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에 대하여
누군들 쓸쓸할 때가 왜 없을까? 살기에 바빠 쓸쓸할 틈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건 바쁜 걸 강조해서 하는 말일 것이다. 정녕 쓸쓸할 틈도 없이 살아가는 사람이 있을까. 아무리 바쁜 사람일지라도 문득 쓸쓸함이 밀려올 때가 어찌 없을까.
나는 덜 바빠서 그런지 쓸쓸함을 느낄 때가 더러 있다. 가끔씩 끙끙 앓기도 해야 하는 쓸쓸함에 잠길 때도 없지 않다. 바쁘게 살던 시절이 훌쩍 흘러가 버렸을 뿐만 아니라, 지금은 바쁠 수 있는 기력도 별로 가지고 있지 못하다.
그 별로 없는 기력이 가끔은 쓸쓸함을 가져오기도 한다. 어쨌든 이따금 쓸쓸함이 찾아오지만, 그중에서도 혼자 읽기 아까운 시가 있어도 같이 읽거나 들려주면서 마음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없을 때 쓸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심장이 / 몸 밖에 달렸더라면 / 네 마음을 더 잘 보았을 텐데…… 아니, 생각이 / 나보다 먼저 잠들기만 했어도 / 너와 더 오래 한집에 머물렀을 텐데……”(정끝별, 「너였던 내 모든」)
이 시를 읽고 있으면 심장의 움직임이 조금씩 빨라져 가는 듯한 느낌이 드는 건 무엇 까닭일까. 설령 심장이 몸 밖에 달려 있다 해도 나에게 심장을 보여줄 사람도 없고, 내 심장을 보여줄 사람도 없다는 게 쓸쓸하다.
‘없다’라는 말 속에는 ‘있었다가 없어졌다.’라는 뜻도 있고, ‘처음부터 있지 않다.’라는 뜻도 있을 테지만, 나는 어느 쪽이라는 걸 굳이 말로 드러내고 싶지 않다. 말이 되어 나오는 순간 상념은 또한 쓸쓸함에 빠질 것 같기 때문이다.
나를 더욱 쓸쓸하게 하는 것은 그다음 구절이다. 너를 향한 생각이 나보다 먼저 잠들 수 있다면 나는 언제까지나 너를 안고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생각이 잠들어주지 않으니 너와 나 사이의 거리일지 벽일지 그런 게 자꾸 멀어지고 두꺼워지는 것 같아 점점 더 쓸쓸해진다.
이런 시를 같이 읽을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내 젖은 목소리로 들려줄 수 있는 이 누가 있다면 쓸쓸함이 쓸쓸함을 녹여줄 것도 같다. 결국은 이 시가 나를 더욱 쓸쓸하게 만드는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내 쓸쓸함을 시가 대상代償해 줄 것 같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런 쓸쓸함보다 조금 더 짙은 쓸쓸함이 엄습해 올 때는 저녁밥을 혼자서 먹을 때다. 어찌하다 보니 삼시 세끼를 혼자서 치러야 하는 처지가 되었다.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는 현실과 더불어 고단하게 사는 처지 속으로 병고까지 찾아왔다.
마냥 죽으라는 법은 없었던지, 고마운 제도가 고마운 분이 나를 찾아오게 해주었다. 하루 두어 시간 내 사는 일을 돌봐줄 뿐이지만, 나에게는 그야말로 구세주 손길이다. 그 길지 않은 시간을 아껴가며 정성을 다해주는 마음이 신고, 심고를 잊게도 해준다.
아침 일찍 나에게로 와 내 하루를 시작하게 해주고 하루 지낼 일을 마련해 놓고 가면, 그 마련으로 하루를 지내곤 하는 날들이 이어져 갔다. 그 정성스러운 마련이 감동을 주기도 했지만, 아침밥이나마 같이 먹을 이가 있다는 것이 여간 큰 위안이 아니었다.
그 위안은 아침으로 끝나야 한다. 점심과 저녁은 혼자서 맞이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맞이는 물론 아침에 마련해 놓은 것으로 해결할 수 있기에 이 또한 다행이라 할 수 있지만, 쓸쓸함은 내 몫이 되어야 하는 건 어쩔 수 없다.
