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꿈!
#Code_Blue
응급실의 밤은 깊어간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버지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저 아픈 마음으로 바라볼 뿐!
벌써 열흘째!
몸이 곡기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다.
아직 나는 아버지와의 이별이 낯설다.
#원혼
피 냄새를 맡은 짐승들이 으르렁거린다.
달빛도 차가운 새벽녘, 팔다리가 잘려 널브러진 학살 현장은 누구의 것인지 구별조차 힘들다. 가까스로 살점을 모아 시신을 수습했다.
군경에게 발각될 가능성이 높은 능선을 피해, 짐승들만 다니는 험준한 협곡을 타고 넘는다. 지게를 타고 흘러내린 핏물이 온몸을 적시고 흘러 흘러 10리 길을 적신다.
연신 토하고 만다.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다.
피비린내 때문일까?
가족을 잃은 울분 때문일까?
꺼이꺼이~
토해내고 토해내도 창자까지 토해내도 속울음이 밀려 나온다.
마치 창자를 토해내듯, 열여섯 소년의 한 맺힌 울부짖음이 짐승 소리와 뒤섞인다.
#부역자_가족
1949년 봄, 반란군이 지리산으로 물러간 직후, 대련리 사람들의 비극은 시작됐다.
제주 4.3 진압 명령을 거부한 14연대가 반란을 일으킨 때는 1948년 10월 19일이다. 반란군은 동부 6군을 장악하는 등 일시적으로 기세를 올렸으나, 결국 지리산으로 패퇴했다.
좌익과 반란군이 조직한 인민위원회는 해체되고 그 자리는 우익 청년단과 군경으로 대체됐다. 수많은 사람들이 노동지서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다. 그해 늦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 부역자 색출은 계속됐다.
할머니는 반란군에게 밥을 해 먹였고 큰아버지는 등짐을 졌다. 대부분의 양민들이 그랬듯이 할머니도, 큰아버지도, 아버지도 살아남기 위해서 낮에는 군경 편, 밤에는 산사람 편이 되어야 했지, 좌익이 무엇인지도, 이념이 뭔지 몰랐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물증은 무의미하다.
누군가가 허위로 밀고하면 즉결심판이 이뤄졌다. 한동네 사람들이 좌·우익으로 갈려 죽고 죽였다. 죄 없는 사람들이 폭행과 고문을 견디지 못해 허위 자백을 했다.
그렇게 무고한 사람들이 재판과정도 없이 명봉역 건너편 언덕에서 총살을 당했다. 아버지는 그 끔찍한 광경을 보고야 말았다. 그 길로 고향을 떠나 도피했다.
#회한
그 기나긴 통한의 세월을 어찌 견디셨을까?
아버지가 아픈 기억을 꺼내든 때는 몇 해 전, 여순사건 특별법이 제정된 어느 날이다. 놀라울 정도로 희생자 이름과 장소를 마치 어제 일처럼 기억하셨지만, 구체적인 이야기를 애써 감추셨다.
후회스럽다.
사실, 기록으로 남기고자 몇 번이나 묻고 싶었지만, 아버지의 상처를 들춰, 역사의 기록을 남기는 게 의미가 있을까 싶고, 너무 힘들어하셔서 다시 꺼낼 수 없었다.
#소년의_꿈
나는 오늘, 아버지를 다시 만난다.
70여 년 전 평화로웠던 그날, 열여섯 소년을 다시 만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