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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5.11(주일) 사무엘상 9:1~14 ‘블라인드 서밋을 주의하라’ 예산수정교회
영어권 국가(영국, 호주 등) 에서 운전하다보면 ‘블라인드 서밋’(Blind Summit)이라고 적혀 있는 교통 표지판을 보게 됩니다. 국내에서는 “전방시야불량”, “급경사”, “언덕길 주의” 등으로 번역되어 표시됩니다. 이 표지판은 차량이 언덕을 오를 때 정상에 이르기 전에는 언덕의 정상이나 그 너머의 상황이 전혀 보이지 않고 예측할 수도 없다는 점을 알려줍니다. 즉 도로가 언덕이나 오르막 형태로 되어 있어서 정상에 도달하기 전까지 반대 방향에서 오는 차량이나 도로 상황을 볼 수 없는 위험한 구간을 말하기에 운전자에게는 속도를 줄여 주의해 운전하라는 표지입니다. 이 표지판이 적혀 있는 구간의 특징은 시야 확보가 어렵습니다. 추월이나 급정지시 사고 위험이 큽니다. 그러므로 운전자는 이 구간에서는 시야를 완전히 확보하기 전에는 절대로 추월해서는 안됩니다. 속도를 줄이면서 전방 상황에 대비해야 합니다. 특히 야간이나 악천후시에는 더욱 더 주의해야 합니다. 특히 주의 하면서 속도를 줄이는 것이 요구됩니다.
요즘 우리는 거의 매일 이 표지판을 대하며 살아가고 있는 듯합니다. 마치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가운데 있기에 불안함과 답답함을 느끼며 살고 있습니다. 6.3 대선을 앞두고 우리 나라의 정치권은 한치 앞도 예측할 수 없습니다. 우리 성도들은 이 문제를 놓고 하나님께 매일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또한 우리의 신앙생활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블라인드 서밋과 같은 경고 표지판을 주시면서 주의하라고, 속도를 줄이라고 주의를 주실 때가 있습니다. 나 자신과 관련된 어떤 사건이나 사람을 보면서 보이는 부분과 보이지 않는 부분으로 인하여 불안을 경험할 때가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심과 십자가에서 고통당하실 때 이러한 블라인드 서밋을 경험하고 답답해 하고 불안해 했을 것입니다. 보이는 것으로 예수님을 판단할 때 제자들은 십자가 사건을 실패로 여기고 실망과 허무감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오히려 보이지 않는 영역이 보이는 영역과 비교할 때 훨씬 크고 광대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이는 것, 내 앞에 닥친 현실만 바라보고 불안해하고 답답해 하는 것이 우리의 연약한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은 세상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을 위해 베냐민 사람 사울을 세우시고, 그를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에게로 인도하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이 본문을 통하여 사람과 환경을 바라볼 때 어떤 ‘블라인드 서밋’을 주의해야 하는가를 살펴보고 또 그 상황 너머를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나 자신을 돌아보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주의해야 할 블라인드 서밋은 무엇일까요?
1. ‘세상과 기복’이라는 블라인드 서밋을 주의해야 합니다(1,2절).
본문에서 사울은 매우 인상적인 첫 등장을 합니다. 그는 “유력한 집안” 출신입니다. 그러니 사울도 1절에 “유력한 사람”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기서 “유력한 사람”이라는 말은 “힘있고 강력한 영웅”이라는 뜻입니다. 즉 사울의 아버지는 영웅이었고, 사울 역시 그 아버지 영향을 받았을 것입니다. 기스 가문은 베냐민 지파 내에서도 지위가 있습니다. 또한 사울은 2절에 “준수한 소년”입니다. “준수하다”(히, 토브)라는 말은 “보기에 좋다”라는 뜻입니다.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하면 “시각을 즐겁게 하거나 외적으로 아름답다”라는 뜻입니다. 즉 외모가 뛰어나고 사람들이 보기에도 출중했던 미소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후 2절에서는 “키는 모든 백성보다 어깨 위만큼 더 컸더라”고 합니다. 사울은 베냐민 지파 중에서 영웅과 같은 집안 출신의 잘생긴 소년이었습니다. 그의 집안은 지파 내에서 영웅 대접을 받았고 부유했습니다. 그는 외모를 통하여 사람들에게 늘 주목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 완벽한 왕처럼 보였습니다. 왕을 구하던 이스라엘 배것ㅇ들이 그토록 찾던 왕의 자질을 충분히 갖춘, 오늘날로 말하면 완벽한 스펙을 갖춘, 외적으로 완벽해 보디는 그런 사람이 사울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사울의 외형적 스펙은 ‘블라인드 서밋’과 같은 경고사인과도 같습니다. 정상에 오르기 전까지는 사울의 이 외형적 스펙만 보입니다. 그러나 그 너머엔 위험과 비극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외모로 왕을 뽑은 결과, 하나님은 그의 불순종으로 인해 사울을 버리셨고, 이스라엘 백성들도 그로 인해 패배하게 되었고, 그들이 아무리 하나님께 부르짖어도 응답하지 않고 버려주셨습니다. 사울은 왕이 되어 길보아 산에서 블레셋에게 패배하여 전멸하게 되었습니다.
