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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8. ★★★묻히고, 파 묻어버린 밀양 향토사의 진실을 찾아서★★★
■ 다음(Daum) 카페 밀양광장 대문(메인 화면)에 올린 글
※ “재악산(載岳山) 정상의 바위가 사자(獅子)가 웅크리고 있는 형상”이라고 알리기 위해 사자(獅子) 사진을 넣었습니다
※ 각 항목별 자세한 내용과 사진 등은 밀양광장의 해당 게시판에 있습니다
추가 자료를 확보할 때는 해당 게시판에 계속해서 올려 드리겠습니다
[ 묻히고, 파 묻어버린 밀양 향토사의 진실을 찾아서 ]
1. 밀양의 고대국가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의 사라져 가는 여러 산성(山城)
2. 천황산(天皇山)을 재악산(載岳山)으로 산명 복원 운동
(민족 자존심 고취 및 일제로부터 진정한 독립)
3. 재약산(載藥山)을 수미봉(須彌峯)으로 변경 운동
(역사적 근거없는 산 이름 없앰, 1 山群 1 山名 부여 원칙 준수)
4. 1270년 항몽(抗蒙) 독립운동 밀양사람들의 삼별초(三別抄) 지원 및 훈련장 “사포(沙浦) 병구지(兵區址)”
5. 종남산(終南山) 봉수대(烽燧臺)의 원래 위치(역사 유적지 올바른 복원 강조)
6. 1194년 밀양 “효심(孝心)의 난(亂)” 전적지(戰迹地)와 산성(山城)
○ "효심의 난"은 무인독재권력의 폭정에 짓밟힌
○ 고려민중(경상도 장정) 7000명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
○ 운문지맥(밀양)에서 항거하다, 관군에 도륙당한 사건임
○ 초적(草賊)으로 비하된 7000명을 양민으로 복권시키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7. 밀양 “효심의 난 및 항몽 독립투쟁” 전후 고려와 밀양의 시대적 배경
[고려(高麗) : 밀주(密州) ~ 귀화부곡시대(歸化部曲時代)]
밀양의 향토사는 우리나라의 어느 군현(郡縣, 시군구)에 비교해 보더라도 자랑스러운 것입니다.
유구한 세월이 흐르면서 향토사의 작은 것에서부터 큰 것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것들이
왜곡되거나, 관리 소홀로 묻히거나, 어떤 권력에 의해 파묻혀 버렸습니다
유구한 역사를 거쳐 오면서, 수없이 왜곡되고, 파 묻혀, 잊혀진 우리 밀양의 향토사 중에서,
밀양을 가장 대표하는, 밀양인을 가장 대표하는, 가장 중요하고,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다음의 6가지 항목입니다.
밀양광장에서는 다음의 6개 항목의 향토사를 조사.발굴.보존을 위해서 노력할 것입니다
1. 밀양의 고대국가 미리미동국(彌離彌凍國)의 사라져 가는 여러 산성(山城)
■ 밀양의 고대국가 미리미동국의 자씨산성(慈氏山城)과 호두산성(虎頭山城) 위치
밀양의 역사는 현대사, 근대사, 조선사, 고려사, 신라사, 가야사, 삼한사(미리미동국)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그런데 "위지 동이전"에 "미리미동국"이 기록되어 있는 것 외는,
밀양의 향토사를 다루는 밀양문화원에서 발행한 밀양지에는 미리미동국에 대한
어떠한 역사 자료 기록도, 역사의 흔적을 발굴한 내용이 없습니다
아득한 옛날 우리 밀양에 살았던 미리미동국의 주인들이 남긴 자료와 기록,흔적이 없어
너무나 안타깝고 부끄러운 현실입니다
밀양 고대사는 뿌리없는 부평초처럼 되어 있습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밀양의 향토사학자들과 관청, 역사.문화단체 등에서는 밀양 고대사의 자료를 찾아내고, 그 흔적을 찾아내어,
우리 밀양이 뿌리없는 부평초같은 고장이 아니라는 것을 시민과 일반국민들에게 알려야 합니다
밀양에는 산성(山城)이 전국 군현(郡縣 : 시군구) 단위로서는 가장 많은 곳 중의 한 지역입니다.
그리고 고대읍락국가 미리미동국이 있던 지역치고는 고분이 전혀 없습니다.
산성이 많은 이유는 밀양이 예나 지금이나 사람이 살기좋은 고장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리미동국의 주변 세력은 땅을 빼앗기 위해 끊임없이 밀양을 침략해 왔고,
미리미동국과 그 후기 세력은 신라에 복속당하기 전끼지는
미리미동국의 후기까지 경계에 계속해서 여러 산성을 쌓아 외적(外敵)을 막았습니다.
신라시대 경덕왕 때에는 밀양을 밀성군(密城郡)이라 했습니다.
"밀성(密城)"이라는 지명의 유래는 밀양땅 둘레에 있는 여러 산성에서 벌어지는
피아간의 피와 불로 물든 전투 장면에서 유래되었다고 밀양의 향토사학자 도재국은 밀양광장에 올린 글이 있습니다
밀양광장에서는 향토사의 원조인 전기(前期) 미리미동국의 흔적으로 남아 있는
우리 밀양인의 선조들을 적으로부터 지켜, 이 땅을 보존토록 했던 자씨산성, 호두산성, 추화산성, 청운산성을
발굴, 조사, 관리, 보존하는데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밀양인으로서, 밀양문화단체로서, 밀양역사단체로서, 밀양향토사학자로서,
자랑스러운 우리 밀양의 고대사인 미리미동국의 역사를 조사, 발굴, 관리, 보존하는데
주저하거나, 행동하지 않거나,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면,
우리는 이러한 기관.단체.구성원 등으로서의 자격이 있는지를 부끄럽게 생각해야 합니다
■ 파란 선은 초기 미리미동국 주변 세력의 침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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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분지를 둘러싼 일련의 산성(山城)인 추화산성, 호두산성, 자씨산성, 청운산성은 “미리미동국의 산성"(향토사연구회 년보 게재)
2. 천황산(天皇山)을 재악산(載岳山)으로 산명 복원 운동
(민족 자존심 고취 및 일제로부터 진정한 독립)
재악산(載岳山)은 약초 몇 뿌리로 표상되는 작고 왜소한 산이 아닌,
백두산(白頭山), 묘향산(妙香山), 금강산(金剛山), 삼각산(三角山), 지리산(智異山) 등
우리나라 오악(五嶽)의 정기를 모두 담은 신령스러운 산입니다
우리 밀양의 향토 지명은 역사와 함께 하고 있습니다. 향토 지명 중에서 산의 명칭(山名)은
가장 중요한 중요하고, 가장 오랜 역사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산명은 하나의 목표 지점으로서 고대로부터 인류 즉, 우리 밀양의 선조들과 함께 하고 있습니다
재악산(載岳山)은 신라시대로부터 불려져 왔습니다.
그 증거는 표충사삼층석탑에서 유래합니다.
표충사삼층석탑을 옛날에는 영정사삼층석탑으로도 불렀습니다.
표충사삼층석탑을 옛날에는 영정사(靈井寺)라 불렀습니다.
그리고 표충사는 맨 처음에는 재악사(載岳寺)라 불렸고,
그후에 죽림사(竹林寺),
또 세월이 지나 1839년부터는 표충사(表忠寺)라 불리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고찰은 일반적으로 절의 명칭은 산의 명칭과 같이 불려져 왔습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재악산(載岳山) 재악사(載岳寺)"라고도 불린 적이 있다고 밀양의 향토사 문헌에는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제로 침략하면서 우리의 선현과 표충사의 조사님이 지어신 재악산(載嶽山)을 조
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천황산(天皇山)으로 개악(改惡)해 버렸습니다.
밀양시에서는 일제가 개악한 천황산(天皇山)을 원래의 고유한 산 이름인 재악산(載岳山)으로 복원(변경)하기 위해,
2015년도에 밀양시지명위원회를 개최하여, 천황산을 재악산으로 복원(변경)하는 것을 심의 가결하여,
밀양시장의 확인을 한 후에, 관련 법에 의거 경상남도지명위원회에 부의하여, 밀양시의 원안대로 심의.의결하여,
경상남도지사의 확인을 받아,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의 국가지명위원회에 심의.의결토록 보고한 결과,
국가지명위원회는 2015. 12. 4 동 위원회를 개최하여 심의한 결과
어이없게도" 재악산(載岳山)이 아니고, 천황산(天皇山)이 맞다" 라고 심의.의결하였습니다.
국가지명위원회의 이런 엉뚱한 심의 결과는
결론적으로 밀양 향토사, 불교사, 표충사 경내의 비문, 민족사, 고지도, 일본 지명 자료, 고문헌 등에 기록된
수많은 재악산(載岳山)의 역사적 근거와 증거를 부정하고, 짓밟는 반민족적 행위입니다
동 위원회가 인정한 천황산(天皇山)은 1980년 말에 울산의 향토사학자 이유수씨가 만든
"천황산일식명설고찰(天皇山日式名說考察)"이라는 논문인데,
그 논문에 기록된 천황산(천황산) 관련 주장은 아무런 역사적 근거도 없고, 역사적인 증거도 없는
이유수씨의 한 개인의 주장에 불과한 것입니다
재악산(載岳山) 산 이름의 증거는 1000여년 전부터 우리민족사와 향토사, 불교사 등에
한데 어우러져 수많은 역사적 근거와 수많은 역사적 증거에 의해 전해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황산(天皇山)이라는 명칭은
불과 20여년 전에, 울산의 향토사학자 이유수씨가 아무런 근거도, 증거도 없이 작성한
A4용지 10장 정도 분량의 글입니다
오뉴월 하루 볕이 무섭다는 옛 말도 있습니다
2015년 12월 4일 국가지명위원회의 11명의 위원은
1000여년도 넘게 전해오는 재악산(載岳山)의 수많은 역사적 근거와 수많은 역사적 증거를 인정하지 않고,
고작 20여년 전에 울산의 한 향토사학자 개인이 작성한 아무런 역사적 근거와 역사적 증거가 없는 천황산(天皇山)을,
그것도 일제가 내선일체 식민정치로 우리민족을 말살하기 위해 천황(天皇)을 지칭하는 천황산(天皇山)의 독소가 스며 있는 산 이름을
민족 정통의 산 이름이라고 인정한 국가지명위원회의 11명의 결정은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반 역사적인 결정이었습니다
이에 더하여, 천황산(天皇山)이 맞다고 인정한 한 국가지명위원과 울산측은
"재악산(載岳山)의 위치가 지금의 사자봉의(獅子峰) 위치가 아니다" 라고 엉뚱한 주장까지 했습니다.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온 세상이 다 아는데도 불구하고,
지명심의 때, 울산시와 울주군의 지명담당자와 국가지명위원회의 한 위원이
"재악산(載岳山)의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는 식의 주장은 너무나 어이가 없습니다.
아래에 올려진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문"과 "경자갑보월비" 등에는
재악산(載岳山)의 위치가 지금의 표충사를 품고 있는 "사자봉"이라고 명백하게 입증하고 있습니다.
밀양시와 경상남도는 이런 명백한 증거까지 국토지리정보원에 제출했고,
국토지리정보원은 지명심의 때 이런 증거를 국가지명위원들에게 제공했는데도 불구하고,
한 국가지명위원과 울산측은 "재악산(載岳山)의 위치가 지금의 사자봉의(獅子峰) 위치가 아니다"
라고 엉뚱한 주장까지 했습니다. 참으로 어이거 없고, 말문이 막힙니다
일제로부터 해방된지 100년이 다되어 가는 지금까지 일제가 개악한 천황산(天皇山)을 고수하는 것은
민족자존을 짓밟는 행위이고, 일제로부터 완전한 독립이 되지 않았다는 비참한 일입니다
천황산(天皇山)을 재악산(載岳山)으로 복원(변경)하는 일은 우리 민족의 자존을 더 높이는 일이고,
일제로부터 진정한 독립을 하는 일입니다. 우리모두 재악산(載岳山) 산 이름 복원에 동참합시다
어떤 사람들은 재악산(載岳山)으로 부르면 “죄악산”으로 들릴 수도 있다고들 합니다.
우리는 재악산(載岳山)을 억지로 좌측으로 기울어진 생각으로 보는 일을 멈추어야 합니다.
의도적으로 “죄악산”으로 부르는 것은 발음법칙에도 맞지 않는 잘못된 주장입니다.
“재악산(載岳山)”은 현대국어 문법상에도 “재악산(載岳山)”으로 불러야 합니다
산 명칭에 악(岳)이 들어가는 산은 크고, 높고, 깊고, 웅장하고, 기암괴석이 많고, 온갖 동식물이 서식하는 산입니다.
그리고 이런 악(岳)자가 들어가는 큰 산에는 약초가 다 많이 납니다.
약초가 많이 난다고 재약산(載藥山)이라 하는 것은 맞지 않습니다.
수많은 악(岳 = 거대한 산의 요소)의 요소가 들어있는 재악산(載岳山)을
고작 약초 몇 뿌리로 말미암아 재약산(載藥山)이라 하여, 산을 작고, 왜소하게 해서는 않됩니다.
산은 비단 약초뿐만 아니라, 산의 온갖 요소가 가미되어 있는 산입니다.
우리나라의 명산은 설악산(雪岳山), 관악산(冠岳山), 모악산(母岳山), 치악산(雉岳山), 황악산(黃岳山) 등이 있습니다.
이런 산들은 우리 국민이 가장 즐겨 찾는 명산입니다
일제(日帝)가 개악(改惡)한 천황산(天皇山)을
재악산(載嶽山)으로 산명을 복원(변경)하는 것은
민족 자존심 고취 및 일제(日帝)로부터 진정한 독립입니다
↓
■ 재악산(載岳山 = 載嶽山) 표지석
2015년도에 밀양시 및 밀양시지명위원회(위원장 : 밀양시장)와 경상남도 및
경상남도지명위원회(위원장 : 행정부지사)는
일제(日帝)가 개악(改惡)한 천황산(天皇山)을
재악산(載岳山)으로 변경(복원)하기로 심의, 의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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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의 "표충사 삼층석탑(表忠寺 三層石塔)"에서
"재악산영정사삼층석탑개수비문[載岳山靈井寺三層石塔改修碑文, 약칭 : 개수비문(改修碑文)]"이 출토되었습니다
■ 재악산(載岳山) 산명(山名)의 명명백백한 역사적인 증거
영정사(靈井寺 : 표충사의 옛 이름)에 주석하셨던
승려로서 『선종(禪宗) 계통의 최고 직위인 "대선사(大禪師) 계심(戒心)"』께서
『"이 절의 이름을 영정사(靈井寺)"라 하시고』
『"이 절의 배산(背山 : 뒷산)을 재악산(載岳山)"이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2015. 12. 4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의 국가지명위원이 지명 심의 때
밀양시는 경상남도를 거쳐서 위 증거 자료를 국토지리정보원에 제출을 하고
국토지리정보원은 이 자료를 국가지명위원에게 지명 심의를 할 때 제공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위원 등은 『"재악산(載岳山)이 어디에 있는 산(山)인지 모른다"식의 의견』을
진술했습니다
이 결과, 밀양시가 청원한
『천황산(天皇山)을 재악산(載岳山)으로』
『재약산(載藥山)은 수미봉(須彌峰)으로』
『지명(산명) 변경을 요청한 청원서』는 어이없게도 부결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우리 한민족의 지명 역사상, 또 우리 밀양 향토사에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매우 부끄러운 일로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에 "밀양광장"은
천황산(天皇山)을 본래의 산 이름인 재악산(載岳山)으로 변경(복원)하기 위해, 중단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재약산(載藥山) 또한 수미봉(須彌峰)으로 변경하기 위해, 중단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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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향토사학자 손흥수.도재국 선생이 경자갑보월비문의 글자를 20년 동안 확인하고 있다
20년 전에는 글자가 제법 보였는데,
지금은 비바람에 풍화가 계속되어 글자가 계속 마모되고 있다
표충사에서 비문의 자연적 훼손을 방지하기 위한 특별한 대책이 있어야만 겠다
참으로 안타깝다
■ 재악산(載岳山) 산명(山名)의 명명백백한 역사적인 증거
영정사(靈井寺 : 표충사의 옛 이름)에 주석하셨던
승려로서 『선종(禪宗) 계통의 최고 직위인 "대선사(大禪師) 계심(戒心)"』께서
『"이 절의 이름을 영정사(靈井寺)"라 하시고』
『"이 절의 배산(背山 : 뒷산)을 재악산(載岳山)"이라 하셨습니다』
따라서 2015. 12. 4 국토교통부 국토지리정보원의 국가지명위원이 지명 심의 때
밀양시는 경상남도를 거쳐서 위 증거 자료를 국토지리정보원에 제출을 하고
국토지리정보원은 이 자료를 국가지명위원에게 지명 심의를 할 때 제공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위원 등은 『"재악산(載岳山)이 어디에 있는 산(山)인지 모른다"식의 의견』을
진술했습니다
이 결과, 밀양시가 청원한
『천황산(天皇山)을 재악산(載岳山)으로』
『재약산(載藥山)은 수미봉(須彌峰)으로』
『지명(산명) 변경을 요청한 청원서』는 어이없게도 부결되어 버렸습니다
이는 우리 한민족의 지명 역사상, 또 우리 밀양 향토사에
도저히 이해할 수도 없고, 있을 수도 없는
매우 부끄러운 일로 길이 남게 되었습니다
이에 "밀양광장"은
천황산(天皇山)을 본래의 산 이름인 재악산(載岳山)으로 변경(복원)하기 위해, 중단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재약산(載藥山) 또한 수미봉(須彌峰)으로 변경하기 위해, 중단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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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악산(載岳山) 최고의 증거인 『인각사 보각국사 비첩:비문』
■ "인각사 보각국사 비문(사진)"은 밀양시 지명위원 겸 변호사인 박순문 선생이 제공하셨다
왕희지(王羲之) 필체를 집자(集子)
1295년 건립한 인각사 보각국사 비문:비첩(麟角寺 普覺國師 碑帖)에
『재악사(載岳社) 선염(禪燄)』이 새겨져 있다
고려시대에는 "사(社)"는 사찰로서의 "사(寺)"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었고
사찰의 명칭에 "사(寺)"보다 "사(社)"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 99. 재악산(載嶽山) 사자평(獅子坪)과 사자벌(沙者伐 또는 沙自伐) 설명
1. 울산측이 주장하는 "사자벌(沙者伐 또는 沙自伐)"은 맞지 않다
울산지명사(울산문화원 1986년 발행) 등에 의하면
“천황산(天皇山)에” 사자벌“이라는 벌(伐)이 있다.
