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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11.24(주일) 에스더 6:1~13 ‘존귀하게 된 모르드개’ [성전이전7주년감사예배]
모르드개는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인물로, 바벨론에 유대인 포로로 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았던 의로운 사람입니다. 그는 하만의 음모로 유대인들이 멸망할 위기에 처했지만,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로 인해 역전되어 존귀한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는 모르드개의 삶을 살펴보며,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사용하시는 지, 그리고 어떻게 우리가 하나님 앞에 존귀(尊貴)한 삶을 살 수 있는 지에 대해 살펴보고 은혜를 나누기를 원합니다.
오늘 본문에도 ‘존귀’라는 단어가 8번이나 등장합니다.
에스더 6:11의 '존귀'는 히브리어로 "יָקָר" (야카르) 입니다.
이 단어는 "귀하다, 가치 있다, 명예롭다, 존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물리적으로는 값진 보석처럼 귀중한 것을 가리키기도 하며, 비유적으로는 영광스럽고 존중받는 상태를 뜻합니다. 본문에서는 모르드개가 왕의 명령으로 "존귀함"을 입는 장면에서 사용되며, 이는 명예로운 대우를 상징합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위해 왕의 옷과 말을 준비하고, 거리에서 그를 높이는 장면은 이 단어의 의미를 생생히 보여줍니다.
성경에서 ‘존귀’라는 ‘야카르’는 다양한 맥락에서 사용됩니다.
첫째, 값진 것 또는 귀중한 것이라는 뜻입니다.
(잠언 3:15) "지혜는 진주보다 귀하니 네가 사모하는 모든 것으로도 이에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서 "귀하니"는 ‘야카르’로, 지혜의 가치를 강조합니다.
(욥기 28:16) "오빌의 금이나 귀한 청옥수나 남보석으로도 그 값을 당하지 못하겠고."
'귀한 수온'의 '귀한'도 같은 단어로, 금과 보석의 귀중함을 나타냅니다.
둘째, 존귀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사야 43: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을 얼마나 존귀하게 생각하시는지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시편 116:15) "그의 경건한 자들의 죽음은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귀중한 것이로다."
여기서 '귀중히' 역시 ‘야카르’로, 하나님께서 성도의 죽음을 소중히 여기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셋째, 명예와 영광을 의미합니다.
(다니엘 11:38) "오직 강한 신을 공경할 것이요, 그 신을 금, 은, 보석, 보물을 가지고 공경하리라."
'보석'이나 '보물'로 번역된 단어도 야카르의 개념에서 나왔으며, 영광스럽고 명예로운 대상을 표현합니다.
에스더 6:11에서 "존귀"는 모르드개가 왕의 특별한 명령에 따라 백성들 앞에서 높임을 받는 상황을 구체적으로 묘사합니다. 히브리어 '야카르'는 단순한 물질적 가치만이 아니라, 명예와 권위, 하나님께서 주시는 존중을 포함합니다. 이는 다른 구절들에서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람과 상황을 존귀하게 하시는지를 보여주는 데 일관되게 사용됩니다.
이 ‘존귀’, ‘야카르’라는 단어를 신학적으로 적용해 보면,
하나님께서 모르드개를 존귀하게 하신 것처럼, '야카르'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소중히 여기시고 적절한 때에 높이신다는 약속을 상징합니다. 이 의미는 또한 물질적 가치를 넘어 영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라는 교훈을 줍니다. 예를 들어, 잠언에서는 ‘지혜와 경건한 삶’을 가장 "귀중한 것"으로 강조합니다. 또한, 이 단어는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 안에서 존귀한 존재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이사야 43:4) “네가 내 눈에 보배롭고 존귀하며 내가 너를 사랑하였은즉 내가 네 대신 사람들을 내어 주며 백성들이 네 생명을 대신하리니”
결론적으로, '존귀'라는 단어는 물질적이거나 세속적인 가치가 아닌, 하나님의 섭리와 은혜로 인해 주어지는 참된 명예와 가치를 상징합니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뜻 안에서 존귀한 삶을 살아가도록 권면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 존귀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1~3절).
