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거창지역(居昌地域) 임란(壬亂) 의병활동(義兵活動)
향토사연구위원 김영석
1. 임진왜란 전 국내·외 상황
임진·정유의 왜란(1592~98)은 비단 조선뿐 아니라 일본과 중국을 뒤흔든 국제 전쟁이었다. 이런 큰 전란이 왜 일어나게 되었고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는 후세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를 탐구하는 데서 역사적 교훈과 삶의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먼저 전란전의 국내사정을 살펴보자. 건국 후 200년간 큰 전란 없이 사대교린과 숭유정책으로 문약(文弱)에 빠져 국방을 소홀히 하였고 사회와 당쟁 등으로 지배층은 분열되었다. 특히 권문세족의 토지 겸병, 지방수령의 부패, 방납의 폐단과 족징 등 수취체제(收取體制)의 문란으로 유민은 증가하고 농촌사회는 붕괴되고 있었다.
왜란 직전의 국내사정은 어떠했을까? 전운이 감돌고 급박했지만 안일의 타성에 젖어 이를 무시하고 있었다. 선조 20년 일본이 조선의 내정을 정탐하면서 수교(修交)를 요청했으나 거절했다. 재차 간청하면서 침략의 뜻을 암시하자 일본의 동정을 살피기 위해서 선조 23년 황윤길과 김성일을 수신사로 파견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그 이듬해 돌아온 두 사신의 복명은 서로 달랐다. 침략의 가능성을 말한 서인인 정사 황윤길의 보고를 받아 드리지 않고 정명가도(征明假道)를 요구한 일본의 국서를 묵살했던 것이다. 이이의 10만 양병론을 늦게라도 깨닫지 못하고 변방에 성곽 보수 논의도 중단해 버렸다.
다음 국외 정세를 살펴보자. 중국 대륙은 명의 국력이 쇠퇴하고 만주에서 여진족의 세력이 강성해지고 있었다. 바다 건너 일본의 정세는 어떠하였던가? 서세동점(西勢東漸)결과 포르투칼 인으로부터 조총(鳥銃)이 전래되었고 대외 무역과 함께 상업도시가 발달하였다. 1585년에는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修吉)가 나타나 전국시대(戰國時代)의 혼란을 종식시키고 국내를 통일하였다. 그러나 각지 무장들의 살벌한 분위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국내의 통일과 안전을 강화하려는 정략에서 토요토미는 해외 침략의 야욕을 도모하고 있었다. 즉 제장의 관심과 힘을 해외로 쏟게 하고 강대한 제국을 세우고자 사전에 치밀한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안으로 정치적 분열과 사회적 혼란이 계속되고 밖으로 대외정세의 변화를 등한시 하면 국방력은 약화되어 언제나 외침을 당할 수 있다는 교훈을 얻게 된다.
우리의 미래가 왜란과 경술국치(庚戌國恥)와 같은 예고된 국난(國難)을 다시는 겪지 않도록 역사의식을 심어주고 깨우쳐야 할 것이다.
2. 의병의 창의
임진년 4월말에서 5월 사이에 영남일대에는 많은 의병이 일어났으니 곽재우는 의령에서 정인홍은 합천에서 고령에서는 김면 등이 낙동강 서안을 버티고 있었고 7월에는 삼가에서 박사제 등이 민족 항쟁의 선두에 나섰다.
특히 송암 김면(金沔)은 지리적 요지인 거창에 와서 5월 22일 가북 용산으로 동문인 문위(文緯)를 찾아 변혼(卞渾)과 윤경남(尹景男) 등으로 창의하였다. 그들은 지략이 겸전한 김면(金沔)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각 고을의 기병 유사와 참모유사 등을 정했는데 거창 기병유사에 문위(文緯) 류중용(柳仲龍) 안음에 정유명(鄭惟明) 성팽년(成彭年) 함양에 노사상(盧士尙) 박선(朴選) 산음에 오장(吳長) 임응빙(林應聘)을 임명하고 박성(朴星)을 운량차사원으로 참모에는 이승(李承)과 윤경남(尹景男)을 거창 출신인 신수(愼守) 안의현감 곽준(郭䞭) 변희황(卞希璜) 양면(梁緬)을 군기유사 군량유사 전마유사로 각각 임명하였고 이미 의병을 모아 훈련을 시키고 있었던 변혼(卞渾)은 김면(金沔) 막하의 선봉장이 되어 지금의 웅양면 우두령 밑 우지곡에 진을 치고 지례(智禮) 김산(金山) 개령(開寧)등지의 고바야가와 다까가게의 군과 대치하였다.
이때 안음의 기병유사 정유명은 54세의 나이로 나라에 충성을 맹서하고 향리 젊은이들로 하여금 창의하여 의병장 김면 막하로 들어가 왜적을 무찌르는데 크게 공을 세웠다.
동계선생 문집 권지삼 행장 난에 보면 선생은 자기 아버지의 행장을 찬술하고 있다. 거기에 의하면 공의 이름은 유명(惟明) 성은 정씨 본관은 초계이다. 스스로 호를 역양(嶧陽)이라 했다. 공은 중종34년(1539)3월4일 태어났는데 선조30년12월9일 5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공은 1573년(선조7년)에 진사에 급제했는데 소년시절부터 갈천 임선생에게 학문을 배웠다. 학문과 뜻을 같이한 사람으로는 석곡 성팽년 등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거창 의병장 김면을 도와서 의병을 모집하여 향토방위에 신명을 바쳤다. 이때 공과 같이 창의한 사람으로는 문위 성팽년 윤경남 유중룡 변혼 정용 변희황 신수 전팔고 형효갑 김신옥 양면 장응린 등 이었다.
임진년 8월초에 초유사 김성일이 경상좌도로 전출된 것이 거창 의병본부에 알려졌다. 이에 거창 합천 산청 단성 삼가 의령 진주 등지의 선비들이 모여서 열읍에 통문을 내고 초유사의 전출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중심인물이 정유명 이었고 선조왕에게 상소하는데도 공이 소두가 되었다. 열읍에 보낸 통문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우리 영남은 왜적 침입 이래 열성이 와해되고 벼슬아치(현감 군주 등)은 도망치고 백성은 왜적에게 살육되는 환경에서 우리 초유사 김상공(金相公)은 민심을 안정시키고 창의를 격려하여 군신지분을 밝히고 복수의 의를 고창하였는데 그 언사가 간절하여 이를 듣는 자로 하여금 감분케 하여 눈물을 감출 수 없게 되어 폐허 속에서도 의병이 창궐하여 이제 겨우 향토의 안정을 가져왔는데 돌연히 좌도로 전출됨은 조정에서 우리를 버림이요 이때까지 목숨을 바쳐 이룩한 공을 일시에 없이 함입니다”고 간청하였다.
이 상소문은 박간(朴幹)이 지었고 함양 향교 각재에 모여 정유명을 소두로 삼고 성팽년(成彭年) 노사상(盧士尙)을 장의로 하고 노주(盧冑) 강린(姜麟)을 유사로 제소는 박여량(朴汝樑) 사소(寫疏)는 박여량과 정경운(鄭慶雲: 고대일기저자)등이 맡아 진행했는데 조정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초유사 김성일의 경상좌도로의 전출이 취소되었다.
공은 이상 외에도 경상감사 김수와 경상병사 조대곤이 왜적의 침입을 방관하고 오히려 겁을 먹고 도망만 치고 다니기에 이들의 처벌(목을 베어서 기강을 확립 하라는 뜻)을 주장하는 상소 등에도 동참하여 선비정신을 몸소 실천하여 후세의 귀감이 되게 하였다.
또한 성팽년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 와서 학문연구에 전념하던 중 왜란을 당하자 정유명과 더불어 창의하여 의병을 모집하였고 송암 김면의 막료가 되어 전공을 세워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대 비분함을 통곡하여 아군인 의병들을 감동시켜 격전에 임하였다.
공의 문집 중 행장에 의하면 성은 성씨(成氏) 이름은 팽년(彭年) 호는 석곡(石谷)이다. 함양에서 살다가 조(祖)때 안음(거창 위천)으로 이거해 왔다. 공은 1540년(중종35년) 1월 17일 위천면 황산에서 태어낫다. 그 후 사마 양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했으나 부모 봉양이 걱정되어 귀가하였다. 갈천 임훈 선생에게서 배웠고 정유명 신권등과의 친교가 두터웠고 문인에는 정온 오덕 홍등이 있는데 갈천선생의 연보를 찬술했다. 임진왜란 깨는 의병을 모집하여 거창 의병장 김면을 도왔다. 55세로 서기1595년인 서존28년8월15일에 별세 하였다.
그의 전기로 성석곡전(成石谷傳)이 있는데 이는 공의 제자인 동계선생이 찬술했다. 석곡공과 동계선생은 이웃해서 살았고 더구나 동계선생의 아버지인 역양공과는 친구이며 동문수학(갈천선생) 사이이니 누구보다도 잘 표현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공의 학문은 의약 복자 산경(山經)지지(地誌)등에도 통하지 않음이 없었다. 성격은 엄격하고 용모는 신장(身長) 골수(骨秀)하고 광채가 있어서 신선을 방불케 하였다.
시는 배율(排律)에 능하였고 더구나 필법이 뛰어나서 왕우군(王右軍)을 닮았다. 정온(동계선생)은 소년시절부터 문하에 출입하면서 가르침을 받으니 광야에서 길을 찾은 것으로 나의 오늘은 오로지 석곡공께서 깨우쳐 주신 은덕이라고 하였다.
또한 공의 임진 창의문(壬辰倡義文)은 초유사 김성일의 격려에 감분하여 안음 등지의 선비들이 의병으로 왜적을 격퇴하자는 내용으로 동참한 선비로는 정유문 정유명 김신옥 박명부 등이었다. 내용을 소개하면 본현(안음)에서는 이미 수백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순찰사와 초유사에게 예속시킨바 있으나 관군은 날이 갈수록 참패만 거듭하니 실로 위급하기 짝이 없다. 이에 우리가 신명을 바침은 본래 원하는 바이다. 라고 하여 거듭 창의 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경상감사 김수와 경상병사 조대곤을 목 베라는 상소문을 썼다.
이 상소문은 임진년 8월에 선조대왕께 올린 것으로 정유명 노사상 노주 강린 박여량 정경운 등이 연명하였다.
조선개국 200년 이래 처음 당하는 참변이다. 이것은 우리의 군력이 약해서도 아니고 성지가 미약해서도 아니다. 감사는 한 도(道)의 주인이고 절도사(節度使: 병사)는 삼군의 장수로서 막중한 책임을 가진 자인데 동래가 함락된 이래 감사는 밀양 양산 초계 합천등지로 피해 다니기만 하였고 병사 조대곤은 김해에 있다가 역시 도망만 치게 되니 여타의 벼슬아치(수령현감)들은 불문가지이다. 때문에 왜적은 가진 살육을 다하고 극도의 참극이 전개됨은 오로지 위 두 사람의 죄이니 이들은 목 베어 그들의 책임을 묻고 기강을 바로 잡을 것이며 창의한 의병군들의 사기를 높여주기 바랍니다. 라는 요지였다.
공은 체찰사(軆察使)에게 다음과 같은 글도 올렸다.
이때 체찰사는 이원익 이었다. 이원익 체찰사가 호남에 와서 왜적 격퇴에 대한 총지휘를 하고 있었는데 호남의 의병이나 식량을 가지고 영남 특히 서부경남일대를 도와 달라는 요지인 것 같다.
지금 영남에서는 진주의령 성주 거창 함양 등지에서 호남으로 향하려는 왜적을 결사적으로 막고 있다. 그러한 상황에서 영남은 기진맥진 하고 있다. 영남을 구원해 주지 않으면 호남이 있을 수 없고 호남과 영남이 없는데 조선이 있을 수 없다는 논리의 건의서이다.
