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윽한 고독 속으로
사전에 나오지 않는 말이지만, ‘고독력’이란 말이 쓰이고 있다. 인간의 생로병사를 이야기하는 어느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노년층 삶에 필요한 능력 중의 하나로 ‘고독력’을 말했다. ‘고독력’이란 ‘혼자서도 문제없이 잘 사는 능력’이라 했다.
‘고독’이란 말을 두고 사전을 펼쳐 보면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이 매우 외롭고 쓸쓸함.’으로 풀이하고 있다. 적확한 풀이는 아닌 것 같다. 고독은 ‘세상에 홀로 떨어져 있는 듯’한 게 아니라 세상과 떨어져 있고 싶은 마음이다. 고독에는 자발적 의지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고독은 외롭고 쓸쓸한 것도 아니다. 외로움은 자발적으로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괴로운 심리 상태다. 고독 속에도 쓸쓸함은 있지만, 견디기 어려운 외로움 속의 쓸쓸함과는 달리 받아들이기에 따라서는 달금할 수도 있다.
다단한 삶 속에서 남녀노소 가릴 것이 없이 사람은 누구나 홀로 살아야 할 처지며 신세가 될 수 있다. 그중에서도 언젠가는 반드시 홀로 되어야 할 사람들이 있다. 노년들이다, 다른 이들은 그 처지를 벗어날 소망을 가져볼 수도 있지만, 노년은 그렇지 못할 수도 있다.
나 역시 사궁지수 퇴은 노옹이다. 사방을 둘러봐도 산이며 하늘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웃이 없지 않지만, 무엇을 어찌해 볼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담소며 대작으로 일시를 위안 삼을 수 있을 뿐, 살 속을 파고드는 고적감이야 무엇으로 다스릴 수 있단 말인가.
외로움은 아무것도 만져주지 못한다. 떼어 버리려 하고, 붙어 있으려 하는 실랑이만 있을 뿐이다. 외로움은 정녕 벗어날 수 없는 것일까. 길이 없을 것 같지는 않다. 그리움을 키워 보면 어떨까. 사람이라도 좋고, 풀꽃이며 물소리, 숲속의 새소리도 괜찮겠다.
그리운 사람을 그리며, 풀꽃을 보듬으며, 강가를 거닐며, 산을 바라며 내 속 빈자리를 채워 본다. 조금씩 채워지는 듯도 하다. 채워지는 자리만큼 외로움이 비켜나는 것 같다. 외로움이 비켜난 자리에 들어앉는 것은 고독이다. 고독이 자리 잡을수록 외로움은 잦아드는 것 같다.
고독은 홀로 있어도 고립은 아니다. 그리움은 늘 대상과 관계를 맺는다. 외로움은 모든 관계가 끊어진 것이지만, 그리하여 어딜 둘러봐도 절망밖에 보이지 않을 수 있지만, 그리움은 관계다. 그 관계가 위안을 주기도 하고, 삶의 의미를 다시 새길 수 있는 희망의 불씨를 지펴 주기도 한다. 관계를 맺지 못하거나 관계가 끊어진 삶이야말로 얼마나 외로운 것인가.
그리움이 있어 고독은 아늑하고 즐거울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리움이란 하나의 얼굴만 가진 게 아니다. 괴롭고 슬픈 그리움도 있는가 하면, 즐겁고 기쁜 그리움도 있는 것 같다. 이 그리움을 보자.
“산산이 부서진 이름이여! / 허공중에 헤어진 이름이여! / 불러도 주인 없는 이름이여! /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김소월. 「초혼」) 이 그리움은 애달프고, 안타깝고, 고통스럽고 절망의 그림자까지 비치고 있다.
그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을지라도 “오늘은 바람이 불고 / 나의 마음은 울고 있다 / 일찍이 너와 거닐고 바라보던 / 그 하늘 아래 거리건마는 / 아무리 찾으려도 없는 얼굴이여”(유치환, 「그리움」) 하는 이 그리움은 또 얼마나 애잔하고 슬픈 그리움인가.
이 그리움의 주인공들은 괴롭고 슬플 수밖에 없다. 이런 그리움은 아늑한 고독 속의 그리움이 아니다. 사무치도록 외로운 심사 속의 그리움일 뿐이다.
이런 그리움은 어떤가. “늘, 혹은 때때로 /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는 건 / 얼마나 생기로운 일인가 // 늘, 혹은 때때로 /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건 /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조병화, 「늘, 혹은」) 말 그대로 생기롭고 즐거운 그리움이 아닌가. 이런 그리움을 안은 고독이라면 얼마나 그윽하고 아늑할 것인가.
이 그리움은 이렇게 매듭을 짓고 있다. “가까이, 멀리, 때로는 아주 멀리 / 보이지 않는 그곳에서라도 / 끊임없이 생각나고 보고 싶고 / 그리워지는 사람이 있다는 건 / 얼마나 지금, 내가 / 아직도 살아있다는 명확한 확인인가 // 아, 그러한 네가 있다는 건 / 얼마나 따사로운 나의 저녁노을인가”
살아있음을 확인시켜주는 그리움, 그런 그리움을 안고 있는 고독이야말로 얼마나 힘이 센 고독력을 가진 것인가. 고독력의 3요소는 고독 생산성, 자립력, 회복 탄력성이라 했다. ‘그러한 네가 있다는’ 것이 정녕 ‘따사로운 나의 저녁노을’이 될 수 있다면, 그 고독은 생산적일 뿐만 아니라 혼자서도 잘 살 수 있고, 아픔에서도 잘 회복될 수 있지 않을까.
그 그리움의 대상이 사람이든 자연이든, 가까이 있든 멀리 있든, 이 세상에 있는 존재든 없는 존재든 상관없다. 이런 그리움을 안은 고독으로 산다면, 저 곱게 물든 저녁노을이 어찌 따사롭지 않으랴. 홀로 살아있다는 것이 어찌 서럽기만 한 일이랴.
그 따사로운 저녁노을을 위하여 나는 오늘도 그윽한 고독 속으로 깊숙이 든다. 그리운 이를 그리워하며 노을빛 속으로 흔연히 잠겨 든다. ♣(2025.6.25.)