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진달래
꽃 피고 잎 돋는 봄은 왔다. 그렇지만 내 몸은 아직도 봄을 저만치 밀쳐 내두고 있다. 한 해여 전부터 높은 곳, 비탈진 곳은 걷지 말라는 의사의 지시를 받은 터였다. 해거름이면 늘 오르던 산을 못 오르게 된 게 아쉽긴 했지만, 다시 힘찬 걸음으로 오를 날을 위하여 의사의 말을 따라 편한 길로만 걷고 있다.
잠시 혼절하여 쓰러지면서 벽에 부딪혀 척추에 골절이 난 것은 의사의 시술로 치료가 되었지만, 그 후로도 허리는 계속 저리고 아팠다. 시술의 후유증으로 알고 약을 먹으면서 낫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다시 검사를 해보니 그사이에 척주관 협착증이 왔단다.
사는 일, 행하는 일에 몸과 마음을 넓게 가지지 못해 허리도 협착해진 건가. 무릎도 말을 잘 안 들을 때가 있다. 다 노화 탓이라 한다. 늙는 일이야 어찌할 수 없지만, 사는 날까지 하고 싶은 일, 보고 싶은 것은 챙기며 살고 싶다. 그리되기 바라며 먹어야 할 약 알뜰히 먹고, 받아야 할 치료 착하게 받고, 필요한 운동을 위해서도 애쓰고 있다.
기력이 닿을 때까지 하고 싶은 일 하나 있다면, 수필교실 가족들과 오래도록 만나는 일이다. 한 주일에 한 번씩 수필 속의 삶을 함께 나누고, 삶 속의 수필을 같이 찾아가는 사람들과 만나는 날, 그날이야말로 나의 봄이고, 그 사람들이야말로 나의 꽃이다. 그 봄과 꽃을 오래오래 보듬으며 살고 싶다.
봄이 되면, 꼭 보고 싶은 게 있다. 해마다 이맘때면 반갑게 만나는 봄꽃이다. 강둑에 줄지어 선 벚나무가 피워내는 꽃이 해사하고 화사하게 어우러지면 내 봄은 절정에 이른다. 그보다 앞서 산에서는 올괴불나무꽃, 생강나무꽃에 이어 진달래꽃이 봄을 이고 달려온다. 세상을 다하는 날까지 그 사람들, 그 꽃들과 만나는 일 말고 무엇이 더 그리울까.
언젠가는 성한 몸이 돌아오리라 믿고 있지만, 믿음처럼 쉽게 나아지지는 않는다. 내 처지와는 아랑곳없이 봄은 아장아장 오고 있다. 늘 걷는 강둑 길섶에 푸른 움이 한두 곳 여리게 보이는가 싶더니, 겨우내 무거운 침묵에 잠겨 있던 벚나무가 망울에 은은한 혈기를 얼비추어 내고 있다.
이쯤이면 산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무엇이라도 꿈틀거리고 있을 거다. 스틱을 짚고 나선다. 오르기 쉽지 않겠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스틱으로 받치며 힘주어 오르는 발길을 낙엽이 밀어제치기도 하지만, 이 기슭을 오르면 무언가라도 봄소식을 들을 수 있겠지. 의사의 말을 잠시 잊기도 하고, 잊어버리고 싶기도 하다.
드디어 기슭을 올랐다. 푸른 솔숲 길을 지난다. 봄이 보인다. 노란 얼굴 앙증히 내밀고 있다. 생강나무꽃 어린 망울이다. 그러면 그렇지, 강둑에 오는 봄을 산인들 어찌 모른 체하랴. 함께 보고 싶은 게 또 하나 있다. 올괴불나무꽃이다. 붉은 꽃술과 연분홍 꽃잎이 돋보이는 손톱만 한 꽃-.
보이지 않는 꽃을 찾노라니 잊고 있었던 허리가 저려 온다. 저기 보일 듯 말 듯 두어 개 망울이 보이지만, 아직은 좀 이르구나. 잘 피어나거라. 내 다른 세상의 꽃 좀 만나고 올 터이니 포근한 봄 안고 와 있거라, 당부하고 내려온다.
