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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xTswKRfTLdA&t=486s
2025.5.25(주일) 사무엘상 16:1~23 ‘하나님이 찾으시고 세우시는 일꾼’
요즘 거리마다 현수막이 걸려 있고, 방송마다 후보들의 공약이 나오고, 지역 곳곳에서는 각각의 후보를 지원하는 사람들의 율동과 마이크를 든 유세차가 다니고 있습니다.
오는 6월 3일,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어갈 대통령을 뽑는 선거가 있기 때문입니다.
각 후보들은 자기 자신만이 대한민국을 이끌 적임자임을 강조합니다.
“정직하겠습니다.”
“국민을 위해 헌신하겠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만들겠습니다.”
국민의 선택을 받기 위해, 여러 사람들의 눈에 들기 위해 그들은 많은 것을 준비합니다. 경력, 실적, 이미지, 말솜씨, 심지어는 표정을 연습하기도 합니다.
왜일까요? 사람은 ‘겉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다양한 지도자와 일꾼들을 만납니다. 회사에는 사장이 있고, 학교에는 교장이 있으며, 나라에는 대통령이 있습니다. 가정과 교회에도 리더가 있습니다.
세상은 스펙을 봅니다. 세상은 그의 능력, 말솜씨, 재력, 외모, 학벌, 배경을 기준으로 일꾼을 선택하지만, 하나님은 전혀 다른 기준으로 일꾼을 찾으시고 세우십니다. 오늘 본문 사무엘상 16장은 우리에게 충격적인 메시지를 줍니다. 사울이라는 이스라엘의 초대왕은 외모도 뛰어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지만,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하나님께 버림을 받았습니다. 반대로 들판에서 양을 치던 한 소년, 다윗은 하나님께 선택을 받아 이스라엘의 왕으로 기름부음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목동인 다윗에게 이스라엘 왕으로 기름부으시는 오늘 본문의 장면을 통해, 하나님은 어떤 사람을 찾아서 어떤 기준으로 당신의 일꾼으로 세우시는지는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 자신도 이 기준을 명확히 알고 하나님이 찾아 세우시는 일꾼으로 준비되어야 함을 깨닫게 됩니다.
1.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자입니다(1~5절).
하나님이 찾으시고 세우시는 일꾼은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순종하는 자입니다. 하나님께서 불순종하는 초대왕 사울을 버리셨습니다. 이로 인해 사무엘은 슬픔에 빠져 있습니다. 1절에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이미 사울을 버려 이스라엘 왕이 되지 못하게 하였거늘 네가 그를 위하여 언제까지 슬퍼하겠느냐”라고 하십니다.
사무엘이 사울이 버림받은 것을 보고 슬퍼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설명할 수 있습니다:
1) 사무엘의 깊은 사역적 책임감 때문에 슬퍼했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기름 부어 왕으로 세운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사울을 선택했기 때문에, 사울의 실패는 곧 자신의 사역 실패처럼 여겨졌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사울이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함으로 인해 버림받게 되자, 사무엘은 하나님 앞에서 큰 책임감을 느끼며 슬퍼했던 것입니다.
2) 사울과의 인간적인 정과 기대 때문에 슬퍼했던 것입니다. 사울은 외적으로나 능력 면에서 당대 최고의 인물처럼 보였고(사무엘상 9:2), 초기에 겸손하게 왕위에 올랐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에게 인간적인 애정과 나라를 잘 이끌어 주리라는 소박한 기대를 품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잘 되기를 바랐고, 이스라엘을 잘 다스리는 왕이 되기를 소망했지만, 결국 그 기대를 저버리고 하나님께 버림받게 되었기에 사무엘은 애통한 마음을 품게 됩니다.
3) 이스라엘을 위한 슬픔 때문이었습니다. 사무엘은 이스라엘의 선지자로서 이스라엘 전체의 영적 상태와 장래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왕이 버림받았다는 것은 나라 전체가 혼란에 빠질 수 있다는 위기의 신호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스라엘의 미래에 대한 걱정과 슬픔도 함께 가졌을 것입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왕으로 인해 슬퍼한 이유에 대해서 살펴보았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주로 슬퍼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저와 여러분의 삶을 비교해 보면서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슬퍼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습니다:
1)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 손실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에게 가장 큰 슬픔은 사랑하는 이와의 관계가 끊어질 때 찾아옵니다. 이는 죽음뿐 아니라 배신, 이별, 갈등 등을 포함합니다. 사무엘이 사울과의 관계, 그리고 그에 대한 기대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슬퍼했던 것처럼, 우리도 관계의 상실에서 큰 슬픔을 겪습니다.
