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경 문학 아카데미
제목 : 문학과 역사
부제(副題) : 이야기는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의 저력(底力)-
2022.5.28
강사 : 최우창
<차례>
Ⅰ. 머리말
Ⅱ. 이야기를 왜 해요?
Ⅲ. 문학과 역사는 어떤 사이일까요?
Ⅳ. 맺는말
Ⅰ. 머리말
오늘 저는 ‘문학과 역사’에 대한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감당하기 버거운 주제를 선택한 저의 머리를 몇 번이나 쥐어박으며 후회했습니다. 후회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번 강의를 계기로 저의 일상의 일부이기도 한, ‘문학과 역사’에 대한 생각을 나름대로 더 가다듬을 수 있다는 점에서 용기를 내기로 했습니다. 자기 계발의 동기 부여와 유의미한 시간을 갖게 해주신, 고성환 회장님과 조향순 문경문학아카데미 원장님께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흔히 인문학을 담론할 땐 문사철, 문사철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가장 큰 까닭은 문학과 역사와 철학은 매우 유기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기적이라는 말은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어서, 서로 떼어 낼 수 없는 것(관계)을 말합니다. 전체를 구성하고 있는 각 부분이 서로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다는 뜻입니다. 문사철은 인문학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인문학은 ‘인간의 삶’과 관련된 학문입니다. 인문(人文)의 ‘人’자는 사람이 팔을 내밀고 허리를 굽히고 서 있는 옆모습을 그린 글자라고 합니다. ‘文’자는 양팔을 크게 벌린 사람을 그린 것입니다. 人자, 文자 모두 사람(인간)을 의미합니다. 이처럼 인문학은 ‘인간의 삶’과 관련하여, 우리는 어디서 왔고(과거), 누구며(현재), 어디로 가야 하는가?(미래), 인간은 왜 사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왜 그런 생각과 행위를 하는지, 인간다움이란 어떤 것인지 등에 대한 ‘정보와 가르침’을 줍니다. 언어, 문학, 역사, 철학, 종교 등은 인문학의 범주(동일한 성질을 가진 부류나 범위)에 해당합니다.
저는 인문학이 오체(사람의 머리와 팔다리)라면, 역사는 머리, 문학은 가슴, 철학은 손가락에 해당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문사철 모두가 머리도, 가슴도, 손가락도 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좀 세분해서 보면, 역사는 이성적인 측면이 크고, 문학은 감성적인 측면이 크고, 철학은 말 그대로 지혜롭고(명철) 이성적이면서도 방향성을 갖고 있습니다. 철학은 고대 그리스어로 ‘지혜를 사랑한다.’는 뜻의 ‘필로소피아’에서 유래했습니다.
‘~관(觀)’은 ‘마음의 눈, 마음의 창’을 말합니다. ‘~관(觀)’은 가치관이나 가치판단을 의미하며, 가치관이나 가치관에 따른 판단인 가치판단은 철학의 영향을 많이 받습니다. 교사는 교육관이 있고, 문인은 문학관이 있으며, 경제인은 경제관이 있으며, 정치인은 정치관이 있으며, 역사가는 역사관이 있습니다. 인생과 세상살이는 인생관과 세계관이 있습니다. 그게 사고방식이고 교육철학이고 문학철학이며, 정치철학이고 역사철학입니다. 가치관은 방향성으로 이어집니다. 누구나 값어치(쓸모. 의미)를 더 매기는 쪽으로 기울어지기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관(觀)은 ‘황새의 눈으로 보다’는 의미를 가진 한자라고 합니다. 관(觀)은 황새(雚. 황새 관)처럼 나무 위에 올라가 세상을 넓게 보라는 뜻이라고 합니다.
철학은 가리키는 이념(이상적으로 여기는 생각과 견해)의 방향으로, 역사는 옳고 그름과 유불리를 따지고, 문학은 심금(心琴. 마음속의 거문고. 감동하여 마음이 울림)을 울리고자 합니다. 인문학의 범주에 포함되는, 종교는 이러한 문사철을 모두 망라(포괄. 포함)합니다. 그래서 종교입니다. 성경이든 불경이든, 어느 종교든지 경전에는 신화(神話)라는 이름으로, 철학적인 요소, 역사적인 요소, 문학적 요소를 갖고 있습니다. 종교(宗敎)는 문자 그대로 해석하면, ‘으뜸(마루)이 되는 가르침. 근본이 되는 가르침’이라는 뜻입니다. 마루는 어떤 사물의 첫째, 또는 어떤 일의 기준을 뜻합니다.
불경에는 부처의 공덕이나 가르침을 찬탄하는 노래(시의 형식)인, 가타(伽陀)가 있습니다. 유학에는 공자가 편찬한 것으로 알려진 시경(詩經)이 있고, 성경에는 다윗과 솔로몬 등이 썼다는 시편(詩篇)이 있습니다. 시는 운율(리듬)이 있는(들어간) 이야기입니다. 시는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짧고 리듬감 있게 하는 문학입니다.
이야기의 사전적 정의는 어떤 사물이나 사실, 현상에 대하여 일정한 줄거리를 가지고 하는 말이나 글, 자신이 경험한 지난 일이나 마음속에 있는 생각을 남에게 일러 주는 말, 소문이나 평판, 어떤 사실에 관하여, 또는 있지 않은 일을 사실처럼 꾸며 재미있게 하는 말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이야기하는(스토리텔링)’ 것을 우리는 이렇게도 표현합니다. 떠들다, 잔소리하다, 언급하다, 털어놓다, 노닥거리다, 대화하다, 도란거리다, 말하다, 발언하다, 이르다, 전개하다, 지껄이다, 구술하다, 설명하다, 일컫다, 씨부렁그리다, 재잘거리다, 뇌까리다, 표현하다, 형용하다, 까놓다, 실토하다, 토로하다, 운운하다, 왁자지껄하다, 흥얼거리다, 피력하다, 씨불씨불하다, 씨불대다, 이기죽거리다, 지절거리다, 고백하다 등등입니다. 모두가 이야기하는 것의 유의어(비슷한말)입니다. ‘이야기하다’의 반의어(반대말)는 ‘듣다, 알아먹다, 듣잡다, 받아들이다, 경청하다’ 등입니다. 본래부터 이야기는 주고받는 것입니다. 스토리텔링은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 말하는 화자(작가)와 듣는 청자(독자)가 반드시 있습니다.
어떻든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존재하게 된 연유와 이야기가 있습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지나온 이유와 역사가 있습니다. 문학은 까닭 이야기입니다. 역사도 까닭 이야기입니다. 문학도 역사도 사연(일의 앞뒤 사정과 까닭)입니다. 우리는 늘 이야기하고, 이야기 들으며 삽니다.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역사라는 이름으로 인간은 사연을 말하고 사연을 듣고 삽니다.
역사는 인간존재에 대한 이성적인 이야기이고, 문학은 인간존재에 대한 감성적인 이야기입니다. 결국 문학과 역사는, 인류(인간)에 관한 이야기를 합니다. 이야기는 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야기는 인간이 만든 것이기에 소재(글감. 글 재료)나 사료(역사 서술의 재료)가 뭐든, 모든 것(주제)은 ‘인간’으로 귀결(어떤 결론이나 결말에 이름)됩니다.
그게 별이든, 달이든, 태양이든, 구름이든, 산이든, 나무든, 꽃이든, 전쟁이든, 평화든, 기후변화든, 탄소중립이든, 원자력이든, 권력이든, 경제든, 정치든, 무지개든, 전투든, 영웅이든, 왕(황제)이든, 석기든, 청동기든, 철기든, 말이든, 소든, 양이든, 소나무든, 산불이든, 바다든, 저수지든, 파도든, 배든, 비행기든, 한강이든, 영강이든, 문경새재든, 이슬이든, 낙하산이든, 신(神)이든, 모든 이야기는, 인간으로 귀결(어떤 결말이나 결과로 돌아감)됩니다. 마치 유명 요리사가 갖은 식재료로써 맛난 음식을 만들지만, 그 본질엔 사람의 건강에 있듯이, 문학도 소재(작품의 바탕이 되는 재료)가 뭐든 ‘인간’으로 귀결됩니다. 역사도 역사의 사료(史料)가 뭐든 인간의 삶으로 귀결됩니다.
이야기가 인간(뭇사람들)으로부터 설득을 얻고(납득 시키고), 공감을 얻기 위해선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진실한 이야기는 설득력이 있습니다. 진솔한 이야기는 공감력을 갖습니다. 공감은 남의 감정, 의견, 주장 따위에 대하여 자기도 그렇다고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감동은 기교나 기술이 아니라, 진실에서 나옵니다. 설득력을 가진 이야기나, 공감하고 감동을 주는 이야기는 사람을 움직입니다. 참된 이야기는 사람을 움직이고 돈(자본)을 움직이고 유행을 만들고 세상을 움직입니다. 세상을 선도(앞장서서 이끎)합니다. 그것이 이야기가 가지는 힘입니다. 실다운(꾸밈이나 거짓이 없이 참되고 미더운 데가 있는. 미더운. 미쁜) 이야기는 만유인력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에는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저력이 있습니다. 문학의 기교나, 기술이나, 기법, 방법 등은 유명하신 강사님들로부터 이미 들으신 바가 많기에, 오늘 저는 섬세한 방법이나 수단보다 거시적인 안목에서 ‘문학과 역사’에 대한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이 시간은 현미경보다 망원경으로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을 보고자 합니다. 현상이나 기교보다, 본질과 원리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문학과 역사’라는 제목이 너무 버거워 부제(subtitle)로 ‘이야기는 힘이 있습니다.’로 낮춰 잡았습니다. ‘이야기에는 저력(底力)이 있습니다.’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이야기(Story)에 대해서 이야기(talk. say. tell. speak)를 하고자 합니다. 콘텐츠(내용물)나 텍스트(글)보다 콘텍스트(문맥)를 보셨으면 합니다. 우리의 삶은 맥락입니다.