사울의 등장은 이스라엘 백성의 요구에 의해 시작됩니다. 사무엘상 8장에서 이스라엘은 “다른 나라들처럼 우리도 왕을 세워달라”고 요구했습니다. 그 이유는 외적 위협이 아니라, 자신들의 불안과 욕망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기복, 즉 복을 더 누리고 싶어서 자신들 만의 왕을 원한 것입니다. 사울은 백성의 기복적 사고가 빚어낸 결과물입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하나님은 중심으로 보신다고 했습니다(삼상16:7). 오늘날에도 우리는 ‘기복신앙’ 을 따라 하나님께 묻고 인생의 복을 말씀에서 찾기 보다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보이는 것을 먼저 선택하게 됩니다.
한국 교회는 지난 수십 년간 놀라운 부흥을 경험했습니다.
전쟁의 폐허 속에서 복음이 전해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며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기독교 국가로 성장했습니다. 하지만 그 성장 이면에는 불편한 그림자도 함께 자라났습니다.
바로 기복신앙과 감성 자극 중심의 신앙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감성 중심의 설교, 기적 체험 강조, 현세적 복 강조를 통해 신앙을 유도합니다.
그 결과, 신앙은 진리와 순종이 아닌 감정의 고양과 일시적인 감동으로 바뀌고 있습니다.
“감동은 많은데, 삶은 변화되지 않는다.”
“회개보다는 축복을 구하고, 고난보다는 응답을 원한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신앙은 점점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나 중심’ 으로 변질되고 있습니다.
기복신앙은 하나님을 축복의 수단으로 전락시키게 됩니다.
기복신앙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을 통해 건강, 재물, 성공을 얻고자 하는 태도를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신앙이 아니라 종교적 욕망 소비에 불과합니다.
“헌금하면 복 받는다.”
“기도하면 병이 낫고 사업이 잘 된다.”
물론 하나님은 복을 주시는 분이지만, 신앙의 본질은 ‘십자가를 따르는 삶’이며, 자기를 부인하는 제자의 길입니다. 신앙은 ‘감성’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세워져야’
기독교 신앙은 인간의 감성을 배제하지 않습니다.
눈물도, 감동도, 치유도 중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복음의 전부가 되어선 안 됩니다.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순종, 그리고 일상의 삶 속에서 복음을 실천하는 용기에서 드러납니다.
예수님을 찾아왔던 어느 부자 청년의 이야기는 참된 생명, 영생은 물질에 있지 않음을 분명히 가르칩니다. 즉, 영생은 생명의 주이신 예수님을 따름으로 찾는 것이요, 그를 진정으로 따르기 위해서는 우리가 의지하는 물질을 손에서 비우는 실천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라고 말씀함으로 물질 만을 추구하는 삶이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임을 분명히 가르쳐줍니다(딤전 6: 10).
