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https://www.youtube.com/watch?v=QEbx7bJlOdc
2024.9.8(주일) 요한복음 20:1~18 ‘내가 주를 보았다’ 예산수정교회
막달라 마리아는 예수님의 무덤을 막았던 돌이 옮겨진 것을 보고 놀라 그 사실을 베드로와 다른 제자에게 전합니다. 두 제자는 무덤으로 달려가 빈 무덤에 놓인 세마포만 확인하고 돌아갑니다. 무덤 밖에 서서 울고 있던 마리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뒤 제자들에게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18절)고 전합니다. 예수님은 일곱 귀신 들렸다가 주님께 고침을 받은 마리아를 찾아오셔서 그녀의 이름을 부르시고 “내가 주를 보았다”라고 전하는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맡기십니다. 우리도 더 이상 실패와 좌절의 빈 무덤만 보며 우는 인생이 아니라, 내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다고 증거하는 삶을 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마리아처럼 부활의 주님을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부활을 실재(實在)로 믿어야 합니다(1~10절).
부활의 주님을 보려면 부활의 실재(實在)를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대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습니다. 하지만 예수님 곁을 지킨 일곱 귀신 들렸다가 주께 고침을 받은 마리아도, 3년간 스승인 예수님과 동고동락한 두 제자도 빈 무덤을 보았지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합니다. 안식 후 첫날 예수님의 무덤에서 돌이 옮겨진 것을 본 마리아가 그 사실을 두 제자에게 알립니다. 그러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9절)는 말씀을 알지 못한 두 제자는 빈 무덤을 직접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부활은 인간의 이성과 경험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래서 부활이야말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입증하고 증명하는 가장 확실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면 죽음 같은 연민에 빠지고, 피해의식의 빈 무덤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내가 예수님의 부활의 실재(實在)로 믿을 때 하나님이 이미 나에게 허락하신 삶과 십자가를 지는 고통 가운데서도 예수님이 경험하신 부활의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단순한 지적인 동의를 넘어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고, 신앙공동체와 함께 하며, 개인적인 경험을 통해 부활의 실재를 확인해 나가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부활의 첫열매이고,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나도 예수님처럼 부활할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어찌 다시 살 수 있나요?”라는 의문을 인간은 끝도 없이 반복하여 물어 왔습니다. 의심 많은 주님의 제자인 도마만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의문을 갖기 때문입니다. 이 궁금증을 주님께서 친히 부활하심으로 깨끗이 해소시키기는 했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부활을 믿기가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완전히 흙이 되었는데,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 매우 궁금합니다.
그런데 놀라지 말아야 합니다. 그때의 부활은 지금의 썩을 육체가 아닌 몸으로 부활하기 때문입니다. 부끄러운 모습도 아닌 광채가 나는 영화로운 몸으로 바뀌는 놀라운 변화의 부활입니다. 어느 공동묘지의 비석(碑石)에 “눈 내리던 아침에 진 한송이 모란, 네가 다시 필 날을 아빠는 기다릴게”가 적혀져 있었답니다.
인간의 무의식 속에는 부활이 들어 있습니다. 부활은 인간의 깊고도 간절한 소망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부활을 믿느냐, 믿지 못하느냐?”만 남을 문제입니다. 우리는 마지막 때의 부활을 믿어야 합니다.
대부분의 사람은 “죽으면 끝이야, 없어지고 마는 거야, 그러니 살아생전에 원 없이 해!”라고 말하면서 살아갑니다. 그것이 아닙니다. 이제 생명의 부활을 믿고 살아가야 합니다.
[상식] 또한 일반적으로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라는 인사말을 많이 하는데요. 이 표현은 교회식에서는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명복' 의 의미는 죽은 뒤 저승에서 받은 복을 뜻합니다. 저승은 비기독교적인 용어이죠. 그리고 명복 또한 불교와 관련이 깊은 용어로 기독교에서는 사용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래서 기독교식 조문 인사말은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라는 말을 사용하면 됩니다. 여기서 삼가의 의미는 겸손하고 조심하는 마음이라는 의미이며 정중하게 몸가짐이나 언행을 조심한다 란 의미입니다. 천국 소망으로 위로를 드립니다." "주 안에서 평안을 누리시기를 기도합니다." "하늘의 위로가 넘치시기를 빕니다."
