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경해석의 과정
설교자는 먼저 성경 묵상을 통해서 본문을 충분히 파악한다. 그는 묵상한 본문에서 설교할 본문을 선택한다. 이미 성경을 묵상하면서 본문의 내용을 거의 파악하고 내용을 요약하였다. 이제는 성경 묵상하면서 청중의 상황에 맞는 본문을 정해서 성경연구로 확장할 필요가 있다.
필자도 스튜어트 교수가 제시한 성경해석 방법론으로 매번 설교 준비를 하지 못한다. 새벽기도회 설교는 매일성경의 본문으로 전날 밤에 묵상한다. 묵상한 한 내용으로 간단한 설교를 준비해서 10분 설교를 한다. 수요기도회는 성경을 강해하고, 금요기도회는 매일성경의 본문으로 설교하고 있다. 그리고 주일 오전예배 설교는 주로 한 주간의 묵상한 본문 중에서 설교를 작성한다. 그리고 주일 오후예배는 주일의 매일성경 본문으로 나눔을 갖는다. 매일성경을 따라서 설교 본문을 정하니까 설교 본문을 정해야 하는 어려움이 전혀 없다. 또 매일 성경을 묵상하며 얻는 깨달음이 있어서 설교 준비가 즐겁다.
1. 성경해석의 중요성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으면서 본문의 뜻을 잘 파악하지 못한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매일 아침에 모세오경을 읽는다. 그러나 그들은 성경을 기도문으로 읽을 뿐이다. 본문의 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그냥 읽는다. 우리가 이러한 잘못을 하지 않기 위해 본문의 의미를 잘 파악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경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도록 해석되어야 한다.
1) 당신은 읽고 있는 내용을 이해하는가?
예수님은 복음은 예루살렘에서 땅끝까지 전파될 것을 원하셨다. 그렇지만 제자들의 모습은 그렇지 못했다. 두려움에 떨었고 자신감이 없었다. 그렇지만 나약한 제자들이 성령의 이끌림을 받았을 때 상황이 달라졌다. 능력 있는 사람으로 변했을 뿐 아니라, 담대함이 넘쳤다. 이들은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가 바로 당신들이 십자가에 못 박은 그리스도’라고 외쳤다. 그러자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사도들의 발 앞에 무릎을 꿇고 회개했다. 이런 능력이 나타나자 더욱 많은 사람이 모였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유대 지도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했다. 급기야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예루살렘의 성도들이 뿔뿔이 흩어졌다. 흩어짐은 복음전파의 원동력이 되었다.
사도행전 8장에 보면, 빌립은 사마리아로 향하여 갔다. 성령의 이끌림을 받아서 예루살렘에서 가사로 내려가는 길까지 갔다(26절). 거기서 에디오피아 내시를 만나게 되었다. 그는 에디오피아의 재무장관이었다. 그가 성경을 읽고 있다가 빌립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다.
빌립이 “당신은 지금 읽고 있는 내용을 이해합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내시는 정중하게 대답했다.
“지도하는 사람이 없는데 어찌 깨달을 수 있느뇨?”(31절)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잘 보라. 에디오피아의 재무장관은 성경을 읽고 있었지만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도움이 필요했다. 결국 ‘해석’의 과정에 깊이 파묻혀 있었다. 성경 본문을 읽고 던지는 그의 통찰력 있는 질문이 이를 증명해 준다.
“청컨대 묻노니 선지자가 이 말한 것이 누구를 가리킴이뇨. 자기를 가리킴이뇨, 타인을 가리킴이뇨?”(34절)
빌립은 에디오피아의 재무장관에게 본문의 뜻을 깨달을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읽던 성경 본문을 이해하게 된 그는 믿음으로 복음에 반응하였다. 39절은 그가 기뻐하며 고국으로 돌아갔다고 기록했다. 실제로 이 “해석”의 과정이 아프리카가 복음에 눈을 뜨게 하는 데에 큰 공헌을 했다고 볼 수 있다.
2) 해석이란 무엇인가?
해석은 ‘본문이 무슨 의미인가?’를 밝히는 과정이다. 이 해석을 잘 하기 위해서는 좋은 관찰이 먼저 되어야 한다. 저자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를 이해하기 전에는 저자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가를 이해할 수가 없다. 관찰은 건물을 기초를 파내는 작업이다. 건축물을 세울 때 지하 파기 작업이 먼저 이루어진다. 기초를 튼튼히 하기 위해서는 먼저 흙을 파내어야 한다. 관찰을 통해서 기초를 쌓는다. 관찰의 기초 위에 건축물을 세운다. 이것이 해석이다. 건축물은 기초가 얼마나 튼튼한가에 달려 있다. 기초가 튼튼하면 할수록 건물의 구조는 더욱 견고하다.
