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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4.27(주일) 사무엘상 1:19~28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삶’ 예산수정교회 이몽용 목사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가 자녀를 위해, 가정을 위해 기도할 때 가장 바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성공? 건강? 아니면 행복한 삶이신가요? 오늘 본문은 오랫동안 자녀를 갖지 못했던 한 여인,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의 이야기를 통해 ‘평생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 그 고귀한 신앙의 결단을 보여줍니다. 한나는 아들을 간절히 구했고, 하나님께서 응답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아이를 자신이 아닌 하나님께 드리는 삶을 선택합니다.
성경에는 평생을 여호와께 드렸던 사람들에 대해서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습니다.
1) 모세 ~ 40세까지 애굽 궁에서 살다가, 미디안 광야에서 40년을 보내고, 그 이후 40년간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며 하나님을 섬기는 데 온 생애를 드렸습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친구'라고도 불릴 만큼 하나님과 가까운 삶을 살았습니다. (출애굽기–신명기) 2) 사무엘 ~ 어릴 때 어머니 한나가 기도로 얻은 아들인데, 약속대로 어릴 때부터 성막에서 하나님께 봉사하며 살았습니다. 사무엘은 사사이자 선지자, 제사장 역할을 하면서 평생 하나님을 섬겼습니다(사무엘상 1–3장). 3) 안나(여선지자) 누가복음에 나오는 여선지자입니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후, 평생 성전에서 금식과 기도로 하나님을 섬겼습니다(누가복음 2:36–37). 이때 하나님께서는 그녀의 아픈 마음과 외로움을 위로하여 주셨고 예언의 은사를 내려주심으로 여선지자로써 추앙을 받게 하셨습니다. 4) 요한 (세례 요한)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 특별히 구별된 인물입니다. 광야에서 살며 회개의 세례를 전파하고, 메시아의 길을 준비하는 데 인생을 헌신했습니다(마태복음 3장). 5) 사도 바울 ~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는 교회를 핍박했지만, 예수님을 만나고 회심한 이후 남은 생애를 복음 전파에 바쳤습니다.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죽기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습니다(사도행전, 서신서들). 이들의 공통점은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따라 그들의 인생을 살았고, 세상의 성공이나 편안함보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장 소중히 여겼다는 점입니다.
이 시간 우리는 사무엘 선지자의 어머니 한나의 신앙을 통해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삶’이 무엇인지, 또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보고 저와 여러분을 향하신 주님의 음성을 듣기를 원합니다.
1. 기도응답의 순간에도 하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19~20절)
한나는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행복한 여인입니다. 세상에 이렇게 행복한 여인이 없습니다. 한나는 좋은 남편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한나의 남편 엘가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첫째, 그는 좋은 가문의 사람이었습니다(1절). 둘째, 그는 재물이 있는 사람입니다(2절). 셋째로 그는 신앙이 있는 사람입니다(3절). 매년마다 제사를 드리러 실로에 갔습니다. 신앙이 좋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사람입니다. 이만하면 나무랄 데가 없는 신랑입니다. 가문 좋습니다. 재물 많습니다. 신앙도 좋았습니다. 넷째로 그는 한나를 지극히 사랑해주었습니다(5절). 5절 상반 절에서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그를 사랑함이라."고 말하는 것처럼 한나에게는 재물의 분깃을 갑절이나 주었습니다. 8절에서 "한나여 어찌하여 울며 어찌하여 먹지 아니하며 어찌하여 그대의 마음이 슬프뇨? 내가 그대에게 열 아들보다 낫지 아니하냐?"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한나를 지극히 사랑했습니다. 한나에게도 큰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한나는 결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한나에게는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5-6절에 보니 "한나에게는 갑절을 주니, 이는 저를 사랑함이라. 그러나 여호와께서 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니, 여호와께서 저로 성태치 못하게 하시므로 그 대적 브닌나가 그를 심히 격동게 하여 번민케 하더라" 그렇습니다. 성경은 한나는 브닌나로 하여금 심히 격동되었고, 번민하였습니다. 그런데 본문을 주목하여 보면 한나가 자녀를 생산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에게 있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본문에 보니 하나님께서 한나로 하여금 성태치 못하게 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그러셨습니다. 하나님께서 문제를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아니 사랑의 하나님께서 성태치 못하게 하시다니?"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하나님의 오묘한 섭리를 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때때로 문제를 주십니다. 하나님은 사랑하시는 사람일수록 시험과 문제를 주십니다. 하나님께서는 100% 건강, 100% 은혜, 100% 축복을 허락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에게 오히려 부족함을 주십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완전한 만족을 주시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그들 나름대로의 어려운 문제, 기도의 문제는 꼭 한 가지씩 있습니다. 다윗에게 골치 덩어리, 압살롬이 있었습니다. 사도 바울에게 육신의 가시가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에게도 천하의 못된 유다가 있었습니다. 다 제거하시지 않았습니다. 하나는 남겨두셨습니다.