“영남의 몇 고을의 남은 백성들이 왜적의 어육 됨을 면하지 못할 때 호남의 길은 보전될 수 없다.”
또 이때 호남에서는 최경회(崔慶會)와 임계영(任啓英)이 호남 의병을 이끌고 있었는데 이들로 하여금 빨리 영남지방을 구원할 것을 촉구하고 체찰사가 이를 이행치 않을 때는 영호 두지 방을 버리고 전세를 회복치 못하는 책임을 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합하께서는 이때의 중요성을 통찰하시어 국가를 지킨다는 근본적인 생각으로 양장(최, 임)에게 격문을 보내어 근왕의 행각을 중지시키고 선조왕에게 주달하여 회복의 근기를 마련한다면 국가나 생민은 큰 다행일 것이다.”
정유명(鄭惟明)은 강동 역골(薑洞嶧洞)에서 태어났고 성팽년(成彭年)은 황산서 출생하였으니 역골 뒤 용문산성(龍門山城)과 황산 뒤 호음산성(虎音山城)등이 이때 왜적에 대한 임전태세로 수축한 항거의 거점들이었으리라 생각된다.
3. 거창지역의 임진왜란 전투지역
1) 우척현 전투
우척현전투는 같은 해 6월 15일경에 있었다. 우척현은 소백산맥 중턱으로 거창과 개령의 경계에 있는 비교적 험준한 고개이다. 당시 경상도에서 호남지방으로 가려면 반드시 이 고개를 넘어야 되었다. 한편, 왜장 小旱川隆景은 立花, 모오리테루모토(毛利輝元)와 같이 성주, 선산, 부산 등에 주둔시키고 별군은 창원에 주둔케 하였는데 토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지역을 나누어 점령하라는 지침에 따라 전라도에 침공하여 웅치와 이치에서 싸웠다. 또 일부는 지례와 거창을 침범하려 하였다. 김성일은 고령에 있던 김면에게 급히 기별하여 왜군을 섬멸토록 하였다. 이리하여 지례에서 거창을 들어가는 접경지상에 있는 우척현에서 양군 사이에 전투가 벌어지게 되었다.
8월 16일(음력 7월 10일) 일본군은 거창 북쪽 우척현에 당도했고 우척현에 조선군이 없자 우척현 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척현 고개에는 음력 5월 10일 정인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김면의 의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면은 곽준(郭遵), 문위, 윤경남, 박정번, 유중룡, 조종도(趙宗道) 등의 휘하 장수들을 두고 거창에서 군량을 모아 4~5일간 집안의 종 700명을 포함한 총 2000명의 의병들을 모집하고 김성일(金誠一)이 보내준 만호 황응남, 판관 이형 등의 관군과도 합류해 전투 준비를 했다. 일본군 선봉대가 고갯마루를 넘자 일제히 3면에서 활을 쏴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일본군이 크게 당황하고 결국 그 동안 의병들이 계속 활을 쏴 일본군 대열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후퇴하던 일본군을 의병들이 추격하자 일본군은 시체도 남겨두고 철수하고 말았다. 결국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마지막 전라도 진격은 완전히 실패했고 더 이상 전라도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2). 지례전투
지례 전투는 같은 해 7월말에서 8월초에 걸쳐 있었다. 이곳은 현재의 김천시 지례면에 해당한다. 이 전투는 김면 의병군이 지금까지의 방어책 매복 작전에서 규모 있는 공격적 작전으로 전환한 전투중의 하나이다. 지례관사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을 화공으로 모두 태워 죽인 전투이다. 이때 금산·전주로 향했던 왜군의 수천병력이 지례에 주둔하면서 지례·무주 통로는 왜군의 천지가 되어 있었다.
김면은 왜군 1,500명이 지례현에 주둔하고 있는 것을 탐지하고 정병 수천을 거느리고 시위를 하였다. 이어 전부사 서예원(徐禮元)과 전만호 황응남(黃應男)을 좌우장으로 삼아 복병하게 하는 등 작전을 진행시켰다. 서예원으로 지례에 매복케 하고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망현에 있던 적이 성원할 움직임이 있어 취소하였다. 7월 29일 비가 오는 가운데 군마를 갖추어 서예원이 지례근처로 나가 진치고 작전을 개시하였으나 저녁에도 비가 와서 중지하고 말았다. 8월 1일 왜군은 사창, 객사, 관아 등을 점거하고 있었다. 김면이 직접 진두지휘하여 독전을 하였다. 의병진은 사창을 일시에 포위하고 나무를 쌓아 불을 질러 모두 태워 죽였다. 날이 저물자 나머지 왜군이 금산로로 도망을 가는데 미리 매복해 놓았던 복병으로 일시에 엄습하여 마침내 지례를 수복하였다. 그러나 배설(裵楔)이 김면의 명령을 듣지 않아 섬멸하는데 실패하였다고 한다.
<지례전투 일지>
1592년 4월 25일
왜장의 우종대가 개령을 거쳐 김산에 침입하여, 김천역을 점령했고 같은 날 좌종대가 거창에 침입하여 합류했다.
5월 12일
여대로가 거창에 가서 현풍사람 곽준, 거창사람 문위와 함께 각읍에 기병을 촉구하는 격문을 보냈다.
6월 모일
김면 의병대장이 정인홍 의병대장과 성주성 공략을 계획하고 성을 포위 했다가 개령의 왜군이 내원하여 실패한 후 김면은 지례로 진을 옮겨 적의 거창침입을 막았다.
7월 19일
김면 의병대장이 초유사 김성일과 만나니 초유사는 김산, 지례의 적세가 창궐하여 거창을 침입할까 우려되므로 우두령을 지키도록 했다. 김면은 가장 손인갑으로 하여금 그 곳에 가게하니 정인홍이 이를 반대했다.
7월 20일
지례의 적이 또 우두령을 넘으려 하자 김면 군진이 두의곡역에서 적을 맞아 일전 끝에 군관 장응린을 잃었다.
7월 26일
김해부사 서예원이 의병을 거느리고 김면 휘하에 들어와 지례 지경에 매복해 적의 출현을 기다렸다.
7월 29일
김면 의병대장 휘하에 각 의병군 즉 중위장 황응남, 중위장 서예원, 지례현감 여대로, 의병장 권응성, 종사관 강절, 의병장 박이룡(김면 휘하 종사관)은 무풍에서 퇴각한 적이 지례향교 창고에 들자 이를 포위 했다.
8월 1일
지례전투가 벌어졌다. 김면 의병대장은 지례전에 대비해 두의목으로 진을 옮겼다.
8월 모일
김면 본진이 신창(거창군 운양면)에 주둔하고 지례 통로를 방어했다.
8월 25일
여대로, 권응성이 지례작전을 끝내고 김산으로 이전해 다시 화구를 준비 했다. 순찰사 김성일이 의병장 여대로와 부장 권응성의 선전을 조정에 보고했다.
9월 25일
김면 군(軍)과 김시민, 박이룡 양군이 합세해 개령에서 적과 싸워 10명을 참살하고 박이룡은 하로로 회군하였다.
10월 9일
김면 휘하의 전군이 성주성을 공격했는데 합천군수 배설[14]이 부상에서 개령의 적이 내원하는 것을 막으라는 김면의 명령을 어기고 막지 않아 크게 패했다.
12월 18일
인동인 장봉한이 왜군에 붙었던 승려 찬희(성주 금수면 적산사 주지), 상좌 수정을 잡아 대덕 두위곡에 있는 김면장군에게 끌고 와서 이를 처형했다.
12월 19일
수일 전에 의병군 대장들이 개령 적진을 24일을 기해 공격할 계획을 세웠던 바 의병대장 최경회(장수현감으로 상중에 창의했다. 논개 남편)가 성주성을 먼저 치자고 주장했다.
12월 20일
영동군수 최명윤, 의병 총대장 김면, 중위장 황응남, 개령현감 최기준, 김산군수 주몽룡, 황간 의병대장 박미룡 등이 회동하여 개령의 적진 공략을 24일로 확정하고 세부 작전을 수립했다.
12월 23일
호남 의병장 민여운이 김면 총대장을 찾아와 대구의 적이 대거 현풍으로 몰려왔다 하고 현풍인 곽율과 안음의 정유명도 와서 현풍 방어를 역설했다.
12월 24일
김면의 본진 병력이 2천명, 최경회와 민여운의 병력이 1천명으로 개령을 격파하려면 호남군은 거창 운현에서 지키고 김면은 무주와 거창의 경계인 수두를 경유하여 개령으로 진군하고, 삼산군과 김면 본진의 복병은 개령의 동산정에 올라 화열을 일으키고, 선장 김함, 정유금, 김몽령의 군진과 좌우 돌격장 등의 군병은 한꺼번에 개령 적진에 돌격하여 방화 또는 사살하고, 외곽의 모든 군사는 사면을 포위하여 한 놈도 남김없이 섬멸하기로 작전을 짜고 저녁에 맡은 세곳으로 행군했다. 김면 총대장은 이때 궁장(구성면 송중리)에 유숙하고 있었는데 밤중에 한 위장의 심부름꾼이 와서 말하기를 호서와 상주병이 약속한 곳에 오지 않아 거사가 불가능하니 우선 호남병과 함께 개령의 적을 진 밖으로 유인함이 옳을 것이라 했다.
12월 25일
김면이 새벽에 상좌원(구성면)에 출진하니 민여운, 최경회 두 의병장이 와서 척후병의 보고라면서 왜군이 대거 김산으로부터 지례로 온다 하여 상좌원에서 이를 맞아 3전을 벌렸다. 전날 호남병이 웅치를 치고 개령으로 올 작전이었으나 적군이 웅치를 뛰쳐 나와 의병군을 먼저 포위하므로 서로 공방전이 벌어지고 쌍방간 10여명의 전사자를 냈다. 또 이때 후원군 김충민 군진과 함양병 최운 남노(男奴)억복이 말탄 왜장을 사살했으며, 여대로와 권은성은 약속대로 상좌원에 출동하여 석현전에 참가했다.
1593년 1월 5일
순찰사 김성일이 거창에서 김면을 만나 개령의 적의 방어가 시급하다고 전했다.
1월 13일
개령의 적이 상주에 출몰하여 분탕질이 심하다는 보고가 있어 거창에 있는 김면의 군 가운데 50명을 그곳으로 보내어 일망타진토록 했다.
1월 24일
박이룡 의병장이 부상고개에서 적과 접전하던 중 왼쪽 다리 윗부분에 부상을 크게 입었으나 굴하지 않고 분전 끝에 10여급 참수의 전과를 올렸다.
2월 4일
성주의 적이 어디론가 도주하였으므로 지례에 들어 올것에 대비하여 김면이 지례로 나아갔다.
2월 8일
김면이 궁장에 하진하고 사람을 충청도에 보내 명군을 맞이 할 절차를 알아 오도록 했다.
2월 9일
김면은 하로(김천시 양천동)로 진을 옮겼다.
2월 12일
개령의 적군이 명군의 남하소식을 듣고 완전 철수했고 적군진에 갇혀 있던 개령 백성 3백여명은 살해되고 4백여명이 풀려났다. 이날 지례현감 여대로, 개령현감 최기준이 하로에 가서 김면 의병 총대장을 만나 개령의 수습책을 논의했다.
2월 16일
개령의 적의 낙오병을 추격하여 위장 황응남, 개령현감 최기준, 김산군수 주몽룡 등이 호남 의병과 협력하여 12명을 참수했다.
2월 18일
김면이 상도위장 김준민(거제부사)과 더불어 개령 적진을 시찰했다. 주위 8~9리에 목책과 담장으로 두르고 목책 안팎에 참호를 팠으며 판자문을 별도로 만들어 왜장의 거쳐를 따로했다.적진 동쪽 봉우리에 까마귀와 솔개가 어지럽게 모여 있는데 시체가 쌓여있었다. 적이 도망갈 때 부역한 남녀를 많이 죽인 것이다. 동쪽 목책에 세사람의 목이 매달려 있었고 서쪽에도 한사람의 목이 달려 있었다. 개령이 경상도에서 가장 적이 많았는데 그 수가 8만에 이르렀다함이 헛말이 아닌것 같다고 <김호문집>에 적고있다.
