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봉(碧峯) 변혼(卞渾)
- 임란 30여 차례 전투에서 선봉장으로 활약한 장군 -
변혼(卞渾,1559~1626)의 자는 명숙(明叔)이고, 호는 벽봉(碧峯)이다. 본관은 밀양(密陽)이고, 거주지는 거창이다. 고려 때 산원(散員) 휘 고적(高迪)이 그 시조이다. 그 후 휘 옥란(玉蘭)이 계시니 공양왕(恭讓王) 때에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냈고 좌찬성(左贊成)에 증직 되었다. 이분이 중량(仲良)을 낳으니 고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문인으로 벼슬은 밀직사좌승지(密直使左承旨)를 지냈으며 스승과 함께 절의를 지켰다. 호는 춘당(春堂)인데, 호가 춘정(春亭), 시호가 문숙공(文肅公)인 동생 계량(季良)과 더불어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을 날렸으니 후에 이조판서(吏曹判書)로 증직 되었다.
변혼의 고조(高祖)는 충순위(忠順衛) 신보(申甫)이고, 증조(曾祖)는 구산(龜山) 벽(壁)이다. 그는 생원(生員)으로서 기묘년 현량과(賢良科)에 추천되었으나 은거하여 과거시험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화(禍)가 일어나 노천 김식(老泉金湜) 선생이 이 고을에서 순도(殉道)하였는데 이때에 김선생의 빈소를 찾아가 통곡하고 염습(殮襲)하다가 얻은 유소(遺疏)를 조정에 전하였다. 사람들이 이 어려운 일을 했다고 하였다. 후에 지평(持平)으로 증직되었다. 조(祖)는 우성(友誠)이며 참봉이며 공조(工曹) 참의(參議)로 증직 되었고, 고(考)는 희수(希琇)로 성품(性稟)이 효순(孝順)하고 봉양(奉養)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형제와의 우애(友愛)가 지극히 돈독했다. 그리고 스승 곡굉헌 문언흡(曲肱軒文彦洽)을 위해 마음으로 상(喪)을 입었으니 향인들이 이를 칭송하였다. 순효봉양(純孝奉養)하셨다. 비(妣)는 김해배씨(金海裵氏) 응수(應秀)의 따님이다.
변혼은 명종(明宗) 14년 을미(乙未,1559년)에 거창 북주곡리(北主谷里)에서 태어났다. 그는 14세에 아버지를 여의었고, 17세에 어머니마저 여의게 되어, 일찍 부모를 여의니 종신(終身)토록 이를 질통(疾痛)하여 매년 아버지의 제사 때 마다 눈물을 흘리며 슬피 애통(哀痛) 했다. 계부(季父) 섬기기를 아버지 섬기듯 하였다.
선생은 1591년 30세에 무과에 합격하였고, 이듬해 임진년(1592)에 바다 오랑캐가 회오리바람처럼 쳐들어오니, 주군(州郡)이 와해(瓦解)되었다. 선생이 김면(金沔) 의병장 휘하의 의병부대에 들어가서 30여 차례의 전투 때마다 선봉장이 되어 많은 전공을 세웠다
1) 고령전투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고 왜군이 한반도에 발을 내디딘지 1개월도 못되어 선조는 의주로 파천하였다. 이에 왜군은 서울을 함락시킨 뒤 평양까지 진격하였다. 그 후 왜군은 조선에 장기간 머물 것을 생각하며 군량미 확보를 위해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진출을 꾀하고 이었다.
왜군이 호남으로 가는 길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남해바다로 들어가는 것이고, 또 하나는 육지를 통해 가는 것이다. 바다로 들어가는 길이 수월했지만 남해바다는 이순신 장군이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다. 그래서 왜군은 낙동강 서편인 경상우도 거창(居昌), 합천(陜川), 진주(晉州), 하동(河東)을 공격한 뒤 호남으로 향하려고 하였다.
왜군은 지나가는 고을마다 약탈을 일삼고 고을 백성들을 잔인하게 살해하는 등 악행을 일삼았다. 하지만 고을 관리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어려움에 처한 백성들을 버리고 앞장서서 도망가기에 바빴다. 이때 내 고을은 내 손으로 지킨다는 결의를 다진 사람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고령(高靈)에서는 김면(金沔,1541~1593) 의병장, 의령(宜寧)에서는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의병장, 진주에서는 진주부사(晉州府使) 김시민(金時敏,1554~1592), 거창(居昌)에서는 문위(文緯,1554~1631) 의병장이 분연히 떨쳐 일어났다.
