는 그 순간 그림은 정지된 것 같으나 어제를 기억하고 내일을 예상해 보면서 번짐의 현상을 확인하게 된다.” 현상을 현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은 역발상이 이 수필의 깊이를 느끼게 한다.
화자의 내적감각에 닿은 존재의 자각은 단순한 현상 자체가 아니라 그 속내를 규명하고자 하는 작가정신일 것이다. 그래 “한 송이의 꽃을 집중 관찰한다면 꽃눈이 벙글어 꽃을 피워내는 과정만을 자세히 관찰할 수 있겠지만, 거리를 두고 한 그루의 나무로 보거나 숲으로 보게 되면 봄볕의 아지랑이 속에 숨어 꿈틀거리는 어떤 느낌, 즉 번짐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변화의 기운이 오감을 통해 전달된다.”라는 깨달음에 이르게 한다. 하여 “자연이 그리는 아름답고 조화로운 그림은 그대로가 걸작이다.”라는 자각은 일상을 뛰어넘는 법열法悅과도 다름이 없다.
화선지는 번짐으로 인해 생명을 얻는다. 산수유는 번짐을 통해 열매를 맺는다. 산불과 같이 빠르게 번지는 번짐도 있고, 땅속의 뿌리와 같이 조용히 번지는 번짐도 있다. 또한 한 점의 번짐도 있고, 유행이나 사상의 번짐과 같이 지구차원의 번짐도 있다. 크건 작건 빠르건 느리건, 사물이 있고, 감정이 있고, 관계가 성립되는 모든 곳엔 번짐이 있다.
서툰 솜씨지만 남은여생을 그리고 있는 나는 어떤 번짐으로 그려지고 있을까?
-<번짐에 대하여>에서
“산수유 마을 입구에 서서 만나게 되는 풍경도 마찬가지다.”라는 화자의 언술은 이를 뒷받침한다. 수묵화와 산수유의 절묘한 배합. ‘번짐’이란 화두에 시선을 둔 작가의 ‘수필의 눈’이 빛난다.
이상기의 수필이 보여주는 수필의 진경은 여기에 머물지 아니한다. 현상을 바라보는 작가의 통찰력과 예지가 “현대 추상표현주의 화가 마크 로스코Mark Rothko의 그림 앞에서 눈물을 흘리는 이들이 많다고 한다. 단순한 사각의 형태로 색을 나누어 그린 그의 그림이 어떻게 사람들의 감정에 경련이 일어나게 하는 걸까? 자세히 살펴보면 색과 색 사이에 경계는 없고 서로 다른 색들이 스며들어 서로 번져있는 영역을 만나게 된다.”라는 언술에서 보듯, 그의 수필은 자연현상과 타장르와의 이종결합을 통해 인문학적 성찰로 나아가고 있다.
화자로 하여금 ‘길에서 만난 생각’의 단초를 제공하는 사물과의 관계맺기는 이렇게 자연과의 통섭을 통해 구체화된다. “루카치의 연명과 같이 “인간과 자연, 우주를 포함한 현실세계는 개별자와 보편자의 범주로 나누어 인식될 수가 있다.
자연과학적 상상을 인문학적 상상력에 결합시키는 통섭이야말로 진정한 본질 찾기가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작가 이상기의 시선은 열려있다고 하겠다. 수필 <관계>, <흙을 말리다>, <개미 운명>이 이런 맥락에 놓여 있다. 이를 위한 출발점 행위는 바로 산책에 있다. 화자에게 있어 산책은 그래 매력적이다.
잔설이 남아있는 산길을 가다 바위 밑에 숨어 핀 노란 복수초의 발견은 행운이다. 거친 검은색과 눈부신 흰색의 대비 속에서 노랗게 핀 복수초의 대견함과 아름다움은 깊은 감동을 준다.
꽃의 아름다움은 종자의 유지를 위한 몸부림이라지만 다양한 색깔, 은은한 향기는 우리를 매혹시키기에 충분하다. 이들이 보여주는 구조 또한 좌우대칭, 회전대칭 등을 이루어 완벽한 구조적 균형미를 보인다. 해바라기 꽃 씨앗의 좌우 나선형 배열은 자연의 비밀이라는 ‘피보나치수열’의 황금비율을 나타내고 있고, 이 비율은 A4용지, 카드, 그림의 안정된 구도, 건축물 등의 가로와 세로의 가장 편한 비율로 이용되고 있을 뿐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 비례 역시 이 비례로 설명된다고 한다. 우리가 느끼는 매력 속에 숨은 자연의 특징적 숫자가 존재함은 신비하기만 하다.