내가 지금 자신을 지켜줄 왕을 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과 같이 그렇게 세상과 기복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만일 내가 세상 사람들이 추구하는 보이는 물질과 건강과 세상 속의 성취에 집착한다면, 이것으로 인해 내 눈에는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더 가치 있고 영원한 축복의 삶을 도외시 할 뿐 아니라, 현세의 축복이라는 우상을 숭배한다는 점에 기복신앙의 오류가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어제 사랑하는 누님을 보내드리면서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시골의 가난한 농부의 장녀로 태어나 초등학교만 간신히 졸업하고 20세에 불신가정에 시집가서 서울로 가서 온갖 고생을 다하면서도 남매를 키우고 불신남편을 뒷바라지 하면서도 교회에 가서 예배드리는 것을 꾸준히 하며 81세로 생을 마감하기 까지 한 교회를 거의 50년을 다니며 교회궂은일을 하고 비록 청소일을 평생했지만, 그 적은 돈으로도 형제들을 돌보며 그렇게 믿음으로 살았습니다. 비록 그의 겉으로 보이는 인생은 화려하지도 않았지만, 평생 하나님 섬기는 영원한 가치를 붙잡는 복된 삶이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적용) 내가 기대하는 기복신앙은 무엇입니까? 세상의 행복입니까?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까?
2. ‘성품과 재능’이라는 블라인드 서밋을 주의해야 합니다(3~10절).
사울은 아버지 기스의 지시로 잃어버린 암나귀들을 찾으러 사환과 함께 이스라엘의 여러 지역을 헤매다가 결국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갑니다. 이 구절들을 보면 사울은 책임감있는 아들입니다. 아버지의 명령을 따라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먼 길을 떠납니다. 일정시간이 지나자 “아버지가 우리를 걱정할지 모른다”며 아버지를 배려하는 말도 합니다(5절). 또한 사환의 제안도 무시하지 않고 듣습니다. 집으로 돌아가자는 사울의 의견에 사환이 제안하기를, 돌아가는 길에 사무엘 선지자가 사는 곳에 들러 한 번 물어보자고 권합니다. 어디로 가야 암나귀를 찾을 수 있을지 하나님의 사람인 사무엘이 가르쳐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 말에 사울은 거부하지 않고 사환의 말을 듣습니다. 즉 사울은 경청할 줄 아는 리더십을 가졌습니다. 당시로 보면 사환은 계급상 아래였지만, 그의 말 조차도 경청하는 휼륭한 성품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또한 사울은 선지자를 만나기 전에 예물을 챙기려고 합니다. '모처럼 선지자를 만나러 가는데 빈손으로 갈 수야 있나……' 그들은 오랜 여행에 노자도 다 떨어졌습니다. 예물을 마련할 길이 없습니다. 간신히 털어 모은 것이 은 한 세겔의 사분의 일,두 사람은 그것을 가지고 사무엘을 찾아갑니다. 당시 관습에 따라 예의를 갖추려는 기본이 있는 성품입니다. 외적으로 볼 때 사울은 모범 청년, 잠재력있는 지도자입니다. 그의 성실함과 판단력, 겸손함은 매우 바람직안 리더의 자질을 갖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 성품과 재능이 ‘영적 분별력’을 대신할 수 없습니다. 도대체 많은 사람들이 왜 이단에 빠지는 것일까요? 이유는 한 가지입니다. 영적인 분별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할 영적인 능력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자신을 광명의 천사처럼 꾸밉니다. 의의 일꾼처럼 속이는 거짓 일꾼들과 거짓 영적 지도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선과 악이 때로는 너무 유사해서 사람들을 헷갈리게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분별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르게 아는 것이 ‘영적 분별력’입니다. 바로 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게 되고,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주신 축복의 현장인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 영적 분별력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구원이 없음을 아는 것이 영적 분별력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선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선과 악을 어떻게 분별할 수 있을까요? 그 분별함의 기준은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 속에서 다가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성령을 통해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영적 분별력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영입니다. 이 시대를 분별하게 하는 영입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깨닫게 하고 판단하게 하는 영입니다. 나는 성령의 사람입니까? 하나님의 일을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성령을 통해 생각하고 판단하기를 멈추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가장 깊은 곳, 감추어진 것까지도 성령은 통달한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통달한다는 것은, 꿰뚫어 본다는 것입니다. 샅샅이 살펴본다는 뜻입니다. 즉, 성령은 우리가 모든 것에 분별력을 자길 수 있도록 도와줍니다.
