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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17(주일) 잠언 18:1~12 ‘견고한 망대되시는 하나님’
오늘 본문 10절에 나오는 “견고한 망대”는 그 시대에 방어와 보호의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이 구절은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이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을 얻으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견고한 망대‘는 당시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녔습니다. 고대 도시들에게서는 외부의 침입자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과 망대(탑)을 쌓았습니다. 망대는 적의 공격에 대비하여 적의 움직임을 감사하고, 위험이 닥쳤을 때 사람들에게 피할 곳을 제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견고한 망대“는 그만큼 튼튼하고 안전한 보호처를 의미합니다. 따라서 이 구절에서 ”여호와의 이름“이 ”견고한 망대“라고 표현된 것은 하나님을 의지하면 마치 안전하고 튼튼한 성의 망대에 숨는 것처럼, 인생에게 다가오는 온갖 어려움과 위협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음을 의미합니다. 즉, ”견고한 망대“는 단순히 건축적인 구조가 아니라, 하나님께 의지하고 그 분의 보호를 받는 믿음을 강조하는 비유적인 표현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을 ”견고한 망대“로 삼는 자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할까요?
1. 참 지혜를 배척하지 않고 수용합니다(1~3절).
하나님을 “견고한 망대”로 삼는 자는 참 지혜를 배척하지 않고 수용합니다. 오늘 1절에, “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는 자기 소욕을 따르는 자라 온갖 참 지혜를 배척하느니라 ”고 합니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는 사회적 존재입니다. 그런데 왜 무리에게서 스스로 갈라지는 자가 나온다 할까요? 자기 소욕을 따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자기 소욕을 따르는 게 결국 나 혼자인 거가 되는 것이지요. 혼자 사는 게 편하고 함께 신앙생활하는 것도 귀찮으니 나 홀로 신앙을 부르짖고 나 혼자만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것이죠. 그런데 성경은 그것이 결국 참 지혜를 배척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나 혼자 편하게 살고 싶은 마음에 공동체를 떠나려는 미련함이 참 지혜를 배척하는 것이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지혜를 배척하는 자의 특징은 고독을 즐기고 다른 사람들과의 교제나 상호작용을 피하는 성향을 가집니다(1절). 교회에 와서도 예배만 드리고 가는 것이죠. 소그룹 모임에도 참석하지 않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옳다고 믿는 것을 고수하며 신앙생활을 합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진정한 지혜를 얻기보다는 자기만의 좁은 관점에 갇히게 됩니다. 여러분은 공동체의 지체들과 함께 신앙생활하며 삶을 나누는 것이 기쁜가요? 나 혼자 있는 것이 기쁜가요?
2절에, “미련한 자는 명철을 기뻐하지 아니하고 자기의 의사를 드러내기만 기뻐하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미련한 자’는 ‘영적이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또한 이들은 자기 주장이 강하고 교만하여(2절),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지혜를 수용하기보다 자신의 고집과 자아를 드러내려합니다.
반면에 지혜로운 사람은 경솔하게 행동하지 않고 행동 하나를 해도, 말 한마디를 해도 영적으로 깊게 묵상하며 구원 때문에 할 수도, 안 할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기주장만 내세우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만 하고, 내 생각만 드러내는 철없는 자가 바로 미련한 자입니다. 혹시 내가 이런 사람이 아닌가 자신을 돌아보시길 바랍니다. 3절에서, 그렇게 사는 결과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악인들은 반드시 멸시를 당하고 고개를 들 수 없을 정도의 능욕을 당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이들은 부정적인 마음을 가지고 타인을 비방하거나 공격해서 결국 주변과의 관계도 악화시키고 자신에게도 해로운 결과를 초래합니다.
이들은 참 지혜를 따라 회개하기 보다는 죄를 가볍게 여기고 아무 거리낌 없이 행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입에 담을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한 일을 도모하는 사람들이며 당장에는 이득을 보고 모든 사람 위에 군림할 수도 있습니다.