‘하나님의 섭리’란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개념입니다. ‘하나님의 섭리’는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주권적으로 다스리시며, 모든 일을 그분의 뜻과 목적에 따라 유지하고 이끌어 가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가 우연에 의존하지 않으며, 모든 일이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여러 곳에서 증언합니다.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셨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세상을 유지하고 다스리십니다. (히브리서 1:3) "그의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시며..."라고 합니다. 또한 하나님은 자연현상과 역사적 사건을 통해 섭리를 나타내십니다. (시편 104:14) "그가 풀을 자라게 하사 가축을 위하여 먹게 하시며 사람을 위하여 농사를 짓게 하시고..." (다니엘 2:21) "그는 때와 계절을 바꾸시며 왕들을 폐하시고 왕들을 세우시며..." 또한 하나님은 개개인의 삶에도 섭리하십니다. (잠언 16:9) "사람이 마음으로 자기의 길을 계획할지라도 그의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여호와시니라." (마태복음 10:29-30)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하나님은 우리의 일상적인 삶의 작은 부분까지도 돌보십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모르드개는 에스더서에 등장하는 중요한 인물로, 유대 백성을 구원하는 데 크게 쓰임받은 자입니다. 그는 에스더의 사촌이자 양아버지로 에스더를 사랑으로 키웠습니다.
모르드개는 왕궁에서 일하면서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조용히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유대인들을 위해 기도하며, 그들의 안위를 염려했습니다. 특히 하만이 유대인들을 멸망시키려는 음모를 꾸미자, 이를 에스더에게 알리고 왕에게 간청하여 유대인들을 구해낼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그러나 모르드개는 자신의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하만에게 미움을 받고 죽임을 당할 위기에 처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모르드개를 지키시고, 그를 존귀하게 만들어주셨습니다. 오늘 본문 1절에 왕이 밤잠을 이루지 못하고 과거 역사를 기록한 역대일기를 살펴보던 중 모르드개가 자신의 암살음모를 아뢴 모르드개에게 상을 베풀지 못했음을 알고 그에게 존귀를 베풀고자 합니다(3절). 이는 하나님께서 미리 계획하신 일이었습니다. 모르드개를 통해 유대인들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였습니다. 사람은 이런 계획을 할 수 없습니다.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하십니다.
때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이해하지 못할 때가 있지만, 하나님은 신실하게 일하고 계십니다.
(이사야 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으니라."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의 이해를 초월하지만, 항상 선하고 완전합니다.
하나님의 섭리의 가장 위대한 예는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였지만, 하나님은 이를 통해 인류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사도행전 2:23) "그가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준 바 되었거늘 너희가 법 없는 자들의 손을 빌려 못 박아 죽였으나..."
따라서 믿음의 성도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어야 합니다. 이런 성도는 내가 기대했던 일이 내가 원하는 타이밍에 일어나지 않았다고 낙심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때에 나의 수고와 공로를 하나님은 다 기억하고 계시고 또한 갚아주실 것을 믿고 인내하며 살아야 합니다. 성도의 삶 속에 어려움과 고난이 찾아올 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고 계심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기 때문입니다(롬 8:28).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아시고, 가장 좋은 길로, 가장 안전한 길로 인도해주시는 목자되신 좋으신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성도는 다음과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1) 믿음과 순종의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며 그분의 인도하심을 따릅니다. (잠언 3:5-6)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신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2) 감사와 찬양을 합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성도는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고 모든 상황에서 감사하며 찬양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3) 소망과 인내의 삶을 살아갑니다. 하나님의 섭리를 믿는 성도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의 계획을 신뢰하며 인내합니다. (로마서 8:25) "우리가 바라보는 것을 보지 못할 때에 인내로 기다리느니라."
하나님의 섭리는 우리 삶의 모든 영역에 미치며, 때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궁극적으로 선하고 완전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섭리를 신뢰하며 그분의 뜻 안에서 살아갈 때,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를 복되게 하십니다.
적용) 요즘 내가 기대했던 대로 되지 않아 실망한 일은 무엇입니까? 나를 선한 길, 안전한 길로 인도하실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믿고 나를 존귀케 하실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십니까?
2. 스스로 존귀케 되려는 교만을 버려야 합니다(4~10절).
하만이 모르드개를 나무에 매달고자 왕의 허락을 받으러 왕궁에 이릅니다. 그리고 아하수에로 왕이 존귀하게 하려는 자에게 어떻게 해줄까라는 질문에 자기가 그 인줄 착각하고, 왕복과 왕의 말과 왕관을 가져다가 이 존귀하게 하려는 자에게 주어 그를 높여주라고 당당하게 말합니다(7~9절). 하만은 왕에게 자기가 받고 싶은 상을 말합니다. 하지만 왕은 그 상을 자신의 원수인 모르드개에게 그의 손으로 직접 주라고 명령합니다(10절). 하만은 하룻밤 사이에 자신의 원수인 모르드개가 자기보다 더 높이 올라간 것은 미처 몰랐습니다. 높이 쌓아올린 교만이 무너져 내리는 순간입니다. 실제로 하만은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의 충신으로 왕의 총애를 받았고, 모든 백성들이 그에게 절해야 했습니다. 하만은 권력자였고, 그 권력으로 유대인들을 멸절하려는 악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권력은 사람을 교만하게 만들고 악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성경은 교만에 대해서 경계하고 있습니다. 잠언 16:18은 교만의 본질과 결과를 잘 보여줍니다.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거만한 마음은 넘어짐의 앞잡이니라."