점심때는 창밖으로 보이는 푸른 하늘과 녹음 짙은 산이 마음을 추스를 수 있는 위안거리가 될 수 있지만, 저녁은 어스름 황혼 빛이거나 어둠 속에서 허우적대는 전등 빛 아래에서 홀로 술을 들다가 보면 국물 맛이 눈물 맛같이 다가올 때가 있다.
이렇게 혼밥 상과 함께한 이력이 하루 이틀이 아니었건만, 왜 이리 여물어지지 못했을까. 모든 것을 혼자서 해결해야 할 때도 없지 않았는데, 도움을 주는 이가 있음에야 더욱 여물어져야 할 것이 아닌가. 모를 일이다.
그랬던 것 같다. 혼자 한 마련으로 먹고 자고 할 때는 오직 생존 일념뿐이었던 것 같다. 비록 울울한 심정으로 술을 들지언정,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돌아봐 줄 이가 아무도 없다는 긴장감, 절박감이 쓸쓸함을 조금 앞질러 있었던 것 같다.
그래도 지금은 잠시간이나마 함께할 수 있는 이가 있다는 것이 생존에서 벗어나 생활 속을 살고 있다 싶어 안도감을 준다. 오히려 그 안도감이 쓸쓸함을 몰고 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아침과 저녁의 처지가 같지 않은 데서 오는 쓸쓸함은 또 무엇인가.
생활이 생존보다 더 쓸쓸한 것 같다. 생존은 간혹 거부하는 이도 있지만, 누가 생활을 마다할 수 있는가. 어차피 사람은 생활 속을 살아야 할 존재라면, 쓸쓸함은 모든 사람이 원죄로 타고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쓸쓸하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오늘 저녁도 쓸쓸한 술을 든다. 밥술을 들고 가끔은 술잔도 든다. 이 저며오는 쓸쓸함이 나의 생활이라면 도리 없는 일이다. 쓸쓸하면서 살 수밖에 없는 일인 것을 세상 사람들은 모두 알고 있을까. 쓸쓸함을 보듬기도 하면서 숨 쉬어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임을 나만이 아는 일일까.
생활 속의 쓸쓸함이여, 쓸쓸함 속의 생활이여! ♣(2024.9.2.)
첫댓글 선생님 안녕하시지요?
아직도 날씨는 덥기만 한데, 오늘 종일 작업한 밭, 포도 잎새에서 가을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새벽 선생님 주옥같은 글에서 가을을 느낍니다. 언젠가 읽은 시에서 본 글입니다. “시간을 고요에 헹구지 않으면 오늘을 반복할 뿐 내일의 다른 시간이 뜨지 않기에.” 쓸쓸함은 누구도 품고 있지만, 생활 속 쓸쓸함을 안개처럼 그윽이 품어내는 글은 짠하게 가슴을 젖게 합니다. 부디 안도하는 쓸쓸함으로 즐기시며 아프지 않으시면 하는 마음입니다.
선생님, 강녕하게 지내십시오. 감사합니다.
요즈음은 쓸쓸함을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살려고 애쓰고 있습니다.
항상 따뜻한 관심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좋은 일 많으시기 바랍니다.
쓸쓸함
누구나 느끼는 게 맞는건 모르겠지만
정년퇴직하고 저 역시 자주 빠지게 되는 감정입니다
워낙 사람들과의 관계를 중요시하는 외향적인 성격이라 유난히 8월 한달 힘들었고 요즘은 쇼펜하우어 읽고 있는데 공감되지 않는 부분도 많더군요
전원생활하면서 바쁜 일들 가운데서도 느끼시는 쓸쓸함에 대하여
저는 깊이 공감합니다
자유롭고 편안하지만 누군가는 간절히 원할수도 있는
하지만 내겐 그 쓸쓸함
귀한 결음해 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저는 지금 '슬쓸함'도 생활의 한 부분으로 받아 들이고 있습니다.
생활 속의 제가 없다면 쓸쓸함인들 어찌 있겠습니까?
그 쓸쓸함과 더불어 즐거운 일도 많으시기 바랍니다.~!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