○ 사자벌의
○ “사”는 평연(平衍)한 광원(廣原)을 뜻하는 옛말“사(沙)”를 말하며
○ “자”는 산의 옛말 “자(者․自)”에서 온 말일 것이니
○ 이는 “산들벌”이 되는 것이다. 로 기록하고 있다“
(주)도재국
즉, 사자평을 한문으로 沙者伐 또는 沙自伐이라 하고
그 뜻은 “평연(平衍)한 광원(廣原)”이라 하고 있다
2 사자평(獅子坪)
밀양지명고(1994년 밀양문화원 발행) 단장면편 구천리조(581P)에는
시전(枾田, 감밭)마을에 속한 사자평(獅子坪)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사자평(獅子坪)
○ 재약산(載藥山),동쪽 기슭에 펼쳐진 해발 800m의 지대이다.
※ 이 재약산(載藥山)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1961년 지명고시한 재악산(載嶽山) 제2봉인 수미봉을 가르킴
○ 오래 전부터 화전민(火田民)이 밭을 일구어 살아오면서
○ 고냉지(高冷地) 채소(菜蔬)와 약재(藥材)를 재배해 왔다.
○ 일제 때는 이 곳에 목장(牧場)이 설치되었고
○ 눈이 많이 내리는 산상(山上)스키장이 있었다.
○ 해방 후에는 20여호의 민가(民家)가 살아,
○ 고사리학교(學校)라는 산동 초등학교 분교(分校)가 개설(開設)되었다.
○ 수만 평의 평원(平原)의 억새밭이 유명하고,
○ 영남(嶺南) 알프스의 대표적인 코스이다.
○ 옛날 이 곳에 사자암(獅子庵)이라는 암자(庵子)가 있었으므로
○ 지명이 사자평이 되었다.
3. 사자평(獅子坪)에 대한 더 상세한 내용
4. 사자암지(獅子庵址)
1987년 밀양문화원에서 발행한 밀양지(密陽誌) 471P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사자암지(獅子庵址)
○ 載藥山 獅子坪 아래에 있었는데, 창건 년대는 미상이다.
※ 이 재약산(載藥山)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1961년 지명고시한 재악산(載嶽山) 제2봉인 수미봉을 가르킴
○ 東上庵, 西上庵과 함께 높은 산 절벽 위에 위치하여,
○ 휴량(休粮) 절립(絶粒)한 중들이 참선하기 위하여 이용하였으나,
○ 조선조 말기에 폐사되었다.
5. “사자평”에 대하여
○ 울산측에서 말하는 사자 즉, “沙者 또는 沙自”는 국어사전 등에 나오지 않는 말로 보인다
○ 『 “자”는 산의 옛말 “자(者․自)”에서 온 말일 것이니』 로 표현하여, 명확하지 않다
○ 옛말 사전 등에는 어떻게 기록하는 단어인지는 확인할 수가 없다
○ 그러나 밀양에서 말하는 사자(獅子)는
○ 사자평(獅子坪), 사자암지(獅子庵址) 등에서
○ 재약산 즉, 수미봉(須彌峰) 동쪽의 평원을 사자평(獅子坪)으로 부르며
※ 이 재약산(載藥山)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1961년 지명고시한 재악산(載嶽山) 제2봉인 수미봉을 가르킴
○ 사자봉(獅子峰) 바로 동쪽의 평원을 말하지 않는다
○ 현재 밀양시와 낙동강유역환경청,표충사 등은
○ 재약산 산들늪 고산습지(내륙습지)(습지보호지역)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이 재약산(載藥山)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1961년 지명고시한 재악산(載嶽山) 제2봉인 수미봉을 가르킴
○ 건축 년대가 확인되지 않는(아주 오래된) 고찰의 암자가 있다가
○ 조선 후기에 폐사된 기록을 보면
○ 이 지역을 사자평(獅子坪)이라 하는 것이 명확하게 증명이 되며
○ 밀양교육청 소속 산동초등학교의 옛 “사자평(獅子坪)고사리분교”의 명칭도 사자평(獅子坪)을 사용했다
○ 위 울산과 밀양의 주장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 울산측이 기록하는 “沙者坪 또는 沙自坪”은 근거가 희박하다
○ 그러나 밀양측이 기록하는 사자평(獅子坪)은 문헌적으로 명백하다
○ 따라서 재악산(載嶽山) 정상의 사자(獅子)의 형상을 따서 붙인 사자평(獅子坪)이 맞다
■ 사자봉(獅子峰)과 수미봉(須彌峰)과의 직선 거리는 약 1,700미터입니다
하나의 산군(山群)에, 이렇게 가까운 거리에
2개의 산명(山名)을 부여하는 것은 대단히 잘못된 일입니다
■ 재악산(載岳山) 정상에는 사자(獅子)의 모습을 한 암봉(岩峰)이 있어, 사자봉(獅子峰)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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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의 한 향토사학자가 주장한
평연(平衍)한 광원(曠原)이라는 뜻으로 사자벌(沙者伐 또는 沙自伐)이 아닌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 등에 기록된
사자(獅子) 형상의 사자봉(獅子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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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악산(載岳山) 연봉(連峰)과 사자봉(獅子峰)
재악산(載岳山)은 최고봉인 사자봉(獅子峰)을 중심으로 해서
우측으로 관음봉(觀音峰), 수미봉(須彌峰), 문수봉(文殊峰), 향로봉(香爐峰), 필봉(筆峰) 등이 연달아 있습니다
이러한 봉우리들은 오래 전에 표충사(載岳寺, 靈井寺)에서 조사님들이 붙인 이름들입니다
위와 관련하여
재악산(載岳山) 최고봉인 사자봉의 지명 유래가 사자(獅子)와 관련이 있습니다
따라서 울산에서 주장하는 평연한 광원이라는 사자벌 또는 사자벌은 맞지 않고
사자봉(獅子峰)에서 뻗어내린 산상(山上)의 고원(高原)이라는 뜻의 사자평(獅子坪)이 맞습니다
누구든지 지명을 함부로 왜곡시켜서는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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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악산(載嶽山) 최 정상의 사자 형상의 사자봉(獅子峰)
- 사자(獅子)는 불교에서도 자주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 넓은 산들늪지대를 사자봉의 사자의 형상에 유래한 사자평(獅子坪)이라는 지명 유래가
- 밀양문화원에서 발행한 밀양 지명의 대전(大典)인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 밀양사람들과 전국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밀양지명고에 기록된 지명 유래대로 알고, 부르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 그런데 작고한 울산의 한 향토사학자는
- "평연(平衍)한 광원(曠原)"이라는 뜻으로
- "사자벌(沙者伐 또는 沙自伐)" 로 부른다는 이상한 지명 유래를 주장했습니다만
- 이는 옛부터 자연 형상에 맞추어 지명을 짓는 우리 조상들의 지명의 작명 이치에 전혀 맞지 않습니다
- 지명은 역사적인 근거가 있어야 하고, 보편 타당해야 하며, 객관적이어야 합니다
- 울산의 한 향토사학자 처럼 보편 타당하지 않고,
- 극소수만이 인정하는 즉, 너무 주관적으로 작명한 지명은 맞지 않습니다
■ 불교와 사자의 관계
출처 : 네이버 지식 iN
흔히 사자를 백수의 왕이라고 말들 합니다. 이는 사자의 용맹함을 비유적으로 말하는 것이죠.
이와 마찬가지로 부처님을 인사자(人獅子)라고 하는데
이는 부처님의 진리가 세상의 모든 사견(邪見)을 몰아내기 때문입니다.
사견(邪見)
1 . 올바르지 못하고 요사스러운 생각이나 의견.
2 . <불교> 십악의 하나. 인과(因果)의 도리를 무시하는 그릇된 견해를 이른다. 칠견(七見)의 하나이자, 오견의 하나이기도 하다.
사견에 빠지다.
그리고 부처님의 설법을 사자후(獅子吼)라고 말합니다. 이 말 또한 같은 의미로
사자가 한번 울으면 짐승들이 몸을 사리는 것처럼
사견들도 몸을 사린다는 의미입니다.
이렇게 사자는 진리 혹은 부처님을 상징합니다.
불교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은 사자를 타고 다닙니다.
같은 의미이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석탑에 사자상을 놓는데
한 곳에 놓지 않고 사방에 4개를 놓습니다.
이는 부처님의 진리가 온 누리에 가득하다는 상징입니다.
출처 : 속성(영문 주소)를 연결해서 검색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6&dirId=60903&docId=62153281&qb=67aI6rWQ7JeQ7ISc7J2YIOyCrOy
ekA==&enc=utf8§ion=kin&rank=1&search_sort=0&spq=0&pid=SGmuawoRR0CsstrBSl4sssssssC-306757&si
d=YQm87BCym1SMPTwQlOZB9Q%3D%3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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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밀양에서는
밀양지(密陽誌) 및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에는
위와 같이 사자(獅子)의 형상을 한 암봉(岩峰)을 사자봉(獅子峰)이라 하였다
그래서 100만평에 이르는 산상(山上)의 평원을 사자평(獅子坪)이라 하였고,
그곳에 있었던 표충사의 부속 암자를 사자암(獅子庵)이라 기록하고 있다
또 1970년대 초까지 산동초등학교 사자평 고사리분교가 있었다
■ 울산에서는
울산지명사(울산문화원 1986년 발행) 등에
“천황산(天皇山)에 사자벌(沙自伐 또는 沙者伐)이 있다” 라고 설명하고 있다
사자벌의 “사”는 평연(平衍)한 광원(廣原)을 뜻하는 옛말“사(沙)”를 말하며
“자”는 산의 옛말 “자(者․自)”에서 온 말일 것이니, 이는 “산들벌”이 되는 것이다. 로 설명하고 있다
■ 우리나라의 산이나 봉우리의 이름은
자연적인 형상에 따라서 짓는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사자(獅子)의 형상을 한 재악산(載岳山) 최고봉이 사자봉(獅子峰)이다
“위와 같이 울산에서 주장하는 뜻으로 산 이름이나 봉우리의 이름을 짓는 사례”는
우리들은 들어본 적이 없다
그것은 객관적으로 증명이 되지도 않았고, 일반적으로도 인정이 되지도 않은
한 사람(이유수)의 개인적인 주장에 불과한 것이다
3. 재약산(載藥山)을 수미봉(須彌峯)으로 변경 운동
[역사적 근거없는 산 이름 없앰, 1 산군(山群) 1 산명(山名) 부여 원칙 준수]
재약산(載藥山)은 지금부터 170여년 전에,
밀양시 무안면에 있던 임진왜란 때 조선을 구한 사명대사를 비롯한 삼대사의 영정을
밀양시 단장면 표충사로 이건(移建)해 올 때,
『역사적 근거와 역사적 증거가 없는 "재약산영정사고적(載藥山靈井寺古跡)"』에 의해 붙여진 이름입니다
역사적 근거와 역사적 증거가 없는 지명(산 이름)인 재약산(載藥山)을 사용하는 것은
지명 역사를 왜곡하는 일이이므로, 이런 일을 해서는 안됩니다.
표충사를 둘러싸고 있는 재악산(載岳山) 산군(山群 : 산덩어리)에는
사자봉(獅子峰), 필봉(筆峰), 수미봉(須彌峰), 관음봉(觀音峰), 향로봉(香爐峰) 등의 아름다운 산봉우리들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하나의 산군(山群)에는 제일 높은 산봉우리에 산봉우리 명칭과 산 이름을 부여하고,
나머지는 전부 봉우리의 명칭을 붙입니다 즉, 아래의 산 표지석 사진과 같이 『재악산(載岳山) 사자봉(獅子峰)』입니다.
하나의 산군에, 그것도 직선거리 1700미터의 가까운 거리에,
역사적 근거와 역사적 증거도 없는 재약산(載藥山) 산 이름을 하나 더 붙여,
2개의 산 이름을 붙인 것은 아주 질못된 일이므로,
재약산(載藥山)은 없애고, 그 자리에 봉우리의 명칭인 수미봉(須彌峰)으로 해야 합니다
■ 수미봉은 載岳山群에 속한 봉우리이고, 獅子坪은 獅子峰에서 유래
①밀양지와 밀양지명고에는 사자봉(獅子峰)과 수미봉(須彌峰)의 동쪽 평원을
"사자평(獅子坪)"이라 한 것은 수미봉이 재악산(載岳山) 산군(山群)에 속하기 때문이다
②울산은 “재악산(載岳山 : 사자봉)과 수미봉(須彌峰)이 하나의 산군(山群)이 아니고,
별도의 산군(山群)이다” 우기면서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단어를 이용해서 “수미봉 동쪽 평원을 사자벌(沙者伐)
또는 사자벌(沙自伐)”이라 주장하는 것은
지명 작명의 보편 타당성의 원칙에도 맞지 않다.
요즘 평평한 땅을 사“자벌(沙者伐) 또는 사자벌(沙自伐)”이라 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본다
②사자봉과 수미봉이 속한 재악산(載岳山)은 2개의 산군(山群)이 아닌, 하나의 산군이다
그 이유는 밀양지(密陽誌)와 밀양지명고(密陽地名攷)에 수미봉(須彌峰)의 동쪽 평원을
사자평(獅子坪)이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수미봉(須彌峰) 동쪽의 평원(산들늪)은 사자봉(獅子峰)에서 뻗어 내려왔기에 사자평(獅子坪)이라 한다
다시 말하면 수미봉(須彌峰)은 재악산(載岳山) 산군(山群)에 속한 하나의 봉우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③울산의 향토사학자 한 향토사학자는 생전에 재악산(載岳山) 정상의 사자(獅子) 형상을 한 사자봉(獅子峰)을 부정하고,
재악산(載岳山)과 수미봉(須彌峰)을 하나의 산군으로 보지 않고, 별도의 산군으로 보아,
하나의 산군에 또하나의 산명인 재약산(載藥山)을 주장하여, 1
산군 1 산명 부여 원칙에 맞지않게 했다.
④울산의 주장대로 한다면, 하나의 산군에 여러 개의 산명을 부여하여 큰 혼란이 올 수 있다
즉, 載岳山群보다 큰 智異山群과 雪嶽山群 같은 곳은 무려 10개 이상의 산 이름을 부여해도 될 모순에 빠질 수도 있다.
그 이유를 다시 말하면 사자봉과 수미봉은 직선으로 불과 1.7킬로미터 거리이다.
그러나 지리산과 설악산 등은 동쪽 끝에서 서쪽 끝까지 무려 백여리나 되고, 수많은 기암괴석의 아름다운 봉우리들이 있다.
이러한 봉우리마다 산 이름을 다 부여할 수 있으까?
그건 아니올시다
⑤울산의 그 향토사학자는 사자평(獅子坪)을 엉뚱하게도 사자벌(沙者伐) 또는 사자벌(沙自伐)이라 주장했다.
이는 그 분과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수긍이 가능한 지명이다.
다시 말하지만, 지명은 보편 타당해야 한다
⑥위와 같이 울산이 맞다고 주장하는 재약산(載藥山)은 역사적 근거와 역사적 증거가 전혀 없고,
사자벌(沙自伐)과 사자벌(沙者伐)은 그 분의 개인적 주장에 불과하고,
극소수의 사람들조차도 수긍이 가능할른지 모르는 지명이다.
지명은 보통사람들이 수긍이 가능한 지명이어야 하고,
혼자 또는 극소수 사람들조차도 고개를 갸우뚱 거릴 정도의 이상한 지명은 인정할 수가 없다.
재악산(載岳山)과 사자봉(獅子峰), 수미봉(須彌峰)의 지명 유래가 명백하므로,
울산은 수미봉(須彌峰)을 더 이상 재약산(載藥山)이라 하면 않되고,
사자평(獅子坪)을 “사자벌(沙自伐)과 사자벌(沙者伐)”이라 주장해서도 않된다
■ 정부는 사자평(獅子坪)을 습지보호구역(산들늪)으로 지정
필자는 밀양시청에 근무할 때 사자평(獅子坪)을 환경부로부터 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을 받기 위해 환경부 등에 출장을 많이 갔고,
그 결과 고산습지보호구역으로 지정을 받았다
○ 현재 밀양시와 낙동강유역환경청,표충사 등은
○ 재약산 산들늪 고산습지(내륙습지)(습지보호지역)로 지정하여, 관리하고 있다
※ 이 재약산(載藥山)은 국토지리정보원에서 1961년 지명고시한 재악산(載嶽山) 제2봉인 수미봉을 가르킴
○ 건축 년대가 확인되지 않는(아주 오래된) 고찰의 암자가 있다가
○ 조선 후기에 폐사된 기록을 보면
○ 이 지역을 사자평(獅子坪)이라 하는 것이 명확하게 증명이 되며
○ 밀양교육청 소속 산동초등학교의 옛 “사자평(獅子坪)고사리분교”의 명칭도 사자평(獅子坪)을 사용했다
○ 위 울산과 밀양의 주장을 종합해서 살펴보면
○ 울산측이 기록하는 “沙者坪 또는 沙自坪”은 근거가 희박하다
○ 그러나 밀양측이 기록하는 사자평(獅子坪)은 문헌적으로 명백하다
○ 따라서 재악산(載嶽山) 정상의 사자(獅子)의 형상을 따서 붙인 사자평(獅子坪)이 맞다
↓
수미봉(須彌峰) 표지석
하늘에는 2개의 태양이 없듯이,
하나의 산군(山群 : 산덩어리)에는 하나의 산명(山名)을 부여하는 원칙에 따라
2015년도에 밀양시 및 밀양시지명위원회(위원장 : 밀양시장)와
경상남도 및 경상남도지명위원회(위원장 : 행정부지사)가
재약산(載藥山)을 수미봉(須彌峰)으로 변경하기로 심의, 의결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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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1270년 항몽(抗蒙) 독립운동 밀양사람들의 삼별초(三別抄) 지원 및 훈련장 “사포(沙浦) 병구지(兵區址)”
밀양시 부북면 전사포리 소재 『사포일반산업단지 입구 도로변의 “고인돌공원”』에는
산업단지가 들어서면서 사라진 신당마을, 넓은골마을, 남지거렁마을의
이주민의 망향을 달래기 위해 거대한 망향비가 서 있습니다.
이 망향비 의 앞면에는 망향비를 건립한 취지문이 있고,
그 취지문에는 ”병구지(兵區址)에 대한 유일한 역사 흔적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기록은 고려시대 진도의 삼별초군을 지원하면서 유일한 항몽자주독립을 외쳤던
밀양인들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만세에 전하기 위해
밀양의 향토사학자 도재국이 새겨 넣었습니다
병구지(兵區址)는 명칭 자체가 말을 해 주듯이
고려시대에 몽고군과 몽고군의 압잡이가 된 고려조정에 저항하면서
전라남도 진도(珍島)까지 몰리면서 성(城)을 쌓아 민족자존과 민족독립을 기치로 하여,
몽고군에 저항했던 삼별초군을 밀양인이 군사적으로 지원하기 위해
밀양인과 인근 군현(郡縣)의 수많은 장정(壯丁)들을 모아,
군사 훈련장으로 사용한 전적지(戰迹地)입니다.