2) 자신의 기대와 현실의 괴리 때문입니다. 자신이 세운 계획이나 기대가 무너질 때 사람은 슬퍼합니다. 이는 진학, 직장, 결혼, 자녀 등 인생의 다양한 영역에서 나타납니다. 사무엘도 ‘이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이룰 것’이라는 사울에 대한 기대가 무너졌기에 큰 실망과 슬픔을 느꼈던 것입니다.
3) 자책과 후회 때문입니다. 사람은 일반적으로 자신의 선택이나 행동이 불러온 결과를 보며 자책하고 슬퍼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사무엘은 사울을 왕으로 세운 장본인이었기에 그의 실패를 자신의 실패로 받아들였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저의 슬픔도 이 중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제 하나님은 사울이 버림 받은 것을 보며 슬퍼하고 있는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베들레헴 사람 이새의 아들 중 한 사람을 왕으로 보았다고 말씀하시면 뿔에 기름을 채워 가지고 가라고 말씀하십니다(1절).
그런데 이 일은 현재 왕인 사울의 입장에서 ‘반역’이므로 사무엘은 이 일을 순종함에 있어서 죽음을 각오해야 했습니다(2절). 사무엘상 16장 2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사무엘이 이르되 내가 어찌 갈 수 있으리이까? 사울이 들으면 나를 죽이리이다 하니“
사무엘이 사울을 두려워했던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사울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폭력적인 성향을 보였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사울은 앞서 아말렉과의 전쟁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전리품을 탐하는 등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자신의 뜻과 욕심을 따랐습니다(사무엘상 15장). 사무엘이 그런 사울을 책망하자, 그는 겉으로는 회개하는 듯 보였지만 내심 불편함과 사무엘에 대한 반발심을 품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런 성향을 가진 사울왕이 자신이 폐위될 수도 있는 위협을 감지하게 되면, 사무엘에게 물리적 위협을 가할 수 있다는 생각이 사무엘에게는 있었고 그러한 생각은 매우 현실적이었습니다.
2) 새로운 왕에게 현재 있는 왕과 상의 없이 몰래 기름 붓는 일은 반역 행위로 간주될 수 있었습니다.
왕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람에게 기름을 부어 '하나님의 왕'으로 인정하는 행위는, 당시 정치· 사회 구조에서 명백한 반역 행위로 간주될 수 있었습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으로 차기 왕에게 기름부으러 간다는 소문이 사울의 귀에 들어가면, 그는 정치적 위협을 느끼고 사무엘을 죽이려 들 수 있었던 것입니다.
3) 사울은 이미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상태였고, 불안정한 통치자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 버림받은 자는 그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떨어지기 때문에 영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불안해지기 쉽습니다. 사무엘상 16장 후반에 보면, 사울은 악령에 시달립니다. 이처럼 사울이 매우 불안정하고 충동적인 반응을 보일 수 있다는 점에서 사무엘은 이 일을 순종함에 더욱 더 두려움을 느꼈을 것입니다.
그런 사울의 반응을 보고 하나님은 사무엘을 책망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배려하시고 지혜로운 방법을 제시합니다. 배려~ 참으로 중요하지요. 배려는 상대방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것입니다. 그럴 수 있겠다고 품어주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해결책도 제시해주십니다.
“너는 암송아지를 끌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여호와께 제사하러 왔다' 하라.”
이것은 단순한 '거짓말'이 아니라, 기름 부음을 포함한 제사 행위 자체가 실제로 이뤄지는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일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자신의 일을 이루시기 위해 사무엘에게 현실적인 방식과 안전장치를 제공하신 것입니다.