-<매력 산책>에서
화자의 기하학적 사유의 근거가 되는 수필 <매력산책>이야말로 그의 수필의 진경일 것이다. 단초는 산책길에 만난 ‘복수초‘다. 잔설에 남아있는 산길. 꽃의 아름다움, 다양한 색깔과 은은한 향기가 화자로 하여금 ’피보나치수열‘의 황금비율과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인체비례를 떠올리게 한다. 이런 통섭적 사유와 상상이 그의 수필을 인문학적 성찰에 놓이게 한다. 가멸찬 작품세계가 아닐 수 없다.
4. 자기 응시와 사물의 재현
이상기의 수필집 《길에서 만난 생각》은 말할 것도 없이 자연인인 수필작가가 짓는 자신만의 성채일 게 분명하다. <자유의 무게>, <자유로의 여정>이나 제2부의 <팽나무 아래서>, <노젖기>, <아니 오신 듯>, <흔들리는 것들>에서 보듯, 그의 수필은 타자의 작품집과 등거리에 있지 않다. 자기 응시와 사물의 재현, 그의 수필은 이런 그만의 성 쌓기에 주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수필은 ’길‘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자기화하면서 게서 만나는 생각, 즉 사유의 세계와 함께 문학적 상상을 수필화하고 있다. 이는 ’일상‘이란 다소 통속적이고 보편화된 삶의 현장에서 추수한 존재인식의 진솔한 고백일 것이다. 무의미에서의 유의미화, 작가는 인간 존재의 문제에 천착하면서도 이를 사유와 상상 속에서 변용과 굴절을 일으킨다.
수필 <자유의 무게>를 보자. “만일 누군가가 나에게 더 많은 자유를 원하느냐고 물으면 주저 없이 그렇다고 답할 것이다. 자유롭다면 무언가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것 같다. 언제 어디서나 하고 싶은 일을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도 즐겁다.”(<자유의 무게>에서)
삶의 현장에서 물러나 이제 자유를 느끼는 화자에겐 ‘자유’라는 언어의 기표가 지닌 무게를 새롭게 느끼게 한다. “나의 자유는 이미 맺어있는 인연의 폭과 무게에 연동된다.”는 화자의 언술은 존재인식에 터한 자각일 것이다.
기술과 문명의 발전은 불가능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노동으로 부터의 자유, 시간과 거리로부터의 자유, 신의 영역이라고 했던 생명의 영역에서도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삽과 지게로 대표되던 농기구는 이미 사라지고, 무거운 망치나 물건은 기계가 대신하고, 해외여행은 가벼운 나들이가 되었고, 유전인자 조작이나 시험관 아기가 태어나고 있다. 손안의 전화기는 세계를, 아니 모든 지식을 검색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를 얽매어 왔던 여러 가지가 해결되었음에도 “나는 자유롭다!”고 소리치지 못한다. 우리 삶 속 자유는 어디에 숨어 있는가. 자유는 높이 날아 오른 새에게 찾기 힘든 몇 톨의 낱알과도 같은 존재로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자유의 무게>에서
이와같은 화자의 사유는 무한 상상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과학적 상상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인문학적 상상이다. 기술과 문명이 불가능을 가능함으로 발전시켰지만, 존재의 인식이란 철학적 물음에 답하기에는 과학으로 해명할 수 없는 사유와 문학적 상상이 요구된다. 작가는 이렇게 자기의 행동이나 감성, 사상 등의 모든 것이 섬세하고도 치밀한 소재를 형성하여 그곳으로부터 자신의 작품을 창조해 내는 사람이다. 작가 이상기는 아마도 그런 작가정신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지 싶다.
이런 연유로 화자는 즐겨 <자유로의 여행>을 떠난다. “‘자유’라는 말은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일상으로부터 해방되어 어디론가 가고 싶은 마음은 언제나 가슴에 숨어 있다. 여행 계획만으로도 마음은 새털같이 가벼워지고 행복감이 차오른다.” 그의 여행의 출발은 이렇듯 산뜻하다. 그에게 ‘길’은 자유를 찾아 떠나는 즐거운 놀이의 공간이다. 그의 다른 언술을 보자. “누구나 더 많은 자유를 희망한다. 하지만 공자는 “일흔이 되어서야 마음대로 행하여도 법도에 어긋남이 없다.”(七十而 從心所欲, 不踰矩)고 했다고 한다. 공자 같은 위인도 이런 말을 하였으니 우리 같은 범인에게 ‘실천의 자유’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일깨워 준다.”(<자유로의 여행>에서)고 했다. 자유인 조르바, 아마도 작가 이상기는 지금 조르바가 되고 싶은지도 모른다. 조르바에겐 일상으로부터의 탈피라는 꿈을 지니고 있었다. 현대인에게는 더욱 그렇다. 하여 회색빛 도시로부터의 도피는 노마드Nomad를 키운다. 이들 수필은 자기 응시를 통한 사물의 재현일 것이다.