그러므로 훌륭한 관찰은 곧 훌륭한 해석을 낳는다. 항상 해석을 염두에 두고 본문을 관찰해야 한다. 관찰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다. 관찰은 다만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해석은 본문을 의미를 파악하는 재창조의 과정이다. 우리는 저자들의 신발을 신고 그들의 경험들을 재창조하는 시도를 해 보는 것이다. 바다를 항해하는 선장에게는 지도가 있다. 지도 위에 나침반을 두고 항해를 한다. 성경은 바로 지도와 같은 것이다. 지도는 먼저 경험한 사람이 만들었다. 그들이 먼저 경험하고 살았던 것들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는 항해사가 지도를 보듯이 성경을 보면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게 된다. 그러면 바른길이 보인다. 항해사가 지도를 보면서 같은 길을 가면서도 늘 새롭고 감격적인 일을 경험한다. 항해사가 지도를 만든 사람과 똑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을 해석하면서도 똑같은 경험을 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을 해석하면서 저자의 의도를 다르게 느낀다. 그렇지만 지도를 따라가는 것이 가장 좋은 지름길이다. 그래서 해석의 과정은 “이 본문이 저자에게 무엇을 의미했나”를 찾는 것이다. “이 본문이 나에게 무엇을 의미하나”를 묻는 것은 나중에 할 일이다. 해석은 철저하게 저자의 의도를 밝히는 과정이다.
2. 성경해석의 필요성
성경해석이 왜 필요한가?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 다 이해가 되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다. 성경을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다. 왜냐하면, 성경의 저자와 우리 사이에 큰 장벽이 있기 때문이다. 이 장벽들 때문에 성경을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는 먼저 이 장벽들이 무엇인가를 가려내어 극복해야 한다. 이야기는 간단한데 그 내용이 이해하기가 힘들다.
우리가 100년 전(1919년 3월 1일)에 선포된 독립선언문을 읽으면 이해하기가 참 어렵다. 그 이유는 독립선언문이 고어로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또 우리가 현재 사용하지 않는 한자어를 많이 사용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본강점기 시대의 상황과 오늘 우리가 사는 현실의 괴리가 있다. 독립선언문은 그 시대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시대의 상황을 이해할 때에 내용을 더 잘 파악할 수 있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더 오래된 용비어천가를 읽으면 더욱 어렵다. 오늘 우리가 사는 시대와 많이 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시대와 오늘을 연결하는 성경해석이 필요하다.
1) 언어의 장벽들 때문
외국어를 배우면서 느끼는데 단지 언어를 안다고 말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 구조, 문화 또 그들의 세계관 등을 알아야만 그들의 말하는 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 우리에게 성경의 언어는 외국어(히브리어와 그리스어)이다. 그것도 수천 년 전에 기록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언어들이다. 그러므로 이해하기 힘들 수밖에 없다.
성경을 이해할 때도 마찬가지이다. 히브리어, 그리스어, 아람어의 원어 성경을 번역한 아주 훌륭한 번역본들이 있지만, 성경의 완벽한 이해를 위해서는 부족한 부분들이 있다. 그러기에 성경 사전 등의 보조 자료가 바른 성경해석을 위해 꼭 필요한 도구이다. 우리는 원어 성경으로 돌아가서 원래의 의미를 파악해야 한다. 그리고 번역된 것만으로는 충분히 파악할 수 없는 의미의 세밀한 부분을 끄집어내야만 한다. 이러한 작업이 성경해석이다. 우리는 성경해석을 통해서 원래의 의미를 되살릴 수 있다. 번역은 또 다른 해석이므로 원저자가 선택한 단어의 의미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 성경해석이 필요하다. 또 우리가 성경 언어를 모르기 때문에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내용이 있다. 그래서 성경해석이 필요하다.
2) 문화적 장벽들 때문
언어가 문화의 산물이기 때문에 문화적 장벽은 언어의 장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성경은 우리 문화와는 너무나도 다른 산물이며 표현이다. 또 성경을 각 책끼리도 다른 문화의 산물이며 표현이다. 성경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가를 제대로 파악하고 음미하기 위해서는 통신, 교통수단, 상업, 농업, 생업, 종교, 시대의 사조 등에 관련된 문화적 맥락을 나름대로 재구성해야 한다. 성경의 세계를 이해하여야 성경을 더 바르게 해석할 수 있다.
성경의 문화를 더 잘 이해하기 성경의 세계를 이해해야 한다. 성경이 기록된 고대 근동(초승달 지역)은 서구의 문화와 차이가 크다. 서구의 관점에서 본 성경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로이스 티어베르그는 서구의 문화와 성경 시대의 문화가 차이가 나는 원인을 네 가지로 설명했다.