Ⅱ. 이야기를 왜 해요?
예로부터 민간에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를 민담(民譚)이라고 합니다. 민간설화라고도 하고요. 옛날이야기(고릿적 이야기)이지요. 이야기는 경상도 사투리로 ‘이바구’라고 하지요. 재미있는 것은 ‘이야기’라는 낱말의 어원이 ‘이바구(입아귀)’에서 유래되었다는 설(說)이 있습니다.
수많은 고릿적 이야기 가운데서, ‘혹부리 영감’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에 혹이 달린 영감(혹부리1)이 산에 나무를 하러 갔다가 날이 저물어서 묵을 곳을 찾다가 빈집을 발견해서 하룻밤을 쉬기 위해 들어갔습니다. 빈집에서 혼자 심심해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근처에 있던 도깨비들이 그 소리를 듣고 몰려왔습니다. 노래에 감동한 도깨비 두목이 “노인, 그 고운 노랫소리는 어디에서 나오는 거요?” 하고 물었더니 노인은 농담 삼아 “목에 달린 혹에서 나오는 것이오.”라고 말했습니다. 도깨비는 재물을 줄 테니 그 혹을 자기에게 팔라고 하며, 재물을 던져 주고 혹을 떼어 갔습니다. 이렇게 해서 노인은 혹도 떼고 도깨비가 준 재물로 부자가 되었습니다.
이웃에 살던 다른 혹부리 영감(혹부리2)이 그 말을 듣고, 본인도 혹을 떼고 부자가 되려고, 그 빈집을 찾아 들어가 밤이 되기를 기다린 다음 노래를 시작했습니다. 그랬더니 그 소리를 듣고 도깨비들이 몰려왔습니다. 도깨비 두목이 또 그 노랫소리가 어디서 나오는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도 태연하게 이웃 노인과 똑같은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도깨비 두목이 그 말을 듣더니 “그 전에 어떤 영감이 와서 거짓말을 하더니, 너도 거짓말을 하는구나.”라고 화를 내면서 다른 편에 혹을 하나 더 붙이고 가버려서 결국 혹만 하나 더 달고 엉엉 울면서 돌아갔다고 합니다.’
‘혹부리 영감’ 이야기는 대부분의 고릿적 이야기가 그렇듯이 여러 버전(변형을 준 것)이 있고, 또한 비슷한 이야기가 일본에도 있다고 합니다. ‘혹부리 영감’, ‘도깨비 방망이’ 등의 고릿적 이야기가 주는 교훈 가운데 하나는, 성공한 사람의 성공하기까지의 힘든 과정보다, 욕심이 앞서 결과(열매. 부와 명예)만 보고 그냥 따라하기만 하는 따라쟁이(흉내쟁이. 모방자)는 실패한다는 가르침입니다. 따라쟁이들이 실패하는 큰 이유는 성공자의 흉내(시늉. 척. 체)만 내기 때문입니다. 따라쟁이들이 명심해야 할 대목입니다.
물론 모든 따라쟁이가 실패하는 것은 아닙니다. 모방이 창의와 창조의 바탕(어머니)이 되기도 합니다. 무작정 성공자의 사례를 따르기보다 성공 사례를 면밀하게 분석하고, 자신에 맞게 체화(體化. 생각, 사상, 이론 따위가 몸에 배어서 자기 것이 됨)하여 일을 하는 사람은, 더 큰 성공을 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모든 실패자의 공통점은 성공자의 성공 맥락은 도외시(무시)하고, 무작정 성공자의 흉내만 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필패(반드시 패함)한, 무작정 따라쟁이의 또 다른 실패의 이유는 ‘탓하기’입니다. 실패의 원인을 제 탓보다 남 탓으로 돌립니다. 탓하기는 지속적인 실패자(루저)의 전형적인 특징입니다. 모든 결과는 원인이 있기 마련입니다. 원인을 잘못 분석하면 결과는 엉뚱하게 나옵니다. 검진이 오진되면, 처방도 진료도 잘못되기 마련입니다.
저는 ‘혹부리 영감’이라는 고릿적 이야기에서 ‘이야기의 저력’을 발견했습니다. 저력(底力)은 밑바닥에 간직하고 있는 끈기 있는 힘입니다. 여차할 때 발휘되는 강력한 힘이 저력입니다. 이야기에는 저력이 있습니다. 영국의 소설가 바이어트는 ‘이야기는 호흡이나 혈액순환처럼 인간 본질의 한 부분이다.’라고 말했습니다. 혈액이 순환되고 호흡이 되어야 사람은 삽니다. 이야기는 호흡과 혈액순환처럼 우리의 삶과 불가분(不可分)의 관계라는 의미일 것입니다. TV·라디오·카카오톡, 페이스북과 유튜브 등과 같은 SNS 등의 온갖 매체(미디어)를 통하여 이야기는 말, 영상, 이미지(그림), 글 등의 형태로 홍수를 이루고 있습니다. 디지털미디어 시대에 각종 이야기는 봄날의 쑥처럼 여기저기 불쑥불쑥 돋아나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사람들은 왜 이야기를 하고 살까요? 이야기에 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야기엔 생존에 필요한 저력이 있음을 인류는 본능적으로 간파하고, 고릿적부터 이야기를 해왔고 지금도 열중하고 있고 앞으로도 기막히게 창작할 것입니다. 우리가 밤하늘의 별과 달을 보며 이야기를 할 수는 있지만, 별과 달이 직접 이야기하는 것은 아닙니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존재의 이유와 함께, 존재하게 된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야기는 인류(인간)만이 할 수 있습니다. 인류에게 이야기는 본능입니다. ‘호모나랜스(Homonarrans)’는 ‘이야기하는 사람(인간)’이라는 뜻의 라틴어입니다. 디지털 공간에서 글·사진·동영상 등을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생산하고, 공유하고, 전파하는 이들을 가리키는 용어입니다. 캘리포니아대학교 영문학 교수인 존 닐이 1999년 출간한 <호모나랜스 HomoNarrans>라는 책에서 사용한 신조어로, 존 닐은 이 책에서 ‘인간은 이야기하려는 본능이 있고, 이야기를 통해 사회를 이해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인류가 지금까지 잘 생존해온 훌륭한 전략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이야기가 생존에 필요한 가르침(교훈)과 정보(기억)를 제공하든, 공동체를 결집하든, 집단과 개개인의 마음을 변화시키고 행동하게 하든, 인간의 삶과 세상의 흐름을 이야기하든, 실없는 이야기를 밤새 깔깔대든, 이야기는 인류가 잘 생존하는데 중요한 도구(수단)였고 장래에도 그럴 것입니다.
인류가 자신들의 이야기를 어떻게 만들어가느냐 따라서, 그들의 미래도 결정될 것입니다. 이야기는 방향도 될 수 있고, 속도가 될 수 있고, 목적이 될 수도 있고, 이유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나무뿌리 같은 본질이 될 수도 있고, 가지나 잎과 같은 현상이 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해답이 될 수도 있고, 문제(골칫거리. 말썽)가 될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치유가 될 수도 있고, 아픈 상처를 헤집을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는 양면성(한 가지 사물이 가지고 있는, 서로 맞서는 두 가지 성질)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두 날을 가진 검(劍)처럼,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어느 쪽의 날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인류에게 덕분이 되기도 해코지가 되기도 합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을 예술가 또는 작가라고 합니다. 문인은 작가의 범주에 듭니다. 문인은 말과 글로써 이야기를 꾸려 나가는 사람입니다. 말과 글로써, ‘누구’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입니까? ‘무엇’에 대한 이야기를 하시렵니까? ‘왜’ 그런 이야기를 하십니까? ‘어떻게’ 그 이야기를 꾸려 나갈 것입니까?
문인으로서, 여러분은 ‘무엇’으로, ‘어떤’ 이야기를 창작할 예정이십니까? ‘시’라는 연필을 가지고 무엇을 그려낼 것입니까? ‘소설’이라는 펜을 들고 무엇에 대한 소리를 낼 것입니까? 수필이라는 붓으로 어떤 표정을 짓고 싶습니까? ‘희곡’이라는 자판(字板)으로 몇 막을 올릴 것입니까? ‘평론’이라는 철필로써 무얼 긁어내렵니까? 이야기는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저력도 있습니다. 그러나 힘이라는 것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습니다. 이야기의 양면성입니다.