지혜로운 자도 때로는 그렇게 사는 사람들이 너무 두려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럽고 예수 믿는 것이 마치 손해 보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악을 반드시 기억하시고 그들로 멸시와 능욕을 당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참 진리 되신 예수님 안에 사는 유한한 기쁨을 참 지혜되신 예수님을 무시하고 박해하는 미련한 자가 겪는 영원한 고통과 바꾸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예수님을 믿어서 손해 봤다고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까? 할 수 만 있다면 손해보고 사십시오, 그러나 그렇게 손해본다고 손해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 손해를 주님이 몇 배로, 아니 몇 십배로 갚아주십니다.
반대로 참 지혜인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를 수용하는 자는 타인과 소통하고 교제하며 겸손하게 타인의 지혜를 받아들입니다. 그들은 고립되기보다 공동체 안에서 더 큰 지혜를 추구하고 성장하려는 겸손한 태도를 보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의견을 과시하기보다는 말씀안에서 주시는 명철을 기뻐하며 배우려는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자는 미련한 자가 받는 멸시나 부끄러움 대신 그들의 겸손한 태도로 인해 공동체에서 존경과 신뢰를 받게 됩니다. 결국 참지혜인 하나님의 말씀과 믿음의 공동체에서 주어지는 말씀의 지혜를 배우고 수용하여 결국 견고한 망대되시는 지혜의 하나님으로부터 안전함을 얻게 됩니다. 바라기는 우리 수정교회 성도님들이 다 참 지혜되신 예수님과 하나님의 말씀과 공동체의 권면을 기쁘게 여기며 함께 믿음생활하시는 성도님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적용) 교회 공동체에서 받은 지혜로운 훈계 중 내가 귀 기울이지 않고 스스로 멸시하여 배척한 것을 무엇입니까?
2. 사람을 죽이는 말대신 살리는 말합니다(4~8절).
하나님을 “견고한 망대”로 삼는 자는 사람을 ‘죽이는 말’이 아니라 ‘살리는 말’을 합니다. 4절에 “명철한 사람의 입의 말은 깊은 물과 같고 지혜의 샘은 솟구쳐 흐르는 내와 같으니라”고 합니다. 명철한 사람은 자기 생각만 드러내는 ‘얕은 물’이 아니라 길어내기 어려운 ‘깊은 물’과 같은 사람이라고 합니다. 요동함 없이 말을 아낄 줄 알지만 그러다가 한 마디 말을 해도 ‘영혼에 생기를 주는 말’을 하는 사람인 것이죠.
인간의 언어는 큰 힘을 가지고 있으며, 그것이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한다는 가르침이 여러 곳에서 나타납니다. 성경은 말의 힘과 그에 따른 결과를 경고하거나 교훈을 줍니다.
사람을 살리는 지혜로운 말이 ‘깊은 물’과 ‘샘물’처럼 사람을 풍성하게 하고, 시원하게 합니다. 즉 사람을 살리는 말은 다른 사람을 세워주고 믿음으로 다시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주며 믿음으로 격려합니다. 그러나 “미련한 자의 입술은 다툼을 일으키고 그의 입은 매를 자청하느니라”(6절)고 합니다. 미련한 자는 경솔하고 무분별한 말을 하여 다툼을 일으키고 자신에게도 해를 끼칩니다(7절). 또한 8절에 “남의 말하기를 좋아하는 자의 말은 별식과 같아서 뱃속 깊은 데로 내려가느니라”고 합니다. 우리가 얼마나 남의 말하기를 좋아합니까? 내 이야기를 별로 안 해도 남의 이야기는 그렇게 침을 튀겨가며 할 때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것이 별식과 같다니 또 얼마나 맛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맛있다고 먹어치운 그 ‘별식과 같은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씻을 수 없는 수치와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줍니다. 남의 말을 함부로 하는 것이 얼마나 큰 악인지 알아야 합니다. 아무도 이 부분에서는 자유롭지 못할 것입니다. 저도 이런 유혹을 받을 때가 너무 많이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그렇게 하고 후회할 때도 있지요, 그런데 말씀을 통해 인간이 100% 죄인임을 알게 되고 환경에는 장사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면 그런 말을 점점 하지 않게 되죠. 저와 여러분은 남의 이야기를 별식처럼 여기며 여기저기 전하고 다니지는 않나요?