오늘 본문의 ‘하만’에게서 보듯이 교만은 자신을 과대평가하거나 하나님보다 자신을 높이는 태도입니다. 또한 다른 사람을 나보다 낫게 여기지 않고 깔보거나 무시하는 마음과 태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위와 질서를 무시하고 스스로 주권자가 되려는 행동입니다. 성경은 교만이 죄성(罪性)에서 비롯되며, 인간의 타락한 본성에서 나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교만은 자기 중심적인 생각을 말합니다. 자신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필요치 않는 마음입니다. (신명기 8: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버릴까 하노라." 또한 교만은 물질적 성공이나 지위만 있으면 하나님 없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다고, 오늘 본문 말씀대로 하면 하만처럼 스스로 존귀케 할 수 있다고 착각하게 만듭니다. 또한 교만은 자신의 지혜를 자랑하며 하나님의 지혜를 무시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그러한 자를 어리석은 자라고 말씀합니다. (로마서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그리고 교만의 결과는 반드시 하나님의 심판을 가져옵니다. 특히 교만은 하나님과의 관계를 단절시킵니다. 왜냐하면 교만한 사람은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하나님과의 관계를 끊게 됩니다.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기에 교만한 자는 하나님의 은혜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최고의 교만한 자는 사탄입니다. 사탄은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자리에 앉겠다”라는 교만한 마음을 품다가 타락하게 됩니다(사 14:13,14). 다니엘 4장에 느부갓네살왕은 자신의 업적을 자랑하다가 하나님께 심판을 받고, 7년동안 들짐승처럼 살며 교만의 대가를 치릅니다. 또한 예수님시대의 바리새인들은 스스로 의롭다고 여기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다가 예수님께 책망을 받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모르드개가 존귀하게 된 것은 그의 능력이나 지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 때문이었습니다. 모르드개에게는 늘 하나님을 의지하며 유대 백성들을 위해서 헌신하는 겸손함이 있었습니다.
성경은 교만의 반대로 겸손을 강조하며,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태도가 중요하다고 가르칩니다. 겸손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고,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구하는 태도입니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겸손한 자에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의 모르드개처럼 높여주십니다. (베드로전서 5: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우리도 마찬가지로 어떤 위치에 있든지 겸손한 자세를 유지해야 합니다.
겸손한 자세를 유지하려면, 첫째 자신의 마음과 태도가 교만으로 흐르고 있는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성찰해야 합니다. 고린도전서 10:12: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둘째, 하나님을 경외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인정하고 그분께 나의 모든 것을 의지하는 것이 교만을 이기는 길입니다. (잠언 22:4) "겸손과 여호와를 경외함의 보상은 재물과 영광과 생명이니라“ 셋째, 타인을 존중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을 섬기고 낮아지는 태도로 살아가야 합니다. (빌립보서 2:3)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겸손한 자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주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기억하고 고백 합니다. 하나님은 모르드개와 같이 겸손한 자를 존귀케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약4:10; 마23:12). 적용) 가정과 직장, 교회에서 스스로 잘한다고 여기며 자신하는 부분은 무엇입니까? 교만한 나의 죄성은 무엇입니까?
3. 하나님의 심판은 공의로우심을 믿어야 합니다(11~13절).
하만은 자신이 존귀하게 되려고 준비한 모든 것들을 왕의 명령으로 대적인 모르드개에게 베풀어야만 했습니다(11절). 스스로 높아지려던 하만에게 굴욕(屈辱)이 시작된 것입니다. 상대가 실제로 주어서 당하는 굴욕이 있는가 하면, 아무도 주는 사람이 없는데 혼자 당하는 굴욕이 있습니다. 하만이 당한 굴욕은 후자에 해당합니다. 그가 가진 재산이나 권세를 건드린 사람도 없고, 왕도 모르드개를 높일 뿐 하만을 낮춘 것도 아니었습니다. 하만은 자신이 준비한 의식을 통해 모르드개에게 존경을 표해야 했고, 이는 그의 권위와 명예를 떨어뜨리는 굴욕을 가져왔습니다. 하만은 겉으로 드러난 굴욕뿐만 아니라, 자신의 아내와 친구들로부터 굴욕의 말을 듣습니다(13절). 하나님은 악을 행하는 자에게 반드시 그에 합당한 보상을 주시고, 의인에게는 합당한 존귀를 주시는 공의로우신 분이십니다.