2월 23일
개령의 적을 추격할 때 군령에 따르지 않았던 합천군수 배설은 곤장 20대, 성주 판관에게 40대를 각각 쳤다. 배설은 전에 성주성 공격시에도 개령의 적의 내원을 막으려 부상에 출전토록 했으나 “수령으로써 어찌 일개 서생의 명에 따를것인가” 하고 의병 총대장 김면의 명을 불복한바 있었다.
3월 13일
김면 병사가 하로군진에서 병으로 순직했다. 그는 3월 초부터 병을 얻었으며 연일 군무를 강행하다 변을 당했다.
3). 사랑암(고제면 수내 동쪽 산 중턱) 전투
그해 8월 3일에 있었던 거창 사랑암 전투는 우척현 전투에서 무참하게 패한 왜군 小旱川隆景부대는 거창을 거쳐 전라도로 진입하려는 야망을 버리지 않고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김면은 김해성을 빼앗기고 거창에 와 있던 전부사 서예원 등과 힘을 모아 싸우는 한편, 금산 의병장 성균관박사 여대로(呂大老) 등과 같이 왜군을 협공할 계책을 세웠다. 김면 의병군은 거창에서 지례, 금산의 길을 막고, 정인홍은 성주에서 고령, 합천의 길을 막으며, 곽재우는 의령에서 함안, 창령, 영산 방면에 진출하려는 왜군을 막자는 것이었다.
4. 거창지역의 의병장
가. 모계(茅谿) 문위(文緯)
(1) 선생의 이름은 위(緯)이고 호는 모계(茅谿) 자는 순보(順甫) 성은 문씨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대대로 함양에서 살다가 조부 현감공 웅(雄) 때 거창 가조현 용산으로 이거해 왔다. 아버지의 이름은 산두(山斗)인데 어질고 학문이 높아서 윤경남을 비롯한 지방 자제들을 가르쳤고 어머니는 함양오씨였다.
명종 9년(1554) 6월에 용산에서 태어나서 일찍이 남명 조식선생을 흠모했고 산청 덕계 오건(吳健) 선생에게서 주역을 공부했으며 한강 정구(鄭逑)선생으로부터 성현의 뜻을 얻었다고 전한다.
(2) 39세 때 임진왜란을 당하여 의병을 창의해서 직접 왜적과 싸웠고, 또 임란 향토사에 중요한 사료가 되는 임란 의병삼장사적(義兵三將事蹟)과 장응린, 곽우당, 이설확, 전탁계, 이형, 최효자, 황석산성 사적과 모계일기 등을 남겨서 향토의 임란사뿐 아니고 우리 국사 상에도 귀중한 사료가 되어 있다.
(3) 모계문집에 나타난 임란사
○ 모계문집 연보 39세조에 보면, 여름에 왜구가 크게 일어나서 향병을 수모(收募)해서 김송암 면에게 응했다.(夏倭寇大至收募鄕兵應金松庵沔)
이리하여 지례 병암(弁巖) 사이에 방비(防備)를 설치해서 송암을 도왔기에 진양일로(晋陽一路)를 보전할 수 있었고, 모계와 함께 의병장 송암 김면(金沔)의 좌막(佐幕)이 된 사람과 참모와 서기를 맡은 사람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고, 즉시 산청에 머물고 있는 초유사 김성일(金誠一)에게 달려가서 의병 창의를 신고 했으며 산청의 오사호(吳思湖)와 군량관계를 의논하고 돌아와서 각처에서 왜적과 싸웠는데, 1593년 3월에 김면 장군이 과로로 금산에서 별세하니 그 뒤를 맡아서 왜구 소탕에 신명을 다했다.
○ 김송암 사적(金松巖 事蹟)
송암 김면은 임란초에 정인홍 등 여러 선비가 의병을 일으키고자 하기 때문에 그에 찬동하여(鄭仁弘與諸士子 欲起義兵 以討賊 松庵亦以爲可 乃聚高靈兵於一村) 의병을 일으켰는데 고령은 작은 현이라 왜적을 막을 수 없기에 거창으로 달려와 보니, 거창선비들은 이미 산척(山尺) 약간을 모아 놓고 있는데 4~5일간 의병을 모집하니 순식간에 2,000명이 모여들었다고 한다.(高靈小縣 度不能御賊 遂馳入居昌 居昌士子 己聚山尺若干矣 行到卽令 抄發 則四五日 得二千餘人)
그 후, 장암(莊巖), 목통(木通), 우현(牛峴), 고령, 성산, 개령(開寧), 안음, 함양 등 지에서 초유사 김성일, 김해부사 서예원(徐禮元), 제포만호 황응남(黃應南), 합천의병장 정인홍, 진주목사 김시민 등과 왜적을 상대하여 싸우는 동안 가족들은 안음 촌사(村舍) 등지에서 유랑하면서 고초를 겪는데도 서로 만나거나 생사 연락초차 하지 못하였다.(自起兵以來 妻子流寓安陰村舍 而一不相顧 以至疾病 亦不相通)이 외는 생략한다.
(4) 모계 문선생일기(茅谿文先生日記)
○ 모계일기는 선조 23년(1598) 정월부터 시작해서 선조 26년 3월까지 약 4년간의 기록인데, 임진왜란 이전에는 주로 교우관계 또는 스승 선배와의 왕래 강화(講話)한 사실과 독서한 책 등이 기록되어 있고, 최우수(崔守愚)가 감옥에 있을 때 전팔고, 전팔급 등이 금부도사에 의해서 체포되어 가고 모든 서적도 모두 압수 당했는데, 선조 23년 7월 8일에 체포되어 26일에 하옥되었다.
8월 말 경부터 9월 초순까지 거창, 함양, 산청, 합천 등지의 선비들이 모여서 탄원소에 대한 의논이 있었고, 9월 8일에 두 분은 무사히 돌아왔다. 최수우가 별세하였는데 수목(需木) 반필(半疋)과 건시 세접(三貼)을 보냈고, 간혹 회합에 가서 취(醉)해서 돌아왔다는 기록으로 보아 애주한 듯도 하다.
왜군이 침입해서 부산, 동래 등이 함락된 소식은 비교적 빠르게 알고 있었다.
4월 24일에는 가족을 음막동(陰幕洞)으로 피난시키고, 5월 17일에는 신종기(慎宗紀)를 불러서 가북 용산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는데, 이것이 임란 때 거창의병군의 최초였다. 5월 19일에는 송암 김면이 용산으로 와서 신종기, 마천목(馬天目) 등 10여인과 더불어 동면, 서면, 남면 등에서 4~5일 간에 많은 의병을 모집하였고 27일에는 산음에 유진하고 있는 초유사 김성일을 찾아가서 의병관계를 신고하고, 6월 9일부터 개산포전이 시작되었다. 7월 20일 장웅린의 전사, 성산전투에서 래암 정인홍 대장과 합세하였다. 11월 29일에는 최경회(호남 의병장)대장이 거창에 왔다는 등과 이진(移陣) 출전(出戰) 환진(還陳)과 일기(日氣)는 청(晴), 음(陰), 한(寒), 화(和), 온(溫), 조설석청(朝雪夕晴), 음한(陰寒), 운(雲), 우(雨), 청풍(晴風) 등으로 기록되어 있다. 모계 임진일기는 송암의 병사와 장례를 끝으로 마감되어 있는데, 모계선생께서 초안(草案)해 둔 것을 후인이 대필한 듯하다.
○ 의병삼장적(義兵三將蹟)
의병 삼장 사적에서 제일 먼저 기록된 분이 내암 정인홍으로 이름은 기록되어 있지 않은데 내용은 정인홍 것이니 이 기록 역시 후인이 새로 쓰면서, 정인홍의 이름을 제외시킨 것으로 보인다. 정인홍은 김면, 박성, 곽준 및 그의 문하인과 더불어 기의(起義)해서 통문을 만들어 합천, 거창, 안음, 함양 선비들에게 보내고 전팔고 등을 참좌(叅佐)로 삼아 전투조직을 완료하고, 합천 의병장이 되어 사력을 다했으며 뒤에는 대사헌으로 발탁되었으나 여러 번 사양했다고 하였다. 그 다음 송암 김면, 이향, 장응린, 곽재우, 이대기, 황석산성사적, 최발사적, 교유대사헌서(敎諭大司憲書), 대사헌계사(大司憲啓辭), 걸귀차자오불가(乞歸箚子五不可), 걸귀봉사(乞歸封事) 등 정인홍 문집내용이 어찌하여 여기에 기록되어 있는가 이해하기 어렵다. 내암의 나이가 모계보다 19년 연장이고 가북 용산과 가야는 아주 가까운 거리이니 상호 내왕과 학문상의 밀접한 관계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 모계수기략(茅谿手記略)
영호공문집에 나타난 모계수기의 일부를 소개한다.
임진년(1592) 5월 11일에 송암이 20여인을 이끌고 거창에 와서 열읍(列邑)에 통문하고 기병유사를 청했는데, 그 글속에 이미 거창에서는 9백여 인의 의병이 모여서 왜 적진으로 진격하려 하고 있다.(五月十一日 松庵自高靈 領家僮同里 二十餘人 卽赴居昌 居昌則己起九百餘人 將進赴賊陳) 이상으로 보아 김면 대장이 거창에 오기전에 이미 가조에서는 9백여명의 의병이 모여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임란 후의 행적
46세 때(1599) 용산에서 모계리(茅溪里 : 지금의 월천)로 이거하고 호에 있어 溪를 谿로 고쳤다. 이것은 “산계모한(山谿茅寒)” 즉, 스스로 겸손하고 경계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때의 문인으로는 이선립(李善立), 윤사임(尹思任), 변창후(卞昌後), 정시수(鄭時修) 등으로 나타나 있다. 49세 때는 본도중흥사적을 편찬했고, 50세 때 임란관계를 저술 했다. 51세 때는 동몽교관(童蒙敎官:종9품)에 임명되어 서울에서 조직(趙稷), 이경의(李景義) 등의 제자를 키웠고, 그 외 조경(趙絅), 허목(許穆), 임진부(林眞怤), 강대수(姜大遂) 등 기라성 같은 분들이 선생을 스승으로 섬기었다. 53세 때는 선무원종공신 3등에 기록되고 54세 때에는 사헌부감찰(정6품)에 임명되었는데, 광해군 때는 일체의 관직에서 물러나 학문에 몰두하였다. 인조반정(1623)으로 조산대부(朝散大夫:종4품) 고령현감에 임명되었다. 그후 서계서원과 산제동서원 건립 등에 힘쓰다가 78세로 별세하였다. 묘는 다발산(수도산)에 있고, 묘갈명은 조경(趙絅 :龍洲 )이 지었으며 행장은 허미수(許穆)가 찬했다. 숙종 12년(1686) 거창읍 원동에 용원서원이 건립되었으나 대원군때 철폐되고 그 후 후손 문석만(文錫萬) 형제에 의해서 가북 용산에 용원서원이 복원(1988)되었고 아울러 1993년에는 모계선생문집이 국역으로 간행되었다.
나. 원천(原泉) 전팔고(全八顧)
(1) 명군의 거창주둔
조선은 명과 건국 초부터 일가적인 관계에 있었다. 더구나 일본의 풍신수길은 명을 공략하는 것이 목적이었으니 임란이 일어나자 그해 12월에 이여송이 이끄는 4만의 명군이 당도하여 이듬해 정월에는 평양을 탈환하고 이어 서울을 수복하면서 왜군을 경남 해안선 일대로 추격하였다. 때문에 명군은 경주, 성주, 남원, 거창 등지에 유진했는데 이영, 조승훈, 갈달하, 유정 등이 거창지역에 주둔했다는 기록이 있다.