수필 <팽나무 아래서>는 “멀리 보이는 노거수의 윤곽이 반원형이다. 편안해 보이는 부드러운 곡선이 산의 능선들과 드문드문 보이는 농가 지붕들이 어우러져 따스한 고향의 그림으로 그려진다.”로부터 열린다. 화자가 길에서 만난 노거수老巨樹. 이 수필의 공간은 “흥해읍 용천리”다. 수령이 약 500년으로 추정되는 팽나무다. 화자는 주민들의 쉼터인 평상이 앉아본다. 작가의 사유와 상상의 발원지다.
저렇게 번개가 몸통을 쪼개고 태풍이 가지를 잘랐어도 풍성하고 편안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나무는 “삶이란 꺾이고 흔들려도 말없이 견디는 것이다.”라는 교훈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성숙은 시련을 이겨내며 견디는 과정에서 얻어진다. 하지만 세상 누구나 시련을 이겨내고 일어서는 것은 아니다. 노거수는 말없이 이에 대한 답을 보여준다. 큰 가지가 꺾여도 말없이 옹이를 만들고 견뎌내면서 뻗어 바람에 견디며 가지를 키워 많은 열매를 키워냈다. 삶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진 자만이 시련을 이겨낸다는 것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팽나무 아래서>에서
큰 가지가 꺾여도 말없이 옹이를 만들고 견뎌내면서 뻗어 바람에 견디며 가지를 키워 많은 열매를 키워내는 노거수는 다름아닌 화자 자신이다. “성숙은 시련을 이겨내며 견디는 과정”에서 얻어진다는 화자의 진술은 삶의 통찰에서 유로한 자각이자, 존재인식이다. ‘길’에서 만난 이런 사유의 세계가 설득력 있게 다가온다. 작가 이상기의 수필은 이렇게 자기 관조와 성찰에서 출발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의 작품을 통해 작가의 얼굴과 만나게 된다. 수필 <곡류曲流>나 <바람 속에서>, <기다림의 미학>, <추억지우기>가 이런 맥락에 있다.
5. 실존적 의식의 그물망 그리고 경계 가로지르기
작가 이상기는 지금 새로운 삶을 경영하고 있다. 나이듦과 퇴임의 의미는 현장에서 밀려남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을 예고한다. 그 역시 그러하다. 제3부에 배열된 작품들은 이런 화자의 현주소를 잘 보여준다. “퇴직 후 집에서 세 끼 식사를 하는 남자에게 아내들이 ‘우리 집 삼식이’라 부른다고 한다. 남편의 직장생활로 낮시간이 혼자였을 아내는 나름의 생활 리듬을 만들며 살아왔을 터인데, 갑자기 세 끼 식사를 챙겨야 할 남편이 생겼으니 아내의 생활에 혼선을 빚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로 인한 불편함이 묻어있는 대명사가 ‘삼식이’일 것이다.”(<삼식이로 살기>에서) 그런 그가 아내의 성화에 못 이기듯 신발장 정리를 한다. “몇 번이나 신발장을 정리해 달라는 아내의 말이 있었지만 무심한 채로 지내왔다. 현관이 그 집의 얼굴이라곤 하지만 둘만 사는 집에 올 손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신경 쓰일만한 불편도 없었기 때문이다.”(<신발장 정리>에서) 화자의 의식의 그물망에 이런 소소한 일상이 실존적 자각으로 다가온다. 삶의 현장에서 깨우치지 못했던 일상이 변용되고 굴절하는 변화를 수용하는 실존적 자각이다.
수필 <황혼의 악기>는 노년에 이른 화자의 새로운 의식의 그물망이다. “소일과 건강을 위해 색소폰을 배워보려 학원에 등록한 지도 몇 년이 되었다.”고 서두를 풀어낸 이 수필은 생활인의 건강한 존재의식을 잘 보여준다.
무엇을 하건 어디에 있건 배우고 익히고 실천하는 것이 누구에게나 적용되는 기본실천사항임을 늦게 시작한 악기를 통하여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언제쯤 이 답답함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연주할 수 있을지 가끔은 조바심이 나기도 한다.
청각은 시각보다 감성적이다. 좋은 음악은 물론, 새소리, 바람소리, 파도소리, 흐르는 물소리, 눈 내리는 소리 등등 자연의 소리들은 마음에 파문을 일게 만든다.
아직은 멀고 먼 욕심이겠지만 다른 이에게 작은 파문이라도 만들 수 있는 소리를 갖고 싶다. 우선 스스로 만족하는 소리 만들기 연습에 게으르지 말자고 스스로에게 다짐한다.
