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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0(주일) 잠언 14:20~35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
‘피난처 되시는 하나님’이라는 주제는 성경 전체에 걸쳐서 반복되는 강력한 주제이며, 인생의 폭풍우 속에서 안식을 찾고자 하는 모든 이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하는 영원한 주제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시46:1)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시고 힘이 되시고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시는 g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세상 살면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지 아니하고 자꾸 눈에 보이는 것을 의지하려고 하는 악한 습성이 있습니다.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기 때문에 당장 일이 터졌을 때 엎드려 기도하는 것보다 먼저 사람을 찾아가고 자기가 가진 것을 의지할 때가 있어요. 세상 권력을 의지할 때가 있고 물질을 의지할 때가 있고 자기 몸의 건강을 의지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를 만났을 때 사람을 의지하면 잠깐 도움은 될 수 있지만 근본적인 도움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물질이 잠깐 우리를 도울 수 있지만 영원히 우리를 도울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세상의 권세를 가진 사람이 잠깐 우리를 도울 수 있지만 그 권세를 가진 사람이 우리 문제를 다 해결할 수 없어요.
[적용] 오늘 예배 후에 공동의회를 통해서 교회담보대출연장건을 결의하게 됩니다. 1억 2천의 대출금 중에 이제 4천만원을 갚고 나머지 8천만원에 대한 연장건을 결의하게 되는데요. 요즈음 자꾸 인간적인 생각이 드는 겁니다. 최근 대출이자(변동금리이긴 하지만)가 거의 6.5%가 다 됩니다. 큰 교회에게 편지를 써서 천만원(한광주리)씩 지원해달라고 할까? 돈 많은 분에게 요청해서 은행이자로 빌려서 그렇게 할까? 가만히 있으면 별의 별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면 이것이 다 부질없는 일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문제의 유일한 해결자는 하나님 한 분 밖에 없는 것입니다. 어떠한 절망도 어떠한 고통도 어떠한 괴로움도 주님 앞에 나아가면 주님이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 되셔서 모든 문제를 해결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시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성도 여러분, 이 세상 것으로 해결하지 못할 많은 문제가 있지만, 피난처되신 주님 앞에 나오면 주님이 다 해결해 주세요. 고난이 다가와도 슬픔이 다가와도 문제가 다가와도, 피난처되신 주님만 바라보고 나아가면 고난이 변하여 축복이 되고 환난이 변하여 우리에게 은혜로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어떤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가 되어 주시고 힘을 주십니다. 피난처되신 하나님은 1) 모든 위험과 악으로부터 안전하게 보호해주시는 강력한 요새입니다. 2) 삶의 풍파 속에서 평안과 위로를 주시고 두려움을 극복하게 하십니다. 3)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소망을 주시고, 어려움을 이겨낼 힘을 주십니다. 4) 인생의 끝날까지 함께 하시며 안전하고 견고하게 지켜주시는 영원한 동반자이십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누구에게 피난처가 되시나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묵상해보고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1.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26~30절)
하나님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26,27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하나님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 ‘견고한 의뢰’(26절)가 되시고,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26절)가 되어주십니다. 여기서 “견고한 의뢰”는 ‘강한 믿음과 신뢰’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그 분을 향한 견고한 믿음이 있다는 것이죠.
어떤 믿음입니까? 여호와 하나님께서 나와 내 가정을 구원해 주신다는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내 두 발을 딛는 지지대가 되어 어떤 환난이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게 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여호와께서는 그 환난보다 훨씬 더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이 믿음을 가지고 가정에서 중심을 잡고 가면 그 자녀들도 피난처를 얻게 됩니다.
그런 믿음으로 살아가는 부모를 보며 자녀들 또한 하나님 경외하기를 배우게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잘될 때나 고난이 찾아올 때나 늘 한결같이 부모들은 하나님을 찾는 모습을 자녀들 앞에 보여야 합니다.
27절에,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고 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입니다. 즉 ‘고갈되지 않는 샘’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은 피난처되신 하나님을 경험함으로 끊임없이 공급해주시는 그분의 사랑을 받아 누릴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생명의 샘’과 반대되는 것을 말할 때 ‘사망의 샘’이라고 하지 않고 ‘사망의 그물’이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또 무슨 의미일까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는 사람은 그 누구라도 무엇인가 ‘그물’에 매어 있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자기가 그물에 매어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살아가지요.
