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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4. 21일 강의 (2025. 5. 4일 주일) 프로 페짜이 설교 연구 모임 이형우 목사 강의안)
* 설교자들 모임(프로페짜이 성남지부)에서 강조하는 내용 몇 가지.
1. 본문 정하기 : 가장 중요한 문맥의 구절을 찾으라. (10절 정도가 좋다) 다른 구절들은 설교에서 다룸
2. 성경 분문에서 절대 빗나가지 마라. (몇 번을 읽고 분문 내용을 간단히 요약해보라. 프로페짜이에 올린 분문 주석을 읽고 본문의 뜻을 파악할 것. 정해진 주제에서 설교 제목이 나오고 전체 설교가 진행)
3. 원 포인트 설교를 하라. (주제를 여럿 잡으면 산만해진다. 하나님이 본문을 통해 무엇을 내게 말씀하시는가 한 가지만 잡고 달려가라)
4. 알기 쉬운 설교를 하라. (아무리 유식한 내용도 못 알아들으면 소용이 없다. 초등학교 4학년이 이해할 수 있는 설교를 하라)
5. 재미있는 설교를 하라. (아무리 영양가를 갖췄어도 맛있어야 먹는다. 졸지 않게 하라)
6. 감동적인 설교를 하라. (좋은 예화나 간증을 통해 감동을 주라)
7. 삶에 적용하도록 하라. (적용되지 못하는 설교는 공허한 메아리다)
8. 영혼 구원에 초점을 맞추라. (낮 예배 : 처음 교회 나오는 사람이라 생각하고 구도자에게 초점을 맞추라. 예수님을 구원자로 영접하게 하는 데 최선을 다하라)
9. 결론을 전도에 두라. (하나님이 오늘 이렇게 말씀하시므로 그 말씀을 전하는 것이 교회와 성도의 사명이다. 오늘 들은 말씀을 친지들에게 전하면 성공이다)
10.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으로 전하라. 아버지 같으면 이 말을 자녀들에게 어떻게 말할까. 상처를 싸매주고 용기와 격려를 주려는 마음.
11. 설교를 길지 않게 하라. (낮 예배 설교는 30분 정도)
* 전해야 할 중요 멧세지. 참고할 설교 중 중요 내용을 복사함.
* 제목 : (주제에서 발견한 전체 설교를 요약할 수 있는 제목을 선정)
* 전개 : (어떻게 설교를 할까를 적어봄) 서두, 이끌어 가기, 적용, 예화, 맺음 말.
* 본문 : 계 1 : 1 - 8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이는 하나님이 그에게 주사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그 종들에게 보이시려고 그 천사를 그 종 요한에게 보내어 지시하신 것이라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의 본 것을 다 증거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볼찌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인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터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를 인하여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주 하나님이 가라사대 나는 알파와 오메가라 이제도 있고 전에도 있었고 장차 올 자요 전능한 자라 하시더라
* 본문 요약 : 본문은 사도요한이 주님께 받은 계시의 말씀으로 복있는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지키는 자임을 말씀하며 이제 곧 때가 가까웠다고 말씀합니다. 평안하다 생각하며 안일에 빠진 성도들에게 주님의 재림을 깨우치고 깨어 바른 신앙의 성도가 되도록 인도합시다.
참고로 본문으로 작성한 설교 제 한 편과 그 아래 몇 분의 설교를 싣습니다.
계 1 : 1 - 8 때가 가깝습니다. 2025. 5. 4.
어떤 조종사가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때였습니다. 훈련 교관은 늘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서는 절대로 자신의 감각을 믿지 말라. 특히 악천후 속에서 비행할 때나 고도가 높아질 때, 공중의 한복판에서 항로를 이탈했을 때 더욱 자신을 믿지 말라. 그때는 계기판을 믿어라.”
다른 조종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조종사도 비행 감각에 대해서는 자신 만만해 했습니다. 훈련을 통해서 이미 비행 감각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시험 비행 때도 감각에 의지하여 무난히 비행에 성공하였습니다. 그런데 이 조종사가 한번은 비행기를 조종하며 가다가 좋지 않은 일기를 만났습니다.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이 조종사는 자신의 비행 지식을 총동원하였지만 점점 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방향조차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비행학교 훈련 교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계기판을 보아라. 계기판을 믿고 따라가라.”자신이 느끼던 것과 계기판의 기록은 판이했습니다. 이 조종사는 계기판을 보면서 방향과 고도를 잡고 침착하게 조종을 해서 곧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인생길을 가는 동안 악천후와 같은 상황을 만날 때가 허다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지식을 의존하거나 지혜를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길에 계기판은 내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인생의 계기판으로 삼아 말씀이 지시하고 있는 방향으로 길을 잡아나가야 제대로 갈 수가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인생의 바른 길을 보여주는 하나님 말씀을 따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사도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되고 유형생활을 했습니다. 그 유배 생활하는 중 기도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습니다. 계시록은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서 유배생활 할 때 받은 계시를 적어놓은 말씀입니다. 이 계시록의 말씀은 어렵고 난해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은 계시록에서 입문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이고 서론적이고 가장 쉬운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말씀은 “내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로 받은 말씀”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까왔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여기 “때가 가까웠다”라는 말은 “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실 시간이 가까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이 임박한 종말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서 종말신앙이 가장 좋은 신앙입니다. 이 종말신앙이 없으면 신앙인으로서 자신을 잘 지켜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며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잘 세우고 다지고 살아가는 방법이 세 가지입니다.
“읽는 일”
읽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거기다 성경을 읽는 일이 더 중요합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이유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이 이스라엘민족이 읽는 민족이라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은 교육 중 가장 큰 특징은 읽게 하는 교육입니다. 그것도 성경의 율법서를 아이들이 아주 어려서부터 읽게 합니다. 구약 신명기서를 보면 이 말씀을 미간에 붙이고 손목에 매고 문설주에 바르고 읽게 하고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매일 보고 읽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교육이 이 율법서를 아주 어려서부터 읽게 하는 것이 교육방법입니다. 왜 읽는 교육이 중요하냐 하면 읽을 때 많은 생각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을 때 눈으로는 책을 보지만 마음과 생각으로는 그 보는 내용이 머릿속에서 상상되고 영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때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생각되고 상상력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읽기를 싫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책이 잘 팔리지 않는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래서 많은 서점들이 문을 닫습니다. 책도 글씨가 많고 두꺼운 책은 더 읽지 않습니다. 책이 얇고 글씨가 커서 부담 없는 책들만 읽습니다. 그래서 한번 읽고 아깝지 않게 버릴만한 책들이 잘 팔린다고 합니다. 거기다 오늘은 이 TV가 문제입니다. 책을 읽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TV가 제공해 줍니다. TV는 읽는 수고 없이도 그냥 앉아서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책은 멀어지고 TV만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TV를 오래 보다 보면 생각이 없어진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오늘은 핸드폰을 들고 다니며 영상을 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결국 생각하지 않는 국민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읽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후손들에게 읽게 하라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이고 경거망동 하다가도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어린이 날을 맞으면서 우리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성경말씀을 읽게 해야합니다. 상을 주던지 매일 목표를 정해서 꾸준히 말씀을 읽게 하는 일이 자냐가 잘되는 길임을 잊지 맙시다. 요한은 이 계시의 말씀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말씀을 가까이 하면 시대를 알고 경건을 유지하며 종말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듣는 일”
성경 말씀을 읽는 일도 중요하지만 또 듣는 일도 중요합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주시는 말씀을 듣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시1:에 나오는 “묵상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말씀을 씹는 사람” 이란 뜻입니다. 말씀을 씹으며 읽다 보면 그 말씀의 맛을 알게 되고 그 말씀이 주시는 영감을 얻게 됩니다. 그 말씀에서 길이 나오고 방법이 나오고 뜻이 나오고 내가 할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성경 말씀은 영감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에 읽을 때 영감을 얻게 되고 음성으로 다가 옵니다. 그 음성이 나로 하여금 갈 길을 가게하고 깨달을 것을 깨닫게 하고 할 일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온갖 세상의 소리만 듣게 됩니다. 그래서 설교 말씀을 자꾸 들어야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영감이 주어지고 축복이 주어집니다. 말씀을 통해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는 일이 중요합니다.
"지키는 일"
여기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그렇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지킨다는 말은 내 뜻을 접고 듣고 보고 믿은 것을 그대로 따른다는 말입니다. 오늘 신앙인에게 고민이 있다면 읽고 듣고 알기는 하는데 지키기가 어렵다는데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너무 똑똑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알고 지켜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지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 어느 곳을 보아도, 말씀을 읽거나 듣는 것으로 그치라는 말씀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말씀은 실천하라고 주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따라 살아야 합니다. 성경에 약속된 축복은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란 말씀은 누구에게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싶다면 우리는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바로 그 자리가 천국의 자리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지켜 행하므로 약속하신 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실버만의 <오늘날 미국의 유대인>이라는 책에 의하면 20세기 인물 21인 가운데 15명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는데 노벨상 수상자의 22.3%를 유대인이 차지한다고 합니다.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는 미국이지만 미국을 지배하는 민족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최고의 복이라고 생각하고 돈의 지배력은 대단한데 뉴욕의 월스트리트(금융가)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미국 내 400대 재벌 가운데 유태계 회사가 23%, 유태인 임원은 36%, 미국 내 10억 달러 이상 자산가의 24%가 유대계라고 합니다. 금융은 물론 언론, 정치, 학술, 교육,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유대인은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미국 변호사 중 15%가 유태인이고 미국 의사 중 15%가 유태인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이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원인은 그들이 어릴 때 가정에서부터 받은 철저한 신앙교육에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교육방법은 '테필린' '쉐마', '학가다'라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반복과 암기교육입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이 기록된 테필린을 착용하고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기도 시간에 쉐마의 말씀을 외울 뿐 아니라 4살부터 13세까지가 무조건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토라(모세 오경 5843절)을 암송하게 하고 말씀의 아들로 세웁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학교에서도 오전에는 토라와 탈무드 교육을 하고 오후에 일반 학문을 공부한다고 합니다. 암송은 어휘력과 기억력, 독서 능력, 학습 능력, 주의력, 집중력을 향상시킵니다. 지금 세상은 소리 전쟁터입니다. "내 소리를 들으라"라고 수많은 소리들이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 승리하고 복된 삶을 살려면 오늘 성경은 말씀을 읽고 듣고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본분에서 중요한 교훈은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을 자세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장차 될 일을 사도 요한에게 환상으로 알려 주셨는데, 받은 계시를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합니다. '반드시'(데이)는 하나님의 섭리대로 일이 확실히 성취될 것을 나타냅니다. 속히'(엔 타케이)는 예기치 못한 때에 갑자기 성취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계시로 알려 주셨습니다. 계시(아포칼립시스)는 드러내는 것 씌웠던 것을 의미합니다. 면사포를 벗기는 상태를 의미하여 닫힌 뚜껑을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요한 사도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가리켜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7절)고 했습니다. 이 희망 때문에 성도들은 환난도 참고, 순교의 죽음 가운데서도 위안을 얻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우리 주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에 대하여 여러 번 약속해주셨습니다. 재림 신앙은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은 성경에서 300번 이상 말씀하셨으며, 이것은 매일 같이 사모하고 기억하라는 말씀으로 보여집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록은 사도 바울의 서신에만 50회가 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던 그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친히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무디는 그의 능력의 비밀을 묻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수년 동안 설교할 때마다 이 설교가 끝나기 전에 그리스도가 오실 수도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뛰어난 영국의 성경 주석가 캠벨 몰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매일 밤 내일이 마지막 날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중국에 들어갔던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나의 사역에 가장 큰 원동력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하여 각성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우리 주님은 영광 중에 다시 오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우리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오늘의 신앙을 어떻게 진단할 것입니까? 주의 재림에 대한 기대심은 찾아보기 어렵고, 재림에 대하여 말하면 우리들과 상관이 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풍조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학위논문에서 설문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교회는 재림 신앙이 차츰 퇴색해져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든지 아니 믿든지 주님의 재림은 예정되어 있고, 이 세상의 역사는 주님의 심판대 아래에 서는 날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늘 예배 때마다 신앙을 고백합니다. ‘전능하신 하나님 우편에 앉아 계시다가 거기로부터 살아있는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러 오시리라.’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예수님께 대하여 동정녀 탄생에서부터, 곧 말구유에서 나신 역사적인 예수 그리스도, 본디오 빌라도에게 고난을 받으사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 부활 승천하신 예수, 그리고 재림하시는 그리스도, 심판주로 오시는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학적으로 말한다면 종말론적 고백이라 하겠습니다. '재림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신앙고백에서 절대로 빠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셔서 오늘도 중보자가 되시고, 그리고 다시 오실 그리스도, 우리가 고백하는 그리스도는 실제적으로 오시는 그리스도입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만날 때마다‘주님이 곧 다시 오십니다’라 인사했습니다. 지금은 어렵고 힘들지만 주님이 오시면 모든 것을 갚아주신다고 믿었기에 고난과 핍박을 참고 견딘 것입니다. 예수님 재림의 때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말도 많이 합니다마는, 성경은 이를 언제 오신다고 명확하게 말씀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에 대해서는 언제나 겸손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한 것은 가르쳐주시고 필요치 않은 것은 가르쳐주시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필요치 않은 것까지 알겠다고 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의 알바 아니요(행 1:7)"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겸손하게 그런 줄 알고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만큼 알면 됩니다. '여기까지만 알아라' 하면 거기까지만 알면 지혜로운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죽을 날을 안다면 어떻게 될 것 같습니까? 내가 나의 죽을 날을 알고 있다면 좋을까요?
알아서 좋을 것 같으면 왜 가르쳐주시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사람에게 예수 믿으라고 전도했습니다. 그랬더니 "이 젊은 나이에 왜 예수를 믿습니까? 좀 더 놀다 한 육십이 넘으면 믿지요 뭐" 합니다. 글쎄요. 그 사람이 육십 넘어 산다는 보장이 있습니까? 어느 목사님은 자동차에 '예수님과 함께 운전하나니'라고 써 붙였답니다. 그리고 자동차에 앉을 때마다 기도를 한답니다.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라고. 가다가 '꽝'하면 기도할 시간이 없으니 미리 임종기도 하고 떠난다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에게는 종말론적 인식이 있어야합니다.
재림에 대한 바른 교훈은 어떤 것일까요? 주님의 재림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로, 눈으로 볼 수 있게 재림하십니다. 어떤 이단자들은 영으로 아무도 모르게 재림했다고 합니다. 영등포에 오신 재림 주, 가평에 오신 재림 주, 지리산에 오신 재림 주, 너무도 많은데 모두 가짜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전 인류가 볼 수 있게 임하십니다.‘너희가 올라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그러므로 지금 우리나라에 있는 자칭 재림 주들은 모두 가짜들입니다.
둘째로, 예고 없이 돌발적으로 오십니다. 이 말은 재림의 시간에 대한 예고가 없다는 뜻입니다. 미리 알려주고 어느 때 어느 장소에 오신다고 하시지 않으셨습니다.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살전5:3) 임산부에게 출산은 정해진 사실입니다. 예정일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출산일과 시간은 아무도 모릅니다. 재림은 정해진 사실이지만 정확한 때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미 선교회처럼 1994년 10월에 오신다든지, 어떤 이단자들처럼 공중에 와 계신 것이 아닙니다. 재림은 언제 어느 때든지 일어날 수 있는 예고 없는 사건입니다.
셋째로, 영광스런 모습으로 재림하십니다. 주님이 처음 오셨을 때에는 아주 초라한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베들레헴의 마구간에, 가난한 목수의 아들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재림은 다릅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살전4:16) 전 우주적입니다. 천사장이 함께 임합니다. 나팔과 호령 소리가 납니다. 온 세상의 지배자들이 다 두려워 떠는 영광스런 모습으로 오십니다.
넷째로, 심판적인 재림입니다. 처음 오신 주님은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죽으러 오셨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시는 주님은 심판주로 오십니다.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왼편에 두리라.”(마25:31-33) 주님의 재림으로 전 인류는 주님 앞에서 심판을 받습니다. 그리고 전 인류를 둘로 갈라놓을 것입니다. 천국 백성으로, 혹은 지옥 백성으로! 그리고 충성된 자에게는 그 모든 수고를 영원한 상으로 갚아 주실 것입니다.