1592년(선조 25) 6월 낙동강 주변인 고령에서 전투가 벌어졌다. 고령전투가 벌어지기 전부터 김면은 거창을 왜군에 넘겨주면 주변고을이 위험하다는 인식을 확고히 하고 있었다. 김면은 거창에 두었던 본진을 고령으로 옮겨 포진하도록 하였다. 낙동강은 부산과 서울을 연결하는 왜군의 주요 보급로였을 뿐 아니라, 수상 교통으로서도 조선군에게나 왜군에게나 모두 지리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그래서 김면은 낙동강 포구인 개산포(開山浦: 일명 開經浦, 현 개포) 지리에 밝은 박정번에게 물속에 말뚝을 박도록 하고 참모장인 문위와 곽준에게 강가에 매복하도록 하였다. 이때 6월 9일 현풍(玄風)에서 낙동강을 따라 내려오던 2척의 왜선을 나포하고 80여 급의 왜군 목을 베며 대승을 거두었다. 그리고 임금의 개인 재물을 넣어두던 내탕고(內帑庫)에 있던 보물을 노획하여 초유사에게 보낸 뒤 임금이 머물고 있는 행재소(行在所)로 보내도록 하였다. 이때 선생(변혼)이 선봉장으로 나아가 김면(金沔)의 의병군이 대승을 거두는데 일조를 하였다.
2) 우척현 전투
그 후 7월 10일 김면은 고바야가와 타가가게(小早川降景,1533~1597)가 2,000여 명의 왜군을 이끌고 곡창지대인 호남으로 가기위해 금산(金山, 현 김천)으로 진격한 뒤 우척현(牛脊峴)을 넘어 거창으로 진격할 것이라는 첩보를 입수하였다. 이는 바닷길을 통해 호남으로 들어가려던 왜군의 진출은 이순신 장군으로 인해 막히고 진주지방에서는 곽재우 의병장 의해 막히자 우회로 택한 길이다. 김면은 의병군을 거창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우척현, 지례(知禮), 사랑암(砂郞岩) 등지에서 매복하도록 하였는데, 특히 우척현 계곡에 1,000여 명의 의병을 매복하도록 하였다. 우척현은 거창과 개녕(開寧) 사이에 있는데 경상도에서 호남으로 가기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고개였다. 제법 험준한 지형이었지만 왜군이 우척현을 넘어 올 것이라는 판단했기 때문이다.
금산(金山, 현 김천시)를 점령한 왜군의 원래 계획은 지례를 공격한 뒤 7월 12일 우척현을 넘어 거창으로 향하려는 작전을 실행하였다. 그러나 김면 의병군이 매복하였다가 갑자기 꽹과리를 치고 징과 북을 두드림과 동시에 변혼 선생이 좌부장 황응남(黃應男)과 우부장 김준민(金俊民)을 거느리고 선봉장으로 달려 나가자 매복했던 의병들이 천지를 뒤흔들 만큼 큰 함성을 지르며 동시에 왜군을 공격하였다. 이에 왜군은 혼비백산하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당시 우척현 전투에는 험준한 지세에 밝은 산척(山尺)이라 불리던 약초꾼과 사냥꾼들이 대거 참전하였기 때문에 지세에 밝지 못한 왜군을 물리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의병군은 힘을 합쳐 왜군의 선봉을 꺾어버리고 대승을 거두게 되었다. 이때 변혼은 임진왜란 산악전의 대표적인 전투로 일컬어지는 우척현 전투에서 선봉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해 왜군의 호남 진출을 철저히 방어하는 데 큰 공훈을 세웠다.
그 후 7월 20일에는 두곡(豆谷)전투가 벌어졌는데, 이때도 변혼은 선봉장으로서 활약하며 전투를 승리로 이끄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7월 29일에서 8월 1일 사이에 벌어진 지례 전투에도 참전하였다. 당시 김면은 두곡 전투를 치른 후 지례인근에 의병군을 매복시켰다가 지례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 500여 명을 포위하였다. 그리고 중위장(中衛將) 서예원(徐禮元)으로 하여금 왜군을 공격하게 하였다. 이때 사창(社倉)과 객사 아문(衙門)에 머물러 있던 왜군을 화공(火攻)으로 공격하였고 살아서 달아나는 왜군을 금산로에 매복하고 있던 의병들로 하여금 섬멸하도록 하였다. 이때도 변혼은 선봉장으로서의 역할을 다하였다.