배우자의 그물, 자식의 그물, 돈의 그물, 질병의 그물 등에 매어 모두 잡힌 물고기처럼 파닥 파닥 거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물에 매인 물고기가 스스로 그물을 빠져나올 수는 없지요.
빠져나오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마찬가지로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려면 하나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면 내 힘으로는 절대 빠져나올 수 없는 그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도록 하나님이 나를 도우십니다. 그래서 그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면
28절 말씀처럼, ‘왕 같은 신분’이 되어 백성이 많아지므로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지요.
‘백성이 많아진다’는 것은 생명의 샘을 나도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도 마시게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게 하라고 생명의 샘이 고갈되지 않게 하셨는데 나만 좋자고 다른 데 쓰며 욕심내는 것은 주권자의 패망을 가져올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호와를 경외하는 일에 힘쓰는 성도가 되어야 합니다. 유대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기록할 때나 원본을 복사할 때에 “여호와” 란 이름이 나오면 손을 씻고 붓을 빨고 기록하고, 또 “여호와”란 이름이 나오면 또 손을 씻고 붓을 빨아 기록하기를 완성할 때까지 그리 했습니다. 쓰던 붓으로 어찌 크고 두려운 이름을 쓸 수 있겠는가 입니다. 모세 오경(창.출.레.민.신)안에는 “여호와”란 말이 1585번이나 나온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1585번이나 손을 씻고 붓을 빨면서 모세오경을 복사기록했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구약 성경전체를 기록으로 남기려 했을 때에는 얼마나 많이 손을 씻고 붓을 빨았겠습니까?
또한 모든 히브리어에는 발음기호를 달아 읽을 수 있도록 했으나 하나님의 본래의 이름 밑에는 발음기호를 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 이름 아래 인간이 만든 발음기호를 달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의 그 행위는 그 어떤 이방인도 그 범위를 넘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욥시-시편-잠언-전도서 등 구약성경을 읽어보면 믿음의 조상들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그 이름 앞에서 " 부들부들 떨면서 신앙생활을 했는지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코람데오’의 신앙이지요. 오늘날 이방인들이 하나님 섬기는 것을 보면 미신에 가깝고, 하나님 알기를 우습게 알고, 하나님 이름으로 서약해가며 결혼을 해 놓고도 두려움없이 이혼을 밥먹듯이 하고 하나님의 이름으로 서약을 해 놓고도 자기 이익을 위해서는 손바닥 뒤집듯이 합리화 정당화 시키면서 무효화해 버리고, 하나님의 이름을 서슴없이 도용도 하고 더럽히기를 두려움없이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환난이나 핍박이나 어려운 일이 당하면 하나님께서 어찌 피난처가 되어 주겠습니까. 그런 자들을 어찌 ‘하나님을 경외한 자’라고 ‘하나님만 의뢰한 자’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더러운 입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함부로 사용하고 추하고 더러운 행위로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히는 그런 자들을 어찌 하나님이 도와주겠습니까?
잠 14:26의 말씀은 한 마디로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 이름 앞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며 정직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는 다시 말하면 좌로나 우로나 흔들리지 않는 믿음, 즉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신뢰하는 굳건한 믿음을 소유하고 있는 그 사람에게는 인생을 살아가면서 환난이나 어려운 일이 닥칠 때 하나님께서 친히 그와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실 것이라는 약속있는 말씀입니다.
