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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의 말씀 이야기와
예수님의 말씀 이야기
그리고
공자님의 말씀이야기 ..
또한
우리민족의 경전말씀인 천부경이야기 등..
여기에 부응하여 역시 같은 맥락이라 할 수 있지만 우리나라 문화적 영향에 크게 미치지는 않았던 범주에 해당되지만
세계적인 지형의 관점에서도 인류의 삶에 대하여 아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코란경, 힌두니즘, 등
지구별에 전개된 이 모든 성인들께서 출현하신 의미등을 포함한 통괄적인 義(의) 를 찾는다면 공통 善 이며, 계율입니다.
성인의 말씀과 그 지위에 대하여는 지구상에서도 유일하게 추앙받은 분들로서 이분들의 메세지는
연역적으로, 시대적 순으로도 , 인류의 문화적 배후에 불가분 관계로 진리의 본질을 보신 분으로 이미 의심할 나위없이
설정되어져 있읍니다.
인류의 문화를 세우고 문명시대에 이르게한 언어의 발생과 문자의 발전에 대하여도 일부 개연하여 영향을 끼쳤으며, 지구벌에서 유일한 소통의 의미짐작으로서도 생명운동에 대한 포괄적 사물의 이치를 이성화로 통찰 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게 된 것도
모두 성인들의 말씀에서 비롯한다는 사실을 이해할 수 가 있는 것입니다.
반면에 언어와 활자 이전에 기원을 들추어 보신 성인들의 물자체 소식일진대, 도리어 소통매개체의 활자와 언어의
양태가 이러한 본의적 이고 압축되어진 진리의 헤안점을 차단하는 역효과를 지니게 된 것도 사실입니다.
모든 경전의 말씀은 언어와 활자의 문자 이면에 주어진 본의를 살피지 않으면, 수박겉을 핱고 있는 것과 다름아닌
본질 이면은 들여다 보지도 못하고 , 그 외양의 껍데기의 옷만 잡고 치수를 재는데 불과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의 말씀은
무릇 그러한 문제점도 병행하여 성인의 말씀이 도리어 인간군에 의하여 오히려 역 공격되는 대상이 되거나 각색되어지다시피 과다 포장화 되기도 하면서 옷을 입히기 시작했읍니다..
그런고로 모든 성인들의 말씀은 활자화 한 문자내용 이면에 보이지 않게 서성이며 계십니다.
언어와 문자를 최고치로 인식하고 이 소식을 압축하여 문자라는 재료로 떡칠하여 놨기 때문에 이를 풀어볼 재간이 모호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경전을 글을 대면해서만은 진리의 구심점을 드러나게 하는 만족치를 점점 더 애매모호한 관점에서만
구할 수 는 있는양 그러한 처지에 놓이게 했다는 점을 말 합니다.
이는 진리를 목도하는 일관성(一貫性) 이 도리어 각각의 견해질에 따라 각관성(各貫性)으로 와전 되어지게 된다 이 말입니다.
성인의 말씀에 대하여
단 한분의 말씀에만 집중하여도 모든 종교적 의미의 본질과 진리의 측면에서도 모두 다 통하게 되어야만 합니다.
그럴 수 밖에요, 통찰의 맥락은 어김없는 일여(一如) 를 본질로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각기 다 종교적 색깔과 모습, 지역적 문화양태에 따라 옷 색깔이 다르다고 다 다르고 우리것이 제일 진리라는
희한한 퍄숀 경쟁만 일삼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지금 각기 종교색으로 주어지는 격리된 문화양태와 가치관은 서로 다르다고 하자마자 이 넘의 진리가 술이 취해서
갈팡질팡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럴수록 성인의 말씀을 기준하고, 부흥하여 ( 진리의 말씀을 공부하시는 다른 여타의 분들도 같은 마음이겠지만)
한꺼번에 개괄 하여 펼치고자 하는 것은. 공통 선의 큰 의미를 짐작하고자 하는 의지의 발로 는 늘 시도 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삶을 살아가는 문명인으로서 최대의 난제이며 숙제가 되는 현 주소지다 이렇게 말씀을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글자 문자 이면에 주어진 의미를 잡아내야 한다는 것이 성인의 말씀이 되는 진리의 본칙을 풀어내야한다는 사명을 모든 인류가 총체적으로 인식하고 그 맥락을 빨리 풀어내어 와전과 왜곡접을 제거해야 한다 이 말입니다. 이를 일단 우선 진작
하기로 해야 합니다.