첫째, 서구의 높은 교육 수준
둘째, 서구의 산업화
셋째, 부유함
넷째, 민주화
이런 요인들로 인해 서구문화권에 속한 사람이 성경을 이해하기에 어려움을 느낀다. 그렇지만 교육 수준이 낮고, 농경사회를 유지하고 있는 가난한 나라들은 아프리카, 아시아, 그리고 남미 일부 지역의 사람들은 성경을 쉽게 이해한다. 그 이유는 성경의 세계가 그들이 문화와 유사한 부분이 많기 때문이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 성서 고고학은 성경해석에 많은 도움이 된다. 그 밖에 성경의 지리를 파악하기 위해 성경이 기록된 땅을 여행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성경 시대에 있었던 사회 문화와 관습에 대해서 아는 것이 성경 해석하기에 도움이 된다.
⚫창세기 2:24 해석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성경 시대의 결혼 관습과 현대의 결혼 풍습은 차이가 난다. 아내는 부모의 집을 떠나 남편의 가족의 일원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아내는 남편의 가족으로 적응해야 한다. 생경한 생활과 시댁의 고유한 풍습을 이해하고 익혀야 한다. 아내는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이를 잘 극복하기 위해 성경은 남편도 아내에게 충성을 다 해야 한다고 언급했다. 그래서 성경은 “이러므로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고 했다.
3) 문학적 장벽들 때문
성경은 다양한 문학적 양식을 내포한다. 구약성경의 아가서는 로마서를 읽듯이 딱딱한 논리를 바탕으로 읽을 것이 아니라 사랑의 노래로 읽어야 한다. 성경은 인간의 다양한 표현 방법을 동원하여 기록했다. 우리가 성경해석을 더 잘하기 위해서는 문학의 양식에 따른 해석을 해야 한다. 성경의 다양한 문학 양식들이 있다. 문학의 장르란 내용, 어조, 혹은 구조에서 유사성을 가지고 있는 그룹을 말한다. 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에는 역사, 법, 시, 지혜, 예언, 복음, 서신, 그리고 계시문학을 만나게 된다. 이러한 다양한 문학적 장르에 따라서 성경을 해석해야 한다. 시편을 해석하는 방법으로 역사서를 해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설교자의 무지함이 용서될 수 없다. ‘무엇을 알아야 면장을 하지’라는 말이 있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이 한다. 성경에 대한 무지함은 설교자에게 용납될 수 없다. 성경을 모르면 자기의 경험을 성도들에게 주입한다. 우리는 이미 성경 묵상을 완료한 본문으로 설교 본문을 정하기 때문에 본문이 매우 친숙할 것이다. 그렇지만 설교자에게 성경해석은 필수적이다. 성경 묵상보다 더 깊은 차원으로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살아가는 현장과 성경 시대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 당시의 언어와 역사, 문화와 관습, 또는 문학 장르와 서술의 차이로 인해 성경이 어렵게 느껴진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성경해석이 필요하다.
▣ 성경의 다양한 문학 양식들 ▣
첫째, 강론
강론이라는 것은 객관적 진리에 대한 직접적인 논리의 전개나 설명을 의미한다. 이는 주로 지성에 호소하는 문학의 양식이다. 논리의 전개는 일반적으로 요점들을 지적해 나가는 꽉 짜여진 구조를 지니고 있다.
둘째, 이야기와 전기
성경에는 수많은 이야기(내러티브)가 담겨 있다. 이것이 성경이 인기 있는 책이 된 한 이유일 것이다.
셋째, 비유
“이야기”와 아주 가까운 관계에 놓여 있는 것은 “비유”와 그 사촌격인 “우화”이다. 비유는 도덕적인 교훈을 주는 짧은 이야기이다. 성경에 나타난 “비유”의 대부분은 예수님의 가르침 중에 있다. 실상, 마태복음에 의하면, “비유”는 주님께서 좋아하셨던 교훈 방법이다(마 13:34).
넷째, 시
성경에는 가장 훌륭한 시구들도 담겨져 있다. 실제로 어떤 시들은 이미 우리 삶 속에 깊이 박혀버린 것이 되었다. 예를 들면 시편 23편 1절이다.
다섯째, 잠언과 지혜문학
성경의 여러 부분 중 가장 풍부한 금광 가운데 하는 “지혜문학”이라고 알려진 부분이다. 이 문학의 양식에서 저자는 지혜가 풍성한 인생의 노장으로서 아직 젊고 경험은 없지만, 배울 자세가 되어 있는 자들에게 자신의 통찰력을 나누어준다.
여섯째, 예언과 묵시(계시)
가장 도전이 될 만한 성경에 나타나는 문학의 양식은 예언적인 부분이다. “예언”이라고 하면 단지 미래를 예측하는 예언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물론 예언서들은 앞을 내다보고 있다. 그러나 더욱 드러나는 특징은 경고와 심판의 어조이며, 하나님의 직접 계시를 나타내는 “여호와의 말씀이 임하니라”와 같은 관용적인 표현이다. 성경에서 예언서의 기능은 미래에 관한 것을 얘기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주의 말씀을 선포하는 것이다.