시편 34편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경외하는 방법’을 가르쳐줍니다. 그 방법은 말씀을 암송하고, 말씀을 깊이 있게 연구하며, 매일 예배하고 기도하는 외형적인 것만이 아닙니다. 다윗은 “네 혀를 악에서 금하고 네 입술을 거짓말에서 금하며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르라”고 가르쳐 줍니다(13-14절).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한다는 증거는 성경공부와 예배만이 아니라 삶의 실천적인 모습들을 통해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은 율법에 능통한 자들이었습니다. 오늘날로 얘기하면 성경공부도 많이하고, 제자훈련공부도 잘 받았고, 성경도 잘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모세의 모든 율법을 완벽하게 외우고, 철저히 그 계명을 지키려는 경건의 모양을 가졌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입술에서는 거짓말이 가득하였고, 그들의 마음은 악하였으며, 그들은 선을 따라 화평을 구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눈은 의인을 향해 있으며 그들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이시는 분이십니다(15절). 화평을 이루지 못하고 악한 마음을 품고 입술에 거짓을 말하는 것은 ‘악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여호와를 멸시하는 자’(31절)는 참지 못하고 조급하여 분을 내어 자신의 어리석음을 나타냅니다(29절). 또한 ‘평온한 마음’(30절)을 유지하지 못하고 ‘시기’(29절)하여 뼈를 썩게 합니다. 시기는 단순히 감정적인 문제를 넘어 육체적인 건강까지 해칠 수 있으며,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를 파괴하고, 자신을 고립시키며, 삶의 기쁨을 빼앗아갑니다. 또한 시기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를 흔들고야 맙니다.
사무엘상 2장의 엘리의 아들들은 12절에 “여호와를 알지 못하더라”라고 기록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는 은혜, 우리를 용서하시는 은혜는 너무나 큽니다. 우리에게 왕 같은 제사장의 신분이 주어지는 것이 놀라운 것임에도 거저 얻는 것이기에 우리는 엘리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하나님과 그분의 은혜를 우습게 여길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살아계신 하나님을 믿는 자, 자신이 죄인임을 고백하는 자, 값없이 주시는 은혜를 위해 독생자께서 어떤 값을 치르셨는지를 알고 믿는 자는 하나님을 멸시할 수 없습니다. 값없이 받는 은혜가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 아님을 알기 때문에 하나님을 참으로 존중하며 하나님 뜻대로 행하고자 애쓰게 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큰 잘못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현실적인 유혹이나 작은 탐심으로 하나님의 기준에 살짝 빗나간 일을 하고는 하나님이 그냥 두시면 괜찮은가보다 하고 안심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 하나님을 멸시하는 수준까지 가 있는 것입니다. 자신의 잘못을 다루는 일에서 있어서 그렇고 다른 사람의 잘못을 다룰 때에도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잘못을 반복적으로, 더 크게 저지르는데도 하나님이 그냥 내버려두시고, 나의 죄가 세상에 드러나지 않게 하신다면 우리는 두려워해야 합니다. 엘리의 아들들은 하나님이 요구하신 절차대로 백성들의 제사를 돕는 것에서 죄가 처리되는 것과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를 경험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러지 못했기에 제사는 그들에게 있어서 그저 음식이 나오는 과정일 뿐이었습니다. 그러기에 그들은 은혜로 얻은 제물에 대한 자격을 당연한 권리로 변질시켜 제사를 방해하고 제물을 빼앗았습니다. 반대로 한나는 사무엘이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봉사자로, 섬기는 자로서 바르게 되도록 애썼습니다. 자신의 마음에 사무친 불임의 열망이 응답으로 이뤄졌을 때 그것을 자신의 소유삼지 않고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은 아이 때부터 부모가 자신을 챙겨주는 이유가 하나님 앞에서 바르게 섬기기 위한 것임을 알고 자랐을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는 하나님보다 자신의 아들들을 더 사랑했습니다. 엘리는 자신의 아들들이 하나님을 존중하는 것보다 자신들이 더 우선이라는 인식을 하며 자라게 했음이 분명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들들이 하나님을 멸시하고 우습게 여기게 된 책임을 부모인 엘리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와 엘리제사장의 차이는 바로 ‘여호와를 경외하느냐 여호와를 멸시하느냐의 차이’입니다. 저는 우리 부모를 통해서 우리의 자녀들이 홉니와 비느하스처럼 예배를 멸시하고 하나님을 멸시하는 자로 자라나지 않고, 사무엘처럼 하나님을 바르게 섬기는 자가 되기를 소원하고 기도합니다.
26,27절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에게는 견고한 의뢰가 있나니 그 자녀들에게 피난처가 있으리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은 생명의 샘이니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느니라”
적용) 나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로 살면서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경험합니까?
2.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20~25절)
하나님은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20절에, “가난한 자는 이웃에게도 미움을 받게 되나 부유한 자는 친구가 많으니라”고 합니다.