(진작: 조심스럽고 신중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마음가짐을 모야야 하는 상태)
그렇다면 왜 진리는 하나인데 각기 일관하는 것이 종교의 문화형태로서 이를 믿는 집안살림의 척도가 각기의 관점으로 굳어져서 문화양태에 따라 견해가 다르게 꼬여져 있는 상태를 우선 스스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무슨 연유로 달리 매듭을 짖고 있는가 하는 의문은 빨리 풀어내기 위해서 입니댜.
이 문제의 본질은 언어와 문자로서는 진리의 본질에 접근할 수 없는 자연색을 건천에 다양한 주관적 기호로 페인트로 덧칠 하여 알맹이를 보지 못하게 했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성인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인간의 자세는 4 와 8 이 떠서 사팔때기로 변질되어 보고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다른말로 하게되면 선무당이 사람잡고 있다 이 말입니다..
왜 이러한 양상이 역사적 세월을 거듭하면서 계속 더 헷갈리는 세계로 비추어지는 양태로
굳어져버렸고 수정되지 않고 있는지에 대하여 심층있게 검토를해야 합니다.,
바로 이 지점을 연구 검토하는 자세가 성인말씀을 올곧게 받아들이고 공부하는 자세가 된다 이 말입니다.
그런고로 다시금 각기 종교단체에서 서로 대화하고 토론하여 소통하는 자세를 늘 유지 발전시켜야 한다는 사실입니다..그리고 공통선을 반드시 발췌 해내야 합니다. 거기에는 공통선이 있읍니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자기의 관점은 옳다는 사실만을 전제하고 의론을 주장하는 선상은 더욱 더 두터워지고 있으므로 오히려 장벽을 만들기에 바쁜 비판 문화만 더 팽배해졌읍니다. 심각합니다.
그렇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서 기인하는가?
그 원인은 분명합니다.
경전의 말씀이 진리의 본질처로서 이견이 없으나, 이를 문자화로 구성하고 기록하는 관점의 연역적 배경을보면
이미 성인의 출현 이전에 인류가 발견한 문자와 이성적인 관점을 기준하여 글자 형상화로서 채택한 소통매개체로서 , 이와 아울러 지정학적인 환경의 판이한 성질 덕분으로
모든 사물의 이치기 전혀 일관성이 없는 주관화 양태로 감정을 실은 환경적 변이상태로 고착화된 풍토적
병인 요인입니다.
상황추이에 따라 사물의 이치나 본질면을 제대로 규명하지 않고 카더라 하는 식의 방법으로 애매모호하한 전제 를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물의 이름을 지어버리고 이것이 습관화 되고 관성화되어 고착화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진리의 본질은 이미 언어 문자 이전의 소식을 담아주어야 합니다.
진리의 體(몸 체) 라 함은 언어 문자 이전의 보여지는 것, 그리고 소리와 향기 냄새와 맛, 감촉 .이 먼저있었고
또한 이 6 의 오감이 있기전에 자연음의 소리가 있었고, 소리이전에 빛이 있었으므로, 진리의 본질을
체(體) 로 하는 빛의 소식을 이해하지 않으면 성인의 말씀을 올곧게 받아들일 수 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문자이전의 본래 면목을 보아야 한다는 것은 필히 짐작할때 진리의 본질은 우리들의 눈 앞에 와 준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개괄적이며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본질자체도 접근할 수 없는 언어와 문자의 선택사양의 온존함을 담지 못하는
양태를 문화가치로 활용하게 되면 통각자체도 올 수 가 없읍니다.