하나님은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지름길로 해서 가나안 땅에 단번에 들여보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우리에게 완벽한 행복, 완벽한 건강, 완벽한 은혜, 완벽한 축복을 허락하시지 않으실까요?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을 그 무시무시한 광야에 집어 넣으셨습니까? 그것은 세 가지 의미가 숨겨져 있습니다. 첫째는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고후 12:7)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귀히 쓰시는 종입니다. 이런 바울에게도 한가지 문제는 있었습니다. 육신에 찌르는 가시를 주셨습니다. 가시가 얼마나 아픕니까? 바울은 이 가시를 없애달라고 하나님 앞에 세 번이나 기도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안된다고 했습니다. 그것이 없으면 넌 안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가시를 통해서 사도 바울을 기도하는 사도로 쓰셨습니다. 더 위대한 종으로 쓰신 것입니다. 고후 12:7에서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 이는 나를 쳐서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말씀처럼 자고하지 않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둘째는 하나님만을 의뢰하시기 위해서입니다(고후 1:9). 바울은 선교를 하면서 생명의 수많은 생명의 위협과 위험을 만났습니다. 이는 하나님만을 의뢰하게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고후 1:9에서 “우리 마음에 사형선고를 받은 줄 알았으니 이는 우리로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뢰하게하심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셋째는 기도하게 하시기 위해서입니다. 평안하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물론 평안한 가운데서도 기도하는 참으로 복된 일입니다. 그러나 지금 폭풍 전야의 위험 속에 있음에도 기도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이며, 하나님을 시험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어려운 문제 앞에서 결코 좌절만하지 않고 기도하면 부족한 것을 채워주십니다.
하나님께서 한나에게 어려운 문제를 주신 것은 한나를 미워하신 것이 아니라 어려운 문제 앞에서 결코 낙망하거나 좌절하는 것으로 머물지 않고 기도하는 모습을 통하여 우리 성도들에게도 어려운 고난이 닥칠 때에 다른 것 하지 말고 기도할 것을 교훈하시기 위함입니다. 우리가 때때로 문제에 빠지면 기도하라는 신호로 알아야 합니다. 원망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 엎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왜 문제 속에 집어넣으십니까? 하나님의 생각은 무엇입니까?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방법을 배우라는 것입니다.
10절에서 "한나가 괴로워서 여호와께 기도하고, 통곡하고"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한나는 울면서 기도했습니다.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한나는 비록 마음이 괴로워서 기도하고 통곡하였지만 그것은 원망의 기도가 아니었습니다. 한나는 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는 분은 오직 하나님임을 믿었습니다. 그러기에 한나는 자신의 고통과 괴로움을 하나님께 가지고 기도의 자리에 나아갔습니다. 뿐만 아니라 한나는 자신의 어려운 환경이 하나님의 뜻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러기에 하나님께 기도했던 것입니다.
한나는 11절 상반 절에서 "서원하여 가로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서원의 기도를 드렸습니다. 한나는 브닌나로부터 받은 박해와 모욕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고 아들을 구한 것이 아니라 주님의 영광을 위해 서원기도를 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욕심만을 채우기 위해서, 대적으로 부터 당하는 고통으로 부터 벗어나기 위한 기도가 아니라는 것이지요, 하나님은 한나와 같은 이런 기도를 기뻐하십니다. 한나는 아들을 주시면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기도했습니다.
이와 같은 한나의 기도를 하나님이 들으시고 응답하셨습니다.
한나는 오랜 고통과 기도의 눈물 끝에 하나님께 응답받습니다. 하나님은 고통 가운데 하나님께 드린 한나의 기도를 생각하십니다(19절). 이에 하나님은 한나에게 임신을 허락하시고 때가 이르러 아들을 얻게 하십니다. 그런데 그 기쁨의 순간, 한나는 자신의 원함으로 인한 기쁨에 취해 있기보다 하나님의 뜻을 먼저 생각합니다. 그 증거로 한나는 아들의 이름을 "사무엘" 즉, ‘여호와께 구하였다’라는 뜻으로 짓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되었을 때, 우리는 종종 하나님보다 결과에만 집중하게 결국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고, 한나는 약속을 지킵니다.