모름지기 우리는 세상 앞에서 분명한 크리스찬의 자세로 살아갈 것입니다. 식당이든 길거리이든 어디에서든지 누구 앞에서든지 '나는 그리스도인이다'라는 분명한 자기 정체감을 가지고 살아갈 것입니다.
"내가 그리스도인이오"하고 나섬으로 때로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를 감추거나 속이면 하나님께 충성을 거부하는 것이 되며, 이 또한 심판의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디에서든 "나는 그리스도인이오"하고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 재림은 예고된 예정입니다.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역사는 마감됩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악한 자들이 심판을 받습니다. 주님이 오심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이 시작됩니다. 새로운 우주 질서가 시작됩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종말과 재림을 대비하며 삽시다.
주님은 내가 복음을 위해 일한 것, 수고한 것, 남몰래 어려운 이를 도와준 것, 선교를 위해 헌금한 것, 어려운 중에 헌신하며 봉사한 것, 교사와 찬양대로, 누군가에게 예수 믿으라 전도한 것, 주님 위해 일하다가 억울한 말을 듣고 욕을 먹고, 남몰래 흘린 눈물과 상처를 다 갚아주시고 상을 주십니다.
주님께서 강림하시고 반드시 우리를 심판하러 오십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백이 되어 하나님 앞에 바로 살기를 힘쓰며 그날에 상 받는 우리 모두가 되어야겠습니다. 영원한 천국과 재림의 날 받을 상급을 바라보며 성령 충만해서 힘써 복음을 전하며 삽시다. 재림을 믿는 성도답게 영혼을 구원하는 일에 힘쓰는 우리 모두가 되어서 내 모든 삶을 지켜보시는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 없도록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아가는 복된 믿음의 명문가문을 이루게 되기를 축복합니다.
* 찬송 : 180장 하나님의 나팔소리
* 찬양 : 나의 남은 생애는
강성찬목사 반드시 속히 될 일 계01장 01절 ~ 절
아프리카의 콩고에서 일하던 스티븐스 선교사의 수기 가운데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스티븐스는 콩고의 정글 한복판에 조그마한 오두막집을 짓고 살면서 지나가던 사람들에게 전도하였습니다. 천둥 번개를 동반한 폭풍우가 몰아치던 어느 날, 뜻밖에도 백인 청년 두 사람이 이 선교사의 오두막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들은 비바람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사실, 이 정글 속에는 길이라고 말할 수 있는 길도 없었습니다. 이들이 선교사의 오두막집 문을 두드리며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 저희들은 진스강을 찾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그 강으로 가는 길을 도무지 알 수가 없읍니다. 그 길을 가르쳐 주십시오." "유감스럽게도, 이 정글에는 길이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는 그 진스 강에 꼭 도착해야 합니다. 방향이라도 좀 가르쳐 주십시오" "여기에서는 방향도 가리킬 수가 없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이 때 스티븐스 선교사는 빙그레 웃으면서 대답했습니다.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제가 당신들을 데리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선교사는 청년두 사람을 데리고 가면서 나무와 각종 식물로 뒤엉긴 정글에서 인생을 설명했다고 합니다. 때때로 우리는 인생의 정글에서 길을 잃어버립니다. 갈 길을 알지 못합니다. 공포와 불안이 우리 마음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어떻게 갈 것인가를 고민하지 마십시오 길을 아는 그분이 내 곁에 계시다면! 그분이 내 손을 잡고 인도하신다면! 하나님이 당신 곁에 거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과 참으로 살아있는 교제를 나누고 계십니까? 당신이 하나님을 붙들고 간다면 인생의 수다한 결정의 길목 앞에서 방황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이 당신과 함께 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결정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인생의 안내자)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장차 임할 일에 대하여 알려주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회의적일 때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의 재림이 자기들이 살아 있는 동안에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기대와 소망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신들의 기대대로 예수님의 재림이 곧 이루어지지 않자 믿음이 약한 자들은 실망하여 재림 신앙에 회의를 갖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자들에게 믿음을 견고히 할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주의 재림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왜 재림을 빨리 하시지 않는지에 대해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강의 다름을 (벧후 3:8)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은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말씀하시고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이 한 사람이라도 더 회개하도록 오래 참으심을 말씀 하셨습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는 한 사람이라도 멸망 받는 것을 원치 않으시기 때문입니다. 그럼과 동시에 도적이 예고 없이 갑자기 오듯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도 예고 없이 갑자기 임할 것이라고 증거했습니다. 그때에는 하늘이 떠나가고 체질이 뜨거운 불로 풀어지고 땅과 그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인간의 숨겨졌던 모든 죄악이 드러나게 되고 죄로 오염된 우주 만물이 불에 녹아져 정제되어지고 새 하늘과 새 땅이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이 도적같이 임하여 세상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므로 우리 성도들은 그날을 기다리며 준비하여야 합니다. 성도는 그날에 축복에 동참하기 위해서 항상 깨어 있는 신앙의 삶을 살아야 하며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성결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장차 될 일을 사도 요한에게 자세한 환상으로 알려 주셨는데, 받은 계시를 반드시 속히 될 일이라고 합니다.
'반드시'(데이)는 예언적 필연성을 내포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섭리대로 일이 확실히 성취될 것을 나타냅니다
속히'(엔 타케이)는 예기치 못한 때에 갑자기 성취되는 것을 나타냅니다. 인간의 시간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 측면에서의 시간적 개념으로(벧후3:8) 하나님의 갑작스런 개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계시의 성취와 그 확실성을 나타냅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은 하나님의 계시가 미래에 성취될 사건임을 암시합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은 심판의 때 곧 마지막 때에 될 일입니다. 끝 날은 재난으로 시작되고(마 24:8,막13:8) 무서운 날이며 (습1:14,욜2:1) 세상이 무너져 버리는 날이며 (사13:10, 욜2:30-31,3:15) 모든 인간관계가 파괴되는 날입니다 (슥14:13,말3:1-3,사66:15-16)
반드시 속히 될 일은 성도의 구원이 완성되는 일입니다
반드시 속히 될 일을 계시로 알려 주십니다.
계시(아포칼립시스)는 드러내는 것 씌웠던 것을 벗기는 것 나타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일반적으로는 면사포를 벗겨 내는 상태를 의미하여 비밀의 덮은 것을 벗는 일 공공연하게 드러내는 것이며, 닫힌 뚜껑을 열어 보이는 것입니다.
성경적인 용례는 하나님의 뜻을 드러내는 것((갈 2:2) 하나님의 진리를 사람들에게 드러내는 것(갈 1:12) 설교자의 설교 내용(고전 4:6) 그리스도께서 인간을 입으시고 오심(롬 16:25-26,엡 3:3) 재림으로 인한 심판(롬 2:5) 찬송과 영광을 드러냄(벧전 1:7) 은혜의 나타남(벧전 1:13) 기쁨의 드러남(벧전 4:13) 성령의 활동에 관련 합니다 (엡 1:17)
계시의 중심은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요한 사도는 '일곱 교회', 곧 전 세계에 있는 시공을 초월한 모든 교회에 보낸 인사의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보여 주신 계시를 통해 장래 일에 대해서 소개하면서 무엇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를 충분하게, 그리고 완벽하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초림의 예수님에 대하여 말씀 합니다.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분입니다.
'증인'이란 눈으로 보고 귀로 들은 것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를 위해 '충성된 증인'이 되셨다는 말씀입니까? 예수님은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우리 아는 것을 말하고 본 것을 증거하노라'(요 3:11)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게는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라'(요 18:37)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아시는 유일하신 분입니다. 때문에 하나님과 하나님의 뜻에 대한 그분의 증거는 가장 충성된 증거가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고전 15:20). 그러므로 죽으심과 사심에 대한 증인이 되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왕권을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 시니 모든 영광의 증인이 되십니다.
일본의 기독교 작가인 엔또 슈샤꾸의 작품에 <침묵>이라는 소설이 있습니다. 일본에 처음으로 천주교가 들어가던 때의 이야기를 엮은 소설입니다. 말 못할 박해를 받으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끝까지 지켜서 순교해 가는 사람들, 약해서 굴복하고 배교하는 사람들, 이들을 지켜보는 신부의 고뇌와 회의 이런 것을 밀도 있게 그린 작품입니다. 예수 믿기로 작정한 사람들이 말로 표현하기조차 끔찍스러운 온갖 박해와 고문을 다 당하면서 예수를 부인하라는 협박을 받습니다. 이를테면 썰물 때에 바닷가에 십자가를 죽 세워 놓고 거기에 사람을 비끌어 매어 둡니다. 밀물 때가 되어 바닷물이 밀려들어 오면 잠겨서 죽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부인하면 살 수 있는데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처럼 순교해 갑니다. 이 사람들에게 믿음을 심어 주었던 포르투갈 신부는 너무도 답답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합니다. 능력을 나타내 주옵소서, 저들을 구원해 주옵소서하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능력을 나타내시지 않습니다. 신부는 피땀을 흘리며 더욱 안타깝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왜 침묵하고 계시는 것입니까? 그러자 그의 귀에 들려오는 뚜렷한 음성이 있었습니다. 나는 침묵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을 뿐이다. 그렇습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의 말씀입니다. 그러기에 그리스도를 위하여 당하는 고난에 하나님이 함께 하십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멍에를 메고 나아갈 때, 그 멍에는 어떠한 고난일지라도 쉽고 가볍고 기쁜 멍에가 되는 것입니다. (고통을 함께 나누고 있을 뿐이다) 우리와 고통을 함께 참여 하시는 주님은 우리의 참된 증인이 되십니다.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시고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분입니다.
참사랑은 말없이 자신을 희생합니다(사 53:4, 5).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위해 대신 허물을 뒤집어쓰고 사랑하는 이를 살리려 합니다(사 53:6). 곤욕을 당해도 그를 위해 굳게 입을 다물고 맙니다(사 53:7).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그런 사랑의 주님이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기에 자기 목숨을 바쳐 피 흘리시고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셨습니다(사 53:10-12).
이러한 그리스도의 희생에 의해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을 위한 왕 같은 제사장 나라가 되며 그의 거룩한 백성이 됩니다(출 19:6; 벧전 2:9). 여기서 우리가 기억할 것은 산 제사장이 되는 것은 특정한 누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피로 죄에서 해방된 '우리', 곧 모든 그리스도인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하나님을 위해 와 같은 제사장의 임무를 실행해야 합니다. 만인이 다 제사장입니다. 그리스도의 공로를 힘입어 누구나가 다 하나님 앞으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히 4:16).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길을 열어 놓으셨습니다(히 10:19-22). 그러므로 이젠 거룩한 나라의 제사장답게 참 마음과 온전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믿는 도리를 다하고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에 힘써야 합니다.
후안 까를로스는 주님과 동행하는 삶에서 말 합니다. 하늘에는 지구상에 살았던 모든 사람들의 신상명세서가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식으로 그것을 기록하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되던 당시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계산하셔야 할 갖가지 것들을 모두 책에 기록하고 계시는 것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신상명세서 첫 장에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을 것입니다.
"...머리카락은 6,276개..." 이런 식으로 모든 것이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저에 대하여는 더 이상 물을 것이 없습니다. 두 번째 페이지에는 하나님의 모든 법들, 특히 십계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다음 페이지부터는 제가 각 계명을 범할 때마다 표시를 해 놓을 수 있는 칸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저의 신상명세서는 상당히 두껍습니다. 맨 마지막 페이지는 차용증서입니다.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 제1계명을 8,322회 범했으며, 제2계명을 5,456회 범했고, 제3계명은...제4계명은...그러므로 곧장 지옥으로 가야 한다." 그런데 제가 주님과 함께 죽었기 때문에 주님은 저의 신상명세서를 꺼내 드셨습니다. 그리고 커다란 스탬프 도장에 자신의 피를 듬뿍 묻히시더니 매 페이지마다 "페기 됨"이라고 찍으셨습니다. 그리고 주님은 쓰레기는 하늘나라에 두실 수가 없기 때문에 영원히 버리셨습니다. 주님은 저의 신상명세서를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셨습니다. 누구든지 저의 신상명세서를 보고 싶으면 예수님의 십자가를 넘어가야 하는데 그것은 이미 영원히 지워진 사건입니다. 주님을 찬양하십시다. 이제 우리는 갚지 못할 빚을 지은 존재들이 아닙니다.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하나님뿐만 아니라 우리자신과도 완전한 평화를 누리며 살게 됩니다.
주님께서 자기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 시켜 나라와 제사장 삼으시고 나라가 임하기를 기다리게 하셨으니 이 일이 반드시 속히 될 일임을 믿고 준비하는 모두가 됩시다.
다시 오실 예수님입니다.
요한 사도는 다시 오실 예수님을 가리켜 '볼지어다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7절)고 했습니다. 이는 예수께서 수난 당하시던 그때 대제사장 앞에서 스스로 확증하신 바이기도 합니다(막 14:62). 다시 오실 주님은 구름을 타고 오십니다(단 7:13). 그는 모든 크리스천의 희망입니다. 이 희망 때문에 성도들은 환난도 참고, 순교의 죽음 가운데서도 위안을 얻습니다.
그러나 다시 오시는 예수를 두려움과 애곡으로 맞이하게 될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입니다(7절). 이는 다만 골고다 언덕에서 못 박은 사람들만 의미하지는 않습니다. 메시아를 거부하고 범죄 한 모든 이들은 자신들의 죄를 깨닫고 애곡하고야 말 것입니다.
재림을 아는 지식이 귀중한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황금은 우리를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어느 때라도 오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위해 일을 할 것입니다.
무디는 그의 능력의 비밀을 묻는 질문을 받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수년 동안 설교할 때마다 이 설교가 끝나기 전에 그리스도가 오실 수도 있다고 생각해 왔습니다."
뛰어난 영국의 성경 주석가 캠벨 몰간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매일 밤 내일이 마지막 날 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잠이 들었습니다".
지대한 영향을 끼친 학자요 전도자인 R. A. 토레이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재림의 진리는 성경의 진리 중 가장 귀중한 것입니다." 고아들의 아버지 조지 뮐러는 하나님께서 주 예수의 재림의 진리를 깨닫게 해주셨을 때 자신의 심정이 어떠했는지를 말했습니다. “잠들어 있는 세상을 생각하니 내 속에서부터 죄인에 대한 사랑이 끓어올랐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중국에 들어갔던 허드슨 테일러는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주님의 재림은 나의 사역에 가장 큰 원동력이었습니다."
장로교의 강력한 전도자 윌버 채프만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주님의 재림을 설교하는 이유는 재림의 사실이 나의 사역 전체를 변화시켰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놀라운 사실에 대하여 각성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다시 오실 것입니다. 재림이 있기 이전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할 일을 알려주신 것은 감사할 일입니다. (황금보다 귀중한 지식 )
재림이 반드시 속히 될 일이니 확신하고 준비하는 모두가 됩시다.
보이시려고 지시하신 것입니다.
계시의 전달 경로는 하나님께서 계시의 전달자이며 중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주셨으며, 예수 그리스도는 천사를 통해 자신의 종인 요한에게 전하셨으며, 그 종 요한은 편지를 받는 자들에게 자신이 받은 계시를 전합니다.
계시의 목적은 그 종들에게 보이기 위함이라고 합니다. 이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환난의 날들 속에서도 자기 갈 길을 찾고 무수한 고난들 속에서도 위로를 받아 힘 있게 일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어떤 조종사가 비행학교에서 훈련을 받을 때였습니다. 훈련 교관은 늘 이렇게 강조했습니다.
“비행기 조종석에 앉아서는 절대로 자신의 감각을 믿지 말라. 특히 악천후 속에서 비행할 때나 고도가 높아질 때, 공중의 한복판에서 항로를 이탈했을 때 더욱 자신을 믿지 말라. 그때는 계기판을 믿어라.”
다른 조종사들과 마찬가지로 이 조종사도 비행 감각에 대해서는 자신 만만해 했습니다. 훈련을 통해서 이미 비행 감각을 키웠기 때문입니다. 시험 비행 때도 감각에 의지하여 무난히 비행에 성공하였습니다. 이 조종사가 한번은 비행기를 조종하며 가다가 좋지 않은 일기를 만났습니다. 앞뒤를 분간할 수 없는 짙은 안개 속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이 조종사는 자신의 비행 지식을 총동원하였지만 점점 더 오리무중이었습니다. 방향조차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때 비행학교 훈련 교관의 말이 떠올랐습니다.