그것도 지형적인 환경요인에 따라 옷을 입힌 언어의 담즙을 재로로 본질을 요리하는 선상에서 그르치는 희한한 요리솜씨가 동원되어 진리인양 패숀감각과 테크레이션(장식) 화 되어져서 눈금을 잡고 저울질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적 환경에서 정확하지도 않은 애매모호한 명제에다가 이름을 입혀 문자를
만든 원인에서 비롯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분면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말입니다.
진리의 모습은 법칙인데
진리가 삐딱하게 기울어져서 경사면을 지니면서도 유사성의 진리를 표현하는 것은
규범이라 합니다.
인류의 불량품은 규범입니다, 엿볼 규字 를 붙여 窺範(규범) 이라 하는데 일체범주를
그냥 안방에서 규수가 문을 약간 열고 외부를 살피는 정황으로 수다를 떤 다하는 것을
규수라 하거니와 이러한 규범을 정도로 인식화 하고 고착화 하게 만든 것이 문자라는 것을
말합니다. 문자는 다만 도리어 언어보다는 뜻이 내밀한 것은 있으므로 진리를 활용하는
수단화로도 1차적 매계수산은 필연적이기도 합니다만..
그러므로 문화적 가치가 다른 지역들과 서로 접촉할때에는 충돌부터 일어나는 것입니다.
똥개도 자기집에서는 50점을 따고 들어가는 자기 집구석의 익숙함에 물든 우월론의 잣대양태를
말합니다. 진리를 논하는 경전말씀이 이렇게 되어서야 되겠읍니까?
진리의 본색은 자유자재 입니다. 공간적 자유자재를 논하지 않고서는 진리를 말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아예 직업화가 되어버려서, 밥 그릇 빼앗길까바 아주 시장 돗대기 같은 거리로 변해진지
오래입니다. 선택을 지향 하는 관점으로 되어졌기 때문입니다.
이를 선입견 문물의 투성이라고 이름지을 수 가 있는 것이며 그러한 판단을 할 수 있게 된 것은
인간의 선택이였을뿐 달리 할말도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각기 해당 나라나 지역적으로 편중되어 심화되는 각별한 문화를 창달하게되었다는 사실로서만
각기 지역적 특징은 이질화로 정의를 내리는 관점으로 작용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당체는 해당 문화적 가치관에 따라 습관화 된 양태로 개별적인 개념이 같이 붙어
진리의 본질세게에 대하여 애매모호한 관점을 넘어 본질과 전혀 상관이 없는 이름만이 발전하여
모든 세계가 차별화 되었다는 사실은 성인의 진정한 말씀을 각색한 각기 경전의 활자화에도
그 영향을 심대하게 미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 종교개혁이라고 이름할 수 있읍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의미를 진작하는 본질로서는 종교는 서로 타협점 자체도 불가능하게 되엇다는
현실적 문제에 대하여 시급하게 깨뜨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성인들이 말씀을 담은 경전말씀은 서로가 각기 판이하게 애매모호한 것만을 유발하면서
가치창달의 구조만 변경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이제는 아예 과학에 끌려가고 있는 형국입니다.
어떻게 종교가 이처럼 사람이 살다가는 방법의 수단화로 되어야만 하는가 입니다...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본질적이고 총제적인 정의력을 상실하고 힘의 이동점에서
종교는 국가화 되고 세력을 이동시키는 주체자의 힘에의하여 변모되는 신세를 지고 있는 것이
현 경전을 해석하는 모순에 빠져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렇게 되면 윤리가 서질 않읍니다. 윤리는 굴러간다는 것이니 인간의 가치인 O 률을 운동한다는
덕을 상징화 하는 것이 윤리입니다.
그런고로 언어이전으로 되 돌아가서 회구하여 본질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경전의 말씀을 활자에 의존하여 아무리 읽어보십시요.
하얀것은 종이요, 까만것을 글자 일 뿐입니다. 그 이면의 맥락을 빨리 끄집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들이 흔히 말하는 "말이 그렇다는 것이지 뜻이 그러한가" 와 같읍니다.