4) 의사소통의 장벽들 때문
우리 속담에 “소의 귀에 경 읽기”라는 말이 있다. 아무리 훈계를 하여도 알아듣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아시지만 인간은 다 알지 못한다. 하나님의 뜻을 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 해석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해석이 100% 완벽한 것은 아니다.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는 곳이 한, 두 곳이 아니다. 어떤 부분은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한 목사님이 식당에서 생선을 먹고 있었다. 그때 한 무신론자가 목사님을 골탕 먹이려고 말을 걸었다.
“목사님은 성경을 다 믿으시나요?”
“물론이지요.”
“아니, 성경의 모든 내용을 다 믿으신다구요?”
“구구절절이요”
“그러면 성경에서 해석하기 어려운 부분이 있나요?”
“예, 제가 설명할 수 없는 부분이 한, 두 곳이 아니죠.”
그러면서 목사님은 성경의 의문이 되는 부분에 물음표 한 곳을 보여주었다. 그러자 무신론자는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예? 그 이해할 수 없는 부분들은 어떻게 하세요?”
“매우 간단하죠”
목사님은 “나는 지금 내가 먹고 있는 이 생선을 먹을 때와 똑같이 합니다. 생선의 살 부분만 먹고 뼈는 발라서 옆으로 치워둡니다. 어리석은 사람은 혹시 그 뼈까지 먹으려다가 목에 걸려 고생하게 될지도 모르죠”라고 대답했다.
성경을 공부하다가 해결하기 어렵고 답하기 어려운 문제들에 얽매여서는 안 된다. 영원한 구원과 매일의 삶에 관해 하나님께서 당신이 알기 원하시는 필수적인 것들을 이해할 수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에게 주어진 기적인 것이다. 내가 이해하지 못한다고 틀린 것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것일 뿐이다. 모르는 것은 더 연구하면 알 수 있다. 모르는 것이 틀린 것이 아니다.
3. 성경 본문 해석(본문비평)
성경 묵상을 하면서 설교할 본문을 정했으면 성경해석을 한다. 성경해석은 숲을 보면서 나무 한 그루, 한 그루를 살펴보아야 한다. 성경은 하나의 큰 이야기이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구슬로 연결되어 있다. 그것을 한 부분만 떼어내어 설교한대 해도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해석해야 하고 설교해야 한다. 숲만 보면 나무의 실체를 모를 수 없고, 나무만 보면 숲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다. 그래서 성경해석은 숲을 보면서 한 그루의 나무도 놓치지 않는 깊고 세밀하게 연구하여야 한다.
설교자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성경을 해석하면 엉뚱한 방향으로 해석하게 된다. 이단들의 주장을 들어보라. 그들은 어떤 구절들을 문맥에서 떼어내어 자기의 신조를 옹호하는 데 사용하고선 성경의 나머지 가르침은 무시하며, 자기들이 주장하는 “진리”(?)가 성경에서 가르치는 진리라고 우긴다. 설교자가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성경을 해석하면 이런 잘못을 하게 된다. 또 성경을 연구할 때에 자기가 속한 사회나 문화의 가치관을 토대로 성경을 해석한다.
성경 어디에도 자본주의나 사회주의에 대해서 언급하지 않는다. 남미의 해방신학자나 민중신학 신봉자들은 자신들의 정치적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성경을 이용하기도 한다. 한 번 더 강조하지만, 자신의 경험에 비추어 성경을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성경에서 발견하려는 유혹을 버리고 자신의 경험을 성경에 비추어 해석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내가 성경을 해석하기보다 성경이 나를 해석하도록 자신의 모든 것을 노출해야만 바른 성경해석을 할 수 있다. 그리고 성경해석을 통해서 원저자의 뜻을 살펴야 한다. 성경해석자가 자기중심으로 성경을 해석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것은 성경해석의 실패이다.
1) 저자의 의도 파악
성경의 저자는 삼위일체의 하나님이다. 성경은 인간의 세상에서 하나님이 행한 일을 기록했다. 그러므로 다분히 하나님의 의도가 담긴 메시지이다. 우리는 성경을 원저자의 의도를 파악하고 해석해야 한다. 물론 성경을 해석할 때에 합리적 의문이 필요하다. 그러나 저자의 의도를 벗어나면 올바른 해석이라 할 수 없다. 저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청중을 요구에 얽매이거나 설교자의 의도에 맞추어서 해석하지 않아야 한다.
인간의 욕구는 ‘자기중심적으로 살아라’는 것이다. 사탄도 이것을 이용하여 인간을 흔든다. 하나님을 의심하게 하고 인간을 높이려고 한다. 설교자의 위험도 이런 숨겨진 의도가 있다. 성경 본문에서 하나님이 하시는 말을 듣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하려고 한다. 저 장로가 들어서 깨어져야 할 말을 하고 싶어 한다. 이것은 나쁜 의도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을 나의 손바닥 안에 머물게 하지 말고 내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에 붙들려 사용되어야 한다. 성경해석은 텍스트를 통해서 하나님이 무슨 말을 하시는가를 발견할 뿐만 아니라 나의 생활 현장에서 들려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성경해석을 할 때 항상 듣는 마음이 준비되어야 한다. 솔로몬이 기브온 산당에서 하나님에게 요구한 것이 “듣는 마음”이었다.