좋은 힘은 개인과 인류 공동체의 삶에 도움이 되는 것들일 것입니다. 즉,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를 말할 것입니다. 평화, 사랑, 자유, 평등, 질서, 인권(인간존중), 공존, 민주주의, 공화주의, 감동, 감화, 겸손, 삶, 구원, 좋은 관계, 관용, 교훈, 그리움, 권위, 기쁨, 꿈, 노동, 소통, 대화, 독립, 해방, 설득, 이해, 선행, 지혜, 명예, 문명, 미덕, 발전, 변화, 축복, 봉사, 희생, 긍정, 비판, 평안, 분별, 풍요(부요. 부), 진실, 빛, 소금, 희극, 행운, 분배, 상식, 생산, 선(선행), 정의, 부당, 승리, 믿음(신뢰. 신용), 아름다움, 협력, 웃음, 용서, 우정, 은혜, 축복, 만남, 이상, 희망, 효도, 회개(반성. 후회), 관심(호기심), 선용, 정치, 타협, 빛, 절제, 칭찬, 책임(의무), 천국, 정직, 공정, 도리, 진실, 진리, 참, 양심, 자연, 적응, 극복, 자부심, 긍지, 자존감, 애국, 안전, 기억, 건국, 믿음, 합당, 진심, 중심, 진짜, 소중, 착함, 밝히다, 개선, 개업, 거룩, 겸손, 참말(정말), 안심, 건강, 건설, 검소, 용기, 속마음, 형평, 조율, 협력 등등입니다.
나쁜 힘은 개인과 인류 공동체의 삶에 해로운 것들일 것입니다. 폭력(강제. 폭행), 전쟁, 살인, 성폭행, 약탈, 침탈, 독재, 군주, 거짓, 혐오, 교만, 고독, 죽음, 고통, 궤변, 강요, 악행, 무식, 불명예, 멸종, 멸망, 두려움, 공포, 야만, 악덕, 퇴보, 퇴행, 죄, 저주, 분노, 부패, 부정, 비난, 불안, 무분별, 빈곤, 비극, 불운, 독점, 몰상식, 악(악행), 불의, 패배, 불신, 더러움, 싸움(다툼), 성냄, 증오, 우울, 슬픔, 배신, 이별, 절망, 불효, 집착, 핑계(변명. 탓), 악용, 폭군(暴君), 포기, 편견, 특권, 통치, 탐욕, 탐심, 탄압, 타락, 그림자(그늘), 무절제, 지옥, 지배, 예속, 위선, 거짓, 재앙(위기. 재난), 산불, 기후변화, 상실감, 몰이해, 매국, 불안전, 미움, 망각, 망국, 의심, 불통, 가난, 부당, 가면, 가장자리, 가짜, 간악, 감추다, 개악, 폐업, 비천(천박. 비루함), 거만(교만), 거짓말, 걱정, 쇠약(나약. 병약), 파괴, 사치(낭비), 겁, 겉마음 등등입니다.
호모사피엔스(현생인류. 생각하는 인간)는 이야기를 하는(story를 telling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이야기를 하고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우리들은 누구나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스토리텔러(storyteller. 이야기꾼. 작가)입니다. 스토리(사연) 없는 인생은 없습니다. 누구나 저마다의 인생이야기(전기. Life story)가 있습니다. 저마다 감추고 싶은 이야기도 있을 것이고, 드러내고 싶은 이야기도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스토리와 함께 태어났습니다. 국가와 민족도 영웅도 스토리(탄생 설화)와 함께 생겨났습니다. 심지어 종교도 신화(神話. Myth)와 함께 시작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왜 인간은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할까 생각해봤습니다. 왜 인간은 ‘토끼와 거북이’나 ‘춘향전, 심청전’ 같은 이야기를 쉼 없이 만들고 또 이야기를 할까요? 왜 인간은 이야기를 하고 들으며 살까요?
크게 세 가지 이유 때문이 아닐까요?
첫째는 재미있기 때문입니다. 재미의 유의어는 흥미(興味)입니다. 기분(味. 맛. 느낌. feeling)을 돋우는(일으키는. 興) 것이 흥미입니다. 이야기는 소설 삼국지처럼 흥미진진(興味津津. 넘칠 진)해야 인기 1위의 연속극이 됩니다. 이야기는 흥미(재미)가 넘칠 만큼 많으면, 때때로 목돈(뭉칫돈)이 되기도 합니다. 타고난 이야기꾼 곁에는 항상 사람들이 꼬입니다(사람이 한곳에 많이 모이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사람인 래칸투어(raconteur)는, 인기(人氣)가 있습니다. 인기는 어떤 대상에 쏠리는 많은 사람의 관심이나 호감을 말하지만, 저는 ‘사람들에게 주는 기운·원기·힘·생기·기력’으로 해석하고자 합니다. 기(氣)는 밥(米)을 지을 때 피어오르는 수증기의 모습을 표현한 글자(상형자)라고 합니다. 오늘날의 표현대로 하자면 ‘밥심(밥힘)’인가요? 아무튼 인기가 있는 사람을 가까이한 사람은, 인기쟁이로부터 기운을 얻는 것입니다. 삶에 기운을 얻으니 더욱더 가까이하게 되는 것입니다. 팬덤(fandom. 팬층, 팬들)은 그래서 생겨나는 것이 아닐까요?
인기가 있어, 사람들이 한곳에 많이 모여들어 뒤끓으니, 돈이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지요? 유튜브에서 자기만의 동영상을 제작해 업로드하는 직업인 ‘유튜브 크리에이터(유튜버)’를 떠올리면 이해가 쉽게 될 것입니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너절하고 시시껄렁하고 맛없고 멋없고 따분합니다. 지위와 재물이 어느 정도 있어도 재미없는 사람은 남녀 사이에 인기가 별로라고 합니다. 요새 가장 인기 있는 연인은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재미는 대세이고 시대적인 추세입니다. 오늘날의 트렌드는 즐거움(락. 樂)입니다. 텔레비전에 가장 출연 횟수가 많은 사람들은 이영자·유재석씨와 같은 개그맨 출신들이지요. 그들이 왜 많이 출연할까요? 유식하기 때문일까요? 연기를 잘하기 때문일까요? 그보다는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시청자들에게 웃음(즐거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기쁨과 즐거움과 재미가 있는 곳에 돈이 모입니다. 재미(fun)가 돈(fund)이 된다는 말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돈이 많이 됩니다. 거칠게 표현하면 ‘재미(fun)가 돈(fund)이다.’라고 요약이 될까요?
수많은 정보가 쓰나미처럼 몰려오는 디지털미디어 시대에 객관적이고 가치중립적인(어떤 가치관이나 태도에도 치우치지 않는) 정보는, 이제 이야기 소비자로부터 별다른 감흥(신명)을 불러일으키기 어렵습니다. 이야기의 소비자들은 재미가 있어야지 이야기를 구매합니다. 재미없는 이야기는 돈이 되지 않는다는 말이 됩니다. 이야기는 재미가 있어야 돈이 됩니다. 독자들은 이야기 맛집을 찾고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둘째로 이야기는 돈이 됩니다.재미라는 낱말의 어원은 확실치 않습니다. 다만, 재미의 유의어로 ‘수익, 매상, 소득, 이익, 영리, 이문’이라는 뜻이 있습니다. 그렇게 볼 때, ‘재물(財物)을 모으는 맛(味)’에서 재미(財味?)라는 단어가 유래되지 않았을까 유추해 봅니다. ‘재미를 보다, 재미를 붙이다.’라고 할 때, 재미는 재물과 재산을 늘리는 것과 연관이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지나친 억측인지 모르겠지만요.
味(맛 미)는 ‘맛, 기분, 취향’의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인간에게 재물은 동물의 먹이에 해당합니다. 인간이 재물을 모으는 것은 다람쥐가 가혹한 겨울을 나기 위해 도토리를 볼주머니에 한가득 욱여넣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먹이는 생존과 직결된 것입니다. 생존과 유전자 보전(온전하게 보호해서 유지함)과 관련된 것들은 대체로 본능에 해당합니다. 먹이(재물)를 모으고 먹이(음식)를 먹는 것은 물욕과 식욕이고, 이것들은 본능적인 것들입니다. 인간은 본능과 관련된 것을 할 때 사력(안간힘. 전력)을 다해서 합니다.
먹이활동은 때론 저장강박증처럼 집착이 되기도 합니다. 자연계에서 동물들의 저장강박은 비교적 적은 편이지만, 인간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습니다.
저장강박증은 강박장애의 일종으로, 어떤 물건이든지 사용 여부와 관계없이 계속 저장하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불쾌하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증상을 말합니다. 저장강박 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아마도 저장할 때마다 마음이 편하고 희열을 느끼기 때문이 아닐까 짐작해 봅니다. 먹이를 모으는 기분은 황홀할 것입니다. 어떤 부자들은 돈을 모으는 재미가 돈을 쓰는 재미보다 더 크다고 말합니다. 그렇지만 지나친 물욕과 식욕은, 탐욕과 과욕은 과유불급이 될 수 있습니다.
적절하고 적당해야 합니다. 균형(동양에서는 중용이라고 함)을 이뤄야 하지요. 물욕, 식욕, 탐욕, 탐심 등은 생존적인(본능적) 욕구이지만, 지나치거나 치우치고 기울어져 불균형 상태가 되면, 그 개인도 그 주변인도 반드시 해를 입기 마련입니다. 법정 스님이 말씀하시는 ‘무소유’는 소유 자체를 하지 말라는 뜻보다, 필요를 최소화하고, 최소한의 필요만큼의 소유만 하라는 뜻이 아닐까요?
어떻든 재미가 쏠쏠한 이야기는, 돈도 짭짤합니다. 흥미진진한 이야기는 더 큰돈이 됩니다. 연극에서 막(幕)이 바뀔 때마다 나타나는, 반전의 묘미를 가진 이야기에 사람들은 열광하고 마음이 끌려다닙니다. 텔레비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먹으면서 하는 이야기(먹방)’입니다. 먹방(먹는 방송)이든 쿡방(cook放. 출연자들이 요리를 만드는 모습을 주로 보여 주는 방송)이든 먹캉스(먹다와 바캉스의 합성어로 일종의 먹방투어)든, 그 방송 프로그램에는 ‘이야기와 음식’이 있습니다. 인간이 가장 좋아하는 맛난 ‘음식과 이야기’가 있으니 당연히 인기가 있고, 그 인기 출연자는 목돈을 벌지 않을까요?