사울은 성품과 재능은 뛰어났지만, 영적 분별력이 없었습니다. 즉 영적이지 않았습니다. 믿음이 없었던 것이지요. 그는 나귀를 잃었을 때, 기도하거나 하나님의 뜻을 묻지 않습니다. 선견자에게 가는 것도 자신의 뜻이 아니라 사환의 제안을 통해서 결정합니다. 사울은 사람 보기엔 ‘괜찮은 사람’이지만, 하나님이 보시기엔 ‘보이지 않는 결핍’이 있는 사람입니다. 이는 ‘성품과 재능’이라는 ‘블라인드 서밋’이 줄 수 있는 착시현상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인격이나 능력이 아닌 영적인지 아닌지로 사람을 보십니다. 적용) 내가 사람을 볼 때 성품과 재능이라는 부분에 마음이 갈 때가 있습니까? 중심의 믿음과 신앙을 봅니까?
3. 말씀으로 중심잡는 사람을 보아야 합니다(11~14절).
오늘 본문은 드디어 선견자 사무엘을 만나는 사울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사울과 사환의 시선은 사람을 찾지만, 하나님은 사무엘을 통해 말씀으로 준비시키십니다(15,16절). 전날 하나님께서는 사무엘에게 사울에 대해 미리 계시해 주셨습니다. 내일 베냐민 사람 하나를 보낼 것이니 그에게 기름을 부어 이스라엘의 지도자로 삼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15-16절). 그리고 그가 이스라엘 백성을 블레셋의 압제에서 구원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짖음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임을 밝혀주십니다(16절). 그리고 사무엘이 사울과 마주치는 순간,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그가 바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자임을 알려주셨습니다(17).
사울이 보기에는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줄 수 있을 것이라는 그런 기대감으로 찾아갔지만, 즉 ‘우연처럼 보이는 만남’이지만, 사무엘에게는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있는 ‘섭리의 만남’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지금 하나님의 집 제사를 위해 산당으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그는 단순히 예언자나 점쟁이처럼 사람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자가 아닙니다. 그는 말씀의 질서와 하나님의 계시를 따라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은 백성이 자기 말을 거절하고 왕을 구하고 있지만, 그는 여전한 방식으로 예배를 섬깁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중심을 잡고 움직이는 사람이었습니다.
사무엘이 등장한 사사 시대 말기는 영적, 도덕적 혼란의 시대였습니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고, 각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았습니다(사사기 21:25).
엘리 제사장의 아들들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았고, 제사 제도를 타락시켰습니다(사무엘상 2:12-17).
"여호와의 말씀이 희귀하여 이상이 흔히 보이지 않던 때"였습니다(삼상 3:1).
바로 이 암흑의 시대에 하나님은 한 소년, 사무엘을 부르십니다.
1.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인 사람 (사무엘상 3:1-10) 사무엘은 어릴 때부터 성막에서 엘리 제사장을 섬기며 하나님 앞에서 자랐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것이 하나님의 부르심인지 몰랐습니다. 그러나 엘리의 지도를 통해 “여호와여 말씀하옵소서 주의 종이 듣겠나이다”라고 응답하게 됩니다.
2.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지 않은 사람 (사무엘상 3:11-18)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엘리 집안에 대한 심판의 메시지를 주셨습니다. 이는 어린 사무엘에게 매우 부담스러운 일이었지만, 그는 하나님의 말씀을 숨기지 않고 엘리에게 전했습니다. 3. 하나님의 말씀으로 자라난 사람 (사무엘상 3:19-21) 사무엘은 자라며 여호와께서 함께하시고, 그가 말한 것이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모든 이스라엘이 그를 하나님의 선지자로 인정하게 됩니다. 여호와께서는 계속해서 말씀으로 사무엘에게 나타나셨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심을 잡는 사람은 자기 생각보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는 자세를 갖습니다.
하나님께 마음을 열고 말씀을 듣고자 하는 사람은 결국 하나님의 뜻 안에 서게 됩니다.
말씀이 중심이 된 사람은 진리를 말할 용기와 정직함을 가집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어렵고 부담스러워도,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사람은 그것을 외면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심을 잡는 사람은 말씀과 함께 성장하며,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갑니다.
삶의 기준이 말씀이 될 때, 하나님께서 그 인생을 세우시고 사용하십니다.