우리는 “독립운동” 하면 일제 36년 동안의 독립운동만을 떠 올립니다.
그러나 일제식민지기간 밀양인의 독립운동의 기원은
고려시대 항몽자주독립운동이 기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우리 민족이, 우리 밀양인이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략에 저항하지 않았더라면,
몽고군의 침략에 민족자존의 독립의식이 없었다면, 조선(朝鮮)은 건국되지도 않았을 것이고,
부끄러운 대한제국 망국(亡國)의 역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또 우리 민족이, 우리 밀양인이 고려시대 몽고군의 침략에 저항하지 않았더라면,
몽고군의 침략에 민족자존의 독립의식이 없었다면, 몽고군의 말발굽에 짓밟힌 한반도는
몽고가 쇠퇴하고 더욱더 치욕적인 일제 강점기를 맞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고려시대 조정으로부터도 억압을 받으면서도 밀양인이 진도의 삼별초를 지원하기 위해 벌인
항몽자주독립운동은 고려땅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외세를 몰아내자는
가장 강력하고도 열렬한 무장(武裝)한 자주독립운동이었습니다
그 후 병구지(兵區址)는 아이러니하게도
몽고군에 편을 든 고려조정에 의해 반역집단으로 매도당한 밀양과
인근 군현의 항몽독립세력을 진압하기 위하여
인근 군현(郡縣)인 경주(慶州) 판관(判官) 엄수안과 금주(金州 : 金海)방어사 김훤등
관군의 밀양독립세력의 소탕 및 진압지가 되어 역사에 남게 되었고,
후세 밀양인 등은 병구지가 관군의 둔영지로서만 대부분 기억되게 만들어 버렸습니다
즉, 몽고군과 몽고군의 압잡이가 된 고려관군이 역적 집단(밀양인 등의 독립운동세력)을
처단한
역사의 유적으로 둔갑시켜 버렸고, 자랑스러운 밀양인의 독립운동의 역사는 묻어 버렸습니다
이에 우리 밀양인은 일제 36년간의 독립운동의 시원(始原)이 된
고려시대 항몽자주독립군인 삼별초군을 지원한 자랑스러운 독립운동을 잊지 말고,
병구지(兵區址)를 국가사적지로 지정시키도록 노력하고,
잃어버리고, 묻어버렸던 밀양인의 자랑스러운 역사를 발굴, 보존하는데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고려시대 밀양인의 항몽 삼별초군을 지원하다 도륙당한 수많은 밀양인의 원혼을 달래고,
그들을 역적이 아닌, 양민으로 복권시키는 일에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 후세 밀양인들은 이런 자랑스러운 민족적 항몽독립운동역사를 발굴하고, 기리면서,
일제 36년간의 독립운동을, 독립운동가를 같이 기려야 합니다.
좀 비약적인 비유가 될지도 모르겠으나, 높은 선대 묘사는 지내지 않고, 5대조 묘사만 지내면,
그건 조상 숭배에 맞지 않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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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구지[兵區址] (原文)
출처 : 密陽誌 487 ~ 488
兵區[병구]는 高麗[고려] 元宗[원종] 때
金州[금주 : 金海] 사람 防禦使[방어사] 金暄[김훤]이
당시 珍島[진도]의 삼별초[三別抄] 정부에 호응,
반란을 일어킨 郡人[군인] 趙阡[조천] 등을 토벌하기 위하여
兵營[병영]을 설치한 곳으로
고려시대 민중봉기와 관련된 사적지[史蹟地]이다
그러나 그 위치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
정확한 점을 확인하기가 곤란하다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는
[兵營在府南五里俗傳金暄討伐趙阡時屯營之地]
[병영재부남오리속전김훤토벌조천시둔영지지] :
“병영은 밀양도호부의 남쪽 5리에 있었는데,
김훤이 조천을 토벌할 때 군사가 주둔한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라 하였고,
密州舊誌[밀주구지]에는
名區在鈒浦東南[명구재삽포동남]이라 했으며
同誌[동지] 府南雲禮里條[부남운례리조]
[府南十里前有長淵東有大藪上有屛巖臺在兵區]
[부남십리전유장연동유대수상유병암대재병구]라 했다.
名區[명구]라는 것은 兵區[병구]의 誤記[오기]인 듯 하지만,
府南五里[부남오리]
鈒浦東南[삽포동남]
府南十里[부남십리]등으로
각각 그 表記[표기]와 距離[거리] 및 위치가 다르다
그러나 佔畢齋[점필재] 金宗直[김종직]은
직접 兵區[병구]라는 詩[시]를 남겨
그 유적의 위치를 암시하고 있다.
이 詩[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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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거[幽居]가 하도 답답하여,
南山[남산] 꼭대기에 올라, 한가로이 거닐며, 읍내를 내려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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幽居意悶默[유거의민묵] : 세상사 잊고 조용히 살다보니, 마음이 심란하여
策杖南山嶺[책장남산령] : 지팡이 집고 남산 고개마루에 올라
石角縱閒步[석각종한보] : 돌 틈을 따라 한가로이 거닐며
俯瞰邑人廛[부감읍인전] : 읍내 사람들과 저자거리를 내려다 본다
----------------------------------
라는 표현으로 서두를 읊고,
당시 金暄[김훤]이 趙阡[조천] 등의
반란군을 진압하는 광경을 상념[想念]한 것이다
그러므로 兵區[병구]는
南山[終南山] 이마에서
府中[부중]을 바라보는 방향의 산기슭 강변이라 할 수 있으니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와 부북면 전사포리 사이의 지점쯤으로
비정[比定]할 수 있겠다
더구나 그 詩[시]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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桓桓金防禦[환환김방어] : 굳세고도 굳센 김훤 방어사
杖鉞巡海堧[장월순해연] : 도끼를 휘두르는 수많은 병사 강가에 자욱하고
鐵馬從南來[철마종남래] : 철마를 좇아 남쪽에서 달려와
雷鼓聲震天[뇌고성진천] : 우레 같은 북 소리 천지를 진동하네
--------------------
이라는 구절도 있는 바,
이는 방어사 김훤이 씩씩한 군대와 철마를 이끌고
김해에서 진군해 왔다는 것을 시사[示唆]하는 것이니,
응천[凝川]을 사이에 두고
부중[府中]을 점령하고 있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가장 적당한 둔영지[屯營地]라는 상상이 가능하다
蒙古[몽고]의 침략으로
나라의 自主性[자주성]을 빼앗긴 고려 후기에
三別抄[삼별초] 군대에 합세하여 일어킨
密城郡人[밀성군인]들의 이와 같은 항전 사건은
결과적으로 密陽[밀양]이 叛逆鄕[반역향]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郡號[군호]마저 삭제당한 채
귀화부곡[歸化部曲]으로 강등되는 원인이 되었지만,
겨레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민족의 주체성을 높이고
밀양인[密陽人]의 올바른 기개를 선양한
역사 사건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高麗史[고려사] 世家[세가]
元宗[원종] 12년[1271년] 1월 丙戌條[병술조]에 실린
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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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 세가 원종 12년(1271년)』<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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密城郡人[밀성군인]인
方甫[방보]. 桂年[계년]. 朴平[박평]. 朴公[박공].
朴慶純[박경순]. 朴慶祺[박경기] 등이 고을 사람들을 규합하여
珍島[진도]에 주둔한 三別抄[삼별초] 정부에 호응할 것을 궐기하는 한편
開國兵馬使[개국병마사]라는 기치를 들고 군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곧 密城[밀성] 고을의 부사[副使] 이신[李頣]을 죽이고
인근 고을에도 격문을 보내어 지지 세력을 규합했으며,
일부는 청도군[淸道郡]에 진격하여 監務[감무] 林宗[임종]을 죽였다.
청도군민들은 그 세력 앞에 겁을 내어 거짓으로 항복하고
주모자들에게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고는 살해해 버렸다.
당시 密城[밀성] 사람 조천[趙阡]은
一善[일선 = 善山(선산)] 縣令[현령] 이었는데,
同鄕[동향]의 동지들과 함께 봉기하기로 이미 약속을 하였지만,
거사가 실패할 우려가 보이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드디어 按察使[안찰사]가 관군을 거느리고 갑자기 당도하였다.
趙阡[조천]은 막강한 관군과 대항하여 싸울 용기를 잃고
동지인 孫逸[손일]과 함께
도리어 首謀者[수모자]인 方甫[방보] 등을 죽이고 항복하니
반란군은 평정되었다.
■『 고려사 세가 원종 12년(1271년)』<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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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사건의 줄거리를 보면
兵區[병구]에 진을 친 金暄[김훤]은 싸우지도 않고
趙阡[조천]의 항복을 받았음은 물론 도리어 관군의 앞잡이로서
同鄕[동향]의 동지들을 소탕하는 세력에 가담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고로 趙阡[조천]은
忠烈王[충렬왕] 5년[1279]에 長史[장사]의 직임을 맡기도 하였지만,
전일 密城人[밀성인]의 민중봉기에 가담하였던 죄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趙阡[조천]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그 주모자는 100명이나 되었으며,
대개 고을의 토착세력으로서 官人層[관인층]이 많았는데
그들을 따르는 피지배 농민층의 무리는 수천 명을 헤아렸다
淸道人[청도인] 濯纓[탁영] 金馹孫[김일손 1464 ~ 1498]의
시문집인 濯纓集[탁영집] 가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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代人上巡察使書[대인상순찰사서]에는
其徒幾數千[기도기수천]
殺密城守而密城之民無復致討[살밀성수이밀성지민무복치토]
밀성의 태수가 밀성의 백성들에게 살해 당하여 ---
殺金州守而金州之人不敢出聲[살금주수이금주지인불감출성]
금주의 태수가 금주의 백성들에게 살해 당하여 ---
於是移檄晉州尙州等地[어시이격진주상주등지]
진주. 상주 등으로 격문을 보내고
東西響應共擧大事[동서향응공거대사]
동서로 호응하여 같이 대사를 진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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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당시 궐기한 밀성군인[密城郡人]들이
蒙古人[몽고인]을 축출, 살해하고
開京[개경] 정부에 반대하여
珍島[진도]의 三別抄[삼별초] 정부에 호응하자는 기치 아래
수천 명의 민병을 거느리고
密城[밀성]. 金海[김해]. 淸道[청도]의 수령을 차례로 살해한 다음,
晉州[진주]. 尙州[상주]등 고을에도 격문을 돌려
東西[동서]에서 호응을 얻은 큰 거사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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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高麗史[고려사] 金暄[김훤] 條[조]에도
密城人殺其宰以叛[밀성인살기재이반]
皆隨風而靡[개수풍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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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하여,
密城人[밀성인]의 격문이 각 군현에 통첩되자
모두 바람 따라 쓰러지는 것 같이
三別抄[삼별초] 정부에 호응하는 투쟁 의식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 나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兵區[병구]라는 이 유적은
당시 피지배 농민으로서 억압받던 密城人[밀성인]들이
愛民的[애민적]. 愛族的[애족적] 사상의 흐름과
반정부적. 반외세적인 저항 활동에 뿌리를 두고
일어킨 민중봉기의 역사 현장으로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趙阡[조천]이 살던 집은
지금의 밀양시[密陽市] 府北面[부북면] 大項里[대항리]에 있었는데,
후일 그는 민중들의 손에 맞아 죽었고,
집터는 못을 팠다는 일설이 있다
■ 병구지[兵區址] (原文).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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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글은 [■ 병구지[兵區址] (原文)]에 필자(도재국) 의견을 추가한 글입니다
추가한 글이 원문과 분간이 곤란하여 원문을 위와 같이 추가로 등재합니다
■ 밀양지(密陽誌)에 기록된 병구지(兵區址) 고찰
작성자 : 밀양시지명위원위원회 위원 도재국
[도재국 01 밀양지(密陽誌)의 병구지(兵區址) 원문의 특별한 단어는 모두 한자로 되어 있어,
한글세대 등 모든 분들이 쉽게 읽을 수 있도록, 한자 원문 다음에 괄호를 만들어 한글음을 기록을 합니다]
병구지는 필자의 고향마을로서 1960년대 말부터 3년간 밀양중학교를 다닐 때 지나다녔던 지역으로
그 당시 지형과 밀양지 487 ~ 488쪽의 내용을 살펴서, 설명을 붙여서 필자가 현지 답사로
다음과 같이 작성하며, 번호를 부여한 작은 글자는 밀양지의 원문을 설명하는 부가적인 글입니다.
경사진 글은 필자(도재국)이 추가 설명한 글입니다
兵區(병구)는 高麗(고려) 元宗(원종) 때 金州(금주 : 金海) 사람 防禦使(방어사) 金暄(김훤)이
당시 珍島(진도)의 삼별초(三別抄) 정부에 호응, 반란을 일어킨 郡人(군인) : [도재국 02 密城郡人]
趙阡(조천) 등을 토벌하기 위하여 兵營(병영)을 설치한 곳으로
고려시대 민중봉기와 관련된 사적지(史蹟地)이다
그러나 그 위치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어 정확한 점을 확인하기가 곤란하다
東國輿地勝覽(동국여지승람)에는 “兵營在府南五里俗傳金暄討伐趙阡時屯營之地
[도재국 03 병영재부남오리속전김훤토벌조천시둔영지지 : 병영은 밀양도호부의 남쪽 5리에 있었는데,
김훤이 조천을 토벌할 때 군사가 주둔한 곳으로 전해오고 있다)”]라 하였고,
密州舊誌(밀주구지)에는 “名區在鈒浦東南 [도재국 04 명구재삽포동남 : 名區는 삽포의 동남쪽에 있다
즉, ”名區“는 ”兵區“의 오기이며, 삽포는 지금의 사포(沙浦)이며, 밀양지 164쪽 교량조(橋梁條)의
병구교(兵區橋 : 사포마을 기준하여 가는 방향에 위치하는 병구교)로 보아,
동암마을에 속한 들빼기들의 새마을 및 주변 강변쪽 들판이 확실하며,
밀양지 487쪽 병구조(兵區條)조의 점필재 김종직 글의
”병구는 남산 이마에서 부중을 바라보는 방향의 산기슭 강변이라 할 수 있으니 ~“ 등을 볼 때,
병구의 정확한 위치는 동암마을에 속한 들빼기들의 새마을과 그 주변 강변들판임이 확실하다] 보이며,
삽포의 동남쪽이라 함은 지금의 동암마을 및 강변들판이다]이라 했으며
[도재국 05 까치저수지로부터 밀양강에 이르는 몽리구역 전부를 들빼기들판(일명 ”들밭들“로서
”들판(논.밭)에 물을 대면 땅속으로 바로 흘러 빠져버린다는 뜻으로 “들어얹힌 들판”을 줄여서
“들빼기들판” 또는 “들밭들”이라 했으며,
이 들판은 원래의 사포공단지역과 동암새마을, 사포일반산업단지 남쪽 안산변 일부에 해당함]
同誌 [도재국 06 同誌 = 密州舊誌)] 府南雲禮里條(부남운례리조)에는
“府南十里前有長淵東有大藪上有屛巖臺在兵區 [도재국 07 부남십리전유장연동유대수상유병암대대재병구 :
밀양도호부의 남쪽 십리 앞 지점에 기다란 연못이 있고, 그 연못의 동쪽에 크다란 대밭(大藪 :
대숲)이 있는데, 그 대밭의 위쪽에 병암대가 있고, 그 병암대에 병구가 있다 :
府南十里前有長淵東有大藪에서 이 문장의 설명의 시작 지점은 지금의 예림리 양림간마을 (정도)로 보이며,
양림간마을의 동쪽 밀양강변(지금의 고속도로교량 주변 및 상류쪽)은 그 당시 대밭으로 되어있었을 가능성이 있고
(지금도 예림교에서 남쪽으로 마을 주변 강변쪽인 제방.도로와 마을 사이에는 대밭이 있음),
”上有屛巖臺在兵區“ 그 대밭의 상류(북쪽)에 병암대가 있었으며,
그 병암대(병풍같이 기다란 암벽 즉, 구 예림교 바로 상류에서 마암마을 상류의 사포 실내골프장 입구까지의 암벽 : 마암마을에서
사포 동암새마을로 가는 도로변의 강변은 지금은 4차선이 되어 있지만,
1960년대 말에 필자가 사포 신당마을에서 들빼기들판과 마암마을을 지나 밀양중학교까지 다닐 때만 하더라도
강변은 병암(屛巖 : 병풍처럼 암벽이 길게 되어 있는 바위절벽형 산록) 형태로 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밀양강에 제방을 축조하면서 지형이 많이 변하였음)에 병구가 있었다”에서,
실내골프장 입구 강변(현재 고물상 주변)에서부터 동암새마을까지가 들빼기들판의 시작점이 되는데,
여기서부터 구 예림교 입구까지가 병구지이다 라는 뜻으로 보아야 하며, 밀주구지에서 이 지역을
병구지 위치 설명의 시작 위치에 삽입한 것은, 김훤이 이끄는 금주방어사군이 김해에서
밀양강을 따라 밀성으로 진격해 온 진격로를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임”라 했다]
名區(명구)라는 것은 병“兵區(병구)의 誤記(오기)인 듯 하지만 “府南五里(부남오리)”
”鈒浦東南(삽포동남)“ ”府南十里(부남십리)“등으로 각각 그 表記(표기)와 距離(거리) 및 위치가 다르다
그러나 佔畢齋(점필재) 金宗直(김종직)은 직접 兵區(병구)라는 詩(시)를 남겨
그 유적의 위치를 암시하고 있다. 이 詩(시)는 “유거(幽居) : [도재국 08 幽居 : 속세를 떠나
그윽하고 외딴 곳에 삶 또는 그 집 : 출처 : 동아출판사 동아새국어사전)]가 하도 답답하여,
南山(남산) : [도재국 09 : 종남산] 꼭대기에 올라, 한가로이 거닐며, 읍내를 내려다 본다
[幽居意悶默(유거의민묵 : 유거가(삶이) 하도 답답하여), 策杖南山嶺(책장남산령 :
(지팡이를 짚고서) 남산 꼭대기(고개)에 올라 : [도재국 10 필자는 종남산 신당마을이 고향으로
주변 지형을 잘 알기에 꼭대기보다는 ”종남산의 고개에 올라“로 번역함이 옳을 것 같음
즉, 종남산 동록 어디에서나 들빼기들판과 밀양강변은 잘 보임],
石角縱閒步(삭각종한보 : 한가로이 거닐며), 俯瞰邑人廛(부감읍인전 : 읍내를 내려다 본다)]는
표현으로 서두를 읊고 당시 金暄(김훤)이 趙阡(조천) 등의 반란군을 진압하는 광경을 상념(想念)한 것이다
그러므로 兵區(병구)는 南山(終南山) 이마에서
府中[부중 도재국 11 사전에서는 “府中”을 “도호부의 안”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여기에서는 밀양 성중(城中 : 성안 : 城內)으로 번역을 해야 함]을 바라보는 방향의 산기슭 강변이라 할 수 있으니
지금의 상남면 예림리와 부북면 전사포리 사이의 지점쯤으로 비정(比定)할 수 있겠다
[도재국 12 여기에서 “상남면 예림리”는 종남산 동록(꼭대기가 아닌, 동록의 낮은 어느 고개,
점필재 김종직이 지팡이 집고서 종남산 고개를 한가로이 거닌다는 것은 종남산 꼭대기에서
한가로이 거니는 것이 아닌,
종남산의 낮은 어느 고개에서 한가로이 거닐었다로 보아야 하며),
낮은 고개에서 府中을 바라보면, “상남면 예림리”는 보이지 않으므로
밀양지에 기록된 “상남면 예림리”의 기록은 제외해야 하며, 여기에 기록된 “부북면 전사포리의
위치”를 현재 상태에서 더 상세하게 표현하면
즉, “병구의 상세한 위치는 들빼기들판의 동암새마을과 그 마을의 밀양강변 들판”으로 보아야 하며,
밀주구지의 기록에 따라 밀양지에서는 점필재 김종직은 정객 및 고위 관료로서 고려와 조선 조정의 기록에 따라
“반란군”으로 보았지만(밀주구지는 몽고군에 예속된 고려조정의 기록에 따라 반란군으로 기록),
밀양 향토사를 새롭게 정립하는 차원에서 필자는 “항몽 삼별초군을 지원하는 밀성군의
항몽독립운동군”으로 기록(정립)을 하고,
“상남면 예림리와 부북면 전사포리 사이의 지점쯤으로 比定(비정)할 수 있겠다”
를 “부북면 전사포리 들빼기들판 및 신당마들판(현재의 사포일반산업단지 지역)을 항몽 독립군과
그 진압군(금주방어사 김훤과 경주판관 엄수안이 이끄는 진압군)의 규모가 클 때는
”훈련장 또는 둔영으로서의 병구지 규모“가 전사포리 신당들판(현재 사포일반산업단지 편입)까지 확대되었을 것으로 확실해 보임 :
필자는 일반산업단지 입구 도로변에 망향비를 건립할 때 건립사업을 주도하면서
병구지의 위치를 이 망향비에 새겨놓았음)이다”로 확정시키는 문장으로 변경한다]
더구나 그 詩(시)에는 桓桓金防禦(환환김방어), 杖鉞巡海연(土우변에而아래에大,빈터 연)(장월순해연),
鐵馬從南來(철마종남래), 雷鼓聲震天(뇌고성진천)“이라는 구절도 있는 바,
이는 방어사 김훤이 씩씩한 군대와 철마를 이끌고 김해에서 진군해 왔다는 것을 시사(示唆)하는 것이니
응천(凝川)을 사이에 두고 [도재국 13 들빼기들판에 있는 동암새마을과
삼문동(지리적으로 부중과 바로 연결되는 지역으로 관군은 병구에 주둔하고,
항몽독립군은 성내를 접수한 상태였고,
삼문동은 완충지역으로 되어 있을 가능성이 매우 큼) 사이에 응천이 흐르고 있으므로,
병구의 위치가 동암새마을과 밀양강변, 들빼기들판, 신당들판이 더욱 명확해짐]
부중(府中)을 점령하고 있던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서는 가장 적당한 둔영지(屯營地)라는 상상이 가능하다
蒙古(몽고)의 침략으로 나라의 自主性(자주성)을 빼앗긴 고려 후기에 삼별초(삼별초) 군대에 합세하여 일어킨
密城郡人(밀성군인)들의 이와 같은 항전사건은 결과적으로 密陽(밀양)이 叛逆鄕(반역향)이라는 불명예를 안고
郡號(군호 : 郡의 명칭)마저 삭제당한 채
귀화부곡(歸化部曲 [도재국 14 歸化部曲 : 군(郡) 또는 도호부(都護府) 등의 행정명칭이
천민집단이 사는 천민의 마을을 뜻하는 “부곡(部曲)으로 강등되었다 라는 뜻임
즉, 밀성군(密城郡)이 밀성부곡(密城部曲)으로 강등되었다는 뜻임]으로 강등되는 원인이 되었지만,
겨레 역사의 관점에서 볼 때에는 민족의 주체성을 높이고
밀양인(密陽人)의 올바른 기개를 선양한 역사 사건으로 평가할 수도 있다
高麗史(고려사) 世家(세가) 元宗(원종) 12년(1271년) 1월 丙戌條(병술조)에 실린 이 사건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 고려사 세가 원종 12년(1271년) : 시작』
密城郡人(밀성군인)인 方甫(방보). 桂年(계년). 朴平(박평). 朴公(박공). 朴慶純(박경순). 朴慶祺(박경기) 등이
고을 사람들을 규합하여 珍島(진도)에 주둔한 三別抄(삼별초) 정부에 호응할 것을 궐기하는 한편
開國兵馬使(개국병마사) 라는 기치를 들고 군대를 조직하였다.