2) 성경의 숲
목회자는 성경으로 밥을 먹고 살아야 한다. 성경을 모르면서 설교를 할 수가 없다. 총신신대원에서 설교학을 배울 때에 성경대로 설교하게 했다. 설교학 시험이 성경 암송이었지 아마! 성경 구절이 성경의 어디에 있는지를 밝히는 것이었다. 성경 묵상을 지속으로 하게 되면 성경해석은 저절로 된다. 학문적인 해석이라기보다 성경의 이치를 깨우치며 성경의 원리를 터득하게 된다. 이처럼 목회자는 성경 안에서 성경을 해석하는 훈련이 우선되어야 한다.
먼저 성경 전체의 문맥을 짚어낼 수 있어야 한다. 창세기에서 계시록까지 성경 전체의 문맥을 꿰뚫고 있어야 한다. 성경의 맥을 짚어낼 수 있도록 성경을 알고 있어야 한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 각 권의 개요와 흐름을 숙지해야 한다. 그리고 성경의 권마다 개요와 주제를 파악해야 한다. 성경을 묵상하게 되면 이런 작업은 저절로 이루어진다. 눈을 감고서도 성경을 넘길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성경 전체를 한 주제로 연결하라(창세기에서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의 문맥을 파악하라.
▪성경 각 권의 개요를 숙지하라.
▪성경 본문의 앞뒤 부분과 연결하라.
3) 성경의 나무
모든 설교자는 성경이 역사의 산물인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은 역사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그러므로 성경 본문에서 의미를 찾아야 한다. 어떤 설교자는 성경 구절들을 나열해서 설교한다. 그런 설교는 하나님이 말하려는 것과 다른 설교가 될 수 있다. 하나님은 역사의 사건에서 말과 행동을 하였다. 그것이 성경에 기록되었다.
그래서 설교자는 설교할 본문을 정하고 성경 본문을 더 깊게 연구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본문에 반복되거나 중요한 단어 연구를 한다. 사전적인 의미와 역사적인 의미나 현재적인 의미를 넘나들면서 본문에 적합한 의미를 파악한다. 그리고 설교 본문의 문법과 구조를 살펴보자. 또 성경이 기록된 언어(히브리어와 그리스어)와 다른 번역본들을 비교하면서 더 깊이 연구하자. 번역본을 비교하여 차이가 나는 단어들이 있을 것이다. 그 이유를 살펴보고 더 적합한 번역을 시도하자. 설교를 준비할 때마다 조금씩 노력하면 낙수물에 바위가 패이고, 가랑비에 나그네의 옷이 젖듯이 실력이 부쩍 올라갈 것이다.
나무를 살펴보면서도 절대로 잊지 말아야 할 것인 나무는 숲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다. 설교자가 나무만 보고 설교하려는 유혹이 있다. 설교 본문과 상관없이 단어만 따서 연역적으로 설교를 한다. 그것은 설교를 쉽게 하려는 유혹이다. 그런 설교를 하더라고 설교 본문은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그것이 설교자의 양심이고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성경은 없고 설교자만 드러나는 설교가 되어서는 안 된다. 설교자는 하나님의 행동을 드러내는 도구일 뿐이다.
▪단어를 연구하라.
▪문법을 파악하라.
▪구조를 파악하라.
4) 성경 번역
성경의 언어로 이해하고 파악하면 좋겠는데 그것이 어려우면 자료를 이용해야 한다. 요즘은 컴퓨터로 활용할 수 있는 성경 자료가 많이 있다. 그것을 활용해서 히브리어와 그리스어로 된 원어 성경을 읽고 연구할 수 있다.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누구나 원어로 성경을 읽을 수 있다. 누구나 큰마음을 먹고 도전하면 할 수 있다.
그리고 다른 번역본들을 비교하면서 해석의 차이를 연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이것이 어려우면 한글로 된 성경도 많이 번역되었다. 그것들만 비교해도 성경해석에 많은 도움이 된다. 마지막으로 설교 본문을 자신이 직접 번역해 보는 것이 설교에 엄청난 도움이 된다. 성경 본문해석의 최고 정점이 개인의 성경 번역이다. 설교자 자신이 성경 본문을 직접 번역함으로 성경의 이해를 마무리한다.
▪번역본 비교하라.
▪본문비평으로 번역하라.
▪개인적으로 번역하라.
