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8주간 금요일(집회44,1.9-13)(마르11,11-25)
제1독서
<우리의 선조들은 자비로워 그 이름이 대대로 살아 있다.>
▥ 집회서의 말씀입니다.44,1.9-13
1 훌륭한 사람들과 역대 선조들을 칭송하자.
9 어떤 이들은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고 존재한 적이 없었던 듯 사라져 버렸다.
그들은 태어난 적이 없었던 것처럼 되었으며
그 뒤를 이은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10 그러나 저 사람들은 자비로워 그들의 의로운 행적이 잊히지 않았다.
11 그들의 재산은 자손과 함께 머물고 그들의 유산은 후손과 함께 머물리라.
12 그들의 자손은 계약을 충실하게 지키고 그들 때문에 그 자녀들도 그러하리라.
13 그들의 자손은 영원히 존속하고 그들의 영광은 사라지지 않으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하느님을 믿어라.>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11,11-25
예수님께서 군중의 환호를 받으시면서
11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
날이 이미 저물었으므로 열두 제자와 함께 베타니아로 나가셨다.
12 이튿날 그들이 베타니아에서 나올 때에 예수님께서는 시장하셨다.
13 마침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멀리서 보시고,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하여 가까이 가 보셨지만,
잎사귀밖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무화과 철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14 예수님께서는 그 나무를 향하여 이르셨다.
“이제부터 영원히 어느 누구도 너에게서 열매를 따 먹는 일이 없을 것이다.”
제자들도 이 말씀을 들었다.
15 그들은 예루살렘으로 갔다. 예수님께서는 성전에 들어가시어,
그곳에서 사고팔고 하는 자들을 쫓아내기 시작하셨다.
환전상들의 탁자와 비둘기 장수들의 의자도 둘러엎으셨다.
16 또한 아무도 성전을 가로질러 물건을 나르지 못하게 하셨다.
17 그리고 그들을 가르치시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
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그런데 너희는 이곳을 ‘강도들의 소굴’로 만들어 버렸다.”
18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그분을 없앨 방법을 찾았다.
군중이 모두 그분의 가르침에 감탄하는 것을 보고
그분을 두려워하였던 것이다.
19 날이 저물자 예수님과 제자들은 성 밖으로 나갔다.
20 이른 아침에 그들이 길을 가다가,
그 무화과나무가 뿌리째 말라 있는 것을 보았다.
21 베드로가 문득 생각이 나서 예수님께 말하였다. “스승님, 보십시오.
스승님께서 저주하신 무화과나무가 말라 버렸습니다.”
22 그러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하느님을 믿어라. 23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서 저 바다에 빠져라.’ 하면서,
마음속으로 의심하지 않고 자기가 말하는 대로 이루어진다고 믿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24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25 너희가 서서 기도할 때에 누군가에게 반감을 품고 있거든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 미사에서 우리는 성전이 제 정체성을 잃으면 어떻게 되는지 엄중히 경고하는 말씀을 듣습니다.
"예수님께서 ...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전에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곳의 모든 것을 둘러보신 다음"(마르 11,1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이르러 먼저 성전을 둘러보십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하느님 현존의 장소로서 하느님 백성 이스라엘의 정체성이 담긴 심장부라 할 수 있지요. 오늘 예수님은 그 안에서 벌어지는 상황에 개입하지 않으시고 그저 둘러보신 뒤 베타니아로 떠나십니다.
"혹시 그 나무에 무엇이 달렸을까 가까이 가 보셨지만"(마르 11,13)
이튿날 베타니아를 떠나실 때 예수님께서 잎이 무성한 무화과나무를 보시고 다가가십니다. "잎이 무성한 나무"는 바로 어제 둘러보신 예루살렘 성전을 떠올리게 해줍니다. 외적인 화려함, 형식에 치중한 율법주의, 부와 권력이 집중된 성직주의는 겉보기에 뭔가 있는 것처럼 그 위용을 자랑하나 실은 정체성을 잃은 채 속이 비어가는 신기루일 따름입니다.