이들은 곧 密城(밀성) [도재국 15 “밀성”은 고려시대 밀양의 행정명칭] 고을의 부사(副使)
[도재국 16 副使 : 정사(政事)를 수행하면서 보좌하는 사신(使臣)] 이신(李頣)을 죽이고
인근 고을에도 격문을 보내어 지지세력을 규합했으며,
일부는 청도군(淸道郡)에 진격하여 監務(감무) [도재국 17 監務 : 고려말부터 조선 초까지 작은 현(縣)의 원을 일컫던 말] 林宗(임종)을 죽였다.
청도군민들은 그 세력 앞에 겁을 내어 거짓으로 항복하고 주모자들에게 술을 권하여 취하게 하고는 살해해 버렸다.
당시 密城(밀성) 사람 조천(趙阡)은 一善[일선 = 善山(선산)] 縣令(현령) [도재국 18 縣令 : 왕조 때 큰 현의 원] 이었는데,
同鄕(동향) [도재국 19 : 同鄕(人)은 密城이 고향인 사람]의 동지들과 함께 봉기하기로 이미 약속을 하였지만,
거사가 실패할 우려가 보이자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드디어 按察使(안찰사) [도재국 20 按察使 : 안렴사(按廉使)와 같은 말로서 고려 때의 지방장관] 관군을 거느리고 갑자기 당도하였다.
趙阡(조천)은 막강한 관군과 대항하여 싸을 용기를 잃고 동지인 孫逸(손일)과 함께
도리어 首謀者(수모자) [도재국 21 首謀者 : 앞장서서 일을 꾀한 이]인 方甫(방보) 등을 죽이고
항복하니 반란군은 평정되었다.
『 고려사 세가 원종 12년(1271년) : 끝』
이러한 사건의 줄거리를 보면
兵區(병구)에 진을 친 金暄(김훤)은 싸우지도 않고 趙阡(조천)의 항복을 받았음은 물론
도리어 관군의 앞잡이로서 同鄕(동향) [도재국 22 同鄕 : 같은 고향, 19번과 동일한 密城人] 의
동지들을 소탕하는 세력에 가담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연고로 趙阡(조천)은 忠烈王(충열왕) 5년(1279)에 長史(장사)
[도재국 23 長史 : ①고려 때의 관직으로, 동궁관(東宮官)으로서 품계는 종7품, 정원은 1명. ②고려 때의 관직으로 육위(육위)에 속해 있었다.
품계는 종6품, 각 위(위)마다 1명씩 있었는데, 공민왕 이후 폐지] 의 직임을 맡기도 하였지만,
전일 [도재국 24 전일 : (前의 事)] 의 密城人(밀성인)의 민중봉기에 가담하였던 죄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고 말았다
그러나 이러한 조천(조천)의 배반에도 불구하고 그 주모자는 100명이나 되었으며,
대개 고을의 토착세력으로서 관인층(관인층)이 많앗는데
그들을 따르는 피지배 농민층의 무리는 수천 명을 헤아렸다
[도재국 25 주모자 수천 명, 그들을 따르는 무리가 수천 명이므로,
이들이 모두 병구지에 모여 군사 훈련을 받았으므로,
진도 삼별초정부를 지원하는 밀성 및 청도 등 인근고을 장정까지 수천 명이 동원된 것으로 보아
“병구지의 규모는 들빼기들판과 신당들판이 전부 훈련장 및 병영으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淸道人(청도인) 濯纓(탁영) 金馹孫(김일손 1464 ~ 1498)의 시문집인 濯纓集(탁영집) 가운데 代人上巡察使書(대인상순찰사서)
[도재국 26 : 代人上巡察使書 : 대리인이 순찰사에게 올린 보고서에는]에는
其徒幾數千(기도기수천) [도재국 27 其徒幾數千 : 그 무리가 수천명이나 되며,
이 문장을 보면 수천명의 백성이 거병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밀성고을 백성들뿐만 아니라,
아래의 문장을 보면 청도고을 백성들도 거병을 한 것으로 보이며,
진도로 가기 위해 먼저 밀성과 청도 백성들이 밀성의 병구지에서 결집하여 훈련을 받은 것으로 추정되고,
수천명의 장정의 훈련에 필요한 둔영지가 들빼기들만으로는 협소하여 신당들까지 둔영지로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殺密城守而密城之民無復致討(살밀성수이밀성지민무복치토)
[도재국 28 [殺密城守而密城之民無復致討 밀성인에 의해 밀성 수령을 살해당하고],
殺金州守而金州之人不敢出聲(살금주수이금주지인불감출성)
[도재국 29 殺金州守而金州之人不敢出聲 금주인에 의해 금주 수령이 살해당하고?],
於是移檄晉州尙州等地(어시이격진주상주등지)[도재국 30 於是移檄晉州尙州等地 진주,상주 등지에 격문을 보내고],
東西響應共擧大事(동서향응공거대사) [도재국 31 東西響應共擧大事 동서에서 거병, 호응한 대사] 라는 기록이 있다
이는 당시 궐기한 밀성군인(密城郡人)들이 蒙古人(몽고인)을 축출, 살해하고
開京(개경) 정부에 반대하여 珍島(진도)의 三別抄(삼별초) 정부에 호응하자는 기치 아래
수천 명의 민병을 거느리고 密城(밀성). 金海(김해). 淸道(청도)의 수령을 차례로 살해한 다음,
晉州(진주). 尙州(상주) 등 고을에도 격문을 돌려 동서에서 호응을 얻은 큰 거사였다는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도재국 32 병구지의 범위와 규모 추정 : 밀성에서 차례로 김해. 청도의 수령을 살해하고,
밀성에서 진주. 상주 등에 격문을 보냈다는 기록을 볼 때,
진도의 삼별초 정부에 호응하기 위한 모든 군사적 조치가 밀양에서 최초로 시도되었다는 것을 볼 때,
진도로 보내기 위한 밀성.청도.김해.진주.상주 등의 대부분의 군사(수천 명)가 밀성의 병구에 집결되었을 것으로 볼 때,
병구지의 범위가 들빼기들판을 비롯한 신당들판까지 해당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또 高麗史(고려사) 金暄(김훤) 條(조)에도 密城人殺其宰以叛(밀성인살기재이반)
[도재국 33 密城人殺其宰以叛 밀성인들은 관청의 벼슬아치들을 살해하고 반역을 일어켜]
移牒郡縣(이첩군현) [도재국 34 移牒郡縣 각 군현에 반역할 것을 이첩하자] 皆隨風而靡(개수풍이미)
[도재국 35 皆隨風而靡 모두 바람에 따라 흩어지는] 라 하여,
密城人(밀성인)의 격문이 각 군현에 통첩되자 모두 바람 따라 쓰러지는 것 같이
三別抄(삼별초) 정부에 호응하는 투쟁의식이 요원의 불길처럼 번져나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兵區(병구)라는 이 유적은
당시 피지배 농민으로서 억압받던 密城人(밀성인)들이 愛民的(애민적). 愛族的(애족적) 사상의 흐름과
반정부적. 반외세적인 저항 활동에 뿌리를 두고 일어킨 민중봉기의 역사 현장으로서 인식되어야 할 것이다
趙阡(조천)이 살던 집은 지금의 밀양시(密陽市) 府北面(부북면) 大項里(대항리)에 있었는데,
후일 그는 민중들의 손에 맞아 죽었고, 집터는 못을 팠다는 일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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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종남산(終南山) 봉수대(烽燧臺)의 원래 위치(역사 유적지 올바른 복원 강조)
■ 해발고도를 기준으로 본 "종남산 봉수대" 원래 위치
■ 사진으로 본 "종남산 봉수대" 원래 위치
■ "종남산 봉수대" 원래 위치(현장) 조사도면(조사자 : 도재국)
■ "종남산 봉수대" 원래 위치(현장)의 봉수군 초소의 축대
■ 종남산 6부능선에 있는 고려시대 이후로 밀양을 지켜온
밀양 최고의 역사 유적지 "종남산 봉수대"의 앞면 축대
- 봉수대는 봉화대(굴뚝)와 봉수군 초소 겸 숙소가 항상 같이 있습니다
- 동아대학교 박물관 역사유적 조사.발굴팀이 이 명명백백한 봉수대 유적지를 "봉수대 유적지"라 아니하고("돌무지"라 하고)
- 봉수대의 흔적이 전혀 없는 종남산 정상에 엉터리 조사를 하여, 봉수대 흔적이 있다고 서류를 조작하여
- 정상에 엉터리 봉수대를 만들도록 했습니다
다시 설명을 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종남산 봉수대" 유적 발굴 조사팀은
봉수대 터를 조사하면서
"봉수대 학술 용역조사 결과 보고서"에 이 축대 시설을,
"산 위에서 굴러 내려온 돌무지 시설"이라고 기록하고,
"봉수대 초소(숙소 겸용)의 터가 아니다" 라고 결론을 짓고
엉뚱하게도,
"종남산 정상"에 가서 조사를 하여, 그곳이 "봉수대 터다" 라고 결론을 짓고
밀양시는 이 결과를 경남도와 문화재청에 보고를 한 후에
문화재청의 승인을 받아
경상남도는 종남산 정상을 "종남산 봉수대 터"라고 결론 지어
"종남산 정상"을 "밀양 남산(종남산) 봉수대 터"로 결정하여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했습니다
밀양시(문화관광과)는 이를 근거로 하여
종남산 정상에 "종남산 봉수대"를 복원하였습니다
● 동아대학교 교수들로 구성된
"동아대학교 박물관의 밀양 남산(종남산) 봉수대 유적지 발굴 조사팀"
● 경상남도
● 밀양시(문화관광과)
● 문화재청
위 4개 기관의
"밀양 남산(종남산) 봉수대"의 "유적 조사와 봉수대 복원"에 대해서
관련 기관은 재 조사를 해 줄 것과
그 결과에 따라,
역사의 진실대로 봉수대와 초소(숙소 겸용)를 다시 복원을 해 줄 것을
진실된 역사 유적 보존을 원하는 우리들은 강력하게 요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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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산(종남산)봉수대" 건설 당시의
"봉수대 유허(유적지)의 위치"에 대한
당시 향토사학자들의 귀중한 의견이 신문에 보도되어
다음과 같이 올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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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신문
뉴스홈 >기사보기
■ 密陽의 역사가 흔들린다. 남산봉수대 ``역사적 검증 미흡하다``
[2005-01-14]
출처
http://407.newsk.com/bbs/bbs.asp?exe=view&group_name=407§ion=6&category=0&idx_num=1740&page=60&search_category=&search_word=&order_c=bd_idx_num&order_da=desc
밀양시가 2001년 사업비 3억원을 투입해
추화산 제2봉에 복원한 추화산봉수대에 이어
상남면 종남산 제1봉에 남산봉수대 복원 공사를 위하여
문화재청으로부터 사업비를 확보하고 착공 단계에 들어갔다.
복원사업비는 2억6천만원으로 밝혀져 있다.
이 복원사업에 대하여
밀양 향토사학가들의 역사적 사실에 대한 검증이 미흡하다는 우려와
제2봉설의 목소리가 힘을 얻어가고 있다.
◈봉수대(烽燧臺)는?
봉수는 국경 변방의 긴급한 상황을 조정 또는 변경의 기지에 알리는
군사상의 목적으로 설치된 통신수단이다.
산정과 산정을 잇는 봉수대는
밤에는 횃불로서, 낮에는 연기로서 신호하여 의사를 전달하였다.
우리나라에서 봉수의 기원은
가락국의 수로왕이 허황후를 맞이할 때 ‘봉화로 신호했다’는
『삼국사기 가락국기』의 기록을 근거로 하고
국법으로 봉수제도가 확립된 시기는 고려 의종3년(AD1149)이다.
봉수의 중요 연락 노선은
함경도의 경흥, 경상도의 동래, 평안도의 강계와 의주, 전라도의 순천 다섯 군데를 기점으로 하여
모두 서울의 남산(목멱산)을 종점으로 연결하였는데
이 다섯 군데를 직봉이라 하였고 보조노선을 간봉이라 하였는데
두 노선이 교차되는 것을 합봉이라 하였다.
봉수의 신호체계를 보면
평상일에는 연기를 1번 올리고,
적이 나타나면 2번,
적이 국경 가까이 접근했을 때는 3번,
국경을 침범하였을 때는 4번,
교전이 붙으면 5번을 올렸다.
그러나 구름이 많거나 바람이 심하게 불면 봉수신호가 불가능하므로
봉군이 차례로 달리거나 역참의 말을 이용하여 위급함을 알렸다.
◈밀양의 봉수대는?
밀양에는 백산봉수(임란이후 설치), 남산봉수, 추화산봉수, 분항산봉수가 있었는데
고종31년(AD1894)에 봉수제도가 완전히 폐지될 때까지 이용되었다.
밀양의 봉수는
가덕도 연대산봉수대에서 칩입하는 왜적들의 동태를 파악하여
⇒ 녹산 봉화산(일명 성화례산)
⇒ 김해 분산
⇒ 자암산
⇒ 밀양 백산
⇒ 종남산
⇒ 추화산
⇒ 분항산
⇒ 경북 청도의 남산으로 전보하는 제8번 간봉선에 해당된다.
◈市가 종남산 제1봉에 남산봉수대를 복원하려는 이유는?
市는 종남산의 제1봉에 군사용 헬기장 공사가 이루어지면서 그 흔적이 없어진 상태이고,
1봉의 헬기장이 2봉으로 옮기면서 2봉 역시 흔적이 없어졌으며
봉수대 위치에 대한 여러 가지 設로 애매한 상황이라
1997년 동아대학교 박물관에 시굴 및 학술조사를 의뢰하였다.
97년 10월 30일부터 98년 1월 28일까지 약3개월에 걸친 발굴조사를 토태로
조사단은 ‘복원자료수집기초조사보고서’를 작성하였고
市는 이 보고서를 토대로
2000년 8월 31일 지방기념물 227호로 지정받고 복원작업에 착수하게 되었다.
◈조사보고서 내용은?