“계기판을 보아라. 계기판을 믿고 따라가라.”
자신이 느끼던 것과 계기판의 기록은 판이했습니다. 이 조종사는 계기판을 보면서 방향과 고도를 잡고 침착하게 조종을 해서 곧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인생길을 가는 동안 악천후와 같은 상황을 만날 때가 허다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내 지식을 의존하거나 감각을 따르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 인생길에 계기판은 내가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말씀이 있습니다. 이 말씀을 인생의 계기판으로 삼아 말씀이 지시하고 있는 방향으로 길을 잡아나가야 제대로 갈 수가 있습니다.(예화뱅크-인생의계시판)
말씀의 게시판은 종말이 반드시 속히 임한다고 합니다. 종말이 반드시 속히 될 이요 종말에 주님 다시 오신 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맞을 준비를 해야 합니다, 등과 함께 기름을 준비한 지혜로운 처녀들 처럼 (마25:1-13) 깨어 있는 집주인처럼(마 24:43) 깨어 있는 문지기처럼(막 13:34) 준비하며 잘했다 칭찬 받고 생명의 면류관 받는 모두가 됩시다.
안효관목사 읽고 듣고 지키는 것이 복 계01장 01절 ~ 3절
어떤 아가씨가 책을 한 권 선물을 받았습니다. 선물을 받았을 때에는 너무 기쁘고 신이 나서 책을 열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열심히 읽으려고 해도 책이 너무 재미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몇 장 읽다가 그만 책을 덮고는 책장에 꽂아만 두었습니다.
몇 달 후 그 아가씨가 여행을 하다가 한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아가씨가 청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제 서재에 있는 어떤 책의 저자 이름이 당신의 이름과 똑같답니다.” “그래요? 그 책의 제목이 뭐지요?” 아가씨가 그 책의 제목을 말해 주자, 청년이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상할 것도 없지요. 그 책은 바로 내가 썼으니까요.”
아가씨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그 책을 꺼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난번에 읽을 때에는 그렇게도 지루하고 재미없던 책이, 이제는 지금까지 읽었던 그 어떤 책보다 재미있었습니다.
여러분, 왜 그 책이 아가씨에게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책이 되었습니까? 책장에 꽂아둔 사이에 책의 내용이 바뀌었겠습니까? 책의 내용이 바뀌어서 재미있어진 것은 분명 아닙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쓴 것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 전까지는 전혀 모르는 사람이 쓴 것이기 때문에 재미가 없었는데, 같은 내용의 책인데도 사랑하는 사람이 쓴 책이기에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지난 1년 동안 성경읽기 운동을 펼쳐왔습니다. 우리 교회 세례교인이 약 500명쯤 되니까, 세례교인 1인당 1번씩 신구약 성경을 완독하면 500독은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500독 릴레이를 시작했습니다. 주보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이번주일까지 해서 모두 223번 성경을 완독했습니다. 성경을 여러 번 완독하셨음에도 ‘성경읽기표’를 제출하지 않은 분들도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런 분들까지 하면 실제로 우리 교인들이 읽은 성경통독 숫자는 더 많을 것입니다. 정말 많은 분들이 열심히 성경을 읽었습니다. 많은 분들로부터 오랫동안 신앙생활 해 왔지만 신구약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본 것이 처음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보를 따라 성경을 읽으신 분들까지 포함하면 올해 안에 300독 이상은 충분히 될 것 같습니다. 성경읽기 운동은 평생 계속되어야 하겠지만, 메달을 주고, 5번 읽은 분에게는 십자가 금뺏지를 주는 것은 500독이 채워질 때까지만 하겠습니다. 그게 내년 상반기에 끝이 날지, 아니면 후반기까지 가야할지는 모르겠지만, 500독만 채워지면 끝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 성경을 한번도 읽지 않으신 분들도 있지요? 글씨를 읽지 못해서 못 읽는 분이나 연세가 드셔서 눈이 침침해져서 성경을 읽을 수 없는 분들은 제외하고, 글씨를 읽을 수 있는 분들 가운데서 아직까지 읽지 못하신 분들 <한 번 추궁해 볼까요> 왜 읽지 못하셨나요? 바빠서요? 아니면 성경을 읽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계신가요?
혹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이 식어졌기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렇게 가정해 봅시다. 지금 연애하고 있는데, 사랑하는 애인이 매일 세 장씩 연애편지를 써 보내온다고 해 봅시다. 여러분, 그 편지를 읽겠습니까? 안 읽겠습니까? 바쁘다는 핑계로 그 연애편지를 뜯어보지도 않고 상자에 차곡차곡 쌓아놓기만 하겠습니까? 아마 그럴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아무리 바빠도, 잠을 자지 못할지라도 그 편지를 꼭 읽을 것입니다. 장편소설처럼 써 보내와도 읽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편지를 받았다면 차 안에서도 읽을 것이고, 직장에서 사무를 보다가 잠깐 틈을 내서라도 읽을 것입니다. 심지어는 남들이 볼까봐 부끄럽다면 화장실에 가서라도 읽을 것이고, 잠자기 위해서 이불을 펴놓고도 그 편지는 꼭 읽고 잠을 잘 것입니다. 그렇지요? 글씨를 모르는 사람은 글씨를 아는 사람에게 찾아가서 읽어달라고 졸라서라도 읽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연애편지입니다. 나를 사랑해서 보내주신 연애편지인데도 그것을 읽고 싶은 마음이 없는 것은 사랑이 식었기 때문입니다.
오늘은 우리 한국교회가 지키는 성서주일입니다. 우리 한국교회에 성서주일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이지 모릅니다. 오늘만이라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새로운 각오를 굳게 하자는 뜻에서 만들어진 뜻 깊은 주일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의 강림을 기다리는 이 강림절 절기에 성서주일이 있다는 것도 뜻 깊은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은 사도 요한이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밧모섬에 유배되어 있을 때에 기록한 책입니다. 계시록 1:9-10절에 의하면, 요한이 유배지 밧모섬에서 주의 날(주일)에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던 도중에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들었고, 그 보고 들은 말씀을 자세하게 기록해 놓았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을 기록하면서 사도 요한은 이렇게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우리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입니다. 그래서 우리 신앙에서 말씀처럼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미신적인 종교와 살아 있는 우리 기독교 신앙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가장 중요한 차이점은 ‘기독교는 말씀의 종교이고, 미신적인 종교에는 말씀이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미신적인 종교에서는 하나님이나 신의 뜻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단지 신의 능력이 중요할 뿐입니다. 그래서 신의 능력을 통해서 문제를 해결 받으면 그것으로 끝입니다. 신의 뜻을 따르기 위해서 신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마치 슈퍼맨처럼 신이 능력으로 역사해서 자신의 소원만 이루어주면 그것으로 고마울 뿐입니다. 그 이상이 없습니다.
그러나 기독교는 그런 종교가 아닙니다. 물론 우리 신앙인들도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능력을 받아서 살아가야 합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에서 그것보다 더 근본적이고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사람들이 신앙인들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해도 어려운 문제만 해결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그 어려움 속에 들어 있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나에게 무어라 말씀하시는가?’ 그것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신앙인이라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발견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으면, 하나님을 믿으면서도 그 신앙이 미신적인 신앙에 머물러 있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성경의 표현으로 한다면 ‘어린아이의 신앙’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한다면 다음 세 가지를 꼭 마음에 새겨 두어야 합니다. 그게 바로 사도 요한이 말씀한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가장 먼저 우리는 말씀을 읽어야 합니다. 말씀을 읽어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어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데에도 방법이 있습니다. 주로 세 가지 방법인데, 첫 번째는 다독이고, 두 번째는 정독이고, 세 번째는 통독입니다.
첫 번째 방법은 ‘다독’(多讀)입니다. 많이 읽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 500독 릴레이를 하는 것은 다독을 하자는 것입니다. 많이 읽자고 그런 운동을 펼쳤습니다. 성경을 많이 읽어서 나름대로 성경의 중심을 잡을 수 있을 만큼 읽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권해드리고 싶습니다. 최소한 우리의 신앙의 나이만큼은 우리가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신앙생활한지 1년이 되었으면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 번은 읽어야 합니다. 신앙생활한지 10년이 되었으면 10번은 읽어야 합니다. 1년에 한번씩은 성경을 읽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우리 주보에 나와 있는 성경공부에 따라서 꾸준히 성경을 읽어 가면 1년에 한번씩은 성경을 읽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 몇 십 년씩 해놓고서도 성경 한번 읽지 않았다면, 신앙생활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았으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나중에 하나님 앞에 가서 부끄럽지 않겠습니까? 최소한 신앙의 나이 값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을 읽는 두 번째 방법은 ‘정독’(精讀)입니다. 정독이라는 것은 성경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도록 자세하게, 깊이 있게 읽는 것을 말합니다. 흔히 그것을 ‘묵상’이라고 말합니다. 성경을 많이 읽는 ‘다독’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말씀 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묵상해야 합니다. 정독함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는 것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 성경을 암송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암송해 놓으면 그 말씀이 꼭 필요한 상황에서 좌우에 날 선 검과 같이 역사하여 우리의 마음과 우리의 삶에 능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 위해서 또 하나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성경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 시대, 우리 문화 속에서 주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2000년 전, 그리고 구약 같은 경우에는 약 3000년 전의 시대적인 상황 속에서, 그리고 유대민족의 문화 속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시대와 문화가 다른 배경에서 주어진 말씀들을 제대로 깨닫기 위해서는 말씀을 공부해야 합니다.
성경을 읽는 세 번째 방법은 성경 통독입니다. 어린 아이들은 음식을 먹을 때에 자기가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먹습니다. 그러나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여러 가지 음식을 골고루 먹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한 가지 음식만 먹으면 다양한 영양분을 섭취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영양분을 섭취하지 못하면 영양실조에 걸리거나 비만에 걸려 건강을 해치게 됩니다.
성경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분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성경만 읽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영적인 영양실조에 걸리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경 66권을 주신 것은 그 모든 책에서 우리에게 주시고자 하는 말씀의 의도가 분명 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어렵더라도 읽어야 하고, 때로는 자신의 맘에 맞지 않는 말씀이라도 읽어야 합니다. 성경을 내 입맛대로 골라 읽어서는 안 됩니다. 내 생각과 내 뜻을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도록 조절해 나가기 위해서 모든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인 설교를 경청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 “말씀을 읽는 자 뿐만 아니라 말씀을 듣는 자들이 복이 있다”고 말씀했습니다. 우리는 선포된 말씀인 설교를 잘 들어야 합니다. 강단에서 선포된 설교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까이 한다는 것은 - 이론적으로는 가능한 일인지 몰라도 - 실제적으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여러분, 어떤 사람의 신앙이 아름답게 성장하는지 아십니까? 설교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설교 말씀에 귀 기울여 잘 듣는 사람의 신앙이 성장합니다. 설교를 듣지 않는 사람은 내 스스로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어도 신앙이 성장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쉽게 하나님의 말씀을 접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사단이 가장 많이 쓰는 고도의 전략이 하나 있는데, 그게 바로 설교를 듣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말씀을 읽지 못하게 하는 방법도 사용하지만, 말씀을 듣지 모하도록 우리의 귀를 막게 만듭니다.
그러면 사단이 설교를 듣지 못하도록 어떻게 우리의 귀를 막는가?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 말씀을 선포하는 설교자와 인격적인 관계를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설교자를 인격적으로 무시하거나, 신앙적으로 무시하게 만듭니다. 설교자의 약점을 부각시켜서 설교자에게 실망하게 만듭니다. 그것도 아주 사소한 일로 인해서 설교자와의 관계를 나쁘게 만듭니다.
설교자와 인격적으로 관계가 나빠지면, 아무리 좋은 설교를 하더라도 말씀이 귀에 들려오지 않습니다.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그렇게 좋은 말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씀을 선포하셨는데도, 바리새인이나 서기관들은 예수님과 인간적인 관계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다른 사람들처럼 말씀을 듣긴 들어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그 말씀에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종종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6:6절에 보면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 여기에 “함께 하라”는 말씀은 성경언어로 말하면 ‘코이노니아’라는 말입니다. 코이노니아라는 말이 우리 성경에 ‘교제, 사귐, 나눔’ 등으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코이노니아’라는 말은 가장 소중한 것 - 생명까지도 - 서로 나누는 것을 말합니다.
말씀을 가르침 받는 사람은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과 모든 좋은 것을 서로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생명까지도 나눌 수 있는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 주위에는 목사와 좋은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불편한 관계에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됩니다. 그런 분들은 교회에는 다니고 있을지라도 신앙생활이 즐겁지 않습니다. 신앙이 자라지도 않습니다. 신앙적으로 방황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신앙에서 멀어진 사람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단의 전술에 빠져든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과 멀어지면, 하나님이 손해이겠습니까? 우리가 손해이겠습니까? 둘 다 손해입니다. 그러면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와 인격적으로 멀어지거나 사이가 나빠지면 목사가 손해이겠습니까? 여러분이 손해이겠습니까? 둘 다 손해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으려고 귀를 막아버린 사람들을 앞에 놓고 설교하는 목사도 못할 짓이고, 설교를 듣지 못함으로 영의 양식을 얻지 못해 영양실조에 빠져가는 교인들도 손해입니다.
목사가 인격적으로 훌륭하기 때문에 좋은 관계를 맺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회적으로 지위가 높기 때문에 대우하거나, 가까이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 직책을 맡은 사람이기 때문에 - 내가 말씀을 잘 받아먹고 내 신앙이 자라고 내 영혼이 복을 누리기 위해서 말씀을 선포하는 목사와 좋은 관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말씀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말씀을 읽고 듣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말씀을 읽는 것도 중요합니다. 또 말씀을 잘 듣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읽고 들은 말씀을 순종하여 실천하지 않으면 그 모든 것이 다 헛것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에 보면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이 복이 있다” 하는 말씀으로 끝나지 않고,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말씀을 듣기만 하고 행하지 않는 사람을 가리켜서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들은 그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그 실천하는 일로 인하여 복을 받는다.’고 말씀해 주었습니다.(약 1장)
그렇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 때,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자리가 바로 ‘천국’ -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대한민국 국민입니다. 대한민국 국민은 대한민국의 주권과 법을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일본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일본의 법을 따를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오직 대한민국의 법만 필요하고, 대한민국의 법만 따르면 됩니다. 대한민국의 법을 따르지 않을 사람이 갈 곳은 두 곳밖에 없습니다. 어디이겠습니까? 다른 나라로 이민을 가든지, 아니면 감옥에 가야 합니다. 대한민국 안에 살면서 대한민국 국적을 가졌다면 우리나라의 법을 반드시 따라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입니다. 하나님 나라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이 곧 법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나라의 시민들이라면, 그 나라의 법인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떠나 살면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시민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성경 어느 곳을 읽어보아도, 말씀을 읽거나 듣는 것으로 그치라는 말씀은 단 한 구절도 없습니다. 말씀은 실천하라고 주셨습니다. 그 말씀대로 따라 살아야 합니다.
그 말씀에 순종하여 사는 사람에게는 하늘의 복이 임할 것입니다. 성경에 약속된 축복은 그 말씀을 따라 사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입니다. 우리가 좋아하는 “네 광주리와 떡 반죽 그릇이 복을 받을 것이며 네가 들어와도 복을 받고 나가도 복을 받을 것‘이란 말씀은 누구에게 주신 것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한 사람에게 주시겠다고 약속하신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깊은 사랑과 은혜를 체험하고 싶다면 우리는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실천하는 바로 그 자리가 천국의 자리이기 때문에, 바로 거기에서 하나님의 능력과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시편 119:105절에 보면 시인은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의 빛”이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길을 인도하는 빛입니다. 캄캄하고 어두운 인생길을 걸어갈 때에 우리가 가야할 길을 비춰주는 등불은 오직 하나 -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말씀의 빛이 비춰주는 대로 따라 살아가는 사람은 천국의 복을 누리며 살게 될 것이지만, 말씀의 빛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사는 사람은 여전히 영적인 어두움과 고통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모두 시인과 같이 고백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의 말씀은 내 발의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우리는 모두 이런 고백으로 더욱 말씀을 가까이 하는 삶을 살아가야 가시기 바랍니다. 말씀 읽는 것을 게을리 하지 마시고, 선포된 말씀인 설교에 귀 기울여 말씀을 들을 때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읽고 들은 말씀을 순종하심으로, 순종하는 자에게 약속하신 모든 성경의 약속과 축복을 내 것으로 누리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축원 드립니다.
