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엘은 쉬운 일을 왜 힘들게 하실까?!
요엘에 이름의 뜻은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다.”,입니다. 즉 구약과 신약의 말씀이
모두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스라엘의 역사가 되게 하여 모든 민족으로 하나님을
알고,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게 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존재
사람은 스스로에 생각으로 갖게 된, 학문과 과학이라는 문명을 맹신하고 있는
상황에 갇히게 되면서 스스로 존재에 대하여 까마득히 잃어버렸고, 자신들이
다스려야 할 피조물 중에서 자신들의 모습을 찾는 어리석은 존재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어리석은 지식을 자손에게 대물림하여 교육하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선과 악을 가르시는 심판이 있게 하는 일이 됩니다. 이 심판은 이미
오래전부터 아니 창세 전부터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따라서 예수님으로
성취하게 하는 구원의 은혜가 됩니다. 이 은혜는 온 세상에 가득하지만 마음이
교만하고 어리석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았지만, 자아(自我) 곧 피조물을 통하여
습득한 지식으로 형성되어 진,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하는 생각에 갇혀 있어서
세상은 창조론이 아닌 진화론으로 가득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영혼을
가진 하나님과 같은 존재이지만, 삼차원에 시간과 공간 가운데서 썩어지는 육체,
곧 영혼이 갈아입어야 할, 몸을 입고 사는 동안에 자신이 마땅히 지켜야 할
일조차 모르고 썩어지는 것을, 좇아 사는 존재로 타락한 자리에 머물러 있지만
정작 스스로는 이러한 사실조차 까마득히 인지하지 못하고 있기에, 영혼이 몸을
벗을 때가 되면 두려움에 휩싸여서 죽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씁니다. 하지만
이는 쓸데없는 일이 되며, 모든 인생은 반드시 영혼은 때가 이르면 썩어지는 몸,
영혼의 옷을 벗게 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일을 놓고 항간에서는 사주팔자라고
하며, 죽음의 권세를 잡은 자, 사탄과 그 하수인에 힘을 빌려서 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에 대하여 알아보려고 점을 치면서 인생을 살며 위로를 받으려 합니다.
이러한 일은 어리석은 일로 영혼마저 영원한 고통 가운데 살게 하는 일입니다.
이러한 증거가 예수님께서 초림하여 공생애의 삶을 사실 때, 예수님의 존재를
가장 먼저 알아본 존재가 바로 귀신이라는 사실에 기인합니다.
11 또 악한 귀신들은 예수를 보기만 하면, 그 앞에 엎드려서 외쳤다.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12 그러면 예수께서는 "나를 세상에 드러내지 말아라" 하고,
그들을 엄하게 꾸짖으셨다.
마가복음 3 : 11 ~ 12절 - 새번역성경
여호와의 뜻은 “스스로 있는 자”, 라는 뜻입니다. 즉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일이
스스로 계시며, “내가 곧 나”, 라고 하여 우주 만물을 존재하게 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을 말씀하고 있지만, 정작 이러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서 흙으로 빚어져서
코를 통하여 하나님의 생령을 받은 존재라서 사람이라고 일컫는 존재는 이러한
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합니다. 그것은 자아(自我)의 생각이 강하기 때문이며,
스스로 습득한 것이라, 그 무엇보다 귀하다고 생각하는 고집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자녀가 되는 사람에게 함께 살자고 끊임없이 하는 말씀은 겸손하라.
말씀을 어린아이와 같이 순수하게 그대로 받아들여서 순종하라고 하십니다.