제1봉은 군헬기장으로 조성되었던 지역이고
제2봉은 현재 군용헬기장으로 사용되고 있는 지역이어서
지표상에는 헬기장의 표식만 있을 뿐 봉수대 흔적은 확인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두 지역 모두
봉수대가 입지하기에 아주 양호한 지형적인 조건을 갖추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제1봉은 석재와 기와편 토기편들이 매우 풍부하게 지표면에 노출되어 있었고
제2봉에는 이러한 흔적들이 전혀 나타나지 않아
제1봉에 봉수대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번 조사에서도
봉수대의 상부구조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확보하지 못하였지만
출토유물이나 지형적인 특징을 참고로 하여
이와 관련이 깊은 추화산봉수대를 통하여 그 구조를 추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아마도 정상부에는 화구시설 등이 있었을 것은 명확시 되며,
정상부임에도 많은 석재들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주변으로는 별로 높지는 않을 지라도 석축담장이 둘러싸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과거 종남산의 상부시설은 군용헬기장 건설로 인하여 완전히 파괴되었기 때문에
그 위치조차 제대로 파악하기 어려웠다.
또 그에 대한 여러 이견(異見)이 있었으나
이번 조사를 통하여 종남산 제1봉 정상부에 봉수대가 위치하고 있었음이 명확시 되었다.
◈향토사학가의 제2봉 주장은?
1. 검증이 미흡하다.
제2봉은 현재 군헬기장으로 사용되고 있기 때문에 발굴조사 조차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헬기장 건설과 그동안의 이용으로 표면이 정리된 상태에서 지표면에 흔적이 없는 것은 당연하며,
헬기장이 파기된 제1봉의 지표면 흔적만으로 추정과 발굴 작업이 이루어져
추화산과 유사한점을 들어 명확시 하다고 판단을 내린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만약 제2봉에 대한 발굴작업도 함께 이루어졌다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판단이다.
2. 봉수대의 역사적인 운영체계에 따르면 제2봉이 더 신뢰성을 준다.
봉수대에는 여러 명의 봉졸이 있었고,
기상으로 인하여 봉수로 통신이 불가능할 때는 차례로 달리거나 말을 이용하여 위급을 알렸다는 점에서
봉수대는 봉졸이 거주하는 마을과 가까운 곳과
낮은 곳에서부터 통신수단이 적합한 곳을 우선적으로 선정하여 운영하였을 것이라는 게 일반적이다.
제1봉과 제2봉은 모두 봉수대가 위치하기에 적합한 지형적 조건을 갖춘 곳이고
제2봉의 가까운 아래쪽에 봉졸들이 기거했던 마을 흔적이 있는 것을 보아
제2봉에 봉수대가 있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게 한다.
봉졸들이 살았던 마을터는 제1봉과 제2봉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고
1봉에서 2봉을 넘어 선 곳에 위치하고 있다.
3. 밀양의 역사가 기록된 ‘밀주지’에 제2봉에 봉수대가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밀주지(密州誌)란? 밀양은 삼한시대 ‘미리미동국’이란 부족국가로 시작하여
신라에 병합되어 ‘밀성군’으로 되었고
고려시대에 ‘밀주군’이 되어 여러 번 변경되었다가
조선시대에 들어 밀양군으로 되었다.
밀주지는
조선시대 숙종 때 우리 지방의 역사를 정리하였고 구한말 재정리 되었으며
현재 참고하고 있는 밀양역사 서적으로는 유일하다고 할 수 있다.
▷ 밀주지 기록 내용은 ?
원문 :
卽府之案山山頭有池 (추之以石)
峯北有祈雨井 (祭山靈)
東麓有烽燧 (南應金海子巖北應推火)
해설 :
(밀양)부의 맞은편에 있는 산으로 산마루에 못이 있는데 (돌로써 우물의 벽을 쌓았다)
산봉우리의 북쪽에는 기우제를 지내는 샘이 있어 (산신령께 제사를 지냈다)
동쪽 기슭(제2봉을 말함)에는 봉수대가 있는데 (남쪽으로는 김해의 자암산에 응하고 북쪽으로는 추화산에 응하였다)
이렇게 밀주지가 제2봉에 봉수대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으며,
최근 문화원에서 발간한 ‘지명고’에도
제2봉에 봉수대가 있었음을 기록하고 있고,
국내 거의 대부분 정보사이트 검색을 통하여 보아도 제2봉으로 기록되어 전하고 있다.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市는 용역비를 투입하면서까지 전문발굴단을 통하여 조사가 이루어졌고
이미 지방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문화재청의 승인을 득하여 복원에 대한 공사 발주 및 착수 단계에 돌입한 상태인 만큼
증거가 불충분한 제2봉 주장을 인정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향토사학가들은
우물의 돌벽과 기우제 단 등이 있었던 제1봉에 대하여
지표면에 노출된 흔적만으로 이루어진 발굴조사에 충실하기보다
제2봉이 군사용 헬기장이라 발굴절차 과정이 어렵고 시간이 걸린다 할지라도
정확한 발굴조사와 역사적 고증을 거쳐야 한다는 주장이다.
많은 사업비가 투입되는 봉수대 복원은
시민들에게 살아있는 교육장의 역할을 하게 될 것이며
또한 밀양인들의 긍지와 자부심이 될 것인 만큼 역사적 고증이 불확실한 복원은 그 의미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특히 이번 복원공사에서는 관광자원화를 위하여
봉졸들이 살았던 마을까지 복원하여 역사적 현장감이 있는 복원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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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재국
■ 제1봉이든, 제2봉이든 간에
봉수대가 높은 산봉우리에 있는 것만이, "봉수대 최적의 입지"가 아닙니다
봉수대가 제1봉(峰)이든, 또는 제2봉(峰)이든 간에
만약에 "산(山) 정상(頂上 = 봉우리)에 봉수대가 있다" 라는 선입감에서
봉수대 유허(遺墟)를 조사, 발굴, 고증한다면 큰 문제입니다
봉수대의 유허를
만약에 이런 식으로 조사, 발굴, 고증하였다면 아주 잘못된 것입니다
“남산(종남산)봉수대가 남산 제2봉에 있다” 라는 것은
“남산(종남산) 제2봉의 산 능선(稜線)의 어디엔가 있다” 라는 것입니다
이런 전제 하(下)에
"봉수대 최적의 입지 기본원칙"에 따라
지표조사 등의 발굴작업을 하여, 고증을 하는 것이
그 당시 “남산(종남산)봉수대 유허의 조사, 발굴, 고증 용역단의 임무"일 것입니다
종남산 정상에는 "봉수대 공사 개요"가 봉수대 표지석 뒷면에 새겨져 있습니다
그러나 "봉수대 공사 개요"가 중요한 것이 아니고
동아대학교 용역단체의 조사,발굴 내용이 제일 중요합니다
따라서 그 당시의 “남산(종남산)봉수대의 조사, 발굴, 고증 용역단”이
이런 “봉수대 최적의 입지 기본원칙”에 따라 용역 작업을 수행하였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6. [밀성(밀양) “효심(孝心)의 난(亂) : 1194년 발생”] 전적지(戰迹地)와 산성(山城)
○ "효심의 난"은 무인독재권력의 폭정에 짓밟힌
○ 고려민중(경상도 장정) 7000명이 인간다운 삶을 위해
○ 운문지맥(밀양)에서 항거하다, 관군에 도륙당한 사건임
○ 초적(草賊)으로 비하된 7000명을 양민으로 복권시키는 것이 최종 목표입니다
■ 사라져간 고려(경상도) 장정 7000명의 울부짓는 원혼이 서린 중산(中山) 북동록(北東麓)의 천지(天池)
■ 고려 농민군 효심 휘하 7000 병력의 사령부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천지(天池) 전경
■ 천지(天池)에 세우려고 만든 홍보 간판(토지 소유주의 허락을 얻지 못해 세우지 못함)
■ 백암산(白巖山) 정상 부근 동록(東麓)의 농민군 사령관 효심의 무덤
■ 800여 년전, 고려 민중의 중심에 섰던 효심(孝心) 장군의 묘소
주민들에게는 "역적 포로의 묘 즉, 역포(逆捕)"의 무덤"으로 전해져 오고 있습니다
손흥수 선생과 저는 이 무덤이 효심 장군의 묘소로 추정하고 있니다
이건형 선생의 저전촌지에는 효심이 저전촌에서 관군의 수장(首將)인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에게 사로잡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백암산 자락에 조상대대로 살고 계셨던 손직수 선생은 지금은 작고하시고 안 계시지만
일족이신 손흥수 선생에게 "오래 전에는 주민들이 해마다 벌초를 했다" 하셨습니다
800여 년이 지났지만 묘소의 축대는 선명하게 보존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손직수 선생에 의하면
800여 년전 "효심의 난" 때, 관군에게 몰살된
"의(義)로운 영령 7,000여 경상도 장정"에 대한 예의로
인근 주민들이 벌초를 해 온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이 정말로 역적들이었다면, 주민들이 이렇게 벌초를 하였을까 !!!!!!!!
이토록 민중의 끈끈한 연대의 힘은 800여 년이 지나도 끊이지 않고 있습니다
역포묘가 세상에 많이 알려진 게기는
지금부터 20여 년전에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백암산 자락의 용암마을에 사셨던
일직인(一直人) 손직수(孫直銖) 선생이 손흥수(孫興銖) 선생을 안내하여
역포묘에 올라 현장을 답사하신 후에
손흥수 선생이 저(도재국)에게 말씀을 하시므로써, 세상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손직수 선생은 몇 년전에 안타깝게도 고인이 되셨습니다
그후 많은 세월이 흐른 후에
손흥수 선생은 저를 데리고 역포묘를 알려 주셨고, 같이 참배 및 답사를 하게 되었고
묘소를 참배 및 답사를 하고 하산길에 또 일직인(一直人) 손태석(孫泰錫) 선생을 만나
역포에 대해 전해오는 이야기를 많이 듣게 되었고
비로소 밀양광장에 최초로 그 내막을 게재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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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심의 난” 때 관군과의 격전지 중 한 곳인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 오치마을
“효심(孝心)의 난(亂)” 이래 800여 년이 흐른 지금
관군과의 격전지 중 한 곳인 오치마을은 운문지맥의 백암산과 구만폭포 중간 위치하며
아름다운 농부들이 평화롭게 농사짓는 마을로 바뀌었다
마을은 해발 400미터 안팎의 산상 분지형 마을로서 평화로운 산중 마을로서
밀양시 상동면 신곡리 오실마을, 산내면 용전리 저전마을
산내면 봉의리 봉천마을, 청도군 예전리 마을과 산길로 연결되어 있는
20여 호가 살아가는 아늑하고 매우 평화로운 마을이다
아래쪽(동남쪽)으로 뻗은 오치들판은
해발 400여미터 산중인데도 특이하게 산중(山中)에 저수지가 있고,
그 저수지 아래로 경지정리가 잘 된 들판이 펼쳐지고
들판의 수구(水口)는 용전리 저전마을 쪽으로 물병 모가지처럼 좁게 뚫여 있다
마을은 사람들은 사철 내내 사과농사에 매달리면서 사과농사를 짓고 있다
가을이 되면 들판 전체가 빨갛게 익은 탐스러운 사과가 나무에 주렁주렁 달려있는 것을 보면
파란 가을 하늘과 함께 여기가 산상의 천국임을 연상케 한다
오치마을 사람들은 오늘도 부농(富農)의 꿈을 가꾸면서
이 마을에서 생산되는 밀양얼음골사과는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면서 전국의 팔려 나간다
오치마을은 언제 들려도 평화롭고 정겨운 마을이다
아름다운 마을의 정경을 사진으로 많이 올리고 싶지만 지면 관계상 몇 장만 올린다
■ 오치마을 입구
■ 오치마을 풍경
■ 오치마을 뒤로 효심의 무덤이 있는 백암산이 보이고, 백암산 너머로 효심 농민군 사령부로 보이는 천지(天池)가 있다
고려(高麗) 농민군 효심(孝心) 장군 전적지(戰迹地) 천지(天池)가 기록된
■ 이건형(李建衡) 초전의고(草田疑考) “저전촌지(楮田村址)”
(저전은)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를 구성하는 한 산중 山中 촌락이다
고려 명종대의 대표적인 초적(草賊)의 괴수 효심(孝心)의 마지막 항전지(抗戰地)이며
관군(官軍)과 치열한 전투를 벌인 전적지(戰迹地)이다 (이건형 李建衡 초전의고草田疑考에 依함)
고려는 무신(武臣)정권이 성립된 이후 문민체제 대신에 무인(武人)들에 의한 독제체제가 등장하였다
무력적인 권력기반은 토지의 국유원칙을 무너뜨리고 농민들의 생활을 궁핍(窮乏)으로 몰아넣었으며,
정권의 유지 장악을 위하여 취해진 그들의 강권정치는 종전의 무신귀족정치보다 더 포악한 것이 되었다.
무인들은 비록 정권을 잡기는 하였으나 내부의 분열과 반목으로 지방의 구석구석까지는 침투하지는 못하였다.
지배질서의 문란은 곳곳에서 농민봉기를 불러 일어켰고, 천민계급의 반란도 잇따랐다.
그러던 중 1192년(明宗22년)을 전후하여 경상, 전라, 충청도 일대에 흉년이 들자
기민(飢民)의 속출을 계기로 민심은 더욱 동요되고
각지의 망명(亡命) 초적(草賊) 집단들도 유랑(流浪) 농민과 합세하여 치열한 반란 봉기를 유발하였다
초적들 중에서도 가장 맹렬한 것이 운문(雲門, 경북 청도)에 웅거(雄據)한 김사미(金沙彌)와
초전(草田)을 근거로 한 효심(孝心)의 집단이었다.
이들은 유민(流民)을 규합하여 주현(州縣)을 약탈하고 관군과도 정면 충돌할 수 있는 강력한 무력집단이었다
1193년(명종23년) 7월에 조정에서는 대장군(大將軍) 전존걸(全存傑)에 명하여
장군 이지순[李至純, 집권자 이의민(李義旼)의 아들] 등을 인솔하여 남도(南道)의 초적을 토벌하게 하였다.
이지순이 도리어 적군에 내응하여 관군은 일대 패배를 당하고 책임상 전존걸은 자살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였다
이에 당황한 조정에서는 11월에 상장군(上將軍) 최인(崔仁)을 남로착적병마사(南路捉賊兵馬使)로 삼고
대장군(大將軍) 고용지(高湧之), 장군(將軍) 김존인(金存仁).사양주(史良柱) 등을 인솔하여
남방(南方)의 초적을 정토(征討)케 한 결과,
이듬해인 1194년(명종24년) 2월에 운문의 초적 수령인 김사미(金沙彌)가 투항하여 참형(斬刑)에 처해졌다.
운문의 초적이 항복한 후에도 관군의 토벌(討伐)은 진행되었으나
또 한 사람의 괴수(魁首)인 초전의 효심은 좀처럼 투항하지 아니하고
장군 사양주는 그들의 도당(徒黨)에게 전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관군은 계속적인 토벌을 진행하여
같은 해 4월 7일에 이 곳 저전촌에서 반적(叛賊)을 완전 포위하고 일대 격전을 벌인 결과
초적 7천여명을 사상시키고 많은 병기와 우마(牛馬)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때 밀성(密城) 저전촌(楮田村)에서 관군에 토벌된 초적은 대개가 효심 배하(配下)의 민중군사(民衆軍士)로서
7천여명이 살상되었다는 기록은 이 전투가 얼마나 격심했는지를 짐작케 하는 것이다.
아마도 효심은 이에 앞서 김사미의 항복으로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자기의 군세를 총동원하는 한편 운문의 잔당들까지 합세하여
관군에 대한 최후의 항전(抗戰)을 기도(企圖)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결전을 계기로
효심의 군세는 하루아침에 꺾이어 이해 8월에는 일당인 이순(李純)을 관군에 보내어 항복을 청하였고,
4개월만인 12월 7일에 더디어 효심이 남로병마사(南路兵馬使)에 체포됨으로서
남방 초적의 반란은 일단 진압되었으니, 관군이 토벌을 시작한지 전후 2년이 걸린 셈이다
평소에 전투훈련이 없던 유망(流亡) 농민들이 2년간이나 관군을 상대로 싸워서 조정을 궁지에 몰아넣었다고 하는 것은
그들의 군사집단이 얼마나 큰 것이고, 그 항전이 얼마나 결사적이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또 그로 인하여 당시 위정자들에게 일대 각성을 촉구하는 계기가 된 것은
역사적으로도 훌륭한 교훈을 남긴 사건이라 하겠다
김사미의 운문산과 효심의 저전촌이 초적의 거점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지리적으로 관군의 공격을 방어할 수 있는 천험적(天險的) 요새(要塞)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이 두 곳의 요새는 당시 경주.울산.언양.김해 등지를 연결하는 교통로의 간도(間道)로서
초적들이 많은 도당을 거느리고 활동하기에 여러가지 유리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명종23년 추(秋) 칠월 조(條)에
시남적봉기그극(時南賊蜂起其劇) 김사미운문효심초전(金沙彌雲門 孝心據草田)
질(소?)취망명표략주현(嘯聚亡命標掠州縣)이라고 하여
초전(草田)을 효심의 웅거지(雄據地)로 기록하고 있는 바,
이 초전은 현재 그 소재지가 확인되지 않는다.
경북 성주(星州) 초전설(草田說), 울산설(蔚山說)이 있고, 밀양(密陽) 화봉리설(華封里說)도 있다.
초전(草田)과 저전(楮田)의 발음 중 의사점(疑似點)이 지명 혼동의 요인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되기도 한다
이곳 저전촌 서쪽은 상동면 도곡리(道谷里)와 접경(接境)하고 있는데
도덕령(道德嶺)이라는 산이 분계(分界)를 이루고 있다.
최근에 발간된 밀주지(密州誌)에는 도덕령상세칭천지주파랙십삼간구폐위경지동인화
(道德嶺上世稱天池周八白十三間久廢爲耕地洞人貨 )
오래 전에 동인(洞人)이 돈을 들여 천지를 폐하고 경작지로 했다
지이축제저수진산상영구(之而築堤儲水眞山上靈區)한 기록이 있다.
도덕령 위에 천지(天池)라는 못이 있어 그 둘레가 813간이나 되었으나
오래 전에 폐지하여 경작지로 삼았다는 것과
그 후 동인이 그곳에 저수지를 만들어 산상(山上)의 영구(靈區)로 불리었다는 내용이다.
이것은 효심이 수많은 유랑 농민을 통솔 웅거하여 관군에 항전한 곳이라는 것을 상상할 때
매우 유리한 지형조건을 갖추었다고 할 것이다.