이런 하나님의 배려 덕분에 사무엘은 두려움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러 간다고 하고, 새 왕에게 기름을 부으러 길을 떠납니다. 이 길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믿음의 길이며, 순종의 길입니다. 사무엘은 이 일의 결과를 알지 못했지만, 이 일로 다윗 왕조가 시작될 것입니다. 또한 이 일은 곧 다윗의 후손으로 오실 메시야 예수님의 평강을 준비하는 순종입니다.
사무엘은 사울의 실패로 인해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슬픔에 머물지 말고 하나님의 새로운 뜻을 따르라고 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말씀하십니다. 과거의 실패나 상실과 두려움에 갇혀 있지 말고, 하나님의 새 뜻을 향해 순종의 길로 나아가라고 말씀하시고, 또한 그런 사람을 찾으시고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하나님은 슬퍼하는 사람을 외면하지도 않지만, 그러한 슬픔에만 머물러 있는 사람을 통해 새 일을 이루시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현실의 슬픔을 딛고 순종의 걸음을 내딛는 사람을 통해 새 일을 시작하십니다.
사무엘은 현실적인 위험을 인식했고,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는 것이 생명의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사무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종의 길을 걸어갑니다.
▶️ 하나님은 슬픔과 두려움이 없는 사람을 찾는 것이 아니라, 슬픔과 두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사람을 찾으시고 세워주십니다.
또한 한 걸음씩 순종할 때 길을 열어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사무엘이 여호와의 말씀대로 행하여 베들레헴에 이르매…” (4절)
사무엘은 하나님께서 지시하신 대로 제사의 명분을 가지고 이새의 집으로 갑니다.
그는 왕을 세우시는 하나님의 모든 계획을 다 알지 못한 채, 하나님의 말씀 한 걸음을 따라간 것입니다.
▶️ 하나님은 완전한 계획을 다 알려주시기보다, 순종할 때마다 다음 걸음을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은 그처럼 말씀에 즉각 반응하고 움직이는 사람을 통해 일하십니다.
"나의 가는 길을 오직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욥 23:10) 이 말씀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과 선하신 인도하심을 신뢰하는 믿음의 고백입니다. 욥은 자신의 상황을 이해할 수 없어도, 하나님께서 그의 길을 알고 계심을 믿고, 그분의 단련을 통해 더 순결하고 성숙한 모습으로 나아가리라는 소망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과거의 실패로 인해 실망과 좌절과 두려움에 계속 머물러 있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일꾼은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현실적인 두려움보다 순종의 길을 택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사무엘에게 “이새에게 가라”는 부르심으로 말씀하셨듯이, 우리의 발걸음도 말씀으로 인도하시며 새 일을 행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날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사 43:18~19)
적용) 오늘 나는 과거의 아쉬움이나 실패에 머물러 있는 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새 일을 준비하는 자입니까? 내가 오늘 순종하고 가야할 이새의 집은 어디 입니까?
2.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이 준비된 자입니다(6~13절).
하나님이 찾으시고 세우시는 일꾼은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이 준비된 자입니다.
사무엘이 이새의 집에 도착하여 집에 있는 이새의 아들들을 차례로 봅니다. 사무엘은 이새의 아들들의 외모를 보고 왕이 될 만한 자를 판단합니다. 6절에 사무엘은 이새의 맏아들 엘리압의 외모를 보고 기름을 부으려 합니다. “그들이 오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고 마음에 이르기를 여호와의 기름 부으실 자가 과연 주님 앞에 있도다 하였더니”라고 합니다. 사무엘이 엘리압을 보자마자 ‘이 사람이 하나님이 세우실 왕이다’라고 생각한 이유는 그의 겉모습과 인간적인 기준 때문입니다.
엘리압은 이새의 장자로서, 아마도 신체적으로 크고, 용모가 준수하고, 카리스마 있는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사무엘은 이전에 사울을 왕으로 세울 때에도 겉모습이 뛰어난 인물을 기름 부은 경험이 있습니다 사울은 “준수한 자로서 백성 중에 그보다 더 준수한 이가 없고, 키는 모든 사람보다 어깨 위만큼이나 컸더라” 사무엘상 9:2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전례로 인해 사무엘은 자연스럽게 외적인 조건을 기준으로 판단했던 것입니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 다윗의 가족 중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부으러 왔지만, 그가 누구인지는 아직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첫째 아들이 등장하자, 사람의 눈으로 판단하여, "이 사람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곧 이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의 판단이 틀렸음을 보여줍니다:
“여호와께서 사무엘에게 이르시되 그의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 내가 이미 그를 버렸노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사무엘상 16:7)
하나님은 “그의 키와 용모를 보지 말라”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7절)고 말씀하십니다.