성인들의 말씀의 공통적인 것은 아직유일하게 우뚝세운 푯말은 성선설입니다. 그리고 자비 보시이고 사랑함이며 인과율을 세우신
그 범주의 표상점 은 지금도 공동선을 표상합니다, 이 공통선을 기호로 표현한다며는 O 입니다.
글자 활자 이전에 항상 O 이 있다는 사실을 전제해서 맥락을 풀어 진리의 본체에 다가서야 합니다.
O 을 인식하게 한 것은 數(수) 입니다.
이것은 필요적이며 충분한 명제로서 아무리 복잡다난하고 갈등과 전쟁 기아의 와중에 문명의 산통을
지닌 현주소이지만 O 률만 이행하고 O 견만 하게되면 다 해결 된다는 사실을
이미 모든 성인들께서 정해 놓으셨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자 그렇다면 모든 경전말씀을 몰록 이해하는 장소로 안내 해 보겠읍니다.
언어이전으로 문명의 시초는 數 가 먼저 존재했다는 선상에서 출발해 볼 수 있읍니다.
數는 O 에서 출발하여 대정수가 머무는 진리안의 근저의 선상에서 존재하는 대상입니다.
O 에서 나왔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數 에서 진리의 본체가 서성거리고 있다는 사실을
우선 인지 해야합니다.
그리고 數(수) 이전에는 그림입니다, 圖(돟:그림 도) 가 數 보다 먼저 존재 했읍니다.
그러므로
이 세계에 존재하는 언어와 문자는 전부 애매모호하고 확실하게 정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본질과 벗어나는
영역선상에서 등 뜨시고 배 부르며 권력을 진 자들의 엿장사 마음대로 기분나는데로 이름지운것이 언어개념으로굳어졌다는 사실을 탈탈 털어내고 數 와 圖 의 언어이전의 시대로 되 돌려 소급해야합니다,
언어의 본질은 수와 그림에서 나온것이 함의의 일부였읍니다.
그러므로 언어적 의미 문자등은 통찰의 장애가 도는 요인으로도 발전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소통의 의미로서도 왜곡전이되는 성질을 가지고 있는 정체가 언어와 문자입니다.
그러므로 말을 온존하게 믿어서는 아니됩니다, 말은 어디에서 오는가? 소리에서 옵니다.
소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빛에서 옵니다, (쉽게 말하자면 번개를 연상하시기 바랍니다0
빛은 어디에서 왔는가? 이 명제가 성인들의 말씀을 공부하는 대상이 된다 이 말입니다.
빛은 빛 이전에서 왔읍니다.
지수화풍 운동에서 왔읍니다.
진실된 본체의 전모를 들여다 보고 관찰해야 합니다.
지수화풍 이전에는 水 가 있었읍니다.
水 이전에는 空 이 있었읍니다, O 을 우리나라 말로 읽으면 공입니다.
문화양상이 또 O 과 공 그리고 무로 갈라치기 해 버렸읍니다.
인류의 출현 이전의 물자체 를 접근하는 지혜를 함축하여 발휘해야만 인류의 출현 까닭이 나오는 것처럼
그 이전의 소식줄을 잡아야 한 줄거리를 꺼내 잡을 수 있읍니다.
이러한 포괄적 연역의 추이에 대하여 소리가 나오고 빛이 일어나고 그림이 생겼으며 數 가 발생하면서
빛의 구체적 도감은 발전하고 동시에 數 가 소리의 배경줄을 잡고 출현하기 시작한 것이
진리라는 O 의 근저에서 정립된 문화를 연구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이를 역추적 한다라고 하고 , 돌려 거슬러 돌이켜서 본다라고 하는 관점의 총체적인 수단을
행해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그냥 여과 없이 관찰하고서 그냥 이름을 붙힌 문자가 허겁지겁 굴러다니다가 습관화 되고
관성의 법칙에 의하여 굳어져서 돌이킬 수 없는 이상한 문자화 세계로 얼룩진 상태에서 성인의 출현을
만났다는 사실은그대로 인용하여 진리의 말씀으로 각색한다는 것은 모래를 사용해서 밥을하자는 말씀과 같음을 말합니다.