김충식목사 하나님께 복 받을 사람의 특징 계01장 01절 ~ 3절
요한계시록은 마지막 때에 되어질 일들을 기록한 책입니다. 요한계시록에는 일곱가지 복의 기록이 있습니다. 첫째, 1장 3절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둘째, 14장 13절 “지금 이후로 주 안에서 죽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셋째, 16장 15절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에 깨어있어 자기의 부끄러움을 보이지 아니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 넷째, 19장 9절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들이 복이 있다” 다섯째, 20장 6절 “첫째 부활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 여섯째, 22장 7절 “예언의 말씀을 가감 없이 지키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 일곱째, 22장 14절 “죄로 더러워진 두루마기를 빠는 사람들이 복이 있다”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복에 대한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은 마지막 때에도 그리스도인들에게 복 주기를 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발견합니다. 따라서 계시록에 나타난 일곱 가지의 복을 통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인에게 주시는 구체적인 축복을 말씀드리려 합니다.
첫째로,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을 보호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첫째와 일곱째 복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삶을 보호하시는 분이심을 말씀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간혹 주머니 속에 부적을 넣고 다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부적을 가지고 다니면 나쁜 일이 생기지 않는다고 막연하게 믿기 때문입니다. 현대를 사는 젊은이들도 첨단과학시대를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적을 수첩이나 지갑 속에 가지고 다닙니다. 집에도 부적을 붙여놓고 신주를 모시기도 합니다. 어느 집을 가보면 대문에 북어 대가리를 걸어 놓은 집도 있습니다. 먼지가 쌓이고 냄새가 나도 못 뗍니다. 떼어 버리면 나쁜 일이 생길 것 같아 서입니다. 그러나 알고보면 부적은 종잇조각에 불과하고, 신주는 단지에 불과하며 북어는 죽은 고기에 불과합니다. 그런데 기독교인들도 이와 비슷한 믿음을 가진 사람이 있습니다. 성경의 좋은 말씀을 상 위에 펼쳐놓거나 액자로 만들어 걸어놓으면 그 액자나 성경 말씀이 우리를 보호하여 주는 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런 책이 아닙니다. 주일 예배드리러 올 때에 먼지 묻은 성경책을 털어서 가지고 왔다가 집에 가서 다시 먼지가 쌓이도록 두었다가 일주일 만에 가지고 오는 그런 책이라면 성경은 소설책이나 역사책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것 자체가 복을 주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복주시기를 원하시는데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사람들을 보호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아는 것만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이 생활화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말씀이 우리들의 삶을 보호해 주실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당신을 주심으로 우리를 보호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피 흘리셨다는 것은 ‘당신을 우리들에게 주셨다’라는 의미가 됩니다. 중국 운남성 박물관을 가면 그 앞에 화단이 하나 있습니다. 거기에 기이하게 생긴 동상이 있습니다. 지나가면서 ‘저것이 무엇일까’ 하였습니다. 동상은 구리로 만든 것이었는데 커다란 암소 한 마리가 가랑이 사이에 송아지 한 마리를 보호하고 그 뒤에는 호랑이가 꼬리를 물고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의미인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옛날에 이 동네에 호랑이가 나타나서 소를 습격하였는데 어미소가 새끼를 보호하려고 자기는 뜯어 먹히면서도 송아지를 보호하였기 때문에 그것을 기념하면서 소의 동상을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박물관에 들어가 보니 여러 물건을 파는데 그 동상의 모형도 있었습니다. 그 박물관에서는 대표적인 보물이었습니다. 순간적으로 하나님이 성도를 사랑하는 것이 연상되었습니다. 어미소가 자기 새끼를 보호하고 살리려고 하는 의지를 가진 것 이상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도 당신의 목숨을 희생시켜 우리의 죄를 씻어주시면서까지 성도들을 보호하십니다. 누가복음 15장에 잃은 양의 비유가 있습니다. 한 마리의 양이 길을 잃었습니다. 방향감각도 없고 어리고 볼품이 없는 양입니다. 목자에게 한 마리 정도는 없어도 좋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끝까지 어린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오는 장면을 읽을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어느 날은 감람산에 올라가셔서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면서 탄식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내가 너를 보호하려는 마음이 얼마나 많이 있었느냐 그런데 너희들은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한 자들을 돌로 치고 있구나.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으듯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마23:37) 하셨습니다. 어미소가 새끼를 보호하고 암탉이 새끼를 날개 아래 모아 보호하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주님께서 사랑하는 백성을 보호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신명기 32:10 이하를 보면 “여호와께서 그를 황무지에서, 짐승이 부르짓는 광야에서 만나시고 호위하시며 자기의 눈동자같이 지키셨도다 그의 날개 위에 그것을 얹은 것같이 여호와께서 홀로 그를 인도하셨고 그와 함께 한 다른 신이 없었도다”하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을 자기 눈동자같이 아끼시고 마치 독수리가 새끼를 보호하듯 하십니다. 이스라엘이 갈팡질팡 하고 있을 때에 하나님은 독수리의 어미처럼 그들을 날개 위에 얹으시고 보호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들은 삶속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반드시 보호해 주시는 분이심을 믿어야 할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성도들의 인생을 책임지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셋째와 넷째 복은 하나님께서 성도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분임을 말씀합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은 이가 복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진정한 기쁨을 주시고, 축복의 삶을 살게 해 주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셨다는 확신을 가진다면 성도들의 인생을 책임져 주신다는 것도 믿어야 할 것입니다. 서강대학교 교수였던 고 장영희 교수가 쓴 ‘살아온 기적, 살아갈 기적’이라는 수필집이 베스트셀러로 많이 팔리고 있습니다. 잔잔한 감동을 주는 좋은 책입니다. 그 책 중에 ‘네가 누리고 있는 축복을 세워보아라’ 하는 글이 있습니다. 장영희 교수는 1급 신체 장애인입니다. 어릴 때에 소아마비로 장애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러나 열심히 공부하여 미국에 있는 뉴욕주립대학에서 학위를 받고 서강대학교 교수가 된 분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그 분을 볼 때마다 안쓰러운 시선을 보내면서 ‘교수님은 천형을 받으셨는데 얼마나 힘드시겠어요.’ 한답니다. 그러나 자신은 천형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오히려 천혜를 받았다고 합니다. 자신은 살아가면서 최소한 몇 가지의 복을 받은 사람이라 믿고 있습니다. 하나는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큰 복이라고 합니다. 개나 고양이나 다른 동물로 탄생한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태어난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둘째는, 자신의 평생소원이 사람들을 가르치는 직업을 갖고 싶었답니다. 대통령도 부럽지 않고, 국회의원도 부럽지 않고, 장관도 부럽지 않고, 어디서든 가르치는 일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한국에서 명문대에 속하는 서강대학교에서 똑똑한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는 것이 복이라고 합니다. 셋째는, 자신의 삶의 주변에 좋은 사람들을 많이 붙여주신 것이 복이라는 것입니다. 부모님을 비롯하여 형제들 그리고 지금도 주위에 있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좋은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넷째는, 글을 써서 다른 사람이 읽을 수 있는 책을 낼 수 있는 것을 매우 큰 복이라 합니다. 그러므로 자신은 천형을 받은 사람이 아니라 천혜를 받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청을 받은 사람들로서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의 삶을 이미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께서 책임져 주시는 대상자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마지막까지 성도들이 부끄러움을 당하지 아니하도록 지켜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첫 인간, 아담과 하와는 타락했을 때에 하나님이 두렵고 무서워서 숨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찾아오십니다. 심판하러 찾아오시는 것보다는 그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찾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셨기 때문에 당신이 창조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지려 하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성도들을 찾아가셔서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제 인생에 놀라운 일들을 많이 행하셨습니다. 제가 어렸을 때입니다. 6.25사변이 끝난 후에 우리 동네 뿐 아니라 한국 전역에 전염병이 돌았습니다. 그 당시에는 염병이라 일컬었는데 후에 나온 서적을 보니 장티푸스였습니다. 당시 저의 어머니까지 염병에 걸리셨습니다. 더욱 놀라운 일은 우리 동네에서 저와 동갑인 아이들이 염병으로 모두 죽었는데 저는 살았습니다. 그래서 저희 동네에는 제 동갑친구가 한사람도 없습니다. 그 이후에도 많은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마다 무사히 넘겼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하나님께서 선택하시어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청한 대상자이었기에 하나님께서 내 인생을 책임져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재림하실 때에도 주님을 환영하는 사람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누구나 하나님을 진실한 마음으로 사랑하는 성도라면 하나님은 그분의 인생을 전적으로 책임져 주실 것을 확신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킨 후 마음 상하신 일이 여러 번 있으셨지만 그 중에서도 금송아지를 만들었을 때 크게 아프셨을 것입니다. 출애굽기 33장을 보면 하나님께서 분노하시어 모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모세야! 안되겠다 내가 약속한대로 이스라엘을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땅으로 들어가도록 하겠는데 나는 너희와 함께 가지 않겠다. 만약 내가 너희와 함께 가다가는 너희가 목이 곧은 백성이어서 길에서 너희를 진멸할까 염려하노라” 하셨습니다. 그 때에 모세가 “하나님, 그래도 안 됩니다. 하나님은 반드시 같이 가셔야 합니다.”했습니다. 하나님은 결국 “내가 친히 가겠다. 내가 너를 쉬게 하리라” 하시고 그 증거로 모세 앞에 하나님의 영광이 지나가는 특혜를 받게 하셨습니다. 이 이야기의 의미는 하나님은 한번 선택한 이스라엘 백성을 끝까지 책임지신다는 의미입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성도들의 인생을 끝까지 책임지실 것입니다.
셋째로, 하나님은 성도들의 미래를 보장하십니다.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둘째와 다섯째 복은 하나님께서 성도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되다 성령이 이르시되 그러하다 그들이 수고를 그치고 쉬리니 이는 그들의 행한 일이 따름이니라”(계14:13) 말씀합니다. 성도들의 행한 일을 보면서 하나님께서는 미래를 축복하시겠다는 것이며, 첫째 부활에 참여하여서 천년동안 왕 노릇 하리라 하셨는데 그것은 미래를 보장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올림픽이나 세계 선수권대회 등 큰 경기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대부분의 선수들이 시상대에 올라가서 눈물을 많이 흘립니다. 그들이 왜 눈물을 많이 흘리는지 아십니까? 그냥 좋기만 해서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의 눈물은 사경을 넘는 혹독한 훈련의 시간들이 생각났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훈련 과정이 힘들면 힘들수록 더 큰 기쁨과 감격의 눈물과 환한 웃음을 지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요즘 피겨스케이트 선수인 「김연아」 선수가 인기가 많습니다. 다른 대회에서 우승할 때는 우는 모습을 보지 못했는데 세계 선수권대회에서 처음 우승 했을 때에는 눈물을 흘리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각고의 노력 끝에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통을 이겨나갔는가? 감회가 깊었을 것입니다. 어느 때에는 ‘차라리 훈련을 받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낫겠다’ 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큰 영광이 있기 때문에 참고 이겨낸 것입니다. 예수님을 영접하고 믿음을 지키고 어려움 가운데에서도 꿋꿋이 주안에 거하는 성도들을, 주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금메달을 받은 선수와 같은 영광을 주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25장을 보면 달란트 비유에서 두 달란트, 다섯 달란트 받은 종에게 주님은 “착하고 충성된 종아 잘했다. 네가 적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내가 많은 것을 네게 맡기겠고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 것이다” 말씀하십니다. 말이 쉽지 종들이 그것을 남기느라 얼마나 많은 노력과 수고를 했겠습니까? 그러니 주님은 보상을 해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1:6를 보면 “내가 생명수 샘물을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이기는 자는 이것을 상속으로 받으라” 하였습니다. 마태복음 19장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으로부터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낙타가 바늘귀에 들어가기보다 더 어렵다는 말씀을 듣고 “그러면 누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겠습니까?”질문하였고, 주님은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다” 하셨습니다. 이때 베드로는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따랐는데 저희는 무엇을 얻겠습니까?” 합니다. 예수님은 “너희가 다 버렸느냐? 내가 세 가지 축복을 주겠다. 하나는 너희가 열 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또 나를 위해서 많은 것을 버린 사람마다 여러 배를 받을 것이고 영생을 상속 받을 것이다.”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부도수표를 내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리스도인의 미래를 보장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성도들은 어떤 형편에서도 실망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좋으신 주님을 의지하고 바라보면서 그분 앞에 우리의 인생을 내어 맡길 수만 있다면 작은 시내가 강물이 되고 그 강물이 바다로 흘러가는 것처럼 하나님의 영광의 자리로 그리스도인들을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성도들의 삶을 보호해 주십니다. 성도들의 인생을 책임져 주십니다. 성도들의 미래를 보장해 주십니다. 마지막 때에 하나님께서 주시는 일곱가지의 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박조준목사 그리스도의 모습 계01장 01절 ~ 8절
요한계시록은 신약성경 중에서 유일하게 우리에게 오늘 나타나고 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 을 보여 주는 책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은 세상에 계실 때 슬픔을 몸소 겪으시며 고통을 익히 체 험하셨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주님께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후 영광과 존귀를 받으시며 다시 욕을 당하지 않으실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읽어 내려가면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2,000년 동안 주님 이 그의 교회를 통하여 이루신 역사를 보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이 뜨거워지리라 믿습니다. 수많 은 천사들이 주님 앞에 무릎을 끓고 주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입니다. 사단과 모든 악 의 무리를 누르고 승리를 거두는 장면도 보게 될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그리스도와 그를 믿는 사람들이 선한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게 될 것을 확실히 말해 줍니다.