다시 죽음이 없는 영원히 살게 되는 영원한 삶이 있습니다. 부활이 그렇게도 중요하기에, 참된 믿음인가 거짓된 믿음인가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의 부활은 축복과 영광을 누릴 몸이고, 형벌의 부활은 고통과 저주를 당할 몸입니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죽은 다음에 세상이 있다”고 믿는 사람과 “죽은 다음에는 다른 세상이 없다”고 믿는 사람입니다. 죽은 다음 세상을 믿는 사람은, 정당하게 살아가려고 노력할 것입니다. 반면 죽은 다음의 세상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자신의 마음대로 살아갈 것입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죽은 후의 세상이 있는 것을 믿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부활을 믿으면서 생명의 부활을 축복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적용) 나는 부활을 개념으로 믿습니까? 실재로 믿습니까? 십자가를 지는 고통 가운데서도 부활의 삶을 누리고 있습니까?
2. 고난과 실패 뒤에 계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11~14절).
부활의 주님을 보려면 고난과 실패 뒤에 계신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해서 이른 새벽에 예수님의 무덤을 찾아간 마리아는 예수님이 부활하셨지만 빈 무덤만 바라보며 주님의 시신이 없어졌다고 슬피 웁니다(11절). 그 때 하나님의 천사들이 “여자여, 어찌하여 우느냐”(13절)고 여인에게 묻습니다. 그리고 여인은 심지어 예수님이 바로 뒤에 서 계시는 데도 깊은 슬픔에 빠져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14절). 우리 삶에서 가장 고통스러운 시간에 예수님이 바로 위 뒤에 서 계십니다.
그러므로 내 삶의 고난과 실패의 빈 무덤은 자기 연민과 슬픔의 이유가 아니라, 고난과 실패를 통해 하나님이 일하신다는 소망과 기쁨의 이유입니다. 내가 실패한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은 그 속에서 일하십니다. 내가 하나님의 뜻 안에만 있다면 내가 실패한 그곳에서 하나님은 승리하십니다. 우리도 실직과 질병과 실패의 빈 무덤 같은 사건 앞에서 슬피 울 때가 많습니다. 그것은 자기연민과 낙심과 피해의식에 빠져 바로 내 뒤에 계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나의 등 뒤에서]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주
나의 인생길에서 지치고 곤하여
매일처럼 주저 앉고 싶을 땐
나를 밀어 주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 주
평안히 길을 갈 땐 보이지 않아도
지치고 곤하여 넘어 질 때면 다가와
손 내미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나의 등 뒤에서 나를 도우시는주
때때로 뒤돌아보면 여전히 계신 주
잔잔한 미소로 바라보시며
나를 재촉 하시네
일어나 걸어라 내가 재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일어나 걸어라 내가 새힘을 주리니
일어나 너 걸어라 내 너를 도우리
너를 도우리 ~~
적용) 내 인생의 빈 무덤만 바라보며 자기 연민과 슬픔에 빠져 있지는 않습니까? 나의 실패와 고난을 통해 일하시는 주님을 지체들과 감사함으로 나누고 있습니까?
[큐티인 간증] [예석아, 어찌하여 우느냐, 곽예석]
저는 외조부가 목사님이신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조부모님과 부모님 모두 장로, 권사로서 교회에 열심히 다니셨습니다. 하지만 부모님은 “세상에 돈으로 안 되는 일이 없다”고 하시며 실상 하나님보다 돈을 섬기며 사셨습니다. 제일 어릴 때 한 번은 교회 부흥회에서 헌금을 많이 하고 교인들의 박수를 받으시는 아버지를 보면서 “나도 커서 아빠처럼 살아야지”라고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부모님의 영향으로 저는 점점 돈의 노예가 되어 “다 필요 없고 돈만 있으면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다 저는 결국 교회를 떠났고, 성인이 되어서는 쾌락과 유흥에 빠져 악하고 음란하게 살았습니다. 20대 중반에는 아버지의 사업이 IMF 외환위기로 무너졌지만 “법정관리를 잘 받으면 회생할 수 있다”는 아버지의 말만 믿고 남은 재산을 탕진하며 흥청망청 살았습니다. 하지만 법정관리 담당자들의 비리로 아버지의 회사는 사라졌고, 살던 집마저도 경매로 넘어가며 저희 가족은 남은 것 하나 없이 쫓겨났습니다.