4. 성경 배경연구
성경은 우리와 매우 다른 시대와 문화 속에서 기록되었다. 그래서 저자가 말하고자 했던 바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저자와 동시대에 사람인 것처럼 생각하고 성경을 읽고 연구해야 한다. 다른 말로 하면 성경 속의 시대와 그 상황 속에서 일어나는 콘텍스트를 먼저 이해하여야 한다. 이를 위해 주석이나 다른 책들을 참고하여 연구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시편 23:1의 목자의 개념을 알려면, 먼저 그 시대의 유목민 생활을 이해하여야 한다. 고대 중근동 지역에서는 왕들이 자신을 백성들의 “목자”라고 불렀다. 성경 속의 콘텍스트에서 하나님은 왕이신 우리의 목자이다. 목자의 비유를 통해서 그 시대의 유목 생활과 목자를 연구한다. 또 목자와 양의 관계를 살펴야 한다. 우리는 성경 시대의 유목 생활과 전혀 다른 환경에서 살고 있다.
1) 역사, 지리적 배경
성경은 역사의 현장에서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이다. 그런데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기록된 성경뿐이다. 그래서 성경을 해석할 때에 그 시대의 역사, 지리적인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은 인간의 역사 안에서 함께 하셨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찾아야 한다. 구약성경은 이스라엘 역사를 통해서 기록되었다. 설교자는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 역사와 고대 근동의 역사를 이해하여야 한다. 남쪽의 이집트와 북쪽의 아람, 앗수르, 바벨론, 페르시아, 그리스, 그리고 로마까지 거의 세계사를 섭렵해야 한다.
성경은 지리와 역사적인 배경으로 기록되었다. 어떤 분이 베냐민 지파가 분배 받은 땅을 설명하면서 그 땅은 척박한 산지라고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을 방문해 보면 베냐민이 차지한 땅은 좁은 지역이지만(남북길이 25km) 고산 평원으로 형성되었다. 그렇지만 유다 지파와 요셉(에브라임과 므낫세)지파가 차지한 땅은 산지였다. 두 강력한 지파 사이의 완충지대에 있던 베냐민 지파가 차지한 땅은 고산 평원의 비옥한 평지였다. 그래서 이스라엘 왕국 초기는 베냐민 땅이 왕국의 중심지였다.
이처럼 성경의 지리적인 배경을 모르면 엉뚱한 해석이 되기도 한다. 성경의 역사 지리적인 배경을 공부하기 위해 성경이 기록된 땅을 답사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백 번 듣는 것보다 눈으로 한 번 직접 보고 확인하는 것이 훨씬 더 좋다고 했다. 성경의 땅을 답사하게 되면 성경을 볼 때 성경이 그림책으로 보인다. 슬라이드로 보는 것보다 동영상으로 보면 더 좋은 것과 같다.
2) 사회, 문화적 배경
성경 시대의 문화와 관습은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와 전혀 다르다. 그 시대의 문화를 이해하면 더 좋은 성경해석을 할 수 있다. 성경 시대에는 유목 생활을 했다. 그들은 이동하면서 생활했던 민족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유목민의 삶을 경험하지 못했다. 또 유목민에게는 목자와 양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이다. 시편 23편 1절은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이때 우리가 받는 느낌은 그들과 많은 차이가 있다. 또 세례요한이 예수님을 가리켜서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이라고 했을 때 개념은 다를 것이다. 그들은 사회 문화와 관습에서 내려온 오린 전통이 있다. 그래서 성경은 사회 문화적인 배경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옛날 할머니는 예배당에 갈 때 다리미를 돈을 다려서 헌금했다. 이 전통으로 헌금은 항상 새 돈으로 한다. 그런데 요즘 세대는 헌금을 은행 계좌로 보낸다. 예배당에 성경책이 비치되어 있고, 영상으로 성경 본문과 찬송을 보여주기 때문에 성경책도 필요하지 않다. 그냥 덜렁덜렁 예배당에 가서 예배드린다. 옛날 어른들이 이런 모습으로 예배당에 가고 예배드리는 것을 보면 혼쭐을 낼 것이다. 그러나 문화를 생물이라서 시대에 따라 달라진다. 성경 시대에 있는 사회 문화는 그 당시의 지역에서 발생한 것이다. 성경이 그런 문화에서 생성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성경 시대의 사회 문화적인 배경에서 성경을 해석할 필요가 있다.
마태복음 13장의 씨 뿌리는 비유는 현대의 농경사회에서는 볼 수 없는 광경이다. 그러나 성경이 기록될 시대에는 그렇게 씨를 뿌렸다. 고산에서 화전을 이루며 사는 사람들도 먼저 씨를 뿌리고 밭을 일구었다고 한다. 그것을 밭을 일구어 씨를 뿌리는 노동을 줄이는 방법이다. 또 돌이 많은 산에서 밭을 일구고 씨를 뿌릴 수 없는 환경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씨를 뿌리는 것이다. 농경 문화를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씨 뿌리는 환경을 선뜻 이해하지 못한다.