즉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는 사람은 지혜롭고 신중하게 말하며, 상대방의 유익을 생각하는 긍정적인 태도를 지니는 반면, 죽이는 말을 하는 사람은 경솔하고 무분별하여, 타인에게 상처와 갈등을 초래하고 자신도 해를 입습니다.
사람이 하는 말은 크게 ‘죽이는 말과, 살리는 말’이 있습니다.
죽이는 말은 비수가 되어 상대방을 우울하게 만들고 용기를 꺾어 버리고 삶의 소망을 없애 버립니다. 그리고 그 사람을 소극적으로 만들고 열심을 떨어뜨리고 매사를 비판적인 사람이 되게 합니다.
또 죽이는 말은 "할 수 없다, 안 된다"라는 부정적인 말을 하고 불평과 험담과 원망을 하고 다른 사람에 감정을 상하게 하고 오해를 불러일으키게 하며, 남을 흉보는 말을 자주하고, 과격한 말과 더러운 말로 남을 비방함으로서 사람을 낙심케 만들고, 결국 그 말을 상대방 사람을 죽이는 말이 됩니다. 잠언 18:21 “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으니, 이를 사랑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이 구절은 혀, 즉 언어의 힘이 죽음과 생명을 모두 결정할 수 있다는 경고입니다. 부정적이고 해로운 말은 사람을 죽음으로 이끌 수 있고, 긍정적이고 파괴적인 말은 관계나 삶을 파괴할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4:29 “썩어질 말을 너희 입에서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 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에베소서에서는 부정적이고 해로운 말을 피하라고 가르칩니다. 부정적인 언어는 사람을 상처 입히고, 신앙 공동체를 분열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살리는 말은 "감사의 말, 세워 주는 말, 위로의 말, 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말로서 그 말을 들으면 꿈과 희망이 생깁니다. 위로하고 격려하며 칭찬하는 말을 함으로서 낙심에 빠졌던 사람이 용기와 소망을 갖게됩니다. 더구나 말씀 묵상에 근거한 긍정적인 말은 상대방을 세워주고 자부심을 갖게 만듭니다. 또한 삶 속에서 항상 ‘고맙습니다, 미안합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수고했습니다’는 말을 자주 함으로서 모든 사람에게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잠언 15:4 “온유한 혀는 생명의 나무이나, 비뚤어진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이 구절은 온유한 혀가 사람을 살리고, 격려와 위로를 준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반대로 비뚤어진 혀는 사람의 마음을 상하게 하며, 갈등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잠언 16:24 “선한 말은 꿀송이 같아서 마음에 달고 뼈에 양약이 되느니라.”
선한 말은 사람에게 기쁨과 위로를 주며, 마음에 달콤하고, 치유의 효능을 가져옵니다. 이는 말이 사람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보여줍니다.
오래 전 듣기 좋은말 best10 이 발표된 적이 있습니다. △ 수고했어. 역시 자네가 최고야. △ 이번 일은 자네 덕분에 잘 끝났어. △ 괜찮아. 실수할 수도 있어. △ 오늘 내가 한턱 낼게. △ 그런 인간적인 면이 있었군. △ 내가 뭐 도와줄 건 없을까? △ 나도 잘 모르겠는데, 도와줄래? △ 그래, 자네를 믿네. △ 패션감각이 돋보이는데? △ 조금만 더 참고 고생합시다(광양뉴스에서 인용)
하나님의 말씀은 마르지 않는 깊은 샘에서 솟아나는 물과 같아서, 모든 사람에게 생명을 얻게 합니다.