8월 3일 거창의 사랑암에서 의병군과 왜군이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때 의병장 김면은 죽음이 있을 뿐 물러설 수 없다며 진격하였고, 김시민 또한 왜군의 진영으로 돌격하였다. 이 전투에서 변혼은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왜군을 지례까지 몰아내는 데 큰 힘을 보냈다.
12월 4일 성주(星州)전투가 벌어졌다. 당시 왜장 모리 테루모토(毛利揮元)가 성주성(城主城)을 점령한 채 그곳에 웅거하고 있었다. 김면은 이들을 물리치기 위해 전라도 의병장 최경회(崔慶會)에게 지원군을 보내줄 것을 청하였다. 최경회가 지원군을 보내주자 김면은 경상우도 의병장 정인홍(鄭仁弘)과 전라좌도 의병부장 장윤(張潤)을 성주성으로 보내 공격하도록 하면서 성주전투가 벌어졌다. 이 전투는 다음해인 1593년 1월 5일까지 수차례 벌어졌다. 결국 의병군의 공격을 견디지 못한 왜군은 밤을 틈타 성주성을 몰래 빠져나가 달아나 버렸다. 이때도 변혼은 선봉장으로서 자신의 책임을 다하며 성주 전투를 승전으로 이끄는데 많은 활약을 펼쳤다.
그 후 김면 장군이 전라도 의병과 합세하여 선산(善山)에 주둔하고 있는 왜군을 격퇴시키려고 준비 중에 병을 얻어 3월 11일 생을 마감하였다.
변혼은 김면장군 휘하에서 고령전투, 우척현전투, 두곡전투, 지례전투, 사랑암전투, 성주전투, 방해현전투, 개녕(開寧)전투, 석곡(石谷)전투, 궁장(弓藏)전투 등 크고 작은 30여 차례의 전투에 참전하여 선봉장으로 활약하면서 의병군의 승리로 이끌 수 있도록 이끄는데 많은 전공을 세웠다.
1598년에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명을 받들어 명나라 장수를 거창 가조현에서 접반(接伴) 하였다.
1602년 무겸(武兼) 선전(宣傳)에 임명되고, 1604년에 거제현령(巨濟縣令)에 임명 되었고, 1605년에 물러났다.
1613년에 위원군수(渭原郡守)가 되었으며, 1615년에 삭주(朔州, 현 평안북도 동진강변) 부사(府使)에 임명되었다.
1605년 4월 조정에서는 선생을 비롯한 9,060명을 선무원종공신으로 녹훈하였다.
1832년(순조(純祖) 32년)에 병조참판(兵曹參判)으로 증직 되었다.
누구나 전쟁터에 서면 목숨을 아까워하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두려움을 물리치고 임진왜란 때 수많은 관군과 의병들이 왜군과 맞서 싸웠다. 그중에서도 변혼은 30여 차례나 왜군과 가장 먼저 마닥뜨리는 선봉장으로 활약하였다. 변혼의 지극한 충절이 없더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의 용맹과 충절은 세상에 널리 알릴 가치가 충분히 있는 것이다.
변혼은 선산김씨(善山金氏) 공익(公翼)의 딸과 결혼하여 일남삼녀를 낳았다. 아들은 창후(昌後)이고, 딸들은 죽산인(竹山人) 박문(朴汶), 사인(士人) 이난미(李蘭美), 사인(士人) 윤사임(尹思任)에게 출가 하였다.
변혼은 1626년 3월 25일 병으로 생을 마감하였다. 묘소는 거창현 북 백현(白峴) 계좌(癸坐) 언덕에 있고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이 찬한 묘갈명(墓碣銘)이 있으며, 전 경북대학교대학원장 서수생(徐首生) 박사가 찬한 신도비명(神道碑銘)이 있다.
【참고문헌】
『삭주공유사(朔州公遺事)』.
『선무원종공신록권(宣武原從功臣錄券)』.
『밀양변씨세보』.
『영호남 임진난의병활동의 역사적재조명』, 사단법인 임진란정신문화선양회, 2011.
『의병대장 송암선생 임란창의』, 도암서원, 2011.
백 종 숙 / 거창향토사연구소 연구위원
[출처] 벽봉(碧峯) 변혼(卞渾)|작성자 암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