성경에서 공의는 하나님의 본성과 행동의 완전한 의로움과 공정성을 뜻합니다.
신명기 32:4은 하나님의 공의를 선언합니다.
"그는 반석이시니 그 공덕이 완전하고 그 모든 길이 정의롭고 진실 무망하며 공의로우신 하나님이시니라."
하나님의 공의가 어떻게 나타날까요? 첫째,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용납하지 않고 반드시 심판하심으로 나타납니다. 로마서 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은 죄에 대해 무관심하지 않으시며, 공의로운 심판을 행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의 공의는 죄를 심판하시면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구원의 길을 여심으로 완벽하게 드러납니다. (로마서 3:25-26) "하나님께서 예수를 세우신 것은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를 믿는 자를 의롭다 하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사건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동시에 이루어진 사건입니다. 셋째, 하나님은 모든 사람의 행위에 따라 상을 주시고 벌을 내리십니다. (갈라디아서 6:7)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의로운 사람에게는 상을, 악한 사람에게는 심판을 내리십니다. (전도서 12:14) "하나님은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 간에 심판하시리라."
하나님의 공의에 대한 성경적 예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노아의 홍수 (창세기 6~8장) 하나님은 인간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할 때, 공의로 심판하셨습니다. 그러나 노아와 그의 가족을 구원하심으로 하나님의 은혜와 공의가 함께 드러났습니다.
(2)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 (창세기 19장) 하나님은 죄악으로 가득한 소돔과 고모라를 심판하셨으나, 의로운 롯과 그의 가족은 구원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의인과 악인을 구별하여 심판하시는 공의를 보여줍니다.
(3)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지 않을 때 징계하셨지만, 그들이 회개할 때는 회복시키셨습니다. 신명기 28장 ~ 축복과 저주의 율법은 하나님의 공의로운 약속을 보여줍니다.
(4)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가 가장 완전하게 드러난 사건입니다.
(고린도후서 5:21)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신 것은..."
하나님의 공의는 예수님께 우리의 죄를 전가하시고, 우리를 의롭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면 공의로우신 하나님 앞에 우리는 어떻게 응답해야 할까요?
(1) 하나님의 공의를 인정하고 의지해야 합니다. (시편 7:11) "하나님은 의로우신 재판장이심이여..." 우리는 하나님의 공의로우심을 신뢰하고 그의 판단에 순복해야 합니다.
(2) 회개를 통한 구원의 은혜를 누려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에 대해 반드시 심판하지만, 회개하는 자에게 은혜를 베푸십니다. (요한일서 1:9) "만일 우리가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3)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따라 살기 위해 우리는 의를 행하며 공정하게 살아야 합니다. (미가 6:8)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공의는 그의 사랑과 결코 대립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공의와 사랑은 십자가에서 완벽하게 드러났습니다. (시편 85:10) "인애와 진리가 같이 만나고 의와 화평이 서로 입맞추었으며..." 예수님의 대속 사역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동시에 그의 사랑을 나타냅니다.
적용) 최근에 굴욕을 당한 적이 있습니까?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굴욕 당할 때 나는 회개합니까? 원망하고 부끄러워 자책합니까?
[큐티인묵상간증] [사과하지 못하는 죄인, 박혜경]
저는 초등학생 때 주일학교 선생님의 전도로 교회를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 후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신앙생활을 하다가 신(信)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락한 결혼생활을 하니 내가 잘나서 믿음생활도 잘한다고 착각했습니다. 체면을 중요시하는 친정 가풍에 제 교만까지 더해져 교양있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나 예민하고 혈기 많은 아들은 매년 학교에서 사고를 쳤습니다. 모범생으로 자라온 저는 아들이 이해되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아들의 일이어도 내가 하지 않은 잘못을 사과하기가 억울했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이나 다른 학부모에게 사과하는 일 등 뒤처리는 모두 남편에게 맡겼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온라인 메신저로 친구와 그 어머니를 모독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저는 이전처럼 남편에게 수습을 맡겼습니다. 그러나 상대측은 저도 아들과 함께 사과하길 요구했고, 제가 이를 회피하자 결국 아들은 학교폭력 가해자로 신고를 당했습니다. 그러나 저는 여전히 아들의 잘못으로 굴욕과 망신을 당해야 하는 상황이 억울했습니다(13절). 그런 제게 교회 소그룹 지체들은 “우리 죄 때문에 아무 죄 없이 돌아가신 예수님을 생각하세요”라고 권면했습니다. 그제야 저는 아들 친구 어머니께 사과했고, 아들은 가벼운 처벌만 받았습니다.