아무리 객관화 하여도 감정이 실린 이 언어의 습관은 객체의 소통의 전달 매개체와는 판이하게 영향을
끼치게 되어있읍니다.
그러므로 이심전심을 수행의 본처로삼는것입니다,
결국은 영적인 체험으로 완성되는 지평을 열고는 있지만 O 을 알고자 하면 문자와 언어를
떠나고 생각을 떠나는 관점에서 오로시 직관으로 數 를 헤아리는 최적의 관찰점에서
끌어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면 오롯한 象 이 오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문자로 기준하는 이성적인 관찰은 거듭 거듭 주장하지만결국은 주관적입니다.
객체의 진리앞에서는 여지없이 매카리 없이 나자빠지는 문화의 가치밖에는 아니됩니다.
이러한 혼잡스러운 사고방식에 기여한 언어와 문자의 승부작용때문에 이상한 갈등요인도 함께 키운 결과다 라는 사실이고 감정적으로 아무리 이성적 관찰을
통찰 한다 하여도 절대 객관적이 아닌 주관적 요인으로 발전할 수 밖에 없음으로 한정되어져 있다는 사실을
먼저 발견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경전의 말씀은 언어화 됨에 따라 오히려 애매모호한 경지로 이 끌려 온 역사적 사실을 감출 수 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언어를 딛고 일어서야 하는 것도 필요불가결한 당체로 대면해야 한다는 사실도
필연적이라는 입장을 견지해야 합니다. 이것을 해결할 추이점은 數 와 그림이다 할 수 있읍니다.
인간의 기본 최 우선 상식의 발로로서는 수와 그림에서 진리의 근저를 접근해야 한다
이렇게 정의 할 수 가 있읍니다.
그러므로 진리라는 본질에 대하여 인간은 언어와 문자를 넘어서는 영역으로 진입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이러한 현 주소지에서 특정한 종교를 고집하는 것은 그러므로 아주 위대한 고집입니다.
이를 진리의 본질로 보게되면 아주희한하고 황당한 고집이다 이 말입니다.
.
빛이란 항상 지금을 본질로 한다는 사실을 전제하면 언어문자화의 진리의 척도를 재는 잣대는 과거에
메몰되어진 집착의 근저를 둘어매고 있다는 사실을 말함과 같읍니다.
자 다시 수면위로 올라가봅시다
세상의 진리라는 본질체는 공통선이고 공존입니다. O存(공존)이지요. 이것은 아주 본연하게 이 세계 바다위에
부표를 띄우고 있읍니다.
공존은 빛의 운동모습이기도 합니다.
공존의 이치를 항상 말씀하신 성인께서의 한 지점을 세상에다가 공존력으로 이 세계가 변함없이 진행된다라하시는 것을 세우신 것입니다. 이 공존의 가치는 O 입니다.공존을 늘 유지하고 균형을 잡고 항상해야 하기 때문에 늘 아무일 없게 O 으로 유지해야 합니다.
우리들의 생명성품과 직결되는 이 개념을 찾아 떠나는 여행의 이야기를 항상 대화하고 또 해야 하는 것입니다.
공간은 늘 변함없고 청정하게 유지됩니다. 구름이 자욱해도 결국은 기화 액화 고체화라는 삼각운동에 의하여
다시 물은 물로 가야 하고 공간은 늘 다시 청정하게 되어지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인 것 처럼 공존의 개념은
이와 같다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그런고로 모순의 양태가 있는 인간군의 물질계소속이라 할 지라도
삼각운동이 O 률 운동으로 회전한다는 사실을 우선 이해해야 합니다.
시간은 이미 12 진법으로 굴러가고 있읍니다, 이것이 성인의 말씀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런고로 빛은 이야기로 언어로 풀어낼 수 있는 대상이 아닙니다. O 견을 해야 합니다.