이 책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성경을 공부하는 이들은 이 지구가 멸망하기 전에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예비하셨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책은 주님 오실 때 준비 없는 가운데 들림 받지 않도록 미리 준비할 수 있게 해줄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닥쳐올 정치적, 사회적 그 리고 종교적 혼란 상태를 이겨낼 수 있는 굳건한 믿음을 가지게 해 줍니다. 성경 이외에서는 이 때가 말세인 사실을 알아낼 수가 없습니다.이 계시록을 제대로 이해하게 되면 그리스도인으로서 의 헌신과 봉사를 꾸준히 계속해 나아갈 수 있는 큰 활력을 얻게 될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 책은 우리의 심령 상태를 깨우쳐 줍니다. 이 책은 우리에게 미래에 대한 희망을 불러일으 켜 줍니다. 이 책은 우리 주변의 잃어버린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품게 해 줍니다. 물론 이 책은 쉬운 책은 아닙니다. 미래에 대한 예언의 책이므로 말하기가 조심스럽다고 해서 아예 요한 계시록 강해를 피하는 분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연구하면 할수록 무궁무진한 생명의 진리 가 주어지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물론 강해와 주석은 다릅니다. 주석은 한 글자 한 글자, 한 구절 한 구절을 해석하는 것이지만, 강해는 이 말씀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나를 발견하고 오 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을 찾으려 하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은 많은 사람에게 신비에 싸여 있는 책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이 수많은 사람들을 혼돈 속에 빠뜨린 것도 사실입니다. 반면에 이 책이 어떤 이들에게는 한없는 축복의 보고가 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책을 우리가 왜 읽고 생각하게 되었습니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느 부분이든지 읽으면 복을 받게 됩니다. 그런데 요한계시록은 특별히 축복을 우리에게 약속해 주고 있는 책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말씀을 읽고 듣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지키는 사람에게 축복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본문 3절에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 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했습니다. 22장 7절에도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이 책의 예언의 말 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으리라 하더라 고 했습니다. 말씀을 읽어도 복이 됩니다. 더욱 귀한 것은 이 말씀을 지키는 것입니다. 야고보서 1장 23∼25절을 같이 읽어보십시다.누 구든지 도를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으니 제 자 신을 보고 가서 그 모양이 어떠한 것을 곧 잊어버리거니와 자유하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 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행하는 자니 이 사람이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 으리라. 우리 모두가 하나님의 말씀을 읽고 들을 뿐 아니라 그 말씀을 따라 살아서 하나님의 크 신 축복을 받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읽을 때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이 나타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미래에 대하여 알고 싶어하는 것은 사람의 공통된 심리입니다.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이 점을 치는 곳에 찾아갑니다. 운명 철학관에 갑니다.믿는 사람들은 소위 예언 기도한다는 사람을 찾아가 예언을 해 달라고 합니다. 엄격히 말해서 이것은 기독교를 미신으로 전락시키는 행위가 되기 쉽습니다.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계획을 알고 싶을 때에는 이 책을 잘 연구하시기 바랍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어느 책보다도 성경의 예언에 대해 분명하게 기록하고 있 습니다. 우리는 계시록을 통해서 그것을 똑똑히 보게 되는데 그것은 창세기로부터 시작하여 성 경의 각 권을 통해 나타난 진리를 완결해 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가령 창세기와 계시록을 비교 해 봅시다. 창세기에는 아름다운 낙원에서 이루어진 인류의 출발을 그리고 있는데 계시록에는 앞으로 나타날 신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창세기에는 어떻게 인간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을 수 있는 기회를 놓쳤는가를 말하고 있는데, 계시록에서는 인간이 그 생명나무 열매를 따먹을 수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창세기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첫 번째 반역을 말해 줍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반역이 끝나게 될 것을 말해 줍니다. 창세 기에서는 죄악이 가져온 비참한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눈 에서 눈물을 씻어 주실 것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창세기에서는 첫 번째 죽음을 기록하고 있습니 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더 이상 사망은 없다 고 약속해 줍니다. 창세기에서는 저주의 시작을 보여줍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저주가 떠났음을 보여줍니다. 창세기에서는 하와에게 하나님이 무어라고 말씀하셨느냐 고 물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을 불신 하게 하려는 첫 번째 시도를 했습니다. 네가 죽을까 하노라 고 함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부정하 려는 시도를 하였습니다. 비극적인 사실은 창세기 이후 모든 인간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고 사단 을 믿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믿는 사람보다는 오히려 회의적인 교육이나 과학을 믿는 사람이 많으며 성경을 믿는 것이 심지어 신학계에서조차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이런 회 의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심령을 불행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계시록에서는 하나님의 신령하 신 말씀을 욕되게 하는 무신론자들에 대한 저주를 약속하고 있습니다. 22장 19절에 누구든지 이 책의 예언의 말씀에서 제하여 버리면 하나님이 이 책에 기록된 생명나무와 및 거룩한 성에 참예 함을 제하여 버리시리라 했습니다.
요한계시록을 해석하는 네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첫째로, 과거적인 해석 방법입니다. 이 견해를 가진 사람들은 사도 요한이 그가 살던 시대인 주후 96년경의 사건을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들의 견해처럼 로마의 황제 네로 나 도미시안이 이 책에 나타난 적그리스도의 조건을 다 구비했다고 보기에는 어렵습니다. 둘째로, 역사적인 해석 방법입니다. 이 견해는 교회 역사상 나타나게 될 중요한 사건들을 사 도 요한이 기록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므로 이 견해에 따르면 우리는 이 사건들을 과거 속에서 찾아보게 됩니다. 물론 그렇게 하려면 이 예언에 맞도록 역사적인 사건을 억지로 뜯어 맞추게 됩니다. 이것은 역사적으로도 맞지 않는 일이며, 그러기 위해서 평범한 말씀까지도 왜곡 시켜 버릴 위험이 있습니다. 셋째로, 영적인 해석 방법입니다. 이것은 성경에 나타난 사건들을 모두 상징이나 은유적으로 받아들여서, 사도 요한이 육신적인 경험이 아니라 영적인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방법입 니다. 넷째로, 미래적인 해석 방법입니다. 우리가 가장 타당하게 생각하는 방법입니다. 이 계시록을 아직 성취되지 않은 예언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계시록을 연구하는데 가장 안전한 법칙은 분 명한 다른 것을 지칭하고 있는 구절 이외에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이 요한계시록 의 윤곽을 나타내는 서론적인 구절은 계시록 1장 19절입니다. 그러므로 네 본 것과 이제 있는 일과 장차 될 일을 기록하라. 이것만 보아도 요한계시록은 미래에 일어날 사건에 대한 기록인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본문 처음에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라 했습니다. 이 계시라는 말은 헬라어로 아포칼립시스( ) 인데 비밀을 밝혀 낸다 는 뜻입니다. 이것은 신약성경에서 그리 생소한 단어는 아닙니다. 신약 성경에 18번이나 나와 있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어떤 그림에 쳐 두었던 휘장을 걷고 공개하여 보여준다, 드러내 보인다 는 뜻이 있습니다. 이미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해서 복음서를 기록한 바가 있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 대해서만 기록한 것은 아닙니 다.
이 구절을 잘 읽어보면 이것은 얼마 안 있어 나타나게 될 일들을 자기 종들에게 보여주시기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시임을 알게 됩니다. 이 사실을 천사를 통하여 지시하신 것이라 고 했 습니다. 이 책을 쓴 분이 사도 요한이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별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책의 문체는 그의 복음서의 문체와 같지 않습니다. 이 계시록을 기록함에 있어서 요한은 단지 펜을 손에 든 사람에 불과했고 그가 하늘의 환상을 보는 동안 들려 오는 음성에 따라 그대로 썼 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다른 서신과 달리 이 요한계시록에는 저자의 개성이나 문체가 반영되기 어려운 것입니다.사도 요한은 자신이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본 환상을 통해 쓴 것뿐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 그리고 지키는 자들에게 축복이 주어진다는 사 실은 앞에서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축복이란 이 세상의 것을 통해 오는 것 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만 나오는 것입니다. 이 계시록은 그 말씀을 읽는 사람, 마음속 깊이 말씀을 받아들이는 이, 그리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이들에게 축복의 근원이 됩니다. 그리고 계시록의 인사가 4∼5절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편 지하노니 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와 그 보좌 앞에 일곱 영과 또 충성된 증인 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 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은혜는 헬라어 인사요, 평강은 히브리어 인사입니다. 이 두 가지는 모두가 인간이 아닌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들입니다. 은혜와 평강은 인간의 점 유물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 따라서 그 사람이 소유한 은혜와 평강이 달라지게 되는 것 입니다. 그런데 신학적으로 말하면 삼위일체이신 주님께서 베푸시는 은혜와 평강을 말씀하고 있습니 다. 성부 하나님-이제도 계시고 전에도 계시고 장차 오실 이로부터. 성령 하나님-보좌 앞에 서 신 일곱 영을 가지신 이로부터(완전을 뜻함, 사 11:2, 성령의 일곱 가지 역사). 성자 하나님-땅 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사도 요한은 바로 이 서문에서 그의 인격과 성품에 꼭 합당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과 존귀 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 어 버린 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 였습니다. 그분이 다시 오실 때에는 존귀와 영광을 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는 권세와 무한한 능력의 왕으로 오시기 때문입니다. 계시록에서는 성경 그 어느 곳에서보다도 예수님을 높이고 있습니다. 본문 5∼7절의 말씀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의 사업을 보여주고 있습 니다. 과거에 그리스도는 충성스런 증인이었습니다. 그는 진실한 종이셨습니다. 하나님이 예수 님을 통해서 나타내셨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주님께서 빌립에게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 (요14:9)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의 인간성에 대해서는 다른 증인들이 많지만 하늘로부 터 나신 성부 하나님과 세례 요한, 예수님이 행하신 이적과 성경 말씀 자체만 가지고도 그리스 도에 대한 증거가 충분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 자신이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죽은 자들 가운데 먼저 나시고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입니다(고전 15:23). 그리스 도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한 첫째 사람은 아닙니다. 엘리사도 죽은 사람을 일으켰습니다. 예 수님 자신도 직접 세 사람이나 죽음 속에서 일으켜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결국엔 죽고 말 았습니다. 그들은 썩지 않을 것 으로 부활하지는 못했습니다. 그리스도만이 영광스런 몸으로 다 시 사신 분이며, 이 사건은 최후에 일어날 부활에 대한 보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은 썩지 않을 몸으로, 죽지 않을 몸으로, 영광스런 몸으로 다시 살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주님은 세상 임금들, 인간들에게 어느 정도 권한을 허용하시는 것 같지만 결국은 온 세상을 주관하십니다.
그분이 인간들에게 최후의 심판을 내리시게 된다는 사실을 보아도 이 세상의 통치자들을 지배하고 계심을 확실하게 나타내 고 있습니다. 그러면 주님의 현재의 사역은 무엇입니까?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 방하시고. 주님은 우리를 위해서 그 자신을 주실 뿐 아니라 오늘도 영원히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돌보고 계십니다. 믿음으로 그리스도 예수를 영접한 사람은 그의 피로써 깨끗함을 얻었 습니다. 이것은 누구나가 경험하는 사건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그를 영접할 때에만 깨끗함을 입을 수 있습니다. 요한일서 1장 7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저가 빛 가운데 계신 것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 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그런데 이 사건이 언제 일어납니까?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할 때에 일어납니다. 요한일서 1장 9절에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 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회개했습니까? 개인적으로 예수 님을 구주로 영접했습니까? 주님에게 죄사함을 구하며, 주님에게 우리의 생명을 드리면 예수 그 리스도의 피가 우리를 깨끗케 해 주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그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셨다 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왕과 제사장으로 만드셨습니다. 지금은 우리가 왕으로 보이지 않을는지 모르 지만, 우리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람이기 때문에, 그분과 함께 다스리게 되는 것입 니다. 그리고 우리를 제사장으로 삼으셨다는 말은, 그리스도가 필요하면서도 그분께 기도할 수 없는 이들을 위하여 우리가 중보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오늘 우리의 사명이 바로 그 것입니다. 제사장의 기도가 필요합니다. 끝으로 주님께서 장차 하실 일이 무엇입니까? 주님은 다시 오십니다. 반드시 다시 오십니다. 이것은 분명히 보증되어 있는 약속입니다. 사도행전 1장 11절에 천사가 전한 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 했습니다. 주님은 우리 눈에 보 이는 상태로 오실 것입니다. 환난의 날 끝에 천년왕국을 세우시려고 주님께서 재림하십니다. 보 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예수님 자신도 마태복음 24장 30절에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각인의 눈이 그를 볼 것입니다. 심지어 그를 찌른 자도 볼 것입니다. 승리의 재림을 의미합니다. 심판의 재림을 말합니다. 영광의 재림입니다. 능력의 재림입니다. 그래서 주님 다 시 오실 때 땅의 모든 족속들이 그를 인하여 부르짖게 될 것입니다.
주님 재림하실 때 울부짖는 사람들은 그를 영접하지 않은 사람이고, 이에 영접한 사람들은 기쁨으로 주를 맞이하게 될 것입 니다. 신랑을 맞는 신부가 될 것입니다. 우리 모두 슬기로운 처녀처럼 신랑 맞을 준비를 잘 하 였다가 주님이 오늘 밤 다시 오신다 해도 어서 오세요, 얼마나 기다렸다고요! 하며 나가서 기쁨 으로 반갑게 맞이하시는 축복이 함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정익목사 세상에 충격주는 삶 계01장 02절 ~ 3절
계시록은 미래에 될 일을 미리 계시하신 말씀입니다. 사도요한이 밧모 섬에서 유배생활 할 때 받은 계시를 그대로 적어놓은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 계시록의 말씀은 대체적으로 어렵고 난해합니다. 오늘 읽은 본문말씀은 계시록에서 입문에 해당하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이고 서론적이고 그러면서도 가장 쉬운 말씀입니다. 여기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 말씀은 “내가 직접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로 받은 말씀”이라는 것이고 그래서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는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때가 가까왔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여기 “때가 가까웠다”라는 말은 “승천하신 주님이 다시 오실 시간이 가까왔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이 임박한 시간개념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즉 종말을 생각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말씀합니다. 그래서 종말신앙이 가장 좋은 신앙입니다. 이 종말신앙이 없으면 신앙인으로서 그 시대를 자신을 잘 지켜 살아가기가 힘듭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며 살아가라”고 했습니다. 우리의 신앙을 잘 세우고 다지고 살아가는 방법이 이 세 가지입니다.
“읽는 일”
읽는 일이 참 중요합니다. 읽는 일은 무슨 책을 읽든지 중요한 일입니다. 거기다 성경을 읽는다면 더 중요한 일입니다. 이스라엘이 강한 이유가 한 가지 있는데 그것이 이스라엘민족이 읽는 민족이라는 점입니다. 이스라엘은 교육 중 가장 큰 특징은 읽게 하는 교육입니다. 그것도 성경의 율법서를 아이들이 아주 어려서부터 읽게 합니다. 구약 신명기서를 보면 이 말씀을 미간에 붙이고 손목에 매고 문설주에 바르고 읽게 하고 가르쳐서 지키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 말은 매일 보고 읽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교육이 이 율법서를 아주 어려서부터 읽게 하는 것이 교육방법입니다. 왜 읽는 교육이 중요하냐 하면 읽을 때 많은 생각이 주어지기 때문입니다. 책을 읽을 때 눈으로는 책을 보지만 마음과 생각으로는 그 보는 내용이 머릿속에서 상상되고 영상으로 나타납니다. 그때 많은 생각이 떠오르고 생각되고 상상력이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더구나 계시록의 말씀을 항상 읽는다면 얼마나 엄숙한 삶이 뒷받침 되겠습니까. 그래서 읽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읽기를 싫어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책이 잘 팔리지 않는다고 아우성입니다. 그래서 많은 서점들이 문을 닫습니다. 책도 글씨가 많고 두꺼운 책은 더 읽지 않습니다. 책이 얇고 글씨가 커서 부담 없는 책들만 읽습니다. 그래서 한번 읽고 아깝지 않게 버릴만한 책들이 잘 팔린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생각이 없어지는 것입니다. 거기다 오늘은 이 TV가 문제입니다. 책을 읽어야 얻을 수 있는 것들을 모두 TV가 제공해 줍니다. TV는 읽는 수고 없이도 그냥 앉아서 보기만 하면 됩니다. 그래서 책은 멀어지고 TV만 가까워졌습니다. 그런데 TV가 큰 문제가 하나 있습니다. TV를 오래 보다 보면 생각이 없어진다는 점이 문제입니다. TV는 눈으로 보기 때문에 머리로 생각할 부분까지 다 보여주어서 굳이 생각이 필요 없어집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TV를 볼 때 넋을 잃고 입을 벌리고 침을 흘리고 앉아있는 것입니다. 생각이 중단되어있기 때문입니다. 그것도 모자라 오늘은 핸드폰을 들고 다니며 영상을 보게 만들어 놓았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생각하지 않는 국민들을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읽는 일이 이렇게 중요한 일입니다. 그래서 신명기에서는 후손들에게 읽게 하라고 강조했습니다. 성경을 읽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것도 예언서를 읽고 자꾸만 가까이 다가오는 종말의 때를 준비하며 살아가도록 이 말씀을 읽으며 마음에 두고 살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읽을 때 마음가짐이 달라질 것이고 경거망동 하다가도 생각이 달라질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계시의 말씀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산을 가까이 하면 마음이 조용해지듯이 물을 가까이 하면 마음이 맑아지듯이 책을 가까이 하면 상상력이 풍부해지듯이 계시록의 말씀을 가까이 하면 시대를 알고 경건을 유지하며 종말을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예언의 말씀을 읽으라고 했습니다.
“듣는 일”
이 성경의 말씀을 읽는 일도 중요하지만 또 듣는 일도 중요합니다. 조용히 귀를 기울이면 멀리서 들려오는 말도 들을 수 있습니다. 그 말은 성경을 읽으면 주어지는 말씀을 듣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때 듣는 말씀은 이 세상에서 듣지 못하고 생각하지 못하던 것을 듣게 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온다고 했습니다. 시1:에 나오는 “묵상하는 사람”이라는 뜻은 “말씀을 씹는 사람” 이란 뜻입니다. 말씀을 씹으며 읽다 보면 그 말씀의 맛을 알게 되고 그 말씀이 주시는 영감을 얻게 됩니다. 그 말씀을 받아 살아가는 것이 신앙인의 삶입니다. 그 말씀에서 길이 나오고 방법이 나오고 뜻이 나오고 내가 할일이 무엇인지를 알게 됩니다. 이 말씀을 읽을 때 주시는 음성을 듣는 일도 중요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이 말씀을 읽고 읽을 때 주시는 음성을 들으라고 했습니다. 이 성경의 말씀은 영감으로 쓰인 책이기 때문에 읽을 때 영감을 얻게 되고 그 영감은 또 우리에게 음성으로 다가 옵니다. 그 음성이 나로 하여금 갈 길을 가게하고 깨달을 것을 깨닫게 하고 할 일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강조한 것입니다.