한나는 아들을 얻은 기쁨에만 몰두하지 않고, 오히려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께 다시 드립니다.
그리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나이다...” (사무엘상 2:1) 여기서 중요한 점은, 기도의 응답(아들 사무엘)이 한나의 최종 목표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응답 이후에도 한나는 여전히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높이며, 하나님의 손길을 인정합니다.됩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 순간조차 하나님을 기억하며 그 분의 손길을 고백합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누가복음 17:11–19)의 이야기를 여러분은 너무나 잘 알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쳐주셨을 때, 그 중 단 한 명만 돌아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감사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자기가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 예수의 발 아래에 엎드려 감사하니...” (누가복음 17:15–16)라고 합니다. 나머지 9명은 나병이 낫는 것 자체에만 집중했고, 나병이 나았어도 진짜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께 나아가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습니다. 우리의 기도가 응답될 때, 우리는 응답의 결과 자체(성공, 치유, 문제 해결 등)에만 집중하고 기뻐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진짜 신앙은, 응답의 결과를 넘어서 그 결과를 주신 하나님을 기억하고 찬양하는 것입니다. 한나는 기도의 응답으로 아들을 얻었지만 그 아들을 하나님께 맡겼습니다. 결과를 통해 하나님과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갔습니다. 이것이 바로 평생 여호와께 드리는 삶의 첫 번째 원리입니다.
적용) 나의 간구한 것이 응답받아 이루어졌을 때, 나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고 있습니까? 혹은 응답만 받고 하나님은 잊고 있지는 않습니까?
2.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결단을 해야 합니다(21~23절)
신앙이 있는 남편 엘가나는 가족과 함께 여호와께 연례 제사와 서원제사를 드리러 여호와의 성막 같은 성전이 있는 실로에 갑니다. 그러나 한나는 그들과 함께 가지 않고 아들이 젖을 떼기까지 집에 머뭅니다(21,22절). 한나는 단순히 서원기도를 한 것이 아니라 그 기도를 지킬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사무엘이 젖 떼기 전까지 그를 직접 돌보며 하나님의 말씀과 사랑으로 양육했습니다(신6:7). 자식을 하나님께 드리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심지어 어렵게 얻은 아이를 품에 안고 사랑할수록 그 결단은 더 어렵습니다. 보통 여인들이 남편은 없어도 자녀만 있으면 산다는 말은 자주 하듯이 자녀에 대한 어머니의 애착은 굉장합니다. 그러나 한나는 값진 아들을 하나님께 아낌없이 드렸던 것입니다.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드리라는 하나님의 명령에 아브라함이 순종한 것도 결코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한나는 하나님과의 약속을 잊지 않았고, 철저히 그 약속을 지키는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한나는 신앙을 말로만 하지 않고, 삶으로 보여주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약2:17)이라고 했습니다. 말로만 하는 신앙, 말뿐인 믿음, 행함이 없는 믿음은 아무런 유익이 없습니다. 무익한 믿음입니다. 소위 말하는 그 믿음은 진짜 믿음이 아닙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자기 자신도 구원의 길로 인도하지 못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7:21~23)고 말씀합니다.
[예화1]
어느 교회 장로님이 한 분 있었습니다. 돈 많은 장로님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는 교회 일에는 그다지 충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뜻밖에 그에게 심장병이 찾아왔습니다. 심장이 마구 조여오는 듯한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병원에 입원을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 소식을 듣고서 심방을 갔습니다. 목사님은 그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장로님, 병세는 좀 어떠하십니까?"
그러자 그는 풀이 죽어서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아직은 잘 모르겠습니다. 조금 있다 원장선생님이 와보셔야 알겠습니다."
바로 그때 원장선생님이 간호사 한 사람을 데리고 병실로 들어왔습니다. 원장선생님은 장로님을 이리저리 진찰을 했습니다. 눈꺼풀을 한 번 뒤집어보고, 가슴에 청진기도 대보았습니다. 또 손으로 배도 꾹꾹 눌러보았습니다. 그러더니 원장선생님은 갑자기 간호사를 향해서 이렇게 외쳤습니다.
