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세배
설날, 이른 새벽 6시경 아들의 렉스톤 차량으로 와이프, 딸,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를 태우고, 도봉구 창동에 있는 형님댁으로 향하였다. 서울의 30-40만대의 차량들이 시골 고향으로 갔는지 교통은 비교적 한산해서 30분만에 도착하였다.
창동 형님집에는 전주에서 올라온 형님내외, 조카와 며느리랑 오셨고, 창동 형님과 형수씨, 조카와 며느리가 분주하게 차례상을 준비하고 있었다. 조상님들을 모시는 방법은 지방마다 차이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를 기준으로 볼 때, 아버님 내외분, 할아버지 내외분, 증조할아버지 내외분을 모시는 것이다. 6명의 지방을 붙이고, 차례순서에 따라서 조상님들을 모셨다.
차례를 마치고 여러 가지 음식을 골고루 나누어 맛있게 먹고, 3형제 내외가 앉아서 자식들 내외로부터 세배를 받는데, 철환조카내외, 재혁아들내외, 준환조카내외, 미영딸, 그리고 민정, 지훈 손주들로부터 세배를 받고, 3만원씩 세배돈으로 나누어 주었다. 세배돈을 주면서 우리가 어렸을 때, 지금은 고인이 되셨거나, 연세가 많은 상태이신 이모님들이 용돈을 주실 때, 얼마나 고마웠었던지~~ 하는 생각과 고모님들은 용돈을 거의 주시지 않았었다는 조금은 냉정한 편이었다는 생각이 떠 올랐다. 고모님들께서도 그 시대에는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다.
우리의 나이를 생각하면 자식들, 조카들, 그리고 손주들에게 세배돈을 즐겁고 흐뭇한 마음으로 줄 기회가 10회 이상이야 되겠지만, 얼마나 오랫동안 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줄 수 있을 때, 아낌없이 주는 것이 자식 조카들에게도 기억에 남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세월이 흐름에 따라 시대가 자꾸 변하고, 경제사정도 좋지 않다고 하니 말이다.
옛날 시골에서의 설날에는 마음이 설레이고, 오랜 시간동안 고생을 하며, 시골에 도착하여 음식들을 장만해서 차례를 지내고, 기름진 음식을 과식해서 어김없이 화장실에 자주가는 일이 생기고, 밤에는 가요 콩쿨대회가 있어서, 이마을 저마을을 돌아다녔던 생각이 난다. 부모들은 어디에 사는 누구는 공부 잘해서 어느 좋은 회사에 취직하였다더라~, 누구는 어디에 가서 돈을 많이 벌어서 좋은 옷 과 귀한 음식을 사 왔다더라~ 하는 식으로 경쟁심을 유발하였던 것 같다.
2009년에는 우리 형제들 2세 중 유일한 미혼인 미영이 결혼하는 행사가 5월 23일로 정해져 있다. 내가 직장에 재직 중일 때, 결혼하였으면 직장동료들도 많이 참석하고 좋았을 텐데, 그 때에는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다가 이제 마음에 드는 광운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한 연구소 연구팀장인 공학도를 신랑으로 정하였으니, 서로의 성장한 환경이 다르겠지만, 서로의 좋은 점들을 격려하고, 허물을 감싸주며 한마음으로 한가정을 이룰 수 있도록, 여러 가지 준비를 잘 하여 사랑받고 축복받는 결혼이 되었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