이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온갖 세상의 소리만 듣게 됩니다. 세상의 소리는 모두 다투는 소리, 싸우는 소리, 속이는 소리, 아픔의 소리. 원망의 소리들입니다. 그 소리들을 듣다 보면 짜증이 나고 갈등이 유발됩니다. 그래서 마음의 평정이 깨져서 불화하고 짜증을 내게 됩니다. 여러분, 우리의 일상의 말은 주위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염됩니다. 내가 소망의 말을 하고 희망의 말을 하면 그 희망의 말들이 주위의 사람들에게 그대로 소망적으로 전염됩니다. 그렇지만 내가 불화하고 화를 내고 짜증을 내면 그 불화한 말들이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그대로 전염됩니다. 그래서 함께 불화하게 되고 싸우고 다투게 됩니다. 참 무서운 전염병입니다.
그래서 말씀을 읽고 기도하는 시간에 귀를 기울이는 일이 중요합니다. 혼자 따발총 쏘듯 쏘고는 그냥 돌아가지 말고 하나님이 말씀하실 시간을 드리고 그 말씀을 들어야 합니다. 그것이 묵상의 기도입니다. 묵상의 기도는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듣는 시간입니다. 그 말씀을 들을 때 영감이 주어지고 내가 할 일을 깨닫게 되고 내 부족함이 느껴지고 내 죄가 사함 받는 것을 알게 되고 잊은 것을 생각하게 되는 축복이 주어집니다. 그런 시간을 가질 때 마음이 넉넉해지고 푸근해지고 따뜻해지고 마음에 여유가 생깁니다. 오늘 사람들에게 그런 시간이 없으니까 그 삶이 매일같이 안달하며 각박하게 살아가고 짜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사오정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성은 “사”이고 이름은 “오정”인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이 사오정 선생님이 새 학교에 부임해서 첫 시간에 책을 읽었습니다. 그때 아이들의 자세가 흐트러졌습니다. 그때 아이들을 잡는 방법으로 혼을 낼 수도 있고 화를 낼 수도 있고 막대기를 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 때에 사용하는 방법으로 그 선생님의 마음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오정 선생님의 방법은 너무나 어필한 방법입니다. 그때 읽은 책 내용에 묵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책을 읽어나가던 선생님이 갑자기 회상에 빠졌습니다. 그리고 말했습니다. “얘들아 나는 묵 이야기만 나오면 생각나는 작품이 있단다.” 그러자 아이들이 순간 조용해졌습니다. 그리고 무슨 거창한 작품이 나오나 하고 기대하면서 모두 자세를 바로잡았습니다. “나는 묵 이야기만 나오면 헤밍웨이의 무기여 잘 있거라가 생각난단다.”
그 순간 교실 안에 폭소가 터졌습니다. 선생님은 자세가 흐트러진 것을 화내지 않고 아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함으로서 긴장을 풀어주고 다시 공부하게 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모두 넉넉한 마음이 없이 모두 각박해서 조그만 말에도 감정을 폭발시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모두 자연과 동떨어져 살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시간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듣느니 세상의 소리만 듣고 각박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갑니다. 그러니까 오늘 사람들이 각종 무서운 병에 시달리고 질병에 쓰러지고 단명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국 피츠버그대학 메디컬 센터에서 장수비결을 연구하던 중 신앙 생활할 것을 건의했습니다. 사람이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면 최하 3,1년을 더 사는 연장효과 있다고 발표했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면 장수하는 이유는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사람들이 가장 힘든 것이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일입니다. 스트레스가 어디에서 오는가 하면 욕망이나 욕구는 큰데 그것이 충족이 안 되는데서 오는 부작용 입니다. 많이 주어졌는데도 여전히 부족함을 느끼기 때문에 스트레스가 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의 뜻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는데서 오는 절망감들이 심적 고통을 가중시키는 것입니다. 그것을 적절하게 절제하게 되면 참으로 마음이 편안하고 만족하고 얼마든지 감사할 수 있는 삶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인데 그것이 조절이 안 되기 때문에 마음의 균형이 깨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묵상하고 기도하고 생각하고 이 말씀을 읽으라는 것입니다. 이 말씀을 묵상할 때 내 마음과 삶과 정신과 영이 조절되고 평온하게 되고 넉넉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내가 엎드려 기도할 때 그 기도 속에서 들려오는 음성과 메시지를 들을 때 비로소 나를 수정하고 내 뜻을 축소하고 하늘의 뜻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도 이 말씀이 예언의 말씀이고 장차 될 일을 예시해 주신 계시의 말씀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경건함과 삶을 바로잡게 해 주는 말씀입니까. 그래서 이 말씀을 통해서 들려주시는 음성을 듣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그 삶이 우리의 삶을 건강하게 하고 건강한 신앙을 유지하고 건강한 관계의 삶 유지하는 비결입니다.
"지키는 일"
여기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는 말씀은 “그렇게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읽고 생각하고 기도하는 중에 얻어진 마음을 삶으로 연결시켜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지킨다는 말은 내 뜻을 접고 듣고 보고 믿은 것을 그대로 따른다는 말입니다. 거기에는 의지의 신앙이 필요합니다. 내 뜻을 접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순종하려면 먼저 나를 극복하고 나의 부정하는 결단이 뒤따라야 합니다. 그래야 지키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오늘 신앙인에게 한 가지 고민이 있다면 읽고 듣고 알기는 하는데 실제로 지키기가 어렵다는데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인들의 고민입니다. 말씀을 읽어서 알고는 있습니다. 기도를 통해서 들어서 알고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로 지키기가 참으로 어렵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고민입니다. 우리들이 알고들은 것을 그대로 실행한다면 이 세상에 큰 충격을 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삶을 감행하는 그리스도인들의 모습에서 세상은 경이로움을 느낄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에 주는 충격이고 위력이고 영향력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소금과 빛의 삶입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세상에 충격을 줄 수 없는 것은 그대로 행동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늘 세상에서 우리들을 향해서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나무라고 비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앞에 엎드리면 늘 죄송한 마음이 들고 부끄러운 것도 그 때문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력이고 우리의 한계입니다. 우리들의 마음이 조금만 더 가난하고 비어있고 자기를 부정한다면 얼마든지 감당할 수 있을 것인데 문제는 우리들이 너무 야무지고 내가 너무 똑똑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알고 지켜야 한다고 믿으면서도 지키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너무 똑똑하고 야무지고 내 자신이 너무 큰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내안의 예수가 나보다 너무 작고 힘이 없어서 언제나 나한테 치이기 때문에 내가 흔쾌히 그 앞에 엎드리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고 부정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정말 생명의 말씀이고 종말의 말씀이고 예언의 말씀으로 내가 읽고 받아들이고 그 말씀이 주시는 뜻을 안다면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을 것이고 듣지 않을 수 없고 지키지 않을 수가 없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내 자신이 너무 똑똑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이 미래에 주어질 이 예언의 말씀보다 오늘을 살아가는 오늘의 이 현실이 더 크게 보이고 그 현실의 것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우리들이 너무 똑똑하기 때문에 내 뜻을 선뜻 포기하지 못하고 순종하지 못하고 무릎을 꿇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다음의 이야기를 통해서 한번 곰곰이 우리들 자신의 모습 을 생각해 보십시오.
교회학교에서 성탄절 때 연극을 했습니다. 마리아가 만삭이 되어 여행 중에 여관에 들러 빈방을 찾고 있습니다. 여관집 주인 역에는 모든 아이들이 반대하는데도 좀 모자란 아이에게 그 역을 맡겼습니다. 연습해서 마침내 막이 오르고 만삭의 마리아가 여관에 들러 빈방을 애처롭게 찾고 있습니다. 그때 이 좀 모자란 아이가 우리 집에는 빈방이 없다고 매몰차게 거절하는 연기를 잘 하다가 이 아이가 마침내 울음을 터트립니다. 그리고 절규합니다. “우리 집에는 빈방이 있으니까 우리 집으로 가세요” 그러자 객석에서는 폭소가 터지고 연극은 엉망이 되었지만 이 아이의 순진한 절규에 관객 모두를 목이 메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누구도 그런 상상도 하지 못했는데 그 좀 모자란 아이의 순전한 마음을 통해서 사람들은 자신의 깨닫지 못한 것을 생각하게 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누가 예수를 받아들이고 영접할 수 있는가 하면 이 아이같이 조금은 모자라지만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의 마음속에 주님이 오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만이 나를 부정하고 축소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요구라면 모든 것을 포기하고 순종하고 지킬 수 있는 용기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사도요한은 밧모 섬에 유배되고 유형생활을 했습니다. 그 유배 생활하는 중에 기도시간에 하나님으로부터 계시를 받습니다. 그때 장차 될 일을 계시 받아 그대로 기록해 놓은 책이 이 계시록입니다. 그 계시록 서두에서 요한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자기가 본 것을 다 증언하였느니라.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 이제는 그 어느 때보다도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운 때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이 얼마나 탁해지고 인간주의가 만연되었으면 이 세상을 심판하기 위해서 재림하시겠습니까. 그때 우리의 할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이 말씀을 읽고 그 말씀을 읽을 때 주어지는 음성을 듣고 또 듣고 깨달은 것을 지키는 일입니다. 그것이 그 시대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입니다.
김필곤목사 말씀 순종의 복 계01장 03절 ~ 절
우리나라에서 연간 새로운 책이 얼마나 나올까요? 2020년 자료를 보니까 약 6만 6천권이 발행되었습니다. 하루에 약 180권이 나온다고 합니다. 우리나라 국립중앙 도서관에 소장된 책은 약 600만권이 된다고 합니다. 한 주에 한 권 사람이 책을 읽는다면 1년 52권이고 한 80년 책을 읽는다면 4160권을 읽습니다. 중앙 도서관에 소장된 책의 0.00069프로의 책을 읽게 됩니다. 그래서 책을 읽는 것도 중요하지만 꼭 필요한 좋은 책을 읽어야 합니다. 사람들이 책을 읽은 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복된 삶을 살기 위해서입니다. 나누어 세 가지로 말하면 첫째로 좀 더 나은 신분을 가진 인간이 되기 위해서입니다. 책을 읽어야 의사도 되고 판사도 되고 교수도됩니다. 둘째로 성숙한 인격을 갖추기 위해서이며 셋째로 전문적인 지식을 습득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은 복된 삶을 위해 열심히 책을 읽고 강의를 듣고 그가 읽고 들은 바를 실행하여 연마합니다.
그렇다면 복받은 인생을 사는데 필요한 한 책 한 권만 읽으라면 어떤 책을 읽겠습니까?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많은 사람은 성경이라고 주저없이 말할 것입니다. 실버만의 <오늘날 미국의 유대인>이라는 책에 의하면 20세기 인물 21인 가운데 15명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해마다 10월이 되면 노벨상 수상자를 발표하는데 노벨상 수상자의 22.3%를 유대인이 차지한다고 합니다. 현재 세계를 지배하는 나라는 미국이지만 미국을 지배하는 민족은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 최고의 복이라고 생각하고 돈의 지배력은 대단한데 뉴욕의 월스트리트(금융가)를 장악하고 있는 사람들이 유대인이라고 합니다. 대표적인 유대인 재벌인 로스차일드와 록펠러 가문은 엄청난 수의 은행, 석유, 항공사 등을 가지고 있고, 두 가문이 소유한 체이스 멘하튼 은행은 단독으로 세계 경제 공황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다고 합니다. 순수 유대인 자본으로 이루어진 리만 브라더스, 라자스 푸레르스, 골드만 삭스, 솔로몬 브라더스, 베이치 앤드 컴퍼니, 마이클 블름버그 등 세계 금융을 쥐고 있답니다. 미국 내 400대 재벌 가운데 유태계 회사가 23%, 유태인 임원은 36%, 미국 내 10억 달러 이상 자산가의 24%가 유대계라고 합니다. 세계 5대 메이저 식량 회사 중 3개가, 세계 7대 메이저 석유 회사 중 6개가 유대인 소유입니다. 금융은 물론 언론, 정치, 학술, 교육,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에 유대인은 막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세계 첨단산업의 선두에 있는 인텔사의 회장 앤드류 그로브도 유대인이고, 컴퓨터 운영체제를 쥐고 있는 윈도우의 빌게이츠도 유대인이며 구글은 러시아 태생 유대인 세르게이 브린과 동료 유대인 래리 페이지가 공동 창업하였습니다. 페이스북을 만든 마크 저커버그도 유대인입니다. 미국 변호사 중 15%가 유태인이고 법률 시장 중 가장 규모가 큰 뉴욕과 워싱턴의 로펌 중 40%가 유태인 소유라고 합니다. 미국 의사 중 15%가 유태인이라고 합니다. 언론 역시 유대인들이 장악하고 있는데 유대인 소유의 언론사는 통신사로 AP, UPI, AFP, 로이터, 신문사로 뉴욕 타임즈, 월 스트리트 저널, 방송사로 NBC, ABC, CBS, BBC 등이 유대인의 영향권에 들어 있다고 합니다. 세계 영화 상영의 85%를 차지하는 할리우드 영화는 유대인의 자본과 기술이 장악하고 있답니다. 토인비는 그의 책 <역사의 연구>에서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지구상에는 28개의 문명이 발생했으나 그중 18개는 이미 사라지고, 나머지 10개가 역사의 중심으로 이루고 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특히 유대주의 문명이야말로 퇴색되지 아니하는 문명이라고 극찬했습니다. 유대인들이 자신의 문명을 보존하고 세계적인 영향력을 끼치는 원인은 그들의 두뇌의 우수성이 아니라 그들이 어릴 때 가정에서부터 받은 철저한 신앙교육에 있다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교육방법은 '테필린' '쉐마', '학가다'라는 단어로 표현됩니다. 반복과 암기교육입니다. 유대인들은 말씀이 기록된 테필린을 착용하고 하루에 두 번 아침과 저녁기도 시간에 쉐마의 말씀을 외울 뿐 아니라 정통 유대인들은 4살부터 13세까지가 무조건 집에서 어머니와 아버지로부터 토라(모세 오경 5843절)을 암송하게 하고 '바 미쓰바' 의식을 거행하여 말씀의 아들로 세웁니다. 정통 유대인들은 학교에서도 오전에는 토라와 탈무드 교육을 하고 오후에 일반 학문을 공부한다고 합니다. 자신의 자녀를 뛰어난 아이로 만들기 위해 4살부터 성경을 암송시킨다고 합니다. 암송은 어휘력과 기억력, 독서 능력, 학습 능력, 주의력, 집중력을 향상시킵니다. 논리력과 사고력, 무한한 상상력과 통합 능력, 창의력을 갖게 하고 탁월한 말솜씨를 갖게 할 뿐 아니라 건강한 자존감과 원만한 인성을 갖게 만들어 줍니다. 날마다 스마트폰 SNS에 서너 시간씩 매달려 사는 아이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지금 세상은 소리 전쟁터입니다. "내 소리를 들으라"라고 수많은 소리들이 목청을 높이고 있습니다. 이 전쟁에 승리하고 복된 삶을 살려면 오늘 성경은 말씀을 읽고 듣고 따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진정한 복이 무엇이지를 가르쳐 주는 책입니다. 예수님 오시기 전 구약성경은 역사서와 시가서와 선지서를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역사서의 시작하는 책인 창세기부터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을 주시는 분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모세 오경을 통해 하나님이 주신 복과 그 복을 잃어 버린 인간의 처참한 모습, 그리고 그 복을 다시 받을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줍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불순종으로 복을 잃었고 순종으로 복을 누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창세기 1장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신 후에 복을 주시고 복을 누리고 살라고 이르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신 복은 영생의 복과 하나님과 교제할 수 있는 복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만물을 다스리며 누리는 지복입니다. 그러나 인간이 교만하여 하나님처럼 되려고 불순종하여 선악과를 따먹음으로 이 모든 복을 잃었습니다. 어머니와 연결된 탯줄이 끊어진 아이처럼 하나님과 생명이 단절되어 영적인 죽음, 영원적인 죽음, 육체적인 죽음이 인간에게 임하였습니다. 하나님과 교제가 단절되어 영적인 소경이 되었고(고전1:21) 죄의 지배(롬6:17)를 받게 되었으며 죄를 좋아하는 친죄 성향을 가지게 되었습니다(딤후4:10). 아담의 불순종으로 복을 잃어 버린 인간들에게 하나님은 누가 진정한 복을 받는가를 말씀을 통하여 명백하게 알려 주었습니다. 모세가 마지막으로 이스라엘 백성에게 유언적으로 주신 신명기 28장 1-19절을 찾아 보시기 바랍니다. 1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삼가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을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세계 모든 민족 위에 뛰어나게 하실 것이라” 3절 이하를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얼마나 많은 복을 약속하고 있습니까? 그러나 불순종하면 어떻게 됩니까? 15절을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을 순종하지 아니하여 내가 오늘 네게 명령하는 그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지켜 행하지 아니하면 이 모든 저주가 네게 임하며 네게 이를 것이니” 질병이 임하고 자연재해가 일어나고 전쟁으로 말미암아 나라가 망한다는 것입니다. 순종하는 자가 복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수많은 왕들이 불순종하여 결국 나라가 망하고 말았습니다.