"간호사, 빨리 가서 장의사를 불러 와!"
그는 그 소리를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제 자기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원장선생님이 자기를 진찰한 뒤 갑자기 장의사를 불러오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급하게 목사님을 찾았습니다. 그리고는 목사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종이와 연필 좀 갖다주세요! 제가 하나님께 헌금을 바쳐야겠습니다."
평소에 하나님께 제대로 헌금을 드리지 못했던 것이 그의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이제 죽음이 바로 코앞에 닥치니까 겁이 덜컥 난 것입니다. 그는 목사님이 전해주는 종이와 연필을 받아 쥐고서 아라비아 숫자로 1자를 적고 동그라미를 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만원, 십만원, 백만원, 천만원, 일억, 그는 다시 한 번 숫자를 확인하고 난 뒤에 그 밑에 자기 이름을 적고서 사인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목사님에게 건네주면서 자기가 그 금액을 헌금으로 바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목사님은 그의 돌발적인 행동에 다소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그의 뜻을 존중하는 의미에서 감사의 인사를 한 뒤 그것을 받아 쥐었습니다.
그런데 잠시 뒤에 문이 다시금 열리면서 밖에 나갔던 간호사가 젊은 의사 한 사람을 데리고 왔습니다. 원장선생님은 젊은 의사를 보더니 야단쳤습니다.
"이봐, 장의사! 아니 진찰을 했으면 차트에 기록을 남겨야지. 이렇게 비워놓으면 어떻게 하나? 이 정도 같으면 퇴원을 시켜도 되잖아? 왜 환자를 이렇게 붙들어 놓고 고생을 시키나?"
알고 보니까 젊은 의사의 성이 장씨였습니다. 성이 장씨인 장 의사(醫師)를 불렀는데 죽고 난 뒤에 장례를 치르는 장의사(葬儀社)를 부른 줄 알고 지레 겁을 집어먹은 것입니다. 장로님은 깜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목사님을 찾아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죄송하지만 제가 조금 전에 써 드린 숫자에서 동그라미 하나만 좀 지워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사람에게도 헌금을 할 수 있는 기회를 드려야지 저 혼자 독차지해서야 되겠습니까? 제가 조금 양보하지요."
물론 우스개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시사해 주는 바가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행함으로 나타나지 않으면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입니다. 내게도 유익이 없고 다름 사람에게도 유익을 주지 못하는 무익한 믿음일 뿐입니다.
[예화2]
어떤 집사님이 천국에 갔습니다. 요한계시록 21장에 기록되어 있는 말씀처럼 천국의 성곽은 너무나도 아름다웠습니다. 각종 보석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천국의 문은 엄청 컸는데 그 문 전체가 하나의 진주로 되어 있었습니다. 문은 굳게 닫혀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국 문 앞에 서서 그 문을 힘껏 두드렸습니다. 그러자 문이 열리면서 베드로가 나타났습니다. 그는 베드로를 알아보고서 인사했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저는 어느 교회에 다니는 아무개 집사입니다. 제가 천국에 들어갈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자 베드로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잘 오셨습니다. 그런데 천국에 들어오려면 믿음의 증표가 있어야 되는데 그것을 가지고 오셨습니까? 한 번 내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자기에게 믿음의 증표가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믿음의 증표라는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는 베드로에게 이렇게 사정을 했습니다.
"제게 믿음의 증표가 있는 줄 알았는데 찾아보니까 없네요. 그렇지만 저는 수십년 동안 교회에 출석했습니다. 그러니 좀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그러자 베드로는 단호하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안됩니다. 믿음도 없이 수십 년이 아니라 수백 년 동안 교회 마당을 밟고 다니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그렇게 해서는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되돌아가십시오."
그는 다시금 베드로에게 애원했습니다.
"제가 그냥 교회 마당만 밟은 것이 아니고, 십 수년 동안 집사로서 직분을 가지고 봉사했습니다. 그러니 들어갈 수 있게 해 주세요."
베드로는 그 소리를 듣고서 큰소리쳤습니다.