사울은 성품도 있고 실천력도 있고 예의도 갖추었지만, ‘말씀을 들을 줄 아는 인생’이 되지 못했습니다. ‘블라인드 서밋’을 넘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또한 보이지 않는 선택의 정점에서 사람이 진짜로 붙잡아야 할 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전해지는 말씀입니다. 적용) 내가 진실로 붙잡아야 할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하나님의 사람을 통해 주어지는 말씀을 붙잡습니까? 외적인 조건이나 성품이나 재능을 붙잡습니까?
[큐티인묵상간증 김*리] [떼 부리지 않는 척]
저는 어릴 적부터 가족에게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 아버지를 무시했습니다. 아버지는 ‘죄인’, 나는 ‘의인’이라고 여겼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가난하고 힘든 상황을 바꿔보고자 세상에서 유력한 사람이 되려고 끊임없이 애썼습니다(1절). 모태신앙으로 교회는 다녔지만 고난에 대한 보상 심리가 있어서 ‘약속의 하나님’보다 ‘전능의 하나님’을 더 바랐습니다. ‘내가 원하는 것은 다 들어주시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런데 대입 재수를 하고, 졸업 후 대학원도 두 차례나 떨어지면서 ‘하나님은 나의 원함을 들어주시지 않는다’고 실망했습니다. 구직과 진로도 내가 원하는 건 하나님이 다 막으신다고 생각하며 삐뚤어진 마음을 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을 묵상할수록 제 안에 끈질기게 구하는 준수한 세상 왕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2절). 인생의 중요한 시기마다 거절의 응답으로 주님을 만나는 최고의 축복을 주셨음에도, 저는 기복신앙으로 눈에 보이는 보상을 더 기대했습니다. ‘수 년동안 성실히 교회 봉사를 했는데 나는 되는 게 없다’며 불평하고, ‘이것만큼은 해주셔야 하지 않을까’하며 한탄했습니다. 반면에 제 주위 사람들은 진로도 결혼도 원하는 대로 되는 것만 같아서 열등감으로 괴로워했습니다.
예수님 없이 유력한 인생만 꿈꾸다 비참히 죽을 뻔한 저를 건져 천국 백성 삼아주신 것에 대한 감사는 잊고, 스스로 준수한 죄인이라 여기며 구원을 행위로 계산하는 악함이 있음을 회개합니다. 기복을 버리지 못하는 모습이 떼 부리는 불신앙임을 반증해주는 제 믿음의 수준을 회개하고 자복합니다. 때마다 거절의 응답으로 세상과 짝하지 못하게 지켜주시고, 별 인생 없음을 알게 하셔서 고난을 약재료 삼는 인생을 살게 하신 주님을 찬양합니다.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허락하신 환경과 사람들을 사랑으로 섬기는 자가 되기를 소원합니다.
적용하기) 일과 관계에서 힘든 일이 찾아와도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며 잠잠히 기도하겠습니다.
공동체를 떠난 소그룹 지체들에게 안부 전화를 하고 큐티 말씀을 나누겠습니다.
결 론
우리를 올바른 길로 이끌 수 있는 것은 외적인 조건이 아니라, 말씀 위에 중심잡은 사람,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며 움직이는 사람,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음성에 반응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바로 우리 자신이 되어야 인생에 닥치는 블라인드 서밋을 올바로 대처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는 사사 시대처럼 혼란스럽고 기준이 무너진 블라인드 서밋과 같은 표지판으로 불안과 염려 속에 이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불안하고 혼란스러워도 외모나 세상이나 기복신앙을 붙들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불안하고 혼란스러워도 성품이나 재능과 같은 스펙을 붙잡지 말아야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으로 중심을 잡을 때, 우리는 블라인드 서밋 표지와 같이 경고하는 세상에서도 방향을 잃지 않고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무엘처럼 듣는 자세, 진실함, 말씀 안에서 자라는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도 하나님 앞에 화려하지는 않지만, 영혼구원의 도구도, 몸된 교회의 기둥과 같은 존재로, 그리고 이 시대를 위해서 늘 기도하는 그런 도구로 쓰임받는 그런 도구가 될 수 있을 줄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