마태복음 12:36-37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무슨 무익한 말을 하든지 심판 날에 이에 대해 책임을 지게 되리라. 네 말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것이요, 네 말로 정죄함을 받게 되리라.”
이 구절은 우리가 사용하는 말에 대해 책임이 있음을 상기시켜 주며, 우리의 말이 그 사람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강조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말은 단순히 언어적 표현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과 삶에 큰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항상 신중하고 긍정적인 말을 선택해야 합니다.
바라기는 우리 수정교회 지체들이 사람을 죽이는 말을 하는 자가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는 자가 되어 영혼을 살리기는 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하나님을 견고한 망대로 삼는 자는 사람을 살리는 말을 하는 성도입니다.
적용) 나는 무슨 말로 판단하고 또 어떤 말을 남에게 전달합니까? 그로 인해 상대방에게 억울한 일을 겪게 하거나 다툼을 일으킨 적이 있습니까?
3. 재물과 권세보다 여호와의 이름을 의지합니다(9~12절).
하나님을 “견고한 망대”로 삼는 자는 재물과 권세를 의존하지 않고 여호와를 의지합니다. 이들은 게으름을 경계하고 성실을 추구합니다(9절). 그들은 자신의 성실한 노력이 결국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일부분임을 인식하며, 나태함을 피합니다. 또한 어려운 상황에서도 하나님께로 달려가 그 분의 인도와 보호함을 구합니다(10절). 10절에, “여호와의 이름은 견고한 망대라 의인은 그리로 달려가서 안전함을 얻느니라”고 합니다. 내가 어떤 상황에 있든지 하나님은 견고한 망대가 되시기에 주님께로 달려가는 자는 안전함을 얻습니다.
‘난공불락’(難攻不落)이란 말이 있습니다. 공격하기 어렵워 함락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세계의 난공불락 요새들, 성들도 다 함락된 적이 있습니다. 오래 전에 ‘나바론 요새’라는 영화를 봤습니다. 영화로 만든 2차 대전의 실화라고 합니다. 아무리 봐도 인간의 머리로는 함락될 수 없는 곳인데 결국 나바론 요새도 연합군에 의해 함락되고 맙니다.
‘스텔스’ 기술이란 운반체나 미사일이 적의 레이더나 그 밖의 전자 탐지기에 거의 탐지되지 않도록 하는 데 목적을 둔 군사과학기술을 말합니다. 미국이 처음으로 스텔스 전투기를 개발한 다음 세계가 다투어 스텔스 기술을 군사 목적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는 중국이 자체 개발한 ‘젠-20’이라는 스텔스 전투기를 시험비행하고 세계에 과시했습니다. 그런데 스텔스라고 절재 안전합니까?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알카에다의 빈 라덴이 파키스탄에 숨어 있었지만 미국은 훤히 드려다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지구상에 숨을 데가 어디 있습니다. 미국의 특공대는 두 대의 스텔스 헬리콥터를 앞세워 갔지만 한 대는 추락했습니다. 모든 것이 절대 안전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망대를 지키셔야 합니다. 하나님께 우리를 숨겨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가 하나님께 달려가지 않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12절에, “사람의 마음에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고 합니다.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나아가야 하는데 내가 다 할 수 있다고 부르짖는 교만이 있으니 오히려 멸망에 선봉에 서는 선택을 하게 된다는 것이지요.
교만한 부자는 재물을 자신의 안전과 보호의 수단으로 여기지만(11절), 이들은 재물이 아니라 견고한 망대되시는 하나님께 자신을 의탁힙니다. 또한 이들은 교만에 빠지지 않고 늘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겸손한 태도를 유지합니다(12절). 겸손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마음이며, 여호와를 의지하는 사람들은 이를 통해 하나님과의 관계를 깊게 하고,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도 존경을 받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에게 달려와 겸손하게 은혜를 구하는 자를 가장 존귀하게 여기십니다.