가난하면 자신은 물론 주변사람들을 힘들게 할 때가 많습니다.
반면에 부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자신감이 넘치는 경우가 많지요.
이렇듯 이 부와 가난이 관계에 많은 영향을 미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런데 21절에,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요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자는 복이 있는 자니라”고 합니다. 부한 자도 가난한 자도 다 하나님이 지으셨습니다. 그렇기에 21절 말씀처럼, 자신이 부하다고 해서 이웃을 업신여기는 것은 그들을 지으신 하나님을 업신여기는 것이기에 죄를 범하는 것입니다.
부한 상황에서도 빈곤한 사람을 불쌍히 여길 수 있는 것이야말로 진정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영적인 관점에서 생각해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소유의 빈곤보다 더 무서운 것은 영적 빈곤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은 하나님이 아닌 재물을 피난처 삼다가 결국엔 영원한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보다 무서운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가장 부유한 사람은 재물을 많이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이 나의 기업이 되심을 알기에 나 같은 죄인을 자녀로 삼아주신 은혜에 감사하며 하나님께 받은 것을 나누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기업으로 받은 우리는 하나님이 없어 영적으로 빈곤한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내가 만난 하나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들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갖고 나의 고난과 죄패를 약재료 삼아 간증하며 나를 살려주신 주님을 전해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22절에서 말하는 ‘선을 도모하는 삶’입니다.
그러면 23절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런 모든 수고에 이익이 있다”고 하십니다.
그것은 곧 수많은 영혼이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추수의 기쁨입니다.
그 기쁨은 마치 농부가 결실하며 느끼는 기쁨과 즐거움이며 한 영혼을 귀히 여기시는 하나님의 기쁨이자 하나님이 우리에게 허락하신 최고의 기쁨입니다.
이것이 바로 재물이 아닌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는 사람이 누리는 기쁨입니다.
22절 말씀을 함께 읽겠습니다. (잠 14:22) “악을 도모하는 자는 잘못 가는 것이 아니냐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는 인자와 진리가 있으리라” 이웃을 헤치기 위하여 악을 꾀하는 사람들, 음모를 꾸미는 자들은 잘못된 길을 가는 것입니다. 그들이 가는 길은 멸망과 심판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22절에 “악을 도모하는 자는 잘못 가는 것이 아니냐”고 했습니다. 여기서 ‘잘못 간다’는 것은 ‘비틀 거리는 것이 아니냐?’,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이 아니냐?’는 뜻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타인을 헤치려 하거나 피해를 주려고 악을 꾸미는 자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바를 끝내 이루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헤매며, 방황하는 실패자의 삶을 살아가게 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22절에 ‘선을 도모하는 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바라보며, 경건하게 살아가는 자를 뜻합니다. 여기에서 "도모한다"고 번역된 말(하라쉬)은 "꾸며냄", "경작함", 또는 "제작함" 등의 뜻을 가진 말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본문에서 말하는 "선을 도모하는 사람"은 일시적으로 선을 행하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준비하고 선을 행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때로 마음을 굳게 먹고 선을 행하기로 결심합니다. 그러나 선을 행하다 보면 때때로 수많은 역경과 난관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때에 많은 사람들이 쉽게 낙심을 하고 선을 행하는 일을 중단하곤 합니다. 그러나 지혜로운 사람은 어려운 때에도 낙심하지 않고,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계속해서 선을 행합니다. 타인을 향한 자비심을 갖는 것 역시 ‘선을 도모하는 자의 특징’입니다. 이처럼 선한 것을 생각하고 계획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비를 받고, 그들의 생명을 구원하는 진리를 얻게 됩니다. 그러므로 선을 도모하는 것은 단순히 좋을 행위를 하는 것을 넘어, 하나님의 법을 따라 정의롭게 살고, 이웃을 사랑하며 선을 행하는 태도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을 도모하는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빈곤한 자를 불쌍히 여기며 차별하지 않습니다(21절). 잠언서 저자는 이러한 사람에게 ‘인자와 진리’(22절)가 있을 것이라고 약속합니다. 하나님은 인자(신실)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지켜주십니다. 하나님은 어려움 속에서 인내하며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 좋은 열매과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약속하신 말씀(진리)대로 인내로 선을 행하는 자들에게 축복과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선을 도모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주십니다. 따라서 선을 도모하는 자, 즉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하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과 가까워지고, 하나님의 보호와 인도를 받게 됩니다. 또한 물질적인 풍요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선한 삶을 살아야 할 책임성이 있습니다. 또한 선을 행하면 반드시 복을 받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나의 선한 행동이 주변 사람들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복음의 통로로 쓰임받게 됨을 기억해야 합니다.