나무를 살피시는 예수님을 관상합니다. 그분은 시장하십니다. 우리의 사랑과 기도와 정의에 너무도 허기가 지셔서 우리 주변을 맴돌며 열매 하나라도 발견해 보려 찾고 계십니다. 기대의 눈길을 쉬이 접지 않으시고 우리를 이리저리 살피시는 건, 사실 당신 허기를 채우시려는 게 아니라 우리가 진정 우리다운지 보고 싶으신 까닭입니다. 그분은 우리다움의 열매를 진심으로 갈구하십니다.
"나의 집은 모든 민족들을 위한 기도의 집이라 불릴 것이다."(마르 11,17)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성전의 정체성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우선 성전은 예수님의 "나의 집"입니다. 아버지께서 계시는 집이 바로 아드님의 거처이며, 우리 또한 주님을 모신 성전입니다.
또 성전은 특정한 어떤 민족만이 아니라 "모든 민족들"을 위한 곳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와 축복을 독점하려는 이스라엘의 배타적 선민의식은 온 세상 모든 민족을 향해 열려야 하지요.
그리고 성전은 기도의 집입니다. 기도란 하느님과 인간 사이의 관계입니다. 성전에서 인간은 말과 노래, 머무름과 행동 등 자신이 받은 모든 것으로 기도하며 하느님과 친밀히 연결됩니다.
"너희가 기도하며 청하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이미 받은 줄로 믿어라. 그러면 너희에게 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마르 11,24)
기도의 뿌리는 믿음입니다. 기도는 믿는 이가 하는 겁니다. 믿지 않으면서 하는 기도는 기도를 가장한 주술이나 흥정, 거래에 불과하지요.
잎만 무성한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실망과 질타에 뿌리째 말라버렸음은 의미심장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영혼, 기도의 정신을 잃어버린 공동체, 기도가 아닌 데서 성장 동력을 찾는 제도는 아무리 겉으로 승승장구 팽창하는 듯 보여도 "강도의 소굴"로 전락하기 십상입니다. 주님에게서 수액과 양분을 받는뿌리, 곧 믿음이 말라버렸으니 사실상 주님과 연결이 끊긴 것과 다음 없지요.
"용서하여라. 그래야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해 주신다."(마르 11,25)
예수님께서 기도하는 이에게 먼저 용서하라고 권고하십니다. 기도가 인격적 만남인만큼, 지고지선하신 주님과 죄인인 우리 사이의 통교와 소통, 일치가 가능하려면 우리 쪽에서의 통회와 주님 편에서의 용서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니까요.
그런데 주님은 용서하는 이를 용서하십니다. 주님의 자비가 조건적이거나 한정적이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아무리 용서하신들, 용서를 모르는 이는 자기에게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모든 일은 그저 자기 능력이거나 우연, 또는 행운 정도일 뿐이니까요.
제1독서에서는 그처럼 뿌리째 말라버린 존재들 사이에서 영원히 기억에 남는 이들을 칭송합니다.
"그러나 저 사람들은 자비로워, 그들의 의로운 행적은 잊히지 않았다."(집회 44,10)
집회서 저자는 에녹, 노아, 아브라함 등 하느님께서 사랑하신 구약 선조들의 업적을 노래합니다. 그들에게서 가장 탁월한 점으로 꼽은 것이 바로 "자비"와 "의로움"입니다.
"자비"는 하느님을 닮은 마음이고, "의로움"은 믿음의 열매입니다. 자비와 의로움을 지닌 이들은 하느님 약속의 수혜자가 되어 영원히 존속하며 그 영광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야말로 이스라엘 백성다움이고 그들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말씀들이지요. 기득권 유지를 위해 율법주의와 성직주의로 탑을 쌓기 전의 이스라엘, 하느님께서 사랑하시던 이스라엘의 영혼이었습니다.
사랑하는 벗님! 우리는 성령을 모신 주님의 성전입니다. 우리가 믿고 기도하는 자비로운 의인으로 존재하며 살아갈 때 가장 우리다우며, 주님과 이어진 우리의 정체성도 충만히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습니다.
주님의 성전이며 기도하는 영혼인 여러분 모두를 축복합니다. 각자의 성전다움으로 주님 목을 축이고 허기를 채워드릴 열매를 맺는 우리는 오늘도 행복합니다.
◆ 출처: 원글보기;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
첫댓글 아멘 신부님 stellakang 님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아멘~♡감사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