5. 성경해석과 신학
나의 성경해석이 다른 성경에서는 어떻게 이야기하고 있는가? 성경은 성경으로 해석되어야 한다는 말을 한다. 성경해석은 신학적으로 오류가 없어야 한다. 많은 이단이 성경해석의 오류에서 비롯되었다. 물론 그들은 아전인수(我田引水)격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그들은 신학을 무시하고 교주의 말만 믿는 교조주의에 빠져 있다.
그들은 성경을 전체적으로 보지 않고 한 구절, 한 면으로만 보고 자기들의 교리를 세우고 체계화하였다. 이런 잘못된 오류들은 기성교회에 대한 거짓된 비판과 함께 자신들의 교리를 옹호하는 수단으로 사용된다. 결국에는 그들의 교리가 교회를 파탄시키는 사탄의 노리개로 전락하게 된다. 성경은 한 주제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큰 이야기이다.
1) 성경의 틀
아무리 뛰어난 성경해석자라도 성경을 벗어나면 자기중심적인 해석을 하게 된다. 매우 위험하다. 주관적 판단이 객관적이고 보편적인 논리에 적합하지 않으면 이단이 된다. 이들의 주장은 성경과 신학을 벗어난 성경해석을 서슴지 않고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독선적이고 철저하게 교주 중심이기 때문이다. 성경해석은 성경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아야 한다. 성경의 틀 안에서 성경해석을 해야 한다. 선택된 본문이 다른 성경에서는 어떻게 인용되거나 해석되고 있는가? 서로 충돌하지 않는가? 성경 묵상을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주로 선택된 본문에 매몰되는 경우가 있다. 성경 전체의 틀 안에서 본문을 묵상하고 해석하지 않는다. 숲 안에 있는 나무를 보아야 한다.
2) 신학의 범주
성경의 다양한 본문의 가르침을 전체적으로 일맥상통하게 연결하는 것은 단순하지 않다. 서로 상충 되는 본문의 내용이 있다. 바벨론 포로에서 귀환한 자들의 이혼에 대한 본문(에스라 느헤미야)과 복음서의 내용과 차이가 나는 것을 발견한다. 로마서 13장과 요한계시록의 국가에 대한 묘사가 차이가 있다. 예수님이 세리와 창기들과 어울리며 그들의 친구라는 본문과 하나님의 백성은 죄인들과 떨어져 분리되어 거룩한 성결을 유지해야 한다는 본문과는 긴장이 있다. 이처럼 서로 상충 되는 본문을 해석할 때에 조직신학의 도움을 받을 필요가 있다. 설교자는 선택된 본문의 원리를 성경 전체의 원리에 부합되게 해석해야 할 책임이 있다.
설교자는 성경 신학에 익숙해야 한다. 신학은 성경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뼈대이다. 그 뼈대가 바르지 서지 못하면 심각한 장애를 겪을 수밖에 없다. 신학이 삐뚤어졌거나 왜곡되어 있으면 성경을 전혀 다르게 엉뚱한 해석을 하게 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에스라처럼 성경신학자로 성경에 익숙할 뿐만 아니라, 성경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어야 한다(스 7:10). 성경에 정통한 그가 예루살렘으로 가자고 이스라엘 백성을 설득했을 때 그들은 에스라를 따라서 유다로 귀환했다.
6. 성경해석의 주의할 점
하루는 집에서 쉬고 있는데 여호와의 증인이 찾아왔다. 자신이 교회에 10년 동안 다녔다고 하면서 잘난 체를 했다. 그분을 집으로 들어오시라고 해서 식탁에 앉아서 성경을 폈다. 자신이 아는 성경을 들고 여호와의 증인 교리를 설명하였다. 그래서 내가 성경을 들고 자세하게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다시는 찾아오지 않았다. 우리 주위에 성경을 잘못 해석해서 문제가 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 바르게 알지 못하니까 이단으로 간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15에서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며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고 격려했다. 교회의 설교자는 끊임없이 성경을 연구하여 해석하여야 한다. 또 그것을 성도들에게 가르치고 설교를 해야 한다. 성경해석은 일평생 해야 할 일이다. 이러한 성경을 해석할 때에 조심해야 할 여섯 개의 함정에 대해서 살펴보자.
1) 본문을 틀리게 읽는 것
만일 본문을 정확히 읽지 않거나 정확히 읽을 수 없다면 성경의 올바른 이해를 기대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내가 곧 길이요”(요 14:6)라고 말씀하셨는데 만일 “나는 한 길이요”라고 읽으면 틀리게 읽은 것이다. “아버지가 방에 들어가신다.”에서 띄어쓰기를 잘못하여서 “아버지 가방에 들어간다”로 읽을 수 있다. 그러면 전형 엉뚱한 해석이 된다. 성경해석의 가장 기본은 성경을 정확하게 읽는 것이다.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딤전 6:10)를 “돈은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로 읽으면 본문을 틀리게 읽은 결과가 된다. 돈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단지 돈은 하나님의 복이다. 그런데 돈을 주신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이다. 성경을 이렇게 기록했다. 그런데 돈이 악의 뿌리라고 읽는다.