적용) 고난이 올 때 내가 피하는 곳은 어디 입니까? 나의 재물과 능력이 나를 보호해줄 것이라 믿지 않습니까?
[큐티인 묵상간증] [가장 안전한 곳, 천지성]
어릴 적 아버지의 외도로 저희 가족은 서로의 신뢰가 깨졌습니다. 이후 저는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나가며 아버지가 돌아오시길 기도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구원보다 가정의 회복만 바라는 기복적인 기도였습니다. 돈이 많으신 아버지는 계속 외도하시며 돈의 힘으로 온 가족을 휘두르셨습니다. 이런 환경에서 저는 도저히 내 힘으로 가정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하여 체념했습니다. 그러면서 행복하고 안정적인 가정을 꿈꾸며 빨리 결혼하고 싶었습니다. 이를 위해 저는 열심히 공부하여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취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회사에서 2년동안 최선을 다해 일했습니다. 하지만 인사평가에서 하위고과를 받게 되었습니다(3절). 마치 내 힘으로 세우려고 하던 높은 성벽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습니다(11절). 저는 출근조차 버거워하며 이 사건을 말씀으로 해석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중 여자친구 어머님의 인도로 구속사의 말씀이 선포되는 교회에 다니게 되었습니다. 여자 친구의 부모님은 제게 결혼하려면 공동체에 속해 매주 주일예배를 드리고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어릴 때 부터 신앙생활은 했지만 십일조를 제대로 해본 것이 없던 저에게 특히 십일조 적용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와 여자 친구의 섬김으로 저는 주일을 성수하며 십일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또한 공동체에 속해 구속사의 말씀을 듣고, 지체들이 말씀으로 살아내는 모습을 가까이서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돈으로 행복과 안정을 얻으려고 하는 저의 교만을 보고 회개한 뒤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12절).
이제는 여호와의 이름을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한 길임을 믿습니다. 물질로 행복을 사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견고한 망대이신 하나님께로 피하여 가족 구원을 위해 기도하겠습니다(10절). 적용) 믿지 않는 아버지와 형에게 안부 전화를 드려 교회에 가자고 말하겠습니다. 직장에서 교만한 마음이 올라오려고 할 때 오늘 12절 “사람의 마음의 교만은 멸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길잡이니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묵묵히 일하겠습니다.
결 론
하나님은 그를 믿고 의지하는 자에게 “견고한 망대”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항상 망대를 지키는 파수꾼처럼 눈을 부릅뜨고 계십니다. 역대하 16:9에는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라고 하십니다. 눈을 부릅뜨고 온 땅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귀를 쫑긋이 세우고 계십니다. 세미한 소리 가운데 계시는 여호와이십니다. 눈을 뜨고 귀를 열고 망대를 지키시는 자는 졸지도 않고 주무시지도 않습니다. 견고한 망대이십니다.
비둘기는 자면서도 눈을 뜨고 사방을 감시한다고 합니다. 자는 것 같지만 잠시도 주변을 감시하고 살피는 일을 멈추지 않습니다. 아프리카의 미어캣이란 동물은 두 발을 들고 마치 보초를 서듯이 잠시도 주위를 살피는 눈을 떼지 않고 사방을 살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모습으로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살피고 계십니다.
망대지기 하나님은 잠시도 졸지 않고 지키십니다. 눈이 밝고 귀가 먹지 않는 하나님께서 망대의 주인 되셔야 우리의 삶이 견고합니다. 견고한 망대는 하나님의 이름입니다. 하나님이 견고한 망대입니다. 하나님께 우리의 동서남북을 맡기고 평안의 삶을 사는 우리가 되기를 바랍니다.
참 지혜되신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고 순종하는 가운데,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살리는 말을 하고, 재물과 권세를 의지하지 않고 겸손히 하나님께로 달려와 은혜를 구하여 우리 인생에 다가오는 고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견고한 망대이신 하나님께 안전함을 얻는 우리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