재미있는 이야기는 돈이 됩니다. 만화가 허영만 선생의 만화 ‘식객(食客)’처럼 음식(먹이)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도 돈이 됩니다. 입에서 맛깔이 나고, 몸과 마음이 재미나는(즐거운) 이야기는 돈이 됩니다. 심금을 울리고, 마음을 움직이는(끌고 다니는) 이야기는 힘이 됩니다. 교제는 먹고 마시면서 나누는 것입니다. 서로 사귀어 가까이 지내려면, 먹고 마시면서 즐거워야 합니다. 그러면서 감동을 주면 금상첨화이겠지요. 이야기의 본질은 감동입니다. 감동은 기술이 아니라 진심(진정성. 진솔함)에서 나옵니다. 감동적인 이야기는 돈이 됩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본(돈 등)을 가진 자가 힘을 가진 자입니다. 자본(경제) 권력이지요. 사람이 돈에 매몰되어서 살면, 돈이 사람을 매장시킵니다. 그렇지만 돈은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돈은 먹이이고 돈은 힘이기 때문입니다. 돈도 힘도 검처럼, 양면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셋째로 이야기는 정체를 밝히고, 소통과 메시지 전달의 수단입니다.
신(神)과 인간에 관한 신령스러운 이야기인 신화(神話), 사실처럼 꾸며 말한 이야기인 설화(說話), 예로부터 민간에 전하여 내려오는 이야기인 민담(民譚. 이야기 담),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인 전설(傳說) 등은 모두 공통점이 ‘옛날이야기’입니다. 신화나 설화와 같은 옛날이야기는 그 민족이나 나라의 정체성(본모습. 아이덴티티)이 되기도 합니다. 옛날의 나라는 신화와 함께 건국했습니다. 그것이 건국 신화입니다.
단군신화는 한민족 최초의 나라인 고조선의 건국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건국 시조인 단군의 탄생과 건국 이념이 담겨 있습니다. 널리 인간 세계를 이롭게(德) 한다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의 건국 이념은 대한민국의 정치, 교육, 문화의 최고 이념입니다. 이념은 이상적으로 여기는 생각이나 사상입니다. 홍익인간은 한민족의 방향성이자 추구해야 할 가치입니다. 그게 한민족의 정체성입니다. 모든 인류의 삶에 덕분이 되는 존재가 우리 민족입니다. 당연히 한민족은 전쟁을 싫어하고 평화를 사랑한다는 것이지요.
신화는 고대인의 사유(대상을 두루 생각하는 일)나 표상(대표로 삼을 만큼 상징적인 것. 상징)이 반영된 신성한 이야기입니다. 우주의 기원, 신이나 영웅의 사적(업적), 그 민족의 아득한 옛날의 역사나 설화 따위가 주된 내용입니다. 그리스 신화는 고대 그리스 민족이 만들어 낸 신화와 전설을 말합니다. 그리스 신화에 따르면, 올림포스산(그리스의 최고봉)에는 주신(主神)인 제우스를 포함하여 십이(十二) 신이 살았다고 합니다. 그리스 신화를 통해서 우리는 고대 그리스인들의 우주관(우주의 기원, 본질, 발전에 관한 학설), 세계관(자연 및 인간 세계에 대한 과점이나 가치관. 인생관), 그리고 신과 인간의 관계 등을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민족의 우주관이나 세계관은 그 민족의 정체성과 연결됩니다. 이처럼 신화나 설화, 전설을 통해 우리는 그 민족의 정체성을 파악하고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또한 이야기는 소통에 도움이 됩니다. 뭐든 막힌 것은, 불통은 고통을 동반합니다. 우리의 삶에는 소통이 절실히 요청됩니다. 소통(疏通. 트일 소)이란 막혔던 것이 트여 잘 드나드는 것을 말합니다. 불통인 나와 나, 불통인 나와 너, 불통인 사회, 불통인 세상, 불통인 사람, 불통인 가정, 불통인 삶과 인생, 불통인 인간과 자연 등과 막힌 것을 틔우고 열어 교통(交通. 서로 오고 감)이 되도록 하는, 소통의 조력자, 주재자, 해결자, 중재자의 역할을 이야기는 합니다. 소통은 향상 쌍방향입니다. 일방통행은 소통이 아닙니다.
이야기를 하는 것으로 고통이 해소되기도 합니다. 이야기를 들음으로써 고통의 문제가 풀리기도 합니다. 요즘 TV의 인기 프로그램인 ‘오은영의 금쪽상담소’는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이자 국민 멘토라고 할 수 있는, 오은영 박사가 다양한 사람들의 고민을 함께 풀어 가는 ‘멘탈케어(마음 돌봄)’ 프로그램입니다. 많은 분이 저마다의 고민거리를 들고나와 사연을 말합니다. 그때마다 오은영 박사는 무엇보다 먼저, 내담자(상담실 따위에 자발적으로 찾아와서 이야기하는 사람)의 말을 주의 깊게 경청합니다.
귀를 기울여 듣는(귀담아듣는), 경청(傾聽)의 청(聽)자는 ‘듣다’나 ‘받아들인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聽자는 耳(귀 이)자와 壬(천간 임)자, 悳(클 덕. 德의 古字)자가 결합한 모습입니다. 갑골문에서는 누군가의 말을 열심히 듣고 있는 모습을 표현한, 단순히 耳자에 두 개의 口(입 구)자만이 그려져 있었다고 합니다. 후에 口자는 생략되었고 대신 눈과 심장을 그린 悳자와 壬자가 더해지면서 ‘보고(直) 듣고(耳) 느끼는(心) 사람(壬)’이라는 뜻을 갖게 되었고 합니다. 直(직)은 十(십)과 目(목)과 乚(숨을 은. 隱의 古字)의 합자(合字)이고, 十(십)과 目(목)을 합(合)하여 열 개(여러 개)의 눈(많은 사람)으로, 숨어 있는(乚) 것을 바르게 볼 수 있다는 뜻을 합(合)하여 바르다, 곧다를 뜻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는 과정에, 서로의 의사가 소통이 되기도 막혔던 오해가 해소되어 이해(용납)될 수도 있습니다. 경청은 눈으로 상대방을 바라보며, 상대방의 말을 귀 기울여 들으며 상대방의 마음(뜻)을 내 마음(뜻)으로 느끼는 과정을 의미한다고 할까요? 그게 이뤄지면 막혔던 것이 트이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는 행운이 올 것입니다.
또한 모든 이야기에는 메시지가 있습니다. 이야기하는 화자(話者)는 이야기를 듣는 청자(聽者)에게 말하고자(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있기 마련입니다. 메시지는 정보, 의도(목적. 뜻. 취지. 본심. 의사), 교훈, 전하는 말, 내용, 전갈, 안부, 생각 등을 의미합니다. 이야기의 기능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메시지의 전달’일 것입니다.
이야기는 메시지를 통해서 여러 가지 큰일을 해냅니다. 이야기는 다음과 같이 허다한 일들을 합니다. 이야기가 가지는 힘입니다. 이야기는 감동을 주기도 합니다. 좋은 이야기는 깊이 느끼어 마음을 움직이게 합니다. 이야기는 두려움과 공포를 극복하는 용기를 줍니다. 이야기는 심약한 사람을 용맹스럽게도 합니다. 이야기는 사랑을 부추기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분노를 떨쳐내게 합니다. 이야기는 상처를 딛고 올라서게 합니다. 이야기는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이야기는 자연과 사람에 관심을 가지게 합니다. 이야기는 좋은 관계를 맺게 합니다. 이야기는 상실의 아픔을 치유되게 합니다. 이야기는 비관에서 낙관으로 돌아서게 합니다.
이야기는 구속(식민지)에서 자유(석방. 해방)를 보여 줍니다. 이야기는 절망에서 희망을 보게 합니다. 이야기는 자신을 살피게 합니다. 이야기는 나를 성찰하고 남을 관찰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실연의 아픔을 떨치게 합니다. 이야기는 실패를 성공으로 이끌게도 합니다. 이야기는 과거에 발목 잡히지 않고 미래를 보게 합니다. 이야기는 머리를 맑게도 합니다. 이야기는 외로움을 떨치게도 합니다. 이야기는 창의성을 키웁니다. 이야기는 가슴에 꿈을 품게 합니다. 이야기는 얼었던 마음을 녹여주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자신을 신뢰하라고 합니다. 이야기는 더 나은 자신으로 성장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삶에 활력을 불어넣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전쟁의 고통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이야기는 죽음(사망)에서 생명(삶, 목숨)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야기는 미움과 증오를 혐오하고, 사랑을 사랑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어둠에서 빛을 보게 합니다. 이야기는 소금의 짠맛과 생선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야기는 모든 차이에 따른 차별에서, 평등과 동등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분리와 분열의 고통에서 통합과 화합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이야기는 변절에서 지조와 절개와 의리를 생각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삶의 미성숙을 성숙하게도 합니다.