적용) 내 옆에 있는 가난하거나 연약한 자를 향해 어떻게 선을 도모하겠습니다.
[큐티인묵상간증] [아버지를 업신 여긴 아들, 김영민]
저와 형은 제가 네 살 때 보육원에 보내져 부모님의 얼굴조차 모르고 자랐습니다. 보육원 친구들은 부모님이 없다는 이유로 저희를 거지 취급하며 따돌렸습니다(20절). 게다가 선생님들의 체벌과 보육원 형들의 폭력까지 더해져 보육원 생활은 그야말로 생지옥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몇 년후, 형이 학교 폭력으로 보육원에서 쫓겨나게 되자 아버지가 형을 데리러 오셨습니다. 이 지경이 될 때까지 우리 형제를 내버려 둔 아버지가 밉고 화났지만, 한편으론 ‘나한테도 아빠가 있구나’라는 안도감에 눈물이 났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는 몇 달 후 형의 퇴소금을 빼앗고는 형을 집에서 내쫓았습니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저는 아버지를 더 원망했고, 이를 갈며 성공을 다짐했습니다. 그래서 스무살에 보육원을 나온 뒤로 공장에 들어가 열심히 일했습니다. 그러면서 밤에는 선배들과 어울려 술을 마시며 유흥업소를 전전했습니다.
그렇게 황폐한 삶을 살던 어느날, 저는 보육원 선생님의 권유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교회에서 처음으로 제 아픔과 수치를 공감하며 울어주는 지체들의 사랑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며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모든 사건이 나를 사망의 그물에서 벗어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계획임도 깨달았습니다(27절). 그리고 아버지가 받았을 상처와 고난이 보였고, 아버지를 예수 믿게 해준 최고의 부모라고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최근 저는 아버지와 다시 연락하며 지냅니다. 아버지가 오늘 형제에게 미안해하며 거듭 사과하셔서 관계도 점차 회복 중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이웃을 업신여기는 자는 죄를 범하는 자”라고 하는데, 우리 형제를 보육원에 버렸다며 아버지를 업신여겼던 것을 회개합니다(21절). 이제는 하나님을 몰라 궁핍한 아버지와 형의 구원을 위해 애통함으로 기도하겠습니다(31절). 또한 저와 같은 아픔이 있는 지체들의 고난과 슬픔을 잘 들어주겠습니다. 적용하기) 아침에 큐티를 마치면 아버지와 형이 구원받도록 기도하겠습니다. 제가 생활했던 보육원에 찾아가 아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겠습니다.