이 사건을 겪으면서 저는 모르드개에게 굴욕을 주고 스스로 존귀해지려 하다가 도리어 굴욕을 당한 하만이 저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6,13절). 그동안 저와 가족이 구원받도록 기도하고 섬겨준 지체들에게 감사하기보다 내가 거룩해서 공동체에 잘 속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보혈로 구원받았음에도 아들을 위해 어떤 희생도 감수하기 싫어하여 아들을 큰 곤경에 빠뜨릴 뻔한 죄인임을 알고 회개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저는 존귀히 여김을 받기를 좋아합니다(9절). 하지만 앞으로는 이를 경계하고 공로 없이 받은 구원의 은혜를 전하며 복음의 빚을 갚아나가겠습니다. 적용) * 교회를 떠난 직장 동료에게 <큐티인]을 주고 예배드리기를 권하겠습니다. * 아들 일로 연락을 받으면 즉각 사과하고 아들에게 혈기부리지 않겠습니다.
결 론
말씀을 마칩니다. 오늘 본문에서 하나님을 경외하고 살았던 모르드개를 존귀하게 높여주셨던 하나님은 당신이 만든 피조물들을 존귀케 하시려는 하나님이십니다(시8:5; 롬2:19).
1) 성경의 인물 중 존귀케 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이 많지만, 그 중에 요셉을 들 수 있습니다.
요셉은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으나 형제들의 미움을 사서 노예로 팔려갔습니다. 감옥에서도 억울한 일을 겪었지만, 끝까지 신실하게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하나님은 요셉을 높이셔서 애굽의 총리가 되게 하시고, 그의 지혜를 통해 온 가족과 나라를 구원하게 하셨습니다. 창세기 41:41: "바로가 요셉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애굽 온 땅의 총리가 되게 하노라." 요셉은 가장 낮은 자리에서 가장 높은 자리로 올려지며, 가족을 구원하는 하나님의 섭리의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낮은 곳에서 높이셔서 그의 선한 계획을 이루십니다.
2) 존 뉴턴(John Newton)은 18세기 영국의 노예선 선장으로 방탕한 삶을 살았고, 노예 무역에 깊이 관여했지만, 폭풍우 속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하고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그를 노예 무역을 반대하는 운동가로 바꾸셨으며, 그가 쓴 찬송가 "Amazing Grace"(나 같은 죄인 살리신)는 전 세계적으로 사랑받고 있습니다. 뉴턴은 하나님께 쓰임 받아 수많은 사람에게 복음과 은혜를 전하는 도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조차 변화시키셔서 존귀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 성경은 하나님의 백성이 그의 사랑 안에서 존귀함을 누린다고 약속합니다.
(베드로전서 2:9)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우리의 현재 상태가 연약하고 보잘것없더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영광스러운 존재로 만드십니다.
(로마서 8:30)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하나님은 낮은 자를 들어 높이시고, 그의 백성을 존귀하게 하십니다. 이는 우리가 자격이 있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섭리로 이루어진 일입니다. 하나님은 오늘날에도 우리를 높이시고 사용하시길 원하십니다.
오늘은 수정교회 “성전이전 7주년 감사예배”로 드립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도 없던 저희 교회에게 7년전 이곳 신례원에 정말 아름다운 교회를 허락해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저와 우리 교회를 ‘존귀’하게 대우해 주셨음을 믿고 주님께 모든 영광과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바라기는 저와 여러분들이 하나님 주신 ‘존귀함’을 누리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를 인정하시기를 바랍니다. 이번 다니엘기도회가 우리 교회를 한 단계 성숙 시키려고 성도를 하나되게 하셨던 특별한 섭리임을 믿습니다. 세상의 재미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는 우리 성도들 되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이번 주 부터 금요일에는 다니엘 기도회와 동일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많은 성도님들이 온라인과 현장에 참여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높이시고 다니엘 기도회의 은혜를 체험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과 사람 앞에 늘 겸손함으로 나의 나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남은 8광주리로 하나님께서 하실 줄 믿고 겸손함으로 주님을 더욱 더 의지하기를 소망합니다. 또한, 공의로우신 하나님을 믿고 의로운 삶을 살도록 말씀을 의지하며 살아가셔서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 아니라 거룩임을 깨닫고 날마다 큐티를 통해 나 자신을 말씀 앞에 거룩하게 세우는 성도님들 되셔서, 하나님께서 존귀케 해주시는 개인과 가정과 교회됨을 체험하는 은혜가 있기를 주님의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