(2) 명군(明軍) 가조유진(加祚留陳)
모계문집 별책 의병삼장 사적에 의하면 삼장 사적에서 제일 먼저 정인홍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정인홍이란 이름은 비워두고, 내용은 정인홍의 것으로 보아 그 당시는 정인홍이 신원이 안 된 상태이기에 그렇게 된 것 같다. 전팔고는 호가 원천인데 덕계(吳健)의 문인이고, 한강(鄭逑)과 친교를 맺었으며 모계 선생에게 지대한 감화를 끼친 분이었다.
원천은 정인홍의 문인이었다. 유중룡, 유계룡, 형효갑, 전팔급, 정온 등이 모두 정인홍의 문인이었다. 정인홍은 임란 초기에 김면, 박성, 곽준 등과 그 문하 여러 사람과 창의해서 일어날 때 통문을 만들어 거창, 안음, 함양, 등지의 주민과 약속하여 왜적을 토벌키로 하니 모두가 이에 응했다. 전팔고, 하혼, 권린, 조응인, 문경호, 정인영, 정함 등을 참좌(參佐)로 삼고 박이장, 문홍도 등을 군량 책임자로 하였으며, 손인갑을 중위장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보이고, 모계일기에도 전팔고가 김면의 장례에 참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원천연보 임란조에 의하면 53세 때 부산 지역 등이 잇따라 함락됨을 듣고, 향곡(鄕曲)을 모아서 요소에 배치하여 지키게 하는 동시에 정금월(鄭琴月), 하모헌(河暮軒) 등과 의논해서 군량 준비에 착수했고, 이듬해에는 우현(牛峴)에서 초유사 김성일을 만났고, 김면, 김성일의 죽음에 깊은 애도를 표했다.
7월에는 명나라 장수 유총병(劉摠兵)이 대구에서 거창 가조로 진(陳)을 옮겼으나 극심한 군량 부족으로 고통을 겪고 있을 때 원천이 수백석의 양식을 공급하여 위기를 면하게 하였다. 유총병은 매우 기쁘하며 전처사(全處士)라고 하였으며 그 뒤 천장(天將)은 명조황제에게 직접 면달하여 특상으로 첨지교지(僉知敎旨)가 내려지고 그 후 선조대왕은 대사헌으로 징소했지만 응하지 않았다.
명군이 가조에 유진했다는 기록은 원천집 행장에도 보인다.(天將留陳于加祚縣)
원천집 유사 문위조에도 용사지변 때 천조대장군이 가조에 유진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변청 또한 사재를 틀어서 주둔한 명군을 환대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다. 벽계(碧溪) 진예남(秦禮男)
○ 우리 향토인으로서 선무원종공신록권에 등재된 사람은 표헌, 진예남, 문위, 윤경남, 오희남 등인데 1등공신은 진예남이고, 2등공신은 오희남, 김준 3등공신은 문위, 윤경남이다. 원종공신록권은 임진왜란이 종결된 지 8년 후인 선조 39년(1605) 공포되었는데 총인원은 약 6,000여명에 달한다.
○ 진예남은 가조 도리 출신으로 호를 벽계(碧溪)라고 하였다. 조선왕조 실록에 보이는 진예남은 선조 30년 정유재란 때, 4월 17일에 포헌(表憲)과 함께 명나라 병부 형(邢)시랑을 만나기 위하여 지도와 품첩을 준비해서 갔다가, 18일 다시 가서 만나서 그를 설득하였고, 그 후 기록에 사역원사(司譯院事)라고 표시가 된 것을 보면 중국어 역관으로 활동한 듯하다. 정유재란 때 남해안에 파견된 명나라 장수들과 우리 조정 사이의 통역을 잘하여서 우리 조정이 위기를 극복하는데 공을 세운 듯하다. 광해군 때는 가선대부 동지판중추부사 원임예조참판 무성군에 봉하여졌다.
라. 변혼(卞渾)
조선 명종 14년(1559)에 태어났다. 공의 휘는 혼(渾)이요, 자는 명숙(明叔)이며, 그 선조는 초계인(草溪人)으로 처음 밀양(密陽)으로 옮기고 나서 관향으로 삼았다. 또 합천(陜川)으로 옮겼다가 마침내 거창(居昌)으로 옮겼다.
공은 14세에 부친상을 당하고 17세에 모친상을 당하였으므로, 부모를 일찍 여읜 것을 한평생 애통해하여 부모의 제삿날이 돌아올 때마다 울먹이며 슬퍼하였고, 계부(季父)를 아비처럼 섬겼다. 33세에 무과에 급제하였는데, 임진년(1592, 선조25)에 왜구가 쳐들어와 주군(州郡)이 와해되자, 공이 의사(義士) 김면(金沔)의 막하에서 보좌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이 공이 죽인 왜군의 수를 보고함에 따라 즉시 부장(部將)을 제수하고 또 문경현(聞慶縣)의 가수령(假守令)으로 삼았다가 얼마 후에 곧 정식으로 임명하였다. 경내가 새로 적병의 피해를 입고 기근까지 겹쳐서 굶어 죽는 사람이 즐비하니, 공이 관아 앞에 10여 개의 솥을 걸어 놓고 소나무와 잣나무 껍질을 벗겨다가 콩과 섞어 죽을 끓여 구제해 주고 또 중국 장수에게 요청하여 곡식을 얻어다가 나누어 주니, 백성들이 매우 고맙게 여겼다.
공이 양산사(梁山寺)에 있을 때 적군이 돌진해 오자, 공이 절문을 등지고 끊임없이 적에게 화살을 퍼부어 대니 적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계사년(1593)에 토적(土賊)이 대대적으로 일어났을 때 공이 토벌의 임무를 맡았으나 군사와 식량이 떨어져 호서(湖西)의 방백(方伯)에게 요청하여 원조를 받았다. 이에 계책을 세워 토적을 체포하여 효시하고 그 처자(妻子)들은 모두 타일러서 주벌을 가하지 않고 놓아주니 다음날 적의 잔당들이 와서 항복하였다. 그래서 그 괴수를 중위장(中衛將) 정기룡(鄭起龍)에게 압송하였는데, 정기룡이 이 일로 인하여 승천(陞遷)하는 상을 받은 반면 공은 아무런 상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공은 조금도 억울해하는 마음을 갖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이런 점 때문에 공을 대단하게 여겼다.
정유년(1597)(정유재란)에 왜적이 황석산성을 공격해 오기에 군마를 양성하여 적을 격퇴시켰다.
무술년(1598)에 체부(體府)의 명을 받아 거창(居昌) 가조현(加祚縣)에서 중국 장수를 접반하였고, 임인년(1602)에는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에 제수되었다. 갑진년(1604)에는 거제 현령(巨濟縣令)에 제수되었다가 을사년(1605)에 그만두고 돌아왔다. 무신년(1608)에 또 무겸(武兼)에 제수되고 경술년(1610, 광해군2)에 월곶 첨사(月串僉使)에 제수되었다. 임자년(1612)에 서해(西海)의 수적(水賊)이 강화부의 말도(末島)에 침범하였는데, 공이 수장(戍長)의 무함을 받아 교동(喬桐)의 감옥에 갇혔으나 상국(相國) 이덕형(李德馨)이 그의 억울함을 알고 구해 주었다. 계축년(1613)에 위원 군수(渭源郡守)로 나가서 백성들에게 농업과 잠업(蠶業)을 권장하여 그 고을이 편안한 삶을 영위하게 하였다. 갑인년(1614)에 감사가 공에게 명하여 적들이 국경을 넘어와 약탈해 간 진상을 벽동 군수(碧潼郡守)에게 추문(推問)하게 하였는데, 공이 굽히지 않고 법대로 집행하였다가 마침내 이 일로 인하여 파직되었다. 을묘년(1615)에 삭주 부사(朔州府使)에 제수되었다. 이후로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집으로 돌아가서 날마다 사우(士友)들과 서로 왕래하면서 고기나 잡고 낚시하는 것을 일로 삼았다.
병인년(1626, 인조4) 3월 25일에 병환으로 운명하였다.
마. 변청(卞淸)
본관은 밀양이고 변혼의 아우로서 명나라 장수 유정(劉挺)이 가조에 머물고 있을 때 군량 부족으로 곤경할 때 이들을 도왔기에 조정에서는 그 공로를 인정해 제용감 첨정(僉正)을 제수하였고 뒤에는 좌승지(左承旨)로 추증 되었다.
바. 윤경남(尹景男)
윤경남(尹景男 또는 尹敬男, 1556년 ~ 1614년)은 조선 중기의 유학자, 의병장, 무신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고, 자는 여술(汝述), 호는 영호(瀯湖)이다. 다른 이름은 경남(敬男)이다.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를 포기, 경사(經史)에 열중하였다.
1592년(선조 25) 초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고향에서 의병을 모집, 의병장(義兵將) 김면(金沔)의 막하에 들어가 참모로서 활약했다. 종전 후 창의의 공으로 사헌부감찰,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 등에 임명되었으나 사퇴했다. 1599년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헌부감찰이 되고 여러 벼슬을 거쳐 장수 현감, 운봉 현감 등을 역임했다. 사후 대사헌 겸 좨주에 추증(追贈)되었다.
1556년(명종 11년)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양항리 전촌(箭村)부락에서 증 참의에 추증된 윤은신(尹殷臣)과 거창 신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경남(景男)이라고도 하고 다른 이름은 경남(敬男)라고도 한다. 자는 여구(汝逑)이다. 증조부는 사간(司諫) 윤경(尹耕)이다. 부인은 이몽룡(李夢龍)의 딸 전주이씨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경서(經書) 및 사기(史記)와 같은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에는 뜻을 두지 않았다. 문산두(文山斗)의 문하에서 수학하다 뒤에 내암 정인홍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남명학파의 한 사람이 되었다. 당색으로는 동인이었다가 남북분당 후 북인이 되었다.
일찍부터 과거와 출사를 포기하고 학문에 뜻을 두어 경사(經史) 연구에 전념하였으며 동계 정온(鄭蘊), 모계 문위(文緯), 곽월(郭越), 이산해(李山海), 류중룡(柳仲龍) 등과 사귀고 교분을 쌓았다. 이후에도 계속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 연구와 문위, 이산해, 정온 등의 학자와 교유했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義兵)을 모집하였으며 모계 문위, 곽준, 류중룡 등의 친구들과 함께 의병장 김면(金沔)의 막하로 들어가 휘하 의병장과 참모로서 활약했다. 이후 우현(牛峴)ㆍ마령(馬嶺)을 지키다가 의병의 소부대를 따로 인솔하여 거창군으로 진을 옮겼으며 거창 주변 지역을 중심으로 활동하며 김면 부대의 참모로써 활동하였다. 이후 경상도 각 읍(邑)에 격문과 통문을 보내어 불과 며칠 만에 의병 3천여명을 모집하여 거창군, 고령군, 진주군 등지에서 일본군을 격파했으며 진주 의병장 김시민(金時敏), 장군 박진 등과 함께 진주성의 방어전에도 참가했다.
이후 의병장 김면의 명의로 열읍에 격문을 띄워 아직까지 창의하지 않은 의병 2천여 명을 추가로 모집하였고, 거창에 나타난 일본군 80여 명의 수급을 베었다. 또한 해안가로 들어오는 전함을 격추, 이 중 2척을 나포하고 일본군 선박에서 얻은 보물과 무기를 사람을 시켜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에게 보냈다. 이로 인해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은 특별히 장계를 올려 그를 포상해줄 것을 건의하여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를 제수하였으나 그는 아직 왜구가 물러가지 않았다 하여 받지 않았다.
