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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6(주일) 예레미야 21:1~14 ‘생명의 길을 가려면’
사람은 누구나 인생의 길을 걸어가면서, 때로는 평탄하고 아름답지만, 때로는 험난하고 예측할 수 없는 고난으로 가득찬 길을 걸어가기도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떤 길을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끝이 완전히 달라진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8절), ‘축복의 길과 저주의 길’(신11:18~32)이 있음을 반복해서 경고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의 순간에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생명의 길로 초대하십니다. 본문은 남유다 왕국이 위기의 순간에 놓였을 때, 하나님께서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전하신 경고와 권면의 말씀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은 바벨론의 강력한 침공 앞에서 무너질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시드기야 왕은 기적을 구하며 예레미야에게 묻지만, 하나님은 철저한 심판을 선언하시며 동시에 유일한 구원의 길을 제시하십니다. 바로 "생명의 길"입니다. 왜 우리가 생명의 길로 가야하는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에서는 예수님이 "생명"이심을 여러 곳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1) 요한복음 14장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구절은 예수님 자신이 생명 그 자체이심을 선포하는 매우 중요한 말씀입니다. 단순히 생명을 주는 분이 아니라, 예수님이 곧 생명이라는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2) 요한복음 11장 25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이 말씀은 예수님이 나사로를 살리시기 전에 하신 말씀으로, 죽음을 이기고 생명을 주시는 분으로서의 예수님의 권세를 보여줍니다. 3) 요한복음 1장 4절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예수님은 태초부터 말씀(로고스)으로 계셨고, 그 안에 생명이 있었습니다. 이 생명은 모든 사람에게 빛을 주는 존재, 즉 삶의 근원이 되신다는 뜻입니다. 4) 요한일서 5장 11~12절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생명은 단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 예수 안에만 있는 것이라고 분명히 말합니다. 예수님과의 관계가 곧 생명을 소유한 증거입니다. 5) 요한복음 10장 10절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목적 중 하나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단순히 존재하는 생명이 아니라, 풍성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생명의 주되신 예수님을 만나야만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분은 바로 생명이시오, 생명의 길이신 분이십니다.
그러면 우리가 생명의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1. 회개의 길을 가야 합니다(1~7절) 생명의 길을 가려면 문제 해결보다 ‘회개의 길’을 가야 합니다. 유다의 마지막 왕 시드기야는 바스훌과 스바냐를 예레미야에게 보냅니다. 평소 예레미야가 선포하는 경고의 말씀을 무시하던 시드기야왕은 바벨론이 쳐들어오자 이제서야 선지자 예레미야를 찾습니다. 그것도 회개가 아니라 예레미야에게 요청하여 문제해결을 위한 기적을 구합니다(2절). 그러나 예레미야는 기적 대신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바벨론 왕의 손에 예루살렘을 넘기겠다고 선언합니다(7절). 하나님께서 시드기야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회개의 기회를 수없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끝까지 완악한 마음을 고집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외면한 채 그저 문제만 해결하려고 기적을 구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기 상황을 해결해주시기를 원하지만, 그것을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특별한 은혜입니다. 시드기야왕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을 찾았지만, 진정한 회개 없이 단지 눈 앞에 닥친 위기를 모면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겉모습이나 형식적인 기도가 아닌 진실한 회개를 원하십니다.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하나님은 생명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잠언 28:13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 회개는 단순히 잘못을 후회하는 선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길에서 완전히 돌이켜 나와 하나님께 돌아가는 결단입니다. 진정한 회개가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비와 용서가 임하게 됩니다.
반면에 사망 자체이며 사망의 길을 가는 마귀는 사람이 회개하지 못하게 방해하여 생명의 길로 가지 못하고 사망의 갈로 가게 합니다. 1) 마귀는 복음이 마음에 비치지 못하게 하여, 사람들이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도록 방해합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하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여기서 "이 세상의 신"은 마귀를 뜻합니다. . 마음을 혼미하게 하고, 죄에 대한 감각을 무디게 만듭니다.