사무엘상 16장 7절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선택하시고 세우시는 기준이 인간의 기준과 전혀 다름을 분명히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성경 전체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시고 사용하시는지를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선택하시는 기준은 ‘중심’(마음)입니다.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여기서 ‘중심(마음, 히, 레바브)’은 단순히 감정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히브리 문화에서 ‘레바브(마음)’는 인간 존재의 가장 깊은 내면, 생각과 의지, 신앙적 태도, 결단의 자리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 그 사람의 진짜 성품, 하나님을 향한 태도, 신실함과 경건의 깊이를 포함하는 개념입니다.
성경의 다른 예시들로 본 하나님의 중심의 기준을 살펴보기를 원합니다.
1) 믿음으로 반응하는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 (창세기 15:6) 아브라함은 율법이나 행위가 아닌,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하나님의 의를 인정받았습니다.
하나님은 믿음의 중심을 가진 사람을 기뻐하시고 사용하십니다.
2) 겸손한 마음의 중심을 보십니다.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야고보서 4:6) 하나님은 자신의 힘과 자격을 자랑하는 자보다,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는 겸손한 자를 세우십니다.
다윗은 형들보다 미약했지만, 하나님 앞에 겸손하고 충성된 중심을 가졌기에 선택되었습니다.
3) 하나님을 경외하는 중심을 보십니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자를 그가 택하사 자기 언약을 알게 하시리로다”(시편 25:14) 하나님은 외적인 종교행위가 아닌, 하나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중심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4) 순종하는 중심을 보십니다.
“내가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게 하리라 하시더니”(사도행전 13:22)
다윗은 완벽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는 중심을 가진 사람이었습니다.
이렇듯 하나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기에 합당한 ‘중심’을 보시고 그를 택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외모나 스펙, 가문, 학벌, 능력이 아니라, 그 사람의 내면, 곧 중심(마음, 의도, 태도, 믿음) 을 보십니다. 외모가 아무리 훌륭해도 중심이 하나님을 향해 있지 않으면 쓸모가 없습니다. 하나님이 다윗을 택하신 것은 겸손하고 진실한 중심,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려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그런 중심을 가진 사람을 찾고 계시고 그런 사람을 당신의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사람을 세우실 때 눈에 보이는 조건보다, 보이지 않는 중심을 보십니다. 또한 우리가 사람을 판단할 때도 그 사람의 외모나 배경이 아니라, 그 사람의 ‘믿음과 진실함’ 즉 중심을 보는 시각을 가져야 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이 말씀은 지도자 선발 뿐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 자아인식, 사역의 기준에 적용되어야 할 성경적 원리입니다.
[큐티인간증, 악령이 떠난 성령의 사람으로, 김혈열]
저는 초등학교 교사였던 아버지 덕분에 뛰어나진 않아도 좋은 재능을 물러받았습니다. 체력도 좋아서 무슨 일이든 해낼 자신이 있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교사가 된 저는 늘 인정받는 자리에 있었습니다. 교회에서는 찬양팀과 청소년부 교사를 하며 인정받았고, 직장에서도 각종 장비를 수리하며 해결사 같은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무능력한 사람, 학력이 없는 사람을 은근히 무시했습니다. 용모와 키를 보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무시하고 사람을 외모로 평가했습니다(7절). 그리고 스스로 기름 뿔병을 가져다가 제 머리에 붓고 “나는 기름 부음 받은 평신도”라고 자부하며 교만하게 살았습니다(13절).
그러다 저는 그럴듯한 외모와 언변, 카리스마를 가진 한 목회자의 외모에 이끌려 온몸과 마음을 다해 충성하면서 ‘40대 장로’를 꿈꾸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공동체에서 제 신앙의 용모와 키만 자랑하고, 그토록 맹신하던 목회자와 교회를 비판하며 불순종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던 중 제 안의 음란이 드러나는 사건으로 하나님은 저의 교만을 회개하게 하셨습니다.