이야기는 불의(不義)와 불화(不和)하고 정의와 화목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퇴보와 퇴화에서 진보와 진화를 엿보게 합니다. 이야기는 통치보다 정치의 소중함을 알려줍니다. 이야기는 불행에서 행복을 꿈꾸게 합니다. 이야기는 불행과 불운에서 행복과 행운을 보게 합니다. 이야기는 속박에서 독립을, 식민지(속국)에서 독립국을 소망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매국노의 친일에서 항일의 가치를 일깨웁니다. 이야기는 가정폭력, 직장폭력, 언어폭력, 댓글 폭력(악성댓글), 데이트폭력, 성폭력 등으로 인해 응어리진 가슴의 근육통을, 쿨파스처럼 소염(염증을 없앰)해줍니다.
이야기는 전제와 독재에서, 다 같이 화합해서 나라를 이끄는 ‘공화(共和)’의 가치를 지키게 합니다. 이야기는 군주주의에서 민주주의의 소중함을 교훈합니다. 이야기는 내면을 키워 외연의 확장을 이루라고 말합니다. 이야기는 내공(오랜 기간 경험이나 숙련을 통하여 다진 능력)을 쌓아야 외공(무예)을 쓸 수 있다고 말합니다. 이야기는 피부색보다 인간을 보라고 말합니다. 이야기는 지구온난화(기후변화)에서 인간의 생존과 지구의 미래를 보게 합니다. 이야기는 공멸에서 공존을 살피게 합니다. 이야기는 인위에서 자연을 돌보게 합니다.
이야기는 저주를 저주하고, 축복을 축복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이승(현세)에서 저승(내세)을 바라보게 합니다. 이야기는 좁은 속에서, 넓은 아량과 인자와 관대함을 살피게 합니다. 이야기는 불효에서 효도를 불충에서 충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불륜(不倫. 인륜에 어긋남. 도덕에 벗어남)에서 인륜(人倫.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의 소중함을 가르칩니다. 이야기는 강자의 횡포에서 약자의 슬픔과 고통을 느끼게 합니다. 이야기는 무식과 무지에서 유식과 지혜를 떠올리게 합니다. 이야기는 부모 자식, 아내와 남편 간의 서운함을 풀어주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막힘과 불통에서 트임과 소통의 원활함을 일깨웁니다. 이야기는 역행에서 순행을 알리고, 악순환에서 선순환을 희망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현상과 모습에서 본질과 원리를, 본질과 원리에서 현상과 실제가 교행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가난과 빈곤에서 부와 풍요를 갈망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배신(배반)에서 신의를 지키라 하고, 원한(증오. 원통)에서 용서를 권유합니다. 이야기는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을 관찰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쇠퇴에서 부흥을 꿈꾸게 합니다. 이야기는 불만에서 충만과 감사를 보라고 합니다. 이야기는 교만에서 겸손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이야기는 혼돈(무질서. 카오스)에서, 질서(체계. 코스모스)를 추구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걱정과 근심에서 안심과 위안을 주려고 합니다. 이야기는 쇠약과 병약, 노쇠에서 건강의 소중함을 말합니다. 이야기는 질병에서 치료와 치유를 살핍니다.
이야기는 무시(괄시. 멸시. 업신여김. 외면. 경시)에서 존중과 존경, 받듦의 가치를 말합니다. 이야기는 죽음과 죽임에서 살림을 말합니다. 이야기는 문제(질문. 물음)에서 해답(해법. 해결)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몰이해와 불감에서 이해와 공감을 강조합니다. 이야기는 불공정과 불공평에서 공정과 공평과 공명정대함을 말합니다. 이야기는 절망(낙망. 비관. 낙담. 실망. 체념. 좌절. 암흑)에서 희망(기대. 소원. 바람. 빛. 염원. 소망. 갈망)을 바라게 합니다. 이야기는 슬픔(괴로움. 비통. 참담. 비참. 비애. 고통. 우울. 울적)에서 기쁨(즐거움. 희열. 환희. 반가움. 쾌락. 유쾌. 통쾌. 상쾌)을 추구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추(醜. 추함. 더러움. 못생김. 미움. 지저분. 불결. 비루함. 추잡. 추악. 구림. 밉살스러움)에서 미(美. 아름다움. 멋. 맵시. 격조. 풍취. 우아. 훌륭. 깨끗함. 청아. 갸륵함. 결백. 고결. 무구함. 사랑스러움. 아리따움)를 쫓아 구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어머니와 아버지를 이야기합니다. 이야기는 흔함(예사롭다. 수두룩. 허다하다. 천함)에서 귀함(소중. 귀중. 보배로움. 값짐. 금쪽같음)을 말합니다. 이야기는 무의미(공허. 허무. 무가치)한 것을 의미(보람. 가치. 중요성. 의의. 값어치) 있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부당함과 악랄함과 사악함, 야비함에 맞서게 합니다. 이야기는 시련과 고난을 극복하고 타개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잘못된 풍습이나 관습과 관행을 타파하고 척결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지옥(나락. 구렁. 늪)에서 천국(낙원. 이상향. 천당. 하늘나라. 하늘)과 극락(극락세계)을 소망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정체불명(正體不明)에서 정체(본모습. 실체. 아이덴티티)를 분명하게도 합니다. 이야기는 사물에서 인간을 바라보게 합니다. 무례와 몰지각과 몰상식에서 상식과 통념, 교양을 일깨우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디스토피아(암울한 미래상)에서 유토피아(꿈나라. 낙원. 천국. 도원경.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갖춘 완전한 사회)를 꿈꾸게 합니다. 이야기는이별(고별. 작별. 석별. 상실. 결별. 몌별)에서 만남(상봉. 상견. 상면)을 말합니다. 이야기는 이별의 슬픔에서 그리움(사랑. 동경. 사모. 생각. 연모. 연정. 순애. 순정)을 그립니다.
이야기는 타향(이역. 타역. 타관)에서 고향(향토. 본고장. 발생지. 근원지. 고토)을 스케치합니다. 이야기는 나의 잘못(과오. 과실. 그릇. 불찰. 실수. 오류. 죄. 허물. 흉. 탓. 탈. 결점. 결함. 흠. 상흔)에서 반성(참회. 뉘우침. 개전. 개과천선. 후회. 고백. 회개. 통회. 회한. 성찰. 한탄. 개탄. 탄식. 한숨. 장탄식)을 하게 합니다. 이야기는 죄(잘못, 원죄. 악행. 죄과. 죄업. 악업. 범죄)에서 벌(징벌. 처벌. 징계. 형벌. 형)을 선고합니다. 이야기는 암울(우울. 음울)에서 명랑(유쾌. 쾌활. 즐거움. 기쁨)의 소중함을 일깨웁니다. 이야기는 코로나의 유난(유별. 특별. 이상함. 특수)에서 코로나가 없는 일상의 무난(수월. 수수. 괜찮음)을 갈구하게 합니다.
이처럼 이야기는 정체를 밝혀서 가야 할 길을 가게 합니다. 이야기는 막힌 것들을 뻥 뚫어 줍니다. 이야기는 지혜와 지식과 교훈과 정보 등의 모습으로 메시지를 줍니다. 그래서 이야기는 힘이 되고 힘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이야기력’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이야기를 하고 듣는 까닭은 사연처럼 참 많겠지만, 이야기는 재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재미가 쏠쏠한 이야기는 돈이 짭짤하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이야기는 우리의 정체를 밝히고, 원활한 소통과 메시지 전달의 중요한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세종대왕은 백성들과의 문자를 통한 소통과 메시지의 전달을 목적으로, 갖은 어려움과 반대를 물리치고 훈민정음(한글)을 창제하게 하셨습니다. 혜안을 가졌던 세종은 왕과 백성이 비휘발적인 문자로써 소통되지 않으면, 조선이라는 국가체제가 지속 가능성을 갖기 어렵다고 판단했던 것입니다. 휘발은 보통 온도에서 액체가 기체로 되어 날아 흩어지는 현상을 말합니다. 휘발성 기름을 휘발유라고 합니다. 오늘날에는 음성도 녹음이 가능하지만, 옛날에 말은 발음하는 순간 휘발되고 말았습니다.
Ⅲ. 문학과 역사는 어떤 사이일까요?
문학과 역사의 가장 큰 공통점은 ‘이야기’입니다. 문학은 주로 인생 이야기거나 더 나은 인류의 삶을 바라는 이야기입니다. 문학은 시간적으로 과거는 물론이고 현재와 미래가 될 수 있습니다. 반면에 역사는 과거입니다.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역사입니다. 물론 역사가 과거를 대상으로 하지만, 그 지향점은 현재와 미래입니다. 문학도 역사도 ‘이야기’라는 점에서는 같은 면이 있습니다.
문학과 역사의 차이점이라면, 역사는 ‘사실(fact)’을 바탕으로(근거하여) 진실과 진리를 찾아가는 여정입니다. 역사는 논픽션(nonfiction. 비소설)입니다. 역사는 실화 즉, 실제로 있거나 있었던 사실을 바탕(근거)으로 한 이야기입니다. 진실은 의미(의의. 가치. 뜻)를 말합니다.
반면 문학은 픽션, 논픽션, 논픽션+픽션 등이 혼재되어 있습니다. 문학은 사실(논픽션. 팩트)에 근거하여 작가는 글을 쓸 수 있습니다. 문학은 실제로 없는 사건을 작가가 상상력과 공상(현실적이지 못하거나 실현될 가망이 없는 것을 막연히 그리어 봄), 창의력을 동원하여 허구적(픽션)으로 꾸며 내기도 합니다. 또한 문학은 역사소설처럼 팩트(사실)와 픽션(fiction. 허구)을 섞어서 이야기를 꾸밀 수도 있습니다. 이를 팩션(faction)이라고 합니다. 팩션은 팩트(fact)와 픽션(fiction)을 합성한 신조어로, 역사적 사실이나 실존인물의 이야기에 작가의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이야기를 재창조하는 문화예술 장르를 말합니다.