2) 마귀는 사람으로 형식적인 회개에 머물게 합니다. 이사야 29장 13절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 하나님은 형식적인 신앙과 회개를 싫어하십니다. 마귀는 사람으로 하여금 입술로만 회개하고 마음은 그대로 두도록 유도합니다. 겉으로는 예배하고 회개하는 척하지만, 실제 삶에서는 변함이 없습니다. 마귀가 원하는 상태입니다. 3) 형식적인 회개는 외식과 위선으로 흐릅니다
마태복음 23장 27~28절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에게 화 있을진저 … 겉으로는 사람에게 옳게 보이되 속에는 외식과 불법이 가득하도다” 예수님은 형식적인 회개와 신앙 생활을 가장 강하게 책망하셨습니다. 마귀는 사람을 종교적인 외형 속에 가두고, 진정한 마음의 변화와 회개를 막아버립니다.
4) 참된 회개는 죄에서 돌이켜 자유를 주지만, 마귀는 묶어두려 합니다. 디모데후서 2장 25~26절 “… 혹 하나님이 그들에게 회개함을 주사 진리를 알게 하실까 하며, 그들로 깨어 마귀의 올무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사로잡힌 바 되어 그 뜻을 따르게 하실까 함이라” 회개는 하나님의 은혜로 가능한 일입니다. 마귀는 우리를 올무(덫)묶어두고, 죄 가운데 계속 머물게 하려고 합니다. 마귀의 전략은 회개를 미루게 하고, 스스로 의롭다고 착각하게 하며, 죄의 심각성을 느끼지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참된 회개는 마음의 변화이며,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마귀는 이를 끊임없이 방해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형식적인 신앙과 외식에 머물게 하거나, 회개의 필요 자체를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회개의 삶은 단회적인 사건이 아니라, 날마다 자기를 부인하고 주님을 따르는 삶 속에 있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회개를 가로막는 마귀의 속임수에 속지 않도록, 늘 말씀과 성령 안에 거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적용) 나는 회개하기보다 문제가 떠나기만을 구하지는 않습니까? 하나님이 나를 치시는 것이 나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긍휼임을 믿습니까?
2.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8~10절)
생명의 길을 가려면 ‘말씀에 순종하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8~10절 말씀에서 하나님은 예루살렘 백성에게 ‘생명과 사망의 길’을 제시하며, 그들의 선택에 따라 미래가 결정될 것이라고 경고합니다. 여기서 문자적으로 ‘생명의 길’은 바벨론에게 항복하는 것이고, ‘사망의 길’은 예루살렘 성 안에 머무르며 바벨론에 대적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유다 백성들에게는 더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명령이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바벨론은 적국이자 무서운 침략자였습니다. 그들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굴욕적이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뜻은 분명했습니다. 그들의 죄악으로 인해 심판은 피할 수 없지만, 말씀에 순종하여 항복하는 자에게는 ‘생명의 길’을 열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결국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을 신뢰하는 믿음의 선택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은 때로 이해하기 어렵고 우리의 생각과 다를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이성과 경험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길이 생명의 길임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단순한 행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그분의 뜻을 따르는 믿음의 결단입니다. 우리의 판단과 계산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때 비로소 ‘생명의 길’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순종이 곧 생명의 길이며, 믿음의 길입니다.
그런데 사망의 길을 가는 마귀는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합니다.
1) 최초의 불순종의 배후 – 마귀의 유혹
창세기 3장 4~6절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 따먹고 …” 인류 최초의 불순종은 마귀(뱀)의 거짓말에서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은 “먹지 말라” 하셨지만, 마귀는 “먹어도 죽지 않는다”고 속여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하도록 유혹했습니다. 마귀는 지금도 동일하게 역사하며,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의심을 심고, 자기 판단을 앞세우게 만듭니다. 2) 불순종은 마귀의 본질입니다. 에베소서 2장 2절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조를 따르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공중 권세 잡은 자”는 마귀를 뜻하며, 그는 불순종하는 사람들 가운데서 역사합니다. 마귀는 순종을 싫어하고, 사람들을 하나님 말씀에 반항하도록 만듭니다. 3) 마귀는 생각을 빼앗아 순종하지 못하게 합니다. 고린도후서 10장 5절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 마귀는 사람의 생각과 마음을 지배하여, 하나님께 순종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생각조차도 복종하게 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4) 마귀는 순종보다 제사, 형식을 강조하게 합니다. 사무엘상 15장 22~23절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 거역하는 것은 사술(마술)의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우상 숭배와 같으니 …” 사울 왕은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판단을 따랐고, 마귀는 그러한 불순종의 틈을 노렸습니다. 하나님은 외형적인 예배보다 진정한 순종을 원하십니다. 마귀는 자꾸 형식적인 신앙생활로 몰아가며 실제 순종은 못하게 합니다.