그해 10월에는 군관으로 임명되어 김시민과 박진, 최경회 등과 함께 진주성 전투에 참전하였다. 그러나 10월 10일 일본군에게 진주성은 점령당하고 구원군이 오지 않자 윤경남은 소수의 군사를 이끌고 지원하지 않음을 지적하자 5백명의 지원군을 이끌고 진주성으로 갔으나 진주성은 함락당하고 왜군은 퇴각한 상태였다. 1593년에는 주부에 임명되어 취임하였다. 그 해 거창현감 김락(金洛),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 등과 함께 대구에 나타난 명나라 구원군 유 총병을 수행하였다.
1597년(선조 30년) 일본군이 재침하자 다시 의병을 모집하여 교전하였다.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에 창의한 공으로 사헌부감찰에 임명되고 이어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에 임명되었으나 1598년(선조 30년) 정유재란이 종결되자 사퇴하고 고향으로 되돌아왔다. 1599년 초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左翊贊)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4월 명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체직당했다.
1599년(선조 31년) 학문적 소양을 인정받아 북인에 의해 여러 번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익찬(世子翊衛司左翊贊), 다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 등에 임명되었다가 사직하였다. 곧 이어 임명된 장수현감(長水縣監)에 임명되어 부임하였다. 장수현감 재직 중 1601년 8월 정사를 가혹하고 혹독하게 다스린다 하여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당했다.
1605년(선조 37년) 선무원종공신 3등관(宣武原從功臣 3等管)에 녹훈되고 광흥창주부(廣興倉主簿)로 되돌아왔다가 개령현감(開寧縣監), 운봉현감(雲峰縣監, 전라북도 남원)등의 지방관을 역임했다. 1604년에 사망하였다. 사후 증직으로 증 사헌부대사헌 겸 성균관좨주(司憲府大司憲兼成均館祭酒)에 추증되었다.
사. 류중용(柳仲龍)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 시기 김면에 휘하에서 공을 세운 의병장이다. 김면군의 참모장서기였다.
아. 정유명(鄭惟明)
정유명(鄭惟明, 1539∼1596)의 자는 극윤(克允)이고 호는 역양(陽)이며, 본관은 초계(草溪)로 안음(安陰)에 거주하였다. 그는 1539년(중종 34년)에 아버지 증좌승지(贈左承旨) 숙(淑)과 진주 정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동계선생 문집 권지삼 행장 난에 보면 선생은 자기 아버지의 행장을 찬술하고 있다. 거기에 의하면 공의 이름은 유명(惟明) 성은 정씨 본관은 초계이다. 스스로 호를 역양(嶧陽)이라 했다. 공은 중종34년(1539)3월4일 태어났는데 선조30년12월9일 5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공은 1573년(선조7년)에 진사에 급제했는데 소년시절부터 갈천 임선생에게 학문을 배웠다. 학문과 뜻을 같이한 사람으로는 석곡 성팽년 등이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니 거창 의병장 김면을 도와서 의병을 모집하여 향토방위에 신명을 바쳤다. 이때 공과 같이 창의한 사람으로는 문위 성팽년 윤경남 유중룡 변혼 정용 변희황 신수 전팔고 형효갑 김신옥 양면 장응린 등 이었다.
임진년 8월초에 초유사 김성일이 경상좌도로 전출된 것이 거창 의병본부에 알려졌다. 이에 거창 합천 산청 단성 삼가 의령 진주 등지의 선비들이 모여서 열읍에 통문을 내고 초유사의 전출을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했는데 그 중심인물이 정유명 이었고 선조왕에게 상소하는데도 공이 소두가 되었다. 열읍에 보낸 통문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우리 영남은 왜적 침입 이래 열성이 와해되고 벼슬아치(현감 군주 등)은 도망치고 백성은 왜적에게 살육되는 환경에서 우리 초유사 김상공(金相公)은 민심을 안정시키고 창의를 격려하여 군신지분을 밝히고 복수의 의를 고창하였는데 그 언사가 간절하여 이를 듣는 자로 하여금 감분케 하여 눈물을 감출 수 없게 되어 폐허 속에서도 의병이 창궐하여 이제 겨우 향토의 안정을 가져왔는데 돌연히 좌도로 전출됨은 조정에서 우리를 버림이요 이때까지 목숨을 바쳐 이룩한 공을 일시에 없이 함입니다”고 간청하였다.
이 상소문은 박간(朴幹)이 지었고 함양 향교 각재에 모여 정유명을 소두로 삼고 성팽년(成彭年) 노사상(盧士尙)을 장의로 하고 노주(盧冑) 강린(姜麟)을 유사로 제소는 박여량(朴汝樑) 사소(寫疏)는 박여량과 정경운(鄭慶雲: 고대일기저자)등이 맡아 진행했는데 조정에서도 이를 받아들여 초유사 김성일의 경상좌도로의 전출이 취소되었다.
자. 성팽년(成彭年)
성팽년(1540년∼1594년).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옹(頤翁), 호는 석곡(石谷). 안음(安陰) 출신. 교위 한량(漢良)의 아들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유생으로 있다가 1569년(선조 2) 아버지가 죽자 학업을 그만두고 오직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면(金沔)이 고령·거창·현풍 등 경상도지역에서 의병을 일으킬 때 정유명(鄭惟明) 등과 함께 안음에서 기병유사(起兵有司)로 창의문(倡義文)을 발통하는 등 김면의 참모가 되어 의병활동을 하였다.
성팽년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다가 부친상을 당하여 고향에 내려 와서 학문연구에 전념하던 중 왜란을 당하자 정유명과 더불어 창의하여 의병을 모집하였고 송암 김면의 막료가 되어 전공을 세워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였으니 이대 비분함을 통곡하여 아군인 의병들을 감동시켜 격전에 임하였다.
공의 문집 중 행장에 의하면 성은 성씨(成氏) 이름은 팽년(彭年) 호는 석곡(石谷)이다. 함양에서 살다가 조(祖)때 안음(거창 위천)으로 이거해 왔다. 공은 1540년(중종35년) 1월 17일 위천면 황산에서 태어낫다. 그 후 사마 양시에 급제하고 성균관에 입학했으나 부모 봉양이 걱정되어 귀가하였다. 갈천 임훈 선생에게서 배웠고 정유명 신권등과의 친교가 두터웠고 문인에는 정온 오덕 홍등이 있는데 갈천선생의 연보를 찬술했다. 임진왜란 깨는 의병을 모집하여 거창 의병장 김면을 도왔다. 55세로 서기1595년인 서존28년8월15일에 별세 하였다.
그의 전기로 성석곡전(成石谷傳)이 있는데 이는 공의 제자인 동계선생이 찬술했다. 석곡공과 동계선생은 이웃해서 살았고 더구나 동계선생의 아버지인 역양공과는 친구이며 동문수학(갈천선생) 사이이니 누구보다도 잘 표현이 됐을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공의 임진 창의문(壬辰倡義文)은 초유사 김성일의 격려에 감분하여 안음 등지의 선비들이 의병으로 왜적을 격퇴하자는 내용으로 동참한 선비로는 정유문 정유명 김신옥 박명부 등이었다. 내용을 소개하면 본현(안음)에서는 이미 수백명의 의병을 모집하여 순찰사와 초유사에게 예속시킨바 있으나 관군은 날이 갈수록 참패만 거듭하니 실로 위급하기 짝이 없다. 이에 우리가 신명을 바침은 본래 원하는 바이다. 라고 하여 거듭 창의 하는 내용이다.
차. 김신옥(金信玉)
김신옥의 본관은 선산(善山)이며, 자는 공서(公瑞), 호는 쌍봉(雙峰)이다. 할아버지는 사헌부 집의(司憲府執義) 김적(金磧)이고, 아버지는 부호군(副護軍) 김세염(金世琰)이다.
김신옥은 1534년(중종 29)에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에서 태어났다. 남명 조식의 문하에서 공부를 하였고, 동문수학한 사람으로는 오건(吳健), 조종도(趙宗道), 김효원(金孝元), 김우옹(金宇顒), 정구(鄭逑), 박제인(朴濟仁) 등이 있다. 그리고 임훈(林薰), 정유명(鄭惟明)에게서 영향을 받았고 정온(鄭蘊), 성팽년(成彭年) 등과는 깊이 사귀었다.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68년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다.
홍주 교수(洪州敎授)와 송화 현감(松禾縣監), 칠원 현감(漆原縣監)을 역임하면서 치적을 남겼으며,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왜적들에게 무참하게 살륙되는 백성들을 보고는 참을수 없어서 의병을 일으켜 송암(松庵) 김면(金沔)을 도와 왜적을 물리치는 데 크게 활약하였다. 임진왜란 때의 공으로 통정대부 절충장군에 임명되지만 사양하였다. 1598년 1월 25일 무주 무풍현(현 전라북도 무주군 무풍면)에서 65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5. 거창 지역의 임진왜란 전적지
○ 용산 : 가북 용산은 거창 의병대장 김면이 임진년 5월 19일 고령의병을 이끌고 이곳에 와서 2000여명의 의병군단을 조직한 곳이고, 서부경남 일대에 통문을 발송하여 합천, 함양, 안음, 산청 등으로 하여금 창의케 한 곳이며, 거창 의병군의 참모격인 문위와 전팔고, 전팔급, 윤경남 등이 이웃해 있었으며 곁에는 가조창(加祚倉)이 있어서 군량 조달이 용이하며, 우척현이 가깝고 성주, 고령, 안음, 진주 등을 연결하는 교통 군사적인 요충인데다가 황사산성(黃沙山城), 용산리산성(龍山里山城), 운현성(熊峴城) 등에 둘러 싸여 있어서 공격과 방위에 편리한 전략적 요충지이기 때문에 김면대장이 병사할 때까지(1593.3) 거창 의병군단의 중심지였다.
○ 황사산성(黃沙山城) : 용산마을 동쪽 일명 “박구디”에 살고 있던 남평문씨 일족이 왜적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성을 쌓았다고 전한다.
○ 용산리산성(龍山里山城) : 임진왜란 당시 원천마을 죽산전씨들이 성을 쌓고 왜적과 대적하였다고 한다. 성을 쌓은 연대는 삼국시대로 보여지며 이때 성을 보수하여 활용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 상자암(廂子巖, 일명 향자암) : 가북면 수재동(秀才洞)에서 7리쯤 되는 수도산(修道山) 밑에서 임진왜란 때 가조, 가북 지역민 중 하빈 이씨(河 濱李氏), 선산 김씨(善山 金氏), 상산 김씨(商山 金氏), 흥해 최씨(興海崔氏), 죽산 전씨(竹山 全氏), 밀양 변씨(密陽卞氏), 함종 어씨(咸從魚氏), 남평 문씨(南平文氏), 함양 오씨(咸陽吳氏) 등 9성(九姓)의 가족이 이곳 바위 밑에서 피난을 했다. 그 중 하빈 이씨 첨추공 휘 이현계(李賢啓)의 집이 큰 부자였다. 그 부인 양씨는 음식물과 의복을 지산(芝山)에서 머리에 이고 날라서 풍족하게 썼다고 한다. 그러므로 그 바위 이름을 상자(廂子 : 곳간의 뜻)암이라 하였다.
○ 만수동(萬壽洞) : 견암사 앞에 있는데 임란 때 만인이 피난한 곳이라 한다. 그 앞에 성지가 있다고 전한다.(조선환여승람)
○ 양망골(梁亡谷) : 가조면 기리 양기마을 동쪽 골짜기에 양씨들이 살던 마을이 있었다. 임란 시 왜적이 침략하여 분탕질을 함으로 이에 왜장을 꾸짖자 전 마을민이 살해 당하고 마을 마저도 없어졌다고 전해오는데 이렇게 가조지역에도 임란 시 피해가 컸던 것으로 추측된다.