"뭐라고요? 믿음도 없이 집사 노릇을 십 수년 동안 했다고요? 이 양반 교회에서 꽤나 말썽을 피웠겠구먼. 당신 같은 사람은 더더욱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그러면서 천국 문을 쾅하고 닫아버렸습니다. "쾅!"하는 그 소리에 놀라서 깨어보니까 그것은 꿈이었습니다. 그가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그 다음부터 그는 달라졌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이름뿐인 집사가 아니고, 정말 충성하면서 신실한 일군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구원은 믿음으로 가능합니다. 믿음에 행함이 첨가되어야만 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구원받지 못할 믿음은 처음부터 믿음이 없었고, 그래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주님이 주시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 아니라 참믿음입니다. 참믿음이 있는 자는 거짓 선지자들과는 달리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이들의 행함은 믿음의 열매요, 믿음의 증거이며, 믿음의 표현입니다. 이런 구원의 은혜를 받은 사람은 하나님 앞에 ‘감사함’으로 행하게 됩니다. 나를 구원해주신 하나님, 나의 기도에 응답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선한 일, 즉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결단을 하게 됩니다. 성도들의 선행은 천국에 들어가기 위한 조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보답으로 행하게 됩니다.
한나는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삶'의 모범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소원만을 위해 하나님을 이용하지 않고, 응답받은 축복을 다시 하나님께 온전히 돌려드리는 삶을 살았습니다.
한나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혜를 나는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는가?"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삶은 이렇게, 내가 가진 가장 소중한 것조차 하나님의 뜻에 따라 드리고, 내 삶 전체가 하나님을 향해 열려 있는 삶입니다.
적용) 나는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했던 약속을 어떻게 지키고 있습니까? 순종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요?
3. 드림은 끝이 아닌 시작일 뿐임을 기억해야 합니다(24~28절)
“젖을 뗀 후에 그를 데리고 올라갈새… 실로 여호와의 집에 나아갔는데…”(24절) 한나는 젖을 떼자마자 사무엘과 함께 실로로 올라가 그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그리고 소 한 마리와 밀가루 한 에바(22L), 포도주 한 가죽부대를 함께 드립니다. 수소는 당시 가장 값비싼 제물이었고, 밀가루와 포도주도 귀한 예물이었습니다. 한나는 ‘어쩔 수 없이’ 드린 것이 아니라,
감사와 사랑으로 가장 좋은 것을 아낌없이 드렸던 것입니다.이 예물은 한나의 삶의 우선순위를 보여줍니다. 한나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여 가장 귀한 아들 사무엘을 드릴 뿐 아니라 하나님께 가장 좋은 예물을 아낌없이 드립니다. 그리고 자신이 했던 서원을 고백하며 이렇게 말합니다: “이 아이를 위하여 내가 기도하였더니 내가 기도한 바를 여호와께서 내게 허락하신지라 그러므로 나도 그를 여호와께 드리되 그의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니이다 하고 그가 거기서 여호와께 경배하니라”(27,28절)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깨닫습니다. 최고의 예물은 값비싼 것이 아니라 아까워하지 않고 드리는 예물입니다. 구원의 은혜, 응답의 은혜에 감사하는 자가 최고의 예물을 드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 드리는 삶은 결코 단회적이 아니라 평생이라는 사실입니다. 한나는 예물보다 더 귀한 아들 사무엘을 평생 하나님께 드림으로 그의 믿음을 증명합니다.
평생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단순히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 가장 귀한 것, 가장 사랑하는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삶입니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내어놓을 수 있을 때, 내 삶의 열매를 내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드릴 수 있을 때, 그것이 진정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삶이 됩니다. 한나의 삶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내가 가진 가장 좋은 것을 받기에 합당하신 분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삶은 남은 것을 드리는 삶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아낌없이 드리는 삶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드렸지만, 그것으로 모든 책임이 끝난 것이 아니라, 그 후로도 매년 옷을 지어 보내며 기도로 사무엘을 섬겼습니다(사무엘상 2:19.) “그의 어머니는 매년 드리는 제사를 드리러 올라갈 때마다 그를 위하여 작은 겉옷을 지어다가 그에게 주었더라.” (사무엘상 2:19)
한나는 사무엘을 하나님께 맡긴 이후에도, 기도로, 사랑으로, 믿음으로 계속해서 헌신을 이어갔던 것입니다.
또한 사무엘 자신도 하나님의 집에 머물면서 단순히 '거기에 있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사명을 시작했습니다.
"사무엘이 자라매 여호와께서 그와 함께 계셔서 그의 말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게 하시니라." (사무엘상 3:19)
정리하면, 드림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순간, 새로운 사명과 삶이 열립니다.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삶은 한 순간의 결단이 아니라, 매일 하나님과 함께 걸어가는 여정입니다.