시가서를 통해서도 시편 1편을 통하여 복 있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알려 주고 있습니다. 시편 1편 1~3절에 보면,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명백하게 하나님이 알려주어도 인간들은 하나님께 계속 불순종합니다. 그래서 시대마다 선지서를 통해 복받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회개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율법을 지킬 경우 복을 받을 것이지만, 지키지 않을 경우는 형벌을 받을 것을 누누이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새 언약의 계명들에 순종하는 자들의 궁극은 최종적이며 영원한 축복이 될 것이지만 불순종하는 자들의 궁극은, 그들이 지상생활 동안 어떤 훌륭한 대접을 받았던지 간에, 저주뿐이라고 말씀합니다. 선지서의 마지막 책인 말라기 2장 2절에 "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만일 듣지 아니하며 마음에 두지 아니하여 내 이름을 영화롭게 하지 아니하면 내가 너희에게 저주를 내려 너희의 복을 저주하리라 내가 이미 저주하였나니 이는 너희가 그것을 마음에 두지 아니하였음이니라"고 했습니다.
말라기 4장 6절은 “그가 아비의 마음을 자녀에게로 돌이키게 하고 자녀들의 마음을 그들의 아비에게로 돌이키게 하리라 돌이키지 아니하면 두렵건대 내가 와서 저주로 그 땅을 칠까 하노라 하시니라”라고 경고하며 구약을 마감을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순종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불순종하여 저주가 이 땅에 들어왔는데 아담의 후손들은 전적으로 부패하여 자신의 힘으로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니까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순종함으로 아담의 후손들에게 복을 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순종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어느날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구원 계획을 성경을 통해 알려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잃어버린 인간에게 진정한 복을 주시기 위해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을 택하여 후손 가운데 복의 근원으로 오실 자를 소개합니다. 창세기 3장 15절에 소개한 여인의 후손으로 오셔서 사탄을 진멸할 분을 아브라함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말씀한 것입니다. 모세를 통하여 구체적으로 신명기 18장 18절을 통해 “내가 그들의 형제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라고 말씀합니다. 다윗에게 더 구체적으로 그의 후손으로 오실 것을 말씀하시고 선지자들을 통하여 베들레헴에서 처녀의 몸으로 태어날 예수님을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때가 차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태어나셔서 십자가를 지시는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이 주신 복을 회복시켜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사실에 대하여 누가 복음 24장 44절에서 “또 이르시되 내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너희에게 말한 바 곧 모세의 율법과 선지자의 글과 시편에 나를 가리켜 기록된 모든 것이 이루어져야 하리라 한 말이 이것이라”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불순종하여 저주 가운데 지옥 갈 영혼을 천국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과 단절된 교제를 회복해 주셨으며 하나님의 자녀로 왕같은 제사장으로 살도록 만들어 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순종함으로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5장의 팔복을 통하여 복있는 자가 누구인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5장 3~12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긍휼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긍휼히 여김을 받을 것임이요 마음이 청결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을 볼 것임이요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라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마감하는 책인 계시록에서 누가 복이 있는 지를 7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계시록에서 어떤 사람이 복이 있는가를 한 번 찾아 읽어 보겠습니다.
① 1장 3절 말씀입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들과 그 가운데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② 14장 13절 말씀입니다.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이 복이 있다.”
③ 16장 15절 말씀입니다. “깨어 옷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
④ 19장 9절 말씀입니다. “어린양의 혼인잔치에 초청된 자가 복이 있다.”
⑤ 20장 6절 말씀입니다.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가 복이 있다.”
⑥ 22장 7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자가 복이 있다.”
⑦ 22장 14절 말씀입니다. “두루마기를 빠는 자들이 복이 있다.”
한마디로 말하면 예수님을 믿어 구원받고 말씀을 순종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말씀은 누가 이런 복을 누릴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까? 3절을 다시 한 번 읽어 보시겠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가 복이 있습니다. 이 예언의 말씀은 계시록을 말하는 것입니다. 읽는다는 말은 단수로 되어 있고 이는 개인적으로 읽는 것을 가리키는 것보다 공적으로 예배를 드리는 곳에서 크게 읽는 것을 가리킵니다. 당시는 성경이 그렇게 흔하지 않는 때입니다. 필사한 두루마리 성경이 있어 회당에서 예배를 드릴 때 모두가 성경이 있어 읽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이 읽었습니다. 그 읽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읽는 사람만 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회중들이 그 말씀을 듣는데 여기서 든는 자들은 복수로 되어 있습니다. 예배에 참석하여 그 말씀을 듣는 모든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은 듣지 못하는데 생명의 말씀을 듣는다는 것이 얼마나 복이 있겠습니까? 그리고 이렇게 읽고 듣는 사람들 중에 진짜 복있는 사람은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시에 읽고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삶의 현장에서 읽고 들은 말씀을 행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들을 때 그 말씀에 순종하는 자들이 복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말씀을 순종할 때 성경에 있는 보물의 소유주가 될 수 있습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은 보물 창고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는 것입니다.
“자유롭게 하는 온전한 율법을 들여다보고 있는 자는 듣고 잊어버리는 자가 아니요 실천하는 자니 이 사람은 그 행하는 일에 복을 받으리라(약1:25)”
야고보서 1장 22절에서는 “여러분은 말씀을 실천하는 사람이 되고, 그저 듣기만 하여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라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하시니라(눅11:28)”
예수님께서도 마 28:20에서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7:24-25절에서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그 집을 반석 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 같으리니,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치되 무너지지 아니하나니, 이는 주초를 반석 위에 놓은 까닭이요.”라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말씀대로 행해야 태풍이 오고 홍수가 나도 무너지지 않고, 시험이 다가와도 실족하지 않고 어떤 고난이 다가와도 주님 주신 복을 잃지 않는 것입니다. 헨리 워드비쳐는 "성경은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안내서이다. 그것은 해저에서 당신을 지키는 것이요, 항구가 어디에 있는지를 당신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파산되지 않고 항구에 도착하는 법을 가르쳐준다."고 말했습니다.
구체적으로 우리가 어떤 복을 누리게 됩니까?
첫째는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복을 주십시니다.
영혼이 살아나는 중생의 복, 거듭남의 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가장 어리석은 자들입니다(렘4:22).
귀 있는 자들은 성령이 교회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말씀합니다(계2:7,11,17,29; 3:6,13,22). 예수님께서도 귀 있는 자들은 들을지어다(마11:15; 13:9)라고 했습니다. 이기는 그에게는 하나님의 낙원에 있는 생명 나무 열매를 주어 먹게 한다는 사실을 들어야 합니다. 둘째 사망 즉 지옥의 해를 받지 않는다는 사실을 들어야 합니다. 들어야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10:17에서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했습니다. 중생의 복을 주십니다. 베드로전서 1:23 말씀에 보면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고 하셨습니다.
둘째는 우리의 인격이 그리스도를 닮은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해 주십니다.
에베소서 5:26은 "이는 곧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만이 우리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십니다. 말씀이 우리의 행실을 깨끗하게 하시도록 해드려야 하겠습니다. 요한복음 17:17에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째는 우리를 능력의 사람으로 만들어 줍니다.
1) 길을 모를 때 말씀이 우리에게 바른 길을 걸어갈 수 있도록 빛이 되어 줍니다. 시편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2) 영적 전쟁터에서 승리할 수 있도록 우리의 무기가 되어 줍니다. 에베소서 6:17 말씀에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고 하셨습니다. 사탄과의 싸움에서 우리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3) 어떤 경우에도 안위와 소망을 가지게 합니다.
로마서 15장 4절에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라고 했습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자가 복이 있는 이유를 오늘 본문은 때가 가까웁기 때문이라고 말씀해 주시고 있습니다. 이는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된 이유를 말씀하는 것입니다. 카이로스는 보편적 시간을 말하고 크로노스는 하나님의 결정적인 시간을 말하는데 예수님의 재림의 때가 가까이 왔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주님의 재림을 기대하며 세상에 시선을 두지 않고 하늘을 바라보는 자들이기 때문에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키는 것입니다.
아이언사이드 박사가 한 교회에서 종말론적 설교를 할 때 이런 일이 있었다고 합니다. 설교가 거의 끝나갈 무렵, 한 남자가 불손한 태도로 예배당 문을 열고 들어와서, 부끄러움도 모르고 맨 앞자리로 나와 앉았답니다. 예배가 끝나자 그 사람은 아이언사이드 박사에게 다가와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인사를 했답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런데 선생님께서는 주님의 재림을 믿습니까? "아이언사이드가 이렇게 물었답니다. "예, 그러믄요." 그는 즉시 대답했답니다. "감사합니다. 그렇다면, 주님의 재림이 선생을 붙들고 있습니까. 주님께서 재림하신다는 진리가 선생의 삶을 얼마나 변화시키고 있습니까"라고 물었답니다. 그러자 경건치 못한 그 남자는 이렇게 대꾸했답니다. "누가 목사님께 가서 제 이야기를 한 모양이군요."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을 살면 성경 말씀을 읽고 듣고 지킴으로 마지막 때를 준비하도록 해 줍니다. 그러한 삶이야말로 우리들에게 한없는 복이 될 것입니다.
4) 말씀 붙들고 기도하면 기도 응답을 받습니다.
요한일서 5장 14~15절에 보면, “그를 향하여 우리가 가진 바 담대함이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 우리가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들으시는 줄을 안즉 우리가 그에게 구한 그것을 얻은 줄을 또한 아느니라”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5) 후손들이 복을 받습니다
신명기 12장 28절에 " 내가 네게 명하는 이 모든 말을 너는 듣고 지키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목전에 선과 의를 행하면 너와 네 후손에게 영영히 복이 있으리라" 고 했습니다.
6) 잘못된 길에서 바른 길을 가게 합니다.
디모데 후서 3장 16절은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라고 말씀합니다.
시편 19편 7~8절에 보면, 다윗은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성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라고 기록되어있습니다.
성경은 그 어떤 책보다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성경의 힘으로 꿈을 이룬 대통령 링컨(이대희 저)>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지금까지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대통령 중의 한 사람입니다. 2009년 65명의 역사학자들과 교수들이 미국 역대 대통령 42명 중 미 역사상 최고의 대통령을 뽑았는데 링컨이 뽑혔습니다. 2006년에도 미국 역사 형성에 가장 영향력을 끼친 인물 100명을 뽑는데 1위가 링컨 대통령이었습니다. 링컨은 시골에서 태어나 초등학교 9개월을 다닌 게 학력의 전부입니다. 링컨의 아버지 토마스 링컨은 1637년 영국에서 이민 온 직공의 후예로 신발 만드는 일과 목수, 농장 일꾼으로 전전하였습니다. 링컨은 어릴 때 너무 가난하여 작은 통나무집에서 살면서 누나와 함께 땔감으로 쓸 나무를 주워 오기도 하고 아버지를 따라 옥수수 씨를 뿌리기도 했습니다. 어머니는 링컨이 아홉 살 때 세상을 떠났습니다. 새 어머니와 어린 시절을 보냈습니다. 그런 링컨이 사람들에게 존경받는 훌륭한 인물이 된 것은 성경의 힘 때문이라고 합니다. 링컨은 대통령 취임식장에서 조그맣고 낡은 성경책을 들고 나와 이렇게 고백하였답니다. "이 낡은 성경책은 바로 어머니께서 저에게 물려주신 가장 값진 유산입니다. 저는 이 성경책으로 말미암아 대통령이 되어 여기 이 자리에 서게 되었습니다. 저는 성경 말씀대로 이 나라를 통치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링컨은 성경으로 수많은 고난을 이기고 노예를 해방시키고 하나의 미국을 세웠습니다. 링컨의 어머니 낸시 행크스가 어릴 때부터 성경 이야기를 들려주고 성경으로 교육을 시킨 것입니다. 링컨이 아홉 살 때 어머니가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유언했습니다. "정말 너는 착한 아이였지. 나는 네가 15살 될 때까지는 살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내 뜻대로 되지 않는구나.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므로 내가 없어도 아버지와 누나 말을 잘 듣도록 해라. 비록 지금보다 더 가난한 살림이 되더라도 하나님을 믿고 열심히 일을 해야 한다. 사람이란 부자가 되거나 높게 되는 것보다 마음을 바르게 가져야 한다. 그것이 사람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이란다. 에이브야! 나는 집이 가난하여 너를 학교에 보내지 못한 점이 너무 미안하다. 그래도 나는 네게 성경의 이야기를 했었지? 넌 커서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 에이브야, 나는 네가 부자가 되고 높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는 성경을 읽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저 상자에 성경책이 있다. 그것을 네게 주니 언제나 가지고 다녀라. 그리고 어서 그것을 읽도록 힘써라. 에이브야! 이 성경의 교훈대로 사는 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이다. 이제 나는 안심하고 죽을 수 있다. 에이브야 어머니와 약속하자.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 된다고..." 링컨은 어릴 때부터 열심히 성경을 읽었고 성경대로 살려고 했다고 합니다. 링컨은 성경의 사람이었습니다. 백악관이나 대통령보다 더 성경을 사랑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어릴 때 그가 유일하게 소유하고 있는 책은 어머니가 물려준 성경책 한 권 뿐이었답니다. 언제나 하루를 성경과 시작한 것입니다. 어려울 때마다 성경을 붙들고 기도했답니다. 만약 성경이 없었다면 지금처럼 존경받는 링컨은 없었을 것입니다. 링컨의 삶은 부모가 키웠다기보다는 성경이 키웠고 성경이 그의 인생을 이끌어갔습니다. 대통령으로서의 지도력이 성경에서 나왔습니다. 위기관리 능력을 성경에서 배웠습니다. 정치적, 인사관리 능력을 성경에서 배웠습니다. 성경은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구원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또 어려서부터 성경을 알았나니 성경은 능히 너로 하여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느니라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딤후3:15-17)"라고 말씀합니다.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담겨있습니다. 성경은 기록 목적에 대하여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 20:31)"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즉 그리스도인 것을 믿게 됩니다. 그 예수님을 믿어 생명을 얻게 됩니다.
성경은 인간을 변화시키는 힘이 있습니다. 타락한 어거스틴이 성경을 읽으니까 새사람이 되었습니다. 방탕하게 살던 부시가 성경을 보고 새사람이 되어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깡패 대장이었던 김익두가 성경을 읽고 목사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나라의 어두움이, 가정의 어두움이 물러갑니다. 성경은 능력있는 사람으로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성경은 사람들을 온전하게 만들어 줍니다. 해적나라를 신사의 나라로, 황무한 나라를 기름진 나라로 만들어 줍니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살인자도 성자가 되고, 무능한 자도 유능한 자가 됩니다. 이렇게 힘이 있는 성경도 읽고, 암송하며, 묵상하고, 실천하지 않으면 그저 자신에게는 그림의 떡일 뿐입니다. 말씀을 읽고 듣고 순종함으로 성경이 주시는 놀라운 복을 누리시길 바랍니다.