이후 저는 큐티하는 공동체에 속해 구속사의 말씀으로 양육받고 교회 소그룹 리더로 세워졌습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제 안에는 사람을 외모로 차별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안 그런 척 하면서 속으론 제가 속한 찬양팀의 작은 실수도 용납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또 교회를 비판하는 지체들을 긍휼히 여기지도 못합니다. 비판의 악령에게 지배되어 죄인의 길을 걷곤 합니다(14절).
하지만 이런 저의 연약함과 죄성을 알기에 날마다 말씀을 묵상하고 주의 보혈을 의지해 긍휼을 구합니다. 이제는 삶 속에서 겸손의 훈련을 잘 받아 더 이상 악령의 노예가 아닌 여호와의 영에 크게 감동된 자로 살기를 기도합니다(13절) 적용) 내 생각이 아닌 말씀에 기준을 두고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며 비판하지 않겠습니다. 직원들 앞에서 직장 상사에 대한 부정적인 말을 하지 않겠습니다.
적용) 내가 사람의 외모 중에서 가장 많이 보는 것은 용모, 학벌, 능력 중 무엇입니까? 내 중심은 누구를 향해 있습니까?
3. 번뇌하는 자들을 섬기는 자입니다(14~23절).
하나님이 찾으시고 세우시는 일꾼은 번뇌하는 자들을 섬기는 자입니다.
여호와의 영이 사울에게서 떠납니다.
‘여호와의 영’(성령)은 구약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 인도하심, 권위를 위임받게 하는 하나님의 임재를 의미합니다.
사울이 왕으로 기름 부음을 받을 때, 여호와의 영이 임해 그를 지도자로 세우셨습니다 (삼상 10:6–7).
그러나 사울은 하나님의 말씀을 반복적으로 불순종하고 교만해졌습니다. 결국 하나님은 그의 왕권과 영적인 권위까지 거두신 것입니다. 이 말씀은 사울이 구원을 잃었다는 의미라기보다, 왕으로서의 하나님의 임재와 인도하심이 철수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러자 여호와께서 부리시는 악령이 사울을 괴롭힙니다(14절).
여기서 “악령”이란 무엇인가? 여기서 “악령”(히브리어 ruach ra'ah)은 문자적으로는 해로운 영, 괴롭히는 영, 파괴적인 영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 사탄이나 악한 영을 직접 창조하셨다기보다는, 하나님이 사울을 보호하던 손을 거두시자, 그 틈을 타서 사울이 영적 혼란과 정신적 불안에 시달리게 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부리셨다”는 표현은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징계 혹은 심판의 도구로 악령의 다스림을 허용하셨다는 뜻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악을 조장하거나 창조하신 분이 아니라, 악까지도 주권 아래 두고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성령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하나님의 허용하심 속에 악한 영이 사울을 괴롭히게 됩니다. 사울은 마음의 평안을 잃고 정신적으로 불안한 상태가 됩니다. 사울의 신하들은 그의 정신적 고통을 덜기 위해 음악, 특히 수금을 잘 타는 사람을 찾기로 합니다. 당시에는 음악이 마음을 진정시키는 효과가 있다고 여겨졌습니다.
사울의 신하 중 한 사람이 다윗을 추천합니다. 그는 이미 전쟁의 용기, 신앙, 악기 실력, 외모 등 여러 면에서 뛰어난 인물로 인식되고 있었습니다. 이때 이미 하나님의 영이 다윗에게 임해 있었기에 (16:13), 사람들도 그에게 특별한 영적인 기운을 느꼈을 것입니다.
사울의 왕궁으로 초대된 다윗에게는 사울에게서는 떠났던 하나님의 영(성령) 이 임하였고, 다윗이 수금을 탈 때는 그에게 악령이 떠나고 평안을 얻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들고 와서 손으로 탄즉”(23절) 다윗은 단순히 악기를 연주하는 기술자가 아니라,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누리는 예배자였습니다. 그의 수금 연주는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하나님을 향한 마음과 영적인 감동이 담긴 예배의 행위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즉 다윗의 연주에는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가 함께하였기 때문에, 그것이 사울에게서 악령이 떠나고 일시적인 회복과 위로를 가져온 것입니다.