이렇게 회사와 집을 모두 잃는 빈 무덤 같은 사건이 와서야 저희 가정은 예수님을 찾기 시작했습니다(1절). 부모님은 매일 새벽기도를 다니셨지만, 부활의 예수님을 모르시기에 회사가 재건되기만을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는 스트레스를 술로 푸시다가 간경화와 합병증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 일을 계기로 남은 저희 가족은 말씀을 묵상하는 공동체로 인도받게 되었습니다.
그 때 저는 물질과 봉사로 헌신하신 아버지를 데려가신 하나님을 많이 원망했습니다. 그래서 날마다 사라진 아버지와 재산을 찾으며 울부짖었습니다(11절). 그러자 예수님이 울고 있던 마리아에게 다가와 “네가 누구를 찾으냐?”고 물으신 것처럼 제 마음에도 찾아와 주셨습니다(15절). 그리고 회사 부도와 아버지의 소천 사건이 우리 가정을 위한 구원의 사건임을 알려주셨습니다. 이제는 마리아처럼 저도 저와 같은 고난을 겪은 지체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증거하며 살겠습니다(18절). 적용) 사업장의 매출을 제일 먼저 십일조 하는 데 쓰겠습니다. 동생에게 <큐티인>을 선물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전하겠습니다.
3. 말씀으로 찾아와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15~18절)
부활의 주님을 보려면 말씀으로 찾아와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막달라 마리아는 본문 15절에서, 예수님이 “여자여”라고 불렀을 때는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이 “마리아야”(16절)하고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실 때 그제야 영적인 눈이 떠진 마리아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마리아야”라는 말에는 ‘내가 너의 마음을 안다. 내가 너의 아픔을 안다. 마리아야, 내가 너의 삶을 안다. 내가 무엇 때문에 힘들어하는 지 내가 너를 안다’ 이런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쩌면 예수님도 마리아를 보면서 우셨을지도 모릅니다. 결국, 예수님의 ‘마리아야’라고 하는 한 마디에 마리아의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되었습니다. 그녀의 모든 아픔과 슬픔이 예수님의 그 이름불러주심 때문에 눈 녹듯이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이제 영적인 눈을 뜨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리아는 부활의 예수님을 개념이 아닌 실재로 믿게 되었습니다. 이제 마리아는 남이 믿는 하나님이 아닌 내가 믿는 하나님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이제 마리아는 죽음을 초월한 부활의 예수님, 또한 자신도 부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삶이 힘들고 피곤한 이유는 마리아처럼 삶 속에서 만나야할 부활의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나 혼자 있는 것 같은 외로움, 두려움, 비교의식, 사랑받지 못한다는 상실감, 상처와 아픔, 피해의식, 원망과 불평 등은 모두 주님을 만나면 다 치유되고 회복되는 것들입니다.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가사 (예람워십)
그대 폭풍 속을 걷고 있을 때
비바람을 마주해야 할 때
불빛저차 보이지 않아도
그대 혼자 걷지 않을 거예요
[chorus]
두려움 앞에서 하늘을 보아요
외로운 그대여 걱정마요
꿈꾸는 그 길을 또 걷고 걸어요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부활한 자신의 모습을 친히 보여주신 뒤 제자들에게 가서 전할 말을 일러주십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우리가 애통하는 그 삶의 현장에 나타나 사명(使命)을 주십니다. 그리고 일곱 귀신 들린 것처럼 소망 없던 내가 주를 보았다고 증거하게 하십니다. 이처럼 주님은 내가 내 곁에 계신 부활의 예수님을 깨닫지 못할 때, 말씀으로 나를 찾아와 내 이름을 불러주시고 부활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주십니다. 적용) 매일 주시는 말씀으로 나의 곁에서 내 이름을 부르시고 사명을 주시는 주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결 론
말씀을 정리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마리아처럼 “내가 부활의 주님을 보았다”는 고백을 하고 자신만이 아닌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사시는 성도님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부활을 개념이 아니라 실재로 믿고, 고난과 실패의 빈 무덤 같은 사건 뒤에 계신 주님을 믿어야 하며, 말씀으로 찾아와 내 이름을 불러주시는 주님을 믿어야 합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의 삶 속에서 부활의 증인이 되어 마리아처럼 사랑과 봉사를 통해 이웃에게 예수님을 증거하고, 매일 말씀과 기도를 통하여 부활하신 예수님을 실재적으로 만나고 체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