○ 용문산성(龍門山城) : 위천면 역골 뒤. 정유명(鄭惟明)은 강동 역골(薑洞嶧洞)에서 태어났으니 역골 뒤 용문산성(龍門山城)이 왜적에 대한 임전태세로 수축한 항거의 거점들이었으리라 추측된다.
○ 호음산성(虎音山城) : 위천면 황산 뒤쪽. 성팽년(成彭年)은 황산서 출생하였으니 황산 뒤 호음산성(虎音山城)이 이때 왜적에 대한 임전태세로 수축한 항거의 거점들이었으리라 추측된다.
6. 전란기 거창사회의 모습
가. 일반적인 경제 사회상
오랜 전란으로 인하여 국가재정은 궁핍해지고 토지는 황폐해졌다. 기근과 질병이 따르고 인구는 감소되었다. 토지대장과 호적도 없어졌다. 식량 부족으로 말미암은 국가 재정을 구하기 위한 방책으로 공명고신첩(空名告身帖)으로 매관매직을 하기도 하였다.
피난민의 발생과 함께 민심이 흉흉하고 도적이 사방에서 횡행했다. 어떤 자는 왜군의 복장을 하고 날뛰는 망나니도 있었다. 이러한 것은 전국적으로 있었던 일반적인 사회상이다. 당시의 거창사회 모습을 문헌에 나오는 것을 몇 가지 분류하여 요약하여 본다.
나. 왜적의 분탕과 항거
왜적의 침범에 의한 폐해는 임진왜란보다 정유재란 때 더 참혹하였다. 민가를 습격하여 살상과 약탈을 하고 피란자를 만나면 겁탈과 납치를 하는가 하면 집을 불살랐다. 살육하고서는 귀와 코를 베어 일본으로 보냈다. 토요토미의 명으로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였다. 잔혹의 극치이다. 왜적의 출몰 때 피란하면서 왜적의 만행에 항거하다 죽은 사람이 많았다. 부모와 부군을 위해 왜적을 꾸짖고 저항한 효자와 열녀의 정려가 이를 알려주고 있다.
다. 명 지원군의 횡포
명의 군대가 한때 거창에 주둔할 때 횡포가 심하였다. 마치 도적과 같이 재물을 빼앗고 가축을 잡아먹곤 하였다. 함양 출신의 선비 정경운(鄭慶雲)이 쓴 고대일록(孤臺日錄)에 당시의 상황이 잘 묘사되어 있다.
○ 1593년 7월 14일(丙寅), 명나라 군대가 군에 가득하고 주민은 텅 비어 있으니 긁어모으는 피해가 왜노와 다를 바없다(天兵滿郡居民一空搜括之害無異於倭奴矣)
○ 8월 3일(갑신), 명나라 군대 중 7개 부대가 함양으로 들어 왔다가 바로 거창으로 향했다. 부대의 사람들마다 각기 닭과 술, 채소와 과일, 짐 싣는 말(馬) 들을 요구했는데 성화보다 급하게 하여 사람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했다. 하략
○ 8월 30일(신해), 도사 김영남과 현감 김 락, 주부 윤경남이 명나라 군대를 배웅하여 함께 거창 경내로 향했는데 인부 마필이 각각 2,3백이 되었는데도 실어 나르는데 부족했다. 백성들이 그 고통을 참아내지 못해 처량하게 우는 소리가 도로에 가득했다.(都事金潁男縣監金洛主簿尹景男陪天兵同向居昌境內人夫馬匹各無慮二三百而未足於載持人民不勝其苦憫泣之聲滿於道路)
라. 원성을 산 목민관들
선조가 피난길에 나서 임진강에 이를 때 호위하던 관료는 불과 100명 미만이었다고한다. 각종 핑계로 피신(도망)했기 때문이다. 국왕과 백관들은 백성들의 원성을 듣는 대상이었다. 직접 백성을 돌보고 다스리는 목민관들도 왜적이 자기 경내에 침입하기 전에 숨거나 도망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거창인근의 수령도 마찬가지였다. 또 전란을 치루는 과정에서 백성들의 고통을 이해하고 위로해야 협조를 구할 수 있고 행정이 순조로울 것인데 탐학하고 혹은 백성을 원수같이 학대하여 대부분이 사방으로 흩어지고 원성을 듣는다는 기록은 안타깝다. 거창은 남부내륙의 복판에 자리하여 지리적 군사적 요지였기에 당시 내외 고관들의 방문이 많았던 군현이었다. 이들을 접대하기 위한 일종의 비자금 마련이었을까?
7. 고대일록(정경운 저)의 거창지역 관련 기록
○ 임진(1592)년 4월 29일 무오(戊午)
적들이 용인현(龍仁縣)에 들어왔다. ○ 감사(監司) 김수(金睟)가 적과 싸우기를 두려워하여 거창(居昌)에 숨어들었다.
○ 임진(1592)년 5월 22일 신사(辛巳)
노지부(盧志夫)가 다시 통문(通文)을 보내 향인(鄕人)들과 모여 의병을 일으켰는데, 나도 이에 참석했다. ○ 김송암(金松庵)이 열읍(列邑)에 통문을 보내 기병 유사(起兵有司)를 정했다. 안음(安陰)은 정유명(鄭惟明)ㆍ성팽년(成彭年)이, 함양(咸陽)은 노사상(盧士尙)ㆍ노사예(盧士豫)ㆍ박손(朴𧂍)이, 산음(山陰)은 오현(吳俔)ㆍ오장(吳長)ㆍ임응빙(林應聘)이, 단성(丹城)은 이로(李魯)ㆍ김경한(金景漢)ㆍ이유함(李惟諴)이, 삼가(三嘉)는 노흠(盧欽)ㆍ이흘(李屹)ㆍ박사제(朴思齊)가, 의령(宜寧)은 이운기(李雲紀)ㆍ곽재우(郭再祐)ㆍ곽근(郭赾) 등이다. [통문(通文)은 별록(別錄)에 보인다.] 통문의 마지막 부분에 이르기를, “거창(居昌)에는 이미 9백여 명이 일어나 장차 적의 소굴로 공격하려 하고 있지만, 성주(星州)와 초계(草溪)의 적들은 날로 늘어나 자칫 시간을 늦추어 기회를 잃으면 뒤에 도모하기 어려운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원컨대 제군들은 속히 일어나 합세해 기회를 잃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했다.
○ 임진(1592)년 6월 12일 경자(庚子)
안음(安陰)ㆍ거창(居昌)의 두 고을에 통문(通文)을 보내 거의(擧義)를 의논했다. 그 글에 이르기를, “이처럼 어처구니없이 닥친 [‘匪茹’는 《詩經》 〈六月〉의 문구] 화(禍)는 개국(開國)한 이래로 없었습니다. 육룡(六龍)이 서쪽으로 떠났고 칠묘(七廟)가 피난살이를 해야 하며, 모든 고을이 궤멸되고 백성들이 어육(魚肉)이 되는 모습을 말로써 설명하기에 부족할 지경입니다. 말과 생각이 여기에 미치니 죽어도 이 원수를 보기 싫습니다 [‘尙寐無吪’는 《詩經》 〈兎爰〉의 문구]. 산하(山河)가 수치스러움을 지닌 채 백인(伯仁)의 눈물을 헛되이 쏟을 뿐이니, 진정 혈기(血氣)가 있다면 누군들 무홍(茂弘)의 [‘茂弘’은 新亭의 酒宴에서 비탄해 하는 주의(周顗)에 대해 수도 탈환의 의지를 피력했던 승상 왕도(王導)의 자(字)] 의지를 갖지 않겠습니까?
○ 임진(1592)년 6월 18일 병오(丙午)
행군(行軍)하여 향현사(鄕賢祠)에서 숙박했다. 본군(本郡)의 병사들은 진용(陣容)을 갖춘 이후로 남의 말을 빼앗고 재물을 약탈하며 멋대로 행동함이 지나쳐서, 사람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기 어려운 지경이었으나, 통제할 수가 없었다. 옛 명장(名將)들의 사례에 비추어 보면, 군기(軍氣)가 형편없다. ○ 왜적이 지례현(知禮縣)을 침범함에 따라, 의병군(義兵軍)이 추격하여 장곡역(長谷驛)에서 전투를 벌여 2명을 참수(斬首)했다.
○ 임진(1592)년 6월 19일 정미(丁未)
의병군은 거창현(居昌縣)에서 숙박했다. ○ 순찰사(巡察使) 김수는 안음(安陰)으로 향했다.
○ 임진(1592)년 6월 21일 기유(己酉)
의병군을 보내 우지현(牛旨峴)의 복병(伏兵)할 곳에 이르게 했다.
○ 임진(1592)년 6월 22일 경술(庚戌)
대장(大將) 정내암(鄭來庵)과 대장(大將) 김송암(金松庵)이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와서 초유사(招諭使) 김성일(金誠一)과 만나 적을 토벌할 방안을 의논하니, 신기한 지모(智謀)와 기발한 계책(計策)이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섰다. 내암은 합천으로 돌아가고 송암은 머물렀다. 우도(右道)의 여러 고을들이 분탕을 면하고 오늘날이 있을 수 있었던 것은, 우부우부(愚夫愚婦)로 하여금 토적(討賊)의 의리를 알게 했기 때문이니, 모두 두 선생의 공이다. 아! 선생들이 없었다면 우리는 피발좌임(被髮左袵)하게 되었을 것이다.
○ 임진(1592)년 6월 24일 임자(壬子)
봉사(奉事) 최변(崔汴)이 멋대로 적을 제압할 것을 도모해 대장군(大將軍)의 명령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대장(大將)이 원문(轅門)에서 최변에게 장을 쳤다. ○ 김 대장(金大將)이 여섯 고을의 병사들을 모아 거창(居昌) 영계(瀯溪)에서 진을 치니, 군대의 위용이 대단히 엄숙하고 호령(號令)이 엄중하고 분명했다.
○ 임진(1592)년 6월 29일 정사(丁巳)
적이 지례(知禮) 우지현(牛旨峴)을 침범해 들어와 거창(居昌)을 공격하려 하자, 의병 비장(義兵裨將) 이(李) …〈결(缺)〉… 가 진병(進兵)하여 힘껏 싸우다 적의 탄환에 맞아 사망했다.
○ 임진(1592)년 7월 7일 갑자(甲子)
전라도의 적이 지례(知禮)와 금산(錦山)의 경계 지점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 의병군(義兵軍) 다수가 도망하여 흩어졌다.
○ 임진(1592)년 7월 8일 을축(乙丑)
적이 지례현(知禮縣)에서 떠났다.
○ 임진(1592)년 7월 9일 병인(丙寅)
의병군(義兵軍) 150명이 도망쳐 왔다. 의병 대장이 도망쳐 돌아온 군사 김순(金順)을 베고서 우지현(牛旨峴)으로 되돌려 보냈다.
○ 임진(1592)년 7월 13일 경오(庚午)
초유사(招諭使)가 거창현(居昌縣)에서 산척(山尺) 정흔(鄭欣)의 목을 베었다. [소문을 날조하여 의병을 모욕했기 때문이다.]
○ 임진(1592)년 7월 15일 임신(壬申)
대장(大將)은 왜적들이 지례 관사(知禮官舍)에 주둔하고 있다는 사실을 듣고, 정예병 수천을 거느리고 출정하여 빛나는 전과를 올리고 돌아왔다.
○ 임진(1592)년 7월 21일 무인(戊寅)
대장(大將)의 군관(軍官) 장응린(張應獜)이 왜적을 맞아 장곡역(長谷驛)에서 전투를 벌이다가 적에게 죽음을 당했다. 응린은 거창(居昌) 사람이다. 평소에도 활을 쏘고 말을 타는 재주가 있었다. 동생 응사(應獅)와 함께 대장이 의병을 모집할 때,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힘을 다해 종군(從軍)하여 조금도 태만한 뜻이 없었다. 결국 여기서 전사(戰死)하여 사람들이 모두 슬퍼했다. 초유사(招諭使)가 이 소식을 듣고 상심하고 특별히 부물(賻物)을 전했다.