저전촌 자체도 비교적 지대가 높은 산중 마을이지만
이웃에 더욱 지세가 험한 산상에 둘레 팔백간(약1400m)이 넘는 천연적天然的인 못이 있었다는 사실은
바로 이 지형이 하나의 요새적(要塞的)인 철옹성(鐵甕城)을 이루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한 도덕령道德嶺(도덕고개), 도덕지道德池(天池의 이명異名)와 같은 지명도
그것이 초전골 도적을 뜻하는 도덕령 도적못에서 기인하여 한자음으로 표기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있거니와
산상의 영구(신령스러운 구역)로 까지 기록된 이러한 이색적인 산령과 저전촌 일대에 대한 역사유적 연구가 긴요한 것 같다
참고 :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전적지조(戰績地條)에는
초전재화봉이고려명종계축효심반거차지(草田在華封里高麗明宗癸丑孝心叛據此地)
여운문적김사미호응(與雲門賊金沙彌呼應) 남로병마사격지참칠천여급(南路兵馬使擊之斬七千餘級)이라는 기록이 있어
지금의 무안면 화봉리에 있는 초전草田 마을을 효심의 반란 본거지로 보고,
1193년(명종23년)과 1194년(명종24년) 두 차례의 토벌사건의 현장으로서 결부시키고 있다.
그러나 이곳은 대규모의 초적집단이 둔소屯所로 삼아 막강한 관군과 싸울만한 지형적 조건이 되지못할 뿐 아니라
7천여급의 초적의 목을 베었다는 1194년 4월 전투현장에 대하여는
고려사 명종24년조(條)에 밀성(密城 )저전촌(楮田村)이라는 명백한 기록이 있는만큼
지금의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龍田里)가 정확한 것이다
그러므로 화봉리 초전마을의 효심 반거지설(叛據地設)은
더욱 확실한 출전(出典)과 앞으로의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출처 : 밀양문화원 밀양지(密陽誌) 편찬위원회 편(編) 발행 밀주지(密州誌) 489P ~ 491P
1987년 초판 발행, 2006.4.20 재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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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도재국 = 레나
운문 김사미와 호응을 했다는 것은
운문산과 저전촌 지역이 산악으로 서로 접근이 용이하고 가깝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이고,
관군의 힘이 미치는 지역이 아닌 곳이므로(농민군 장악지역이므로)
지금의 산내면 용전리 저전촌이 맞다고 보며
무안면 화봉은 운문산과 거리가 너무 멀고,
특히 병마사군과 밀성군의 관군 등이 장악하고 있는 지금의 상동면 동창천 유역(금호마을 남쪽)과
부북면 지역 등을 통과해야 비로소 무안면 화봉리로 통과할 수 있는 지역입니다.
즉, 화악산 남쪽 지역(부북면, 밀양시내)은 밀성군에서 장악을 하고 있던 지역이므로
무안면 화봉리 설은 당연히 배척되어야 한다 고 봅니다
그리고 밀주징신록(密州徵信錄)
복사본[複寫本, 2001.11.23 밀양시 산내면 임고리 섬들마을 거주 도호(島湖) 선생 장서(藏書)에서 복사]을
레나 본인도 한 권 소장(所藏)하고 있습니다
책의 내용를 살펴보면
제1권 전적지조(戰迹地條)에 덕대산성(신라시대 덕녀德女, 왜구),
추화산성(고려시대 손긍훈孫兢訓), 병구(부북 사포, 고려시대 김훤金咺),
초전(草田 무안 화봉, 고려시대, 효심 반거지), 오산鼇山(고려시대 김방경金方慶),
작원(임진왜란 박진朴晉), 광탄(임진왜란 박진朴晉), 대암(산내 삼락정 임진왜란),
진읍촌(임진왜란, 풍각현), 지동(정유재란 枝洞, 풍각현)의 전적 내용이 있습니다
이 책은 전문 지리서가 아닌
밀양지역에서 근세에 어떤 개인 또는 단체가 발간한 지리, 군세(郡勢), 향약 등이 포함된 목판본 책이며,
전적지 분량도 1페이지 반 정도이며,
발간 년대도 불명이며(근세에 발간된 것으로 추정),
당시 발간을 하면서 오류 등으로 화봉리설이 수록(기록)된 것으로 추정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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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밀양 “효심의 난 및 항몽 독립투쟁” 전후 고려와 밀양의 시대적 배경
[고려(高麗) : 밀주(密州) ~ 귀화부곡시대(歸化部曲時代)]
이글은 밀양에서 일어난 역사적인 대사건인 “효심의 난”과
밀양인이 주도하여 경상도 인근 주군(州郡)에 독려한 사건으로
즉, 진도(珍島)에서 항몽독립투쟁(抗蒙獨立鬪爭)을 했던 삼별초정부(三別抄軍政府)에
밀성군인(密城郡人) 전부가 일어나
투쟁한 역사적이고도 자랑스러운 “밀양인의 항몽독립투쟁”을 조명하는데
역사적.시대적.지리적.사회적 배경이 된 고려사(高麗史)와 동(同) 시대의 밀양의 역사를 기록한 것으로
밀양의 역사적인 두 사건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므로
밀양지(密陽誌) 등에서 발췌 및 일부 내용을 필자(도재국)가 추가하여 게재를 하며,
한글세대를 위해서 한자 원문(原文) 앞에 한글음을 기록합니다
출처 : 密陽誌 42 ~48
■ 밀양시 산내면 용전리의 "저전 골안마을"
따사로운 햇빛이 내리쬐는 가을날의 "저전 골안마을"의 풍경은 무척이나 평화롭다
저전마을에서 오치마을 쪽으로 산길을 오르다 보면 골안마을이 나온다
골안마을은 오치마을에서 저전마을로 통하는 산중 깊은 마을이다
법정리(法定里)인 용전리 안에 저전마을 골안마을 오치마을 등이 있다
효심은 저전촌에서 관군과 항전을 하다 관군에 사료잡혔고,
상동면 오실마을. 승학산 역적평지. 천지. 백암산 등 운문지맥에서
효심 휘하 농민군 7000명이 관군에게 도륙을 당했다
멀리 바라다 보이는 우측으로 뻗은 산정(山頂)의 평지가
정각산에서 승학산으로 뻗은 관군과 효심농민군이 대회전을 한 역적평지(逆賊平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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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초 高麗初에는 중앙권력 中央政府의 권력이 포략[(月+包)弱]하고 지방에 대한 통치체제 統治體制가 확립되지 못하여
대체로 신라시대 新羅時代의 주군 州郡을 그대로 두게 되었다.
밀양 密陽도 신라 新羅의 밀성군 密城郡 그대로 있었다.
그러다가 983년 성종 成宗 2년에 비로소 전국에 12 목牧을 설치하였고
이어서 14년에는 다시 전국을 4 도호부 都護府 10 도 道로 구분했는데
지금의 경상도 慶尙道 지방은 영동도 嶺東道. 영남도嶺南道. 산남도 山南道의 3도로 나누어 지고
밀성군 密城郡은 경주 慶州와 함께 영동도 嶺東道에 속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밀성군 密城郡을 밀주 密州로 고쳐 일단 격 格을 높이고 군수 郡守를 자사 刺使로 개칭 改稱하였다.
그리고 주위의 여러 군현 郡縣들을 관하 管下에 두었는데 무릇 속군 屬郡이 2개, 속현 屬縣이 4개나 되었다
○ 속군 屬郡 : 창녕군 昌寧郡. 청도군 淸道郡
○ 속현 屬縣 : 현풍현 玄風縣. 계성현 桂城縣. 영산현 靈山縣. 풍각현 豊角縣
위의 6 개의 군현 郡縣 중에서
청도군 淸道郡은 신라 新羅 때의 속현 屬縣인 오악 烏岳. 형산 荊山. 소산 蘇山이 합쳐진 것이고,
영산현 靈山縣은 마찬가지로 종래의 속현 屬縣인 상약 尙藥 그것이다.
그러나 창녕군 昌寧郡과 현풍 玄風. 계성 桂城. 풍각 豊角 3 현 縣은 모두 새로 귀속 歸屬된 것들이다.
밀주 密州 자체가 큰 고을인데다가
이 2 군 郡 4 현 縣 을 관할하는 밀주자사 密州刺使의 권위 權威는 실로 대단하였다.
뒤에 현종 顯宗 때에 밀주자사 密州刺使는
다시 지밀성군사 知密城郡事로 개칭 改稱되었지만 그 권위 權威는 여전하였다
당시의 전결 田結 결수 結數와 공부 貢賦 관계가 어떠했는지 기록은 찾을 수 없지만
고려사 高麗史 주현군 州縣軍에 의하여 밀성도내 密城道內의 병종 兵種과 군액 軍額을 살필 수 있다.
밀성도 密城道라는 도는 道는 방면 方面이라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밀성방면 密城方面 내에 있는 군대 軍隊라는 것이다
○ 밀성도내 密城道內 [병종 兵種] [군액 軍額]
- 보승 保勝 : 245人
- 정용 精勇 : 427人
- 일품 一品 : 532인
※ 출처 : 고려사 高麗史 권 卷83, 병지 兵志3, 주현군조 州縣軍條
이 군액 軍額은 인근 고을에 비해 월등히 많은 숫자다.
즉 울주도내 蔚州道內. 양주도내 梁州道內. 금주도내 金州道內 등은 모두 군액 軍額이 밀성도내 密城道內의 반도 안된다.
이것 또한 이 고을의 존재 비중을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고려 高麗 전기 前期에 있어서
수군 首郡 개성 開城을 포함한 중부 이북은 거란(栔丹). 여진 女眞 등 북방민족 北方民族의 구량(寇椋)과 압박 壓迫 때문에
전쟁 戰爭과 방비 防備에 따른 출혈 出血이 심하였고
뒤이어 정중부 鄭仲夫. 이의방 李義方 등 무신 武臣의 정변 政變으로 소란 騷亂과 희생 犧牲이 연속되었다.
이에 비하여 남쪽 지방은 그런 피해가 적었으므로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 속에 삶을 영위할 수 있었다.
밀양 密陽의 경우도 그러하였다.
물론 천재지변 天災地變이 가끔 일어나기는 하였다.
예를 들면 1035년 정종 靖宗 원년 元年과 1061년 문종 文宗 15년 양차 兩次에 걸쳐
대수 大水로 인해[낙동강 洛東江의 창일(漲溢)인 ] 수산 守山을 비롯한
속현 屬縣인 창녕 昌寧 땅의 주민들이 큰 손실을 입었고(고려사 高麗史 권 卷80 식화 食貨3)
1025년 현종 顯宗 16년에는 또 청주 淸州. 안동 安東 등지와 함께
밀양 密陽에 지진 地震을 당한 것이 조정 朝政에 보고된 바 있었다.(고려사 高麗史 권 卷5 현종세가 顯宗世家)
그러나 이러한 자연재해 自然災害는 외침 外侵. 내란 內亂에 의한 출혈 出血과 희생 犧牲에 비하면 별 것이 아니었다.
무신정변 武臣政變(1170년)에 죽지 않고 개성 開城을 탈출 脫出한 방랑시인 放浪詩人 임춘 林椿은
이곳(밀양 密陽)에 와서 오래 머물면서,
여러 시편 詩篇을 통하여 이 고장의 자연 自然. 풍광 風光과 인재 人才. 문물 文物 등
당시의 정황 情況을 잘 표현해 놓았다.
여기 먼저 그의 오언시 五言詩 한 수 首를 옮겨 본다.
○ 遊密州書事
“밀주(밀양)에서 놀면서 보고 듣고 한 일을 적는다”
※ 필자(도재국)는 평소에 이 시를 의미심장하게 감상합니다.
임춘의 시와 상황을 보니, 본질은 다르지만
그가 처했던 상황이 어딘가 모르게 필자의 몇 년 전의 상황과도 비슷하게? 보여,
임춘의 마음 속을 좀 더 깊게 들어가면서, 당시의 풍경과 시대상을 상상하면서 첨언을 해 봅니다.
또 이 시는 본문에서도 피력한 바와 같이
당 시대에 밀양의 풍광과 세상사를 상상해 볼 수 있는 역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자료입니다
01. 山郡多佳麗, 산군다가려,
산 많은 고을에 아름다운 곳 많아
[도재국 : 시골 밀성고을이 참으로 아름답기도 하구나]
02. 名高冠一方, 명고관일방,
명성이 높기로는 한 방면의 으뜸이구나
03. 地靈人自傑 지령인자걸
땅이 신령하여 인재 절로 걸출하다
04 野沃歲頻穰 야옥세빈량
05 들이 비옥하여 해마다 풍년이 드네
[도재국 : 임춘이 밀성에 몇 년 머물렀다는 증거]
06. 路拱舟車會 공로주거회
배와 수레가 몰려드는 도회지요
[도재국 : 길에는 배, 강에는 배가 모여 들구나]
07. 風存禮義鄕 풍존예의향
예의와 풍속이 남아 있는 고장
[도재국 : 예의와 풍속이 넘쳐나는 고장 : 뒷 구절에 연결하여 번역함]
08. 多儒如蜀郡 다유여촉군
촉군처럼 선비도 많은 데다
[도재국 : 촉군처럼 선비도 많고]
09. 絶景甲餘杭 절경갑여항
절경은 여항의 첫째라네
[도재국 : 절경은 여항처럼 최고구나]
10. 松菊荒彭澤 송국황팽택
솔과 국화는 팽택에 황량하고
[도재국 : 가을이 깊어 감에 밀성(팽택)에도 송국이 황량하구나]
※ 난을 피해 타향 땅(밀성)에서 방랑하는 임춘의 처량한 신세가 묻어남
11. 烟波動岳陽 연파동악양
안개와 파도는 악양에 흔들리네
[도재국 : 밀양(악양) 땅에 안개가 파도처럼 잔잔이 물결치네]
※ 이른 아침에 영남루에 올라 보니, 안개가 잔잔이 흔들리는 풍경을 보고 읊은 서정으로 보임
12. 山深禽格磔, 산심금격책
산이 깊어 새가 지저귀고
13. 川與水蒼茫, 천여수창망,
하늘은 물과 더불어 아득하네
14. 岫碧開新障, 수벽개신장
메뿌리 푸르게 새 병풍 열고
[도재국 : 산은 푸르러 새 병풍을 연 것 같구나]
※ 영남루나 높은 누대에서 멀리 산을 좌우로 둘러보니, 병풍을 친 것 같은 정경을 읊은 서정
15. 湖淸倚淡粧, 호청의장
호수 맑아서 단장했네
[도재국 : 호수는 맑아 단장한 것 같구나]
※ 호수가 물결 하나 없이 거울 같이 맑아, 화장한 말끔한 얼굴 같은 서정
16. 際天排樹幄, 제천배수악
하늘에 닿도록 나무 장막 치고
※ 도재국 : 번역문을 보면 “실재로 나무 장막을 친 것” 같은 표현을 했으나
나무 장막을 친 것이 아니고, 14번과 연결하여, “먼 산을 좌우로 둘러보니,
산에 있는 숲이 연결되어 윤곽이 하늘가에 장막을 친 듯하다” 라는 뜻으로 보임]
17. 拂雪裊茶槍, 불설요다창
눈을 떨치고 차 잎이 하늘거린다
[도재국 : (때는 흘러 겨울이 오고) 눈 속에 차나무 잎이 하늘거린다]
18. 四序叢筠綠, 사서총균록
사철 내내 대나무는 푸르고
[도재국 : 영남루에서 대밭을 바라보는 서정인 듯함]
19. 千門細柳黃, 천문세류황
일천 대문에 가는 버들 노랗네
[도재국 : (봄이 오니), 집집마다 대문 앞 버드나무에 노랗게 움이 터구나]
20. 杯盤饒海陸, 배반요해륙
밥상 위엔 바다와 육지의 산물 넉넉하고
[도재국 : 밀성군의 지군사(고을 원) 등에게 한 번씩 풍성한 대접을 받는 상황을 묘사]
21. 絃管妙宮商, 현관묘궁상
관현악 음각소리 궁상의 곡조 묘하구나
22. 遇勝添詩興, 우승첨시흥
(밀성고을을 다니면서) 좋은 경치 만나면 시흥을 붙여본다
23. 春行鳧渚暖, 춘행부저난
봄 오리 노는 물이 따뜻하고
[도재국 : 따뜻한 봄이 되니 물가에 오리도 노는 구나]
24. 暮燕鳳樓凉, 모연봉루량
저녁 제비는 봉황의 누대에 서늘한데
[도재국 : 해가 저물어 제비와 황새가 누각에 앉고, 날은 차갑구나]
25. 夢覺書窓月, 몽각서창월
서창의 달빛에 꿈을 깨고
[도재국 : 꿈을 깨어 보니, 서창에 달이 비추고]
26. 衣凝宴寢香, 의응연침향
연침의 향내가 옷에 어리네
27. 賞心幷樂事, 상심병략사
구경하는 마음에 즐거운 일 함께 하고
[도재국 : (밀성고을을) 구경도 하니 즐거운 일이로다]
28. 乘興放淸狂, 승흥방청광
흥을 타고 청광을 마음껏 하였고
[도재국 : 흥에 겨워 청광을 마음껏 하였네]
29. 久被山川住, 구피산천주
오래도록 좋은 산천에 잡혀 머물다
[도재국 : 오래도록 밀성고을(山川)에 의지하여 지냈구나 : 密城에 몇 년을 지냈다는 증거임]
30. 飜嗟道路長, 번차도로장
돌아보니 갈 길이 너무 멀구나
[도재국 : 고향 땅 개경과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그나 : 귀양이 풀리어,
언제 개경으로 돌아 갈수 있을까 : 또 앞으로 귀양길이 너무나 기약없구나 :
林椿은 밀성고을을 거쳐 금주(김해)로 귀양을 가야 하는 영어(囹圄)의 몸으로 신세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을 묘사]
31. 殘霞望騰閣, 잔하망등각
쓰러지는 노을에 등왕각을 바라보고
[도재국 : 해가 서산에 떨어지니, 등왕각이 눈에 어리네 :
“앞날이 암울하면, 등왕각을 희망 삼아, 시련을 극복하고 살아 가련다” 라는 심정을 묘사 :
등왕각을 하나의 희망봉으로 묘사]
32. 夜雨聽瀟湘, 야우청소상
밤비에 소상강 소리를 들어며
[도재국 : 응천(凝川 : 영남루 앞 밀양강 : 중국 호남성 소강과 상강)에 밤비가 내리네 :
32번 구절(심정)에 연이어, 임춘 자신의 처량한 방랑객 심정을 읊음]
[도재국 : 瀟湘 : 후난성(湖南省) 창사시(長沙市)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시안지앙(湘江)과 그 지류인 시아오슈에이(瀟水)로 두 강은 그 유명한 둥딩후(洞定湖)로 유입됨]
33. 鞭促征鞍發, 편촉정안발
채찍을 재촉하여 갈 길을 떠나니
[도재국 : 임춘은 밀성고을을 거쳐서 금주(금주 : 金海)로 귀양길을 떠났음]
34. 心隨去雁忙, 심수거안망
마음도 기러기 따라 총총하구려
[도재국 : 마음이 하늘에 날아가는 기러기 따라 가니, (앞 날이) 두렵구나 :
방랑하는 유배객이 정처없이 또 금주로 떠나니,
앞으로 무슨 일이 닥칠지 매우 불안한 심정을 묘사]
35. 嫌無王勃筆, 혐무왕발필
왕발처럼 노올과 따오기로
[도재국 : 왕발이 등왕각서를 지은 글을(글처럼 내 글도) 싫어해서 무엇하리?]