중국의 후한 말기와 삼국시대(위·촉·오)를 배경으로 쓴, 진수의 <삼국지>는 역사책입니다. 진수의 삼국지는 정사(正史)입니다. 정사는 정통적인 역사 체계에 의하여 서술된 역사나 그 기록을 말합니다. 진수의 <삼국지> 등을 근거로, 명나라 때의 소설가 나관중이 쓴 <삼국지연의>는 역사소설입니다. 진수의 <삼국지>는 역사이고, 나관중의 <삼국지연의>는 문학입니다. <삼국지>는 사실을 바탕으로 쓴 글이고, <삼국지연의>는 사실과 허구를 섞은 팩션(faction)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삼국지>가 아니라 <삼국지연의>입니다. 연의(演義)는 중국에서 주로 명나라와 청나라 때 발달한 소설 장르로, 역사적인 사실을 바탕으로 거기에 허구를 덧붙여서 만든 이야기(역사소설)를 합니다. 소설은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방식. 형식)을 말합니다.
역사 이야기는 진실과 진리를 추구하며, 지혜와 교훈을 통하여 역사 발전(진보)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목적과 이유에서 주로 서술이 이루어집니다. 반면 문학 이야기는 감동(感動. 마음을 움직이는)과 공감을 주는 것이 가장 큰 이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동이란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지요.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문명비평가인 제레미 리프킨은 공감이란 ‘우리가 다른 사람의 삶의 일부가 되어 의미 있는 경험을 해줄 수 있게 해주는 심리적 수단’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의 역사는 ‘과거의 역사’보다, ‘역사의 과거’를 추구합니다. 과거를 위한 역사가 아니라, 역사를 위한 과거를 추구하겠다는 뜻입니다. 역사도 과거의 성공과 실패에 대한 경험담이나 가르침만이 아니라, 공감하고 감동할 수 있는 역사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날 역사는 문학과의 간격이 좁혀지고 있습니다. 이젠 문인은 역사의 문턱을 넘나들고, 역사가도 문학의 문턱을 뻔질나게 넘나들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感(감) 자는 ‘느끼다’나 ‘감동하다’라는 뜻을 가진 글자입니다. 感자는 咸(다 함)자와 心(마음 심)자가 결합한 모습입니다. 咸자는 ‘모두, 남김없이, 모조리’라는 뜻이 있습니다. 감은 ‘하나도 빼지 않고 모두 느끼는 것’을 말합니다. ‘모조리 느끼는’ 것은 오감(五感)을 통해 느낀다는 뜻입니다. 오감은 다섯 가지의 감각으로 곧, 시각, 청각, 미각, 후각, 촉각을 말합니다. 투박하게 말하자면, 오감으로 느껴 마음을 움직이는 감동이 없는 문학은, 문학이라 하기엔 좀 그렇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역사는 진실과 진리 추구, 문학은 재미와 감동 추구가 지향하는 바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역사가 이성적이라면 문학은 감성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역사가 머리만으로 하는 것은 아니고, 문학이 가슴만으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큰 맥락에서 보면 역사는 이성적인 측면이 크고, 문학은 감성적인 측면이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역사가 공감이라면 문학은 감동입니다.
문학은 생각이나 느낌, 정서를 언어로 표현한 예술입니다. 정서(情緖)는 여러 가지 마음이나 감정의 실마리를 말합니다.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기분이나 분위기가 정서입니다. 문학은 감정이나 사건의 실마리(실의 머리. 감겨 있거나 헝클어진 실의 첫머리)를 따라가며, 감정과 사건을 풀어 갑니다. 감정을 표현합니다. 감정을 나타냅니다. 문학은 감정을 표현함으로써 재미와 감동을 추구합니다.
예술의 본질은 표현입니다. 생각이나 감정(느낌)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 표현의 방법이 다를 뿐이지 이성과 감성을 표현하는 것입니다. 느낀 것을 표현하고, 표현함으로써 소통하는 것입니다. 표현하기 위해선, 귀담아들어야 하고, 주의 깊게 읽어야 하고, 눈여겨보아야 하고, 호기심과 관심을 가져야 하고, 눈여겨 관찰해야 하고, 나만의 생각을 만들어야 하고, 그 생각과 느낌을 표출하고 표현합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소통하는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소통하고, 자연과 인간이 소통하고, 우주와 인간이 소통하고, 인간과 동물이 소통하고, 인간과 식물이 소통하고, 식물과 동물이 소통하고, 소통은 언제든 쌍방향이어야 합니다. 일방통행식의 말과 글은 지시전달이고 불통이고 고통일 따름입니다. 굳은 생각은 문학의 최대의 적입니다. 생각의 틀을 깨뜨려야 합니다.
목소리나 악기로 표현(표출. 묘사)하는 예술이 음악입니다. 그림이나 조각, 만들기 등으로 표현하는 예술이 미술입니다. 몸짓으로 표현하는 예술이 춤(무용)입니다. 말과 글로써 표현하는 것이 문학입니다. 말로써 표현하는 것이 토론과 토의, 발표 등입니다. 글로써 표현하는 것이 보고서, 논문, 책 등입니다. 남다르고 색다른(독특한) 시각으로 색다르고 남다르게 표현하는 것이 창의적 표현입니다. 예술이 좋아하는 것은 색다른 시각과 표현이고, 싫어하는 것은 타성에 젖고 관성을 따르는 표현입니다. 문학예술은 관용적(습관적으로 늘 씀. 또는 그렇게 쓰는 것) 표현을 싫어합니다. 문학은 상투적(늘 써서 버릇이 되다시피 한 것) 표현을 가장 싫어합니다.
문학에는 시, 소설, 수필, 희곡, 평론이라는 5개의 갈래가 있습니다. 시는 생각이나 정서를 운율이 있는 언어로 짧게 표현하는 문학입니다. 시(詩)는 자신의 감정을 말(言)이나 글로써 사찰(寺刹)에서 불경을 외우듯이 리듬(운율. 말의 가락)을 갖고 표현하는 것입니다. 시는 사찰(寺)에서 불경을 읊는 소리(言)를 ‘시’에 비유해 만들어진 글자로 해석된다고 합니다. 이야기를 일정한 리듬을 갖고 하는 것이 시라고 봅니다.
리듬이 있는 이야기가 시입니다. 작가의 상상으로 잘 짜인 이야기가 소설입니다. 일상생활이나 사회문제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느낌을 형식의 제한이 없이, 자유롭게 이야기한 것이 수필입니다. 연극 공연을 위해서 쓴, 대사(무대에서 하는 말) 형식의 이야기가 희곡입니다. 시나리오는 영화를 만들기 위해서 쓴 대화 형식의 이야기입니다. 대본(臺本. 극본. 각본)은 배우가 무대에서 연극 연습을 위해서 보는 책을 말합니다.
문학과 역사는 이야기입니다. 문학과 역사는 인간의 더 나은 삶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같은 길을 간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문학과 역사는 진실과 진리를 희구하고 갈망한다는 점에서 닮은 점이 있습니다. 문학은 감성적이고 역사는 이성적이지만, 수레가 하나의 바퀴로만 굴러가기 어려운 것처럼, 문학과 역사가 서로서로 친구가 되어 함께 진리의 길을 동행할 수 있다고 봅니다.
또한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인 역사를 더 많이 안다면, 우리들의 문학의 폭과 깊이도 더 넓고 깊어지리라고 봅니다. 진수의 <삼국지>와 나관중의 <삼국지연의>처럼 말입니다. 역사에는 만약은 없지만, 나관중이 진수의 <삼국지>를 읽지 않았다면, 소설 <삼국지연의>도 존재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가진 게 망치밖에 없을 땐 세상의 모든 문제가 못대가리로 보이기 마련’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문인은 다양한 연장을 가져야 합니다. 문학의 범주에 포함되는 언어, 역사, 철학, 종교 이외에도, 심리나 본성 그리고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갖고 배운다면, 더 아름답고 훌륭한 작품과 글을 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시인 안도현이 쓴 ‘서울로 가는 전봉준’ 작품은 안도현이 동학농민운동과 접주(接主. 동학에서 ‘접’이라는 조직의 우두머리) 전봉준에 대한 역사적인 배경지식과 역사의식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을 것입니다. 역사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자각을 역사의식이라고 합니다. 역사의식은 사물의 역사적 기원과 그 역사적 발전 과정 및 역사적 위치에 관한 의식(사물이나 일에 대한 개인적·집단적 감정이나 견해나 사상)을 말합니다. 역사 발전에 대한 나름(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의 방식)대로 발전적인 생각이 역사의식입니다.
동학은 밖으로 외세(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으로부터 우리 것을 지키고, 안으로는 세도정치로 인한 백성들의 고통을 구원하겠다는 목적으로 창시되었습니다. 그래서 명칭을 서학(西學. 천주교. 천주학)의 반대 개념인, 동학(東學)으로 한 것입니다. 동학이라는 명칭 속에는 서양세력의 침략적 접근을 거부하고 배척한다는 의미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동학은 기본적으로 반외세·반제국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생겨났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반제국주의는 제국주의와 제국주의를 불러일으키는 모든 이념에 반대하는 정치사상을 말합니다. 제국주의는 우월한 군사력과 경제력으로 다른 나라나 민족을 정벌(정복)하여, 제국을 건설하고 유지하려는 정치이념(정치사상)을 말합니다. 군사적·경제적으로 남의 나라 또는 후진 민족을 정복하여 더 큰 나라를 건설하려고 하는 침략주의적 경향(방향)을 제국주의라고 합니다.