○ 임진(1592)년 8월 3일 경인(庚寅)
대장(大將) 송암(松庵) 김면(金沔)이 다시 지례(知禮)로 돌아갔다. 지례의 적 5백여 명이 한 고을을 점령해 머물러 주둔하면서, 민가를 분탕질해서는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약탈하여 온갖 일을 자행하였다. 험준한 지형 조건에 의지해 완강하게 지키면서 김산(金山)ㆍ무주(茂州)의 적들과 함께 연계하여 왕래하고, 인근 고을들을 호시탐탐 엿보며 여러 차례 충돌하기도 했다.
○ 금산(錦山)의 적들이 지례(知禮)ㆍ김산(金山)을 향해 이동했다.
○ 임진(1592)년 8월 9일 병신(丙申)
초유사(招諭使)가 경상 좌도 감사((慶尙左道監司)에 제수되어 장차 강을 건너 좌도로 향해 가려고 할 때, 여러 고을의 사자(士子)들이 실망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이것 때문에 안음(安陰)ㆍ거창(居昌)ㆍ합천(陜川)ㆍ산음(山陰)ㆍ단성(丹城)ㆍ삼가(三嘉)ㆍ의령(宜寧)ㆍ진주(晉州) 등의 관아에 통문(通文)을 보내 알렸다. 그 글에 이르기를, “생각건대, 우리 영남(嶺南)은 저 사악한 무리들이 쳐들어온 이후로 여러 성들이 와해되어 마치 무인지경에 들어오는 것과 같이 되어 사명(司命)이 후퇴하고, 고을의 수령들은 도망을 가 버리니, 군은 무너지고 백성은 흩어져서 고을은 텅텅 비어 모조리 적들의 소굴이 되어,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 임진(1592)년 8월 11일 무술(戊戌)
왕에게 상소하는 일로 인근 지역의 유생들이 일제히 본군 [함양(咸陽)] 의 향교에 모였다. 진사(進士) 정유명(鄭惟明)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부친] 이 소두(疏頭)가 되고, 성팽년(成彭年)ㆍ노사상(盧士尙)이 장의(掌議)가 되고, 노주(盧冑)ㆍ강린(姜繗)이 유사(有司)가 되었으며, 제소(製疏)는 박여량(朴汝樑), 사소(寫疏)는 박여량과 내가 맡았다.
○ 명나라 군사 10만 명이 이미 압록강을 건넜으며, 5천의 기병(騎兵)이 선봉에 섰다. 부총관(副摠管) 조승훈(祖承勳)ㆍ좌참장(左參將) 곽몽징(郭夢懲)ㆍ우참장(右參將) 대조변(戴朝弁)ㆍ유격 장군(游擊將軍) 사유(史儒) 등 20여 명이 정예병을 나누어 거느리고 이미 의주(義州)에 도착해 있다. 7월 10일경 곧바로 평양으로 향해 가서 평행장(平行長)ㆍ평의지(平義智)ㆍ현소(玄蘇) 등의 목을 베고자 했다. 이때문에 양서(兩西) 지방이 사기(士氣)가 충천하며, 날쌔고 용감한 토병(土兵)들이 안주(安州)ㆍ숙천(肅川) 등지에 구름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 임진(1592)년 8월 21일 무신(戊申)
소두(疏頭) 정유명(鄭惟明) 등이 향현사(鄕賢祠)에 모여 소(疏)를 고쳐 썼다. 나도 함께했다.
○ 임진(1592)년 8월 25일 임자(壬子)
김 대장(金大將)과 순찰사(巡察使)가 성주(星州) 지역에서 병사들의 동향을 둘러보았다.
○ 임진(1592)년 8월 28일 을묘(乙卯)
나와 박공간(朴公幹)이 가조창(加祚倉)으로 가서 김 대장(金大將)을 찾아뵈었다. 그런 다음 곽양정(郭養靜)ㆍ이선술(李善述) 등도 만났다.
○ 임진(1592)년 8월 29일 병진(丙辰)
나는 가조에서 돌아왔다. ○ 합천(陜川)ㆍ삼가(三嘉)ㆍ진주(晉州)ㆍ단성(丹城)의 여러 유생들이 상소를 위해 삼가의 향교에 모였다.
○ 임진(1592)년 9월 17일 계유(癸酉)
김 대장(金大將)이 지례(知禮)의 석곡(石谷)에 진을 치고 김시민을 지원했다.
○ 임진(1592)년 11월 29일 을유(乙酉)
나와 여러 벗들이 지례(知禮) 석곡(石谷)의 진지(陣地)에 있는 김 대장(金大將)에게 인사드리니, 대장은 부지런하게 힘쓴 일에 대해 위로했다.
○ 임진(1592)년 12월 20일 병오(丙午)
김 대장(金大將)이 군사를 변암(弁巖)으로 옮겼다. ○ 수령이 군사를 거느리고 대장(大將)이 있는 곳으로 나아갔다.
○ 계사(1593)년 정월(正月) 2일 정사(丁巳)
대장이 있는 곳에 화재가 일어났다. 변암(弁巖)의 복병(伏兵) 막사가 모두 불에 타 잿더미가 됨으로써, 사람들이 얼어붙은 눈 위에 서서 지내야 했다. 장편전(長片箭) 백여 더미도 불에 타 버렸다.
○ 계사(1593)년 정월(正月) 14일 기사(己巳)
개령(開寧)에 있던 왜적들이 모두 성주(星州)로 돌아갔다. ○ 김 대장(金大將)이 앞으로 여러 진영을 순시하기 위해 군사 150명과 비장(裨將) 40명을 거느리고 가다가, 거창(居昌)에서 순찰사와 만났다. 순찰사(巡察使)가 큰소리로 “폐해를 끼치는 것이 심하니, 국가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이다.”라고 했다. 대장은 기분이 좋지 않아 서로 오랫동안 힐난했다. 대장은 부득이 수행 인원을 크게 줄여, 단지 40여 기병만 거느리고 합천길을 순행했다. 대저 김 대장은 위의(威儀)를 펴는 데 힘쓰고, 폐단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들이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 계사(1593)년 정월(正月) 19일 갑술(甲戌)
나는 혈계(血溪)로 가서 진군술(陳君述)을 조문했다. ○ 성주(星州) 사람으로 적진에 투항해 들어간 자가 왜적의 지휘를 받고서, 합천(陜川)ㆍ거창(居昌)을 넘어 팔량관(八良關)을 지나 장차 호남으로 들어가 형세를 살피려다가 운봉(雲峰)의 수령에게 잡혀서 하나하나 승복했다고 하니, 통분할 만한 일이다.
○ 계사(1593)년 정월(正月) 25일 경진(庚辰)
비가 내렸다. ○ 부산포(釜山浦)에 포로로 잡혀 있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이 말하기를, “정월(正月) 초하루에 일본국(日本國)으로부터 백서(白書)를 가지고 왔는데, 큰 글자로 ‘모든 왜(倭)는 본토로 돌아오라.’라고 되어 있었습니다.”라고 했다. 이는 풍신수길(豊臣秀吉)이 적의 무리들을 불러 되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그렇게 한 듯하다. ○ 김 대장(金大將)이 돌아와 가조현(加祚縣)에 진을 치고 주둔하였다.
○ 계사(1593)년 5월 9일 임술(壬戌)
전라 조방장(全羅助防將)이 군(郡)으로 들어왔다가 거창(居昌)으로 향했다.
○ 계사(1593)년 5월 13일 병인(丙寅)
전라도 순찰사(全羅道巡察使)가 군사를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향했다. ○ 상주(尙州)ㆍ선산(善山)의 왜적들이 대다수 남쪽으로 향해 내려오고 있다고 한다.
○ 계사(1593)년 6월 1일 갑신(甲申)
왕은 영유(永柔)에 계신다. 독운어사(督運御使)가 거창(居昌)으로 향했다. 윤경립(尹景立)이다.
○ 계사(1593)년 6월 12일 을미(乙未)
나는 김응구(金應久)의 모친을 모시고 거창(居昌)으로 갔지만, 중도에 되돌아왔다. 왕래할 때 보니, 영남(嶺南)과 호남(湖南)에서 실은 짐들이 도로 곳곳에 가득하여 마치 저자와 같았다. 말들이 벼이삭을 모두 뜯어먹어 지나간 곳마다 황무지가 되었으니, 참담하고 참담했다.
○ 계사(1593)년 7월 9일 신유(辛酉)
명나라 장수 유 총병(劉摠兵)의 군대가 군(郡)에 당도했다. 명나라 군대가 우리 지역에 도달했지만 고을에는 인적이 없어 접대할 방법이 없자, 그들 스스로 인가(人家)를 뒤져 하찮은 물건까지도 남기지를 않았고, 우마(牛馬)를 풀어 놓아 곡식을 모두 먹어 버려서 피해를 보상할 수 없으니,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서 생명을 유지할 수 있을까.
○ 계사(1593)년 7월 10일 임술(壬戌)
명나라 군대가 연속해서 군(郡)에 당도했다. 군사의 수는 1천 5백 명을 헤아린다.
○ 계사(1593)년 7월 11일 계해(癸亥)
수령이 상주(尙州)에서 군(郡)에 도착했다. ○ 명나라 군대가 사방으로 나가 남의 빈집을 뒤지니, 백성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한다.
○ 계사(1593)년 7월 29일 신사(辛巳)
명나라 군대가 군(郡)으로 들어왔다가 곧이어 거창(居昌)으로 향했다. 유 총병(劉摠兵)과 양 유격(楊遊擊) 두 장수가 왔다.
○ 계사(1593)년 8월 1일 임오(壬午)
명나라 군사 8명이 운봉(雲峰)에서 군(郡)을 거쳐 산음(安陰)으로 향하던 길에, 개평촌(介坪村)에 있는 노지부(盧志夫)의 집으로 들어갔다. 노지부와 서로 다투다가 구타를 했는데, 지부는 얼굴이 터져 피가 흘렀고, 몸 또한 중상(重傷)을 입었다고 하였다. 매우 걱정된다.
○ 계사(1593)년 8월 3일 갑신(甲申)
명나라 군대 중의 7개 부대가 군(郡)으로 들어왔다가 바로 거창(居昌)으로 향했다. 군으로 오는 부대의 사람들마다 각기 닭과 술, 채소와 과일, 짐 싣는 말 등의 물건들을 요구하였는데, 요구하기를 성화(星火)보다 급하게 하여 사람들이 그 고통을 감당하지 못했다. ○ 처형(妻兄) 김공신(金公信)이 보문산(寶文山)으로 향하다, 외고모의 초빈(草殯)에 인사를 올렸다.
○ 계사(1593)년 8월 4일 을유(乙酉)
명나라 군대가 군(郡)에 들어와서 유숙(留宿)했다. 다음 날 거창(居昌)으로 향했다가 대구(大邱)에서 서로 합류한다고 한다.
○ 계사(1593)년 8월 28일 기유(己酉)
왕이 적을 토멸하는 데는 무사(武士)만큼 효율적인 것이 없다는 이유로, 아래 세 도(道)에 무사를 널리 모집하도록 명령하면서, 철전(鐵箭) 5발씩 3차례 쏘게 해서 한 번이라도 중(中) 이상 맞힌 자는 모두 선발하도록 했다. 거창(居昌)ㆍ합천(陜川)ㆍ의령(宜寧)의 3개 고을에 무사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장이 개설되었다. 우리 군(郡)에서는 30여 명이 참여했다.