3. 슬기롭게 행하는 자에게(31~35절)
하나님은 슬기롭게 행하는 자에게 피난처가 되어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슬기롭게 행하는 신하는 왕의 은총을 입게 됩니다(35(상))." 여기에서 "슬기롭다"고 번역된 말(마세킬)은 말은 '신중하다', '심사숙고하다', 이지적이다'란 뜻을 가진 말입니다. 신하들은 왕을 보좌할 때에 신중하고 지혜롭게 처신해야 합니다. 이러한 신하는 왕을 영화롭게 하고 그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왕은 이러한 신하를 총애하고 그를 가까이 합니다. 신하는 지혜롭게 왕을 보좌해야 하고 왕은 그러한 신하를 표창해야 합니다. 국가는 어진 임금과 지혜로운 신하가 있을 때에 형통할 수 있습니다. 임금이 충신의 말을 듣지 않고, 간신의 아첨에 귀를 기울이면 나라를 망하게 합니다. 지혜는 왕에게도 필요하며, 또 신하에게도 필요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왕은 지헤로운 신하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그를 가끼이 합니다. 또한 여호와를 경외하는 신하도 지혜롭고 사려 깊은 행동으로 왕을 영화롭게 하고, 그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왕과 신하는 나라는 번영과 형통으로 이끕니다. ‘슬기롭게 행하다’라는 말은 다른 성경에 ‘지혜롭게 행하다’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35절은 단순히 왕과 신하의 관계를 넘어,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서 지혜로운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슬기롭게 행하는 자는 ‘명철’(33절)을 얻게 됩니다. 지혜로운 자는 단순히 지식이 많은 사람이 아니라, 삶의 문제들을 해결하고 올바른 판단을 내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슬기로운 사람은 말씀을 묵상함으로 깊이 생각하고, 다양한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며, 최선을 선택을 합니다. 지혜로운 자로 살려면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묵상하고 그 가르침에 따라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지혜는 하나님께로부터 나옵니다. 말씀을 통해 우리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얻고, 삶의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지혜를 얻게 됩니다. 지혜로운 자는 다른 사람을 존중하며 살아갑니다(31절). 겸손한 마음으로 무궁무진한 지혜의 보고되신 하나님께 지혜를 구하고, 배울 때 우리는 놀라운 지혜를 얻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욕을 끼치는 신하는 그의 진노를 당합니다(35(하))”
지혜로운 신하는 왕을 영화롭게 하고 그의 은총을 받지만, 미련한 신하는 조급하고 왕을 욕되게 하고 왕의 진노를 사게 됩니다. 간신은 나라의 안위보다 자신의 유익을 좇아 움직입니다. 간신은 왕의 마음을 얻기 위해서 간교한 아첨으로 왕의 눈과 귀를 멀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왕은 간신을 멀리해야 하며, 그들에게 중요한 일을 맡기면 안됩니다. 또한 간신은 아니지만 지혜가 없는 미련한 신하들도 있습니다. 이러한 신하는 열심히 일을 하지만 지혜롭지 못해서 결국 왕과 나라에 누를 끼치게 됩니다. 미련한 신하는 왕의 진노를 사게 되고 결국 왕궁에서 쫓겨나게 됩니다. 왕(또는 지도자)은 하나님을 경외하고 지혜로운 신하를 귀중히 여기고 그 말에 귀를 기울야야 합니다. 왕이 간신을 멀리하고 충신을 가까이 할 때에 그의 나라와 통치가 견고해 질 수 있습니다.
적용) 하나님의 신하인 내가 슬기롭게 행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결 론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예화] 서울을 떠나 부산으로 가는 삼등 열차에, 초등학교 1학년으로 밖에 보이지 않는 어린 학생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는 동행하는 어른들도 없는지 낯선 사람들 틈에 끼여 있었으나 조금도 근심스러운 기색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혼자서 가는 길이지만 즐겁기만 한지 연신 창 밖을 내다보며 기쁜 표정으로 싱글벙글하고만 있었습니다. 같이 앉았던 사람들이 그 어린 소년의 의젓하고 태연스런 태도에 커다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어린애의 한 가지 버릇은, 기차가 정거장에 멎을 때마다 밖으로 달려나갔다가 돌아와 자기 자리에 앉는 것이었습니다. 그 일을 이상하게 여긴 나머지 거기 둘러앉았던 어른들이, 매번 어딜 다녀오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그 어린이는 자랑스럽게 대답하기를, '아빠한테 갔다오는 거예요'라고 하였습니다. '너희 아빠가 어디 계신데?'하고 그들은 재차 물었습니다. '우리 아빠가 이 기차의 기관사예요.' 하며 소년은 자못 의기양양하게 손님들을 둘러보았습니다.
기관사를 아버지로 가진 이 소년은 그처럼 자신만만할 수 있었습니다. 소년은 자기 아버지가 세상에서 '최고'라고 믿었고, 그의 아들인 자기의 신분을 자랑스럽게 여겼으므로 그 기나긴 여행 중 아무런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우리의 인생 여정의 기차를 조종하는 기관사가 바로 우리들의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그 분의 저와 여러분의 피난처되시는 아버지 되십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경외하시고, 선을 도모하시며, 슬기롭게 행하심으로 ‘하나님을 나의 피난처’로 삼아 늘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