안으로는 양반 중심의 신분 질서에 반대하고, 밖으로는 서양과 일본과 같은 침략자들을 물리쳐, 왕과 나라(조선)를 지키자는 생각과 행동이 동학농민운동이었습니다. 그 중심에 동학의 접주였던 전봉준이 있었고, 우금치 전투에서 패배함으로써, 측근(부하였던 김경천)의 밀고로 붙잡힌 전봉준은 서울로 압송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안도현은 묘사한 것입니다.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는 ‘척왜(斥倭. 일본 배격)’는 제국주의 국가인 일본을 물리치자는 것이고, 척화(斥和)는 서양 및 일본과의 화친에 반대한다는 의미입니다. 전봉준 체포의 중심에는 침략적인 일제(日帝. 일본 제국주의)와, 명성황후가 있었습니다. 역사의 아이러니는, 전봉준이 처형당한 그해(1895), 명성황후도 일제에 의해 시해당했습니다.
- 서울로 가는 전봉준의 전문(全文) -
눈 내리는 만경 들 건너가네
해진 짚신에 상투 하나 떠 가네
가는 길 그리운 이 아무도 없네
녹두꽃 자지러지게 피면 돌아올거나
울며 울지 않으며 가는
우리 봉준이
풀잎들이 북향하여 일제히 성긴 머리를 푸네
그 누가 알기나 하리
처음에는 우리 모두 이름 없는 들꽃이었더니
들꽃 중에서도 저 하늘 보기 두려워
그늘 깊은 땅속에서 젖은 발 내리고 싶어하던
잔뿌리였더니
그대 떠나기 전에 우리는
목쉰 그대의 칼집도 찾아주지 못하고
조선 호랑이처럼 모여 울어주지도 못하였네
그보다도 더운 국밥 한 그릇 말아주지 못하였네
못다 한 그 사랑 원망이라도 하듯
속절없이 눈발은 그치지 않고
한 자 세 치 눈 쌓이는 소리까지 들려오나니
그 누가 알기나 하리
겨울이라 꽁꽁 숨어 우는 우리나라 풀뿌리들이
입춘 경칩 지나 수군거리며 봄바람 찾아오면
수천 개의 푸른 기상나팔을 불어제낄 것을
지금은 손발 묶인 저 얼음장 강줄기가
옥빛 대님을 홀연 풀어헤치고
서해로 출렁거리며 쳐들어갈 것을
우리 성상(聖上) 계옵신 곳 가까이 가서
녹두알 같은 눈물 흘리며 한 목숨 타오르겠네
봉준이 이사람아
그대 갈 때 누군가 찍은 한 장 사진 속에서
기억하라고 타는 눈빛으로 건네던 말
오늘 나는 알겠네
들꽃들아
그날이 오면 닭 울 때
흰 무명띠 머리에 두르고 동진강 어귀에 모여
척왜척화 척왜척화 물결소리에
귀를 기울이라
Ⅳ. 맺는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존재하게 된 연유와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람은 크든 작든 누구나 사연을 갖고 삽니다. 사연이 없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말은 저마다의 이야기가 있다는 뜻입니다. 연못 속의 개구리도 올챙이 시절 이야기가 있습니다. 부끄럽고 창피하여 숨기고 싶은 사연도 있을 것이고, 알리고 내세우고 자랑하고 싶은 이야기도 있을 것입니다.
인류는 탄생과 함께 이야기를 만들고 이야기를 하고 이야기를 듣고 살아왔습니다. 인류는 고릿적부터 이야기를 나누며 살아왔습니다. 어쩌면 이야기는 생존 본능에 가까울 수도 있습니다.
인류는 신화, 설화, 우화, 전설 등의 방법으로 자신의 존재를 밝히고, 생존에 필요한 정보와 가르침을 주고자 했습니다. 음식의 본질은 영양(양분)이지만, 그 영양을 잘 섭취하도록 하기 위해선 간이 맞고 맛이 있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후세로 지속 가능한 이야기가 되기 위해선, 이야기가 재미있고 흥미진진해야 합니다. 음식도 이야기도 맛깔나야 합니다. 맛깔나고 공감이 되고 감동이 되는 이야기에 사람들은 벌떼처럼 꼬입니다. 사람들은 공감되고 감동되는 이야기를 따라 살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사람을 움직이고 사람을 모으니 돈이 됩니다.
오늘날에는 갖은 기능을 가졌어도 공감과 감동의 이야기가 깃든 제품에 소비자들은 훨씬 더 손이 갑니다. ‘혹부리영감’ 이야기처럼 이야기는 우리에게 ‘성공자를 무작정 따라 하지 마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이야기가 가진 힘입니다. 이야기는 힘이 있습니다. 어떤 이야기를 믿고 따르냐에 따라 인생이 풀리기도 꼬이기도 하는 실타래가 될 수 있습니다. 우린 ‘~힘(力)’에 초점을 맞춘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읽기력, 쓰기력, 문해력, 문장력, 능력, 실력, 매력, 협력, 폭력, 영향력, 강력, 체력, 경쟁력, 상상력, 창의력, 창조력, 경제력, 생산력, 권력, 통찰력, 무력, 원동력, 탐구력, 세력, 활력, 정력, 동력, 효력, 추진력, 탄력, 잠재력, 지구력, 완력, 공신력 등등’
수많은 힘 가운데 이야기도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력(?), 스토리력(?)이라고 할까요? 아무튼 이야기는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가 힘이 있다는 가장 큰 증거는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인류는 탄생의 순간부터 이야기를 해왔다는 사실과 진실입니다.
이야기는 힘이 있기에 고릿적부터 해왔고, 지금도 하고 있고, 앞으로도 할 것입니다. 이야기에 힘을 가지려면 ‘진정성’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오늘날 ‘가짜뉴스(가짜 이야기)’에 정신 팔린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러나 진정성, 진실성, 진솔함이 없는 거짓말을 언젠가는 참말이 이길 것입니다. ‘가짜뉴스(가짜 이야기)’의 생산자들이 가짜뉴스를 거침없이 양산 하는 이유는, 첫째는 돈벌이가 되고, 둘째는 속아 넘어간 사람들을 자신들의 영향력 아래에 두고 통제하고 지배하려는 의도와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가짜뉴스에 속는 사람들은 자기 자신만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을 심리학에선 ‘인지부조화’라고 부릅니다. 자신이 믿는 것과 보이는 것이 다를 경우에, 그 불일치에서 오는 불편함과 불리함을 없애려고 팩트가 아니지만, 믿고 싶은 것을 믿고 따르고, 뻔히 보이는 사실과 진실마저 버리는 심리 현상을 말합니다. 타인이 담배를 피우는 것을 건강에 해롭지만, 자신이 피우는 것을 그렇지 않다고 여기는 것도, 인지부조화의 사례입니다.
아무튼 진정성을 가진, 진솔한 이야기는 힘이 있습니다. 공감되고 감동이 되는 이야기는 힘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힘이 있습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는 돈이 됩니다. 가슴과 머리를 움직이는, 생의 오감을 터치하는 이야기는 힘을 가집니다.
이야기는 힘을 가졌지만, 모든 힘이 그런 것처럼 양면성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검처럼 양날을 갖고 있습니다. 한 날만 있는 칼을 ‘도(刀)’라고 합니다. 양날이 있는 칼을 ‘검(劍)’이라고 합니다. 어느 날을 사용할지에 따라, 살인검이 되기도 활인검(活人劍. 사람의 목숨을 구하여 살리는 칼)이 되기도 합니다.
무예로 사는 사람을 무인이라고 합니다. 문인은 문예(문학예술)에 종사하는 사람입니다. 문인(글쟁이)은 말하고 글쓰기를 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나는 말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 나는 쓴다, 그러므로 존재한다.’가 문인의 정체가 아닐까 합니다. 문인은 글로써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또한 그 글은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말과 글과 삶이, 바람 따라 흩어지는 사막의 모래알 같은 사람은 진정한 문인이라 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말과 글과 삶이 콘크리트로 버무려지기 어렵더라도, 최소한 올바른 방향으로 가려고 애면글면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힘(力)’ 가운데 어떤 힘을 가졌나요? 그 힘을 키우기 위해 어떤 힘을 사용했고 또 하고 있는가요? 키운 그 힘이 나와 타인과 인류의 발전과 진보에 도움이 되는 힘인가요? 아니면 나만을 위한 힘인가요? 아니면 나를 포함하여 타인에게도 해(害)가 되는 힘인가요? 그 힘은 누구를 위해서 사용하고 있는가요? 재력(돈)도, 권력도, 학력도, 근력도 모두 힘입니다. 그 힘을 무엇과 누구를 위해, 어떻게, 어떤 용도로 사용하느냐의 여부가 자신과 타인과 인류의 장래를 결정할 것입니다.