5) 예수님은 순종의 본을 보이셨고, 마귀는 그것을 방해했습니다 마태복음 4장 1~10절 “예수께서 성령에게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가사 …” 마귀는 예수님조차 하나님 아버지의 뜻에 불순종하도록 유혹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으로 대적하시며 끝까지 순종하셨습니다. 이로써 예수님은 두 번째 아담으로서 순종의 길을 여셨습니다 (로마서 5장 19절 참조). 사망자체요. 사람을 사망으로 인도하는 마귀는 하나님께 대한 순종을 방해하고 불순종하게 하여, 하나님과의 관계를 파괴하려 합니다.
그러므로 생명의 길을 가려면 반드시 해야 하는 하나님께 대한 진실한 순종은 영적 싸움이며, 말씀과 성령의 도움 없이는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이를 우리 삶에 쉽게 적용하려면 매일 하나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순종하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순종이 어려운 순간마다 “마귀가 이 틈을 노리고 있구나” 하는 경각심을 갖는 것도 큰 도움이 됩니다.
예수님처럼 말씀으로 마귀를 대적하며, 날마다 순종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적용) 내가 성읍에서 나와 하나님께 항복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3. 공의를 실천하는 길을 가야 합니다(11~14절)
생명의 길을 가려면 불의를 버리고 공의를 행하는 길을 택해야 합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백성이 살아가야 할 삶의 기준을 분명하게 제시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바벨론의 침략과 심판을 피하는 것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삶을 살 것을 요구합니다. 특히 이 본문은 다윗 왕조의 후손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공의를 행하라"는 강력한 명령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은 공의와 정의를 무시하는 자들에게 불같은 심판이 임할 것이라고 경고하십니다(14절). 공의를 행하는 것은 우리의 선택이 아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할 때 우리는 진정한 생명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분을 따르는 자도 공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믿음은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며,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이야말로 참된 믿음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우신 분이시며, 그분을 따르는 자도 공의(정의)를 실천해야 합니다. 그러나 마귀는 이를 끊임없이 방해하고 불의를 조장합니다.
마귀는 공의를 방해하고 불의를 조장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사망의 길을 가게 합니다.
1) 마귀는 거짓과 불의의 아비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 그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 거짓말을 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마귀는 진리와 공의의 반대편에 있는 존재입니다. 그는 거짓과 불의의 근원으로, 사람들을 유혹해 공의롭지 않은 말과 행동을 하게 만듭니다.
2) 하나님은 공의를 기뻐하시고, 불의는 미워하십니다. 시편 11편 7절 “여호와는 의로우사 의로운 일을 좋아하시나니, 정직한 자는 그의 얼굴을 뵈오리로다” 잠언 17장 15절 “악인을 의롭다 하며 의인을 정죄하는 이 둘은 다 여호와께 미움을 받느니라” 하나님은 공의를 실천하는 자를 기뻐하시고, 불의를 조장하는 자는 미워하십니다.
마귀는 바로 이런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도록 유도합니다. 즉, 악을 선하다 하고 선을 악하다 하는 문화를 퍼뜨립니다 (이사야 5:20 참고).
3) 마귀는 마음을 어둡게 하여 공의를 분별하지 못하게 합니다. 로마서 1장 28~32절 “…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그들을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 합당하지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한다고 하나님께서 정하심을 알면서도 …” 하나님을 거부하고 진리에서 떠나면, 마귀는 마음을 어둡게 만들어 불의한 행동이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합니다. 오늘날 사회에서 불의가 ‘정상’처럼 여겨지는 현상은 이런 영향의 결과입니다.
4) 불의한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합니다.
고린도전서 6장 9절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줄을 알지 못하느냐? 미혹을 받지 말라…”
마귀는 불의를 행하면서도 괜찮다고 속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불의는 하나님 나라와 상극입니다.