또 시편 37:4에 “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리로다”로 되어 있는데, 성경의 앞부분을 빼버리고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주시리로다”의 부분에만 관심을 쏟으면 이것도 본문을 틀리게 읽는 경우가 된다.
빌립보서 4:13에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를 강조하면 성경을 자기중심으로 해석하는 긍정 신학이 된다. 바울의 고백은 하나님의 능력을 받지 않으면 우리 자신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했다. 바울은 인간 중심의 긍정 신학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능력을 주시는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성경해석의 가장 기본은 성경을 정확하게 읽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말씀이라도 성경을 제대로 읽지 않으면 엉뚱한 해석이 된다.
2) 성경을 왜곡하는 것
베드로후서 3:16을 비추어 보면, 사도 베드로도 성경을 다 해석하지 못하는 어려움이 있었음을 말했다.
“또 그 모든 편지에도 이런 일에 관하여 말하였으되, 그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말씀을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과 말씀의 의미를 왜곡하는 것은 전혀 다른 것이다. 이 점은 상당히 중요하다. 잘못하면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확하게 생활에 적용할 수 있도록, 또 영적 유익을 얻을 수 있도록 성경을 해석하는 방법을 배워야 할 필요가 있다.
3) 본문에 모순되는 해석
본문을 거슬리거나 삐딱하게 해석하는 것은 왜곡하는 것보다 더욱 잘못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을 거짓말쟁이로 만들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에덴동산에 나타난 사단이다.
뱀이 여자에게 물어 가로되,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더러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 여자가 뱀에게 말하되, “동산 나무의 실과를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는 만지지도 말라. 그리하면 죽으리라’고 하셨다.”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1-4).
이는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하신 말씀과 정면으로 상충 되고 있다(창 2:16-17). 예수님께서 사단을 거짓말쟁이요 거짓말의 아버지라고 부르신 것은 너무나도 당연하다. 사단은 역사의 시작 때부터 거짓말을 해오고 있으며, 오늘날도 사람에게 성경의 본문에 모순되는 해석을 하도록 부추김으로 그는 거짓말을 계속하고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정하지 않으면 바르게 성경을 해석할 수 없다.
4) 주관적 해석
성경을 해석할 때에 신비적인 요소가 가미될 때가 있다. 이성과 상식의 범주를 쉽게 이탈한 자기 주관으로 성경을 해석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감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에는 잘못된 것이 없다. 그러나 본문의 의미는 본문 속에 있다. 성경을 해석하면서 본문의 의미를 본문에 대한 주관적인 반응을 개입한다. 그것은 바른 해석이 아니다. 결단코 자신의 경험으로 성경을 해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
5) 상대주의적 해석
어떤 사람들은 세월이 지남에 따라 성경의 의미도 바뀐다고 단정하고 성경을 대한다. 성경이 기록되었을 당시의 의미와 오늘날의 의미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 의미는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예로 들어보자. 프랭크 모리슨(Frank Morison)이 지적했듯이 예수님의 승천 후에 제자들이 보여준 그들의 행동의 변화는 그들이 실제의 몸을 가지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보았기 때문이라는 것 외에 달리 설명할 길이 없을 것이다. 이것이 곧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말하고 있는 바이다. 어떤 사람들은 바울이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하여 말하고 있음은 인정하지만,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는 그것이 소위 “영적 부활” 다시 말해 “새 생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에게 있어서는 예수는 “자기들의 마음속에 살아 있었던 까닭에 예수가 실제로 죽음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 무덤 밖으로 걸어 나왔건 말건, 그것은 전혀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상대주의적 성경해석이다.
6) 지나친 자신감
인생에서와 마찬가지로 성경을 연구할 때 교만은 실패의 지름길이다. 성경의 한 부분을 완전히 섭렵했다고 자부하는 순간, 당신은 곧바로 곤두박질하게 될 것이다. 그 이유는 “지식은 인간을 교만하게 하기” 때문이다(고전 8:1). 또 오만해지거나 배우려는 겸손한 자세를 잃게 된다. 교리의 오용은 자신이 본문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라고 우기게 될 때 발생한다. 이런 습관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 앞에 겸손하게 구해야 한다. "성경 안에 답이 있다"라는 확신으로 성경을 연구하고 설교해야 한다.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콤한 맛을 느끼지 못하고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꿀의 달콤함을 생생하게 말할 수 있을까?
성경해석은 끝이 없다. 본문을 완전히 파악하고 이해해서 “자, 이제는 그 본문에 관한 문제가 전혀 없어! 난 이제 완벽하게 알아!”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은 절대로 오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계속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