36. 霞鶩記南昌, 하목기남창
남창의 풍치를 적을 필력이 없네
[도재국 : 노올이 막(鶩 : 막:빨리:달리다) 떨어지는 가운데, 밀성(남창)의 풍경을 (이렇게 마지막으로) 적어 보네]
“밀주 密州에서 놀면서 보고 듣고 한 일을 적는다” 라는 이 시는 첫머리에
이 “산군 山郡은 가려 佳麗한 곳이 많아 명성 名聲이 일방 一方의 으뜸”이라고 말한 뒤에
지기 地氣는 신령 神靈스러워 인재 人才가 걸출 傑出하고
전야 田野는 비옥 肥沃하여 해마다 풍년 豊年인데
교통은 열려 주 舟. 거 車가 집합하는 요충 要衝이고
풍속 風俗은 순후 淳厚하여 예의 禮義의 고장이라는 것,
선비가 많기로 촉군 蜀郡과 같고 경치 景致는 뛰어나 항주 杭州를 능가한다고까지 칭찬하였다.
그는 이어서 사시절 四時節의 취죽 翠竹과 천문 千門의 세류 細柳,
그리고 이 아름다운 풍광 風光을 배경으로 해륙진미 海陸珍味의 배반 杯盤과
궁상묘곡 宮商妙曲의 관현 管絃을 즐기는 것을 묘사 描寫하였다.
당시 중앙 中央 무신 武臣들의 피비린내 나는 정권 싸움을 생각하면
임춘 林椿의 시 詩 속에 나타나는 이 고장의 모습은 마치 태평성대 太平聖代와 같은 느낌이다.
임춘 林椿은 제영남사 題嶺南寺. 영남사죽루 嶺南寺竹樓 등의 시 詩도 있는데,
제영남사 題嶺南寺는 고시체 古詩體로서 그 중에
(전략 前略)
01. 水泛桃花出洞中, 수범도화출동중
[도재국 : 물 위에 뜬 도화는 어느 동내에서 흘러 왔는가]
02. 居人宛是秦餘俗, 거인완시진여속
03. 靑山影裏兩三家, 청산영이양삼가
[도재국 : 청산의 그림자가 초가 셋 집에 드리우고]
04. 垂柳陰中千萬屋, 수류음중천만옥
[도재국 : 온 동네(천만옥)가 버드나무 드리운 그늘에 늘어서 있고]
05. 日暮郊原牛馬歸, 일모교원우마귀
[도재국 : 해 저문 郊外에 한가롭게 돌아오는 牛馬들]
06. 春深洲渚鳧鷖浴, 춘심주저부예욕
[도재국 : 봄어 깊어 강가에는 오리와 갈매기갈매기 들이 목욕을 하고]
※[도재국 : 번역이 완전하지 못한 것은 카페 회원님께서 별도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하략 下略)
라는 구절 句節들이 있다.
물 위에 뜬 도화 桃花는 무릉도원 武陵桃源을 연상케 하는데
수양버들 속에 천백 千百의 가옥 家屋들이 해 저문 교외 郊外에 한가롭게 돌아오는 우마 牛馬들을
그 번화 繁華스럽고 평화스러움을 한 결 더 잘 보여 준다.
임춘 林椿은 이러한 自然風光에 대해서 뿐 아니라
이 고장의 人才. 文物에 관해서도 찬미 讚美를 마지 않았다.
향교 鄕校의 유생 儒生들이 그를 초청하여 회음 會飮을 한 바 있었는데
그는 또 시 詩로써 사의 謝意를 표하였다
01. 昨入宮墻拜聖眞, 작입궁장배성진
어제는 사당에 들러 진상 앞에 절하고
02. 衣冠高會杏亶春, 의관고회행단춘
衣冠(文物이 열리고 예의가 바른 風俗)의 높은 集會에 나가보니 杏亶(鄕校를 가리킴)에 봄이 왔구나,
(中略)
03. 藹藹升堂多吉士, 애애승당다길사
당상에는 수많은 착한 선비들이 올라(모여) 있고
04. 陶陶滿座盡嘉賓, 도도만좌진가빈
좌중에는 모두 모두 세련된 빈객이 흥겹게 수작들 한다
05. 老儒久歎斯文喪, 노유구탄사문상
이 늘은 몸, 항상 사문(斯文 : 문장. 학문)이 상실된 것을 탄식했더니
06. 始喜名道禮義新, 시희명도예의신
여기 이 명도(밀성)에 와서 비로소 예의가 새로워짐을 보았노라
궁장 宮墻 즉, 사당 祠堂에 들러 선성 先聖의 진상 眞像 앞에 절하고,
행단 杏亶의 봄 의관 衣冠(문물 文物이 열리고
예의가 바른 풍속 風俗)의 높은 집회 集會에 나아가니,
당상 堂上에는 수많은 착한 선비들이 오르내리고
좌중 座中에는 모두 세련된 빈객 賓客이 흥겹게 수작들 한다.
이 늙은 몸, 항상 사문 斯文(문장 文章. 학문 學文)이 상실 喪失된 것을 탄식했더니
여기 이 명도 名道에 와서 비로소 예의 禮義가 새로워지고 있음을 기뻐하게 되었다 라고 한 것이다
창과 칼로써 모든 것을 결정하는 무신정권하 武臣政權下에서
이 고장의 사람들의 문아 文雅와 예절 禮節에 접한 임춘 林椿은 충심으로 감열 感悅을 금치 못했던 것이다.
처음 유밀주서사 遊密州書事에서 “선비가 많기로 촉군 蜀郡과 같다”느니
“풍속 風俗은 순후 淳厚하여 예의 禮義의 고장”이라는 등의 찬사를 발하더니
이번에는 향교 鄕校에 대한 시 詩에서 다시 “수많은 선비” 라느니 “예의 禮義가 새로워 지느니” 하는 말을 되풀이 한 것이다.
임춘 林椿은 마지막으로 기밀주태수 奇密州太守 라는 시 詩에서
필마단장 匹馬單裝으로 다시 여도 여도 旅途에 오르는 자신의 쓸쓸한 行色을 말하는 한편
아름다운 밀주 密州에 대한 무한한 아쉬움을 표시하기도 했다
임춘 林椿의 시 詩는 종래 從來 한시 漢詩의 특유한 수식성 修飾性 때문에 약간의 지나친 표현이 있을지 모르지만
1170년대 당시의 우리 고장의 상황을 알려주는 좋은 자료라 하겠다
이러한 상황과는 반대로
수도 首郡 개성 開成을 비롯한 전국 각 지방의 정세 政勢는 날로 동요 動搖와 불안 不安으로 흘러갔다.
무신정권 武臣政權이 등장한 뒤에 상하 上下의 신분질서 身分秩序가 크게 문란 紊亂해져서
비록 미천 微賤한 자라도 기회를 잘 잡으면 정부 政府 요위 要位에 오를 수 있었다.
한 때 정권 政權을 잡았던 이의민 李義旼은 연일 延日 사비 寺婢의 소생 所生이었으며
그 이전에도 노비 奴婢 출신 出身으로 공경대부 公卿大夫가 된 자가 많았다.
이러한 흐름 속에 노비 奴婢. 천민 賤民들의 반란이 각처에서 일어났는데,
그 중에서도 1198년 만적 萬積의 난 亂은 노예해방 奴隸解放의 격렬한 외침이었다.
수도 首都에 있어서의 만적 萬積의 난 亂은 실패로 끝났지만
지방 地方에 있어서의 민중 民衆의 소요 騷擾는 일파이파 一波二波 그칠 줄 몰랐다.
특히 동남지방 東南方面에서의 군도 群盜의 봉기 蜂起와 창궐 猖獗은
국가의 행정력 行政力을 거의 마비시키다시피 하였다.
강원도 江原道의 명주 溟洲. 삼척 三陟과 경상도 慶尙道의 경주 慶州. 의성 義城이
한 때는 적 賊에게 점령 占領당했는가 하면
진주 晉州에서는 이민간 吏民間의 폭동 暴動으로 살육 殺戮이 적행 籍行되었고
청도 淸道에는 운문산 雲門山을 근거지 根據地로 한 김사미 金沙彌 일당 一黨이 1198년에 이어,
1202년에 재차 반기 叛旗를 들고 나왔다.
이 시기에 우리 고장은 어떠했는가?
고려사 高麗史에 의하면 신종 神宗 3년
즉, 1200년 5월에 밀성 密城의 관노 官奴 50여 명 名이 은기 銀器를 훔쳐 운문산 雲門山으로 가서
적군 賊軍에게 합류 合流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질 리가 없었을 것이며
쌓이고 쌓인 사회의 모순 矛盾이 전국적 풍조 風潮의 파급 波及에 의해 촉발 觸發된 것이다.
표면적 안정 安靜과는 달리,
내부로부터 위기 危機의 온양 醞釀 [도재국 : 마음에 어떤 생각을 은근히 품음] 이 오래된 것이다.
드디어 임춘 林椿의 시 詩 속에 “도원경 桃源境‘으로 그려졌던 ”아름다운 밀주 密州“가
시대의 격류 激流 속에 말려 든 것이다. 역사적 歷史的 필연 必然이다.
이 무렵 中央에서는 모든 반대 세력을제거 除去하고 대권 大權을 한 손에 잡아
그 나름의 정국 政局을 주도하면서 지방의 반란 叛亂을 철저히 진압 鎭壓하였다.
이리하여 1176년경으로부터 1205년경에 이르기까지
무려 30년 동안 연달아 일어났던 각처 各處의 반란이 일단 종식 終熄되었다.
운문사 雲門寺 적군 賊軍에게 합류했던 밀성 密城 관노 官奴 일당도 물론 평정 平定당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고려 高麗는 내우 內憂가 겨우 종식되자 또 외환 外患이 시작되었다.
광고 曠古의 외환 外患이라 할 몽고 蒙古의 대구 大寇가 쳐 들어온 것이다.
1231년 고종 高宗 18년으로부터 시작된 몽고 蒙古의 병화 兵禍는 전후 또한 30년에 가까운 장기간에 걸친 것으로,
국토의 대부분을 황폐 荒廢시킬 정도의 큰 상처를 입혔다.
최충헌 崔忠獻의 자리를 승계 承繼하여 고려정부 高麗政府의 실권자가 된 최우 崔瑀는
몽고 蒙古의 항복 요구를 거절하고 강화도 江華島로 수도 首都를 옮겨,
그곳에서 전국의 성보 城堡를 지키는 장병 將兵들에게 대몽고 對蒙古 항쟁 抗爭을 지령 指令하였다.
강화도 江華島를 보루 堡壘로 하여 몽고 蒙古에 대한 장기 항전 抗戰을 수행한 고려 高麗 국민 國民은
당시 구아대륙 歐亞大陸을 마음대로 짓밟았던 몽고 蒙古 기병 騎兵 앞에
러시아민족 러시아民族. 중화민족 中華民族과 더불어 최대의 희생 犧牲을 감수하면서
그 저지와 대결에 용감하였다.
특히 주목할 것은 각 지방의 장병 將兵과 민중 民衆들의 영웅적 英雄的 전투 戰鬪였다.
박서 朴犀는 구주 龜州(평북 平北 구성 龜城)에서.
김경손 金慶孫은 정주 靜州(평북 平北 의주 義州의 북동北東)에서.
송문주 宋文冑는 죽주 竹州(경기도 죽산 京畿道 竹山)에서
모두 몽고군 蒙古軍의 철통같은 포위 속에서 조금도 굴함이 없었고 밤낮을 가리지 않는 치열한 공방전 攻防戰 끝에
마침내 몽고군 蒙古軍을 격파 擊破하였다.
그런데 중앙 中央 최고 最高의 위치에서 그것을 종합하고 집중적으로 파악해야 할 무신정권 武臣政權은
전쟁의 장기화 長期化에 따라 점차 력량 力量의 한계를 노정 露呈하면서
오직 후방에서 소비적인 생활과 권력 權力 유지만을 일삼아 오다가
필경 내부 분열에 의하여 최씨정권 崔氏政權은 도괴 倒壞되고
고려왕실 高麗王室 및 타협주의 妥協主義 관료 官僚들의 책동 策動으로
몽고 蒙古에 대한 강화 講和와 개성 開成으로의 천도 遷都가 결정되었다.
몽고 蒙古에 대한 일방적 굴종 屈從으로
고려 高麗 국민 國民의 27.8년간의 장기 長期 항전 抗戰을 무의미하게 만드는 고려왕실 高麗王室과
반동적 反動的 관료 官僚들의 처사는 국민 國民에 대한 엄청난 배신 背信이며
국민 國民으로서 용서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리하여 지금껏 전쟁 戰爭의 주력부대 主力部隊였던 삼별초군 三別抄軍의 장교 將校들이
장군 將軍 배중손 裵仲孫의 지휘 아래 분연히 궐기하였다.
우선 개성 開成 환도 還都를 거부하고 왕족 王族 승화후 承化侯 온 溫을 새 王으로 옹립 擁立하여
정부를 政府를 조직한 뒤에 관리 官吏. 군인 軍人 및 그 자녀 子女. 노비 奴婢 기타 공사 公私 재화 財貨를
천여척 千餘隻의 배에 싣고 남하 南下하여 진도 珍島에 본거 本據를 정하고
남해 南海. 거제 巨濟. 제주 濟州 등 30여도 30餘島를 지배 支配하여 일대 一大 해상왕국 海上王國을 건설하였다.
그들은 전국민 全國民을 향하여 몽고 蒙古에 대한 최후까지의 항전 抗戰을 호소하였다.
이 때 전라도 全羅道. 경상도 慶尙道 지방의 백성들은 일제히 호응하여 일어났다.
그동안 몽고 蒙古의 병화 兵禍에 대한 민족적 民族的 적개심 敵愾心이 강렬한데다
삼별초군 三別抄軍의 행동이 대의명분 大義名分에 합치했기 때문이다.
이 위세 威勢에 놀란 지방 수령 守令들은 바람에 스러지듯 동조하였고
게 중에는 진도 珍島로 찾아가 새 왕 王을 알현 謁見하기도 했다.
반대로 그렇지 않은 수령 守令들은 아주 고립 孤立되거나 백성들의 손에 죽음을 당하는 형편이었다.
이에 대하여 밀양 密陽 사람들은 어떻게 대처했던가.
고려사와 高麗史와 여러 문적 文籍에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하고 있다.
당시 군인 郡人인 방보 方甫. 계년 桂年. 박평 朴平. 박경순 朴慶純. 박경기 朴慶祺 등이
고을 사람들을 소취 嘯聚하여 삼별초군 三別抄軍에 호응하려 하는데
군 郡의 부장 副使(부군수 副郡守)인 이신 李頣(臣?)이 말을 듣지 않아
드디어 그를 죽이고 개국병마사 開國兵馬使 라 칭 稱하여
여러 군현 郡縣에 첩문 牒文을 발송하는 한편
다시 그 당 黨을 보내 비협조적인 청도감무 淸道監務 임종 林宗(혹은 최양수 崔良粹?)을 죽였다.
마침 본군 출신인 조천 趙阡이 일선 一善(선산 善山) 縣令으로 가 있었는데
방보 方甫 등은 조천 趙阡에게 연락하여 그를 귀향 歸鄕시킴과 동시에 함께 거사 擧事하게 되었다.
조천 趙阡은 현직 現職 지방관 地方官으로 관인신분 官人身分의 소유자인만큼
지방사회 地方社會에 있어서의 그의 영향력이 컸으므로 우두머리로 삼은 것이다.
이 소식을 듣고 안렴사 按廉使 이숙진 李叔眞은 겁 怯이 나서 금주 金州(김해 金海)로 도주 逃走해 버렸다.
방보 方甫 등의 행동을 불법 不法이고 반역 叛逆이라고 생각한 금주방어사 金州防禦使 김훤 金暄은
경주판관 慶州判官 엄수안 嚴守安과 함께 군사 軍士를 동원하여
이숙진 李叔眞을 앞세워 밀양 密陽으로 진격하려 했다.
이숙진 李叔眞은 아직도 겁 怯에 질려 결단을 짓지 못하고 술승 術僧을 불러 길흉 吉凶을 점 占치고 있었는데
김훤 金暄이 칼을 들어 술승 術僧을 내리치니 이숙진 李叔眞은 그제서야 도리없이 좇았다.
안렴사 按廉使를 앞세운 관군 官軍의 대부대가 大部隊가 밀양 密陽으로 쳐들어가니
조천은 趙阡은 정세가 情勢가 불리해진 것을 알고 군인 郡人 손일 孫逸과 모의 謀議하여
방보 方甫 등을 목베어 투항 投降하고 말았다.
이것이 1271년의 일이었다.
방보 方甫 등이 개국병마사 開國兵馬使라고 칭 稱한 것은
대국 開國 즉, 나라를 개혁 改革한다는 대단한 의도를 담은 것인데
불행하게도 계획이 미숙하고 조치가 서투른데다가
동지 同志로 포섭했던 조천 趙阡. 손일 孫逸 등이 반복무상한 태도로 나와 완전히 패망하게 되었다
병구지와 병천, 병암 위치도 (아래)
이 사건은 이것으로 일단락되었지만
그 후의 밀양 密陽에 대한 고려정부 高麗政府의 보복 報復이 어떻게 나올 것인지 알 수 없어,
주민들은 모두 전전긍긍하였다.
읍내 邑內 사람들이 힘을 모아 정부요로 政府要路에 많은 뇌물 賂物을 받치고 선처 善處를 부탁하였다.
정부내 政府內의 대간 臺諫들은 진작 밀양 密陽에 대한 응징을 주장하였다.
반역을 꾀한 인간은 물론이고 반역자들의 거주지방 居住地方에 대해서도 응징하는 것이 전통적 원칙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뇌물 賂物을 받은 용사자 用事者들은 5년여를 미루어 왔다.
드디어 전통적 원칙에 입각한 대간 臺諫들의 계속된 주장에 거부할 명분 名分이 없는 정부 政府는
1276년 충열왕 忠烈王 2년에 드디어 밀양 密陽 전체 全體를 반역향 叛逆鄕으로 규정,
밀성군 密城郡을 일반 주군 州郡의 서열 序列에서 완전히 격하시켜 格下시켜,
귀화부곡 歸化部曲으로 만들어 계림부 鷄林府(경주 慶州)에 예속 隸屬하게 하였다.