성경을 읽고 성경을 인생의 나침반으로 삼으면 바른 인생 항해를 할 수 있습니다. 일명 큰 바위 얼굴로도 알려진 유명한 미국 블랙힐의 러시모어 산 화감암 벽에는 미국인으로부터 존경받는 네 명의 대통령 흉상이 조각되어 있습니다. 워싱턴, 제퍼슨,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의 대통령입니다. 이들은 다 공통적인 특징이 있습니다. 능력 있는 사람들입니다. 인격을 갖추어 사람들로부터 존경받는 사람들입니다. 무엇이 이들을 이렇게 능력 있고 온전한 인격을 갖춘 사람으로 만들었겠습니까? 조지 워싱턴은 "성경이 아니면 세계를 다스릴 수 없다"라고 했습니다. 토마스 제퍼슨은 "미국은 성경을 반석으로 삼아 서있는 나라"라고 했습니다. 링컨은 "성경은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귀한 선물이다"라고 말하며 전쟁터에서도 애독했습니다.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어떤 방면에서 일하는 사람이든 그가 자신의 생을 참되게 가꾸기를 원한다면 나는 그에게 성경을 묵상하라고 권하고 싶다"라고 말했습니다. 컴퓨터, 핸드폰, 영상 문화에 빠져 사람들은 점점 성경책과 멀어지고 있습니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이 있습니다. 성경을 멀리하면 하나님도 멀어집니다. 하루에 30분이라고 성경을 듣고, 읽으며, 묵상하고, 실천하면 올 한해 복받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미국 34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가장 정확한 의미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있어서 영원한 영적 진리를 보관하고 있는 유일한 보고이다."라고 말했듯 성경 속에 보화가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 예언의 말씀을 읽는 자와 듣는 자와 그 가운데에 기록한 것을 지키는 자는 복이 있나니 때가 가까움이라(계1:3)".
성홍모목사 구름을 타고 오시는 예수님 계01장 04절 ~ 11절
지난 주일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신 날을 기념하여 부활주일로 지켰습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부활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자신의 부활로 받아들이기 위하여 안식일을 주일로 바꾸고 주님이 부활하신 작은 부활절로 주일을 지켰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께서 부활하셨습니다"라고 외치면 "아멘 예수님은 부활하셨습니다."라고 화답하면서 예배를 드렸다고 합니다. 우리 신앙생활에서 부활은 참으로 중요한 교리요, 우리에게 한없는 은총이며, 축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부활은 새로운 창조의 역사로 보아야 합니다. 부활이란 죽음 뒤에 오는 것으로, 세상 끝에 가서 이루어질 대사건입니다. 먼저 예수님의 부활은 주님의 재림과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부활이란 곧 재림에 대한 약속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즉 초림을 감사하면서 이제는 약속하신 대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대망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심에 대한 기대와 대망 사상이 신약교회의 믿음을 지배하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이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싸웠으며 믿음을 지키는데, 끝까지 견디고 인내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 땅에 다시 오실 것에 대하여 여러 번 약속해주셨습니다. 재림 신앙은 우리들이 마지막으로 간직하고 있어야 하는 아주 중요한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예언은 성경에서 300번 이상 말씀하셨으며, 이것은 매일 같이 사모하고 기억하라는 말씀으로 보여집니다.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록은 사도 바울의 서신에만 50회가 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영으로 오시는 것이 아니라, 부활하셨던 그 모습으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우리 주님이 친히 오신다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우리 주님은 당시의 살아계심을 나타내 보이셨는데, 40일 동안 제자들에게 보이시며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사도들과 수많은 성도들이 보는 중에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수많은 성도들이 보는 중에 하늘로 올라가실 때에 성도들이 하늘을 쳐다보는데, 얼마나 자세히 보았을 것입니까?
그 때에 흰옷을 입은 두 사람이 성도들에게 나타나서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서 하늘로 올려지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행1:10-11)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영화의 필름을 거꾸로 상영하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로 가시는 그대로 다시 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영광 중에 다시 오십니다. 우리 성도들은 우리 주님의 초림과 재림 사이에 살고 있습니다. 이것을 종말론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말을 빌리면 이미와 아직 사이에서 살고 있다고 말합니다. 이미(already)와 아직(not yet)라고 하는데 이미는 성도들이 향유하고 누리는 것을 말하며, 그러나 아직이라고 할 때에 아직은 완성되지 못하였고 완전히 소유하지 못한 상태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이미 성취되어짐과 아직 완성되지 아니한 상태에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이러한 삶을 정의하면서 "이 세상"과 "오는 세상"이라고 하셨고, "금세"와 "내세"라고도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스카 쿨만이란 신학자는 "그리스도인은 D-Day와 V-Day에서 살고 있다. D-Day는 그리스도의 초림이었고, 그 때에 원수들이 결정적인 패배를 맛보았다. V-Day는 그리스도의 재림이며, 그 때에 원수들은 최종적으로 완전히 항복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인간을 지으실 때에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주시고, 우리를 위하여 하늘나라를 준비하여 두셨습니다. 우리 사람만이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이 가지고 있으며,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고백할 수 있고, 하나님 앞에 서는 거룩한 두려움을 가지게 하셨습니다. 우리가 살아갈 영원한 나라가 있기에 잠시 잠깐 살아가는 이 세상만을 위하여 인생을 소비하는 것은 바람직한 인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영원히 살아갈 나라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 나라에는 어떻게 들어갈 것입니까? 여기서 오래 살고, 여기서 잘 사고, 이곳에만 목숨을 걸고 있다면 참으로 어리석은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고 할 것입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의 신앙을 어떻게 진단할 것입니까? 주의 재림에 대한 기대심은 찾아보기 어렵고, 재림에 대하여 말씀드리면 우리들과 상관이 없는 이상한 나라의 이야기인 것처럼 받아들이는 풍조가 있습니다. 어떤 목사님이 학위논문에서 설문 조사한 바에 따르면 한국교회는 재림 신앙이 차츰 퇴색해져가고, 깊은 이해 속에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과학이 발달됨에 따라 모든 사람들은 합리적인 사고 방식에 익숙해지고 있으며 긴박한 재림 신앙은 위력을 잃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든지 아니 믿든지 주님의 재림은 하나님의 경륜 속에 예정되어 있고, 이 세상의 역사는 우리 주님의 심판대 아래에 서는 날이 오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의 다시 오시는 것이 시간적으로 임박했다고 말할 수는 없으나, 상황적으로 임박하였다고 해야 합니다. 지금 다시 오시는 주님이라든지, 천국과 지옥 같은 진리는 아주 고리타분한 교리가 되었고, 목사들이나 공부하는 학문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문제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의 다시 오심이나 주님 앞에 서는 것을 간절히 사모하였습니다. 디모데후서4:7-8입니다. "나는 선한 싸움이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 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고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있어 주님 앞에 서는 것이나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맞이하는 것은 갚아주시는 시간이요, 보상해주시는 시간이 될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는 주님으로 인하여 많은 고난을 받았고, 곤경을 겪고 있을지라도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반드시 상급이 따르고 있습니다.
이 땅의 소망이 진정한 소망이 아니요, 이 땅의 부귀영화가 진정한 부귀영화도 아님을 알아야 합니다. 인간의 영원한 숙제는 무엇입니까? 영원의 문제, 우리 죄의 문제를 해결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영원한 하늘나라에 들어갈 때에야 그동안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이 왜 예수를 믿는 것입니까? 구원받기 위하여 예수님을 믿고 있습니다. 구원받는다는 것은 죄의 문제를 해결하였다는 말이요,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 것이요, 나아가서 우리 주님께서 예비해놓으신 거처에 들어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합니다.
성경에는 재림에 대한 약속의 말씀이 수없이 많은 것을 봅니다.
마16:27에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이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께서 이런 예언의 말씀은 대제사장 가야바 앞에서도 말씀하셨습니다. 가야바가 예수님을 잡아놓고 결정적이고, 최종적으로 물었습니다. "네가 찬송 받을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고 마지막 물었습니다.
그 때에 주님은 더 이상 머뭇거릴 것도 없었고, 있는 그대로, 사실대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인자가 권능자의 우편에 앉은 것과 하늘 구름을 타고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막14:62)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이 자리가 어떤 자리입니까? 말 한 마디 잘못하면 죽어야 하는 절대절명의 자리입니다. 지금이 어떤 상황인 것입니까? 그런데 우리 주님은 당신이 권능자 곧 하나님의 우편에 앉을 것이며, 이후에 하늘 구름을 타고 다시 온다고 선언하시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으로서의 약속이요, 선언입니다.
신약의 모든 복음서와 서신서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가르치고 있으며, 우리로 하여금 항상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며 살아가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여러 번 세상에 다시 오실 것을 말씀하시는 중에 예기치 않은 시간에 다시 오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24:42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깨어 있어라. 너희는 너희 주님께서 어느 날에 오실 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라고 하셨습니다. 누가복음12:40에 "그러므로 너희도 준비하고 있으라. 생각하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 하시니라"고 하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반드시 생각하지 않은 때에 오십니다.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것은 사랑하는 이들을 그가 예비하신 거룩한 곳으로 데려가기 위함이라고 하셨습니다. 요한복음14:2-3에서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고 했습니다. 사실 하늘나라는 하나님이 당신의 아들 그리스도를 위하여 준비하신 곳인데, 우리 주님은 우리를 그곳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함께 거하시려고 했습니다.
여러 서신서는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히브리서 9:28에서 "이와 같이 그리스도도 많은 사람의 죄를 담당하시려고 단번에 드리신 바 되셨고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하여 죄와 상관없이 자기를 바라는 자들에게 두 번째 나타나시리라"고 했습니다.
바울 서신서들은 재림에 대한 기대심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할 것입니다. 주의 형제 야고보는 어떤 사람입니까? 우리 주님이 살아계실 때에는 예수님의 메시아이심을 믿지 않았고, 예수님께서 미쳐서 다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던 그가 우리 주님을 믿어 구원을 받고 보니 주님의 다시 오심을 생생하게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야고보서5:8에서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건하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대는 사도 바울이나 사도요한의 전유물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제자들이 다같이 고대하는 것이었습니다. 베드로는 벧후3:10에서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라고 하셨습니다.
사도 요한은 요한 계시록 전체를 통하여 주님의 다시 오심을 생생하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계3:11에서 "내가 속히 오리니 네가 가진 것을 굳게 잡아 아무도 네 면류관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요한계시록을 마치면서 계22:20에서 "이것을 증언하신 이가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속히 오리라 하시거늘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초대 교회에서도 주님의 재림을 부인하거나 오신다고 하여도 아무 먼 훗날에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경계하고 있습니다. 누가복음12:45에 보면 "만일 그 종이 마음에 생각하기를 주인이 더디 오리라 하여 남녀 종들을 때리며 먹고 마시고 취하게 되면 생각하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각에 그 종의 주인이 이르러 엄히 때리고 신실하지 아니한 자의 받을 벌에 처하리니"고 했습니다. 우리 주님이 더디 오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많았고, 그런 생각은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더 많이 찾아볼 수 있다고 할 것입니다. 오늘의 교회들이 세속적이고 물질지향적이어서 주님의 재림에 대한 힘차고도 생생한 기대심을 가지지 않고 있어 바로 이런 것은 영적으로 병든 징후라고 할 것입니다. 재림에 대한 실재성을 믿는 이들 중에도 지금은 아니고, 먼 미래에 있을 법한 이야기로 알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우리들은 초림하신 주님으로 인하여 구원받았으니 이제 다시 오시는 주님 앞에 아름다운 모습으로 설 수 있도록 우리 신앙을 바르게 세워야겠습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이 땅에 오셔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죄를 지고 가시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시 오시는 주님은 역사를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오시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성도들은 주님의 재림을 나타내는 용어 중에 "파루시아-Parousia"라는 말을 사용하였습니다. 이 파루시아라는 말은 한 나라의 왕이 왕권을 가지고 당신의 나라에 임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었습니다. 왕이 행차하시고 자기 영토에 다스리기 위하여 오는 것을 파루시아라고 하였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과 다시 오시는 것을 연관지으면서 부활은 곧 다시 오시는 것을 예표로 보이신 것입니다.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다시 오신다는 것을 약속하신 것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오십니다. 심판하는 권세를 받아 가지고 오십니다. 우리 주님은 알파와 오메가라고 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처음과 나중이 되시는 것을 말씀합니다. 창조주가 되시고 심판주가 되시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주님의 부활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활은 역사 속에 일어난 사건이지만 참으로 초월적인 사건입니다. 동시 주님의 재림도 그렇습니다. 역사에 접촉해 있지만 동시에 역사를 초월하여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신비한 요소와 초월적인 요소를 다 제거하고 산다면 우리는 믿음을 던져버리고 보는 것만으로 살겠다고 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가 살아있다는 것부터 신비한 일이요, 하나님의 영원하신 계획 속에 들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설 때에만 안식이요, 은총을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믿는 주님은 과연 어떤 분이십니까? 오늘 본문에서는 몇 가지로 정리하고 있습니다.
1. 우리 주님은 부활하셨습니다.
5절입니다.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이 말씀에 "죽은 자들 가운데서 먼저 나시고" 이 말씀은 그리스도는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시고 부활하셨다는 말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 살아계신 그리스도의 연장선상에서 다시 오시는 주님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셨다는 것은 신분을 말하고 십자가는 그의 과업이었습니다.
2. 우리 주님은 그의 피로 우리를 죄에서 해방하셨습니다.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십자가상에서 물과 피를 흘리시면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여 주시고 죄의 속박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우리 주님은 두 번도 아닌 단번에 우리의 죄를 속하여 주셨습니다.
3. 우리 주님은 구름을 타고 다시 오십니다.
7절입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스티븐 트레비스 박사는 성요한 신학교의 부총장이신데 종말론의 전문적인 신학자입니다. 그가 쓰신 End of Story 종말 종말 종말이라고 번역되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죽음은 현실이다. "죽음은 불편한 일이다. 죽음은 정복되었다. 이것이 기독교의 확신이다."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망 권세를 깨치시고 부활하셨고, 하늘로 올리워가셨습니다. 이제 다시 오시는 주님은 어린 양 되시는 사랑의 주님이 아니라, 역사의 심판주로 오십니다.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드러나리라"(고후5:10)고 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책임적인 삶을 살아야 함을 기억하여야겠습니다. 우리의 행위는 곧 심판의 조건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16:27에서 "인자가 아버지의 영광으로 그 천사들과 함께 오리니 그 때에 각 사람의 행한 대로 갚으리라" "행한 대로 갚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여기서 "행한 대로 갚으리라"는 말씀에 주목해야 합니다.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세월이 흐르는 소리, 시계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까뮈는 "죽음에 대한 자각은 인간 실존의 시작"이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우리가 죽는다는 사실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몇 날 남지 않은 시간을 인식할 때 우리의 남은 인생은 정말 의미 있게 사용할 것입니다. 하이데거라는 실존주의 철학자도 "죽음은 인간 실존의 한계"라는 말을 하였습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사망의 권세, 죽음의 한계를 다 허물어버리시고, 부활하셨고, 우리의 부활을 위하여 다시 오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을 사랑하십니다. 그래서 하나 밖에 없으신 아들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어주셨으며, 우리를 구원하여 영원한 하늘나라에 인도하여 들이시고 있습니다. 우리의 귀는 항상 열려 있습니다. 눈이나 입은 닫을 수 있지만, 귀는 언제나 열려있고,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셨습니다. 우리는 역사의 흘러가는 소리를 들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이 땅에서 우리의 삶을 마친 후에 주님이 예비하신 나라에 들어갈 때까지 최선을 다하시는 여러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의 재림을 말씀드릴 때마다 우리는 반드시 기억해야 하는 성경 구절이 있습니다. 마태복음24:36에서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로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는 그리스도 자신마저도 당신이 다시 오시는 날을 모른다고 하셨습니다. 모토(Motto)라는 신학자는 말합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어제 죽으셨고, 오늘 아침 일어나셨으며, 내일 다시 오실 것처럼 살자"고 했습니다. 주님은 나를 위하여 어제 죽으셨으며, 오늘 아침 일어나셔서 부활하셨고, 내일 다시 오십니다. 이런 어제, 오늘, 내일의 사건으로, 살아 있는 신앙을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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