또한 더러운 것은 결코 더러울 수 없는 본질적으로는 쓰리쿠션으로 원래로 회귀되는 현상으로 보는 통찰의 의미로서 . 바로 O 으로 회복되어지는 과정의 운동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쳐야 합니다.
이를 꿈을 깬다 라고 하지요.
.하지만 유사한 이치를 세운 언어의 각론이 헷갈리게 할 뿐 수식으로 본연을 들여다 보는 습관을 지니면
언어로 표현가능한 이면의 모습은 점점 보이기 시작 할 것 입니다.
이미 인간은 언어를 버릴 수도 버릴 생각도 없읍니다. 빛과 상수, 그리고 그림으로 직관을 열어야만 합니다.
인류의 문화는 생각이 굳어지고 고정화 되어서 대정수와 象 그리고 數 를 반영하지 않으면
진리를 풀어질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게 될 것입니다ㅑ.
불확실한 시선의 제한을 유발한 언어의 한계점! 인간이 만든 모순이 포함된 발명품이기도 하므로
누구탓도 아닙니다.
여기서 조금더 외부로 나아가 보기로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정지하듯이 이 세계에서 변화가 되지 않는 모습을 지닌 것이 있는데 항상 하는 것은 물의모습과 공간의 모습 두가지 입니다.
이 두가지는 서로 마주합니다.
공간은 물을 마주하고 물은 공간을 마주하며 서로 거래를 하지만 서로 변화함이 없는 청정한 아무일 없는
그 모습을 항상 유지한다 이 말인데, 이것이 O 의 소식입니다. 항상 청정함을 보는 자리를 대각이라 이름하고
하나님과 성령을 마주하고 독대한다 이름하면 성경말씀에는 이를 인침한다라고도 하는 물자체의 기원은
여기서 찾아야 합니다..
數(수)와 그림(圖) 그리고 빛 이전에 수화지풍이 있었다 함이며 이 수화지풍의 배경과 이면은
공간과 바다의 양태로 지구군의 기원을 이룬다는 것이고 수화지풍의 4 대중에서 유일한 하나가
물을 세웠다는 사실로서 공간\의 九멍 과 통하여 1+9 로서 10 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10 은 O 차원으로 굴러갑니다, 필요충분명제입니다.
그러므로 성인들께서는 항상 바다의 소식을 듣고 바다의 모든것을 말씀하신다 하여 聖(성스러울 성)
입니다, 바다 壬(임: 북방 생명의 기원처 물의 자리) 에 대하여 모두다 듣고 (耳: 귀 이字) 모든것을 다 말씀하시는
분 (口 입 구字) 입니다.
바다가 몸이시고 바다자체가 귀이시고 바다자체가 입이신 분을 성인이라 이름하십니다.
세상의 모든 조화나 삼세간의 사연된 이야기는 전부 바다와 공간의 이야기일 뿐 입니다.
이 바다를 낳으신 분이 공간이다 이러한 표현도 가능하게 표상되어져야 합니다.
공간을 九라 하지요, 그리고 金이라 합니다, 金生水(금생수) 라 금은 물을 낳았더라, 하여 금생수 라하고
9 금은 1 을 낳았다 하여 천 9금 지 (地)1 생수 라 이름합니다.
數 와 그림은 빛의 운동에 대한 연역점을 직시하게 해 줍니다.
그러므로 직관에는 數 와 그림이 발전한 象 의 객관적인 인식체의 온전함에서
끄집어 내지 못하면 직관은 아니되고 불가능한 것입니다ㅑ.
모든 세계의 변증과 확장을 모두 산출 해 낼 수 있다라는 최대의 수단처가
빛이 운용하는 수와 그림 象 입니다.
이는 고요한 공간처럼 적적함에서 마음을 안립해서 놓게되면 자연하게 방문해 줍니다.
세상이 작용해서 오는것을 받아주고 반응하면 되는 과정을 직관이라 이름하는 것입니다ㅑ.