마귀는 이것을 “괜찮아, 다들 그래”라며 정당화하려 합니다.
5) 마귀는 사회 전체가 불의에 익숙해지게 만듭니다. 미가서 3장 9~11절 “야곱의 족속과 … 공의를 미워하고 정직한 것을 굽게 하며 … 재판은 뇌물로, 제사장은 삯으로, 선지자는 돈으로 점을 치면서도 … 여호와가 우리 가운데 계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느니라” 마귀는 사회 시스템 전체를 부패시키고, 공의가 사라지도록 만듭니다.
지도자들조차도 불의를 정당화하고, 하나님의 이름까지 이용합니다. 마귀는 사람을 미혹하여 공의를 버리고 불의 속에 살게 합니다. 그는 불의한 것을 “괜찮다”, “자유다”, “필요한 현실이다”라고 포장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공의를 사랑하시는 분이며, 그 백성에게도 정직하고 의로운 삶을 요구하십니다.
이를 적용하면 우리는 매일 삶 속에서 “공의롭게 사는가, 아니면 불의에 타협하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공의는 단순히 옳고 그름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에 맞게 사는 것입니다. 말씀과 성령의 도움을 통해 마귀의 속임을 분별하고, 정의롭고 진실된 삶을 선택해야 합니다.
적용) 내가 말씀을 따르지 않고 부정하게 행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큐티인묵상간증] [생명을 찾아주시려고 이기은]
우울과 불안에 있는 저는 과거 계속된 남편의 외도로 날마다 부부싸움을 했습니다. 그런 가정환경에서 큰 딸은 우울증과 ADHE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저는 제 잘못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저 아픈 딸을 낫게 하기 위해 상담을 받게 하고 교환일기를 쓰며 사랑을 표현했습니다. 또한 바벨론을 막으려고 여호와를 찾은 시드기야처럼 교회 공동체에 도움을 청했습니다(2절). 하지만 딸은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중학교만 졸업하면 나아가겠지’ 생각하며 새벽까지 딸의 하소연을 받아주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런 제게 속지; 않으셨습니다. 시드기야 왕과 백성이 든 무기를 뒤로 돌리겠다고 하신 것처럼, 딸이 왕따를 당해 학교에 가는 것조차 어렵게 하셨습니다(4절).
그제야 저는 피해자 입장에서 억울해하는 제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편과 싸우고 나면 화풀이로 유치원생이던 큰 딸을 때리고 작은 실수에도 분노하며, 딸에게 무리한 학습을 시켰던 일들이 생각났습니다. 그러자 “너희 행위대로 너희를 벌할 것이요”라는 말씀대로 현재의 고난이 내 삶의 결론이라고 인정되었습니다(14절). 딸이 그저 살아만 있어도 감사하다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후 저는 딸에게 눈물로 사과했습니다. 그릭 딸이 학교에 가지 못한 날은 함께 예배드리며 제 연약함을 나누었습니다. 그러자 딸은 먹기 싫어하던 정신과 약을 꾸준히 먹었습니다. “엄마가 변한 걸 보니 하나님이 정말 계신 것 같아”라고 고백하기도 했습니다.
지금 저는 주일학교에서 8년째 봉사하고 있습니다. 큰딸의 우울증이 초등학생 때 시작되었기에 이 또래 아이들에게 더욱 마음이 갑니다. 그리고 어느 새 대학생이 된 딸은 자신처럼 힘든 청소년기를 보내는 아이들을 위해 중등부 교사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남편을 무시하고 자녀를 학대하며 사망의 길에서 심판 받을 뻔한 저를 정의롭게 판결하시고 말씀을 통해 압박자의 손에서 건지신 주께 감사드립니다. 적용) 남편 때문에 화가 나도 딸에게 남편을 무시하는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딸의 진로가 걱정되어도 잔소리 하지 않겠습니다.
결 론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하여 “생명의 길로 가려면”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상고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수정교회 성도님들이 내게 찾아온 사건에서 기적과 문제해결만 구하지 않고 회개의 길을 택하시고, 불순종의 길에서 벗어나 말씀에 순종하는 길로 가시며, 불의와 거짓의 길을 버리고 공의를 실천하는 길을 택하여 사망의 길을 생명의 길로 바꿔주시는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경험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