다윗은 찬양의 사람이요, 하나님의 임재 안에 사는 자였습니다. “하나님이여 내 마음이 확정되었고 내가 노래하며 찬송하리이다.”(시편 57:7) 다윗은 어려움 중에도 늘 하나님을 찬양하는 삶의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삶을 살았습니다. 저와 여러분들도 삶 속에서 하나님을 늘 찬양하여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그런 은혜가 있기를 원합니다.
지난 주 목요일에는 센터에서 행복나눔나들이로 안면도 수목원, 자연휴양림을 다녀왔는데요. 자연의 아름다움을 경험하고 좋은 공기도 마시고 좋았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고가는 대절 버스 안에서 있습니다. 왕복 2시간 정도를 시끄러운 트로트 음악을 듣다 보니 영이 다운되는 것을 느꼈고, 심지어 그 노래가 내 입에서 맴도는 것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 날은 찬양을 더 많이 듣고 더 부름으로 그 전날의 세상 음악을 씻어낼 수 있었습니다. 내가 무엇에 노출되느냐가 중요합니다. 사울은 수금이라는 악기를 통해 늘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 찬양을 통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자였습니다.
다윗이 수금을 탈 때 사울의 악령이 떠나갔다는 것은, 다윗이 하나님의 임재를 품은 존재였다는 증거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임재를 전달하는 은혜의 통로가 되었고, 버림받고 악령에게 시달리는 사울과 같이 깨어지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회복과 위로의 도구로 쓰임받았습니다.
하나님이 찾고 세우시는 일꾼은 번뇌하는 자들을 치유하고 말씀과 기도로 사는 자입니다. 사울처럼 불순종하다가 우울과 피해의식과 열등감의 번뇌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기도의 수금, 말씀의 수금, 찬양의 수금’을 타서 평안함을 주는 자를 하나님이 찾으시고 일꾼으로 세우십니다. 그 일은 성령이 함께 하실 때 가능합니다. “힘으로 되지 아니하며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영으로 되느니라”(스가랴 4:6). 성령이 함께 하시는 사람은 말 한마디에도 위로와 생명을 담을 수 있습니다. 헨리 나우웬의 <상처입은 치유자>에서는 “진정한 지도자는 완벽한 자가 아니라, 자신의 연약함 속에서도 성령의 위로를 나누는 자”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내 삶에 성령의 머무르고 있는가?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성령이 함께 하는 자는 어디에서든지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됩니다.
적용) 요즘 나를 번뇌하게 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나는 번뇌하는 가족과 이웃을 위해 말씀과 기도와 찬양의 수금으로 섬깁니까?
결 론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은 지금도 당신의 나라를 위해 일할 자를 찾고 계십니다.
말 잘하는 자나 눈에 띄는 자를 찾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겉모습이 아닌 중심을 보시고,
사람의 시선보다 하나님의 음성에 귀 기울이는 자를 찾으십니다.
순종을 말로만이 아니라 삶으로 드리는 자,
세상이 보기에는 작고 평범할지라도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자,
상처받고 번뇌하는 영혼 곁에 서서,
말씀과 찬송과 기도로 그들을 섬길 줄 아는 자—
바로 그런 자를 하나님은 기름 부어 사용하십니다.
다윗이 들판에서 양을 치던 그날에도,
하나님은 그를 보고 계셨고, 준비시키셨고,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를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오늘 하나님은 우리에게도 묻고 계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사랑하는 여러분,
이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주여,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고 응답하는
하나님의 일꾼이 되지 않겠습니까?
세상이 인정해주지 않아도 괜찮습니다.
하나님이 아시고, 하나님이 부르시고, 하나님이 세우십니다.
다윗처럼 준비되십시오.
조용한 골방에서, 예배의 자리에서, 일상의 작은 섬김 속에서
하나님이 기뻐하실 그릇으로 다듬어지십시오.
그럴 때, 하나님은 반드시 그를 들어 사용하실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일꾼으로 준비되어,
이 시대의 사울들을 위해, 또 하나님의 백성들을 위해
기름부음 받은 자로 쓰임받게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