요엘, 즉 여호와 하나님께서 쉽게 하실 수 있는 일을 굳이 힘들게 오랜 세월에
걸쳐서 수없이 말씀하며, 하시는 까닭에 답은 인격과 자유의지와 책임에 관한
일이며, 이는 공의(公義)와 정의(正義)와 질서(秩序)로 우주만물(宇宙萬物)이
공존하는 법칙(法則)으로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것이기에 반드시 순종해야 하는
모든 피조물이 지켜야 하는 의무(義務)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는 법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법을 집행하는 권력자가 스스로 사탄의 깊은 흉계를
따라서 살고 있으면서 부패한 존재가 되고 있기에 세상에서는 하나님의 공의와
정의와 질서가 지켜지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하늘나라에서조차 일정 기간에 걸쳐서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려고 성령과 처녀의 몸을
통하여 세상에 오시기 약 700년 전에 이사야로 기록하게 하셨던 이사야 7장에
말씀을 성취하셔서 완전한 사람이 되셨고, 죄의 문제를 해결하는 십자가상에
사역을 통하여, 이 세상에서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과 계획을 성취하기 위하여
믿음을 통로로 삼아서, 하나님 아버지께 부탁하셔서 하나님 아버지의 영, 성령을
보내 주셔서, 임마누엘의 하나님으로 동행하며, 구원에 이르는 삶을 살도록
도와주고 계시며, 결코 먼저 배반하지 않으십니다. 하지만 자유의지와 책임에
관한 일과 하나님이 모든 만물을 대하는 인품(人品)에 관한 일 때문에, 모든
일을 스스로 듣고, 보고 느끼면서 갖게 되는 감정을 이성 곧 양심으로 다스려서
선한 양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삶을 살게 하시기에 겸손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일에 대하여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삶을 사는 존재에게는
하나님을 드러내지 않으시며, 여러 가지 고난과 환난을 주셔서 깨닫는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요엘께서 말씀으로 만으로도 쉽게 하실 수 있고, 이루실 수 있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하늘나라에서조차 쉽게 이루지 않으셨던 것은 능력이
없어서 그렇게 하신 것도, 아니며 악에 대하여 배반에 대하여 모르고 계셨기에
방치하셨던 것도 아닙니다. 단지 모든 피조물의 참부모가 되시기에 사랑하는
마음에서 모든 배반자까지 회개하고 영원히 함께 살기를 간절하게 바라고
소망하시기에 인내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아버지께서 정하신
세 번에 심판으로 선과 악을 영원히 가르시겠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 첫 번째
물 심판은 노아의 홍수로 이미 지났지만, 오늘날에는 불 심판으로 선과 악을
가르시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확인하시겠다고 말씀하시면서 경고로서, 성경의
말씀이 이스라엘의 역사가 되게 하여,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세상을 심판하시며, 신본주의적인 믿음을 교육하게 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름의 뜻이 “평화의 도시”, 라는 의미와 같이, 세상에서
평화를 이루실 때, 일들을 예루살렘에서 일어나는 일들로 깨닫고, 회개할 수
있도록 모든 영혼에게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그래서 영혼의 잠에서 깨어나야만
주님의 재림을 예비하는 기름을 준비한 신부로서 살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예언하신 마태복음 24장, 마가복음 13장에서는
다니엘에 이름의 뜻이 “여호와 하나님은 재판관이시다.”, 라는 뜻과 같이,
하나님 아버지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심판하는 일을 다니엘서 9장 24절에서
27절에 기록하여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까지 세상에서 있을 일들을 모두 알게
하여 기회를 주고 계십니다. 이렇게 섬세하고, 상세한 은혜의 말씀에 귀 기울여
영원한 자신의 삶을 예비하는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을 두고 예수님께서 예언하신 말씀은 누가복음 21장에도 기록하여
말씀하시지만, 다니엘서를 보라는 말씀은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의사가 직업인
누가로 기록하게 하셨기에 다른 두 기록보다 섬세함을 느낄 수 있으며, 세상을
심판하실 때, 있을 일이나, 사람에 마음의 상태를 느끼게 합니다. 그래서 같은
말씀을 반복적으로 다른 인격을 소유한 사람에 인격을 존중하여 기록하도록
하여, 다양한 인격을 소유한 사람으로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하여,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시는 것으로 이해됩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생각과 능력으로는 감히 가늠할 수 없으신 존재이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