이야기는 여러 모습으로 존재합니다. 이야기는 영상(영화, 드라마, 애니메이션, 다큐멘터리 등)으로, 그림(웹툰 등)으로, 글로, 말로, 행위 등으로 존재합니다. 내가 하는 이야기는 자신은 물론이고 타인에게 공명(共鳴. 남의 사상이나 감정, 행동 따위에 공감하여 자기도 그와 같이 따르려 함. 공진. 맞울림)이 있어야 합니다.
글쟁이는 말맛이 살맛이어야 하고, 글맛이 꿀맛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맛은 말소리나 말투의 차이에 따른 느낌과 맛을 말합니다. 글맛은 글월이 가지는 독특한 운치나 글월을 읽으면서 느끼는 재미를 말합니다. 살맛은 세상을 살아가는 재미나 의욕을 말합니다. 또 다른 살맛은 살과 서로 맞닿았을 때 느끼는 느낌을 말합니다.
글쟁이의 말맛과 글맛은 꿀맛 같아서 살맛이 나게 해야 합니다. 살맛은 살가운 맛도 될 것입니다. 살갑다는 말은 속이 너르다, 마음씨가 부드럽고 상냥하다, 닿는 느낌 같은 것이 가볍고 부드럽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살가운 맛이란, 인간다운 따뜻한 맛인 인간미를 말합니다.
글쟁이는 꿀맛 나고 살맛 나는, 말맛과 글맛을(풍미. 멋지고 아름다운 사람 됨됨이) 만들어냄으로써, 타인과 자신이 ‘맛삶(맛있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하는 책무가 있다고 봅니다. 글쟁이는 맛삶의 멘토(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다른 사람을 지도하고 조언해 주는 사람)가 되어야 합니다.
문학도 역사도 이야기입니다. 인간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문학과 역사입니다. 따라서 문학과 역사는 유기적인 보완재입니다. 문학과 역사는 매우 친한 사이입니다. 그러기에 역사를 알면 문학의 폭이 넓어지고 깊이가 깊어질 수 있습니다. 이젠 문학과 역사의 경계는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문인은 이야기꾼입니다. 길섶에 나뒹구는 돌멩이 하나가, 몽돌 해변의 몽돌 하나가 장편소설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운강 이강년 의병대장이 대하드라마가 될 수도 있습니다. 모르면, 팔만대장경도 빨래판이 될 수 있습니다.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에 관심(호기심)을 갖고, 사건과 인물을 관찰하다 보면, 새로운 관점(觀點. 생각하는 각도. 견해)이 생깁니다. 관(觀)은 ‘마음의 눈’입니다. 그 마음의 눈으로 말을 하고 글을 쓰면 됩니다. 그러면, 몽돌과 팔만대장경과 운강 선생이, 나와 새로운 관계가 형성됩니다. 인간 삶의 모든 것은 관계입니다. 인문과학이든 자연과학이든 ‘관심, 관찰, 관점, 관계’로 이어지는 새로운 시각에서의 선순환이 창의적인 작품과 결과를 도출합니다.
우리의 체험(몸소 겪음. 경험)은 말이 되고 글이 됩니다. 체험은 직접 체험과 간접 체험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일을 체험하고 살 순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하지 못하는 체험을, 대신 겪는 것은 삶에 매우 요긴한 일입니다. 타인이 자신의 체험을 기록한 책을 읽는 것은, 간접 체험입니다. 역사는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역사가가 서술한 것입니다. 역사를 알고 이해하는 것 역시 간접 체험입니다. 그리고 역사는 과거를 대상으로 하지만, 현재의 문제 해법을 제시하고, 미래를 조망(전망)합니다. 왜냐하면 과거가 모여서 현재가 되고, 현재가 모여서 미래가 되기 때문입니다.
역사를 알면 문학의 폭이 넓어지고, 풍요로워집니다. 시야가 넓어집니다. 깊이도 깊어집니다. 역사는 문학의 새로운 놀이터가 될 수 있습니다. 역사는 문학에 영감을 줍니다. 글감도 줍니다. 문학은 역사에서 영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박경리 선생의 <토지>, 조정래 선생의 <태백산맥> 등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소설입니다.
문학이 감성이라면 역사는 이성입니다. 철학은 영감을 주고 방향을 제시합니다. 모든 것에는 역사가 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는 사연과 이야기가 있습니다. 우주의 옻빛 어둠에서 반짝이는 별들도 저마다의 사연이 있습니다. 미국의 소설가였던 이디스 워튼은 ‘진정한 독창성은 새로운 방법이 아니라 새로운 시각에서 나온다.’고 말했습니다. 오늘 저는 새로운 방법보다, 새로운 시각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야기하고는 싶은데, 마땅한 이야깃거리가 없을 때, 역사적 사건과 역사적 인물과 역사적 배경은 문학에 기막힌 글 재료가 됩니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문학은 상투적인 것을 매우 싫어합니다. 맛집의 요리 대가들이 가장 우선하는 것은, 그날 잡은, 그날 들어온 가장 신선한(싱싱한) 식료품을 확보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요리를 잘해도 식료품(식재료)이 상해서 신선하지 않으면, 맛있고 건강한 요리를 할 수 없습니다. 글도 마찬가지라고 봅니다. 소재(글의 재료)가 신선해야 합니다. 글의 소재가 구리고 구닥다리면, 창의적인 글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역사라는 새로운 글 재료로써 새로운 시각으로 독특한 이야기를 꾸미는 여러분과 저가 되었으면 합니다. 시도, 소설도, 수필도, 희곡도 같은 식탁에 놓인 반찬 같은 이야기입니다. 문학도 역사도 이야기입니다. 역사로 시야를 넓혀보면 문학도 시야가 트입니다. 역사 분야를 포함하여 다양한 분야에 대한 호학(好學. 배우는 것을 좋아함)으로써, 천편일률적인(여럿이 개별적 특성이 없이 모두 엇비슷한 현상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글에서 벗어나는 동기 부여가, 저와 여러분께 되었으면 합니다.
창의적인 이야기로, 세상(타인)과 나의 덕분이(보탬을 주는) 되는 이야기꾼이 되길 소망합니다. 세상에 새로운 것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창의는 새로운 것을 찾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을 새롭게 보는 것입니다. 창조는 새롭게 만들기보다 이미 있던 것들을 서로 ‘연결’하는 것입니다. 새로운 시각으로 저와 여러분의 이야기력(?), 스토리력(?)을 키웠으면 합니다. 문학과 역사 이야기는 힘이 있습니다. 이야기는 저력이 있습니다. 문인은 이야기의 소비자이면서 이야기의 생산자입니다.
이화여자대학교 한혜원 교수는 <디지털 시대의 신인류, 호모나랜스>에서 ‘이제 대중들은 처음과 끝이 명료한 결과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과정 자체에서 재미를 느끼는 이야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 이야기의 트랜드가 바뀌었다는 뜻입니다. <미스터 션사인>처럼 문학과 역사의 문지방은 낮아져 가고 있습니다. 이젠 역사도 이성과 합리와 교훈, 진보만이 아니라, 문학처럼 진실(의미. 가치)에 바탕을 둔 공감, 감동, 재미의 추구가 대세인 시대가 되었습니다. 문인은 미래학자 앨빈 토플러가 저서 <제3의 물결>에서 처음으로 말했던, 프로슈머(prosumer. 생산자와 소비자의 합성어. 제품 생산에 직·간접적으로 참여하는 소비자)가 아닐까요? 우린 프로슈머로서 이야기력을 스토리력을 어떤 재료로써, 어떻게 값지고(의미있고) 재미지게 키워낼 것인가? 오늘 함께 생각해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감사합니다. 끝.
<‘~힘(力)’>
읽기력, 쓰기력, 문해력, 문장력, 능력, 실력, 매력, 협력, 폭력, 영향력, 강력, 체력, 경쟁력, 상상력, 창의력, 창조력, 경제력, 생산력, 권력, 통찰력, 무력, 원동력, 탐구력, 세력, 활력, 정력, 동력, 효력, 추진력, 탄력, 잠재력, 지구력, 완력, 공신력, 친화력, 담력, 초능력, 저력, 문해력, 전력, 원자력, 면역력, 결단력, 무기력, 근력, 노력, 분별력, 순발력, 판단력, 박력, 자력, 진력, 시력, 사고력, 집중력, 변별력, 포용력, 만유인력, 장력, 응집력, 필력, 생명력, 기동력, 유력, 속력, 학력, 재력, 실행력, 정신력, 설득력, 마력, 전력, 원자력, 적응력, 흡인력, 구심력, 원심력, 관찰력, 직관력, 호소력, 풍력, 견인력, 수력, 화력, 합력, 군사력, 병력, 구속력, 강제력, 추동력, 강력, 총력, 권력, 국력, 표현력, 지각력, 행동력, 주의력, 억지력, 자생력, 지도력, 기억력, 기술력, 분석력, 의지력, 독해력, 자제력, 구사력, 노동력, 수용력, 통솔력, 영도력, 이해력, 전심전력, 심력, 법력, 복원력, 자연력, 구상력, 조직력, 지배력, 투시력, 구매력, 생활력, 무력, 물리력, 행정력, 전투력, 탐구력, 설명력, 변형력, 변별력, 파괴력, 기획력, 연기력, 문장력, 군사력, 가창력, 주도력, 지속력, 기동력, 회복력, 이지력, 추상력, 발표력, 통제력, 공격력, 증거력, 실천력, 전파력, 결정력, 단결력, 해상력, 추리력, 정보력, 장악력, 방어력, 근지구력, 생존력, 생식능력 등등 ‘~힘(力)’은 그 수를 헤아리기 어려울 정도로 많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