한 시간여를 달려 차를 내린다. 고마운 마중과 함께 교실에 이른다. 책상을 서로 마주보기 좋게 가지런히 놓고 있으면. 꽃들이 달려온다. 봄을 안고 온다. 봄을 맞아 새로이 문을 연 수필교실이다. 때로는 눈물로 때로는 터지는 홍소로 수필 속에 깃든 삶을 함께 나눈다. 삶 속에서 수필을 찾아내기 위해 궁구의 심연을 헤매기도 한다. 통증이 간데없다. 봄이 익어 간다.
이제는 산에도 녹은 봄소식이 와 있을까. 스틱으로 허리를 받치며 산을 오른다. 그리던 대로다. 진노랑 생강나무꽃이 이제야 제 세상인 듯 복슬복슬 무르녹았다. 저기 가녀린 가지 끝에 오종종히 달린 연분홍 아기 초롱, 올괴불나무꽃이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인 채 함초롬히 미소 짓는다. 그래, 그런 네 모습을 그려 내 이리 와 있지 않으냐.
이때쯤이면 또 하나 반가운 것이 얼굴을 내밀 듯도 한데 싶어 두리번거리며 오르막 하나 더 오른다. 허리도 저리고 다리도 무겁지만, 발이 자꾸 앞선다. 발이 아는구나. 저만치 보이는 다홍빛 꽃잎, 진달래다. 언제 저리 잎까지 벌렸나. 마른 풀숲 헤치고 다가간다. 쓰다듬고 만져 보기도 하면서, 급기야 꽃잎 하나 살포시 따서 입에 살짝 넣어 본다. 향긋하다.
고개를 들어보니 저 먼 가풀막 한 자락에 쏟아부은 듯 분홍 잎새들, 무리 진달래가 미소를 피우고 있다. 달려가 그 미소 속에 묻히고 싶다. 그리운 사람, 치맛자락 같을까. 또 발이 앞선다. 어쩌랴, 발은 자꾸 앞을 지르지만, 몸이 말을 안 듣는다. 저 가풀막은 도저히 안 되겠단다. 저 먼 진달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안긴 거로 할게. 아주 아늑했던 거로 새겨둘게-.
내려오는 발길이 자꾸 뒤로 끌리는 듯하다. 그래도 괜찮다. 먼 모습이라도 보고 싶은 모습 봤지 않은가. 내일은 또 하고 싶은 일 하러 가지 않는가. 울고 웃을 삶 나누러, 새로운 삶 찾으러 가지 않는가. 그 빛만도 고왔다, 먼 진달래여. 네 미소 속에 묻힐 날 있을 테지-.♣(2025. 3. 30)
첫댓글 선생님 안녕하시죠?
아직도 아침 기온은 겨울옷이 알맞은 듯합니다. 잠시 한눈파는 사이 꽃은 피고 지네요 목련꽃 진자리 잎 피고 동백꽃은 송이째 뚝뚝 떨어지고 먼 진달래도 비바람에 흩날립니다. 뒷산 올라 진달래꽃 날리는 것을 보며 낙화로 먼 진달래로 연두 여린 싹을 내고 있네요. 저 싹 초록으로 무성해지듯이 선생님 건강 속히 회복하셨으면 하는 마음뿐입니다.
반갑고, 감사하며 글 새기는 마음이 선생님 건강 그 때문에 좀은 짠합니다.
존경하는 선생님 부디 강녕하게 지내십시오.
몸 성치 못한게 무슨 자랑이라고 남 다 알게 해야겠습니까만.
글로 쓰고 싶은 욕구는 병보다 참기 어려워 써본 글입니다.
이 봄 같은 생기로운 몸이 되기 위해 저도 애쓰고 있습니다.
염려해 주셔서 늘 고맙고 감사합니다. 좋은 일 많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