여기에는 감정이라는, 감성이라는 골격은 언어처럼 주어지지 않읍니다.
절대 주관화 할 수 없읍니다.
주관화 될 수 없는 공동선을 행하는 재료는 오로지 수식과 공식 밖에는 없다 이 말입니다.
우리가 진리의 본질처를 접근하기 위하여는 거꾸러 수를 세야 합니다.
회귀력을 길러야 합니다.
땅의 123456789 는 5 가 중을 잡고 나아가고 1234 5 6789 로서 5가 양변을 잡고 굴리며 회전하는데
6은 4 와 마주하고 7은 3 을 마주하고 8은 2를 마주하고 9는 1 을 마주하면서 사방을 운동합니다.
그런데 9=1= 0 입니다, O된 이치로서 서로 마주함이니, 나머지 세가지 사항도 매 한가지이니 이 O 을 空(공) 이라 하고, 영이라 하며, 無 라 하여
항상 아무일 없게 유지하는 허공의 모습을 견 할때 청정함의 보리도를 닦고 하나님의 셩령이 임하는
순간이 된다 이 말씀과 같읍니다.
9=1=0 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9,8,7,6,5,4,3,2,1 로 역행하는 과정에서 통각해야 O 이 보입니다.
.
그러므로 이 O 을 비로서 세우기만 하면 모든 세계는 평화 하며, 사건이라는 문제점에 대하여
문제점으로 여기지 않는 문제가 동시에 답을 규정하는 바로미터가 함축해서 사변적 문제 요인을
동시에 해결하는 함축점을 동반해서 출현해줍니다,
이를 이해했다 라고 할 수 있는 경지가 되는 것입니다.
근취제신으로 나라는 존재가치의 문제점을 거슬로 보게되면 모두가 내 탓인 자리...
그렇게 되면 다 풀리는 경지를 ... 불교에서 참회 해서 본다 하고, 카톨릭에서는 내 탓이로서이다 하고.
기독교에서는 회개 하고 성령의 은총이 임한다 하시는 것입니다
유독 우리 민족은 殺(살)을 푼다 합니다. 문자의 모습이 다르지 체와 용은 항상 하나라는 사실을
진리의 근저에서 늘 숙성시키고 있음을 빨리 자각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구처체적으로 공존개념을 반드시 이해하고 자각하지 않으면 아니되는 기준을 먼저 세우지 않으면 아니됩니다.
數 를 공부해야 합니다.
고로 본인은 이를 시도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 역시 불완전하고 온존하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더욱더 열심히 공부해야 합니다. 또한 아울러 공동선을 지향해야 합니다.
이러한 O 의 자각은 언어이전의 시대로 돌아가서 다시 빛의 발생처름 재발견하는 것을 말합니다, 소리이전으로 돌아가야 본래면목을 볼 수 있기 때문이죠.
그러므로 진리라는 것은 원래 있음인데 이를 잃어버린 것이므로 되 찾는 작업을 말하는 것이지
공존개념은 새로운 창조가 아닌 재 발견을 하는 것이 우리들의 의무이행의 자리가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공존을 위하고 이를 정립하여 바로 세우기 위하여는 . 생각을 내는 인간들의 비중 선상에서는 모든 사실에 대한 객관적이고 주체화 되기 위한 공존의 도를 위해서 이 사실을 O 을 공유하는 패턴을 추구하고 구사하지 않으면 아니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인간으로서 최고의 이성적 고찰의 전제는 부족미와 겸손일 것입니다.
성인들을 향하여 우리가 취할 자세이기도 합니다.
지금 제가 문자로 이럭저럭 말을 붙드는것은 "헛되고 헛되며 헛됩니다"
선지자들의 변을 인용해 보았읍니다,
이를 전제하고 올리는 글임을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성인의 말씀을 항상 공부합시다, 생애의 후회치를 멀어지게 하는 길목이
경전말씀입니다. 이를 인식만 하여도 일단 성공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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