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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달력
교회력은 해마다 한 바퀴씩 순환한다. ‘대림절 첫째 주일’부터 ‘영원한 주일’까지다. 그러면서 또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교회력에서 ‘영원한 주일부터 대림절 첫째 주일까지’ 한 주간은 일 년의 끝과 시작이 서로 맞물려있는 ‘끄트머리’ 주간이다. 끄트머리는 ‘끝이며 동시에 시작’이다. 앞으로 나는 교회력을 몇 바퀴나 돌 수 있을까?
영원한 주일에는 등불이나 알파와 오메가를 새긴 초, 그리고 조개껍데기로 강단장식을 한다. 등불은 인생을 비추는 희망이고, 조개껍데기는 인간의 순례를 상징한다. ‘등불과 조개껍데기’는 인생이 걸어가는 여정을 의미한다. 인생의 순례길 어느 지점에서 내 걸음은 반드시 정지할 것이다. 그럼에도 하나님의 달력을 바라보며 믿음과 희망으로 산다.
영원한 주일의 한 주간은 무엇보다 죽음을 생각하는 기간이다. 먼저 돌아가신 분들을 기억하며, 추모한다. 지금 연로하신 부모님과 어르신들의 연약함과 외로움을 기억하며 가까이 살펴 드린다. 인생의 종말과 아주 가까이에 있는 분들의 삶 역시 우리가 살고 있는 경계선 안에 존재한다. 그리고 나 자신도 그 경계의 언저리에서 멀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영원한 주일은 자신의 인생이 시한부임을 명심하고, ‘삶과 죽음’을 돌아보는 기회가 된다. 그리스 작가 니코스카잔차키스 말에 “인생은 너무나 짧은 섬광 같지만, 충분하다”고 했지만, 동의하기는 힘들다. 누구나 인생의 길이와 의미에 대해서 회한이 있게 마련이다. 다만 영원한 주일은 사람은 임시적인 공간과 한시적인 시간을 사는 존재임을 깨닫게 한다.
따라서 이제라도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영원하신 하나님의 은혜에 기대어 살라고 일깨워 준다. 누구든 인생에서 확정된 로드맵은 없다. 신실한 매뉴얼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인생의 내비게이션도 불확실하다. 다만 방향이 있을 뿐이다. 과연 지금 내가 선 지점은 어디일까? 내 인생의 의미는 무엇인가?
지하철 격언 가운데 ‘돌아갈 곳이 있으면 인생은 여행이고 돌아갈 곳이 없으면 그의 인생은 방황이다’라는 말이 있다. 성공하는 사람의 습관을 전하는 스티브 코비는 “시계를 보지 말고 나침반을 보라”고 하였다. 교회력의 끝 주간에 내 인생을 돌아보며, 나 자신에게도 결코 예외가 없다는 진실을 깨닫는 사람은 지혜롭다. 어둠이 깊을수록 일상의 시계와 영원한 나침반을 확인하는 일은 더없이 긴요한 일이다.
영원한 주일은 ‘그리스도 왕 주일’로도 불린다. 헤른후터 공동체는 이 주간 말씀으로 “너희는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놓고 있어라”(눅 12:35)고 하였다. 어둠이 점점 깊으니, 등불은 더욱 빛난다. 어둠과 빛의 존재는 때를 일깨워 준다. 실야 발터는 등불을 켜야 하는 이유를 일러준다. “주님, 주님이 오실 때에 누군가는 집에 있어야 합니다. 누군가는 밤낮으로 주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바로 대림절을 맞는 자세이다.
교회력은 사회의 기준보다 한 달 앞선다. 일상생활에서 교회력에 따라 살기가 어려운 이유다. 그럼에도 교회력을 하나님의 달력으로 여긴다면 생활신앙은 훨씬 풍성해진다. 더글라스 밀즈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시간에 참여함으로서 우리가 하나님 이야기의 일부임을 알게 된다”고 하였다. 하나님의 날들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과 보조를 맞추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 문화권 밖에서 살아온 한국인에게 교회력은 생각과 생활이 분리된 채, 따로 이해되기 십상이다. 물론 탈농경시대인 요즘에도 24절기가 긴요하고, 추석과 설날 같은 고유한 명절이 세월에 따라 빛 바래지 않듯이, 교회력을 일용할 양식처럼 가까이 적용할 수 있다. 마치 시간 속에 깃든 신앙고백이고, 공간 안에 연출된 신앙생활이기 때문이다. 대개사람들의 달력에서 희망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늘 현실과 비현실, 이익과 손해를 따지기 때문이다. 이제 교회력과 내 생활 시간표를 일치시켜보라. 은총의 삶은 지극히 단순한 일로부터 시작한다.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시 9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