이것은 우리 밀양 密陽으로서 전무후무 前無後無한 큰 변고 變故였다.
“부곡 部曲”이라는 것은 원래 신라 新羅 때 주군 州郡을 편성하면서
인구 人口와 전정 田丁이 한 개의 현 縣(주군제 州郡制에 있어서
최소 最小의 행정단위 行政單位)으로 만들기에
부족한 지방은 향 鄕 또는 부곡 部曲으로 만들어 군 郡이나 현 縣의 임내 任內(관하 管下)에 두었던 것이다.
부곡 部曲에는 중앙 中央에서 파견 派遣돼 온 관원 官員이 없고
오직 부곡 部曲의 리 吏가 있어(부곡장 部曲長이라 칭 稱함) 부곡 部曲의 행정 行政을 맡아 있으면서
상급기관 上級機關인 군현 郡縣의 리 吏에게 통제 統制를 받아야 했다.
지방행정 地方行政 말단 末端의 1 단위 單位이긴 하지만 독립성 獨立性이 전혀 없고
군현 郡縣에 예속 隸屬된 존재일 뿐이었다.
밀양 密陽 자체가 수많은 향 鄕과 부곡 部曲을 경내에 가지고 있는 터에
이제 고을 전체가 송두리째 부곡 部曲으로 전락되어버린 것이다.
따라서 이제 지군사 知郡事(군수 郡守)도 부리 副使(부군수 副郡守)도 없어지고
오직 귀화부곡 歸化部曲의 리 吏 즉, 부곡장 部曲長이 계림부 鷄林府(경주 慶州)의 통제 統制 아래
조세 租稅. 역역 力役 등에 관한 사무를 보기에 이르렀다.
부곡 部曲은 여러 종류가 있어서 일반 양민 良民이 사는 부곡 部曲이 대부분이긴 하지만
부곡 部曲 중에는 포로 捕虜 [도재국 : 민란으로 포로가 된 사람].
역적 逆賊 [도재국 : 민란으로 역적이 된 사람]. 특수천민 特殊賤民 들의 부곡 部曲이 끼어 있어서
대체로 부곡 部曲은 좋은 인상을 주는 것이 아니었다.
귀화부곡 歸化部曲의 경우 귀화 歸化라는 이름이 보여주듯
외화 化外의 백성으로 다시 왕화 王化에 돌아오게 하려는 엄엄혹 嚴酷한 처벌이었던 만큼
주민들의 고통이 심하였다.
부곡인 部曲人이 되어 불명예스러운 것은 차치 且置하고
계림부 鷄林府 쪽으로부터의 예속인시 隸屬人視에 따른 부당한 징수 徵收와 주구 誅求에 견딜 수 없었다.
특히 이 고장 토착세력 土着勢力으로
역대 歷代 호장 戶長. 부호장 副戶長 등 행정실무 行政實務를 관장해오던 읍내 邑內 사람들이
종래 콧대높은 대관향리 大官鄕吏(큰 고을이 아전)의 긍지 矜持를 일조에 잃어버리고
한 낱 부곡리 部曲吏로서 경주향리 慶州鄕吏들에게 하대 下待를 받는 것은
실로 참기 어려운 사정이었다.
이 고장 토착세력 土着勢力을 대표하는 씨족집단 氏族集團 중에
박씨족 朴氏族은 고려중기 高麗中期에 이미 중앙 中央으로 진출한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예를 들면 박의신 朴義臣. 박육화 朴育和와 같은 분들이다.
박의신 朴義臣은 인종조 仁宗朝 (1123 ~ 1146)에
향리 鄕吏로서 역학 力學 등제 登第하여 공부상서 工部尙書가 되었고
박육화 朴育和는 의종조 毅宗朝 (1147 ~ 1170)에
동북면병마사 東北面兵馬使를 거쳐 형부상서 刑部尙書가 되기도 했다.
그런데 이 귀화부곡 歸化部曲 시기에
역시 이 고장 출신으로 박의 朴義라는 사람이 있어
당시의 임금인 충열왕 忠烈王에게 사랑을 받아 王의 측근 側近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는 王이 사냥 다닐 때 응견 鷹犬을 잘 다루는 것으로 행신 倖臣이 되어
여러 차례의 승진 끝에 어느덧 장군 將軍이 되었다.
그는 王의 주변의 료속 僚屬들에게 뇌물 賂物을 주고 왕 王에게 밀양 密陽의 문제를 아뢰게 하였다.
“밀성 密城은 대군 大郡으로, 국가 國家에 공부 貢賦를 바치는 것이 대단히 많은데
부곡 部曲으로 격하 格下시켜 진무 鎭撫하는 수령 守令조차 없게 되었으니
백성 百姓이 유산 流散될까 염려된다” 한 것이다.
왕 王은 이를 받아들여 우선 특별히 “소복별감 蘇復別監”이라는 관리를 두어 백성을 보살피게 하였다.
이 “소복별감 蘇復別監”이 어떤 기능 機能을 했는지 전혀 설명이 없지만,
어쨌던 귀화부곡 歸化部曲의 주민들의 편익을 도모하기 위한 것임은 곧 이해가 된다.
박의 朴義는 부자 富者이지만 인색하기로 소문난 위인 爲人이니까
료속 僚屬들에게 준 뇌물 賂物은 박의 朴義 자신의 것이 아니고
역시 읍내 邑內 사람들이 염출 捻出한 것으로 보인다
이리하여 소복별감 蘇復別監을 둔지 얼마 뒤에
귀화부곡 歸化部曲에서 간신히 밀성현 密城縣으로 승격 昇格되었고
1285년 충열왕 忠烈王 11년에 비로소 밀성군 密城郡으로 회복되었다.
그러나 한번 입은 오명 汚名은 쉽게 가셔지지 않았다.
특히 정부 政府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늘 백안 白眼으로 보아왔다.
고려 高麗를 거쳐 조선초 朝鮮初에 이르기까지 그러하였다.
조선초 朝鮮初의 공사 公私 기록은 대체로 고려 高麗 이래 以來 것을 이어받은 것이지만
1425년에 관 官에서 편찬한 경상도지리지 慶尙道地理志를 보아도 알 수 있다.
경상도지리지 慶尙道地理志의 첫머리에 도내 道內 각 고을의
토지 土地. 수천 水泉. 풍기 風氣. 민속 民俗에 관한 일람표 一覽表를 게재해 놓았는데
밀양 密陽에 대해서는
○ 밀양 密陽 : 토지비 土地肥. 수천심 水泉深. 풍기온 風氣溫. 속상 俗尙 역학호학 力農好學. 연 然 호투쟁 好鬪爭.
○ 밀양 密陽 :
- 토지비 土地肥 : 토지는 비옥하다
- 수천심 水泉深 : 강과 샘은 깊다
- 풍기온 風氣溫 : 풍기는 온화하다
- 속상 俗尙 역학호학 力農好學 : 풍속을 숭상하며, 농사에 힘을 쓰며, 학문을 좋아한다
- 연 然 호투쟁 好鬪爭 : 그러나(然) 투쟁(싸움, 다툼)을 좋아한다
이라 하여,
자연조건 自然條件을 모두 좋게 해 놓고
풍속 風俗은 “농사 農事에 힘쓰고 문학 學文을 숭상한다.”고 하여 역시 좋게 말해 놓고는
끝에 가서“호투쟁 好鬪爭”이라 하여 투쟁을 좋아한다 라고 사족 蛇足을 달아 두었다.
이것은 삼별초 三別抄에 호응한 방보 方甫 등의 사건 때문이다.
이로부터 밀양 密陽의 인사들은 이것을 큰 수치로 알아
오명 汚名을 씻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했다.
후술 後述할 점필재 佔畢齋 김종직 金宗直 선생 先生은
향교 鄕校의 제생 諸生들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이 사실을 언급하기도 하였다
01. 前朝之末, 乾綱解紐, 전조지말, 건강해뉴
[도재국 : 고려 말엽에 임금의 법이 해이해지자
[乾 : 임금]
02. 州之群不정(정 : 책받침변 +呈 : 풀어 주다), 주지군불정
[도재국 : 밀주의 무리들이 快하지(구속 받는 것을 부정하여) 못하여]
[정 : 快也, 通也, 不檢 : 구속 아니 받을 정]
03. 如方甫桂年之徒, 註誤齊民, 여방보계년지사, 주오제민
[도재국 : 방보. 계년의 무리들이 백성들과 함께 (선동) 하여]
04. 以應珍島之賊, 嘯聚未幾, 이응진도지적, 숙취미기
[도재국 : 진도의 도적들과 호응하여, 모두 모여 (세상을) 위태롭게 하여]
05. 自底蕩覆, 世遂以此貶絶其俗, 자저탕복, 세수이차폄절기속
[도재국 : 이로 인하여 탕복을 당하여, 세상은 풍속이 없어졌다]
06. 後之錄觀風誌地志者, 후지록관풍지지자자
[도재국 : 훗날의 관풍과 지지에 기록하기를]
07. 咸曰其民好鬪爭, 함왈기민호투쟁
[도재국 : 그 백성들은 투쟁을 좋아한다 하였다]
08. 至今爲山川人物地差辱焉, 지금위산천인물지차욕언
[도재국 : 지금 산천과 인물을 욕되게 하고 있구나]
※[도재국 : 번역이 완전하지 못한 것은 카페 회원님께서 별도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出處 : 密州誌 府內面 鄕校條)
방보 方甫 등의 잘못된 선동으로 지방이 탕패 蕩敗를 당하고
후세의 관풍록 觀風錄이나 지맂 地理誌에 모두 우리 고을 백성들은 “투쟁을 鬪爭을 좋아한다”
[도재국 : 방보 등의 항몽 삼별초군진도정부에 호응한 것은
우리나라와 일제 독립운동의 기원으로 좋게 보아야 한다.
김종직의 국가제일주의 國家第一主義 사상과 주장 主張으로
백성이 도탄에 빠지게 한 원인이 국가인데 이를 모두 백성에게 몰아 민본 民本과 민족관 民族觀이 의심된다]
라고 기록하여 지금까지 산천 山川. 인물 人物의 수치와 모욕이 되고 있다고 한 것이다.
김종직 선생 金宗直 先生은 이어서
嗚呼 齊魯 文獻之邦也, 오호 제노 문헌지방야
[도재국 : 오호라, 제나라와 노나라 땅에서도]
孔孟之遺敎存焉 이경역세운, 공맹지유교존언 이경역세운
[도재국 : 공자와 맹자의 가르침을 받았거늘]
奸夫大盜 據其地而爲亂者, 多矣 간부대도 그기지이위란자, 다의
[도재국 : 간부와 대도가 웅거한 제나라와 노나라(地)에서도 나라를 어지럽히는 자가 있었거늘]
然而中國之人, 不以是倂구(言+后)其地, 다의 연이중국지인, 불이시병구기지
[도재국 : 그런데도 중국인들은 그 땅에서 꾸짓지 않았는데]
[구(言+后) : 꾸짓을 구]
若稱禮義之俗, 則必以二爲首, 약칭예의지속, 칙필이이위수
[도재국 : 예의의 풍속을 말 할 때는, 반드시 齊魯를 제일이라 하였는데]
奈之何吾州, 以一方桂之亂, 나이하오주, 이일방계지란
[도재국 : 우리나라에서 방보와 계년의 반란을 일어켰고]
而百載之下, 尙蒙其汚衊耶, 이백재지하, 상몽이오멸야
[도재국 : 이에 수백년이 흘러(下), 아직도 몽고(침략)의 피비린내 나는 오점이 남아 있구나]
[衊 : 피 칠할 멸] [百載 : 해(년도)가 꽉 차다? : 수백년?]
可見綠觀風誌地理者之不寬弘其量而不許人以遷善之俗也
가견록관풍지지리자지불관홍기량이불허인이환선지속야
[도재국 : 관풍지와 지지에 보면, 세상의 풍속이 변하였는데도 너그럽게 보지 않고 있다]
※[도재국 : 번역이 완전하지 못한 것은 카페 회원님께서 별도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출처 出處 : 밀주지 密州誌 부내면 府內面 향교조 鄕校條)
라고 하여
공자 孔子. 맹자 孟子의 고장인 제노 齊魯에서도 간부 奸夫와 대도 大盜가 나온 적이 있었지만,
그렇다고 하여 중국인 中國人들이 그 고장을 욕하지 않고
예의지속 禮義之俗을 말할 때는 반드시 제노 齊魯를 제일로 쳐주고 있는데, 그
기 비하면 우리나라 관풍록 觀風錄이나 지리지 地理誌를 엮은 사람들은 너무도 도량 度量이 좁다는 것이다.
“호투쟁 好鬪爭” 3자가 그처럼 밀양 密陽의 체면을 손상시켰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관점 觀點의 문제다.
삼별초군 三別抄軍의 행위를 의거 義擧로 인정하고
그들의 최후 옥쇄지 玉碎地인 제주 濟州에 “항몽순의비 抗蒙殉義碑”를 세우게 된 오늘의 사관 史觀으로 볼 때에
삼별초군 三別抄軍에 호응한 방보 方甫 등의 행동[도재국 : 항몽 독립운동]도 민족 民族 의거 義擧에 해당하는 것이며,
[도재국 : 또한 우리 밀양인 密陽人의 빛나는 항몽독립투쟁 抗蒙獨立鬪爭에 해당하는 것이며,
이를 기리기 위해 병구지 兵區址를 국가 國家 사적지 史蹟地로 지정.관리할 것을 요구하며,
이 항쟁 抗爭에 참여한 모든 사람을 독립운동가로 복권 復權시키고,
제주도 濟州道의 항몽순의비 抗蒙殉義碑와 같은 밀양인 密陽人의 항몽순의비 抗蒙殉義費를 건립해야 할 것이다]
“아름다운 밀주 密州”를 귀화부곡 歸化部曲으로 격하 格下시킨 고려정부 高麗政府의 보복 報復 처사 處事는
[도재국 : 민족자존을 여지없이 뭉개버린 대단히 비열한 짓이다] 끝.
※[注書로 도재국이 번역한 것이 완전하지 못한 것은 카페 회원님께서 별도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서하집(西河集) 권이(卷二) 장십육(張十六)]
※ 遊密州書事 출처 : 밀양문화원 발행 密陽誌(原文 一部) 및 嶺南樓題詠詩文(原文 全文 및 飜譯文. 注書)
※ 도재국 : 注書(一部 飜譯 및 注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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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심의 난”이 끝난 823년 후에도, “민중은 개.돼지이다” 라고 말하는 한 고위 공무원의 발언
왕조시대 국가의 백성에 대한 가렴주구와 폭정은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변함이 없었다
서기 1194년 고려 무인정권은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했고,
가렴주구 도탄으로부터 살아남기 위해서 그들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갔고,
나물과 풀뿌리로 허기진 배를 움켜쥐고 생명을 연명하다
무리를 지어 관청 창고의 식량을 도둑질하기 시작하므로서
그들은 초적으로 몰리기 시작했고,
초적으로 몰려 관군의 소탕 작전으로 운문지맥(밀양)에서 무려 7000명의 경상도 장정이
짐승처럼 도륙을 당한 사건이 “효심의 난”의 전말이다
효심의 난으로부터 823년이 흐른 2016. 7. 7
우리나라 교육을 총괄하는 교육부의 모 정책기획관이 서울 한복판 종로의 한 식당에서
경향신문 기자들과 나눈 대화 내용 중 그가 한 말은 언론(인터넷 기사)에서 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신분제를 공고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민중은 개돼지로 보고 먹고 살게만 해주면 된다"는 등의 발언을 했다
그리고 뉴스에서 그가 한 발언 중에 “99%가 민중”이라고 신문에 대서특필되고 있다
그러니까 “1%가 권력자이고, 99%가 지배를 당하는 민중”이라는 식으로 보도되고 있다
선량한 백성이 개.돼지 짐승으로 몰려 관군으로부터 몰살당한지 어언 823년이 지난
대명천지 21세기에도 1%의 지배권력자들이 99%의 민중을 개.돼지로 취급하면서
1%를 위한 신분제를 언급하는 이 비극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나 ?
할 말을 잊는다.
위에서 말하는 1%의 범주(격 : 格)에 들지 않는
또 다른 1%가 전국의 각 시.군.구의 모든 기관. 단체. 사회. 조직체 등에도 있을 지 심히 두렵다
세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밀양광장은 묻히고, 파 묻어버린 밀양향토사의 진실 규명.보존과
향토 문화.관광의 발전 및 융성. 홍보 등을 위해서
앞으로도 변함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경향 각지의 선배.제현 여러분께서도
변함없는 성원과 지도.편달.참여를 하여 주시면
대단히 고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6. 8.
밀양광장 카페지기 도재국(레나)
|
첫댓글 누구든지 이 사진을 재악산(載岳山) 홍보용으로 사용하시면 좋겠습니다
수정(본문 수정) :
고려시대에는 절(사찰)의 명칭으로
「절 寺 자」보다
「단체 社 자」가 더 많이 사용되었다
본 글은 내용을 계속해서 보완, 증보시킬 것입니다
청운산성
http://cafe.daum.net/_c21_/bbs_nsread?grpid=1BHFK&fldid=9D2M&contentval=0002Hzzzzzzzzzzzzzzzzzzzzzzzzz&datanum=141&searchlist_uri=%2F_c21_%2Fcafesearch&search_ctx=VnKaQtKZsJZB2Q6rEnyTQNJLYJ1BLByrXH6apwnmUgOL5YegifEsd1cqZ7i531igt-YDkRZacyFZD.z.kHoEU_Olxj89S4nnrcfOee1Dq9NK4y6bo2Fx6ip6CwhKUkyAb99eFyvtEkuugUOzHH4.gH1OxJ9.N_WJaz4IFvbRge9T_2M2WMKUpRn5ssCsUGXuPr-CEB-khJb2.s2q4EBUoiB4jVcNKWAM5YCjttWjzvwwXybyIXHNo-CqZ-cY_8fQsUnBBQtSZmg0
훌륭한 일을 하십니다
계속 발전 하여 밀양의 정체성 확립에 근거를 찾고 일깨워
우리의 후손에게 역사성 자연환경에 의한 지금의 문화형성등
역사 뿌리의 시원을 잘 알아야 후손들이 옭곧은 의식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을것입니다 ,,,레나님 도재국님 역사속으로님 모두 님들의 수고가
헛 되지 않을것입니다 박수를 보냅니다 핫~~팅
반갑습니다
요즘 저가 "효심의 난" 글을 몇 달째 쓴다고 카페 들어 올 시간이 없었습니다
오늘 선생님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관심을 가져 주셔서 고맙습니다
도재국님 이 밀양시민이라는것에 자랑스럽습니다
누구신지 모르지만, 용기를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
지기님 멋진 포스팅에 찬사를 드립니다.게시글 공감하며 감사히 즐감하고 갑니다.
긴 글을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역사를 바로 새우기 위해 노력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응원해 주셔서 대단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