적용) 나는 매주 헌금을 감사한 마음으로 아까워하지 않고 기꺼이 드립니까? 생색과 인색함과 아까움으로 드립니까?
[큐티인묵상간증]
“얘들아! 교회가자!” “야호!” 몇 해 전, 결혼 10년 만에 남편과 함께 온 가족이 교회에 예배드리러 가는 주일 아침이었습니다. 아이들은 하나님이 기도를 들어주신 것이라며 기뻐했습니다. 모태신앙이지만 교회에 다니지 않던 남편의 예배 회복과 가정 중수를 위해 저와 아이들이 신음하듯이 드린 기도를 하나님이 기억해주신 것입니다(19절).
하지만 강박과 완벽주의가 있는 남편은 율법적으로 신앙생활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춘기 자녀들과 자주 부딪혔고, 결국 아이들은 말씀과 예배에서 멀어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자녀 고난으로 영육간에 탈진한 저는 남편과 몸 싸움을 벌이며 크게 다퉜습니다. 결국 저는 병원에 입원했고, 남편은 교회를 떠나고 일도 그만두었습니다. 남편과 함께 신앙생활을 하게 되니 제 속의 욕심과 그동안 성품으로 참아온 모든 것이 드러나고 만 것입니다.
얼마 뒤 저희 부부는 가정법원에서 심리상담처분을 받았습ㄴ지다. 그리고 생활비 마저 바닥나자 저는 저절로 겸손해주셔 입이 다물어 졌습니다. 그제야 네 교만과 욕심을 회개하고, 하나님 자체가 상급임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천국 가는 그 날까지 가족 구원을 못 보더라도 제 남은 평생을 하나님께 드릴께요”라고 고백하며 주께 용서를 구했습니다(28절) 그러자 하나님은 우울과 무기력으로 쓰러져 있던 저를 일으켜주셨습니다. 남편도 스스로 교회에 나와 예배 드리고 큐티도 다시 시작하며 믿음의 홀로서기를 위해 한걸음 떼게 되었습니다(23절).
이후 저희 부부는 서로 용서를 구하며 관계를 회복했고, 지금은 회사를 운영하며 같이 일하고 있습니다. 아침마다 함께 라씀을 묵상하고 적용하니 가정도 평안해졌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믿음을 떠나 방황하는 아들이 있고, 양가 어머니께는 복음을 전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정하신 때가 이르기까지 믿음으로 인내하며 구원을 위한 수고를 감당하겠습니다(20a절). 적용) 남편과 매일 큐티한 내용을 나누고 식사 기도를 할 때 양가 어머니를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온 가족이 함께 식사할 때 음식 장만에 정성을 기울이겠습니다.
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한나의 삶을 통해 우리는 중요한 진리를 발견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절한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기도의 응답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응답을 통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고, 삶 전체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한나는 아들을 얻은 후에도 하나님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아들을 하나님께 드렸고, 또한 자신의 가장 소중한 것을 아낌없이 드리면서 평생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무언가를 드리는 것은 끝이 아니라 시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드림을 통해 우리를 하나님의 사람으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사람으로 세우기를 원하십니다. 평생을 여호와께 드리는 삶은, 내 시간을 드리고, 내 재능을 드리고, 내 마음과 계획을 드리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은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하시는 삶이며, 결국 우리 인생을 가장 풍성하고 복되게 하는 길입니다.
오늘 우리도 결심하십시다. 한나처럼, "주님, 제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립니다. 평생을 주님의 뜻에 따라 살겠습니다."
이 고백과 결단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기도문]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오늘도 말씀을 통해 저희의 마음을 깨워주셔서 감사합니다.
한나가 가장 귀한 것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렸듯이, 저희도 우리의 삶을 주님께 온전히 드리길 원합니다.
응답받은 기쁨에 머무르지 않고, 그 모든 은혜를 기억하며 날마다 주님을 향해 나아가게 하소서.
주님, 우리의 마음과 시간과 재능을 주님 앞에 드립니다. 남은 것이 아니라, 가장 좋은 것을 드리게 하시고,
드림을 끝으로 여기지 않고, 드린 삶을 통해 평생 주님과 동행하는 인생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우리의 작은 헌신 위에 주님이 함께하셔서, 주의 영광을 나타내는 복된 삶이 되게 하시고,
모든 날 동안 주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는 참된 제자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감사드리며,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