-<황혼의 악기>에서
수필문학은 자기를 객관화하면서 자신을 비추어 보는 인간 탐구의 문학이다. 이상기의 수필은 비록 일상의 자잘함에서 소재를 취택하고 있으나, 존재의 자각을 통해서 자기 얼굴을 그리고자 하는 창작 동기에서 그 세계의 모습을 찾을 수 있다. 한 마디로 그의 수필에는 소박한 화자의 삶의 지향과 마음의 행로가 행간에 담겨 있다. 영혼의 언어로 직조하듯 자신이 축조한 수필의 성채일 밖에 없다. 그래 그의 수필을 읽어내려가다 보면 절로 그의 마법魔法의 성에 갇히게 된다. 잘 짜여진 의식의 그물망을 그의 수필에서 엿보게 한다.
각자의 삶은 평생을 걸쳐 완성해 가는 구조물이다. 애초부터 설계도가 없이 만들어가야 하는 것이 인생이다. 작지만 따듯한 것, 크지만 황량한 것, 화려하지만 미완성의 것, 어떤 것이 될지는 지금의 삶이 어떤 모습인가에서 비롯된다. 먼발치에서 돌아보고, 비추어 보고, 다른 이의 삶도 참고하면서, 내가 건축하고 있는 삶의 기둥이 비뚤어지진 않았는지, 한쪽 벽만 높지는 않은지 찾아보고 잘못된 것이 있으면 그때그때 바로잡아가면서 완성시켜가야 한다.
-<삶의 구조물>에서
이상기의 수필은 이렇듯 작가의 일상적 체험을 바탕으로 하여 언어미학적으로 창조한 미적 관조의 산물일 것이다. 화자의 솔직담백하면서도 단호한 의지가 엿보인다. 이런 실존적 자각이 독자를 작품 속에 흡인하게 한다. 그의 수필 <스위치>나 <잣대>, <동백꽃>이 같은 맥락에서 파악된다.
끝으로 그의 수필의 한 측면은 경계 가로지르기이다. 새로운 세계의 문학은 전통에 대한 파괴와 전도, 고정관념의 해체로부터 시작된다. 문학의 이종결합이 보여주듯 타 장르와의 결합, 타 학문과의 결합을 통해 출구전략의 변화가 와야 할 것이다. 이상기의 수필은 이런 의미에서 타자의 작품들과 차별화된다. 인문학적 성찰의 좋은 예일 것이다.
이 수필집 제4부에 포진한 작품들이 이런 경향성을 잘 보여준다. 수필 <원전 가동정지를 보고>나 <코로나 시대 행복 짓기>가 그러하며, <스펙과 호기심> 역시 이종결합 또는 통섭적 기법을 보여준다. “과학기술은 목적이 아니라 수단이다. 인류의 안전과 행복을 만들지 못하는 과학은 인류를 파괴할 뿐이다. ‘양심이 없는 과학은 영혼의 파괴자’라는 말이 있다. 인간과 자연을 우선시하는 선순환의 사회를 만드는 과학이어야 한다. 그리고 어느 분야건 그 분야를 담당하고 있는 당사자들의 책임감이 신뢰와 선순환의 시작점이 된다.”(<원전 가동정지를 보고>에서)라는 화자의 언술에 설득력이 실려 있다.
6. 에필로그
지금까지 살펴본 이상기의 수필집 《길에서 만난 생각》의 작품세계는 독자에게 주는 울림이 크다. 좋은 수필은 세계가 주목하지 않아도 작품에 담은 모든 것과 완전한 조화 속에서 울림을 일으킨다. 그 점에서 이상기의 수필은 사유와 상상으로 짓는 인문학적 성찰로 이루어진 그만의 성채일 것이다.
그의 수필은 첫째로 존재론적 담론의 깊이와 함께 그만의 사유와 상상이 씨줄과 날줄이 되어 인문학적 성찰에 기여하고 있음을 보게 한다. 그의 수필이 보여주는 삶의 진정성이자, 독자를 작품 속으로 흡인하는 마력과도 같은 힘일 것이다.
둘째로 그의 수필에서는 자기 응시와 사물의 재현이 나타난다. ’길’이라는 가상의 공간을 자기화하면서 게서 만난 사유의 세계와 함께 삶의 현장에서 추수한 존재인식을 진솔하게 고백하고 있다. 무의미에서의 유의미화, 작가는 인간 존재의 문제에 천착하고 있다.
셋째로 작가의 의식의 그물망에 포착된 실존적 자각과 함께 경계 가로지르기를 통해 일상의 변용과 굴절이 작품화되어 있다.
그의 작품들이 독자에게 신선한 감동과 함께 존재인식의 계기를 마련해 줄 것으로 판단된다. 일독을 권하는 소이가 여기에 있다. 작가 이상기가 짓는 수필의 성城이 더욱 새롭게 축조되길 기대한다.*
첫댓글 일생을 잘 가꾸어 오신 아름다운 황혼을 본 받고 싶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