○ 계사(1593)년 8월 30일 신해(辛亥)
낙 참장(駱參將)이 군사들을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향했다가 대구(大邱)에서 유 총병(劉摠兵)을 만났다. ○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과 현감(縣監) 김락(金洛), 주부(主簿) 윤경남(尹景男)이 명나라 군대를 배웅하여 함께 거창(居昌) 경내로 향했는데, 인부(人夫)ㆍ마필(馬匹)이 각각 무려 2, 3백이 되었는데도 실어 나르는 데 부족했다. 백성들이 그 고통을 참아 내지 못해 처량하게 우는 소리가 도로에 가득했다.
○ 계사(1593)년 10월 7일 정해(丁亥)
거창 군수(居昌郡守) 우치적(禹致績)이 부임했다.
○ 계사(1593)년 10월 9일 기축(己丑)
송 유격장(宋遊擊將)이 군대를 거느리고 거창(居昌)으로 향했다. ○ 독운 어사(督運御使) 윤경립(尹景立)이 병 때문에 체직(遞職)되었다. 도사(都事) 김영남(金穎男)으로 독운 어사를 겸하게 했다. 개령 현감(開寧縣監) 최규보(崔圭甫)가 천방량관(天放粮官)이면서도 식량을 계속 조달하지 않아 이틀 분이 바닥나 부족하게 했다는 이유로 거창현(居昌縣)으로 옮겨져 수감되었다. 최규보는 마음을 다해 나랏일을 돌보았지만, 이러한 뜻밖의 재앙을 당하게 되었으니, 한탄할 일이다.
○ 갑오(1594)년 3월 15일 계사(癸巳)
가랑비가 밤까지 내렸다. 아침에 도사(都事) 정공(鄭公)이 거창(居昌)에 머문다는 말을 듣고, 나와 강형(姜兄)은 거창의 수령을 뵙고, 곧 도사를 뵈었다. 박백빈(朴伯彬)이 마침 함께 자리했기 때문에 정답게 이야기하며 시간을 보냈다. 또 거창의 수령을 불러서 우리들이 흉년으로 곤경에 처하여 스스로 도모할 수 없으니, 우리들의 요청에 부응해 달라는 이야기를 간곡(懇曲)하게 늘어놓았다. 오후에는 비가 조금 그쳤다. 도사(都事)는 화양(華陽)으로 향해 갔다. 우리들이 거창의 수령을 다시 만나니, 굶어서 죽게 된 자에게 쌀 여섯 말만 주는 것이었다. 일찍 욕을 당함이 이 지경에 이를 줄 알았다면, 어찌 차마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갔겠는가. 저녁에 시항촌사(矢項村舍)에 투숙하였다. 비가 오고 바람이 일어 찬 기운이 뼈에 사무쳤다.
○ 갑오(1594)년 4월 7일 을묘(乙卯)
나는 거창(居昌)으로 갔는데, 사근(沙斤)으로부터 장곡(長谷) 종현(鍾峴)에 이르기까지 한 곳도 파종(播種)한 곳이 없었다. 내년의 흉년을 헤아리지 않아도 알겠다. 백성들은 어찌할 것이며, 국가는 어찌할 것인가. 순찰사(巡察使)는 아득히 농사를 권할 뜻이 없고, 수령(守令)은 흥청망청 오직 술과 고기를 먹는 것으로 일을 삼으니, 결국 어떻게 되겠는가. ○ 나는 황혼 무렵에 집으로 돌아왔다. 형수의 건강이 좋지 않았다. 전염병의 기운이 있는 듯하니, 한없이 걱정된다.
○ 갑오(1594)년 10월 8일 임자(壬子)
나는 거창(居昌)으로 갔는데, 별거(別擧)에 응시하기 위해서이다. 도중에 성주(城主)를 찾아뵈었는데, 성주는 시험관으로서 갔다. 종제(從弟) 덕장(德將)도 함께 갔다.
○ 갑오(1594)년 12월 21일 갑자(甲子)
제수씨가 거창(居昌)에서 돌아왔다. 거창 수령 박정완(朴廷琬)이 백성들을 원수와 같이 학대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는 말을 들었다. 가증스러운 일이다.
○ 을미(1595)년 정월(正月) 3일 병자(丙子)
진 유격(陳游擊)이 거창(居昌)으로 향해 갔다. 성주(城主)가 천병지공 차사원(天兵支供差使員)으로 고령(高靈)을 향해 갔다.
○ 을미(1595)년 4월 21일 계해(癸亥)
심 참장(沈參將)이 거창(居昌)으로 갔다. ○ 이씨(李氏) 어른이 여기에 머물렀다. ○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ㆍ우순찰(右巡察) 서성(徐渻)도 군(郡)에 이르렀다.
○ 을미(1595)년 5월 2일 갑술(甲戌)
명나라 장수가 거창(居昌)으로 향하였다.
○ 을미(1595)년 5월 12일 갑신(甲申)
유 참장(劉參將)이 거창(居昌)으로 갔다.
○ 을미(1595)년 7월 24일 을미(乙未)
중국 사신이 거창(居昌)으로 향했다.
○ 을미(1595)년 10월 17일 병진(丙辰)
중국 사신이 거창(居昌)으로 향하였다. 길에서 진안 군수(鎭安郡守) 오익승(吳翼承)을 만나 잠깐 인사를 나누었다.
○ 을미(1595)년 10월 18일 정사(丁巳)
항 독리(項督理)가 군(郡)에 이르렀다. 중국 사신 일행의 자금을 관리하기 위하여 온 것이었다. ○ 이날 중국 사신이 거창(居昌)에 머물렀는데, 거창(居昌) 수령이 전혀 예비하지 않아서 모양새를 갖추지 못했다. 그래서 거창(居昌) 수령과 삼기(三岐) 수령과 진주 판관(晉州判官)에게 장형(杖刑)을 가하였다고 한다. 대저 거창의 풍속은 억세고 사나워, 사람들이 영(令)을 두려워하지 않아서 죽을 각오를 하고 명령을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중국 사신이 지나가는 데만 모양새를 크게 잃었을 뿐 아니라, 전날 유 총병(劉摠兵)ㆍ낙 참장(駱參將)ㆍ송 유격(宋游擊)의 행차 때도 어긋나고 태만하지 않음이 없어서 거창 수령으로 하여금 친히 스스로 풀을 베도록 하니, 백성들이 모두 괄시하였다. 해괴하기 짝이 없다.
○ 을미(1595)년 11월 10일 무인(戊寅)
나는 가조(加祚)에 머물렀다. ○ 거창현(巨昌縣)에 사는 백성들이 다 흩어져 열에 아홉 집은 비었으니, 모두 현감(縣監) 권황(權滉)의 악행으로 인한 것이라고 한다. 애통하다.
○ 병신(1596)년 4월 20일 병진(丙辰)
황석산성(荒石山城)에 종을 보냈다. 산성(山城)을 쌓는 일이 지금 당장 급한 일이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밭 갈 때를 빼앗아 파종(播種)을 못하게 되었다. 또한 군기(軍器)와 군량(軍糧)이 없고, 더구나 통솔할 사람조차 없는데, 성(城)을 백 척이나 쌓는다고 한들 무슨 이익이 있겠는가.
○ 병신(1596)년 7월 3일 무진(戊辰)
칙서(勅書)가 거창(居昌)으로 갔다.
○ 정유(1597)년 정월(正月) 4일 을미(乙未)
부천사(副天使) 심유경(沈惟敬)이 군(郡)에 왔다. 함께 온 군사가 5백 명보다 적지 않았는데, 모두 여우 가죽, 수달 가죽, 오소리 가죽 옷을 입었고 수레에도 가득 실려 있었다. 조금이라도 염치가 있다면 이렇게까지 하겠는가.
○ 정유(1597)년 2월 22일 계미(癸未)
심유경(沈惟敬)이 거창(居昌)을 향해 갔다.
○ 정유(1597)년 3월 18일 무신(戊申)
심유경(沈惟敬)의 패문(牌文)이 군(郡)에 도착했다. ○ 접반사(接伴使) 황신(黃愼)이 호서(湖西)에서 왔는데, 곧장 거창(居昌)으로 향하여 갔다. 유경의 접반사가 되었기 때문이다.
○ 정유(1597)년 3월 21일 신해(辛亥)
심유경(沈惟敬)이 거창(居昌)에서 군(郡)으로 왔다. 아랫사람들을 단속하지 못하고 자기 욕심을 막을 재주도 없으니, 일개 유세객(遊說客)에 불과하다. 그런데 거느린 군정(軍丁)이 2백여 명에 이르고, 말에 실은 짐은 3백 바리가 넘는다. 동원되어야 할 말과 짐꾼의 수가 무려 수백인데, 게다가 분담할 고을은 없고 한 군(郡)이 모두 감당해야 하니, 경내(境內)가 어수선하여 도로에 길게 늘어서 있을 따름이다. 가엽구나, 우리 고을 사람이여! 어떻게 해야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 접반사(接伴使) 황신(黃愼)이 또한 왔다.
○ 정유(1597)년 6월 10일 기사(己巳)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이 남원으로부터 군(郡)에 도착했는데, 내일 거창(居昌)으로 간다고 한다.
○ 정유(1597)년 8월 13일 신미(辛未)
흉적이 거창(居昌)ㆍ합천 등지로 들어왔으나 연락이 끊어져 도무지 소식을 들을 수 없으니, 통탄스럽고 통탄스럽도다!
○ 정유(1597)년 8월 21일 기묘(己卯)
조카가 산에서 정아(貞兒)의 시신(屍身)을 찾았다. 목이 반 이상 잘린 채로 바위 사이에 넘어져 있었는데, 갖고 있던 패도와 손이 모두 평소와 같았다. 오호라! 내 딸이 어찌 이 같은 지경에 이르렀는가. 내가 처음 왜적들이 곳곳에서 출몰한다는 말을 듣고 패도를 주면서, ‘만약 불행하게도 네가 왜적을 만나면 적을 따르지 말라’고 하였다. 이후로 한 번도 머리를 빗지 않고 얼굴도 씻지 않으면서 말하기를, ‘큰 도적이 지금 왔으니, 제가 반드시 산다고 하기 어렵습니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그 엄마에게 매번 하였는데, 졸지에 흉적을 만나서는 우뚝 서서 겁 없이 적노(賊奴)를 욕하고 꾸짖으며 목숨을 버려 절개를 온전히 하였다. 곧도다! 내 딸이여, 그 이름이 부끄럽지 않구나. 오호라! 네가 삶을 버리고 의를 택했으니, 참으로 잘한 일이구나. 하지만 나는 딸 하나도 능히 구하지 못해, 흉한 칼끝에서 너를 죽게 했다. 손을 붙들고 피난하여 시작과 끝을 함께하고자 했으나 그러지를 못했구나. 죽은 후에 황천에서 손잡고 다시 만날 때, 나는 진실로 너만 못하니, 무슨 면목으로 너를 위로할까! 네가 높게 세운 절개는 내 그 뜻을 글로서 분명히 전할 것이다. 의복을 모두 잃어버려 시신을 염하는 도구가 초라하기 짝이 없으니, 통곡하고 또 통곡한다. ○ 이날 밤에 큰비가 왔다.
○ 정유(1597)년 12월 3일 기미(己未)
적의 무리들이 거창(居昌)ㆍ삼가(三嘉) 등지에 가득하고, 장수(長水)의 왜적은 운봉(雲峯)으로 다시 돌아가서 산골짜기에 출몰하여 사람과 가축을 마구 잡아가는 것을 일삼는다 한다.
○ 기해(1599)년 정월(正月) 25일 병오(丙午)
가조(加助) 고개를 넘어 김응구(金應久)의 집에 도착했다. 내 작은 조카가 오랫동안 나가서 돌아오지 않았기 때문에 혹시 죽은 것은 아닌지 근심했었는데, 다시 서로 만나니 기쁘고 안도되어 신발을 거꾸로 신은 것조차도 몰랐다.
[출처] 거창지역(居昌地域) 임란(壬亂) 의병활동(義兵活動)|작성자 암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